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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약가제도 역사에 이런 전횡은 없었다”
보건복지부가 오는 4월부터 보험약값을 평균 14% 내려 연간 1조 7천억 원의 국민 부담을 경감하겠다고 한다. 건강보험 의약품비 지출을 1조 2천억 원, 환자본인부담금 5천억 원을 절감한다는 것이다. 약가 인하 대상 품목은 전체 건강보험 급여 대상 품목의 47.1%에 해당하는 6,506개이며, 인하 대상 품목들의 평균 인하율은 약 22%에 달한다. 우리 건강보험 약가제도 역사에서 두 번째로 대폭적인 약가인하이고 선진국에서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인 조치다.
일률적 대폭적 약가인하는 행정권의 횡포고 재량권의 남용.
국민이 거금을 경감 받는 점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나 내용을 알고 보면 결코 좋아 할 일이 아니다. 비유로 말하면, 게으름피우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1,700만 원을 벌어 와서 무척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강도짓을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양심에 따라, 그리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강도짓을 고발하고 그 돈을 되돌려주고 성실하게 일해서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수십 년 동안 약가를 방치하던 정부가 갑자기 거금을 절감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기는 하나 내용을 검토해보니 엉터리였으므로 이를 바로잡게 하여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제도를 제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보험 대상 의약품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의약품을 제조, 판매하는 제약회사들조차도 사석에서는 이를 인정한다. 이렇게 보험약가에 거품이 있어 국민들이 의약품비를 과중하게 부담하고 있고 리베이트 등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작용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약가인하의 당위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약가 인하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일률적으로 6천5백여 품목을 대상으로, 가격을 단칼에 20% 넘게 대폭 인하할 수 없는 것이다. 개별 품목마다 사정이 다르므로 의약품 하나하나의 가격을 각각의 사정에 따라 정해야 한다. 또 정부 정책은 일관성이 중요한데 정부 자신이 법규에 따라 정했던 가격을 변경하려면 적어도 그 근거와 이유를 제시해야 하고 산정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약가에 거품이 있으니 일률적으로 대폭 인하하는 방식은 행정권의 횡포고 재량권의 남용이다. 우리 약가제도 역사에 이런 전횡은 없었다.
이번 약가인하 조치의 핵심 내용은 특허가 끝난 의약품의 상한가격을 특허 만료 전 가격의 53.55%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의약품에 이 기준을 적용한다. 바로 이 수치를 산정한 방식을 보면 정부가 이번에 얼마나 무모하고 거칠게 약가인하를 단행했는지 알 수 있다. 정교하게 기술해야 하는 학술 논문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백분율을 소수점 한 자리까지 표시한다.
새 가격 수준을 소수점 두 자리까지 표시한 것을 얼핏 보면 고도의 수학모델을 동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100%를 30% 낮춘 것이 70%이고, 70%를 15% 낮춘 것이 59.5%이고, 59.5%를 10% 낮춘 것이 53.55%다. 이 결과수치를 산출하는데 사용한 70, 15, 10%는 정부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임의로 정한 것들이다. 이런 경우 소수점 두 자리까지 표시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차라리 50%나 55%로 할 것이지 엉뚱하게 53.55%를 제시한 것은 정교한 통계학적 모델을 사용하여 정확하게 계산한 것처럼 위장하려는 저의를 엿보게 한다.
이번에 우리 정부가 채택한 약가인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 있다. 바로 이웃 일본에서 지난 20년 동안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시장 실세 가격 평균치 조정폭 산정방식'이다. 1992년부터 시행한 이 방식은 정부가 자의적으로 의약품 가격을 정하지 않는다.
의약품공급자와 요양기관 사이의 거래가격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되게 하고, 시장가격을 정부가 조사한 다음 이를 근거로 새 상환가격을 산정한다. 거기에 조정폭을 가미하여 의약품 공급 차질을 예방하고 있다. 이 제도를 시행한 일본은 지난 20년 동안 2년에 한번씩 10% 범위 내에서 천천히 그러나 야무지게, 제약 산업에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약가를 인하해 왔다.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방식이라 제약회사들도 반발이나 항의도 없었다. 약가인하 효과가 너무 크고 철저하여 최근에는 신약개발 여력을 소진했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을 정도다.
사실 우리 정부도 일본 약가 인하 제도를 모방한 '시장형 실거래가 상환제도'를 도입하여 2010년 10월부터 시행했다. 일본 제도의 주요 부분을 왜곡하였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일본 제도와 유사했다. 그런데 그렇게 요란을 떨면서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제도를 시행 1년도 되기 전에, 단 한 번의 약가조사도 약가산정도 해보기 전에, 유보하고는 이번의 '일괄 대폭 인하 조치'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규제 지향성'의 우리나라 공무원에게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점진적 인하 방식이 직성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민의 주목을 받는 한건주의, 한탕주의도 작용한 것 같다. 이렇게 시장을 거역하면 시장이 보복한다. 정부 자신이 정하고 수십 년 동안 방치한 약가를 마땅한 이유도, 설명도 없이 마구잡이로 무지막지하게 인하하려는 이번 조치를 폐기하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일본식 제도를 도입하여, 가격 결정은 시장에 맡기고,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에 근거하여 상환가격을 산정하는 것이 국민, 제약산업, 정부 모두가 상생하는 길이고 장기적으로는 약가 인하에 더 효과적이다.
이종운
2012.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