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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8> 약학대학 원로교수 20인의 회고록
2023년 9월 5일,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는 운영위원회를 열어 지난 7월 31일 발간된 ‘한국약학교육의 발자취(동명사)’의 출판을 자축하였다. 이 책에는 402페이지에 걸쳐 20개 약학대학을 정년퇴직한 교수 20분의 회고담 (인터뷰 형식)이 실렸다. 이날 자축연에는 이 사업을 지원한 대한약학회의 홍진태 전회장과 이미옥 현회장도 참석하였다. 나는 분과학회의 명예회장으로서 이 책의 머리에 다음과 같은 축사를 쓴 바 있다.민속박물관에 가 보면 옛날에 흔하게 볼 수 있던 지게, 호미, 삽, 멍에나 등잔 같은 물건들이 ‘선조들의 유물’로까지 대접받아 전시되어 있음에 놀라게 됩니다. 구 세대에게는 눈길을 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평범했던 이런 물건들이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지금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물건들도 세월이 흐르면 귀중한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제가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물건들도 이미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교복, 정성분석 실습용 실험상자, 가리방, 철필(鐵筆), 등사기(謄寫機), 프린트물, 청사진(靑寫眞), 논문 발표 용 괘도(卦圖), 슬라이드, 빔 프로젝터, OHP 등 잠시 꼽아봐도 사라진 품목이 수십가지에 이릅니다. 추억이 서린 이런 물품들은 이미 웬만한 박물관에 가서도 만나보기 쉽지 않게 된 것이 현실입니다.약계의 여러 선배님들의 행적도 기록으로 남은 것이 매우 드문 실정입니다. 저는 2020년 고 홍문화 교수님 평전(評傳)을 쓴 바 있는데, 이는 당대 최고의 명사(名士)이셨던 홍교수님이 후학들로부터 완벽(?)하게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에 한 일이었습니다.잘 아시는 대로 약학사분과학회는 2014년 창립된 이래 2022년말까지 총 18회의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2018년부터 매년 ‘약학사회지’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학사회지의 창간사에서 “우리의 약학사 연구 현황은 연구의 첫 재료가 되는, 과거에 대한 기록과 자료의 집적(集積) 단계에서부터 매우 빈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늘 자료와 기록의 빈약함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둘러보면 우리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기록과 자료 수집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약학사분과학회는 이와 같은 반성에서 탄생된 학회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이처럼 약학사분과학회는 고려나 조선시대 같은 먼 과거의 약학사를 연구함에 앞서 아직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생존해 있는 최근세 및 현재의 약학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왔습니다. 이 책의 발간도 분과학회의 이러한 철학과 신조(信條)에 따른 것입니다.이 책은 전적으로 약학사분과학회의 2대 회장인 김진웅 명예교수의 기획과 진두지휘로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20개 약학대학의 원로 교수 한 분씩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각 인터뷰를 주선하고 내용을 정리하여 원고를 보내주신 각 대학 학장실의 협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비록 체제의 통일성에 부족함이 없지 않지만, 이 책은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근 현대 약학 교육의 역사 자료로써 그 가치를 더해 갈 것입니다. 일견(一見) 평범한 기록도 결코 그 끝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회고록이 지속적으로 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 남기기’ 작업이 교육 연구계를 넘어 범(凡)약계로 확산되기를 기원합니다.끝으로 이 책의 발간 취지를 적극 이해하시고 물심 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홍진태 대한약학회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 심창구이 날 자축연에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책이 매우 읽기 쉽고 예쁘게 편집되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염정록 명예교수가 써준 제자(題字)도 책의 품위를 높여주었다. 이 책을 구독하고 싶으신 분은 김진웅 분과학회장에게 연락하시기 바란다.
2023-09-21 1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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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7> 블루마운틴
일본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1979년 4월의 어느 날, 모처럼 커피를 마실까 해서 학교 앞에 있는 낏사텐(喫茶店)이라고 하는 고히쇼프(coffee shop)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연세가 지긋한 영감님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젊은 여성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달랐다. 나는 ‘고히’를 주문 하였다. 일본에서는 커피를 고히(コヒ)라고 한다. 그런데 주문을 받은 영감님이 ‘알겠습니다’ 하지 않고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내 일본어가 짧던 시절이라 약간 당황한 끝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집에서 파는 모든 차(茶)들이 다 커피류(類)이기 때문에 손님은 그 중 어떤 커피, 또는 어떤 브랜드의 커피를 원하는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커피와 차 등을 파는 곳을 다방(茶房)이라고 불렀다. 다방이 커피 숍을 거쳐 카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다방에 가면 의례 젊은 여성이 손님에게 와서 차 주문을 받았고, 잠시 후 손님 자리에까지 차를 날라다 주었다. 다방에서는 커피, 모닝 커피(커피 + 계란 노른자), 홍차, 위티(홍차 + 위스키 몇 방울), 계란 반숙, 쌍화차, 특쌍화차(쌍화차 + 계란 노른자) 등을 팔았다. 커피의 종류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그냥 ‘커피’ 라고만 주문하면 되었다.다방에서 근무하는 여성을 흔히 레지(lady)라고 불렀고, 카운터에 앉아 있는 CEO 급(?) 여성을 얼굴 마담 또는 가오 마담(가오는 일본말로 얼굴, 顔)이라고 불렀다. 그 땐 왜 그렇게 사장이 흔했는지, 종업원들은 나이가 좀 든 남자 손님을 예외없이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남자 손님들의 허세를 노려 비싼 차(예, 특쌍화차)를 팔고자 하는 상술(商術)의 일환이었다. 더 유능한 레지는 사장님으로 불러 비싼 차를 얻어 마심으로써 다방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었다. 최백호씨의 힛트곡인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레지나 마담과 객쩍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장님들이 많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이런 다방 밖에 모르던 내가 동경의 커피숍에 가서 ‘커피 주세요’라고 주문한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낏사텐에서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팔고 있었다. 홋또(hot coffee), 아이스(iced coffee), 아메리카노 외에도, 한두 번 들어서는 외워지지도 않을 외국어로 된 다양한 브랜드의 원두 커피 들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 가서 ‘커피’를 달라고 했으니, 마치 식당에 가서 “식사 주세요”라고 주문한 꼴이 되었다. 내 주문을 받은 영감님이 잠시 당황했을 만도 하였다.이때 나는 커피 브랜드 이름 하나는 외워둬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딱 하나 외운 것이 블루마운틴이었다. 그러나 블루마운틴은 제법 비싼 고급품이어서 그후로도 실제로 마셔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도 어디 가서 좀 아는 척할 필요가 있을 때 이 이름을 언급하면 좀 먹히는 것을 느꼈다. 블루마운틴은 내가 그런 용도로 써먹는 이름이었다.나는 그날 이후 되도록 영감님이 써브하는 낏사텐은 가지 않았다. 분위기 탓인지 웬지 커피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경대학 근처에 젊은 여성이 근무하는 커피숍은 없었다. 그때 일본은 벌써 커피숍이 젊은 여성을 채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임금 시대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차선책(次善策)(?)으로 나와 연구실 동료들은 할머니가 써브하는 커피숍에 가 보았다. 다들 그래도 영감님 숍보다는 분위기가 낫다고 하였다. (아무튼 남자들이란….) 하긴 그런 곳도 서너번 밖에 못 가 보았다.1990년초에 일본 최남단 시코쿠(四國)에 있는 도꾸시마(德島)대에 2개월간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 마침 한달간 연구차 나오신 김종국 교수님과 커피숍을 찾아 다녀 보았다. 지방의 작은 도시인 거기에서도 젊은 여성이 근무하는 커피숍은 없었다. 가끔 낏사텐도 카페도 아닌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가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이 탓일 것이다.
2023-08-30 1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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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6> 원로 군진약사(軍陣藥師)들의 회고담: 군인의 약도 약사에게!
군진(軍陣) 내에서 무자격자에 의해 의약품이 취급되는 사례가 아직도 적지 않은 현실에서, 과거의 군진약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 군진 약사 제도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군(建軍) 이래 국군 장병들이 어떠한 제도 아래에서 약제 서비스를 받아왔으며, 그 과정에서 약사들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조사 보고된 바가 없다.이에 대한약학회 약학사 분과학회는 우선 원로 군진약사들의 회고를 통하여 군대 내 약사들의 역할에 대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2023년 3월 17일 오전 11시~오후 2시에 지하철 교대역 부근에 있는 채미가라는 한정식 집에서 군진약사 좌담회를 열었다.이 좌담회에는 5명의 원로(元老) 군진약사, 즉 박종호(서울대 10회, 육군 의정병과장, 대령), 김진우(서울대 12회, 해군 약제관, 대위), 유용근(서울대 12회, 공군 약제관, 대위), 이강추(서울대 12회, 육군 약제관, 대위)와 이은방(서울대 13회, 공군 약제관, 중위)님이 참석하였다.좌담회 진행은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회장 김진웅)의 명예회장인 심창구(필자)와 운영위원인 신영호(이상 서울대 25회)가 맡았다. 현장 녹음은 서울대 약학역사관 김유진 학예사가, 이를 나중에 문자로 푸는 작업은 박주영 전 학예사가 담당해 주었다. 관련 자료의 검색은 김진웅 회장과 주승재 편집부위원장이 도와주었다.이번 좌담회 (2023, 3,17) 및 후속 작업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약제 장교의 역사는 1947년 7월 경성약전을 17회로 졸업한 김시태, 허용, 황정섭 선배님으로부터 시작되어 1948년 6월 (사립)서울약학대학 3년제 전문부를 1회로 졸업한 김두환 님 등으로 이어진다.2. 1953년에는 서울대 약대 남자 졸업생(10회)의 거의 전원인 50명이 약제 장교로 의무 징병(徵兵)되어 비교적 단기간의 교육 후 중위로 임관되어 약제 및 의약품 수급 업무를 담당하였다.3. 약제 장교 제도는 건국 초기 약대 졸업생들의 약무(藥務) 능력을 함양시킴으로써 이들이 전역(戰役) 후 약무 및 약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 특히 1년여의 미국 유학 기회를 얻은 다수의 해군 약제관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전역 후 국제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4.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이외의 약학대학으로부터도 약학대학 졸업생이 많이 배출되자 약제 장교를 징병하지 않고 모병(募兵)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약대 졸업생 중 소수의 인원만이 약제 장교(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5. 1961년부터 약대 졸업생들이 신설된 ROTC 장교를 선호(選好)하면서 군대 내 약제 장교의 수가 더욱 줄어들었다. ROTC 장교는 약제 장교에 비해 복무 기간이 짧아 인기가 있었지만 임관 후 약제 장교로 보임(補任)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6. 약학대학 재학 중 또는 졸업 후 입대한 사병(士兵)들도 약제 병과(兵科)를 부여받지 못하는 반면에 약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병들이 약제 업무를 담당하는 등 군대 내 약제 업무가 무자격자에 의해 수행되는 난맥상(亂脈相)이 점차 문제로 드러났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간인 약사를 채용하여 약제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6급 약무직 군무원(軍務員)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군무원 지원자가 부족하자 2023년부터 국방부는 군무원 직급(職級)을 5급으로 상향하고 31명의 군무원 공채 공고를 내기에 이르렀다.약사에 의한 의약품 관리와 조제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 권리이다. 국군 장병들에 대한 의약품의 조제 및 관리도 전문가인 약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 좌담회를 통하여 군진약사의 역할이 매우 엄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이 좌담회를 계기로 국군 장병들에 대한 약제 및 관리 써비스의 질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군진약사 제도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3-08-17 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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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5> AAPS 펠로우 – 작은 깨달음 (26)
나는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20개의 국제 학술대회를 조직하거나 좌장을 맡았고, Pharmaceutical Research, J. Pharm. Sci., DMPK, Biopharm. & Drug Dispos. 를 포함한 12개의 국내외 학술지의 편집위원(editorial board member)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으로 편집위원이 되었을 경우, 뭐나 된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해했던 추억이 새롭다. 이는 양적으로나마 제법 많은 수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나는 업적에 비해 상복(賞福)도 많았다. 40개에 가까운 상을 받았는데, 그중 2005년 11월 6일, 미국 Nashiville(Tennessee)에서 열린 미국약학회(AAPS) 총회에서 약물대사 및 동태학 분야의 펠로우(fellow,) 상을 수상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내가 식약청장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와 있던 2005년 2월, 도쿄대학 유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후배인 도호쿠(東北)대학의 테라사키 교수와 홋카이도(北海道)대학의 하라시마 교수가 우리 부부를 초청하였다. 두 대학에서 세미나가 끝난 후, 두 사람은 각각 우리에게 삿포로와 센다이를 구경시켜 주었다. 특히 센다이(仙台)에서 마츠시마(松島)만을 유람한 일, 그리고 센다이(仙台) 아키호(秋保) 온천 지역에 있는 기요미즈 호텔에서 눈 내리는 날 최고급 노천탕을 즐긴 일이 기억에 남는다.그때 테라사키 교수가 내게 ‘AAPS' 펠로우를 신청해 보라’고 권유하였다. 내가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내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으니 꼭 신청하라고 몇 번에 걸쳐 강권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AAPS 펠로우를 신청할 때 작성한 컴퓨터 파일을 참고하라며 주었다. 그러면서 좋은 논문 2~3 편을 쓰는 정성으로 신청서를 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나중에 파일을 열어보니, 그가 발표한 각종 논문 및 학회 발표 사항,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온 반향 등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예컨대 언제 누구를 대상으로 발표한 강연에 몇 명의 청중이 모였으며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까지가 빠짐없이 기술되어 있었다.신청서 작성의 노하우를 깨달은 나는 곧 작업에 착수하였다. 고맙게도 내 연구실의 포닥인 C 박사(현 D대 약대 교수)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작업을 도와주었다. 이로써 내 일생의 연구 관련 활동을 상세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신청서에는 AAPS 펠로우 세 사람의 추천서를 첨부하게 되어 있는데, 도쿄대학의 스기야마 교수, 호시(Hoshi, 星) 약과대학의 나가이 교수, 교토대학의 하시다 교수가 추천서를 써 주었다. 이 분들은 당시 일본 약제학계의 3대 거목이었다. 이 분들이 추천서를 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의례적인 추천서가 아니라 내 연구 전체를 면밀히 검토하여 주요 연구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을 하는 장문(長文)의 추천서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서류를 총괄하여 AAPS에 신청하는 글을 쓰는 일은 미시간(Michigan)대학교 약대의 아미돈(G. Amidon) 교수가 해 주었다.2년 가까이 이와 같은 작업을 한 끝에 마침내 학회의 심사를 통과하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로써 나는 성균관대 약대의 L 교수와 서울대의 K 교수에 이어 국내 세번째로 AAPS의 펠로우가 되었다. 미국 인맥이 부족한 내가 미국약학회의 펠로우로 선정된 일은 자다가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이 상을 받을 때는 아내도 동행하였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에는 1998.11에 정회원으로 피촉되었고, 2005년 11에 종신회원이 되었다. AAPS의 펠로우가 되기 훨씬 전이었다. 2008. 10에는 일본약물동태학회(JSSX)의 펠로우로도 선정되었다. 참, 내가 받은 40개의 상에는 시골 초등학교 졸업시에 받은 민의원(民議員)상과 약대 수석 입학으로 받은 총장상도 들어있다. 아득한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이런 상들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지 가끔 생각해 본다.
2023-07-26 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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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4> 김종국 교수님 1주기
지난 7월 2일 오후 3시, 삼성역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국화룸에서 고 김종국 교수님의 1주기 추모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도전의 승부사’라는 김교수님의 유고 자서전의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고인의 제자들과 지인들로 성황(?)을 이룬 이 모임은, 결국 고인의 삶의 성공을 증명해 주는 자리가 되었다.600 페이지가 넘는 자서전 중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고인이 평소에 써 놓으셨던 글들이었고 나머지는 문하생들의 회고담이었다. 책의 머리말은 ‘후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나의 삶,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오랫동안 편찮으신 상태에서 후손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음을 전하는 글이었다. 나이 탓일까? 교수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자서전에는 교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인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 한국전쟁, 대학생 시절, 미국 유학 및 서울대 약대 교수 시절 전반에 걸친 경험과 관찰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개인사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천의 역사 및 서울대 약대 역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인천연구원’에 참고 자료로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관장, 주승재 교수)’의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되었다. 책의 안쪽 날개에는 김교수님의 정년퇴임 기념식 동영상 QR코드를 실음으로써 누구든지 휴대폰으로 김교수님의 육성과 동영상을 듣고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내 의견에 따른 것인데, 사모님도 매우 좋아하셔서 안도하였다.이날 행사는 한국약제학회에 1억원을 기부하겠다는 아드님의 경과 보고에 이어 문하생들의 회고담이 있었고, 뒤이어 약계 인사들의 추모 순서가 있었다.나도 잠시 기회를 얻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세월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무섭게 세월을 빨아들여 벌써 김교수님이 작고하신 지 1년이 지났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신 김교수님의 위대한 발자취가 단지 과거라는 이름 하나로 추억 속에 잠기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허망하다.교수님과 내 연구실은 약대 21동 위아래 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수님은 빈번하게 내 연구실에 오셔서 담배를 피고 가시곤 했다. 때로는 “교수님, 이제 그만 가 주세요. 저 바빠요” 할 정도로 자주 오셨다. 또 교수님과 나는 약제학과 물리약학전공 대학원생들의 ‘약학연습’이라는 세미나 강의를 공동으로 지도하였는데, 교수님은 과학 현상을 더 할 나위 없이 쉽게 설명하셨다.예컨대 “마이크로스피어(microsphere)? 그거 어렵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다. 냄비에 물을 끓여 놓고 계란을 깨 흰자위를 집어넣고 젓가락으로 막 저어주면 생기는 것이 마이크로스피어다”라고 일갈하셨다. 그 간명한 설명에 나와 모든 학생들은 감탄하곤 하였다.내가 모교 교수가 된 1983년 이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본 것을 참고하여 약제학실과 물리약학실 사이에 ‘제물정기전(劑物定期戰)’이라는 체육대회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봄 가을로 개최하다가 나중에는 가을에만 개최하였다. 이 정기전은 약제학실과 물리약학실 대학원생은 물론 졸업생까지 전부 참석하는 일종의 홈커밍데이의 성격을 띄었다. 혹자는 나와 김교수님이 모두 제물포(濟物浦) 고등학교 출신 (각 10회와 5회 졸업)이라 이런 이름을 붙였나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약학 출신들은 제물전이라는 용어 대신 물제전(物劑戰)이라는 이름을 애용하였는데, 이는 마치 연고전과 고연전이라는 명칭 싸움 같은 것이었다.이 제물전에서는 하루 종일 주로 축구, 농구, 배구, 달리기, 탁구 등의 게임을 했는데, 달리기와 탁구 종목에서만큼은 내가 늘 김교수님을 이길 수 있었다. 축구 등에서 전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약제학실 입장에서는 김교수님은 고마우신 적수(敵手)이셨다. 시합 후 실험실이나 야외에서 돼지 고기 바비큐를 함께 즐기던 추억도 생생하다. 당시 이 체육대회는 약대의 다른 군소 전공 대학원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끝으로 사모님이 강건하게 잘 지내고 계심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하며 회고담을 마쳤다.김교수님의 영면을 간절히 기원한다.
2023-07-13 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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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3> 식약청으로의 외출 - 작은 깨달음 (25)
2003년 2월 어느 날 나는 자곡동 집에서 설사약을 먹고 한창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1994년 직장암 수술 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장(腸) 내시경 검사를 위한 준비였다.그때 청와대라고 하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청장(식약청장)을 맡을 용의가 있냐는 내용이었다. 놀란 나는 우선 내가 공직을 맡기엔 건강이 부실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잘 생각해 보라고 하기에 ‘내일 다시 통화하자’고 대답하였다.다음 날 D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다행히 장(腸)에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천문우 학장님을 찾아 뵙고 어찌하는 것이 좋겠나 상의 드렸다. 학장님은 망설임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이어서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을 찾아 뵀다. 나는 목사님은 당연히 사양하라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목사님도 한 칼에 “하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청와대에서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사실 나는 정부에서 나같은 문외한(門外漢)을 공직(公職)으로 부르는 데에 매우 놀랐다. 나와 식약청 업무의 관련성은, 생동성(生動性)시험에 대한 약간의 전문성, 대한약사회 약사연수교육위원장(1992년) 경력, 한약분쟁(韓-藥 紛爭) 참여(1993년 3월 KBS ‘여의도 법정’ 출연 등) 경력, ‘의약분업 실시를 위한 의-약-정(醫藥政) 협상’(2000년 10월)에 약계 9인 대표 중 1인으로 참여한 경력 정도에 불과했다.나는 공직을 희망해 본 적도 없었다. 교수가 현안에 너무 많이 참여하면 바보요, 너무 피하면 비겁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위에 언급한 몇 가지 현안에 참여하게 된 것은 실은 주변의 요청을 거절 못하는 내 유약한 성격의 탓이지, 공직으로의 외도(外道) 목표를 갖고 있어서가 절대 아니었다.혹자(或者)는 나를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멤버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슷한 모임에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다. 암 수술을 받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인데 어찌 딴 생각을 했겠는가?아무튼 이런 경과를 거쳐 2003년 3월 3일부터 제5대 식약청장으로 봉직하게 되었다. 식약청 사상 최초로 내부에서 차장을 임명한 일, 만두소 사건, 감기약 사건 등을 거치면서 특히 복지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당시는 규제철폐(規制撤廢)가 만능의 열쇠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잘 정비된 규제는 기차의 철로처럼 관련 산업을 진흥시키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나는 식약청이 정부 부서 중 최초로 ‘전자정부(電子政府) 사업’에 도전하도록 독려하였다. 전자정부야 말로 식약청 업무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의 결과, 예컨대 전국 각지에서 수입 유통되고 있는 식품 등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IMF 와중에 탄생한 식약청은 아직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호소하여 행정안전부로부터 적지 않은 수의 증원을 받아냈고, 식약청을 오송 단지로 이전하여 부지를 넓게 잡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또 1973년에 없어진 ‘약의 날’을 30년 만인 2003년에 제17회 약의 날로 부활시켰다. 이 ‘약의 날’은 2021년에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었는데, 나는 ‘약의 날’을 부활시킨 공로로 2021년 약의 날 (11.18)에 이 행사를 주관하는 7개 약계 단체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내가 무엇보다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식약청 재임 중 어떤 비굴한 결정이나 언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총리 주재 회의에서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은 해프닝(?)도 있었다. 2004년 9월 1일, 1년 반 동안의 식약청 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였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평안한 가운데 대학원 학생들과 연구 생활을 재개하였다. 민망하게도 그해 12월에는 온누리교회의 장로가 되었다.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식약청장과 장로는 정말 그런 사건들이었다.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배할 따름이다.
2023-06-28 0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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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2> 가족의 수난사 - 작은 깨달음 (24)
아내와 두 아들의 고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내가 수술을 받기 7년 전인 1987년, 기침을 자주 하던 아내는 서울대병원에서 폐기관지가 작은 돌들에 의해 막혀 폐포(肺胞)가 쭈그러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외과 의사는 방치하면 폐암으로 진행될 우려가 크니 쭈그러진 폐 부위를 절제하자고 했다.그러나 기관지내과의 김영환 교수는 기관지 내시경을 통해 돌을 빼는 시도를 해보자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내시경을 사용하여 일부 돌을 빼낼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신기한 것은 내시경 전날밤 아내의 꿈에 예수님 같은 분이 나타나 아내의 가슴 위에 손을 펴며 이제 다 낳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님은 우리가 일본에서 살던 집의 지점토(紙粘土) 벽지 부스러기와 곰팡이가 기관지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돌을 형성한 것 같다고 추정하였다.1년 후 X레이 결과 폐포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폐포가 펴지지 않았으면 폐를 절제해야 할 상황이었다. 김 교수님은 아내 생명의 은인이다. 만약에 외과의사의 의견대로 폐를 절제했더라면 아내는 십중팔구 수술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두 아들은 나의 일본 유학 시절에 천식으로 큰 고생을 하다가,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1982년 이후 많이 좋아졌었다. 그런데 1988년 퍼듀대학에 함께 가 있을 때 초등학생이던 큰 아이가 어쩌다 포이즌 아이비와 접촉한 후 아토피 증상이 심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옴 몸이 가려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그 상황 속에서도 큰 아이는 1995년에 서울대 약대에 합격하였다. 내가 1994년 수술 이후 암 투병을 하는 와중에, 더구나 잠시도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가려움 속에서 이뤄낸 결과였다.그 애는 학부 졸업 후 약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스테로이드 과용으로 인해 오른쪽 눈의 망막이 박리(剝離)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서울대 병원 안과에 4개월간 입원하여 망막을 붙이는 여러 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여 온 가족이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되었다.그 때 미국 FDA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이자 믿음의 친구인 박찬효 박사의 주선으로 2000년 12월 2일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 가서 망막을 붙이는 수술을 받았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이로써 한쪽 눈 실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우리 아이의 망막을 위해 함께 기도해준 서울대 안과 최장기 입원 환자(권사) 한 분도 우리 아이의 회복 소식을 듣고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달려와 망막을 붙였다. 기도의 위력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시력을 회복한 큰 아이는 2005년에 결혼하여 예쁜 딸 셋을 낳고, 현재 인천에 신설된 모 약대에 교수로 근무 중이다. 그가 스스로 자동차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제야 가장이 된 것 같다’고 기뻐하였다.그는 뉴욕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내 대학 동기 김용진 약사를 찾아간 일도 신기한 일이었다. 김약사의 추천으로 홍삼 엑스를 대량으로 장기간 복용한 결과 얼마 후 그는 그 지긋지긋하던 아토피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명의 내 친구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로 아토피와 망막 박리라는 겹 고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형보다 가족의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 둘째 아들도 1997년 고려대학교에 합격하였다. 졸업 후 입소한 훈련소에서는 천식이 발견되어 병역면제 판정을 받고 사흘만에 귀가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회창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가 이슈가 되자 병무청으로부터 재검(再檢) 통지를 받게 되었다.이에 그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공부에 몰입하여 자격증을 딴 후 병역 특례 게임 회사에 취직함으로써 대체복무의 길을 선택한 하였다. 이 회사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그를 게임회사를 창업하게 만들었는데, 이 회사는 초기의 엄청난 실패를 잘 극복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에게 적지 않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극복하게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2023-06-23 0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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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1> 직장암 투병 3 - 작은 깨달음 (23)
치료를 받는 도중 및 후에도 아내의 간호는 헌신적이었다. 치료가 끝난 어느 주일, 아내는 숫기가 모자라는 나를 온누리 교회의 당회장실(堂會長室)로 끌고 가 그때부터 2년간 고 하용조 목사님의 기도를 매주 받게 하였다. 당시 유한양행 연구소장이던 이종욱 박사도 동행하여 함께 기도를 받았다.이 박사는 내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자 한걸음에 달려와 “너를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내가 “나를 위해 교회에 다녀 주면 좋겠다”고 하자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그때부터 나를 위해 온 누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교회 ‘다녀 주기’는 수술을 한 박재갑 교수님이 “이제 심창구가 직장암으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할 때까지 꼬박 5년간 계속되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마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2007년 10월 19일자 『국민일보』에 “나는 왜 크리스챤 인가?”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수술 후 2년이 지나 항문 복원 수술을 받았다. 나는 배 밖으로 돌출된 항문 부위만 배 속으로 집어넣으면 되는 간단한 수술인 줄 알았다. 박교수님도 그렇게 설명했었다. 그래서 방사선 조사와 항암제 주사를 맞는 동안 복원 수술에 대해 별 걱정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복원 수술도 관장, 마취, 개복에 이르는 전 과정이 처음에 받았던 수술과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수술 후 방귀가 잘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 것까지 똑 같았다. 박 교수님의 선의의 거짓말(?)에 속아 마음 편히 지낸 것이 다행이었다. 여러모로 박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수술 후 5년이 지났을 때 연구실의 동료 교수들이 축하 모임을 해 주었다. 15년이 되었을 때는 주변에서 “이제 정말 나았네요” 하는 말도 해 주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났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성경에 나오는 그 믿음 좋은 왕 히스기야도 겨우(?) 15 년간 생명을 연장 받지 않았는가?그 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는데 2009년 8월 10일, 점심 식사 후 배가 너무 아파 서울대 보라매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이날 점심에 쇠고기 구이(차돌박이)를 먹고 후식(後食)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쇠고기 기름이 응고되어 장폐색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응급실에서는 간단한 장폐색(腸閉塞)이 아니라고 하면서 원 수술을 했던 서울대 본원으로 이송시켜 주었다.그래서 서울대 병원에 세번째로 입원해 또 다른 박 교수님에게 개복 수술을 받았다. 그는 ‘내 장(腸)이 엉망으로 유착(癒着)되어 있어 소장을 28cm나 잘라냈다’고 하였다. 세 번째 개복 수술은 정말 힘들었다. 한번만 더 이런 수술을 받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공포감이 엄습(掩襲)하였다.오랜 기간 입원 끝에 겨우 겨우 회복해서 다시 학교에 나가고, 정년 퇴직을 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3회에 걸친 개복 수술의 후유증으로 배변(排便)이 불순(不順)하여 ‘삶의 질’이 낮아진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정년을 몇 년 앞두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려 몇 년 동안 정신과에 다니는 고생을 하기도 했다. 백약(百藥)이 무효였지만, 그때 큰아들 네의 세 손녀들을 돌보며 지냄으로써 우울증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우울증에는 손주가 명약이었다.내가 아파보니 평생 편찮으셨던 어머님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어머니는 농사 일로 생긴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다가 장남인 내가 서울로 모신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당뇨병에 골반골절, 그리고 뒤 이은 뇌경색과 뇌출혈로 10개월간이나 입원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억척같이 일만 하시고 호강 한번 제대로 못 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릿하다. 어머니는 내가 아픈 것을 차마 보고 싶지 않으셨던지, 내가 암에 걸리기 두 해 전인 1992년 71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사별 후 따로 사시던 아버지는 2014년 12월 온누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2017년부터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97세의 연세로 소천하셨다. 아버지의 장수가 내게 위로가 되었다.
2023-05-31 0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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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70> 직장암 투병 2 - 작은 깨달음 (22)
콧줄(Levin tube)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방귀가 안 나와 창자가 부풀고 배가 아프게 되자 젊은 의사는 당연히 콧줄을 다시 삽입하려 들었다. 얼마 동안은 박재갑 교수님의 빽(?)으로 삽입을 막았지만 장의 상황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문득 약대 김낙두 교수님이 예전에 같은 문제로 고생하다가 한의사 친구분께 침을 맞고 방귀가 나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다. 다음날 그 친구분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알려주셨다고 했다. 즉 A와 B라는 생약(生藥)을 끓여 마셔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도 못 마시는 내가 그걸 마실 수는 없었다. 생각 끝에 A와 B를 끓인 액을 반 스푼도 안되게 농축해서 핥아 먹었다.효과는 극적이었다. 놀랍게도 먹은 즉시 장이 편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약액(藥液)이 창자에 골고루 접촉할 수 있도록 밤새 몸을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다시 콧줄을 들고 온 의사에게 이제 장이 편안해졌으니 콧줄을 삽입하지 말자고 말하였다. 생약 추출액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미심쩍어 하는 의사는 그럼 장 촬영을 한번 해 보자고 하였다. 촬영 결과 잔뜩 부풀었던 장이 현저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그래서 콧줄 끼우기를 한번 더 연기 받았다. 희망(?)에 부푼 나는 당장 AB 졸인 액을 한번 더 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방귀 뀌기에 성공하였다. 할렐루야!방귀 문제는 장 수술 환자들에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식사도 퇴원도 방귀가 나와야 가능해진다. 이 경험은 뒤에 내가 AB를 대상으로 장운동축진제(prokinetic agent) 개발 연구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드디어 며칠 후 퇴원하여 귀가하였다. 인공항문(artificial anus)을 단 채였지만, 집으로의 무사(無死)귀환은 감격이었다. 몹시 불편하던 인공항문도 차츰 익숙해지자, 외출도 하고 심지어 줄넘기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얼마 지나자 아내의 도움없이 인공항문에 달린 플라스틱 백을 뒷처리 할 수 있게 되었고, 배 밖으로 노출된 인공항문 부위를 햇볕으로 소독할 줄도 알게 되었다.퇴원 후 두 달간 매주 방사선 조사(照射)를 받은 뒤, 1년 동안 한 달에 5일씩 연속해서 5-FU라는 항암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주사를 맞은 첫날은 의외로 몇 시간 동안 아무렇지도 않아서 ‘아마 나는 항암제 고생은 좀 덜 하려나 보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웬걸! 저녁이 되자 입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상황이 되었다.그래서 다음날 주사 처방을 내린 내과의 고 김노경 교수님에게 가서 ‘힘들어서 도저히 주사를 못 맞겠다’고 호소하였다. 김교수님은 주사 용량을 절반으로 줄여 주었다. 그랬더니 한결 견딜만해졌다. 이를 본 아내는 주사용량을 줄여 준 김교수님을 명의(名醫)라고 칭송하였다. 그래도 닷새간 주사를 맞고 나면 밥맛도 기운도 다 사라져 1주일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1년 정도 지나고부터는 김 교수님의 배려로 집에서 가까운 삼성의료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한 달 후 정해진 날에 다시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사전에 혈액 검사를 통해 각종 혈액 수치가 회복되었음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다른 수치는 괜찮았는데 혈소판 수치가 잘 회복되지 않아 예정된 날보다 1~2주일 뒤에야 주사를 맞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년이면 끝날 주사를 1년 6개월에 걸쳐 맞아야 했다. 치료 기간 중, 아내의 호소(?)에 못 이겨 고기는 먹지 못하였다. 대신 가끔 복지리와 순두부를 먹었다. 어쩌다 내 식사를 구경한 사람은 아내가 나를 구박하는 줄로 알았단다. 이때 약대 박정일 교수가 열처리 인삼[선삼(仙蔘)의 재료]을 대주었다. 나는 이 인삼 끓인 물을 콜라병에 담아 놓고 수시로 마셨다.내가 수술을 받은 1994년 5월, 두 아들은 각각 고3과 고1이었다. 병 간호에 전념하는 아내를 대신해 장모님이 우리집 살림을 도맡아 주셔야 했다. 장모님의 상심이 얼마나 컸겠는가!
2023-05-17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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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9> 직장암 투병 - 작은 깨달음 (21)
1989년 미국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여 연구와 강의, 학회 일 등으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던 1994년 4월의 어느 날, 몇 명의 교수들과 약사회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대변을 보고 일어나 보니 변기(便器)가 온통 빨간색이었다. 그래서 5월 12일 서울대 병원 외과의 박재갑 교수님의 진찰을 받았다. 박 교수님은 직장에 손가락을 넣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직장암이라고 했다. 정신이 하얘졌다. 심란한 가운데도 운전에 조심하며 자곡동 집으로 돌아왔다.당장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어떻게 꺼낼 것인가부터 걱정이었다. 나는 동네 뒷산 약수터로 물을 길러 가자고 했다. 아내는 마침 약수가 떨어졌다며 좋아라 했다. 약수터에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는 울고불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며 여러가지 희망적인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내의 담대함에 큰 위로를 받았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5월 16일, 박 교수님의 집도(執刀)로 개복(開腹)하고 종양(腫瘍) 제거 수술을 받았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인천 도립병원에 가서 에테르로 전신마취를 하고 치질(痔疾) 수술을 받은 후 처음 받는 수술이었다. 수술의 전 과정이 힘들었지만 특히 수술 전에 받는 관장(灌腸)이 힘들었다. 관장은 항문에 호스를 꽂고 억지로 물을 역류시켜 세정하는 방식이었다. 관장을 담당하는 젊은 의사는 “아마 도중에 저를 죽이고 싶으실 겁니다’ 라며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귀뜸해 주었다. 관장은 세정한 물이 맑아질 때까지 반복되었다. 관장액에 온 몸이 젖어 추위에 벌벌 떨게 되고 나서야 관장이 끝났다. 이 때 그 의사의 사전 경고(?)는 고통을 참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그 의사께 감사드린다. 관장 후 전신마취 상태에서 개복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수술부위를 굽어보니 가슴에서 배꼽까지 봉합된 부위가 정말 끔직하였다. 보통 그렇게 하는 거겠지만, ‘아무리 남의 배지만 이렇게 험하게 째고 꿰매 놓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종양 크기도 작다고 했다. 다만 암 부위가 항문에서 너무 가까워 항문을 살리지 못 했는데 그것은 나중에 복원수술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인공항문(人工肛門)을 달고 지내게 되었다.종양 크기가 작다고 해서 수술 후 며칠 동안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때 인공항문용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 직원들 (주로 여성)이 수시로 입원실에 들어와 내 인공 항문을 들여다보고는 “참 예쁘게 만들어졌네요” 하고는 자기 회사 제품을 선전하였다. 내 상황이 이런데 ‘인공 항문이 예쁘다고?’ 그들의 맹렬한 영업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며칠 후 종양 부위 및 림프에 대한 조직 배양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암의 진행 정도가 ‘phase 3 B’라는 것이었다. 3기 중반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와 동갑인 박교수님은 ‘우리 나이(만 47세)가 암세포 증식이 활발한 나이라 상황이 더욱 좋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순간 온몸의 기(氣)가 양쪽 발가락을 통해 싹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기(氣)라는 것을 평생 처음 느껴 본 순간이었다.그 후 병상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이 상황을 맞았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믿는 상태에서 이 상황을 맞았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후 신기하게도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잠을 못 자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불안감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것은 당장 방귀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박교수님은 그 상황에서 내 콧줄을 빼 주셨는데 그 바람에 창자가 방귀에 부풀어 배가 더 아팠다. 시사프리드(cisapride)를 투여해 봐도, 그리고 봉합 부위 실밥이 튿어질 때까지 병동의 복도를 뛰어다녀봐도 방귀는 소식도 없었다. 수술받은 지 얼마 안된 내가 쏜살같이 뛰어다니는 모습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 하였다. 실로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2023-04-26 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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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8> 퍼듀대학 방문 및 교회 출석 - 작은 깨달음 (20)
나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 약물체내동태학과 생물약제학을 주로 공부했다. 교수가 된 다음에는 이들과 함께 약제학의 3번째 새 물결인 약물송달학(drug delivery system, DDS)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DDS의 재료가 되는 폴리머(polymer)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나아가 지구촌의 대표 국가인 미국을 경험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88 서울올림픽’이 끝나자 마자 당시 우리 약대의 고 유병설 학장님의 추천을 받아 미국 인디애나주 West Lafayette시에 있는 퍼듀대(Purdue) 약대의 박기남 교수 연구실을 연구 차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대 약대 4년 후배인 박교수는 폴리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아내와 두 아들이 나와 동행하였다. 부모님을 모시며 두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있던 우리 부부에게 장기간에 걸친 미국 여행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나는 이때 J. Pharm. Sci. 에 논문을 실었던 제자 J 군도 데리고 가고 싶었다. J군은 동아제약 연구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에게 최신의 폴리머 과학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회사나 그에게 바람직할 것 같았다. 그러나 회사가 J 군의 유학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회사 사정이 여의(如意)치 않았겠지만 아쉬운 일이었다.퍼듀대학에 가 있는 동안, 주중(週中)에는 연구실에 나가 실험을 하고 주말에는 미국 각지로 여행을 다녔다. 실험으로는 효소에 의해 소화되는 팽윤성 하이드로젤(enzyme-digestable swelling hydrogel) 정제를 만들었는데, 내 능력 부족으로 생각만큼 연구가 잘 진전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약 10개월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1989년 시카고에서 열린 CRS(Controlled Release Society) 학회의 프로시딩에 게재하고 구두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연구의 상세한 내용을 정식 논문으로 학회지에 발표하지는 못하였는데, 이 점은 나를 초청해 준 박 교수에게 지금까지 미안하게 생각한다.시카고 학회에 참석해 보니 폴리머 화학자들은 약학자들과 달리 폴리머의 안전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안전성은 폴리머의 기능성이 확인된 다음에 고려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새로운 폴리머의 다양한 기능을 발견해 내고 그 기전을 규명하는 ‘재미(why)’를 연구의 주된 동기로 삼았다. 그러나 나는 인체에 대한 안전성이 부족하여 응용성 (how to apply)이 없는 폴리머에는 애초부터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물론 ‘재미’는 시대를 불문하고 순수과학자(기초과학자)들의 변함없는 연구 동력이다. 그러나 응용과학자마저 ‘재미’에 빠져 ‘결국에는 사용할 수 없는 물질’ 연구에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응용과학자에게는 ‘응용성’이 가장 중요한 연구의 동기인데, DDS용 폴리머의 응용성은 인체에 대한 안전성이 첫번째 관문이 된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에게 늘 안전성을 최우선시 하는 약학 고유의 시각으로 폴리머를 바라봐야 한다고 가르쳤다. 소금(약학자)이 짠 맛(안전성 중시 태도)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우리 부부는 미국에 가기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퍼듀대학에 가 있는 동안, 아내더러 퍼듀 한인 교회에 나가 보자고 했더니 의외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거기에서 장로회신학대학교(장신대) 학장을 정년퇴직하시고 첫 목회지로 그 교회에 오신 고 박창환 목사님을 만났다. 여러 면에서 훌륭하신 박 목사님을 만나 세례를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우리 부부에게 크나큰 축복의 시작이었다.그 교회에서 고 김영길 총장님을 비롯하여 N 교수, S 교수 등 한동대 교수님들을 많이 만났는데, 신기하게도 그 분들은 모두 온누리 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분들과의 인연으로 1989년 귀국 후 우리 부부는 서빙고에 있는 ‘온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2004년에 장로가 되었다. 퍼듀대학을 거쳐 온누리 교회로 내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드린다.
2023-04-12 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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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7> 더블 피크 현상의 발견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9
이번에는 약물을 경구투여(經口投與)하였을 때의 혈중농도 프로필에 2개의 피크(peak)가 나타나는 현상에 관해 연구한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1988년에 수행한 생동성시험 결과로부터 라니티딘 정제(tablet)를 복용한 지원자의 혈장 중 약물농도-시간 그래프에 2개의 피크가 보이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기존의 약물동태학 이론에 따르면 1개의 피크만 보여야 한다. 실제로 그동안의 논문에는 1개의 패턴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실험에서 나타난 피크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2개였다. 너무나 놀라워서 기존의 문헌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니 예전 논문에도 이런 더블 피크(double peak)를 보이는 사례들이 적잖이 있었다. 다만 그 현상이 현저하지 않아 연구자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 같았다.
더블 피크의 패턴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달랐다. 어떤 사람에서는 첫번째 피크가 높았고, 어떤 사람에서는 2번째 피크가 더 높은 식으로 사람에 따라 패턴이 매우 달랐다. 즉 개체간(inter-individual) 변동이 매우 컸다. 그러나 같은 사람에게 1주일 후에 다시 같은 약을 투여했을 때의 피크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1주일 전과 같았다. 즉 개체내(intra-individual) 변동은 매우 작았다. 마치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지문(指紋)이 있듯이, 사람마다 고유한 혈중 농도 패턴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1) 경구투여한 라니티딘의 혈중 농도 패턴에 더블피크 현상이 나타나며, (2) 그 패턴은 사람마다 차이가 크지만 1주일 간격을 두고 재 시험하였을 때 나타나는 패턴은 지문(指紋)처럼 사람마다 고유하다는 사실을 학계 최초로 국제저널[J. Pharm. Sci. 78(12)(1989), 990-994 (그림 참조)]에 보고하였다.
더블 피크 현상에 매료된 나는 그 후 S, J, K, L(1990~1992) 등의 석사 논문 연구를 통해 그 기전 규명에 도전하였다. 나는 경구투여시 위액으로 용출된 약물은 2회로 나뉘어 흡수 부위인 소장 상부로 내려가서 흡수되기 때문에 혈중 농도 피크가 2개로 나타나는 것이란 가설을 세웠다. 즉 위내용배출(胃內容排出)의 2상성(二相性) 때문에 더블 피크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가설은 쥐의 십이지장에 약물을 두 번으로 나누어 주입하면 2개의 피크가 나타남을 보임으로써 그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약물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혈중 약물 농도 곡선에 피크가 1개 또는 2개로 다르게 나타나는가? 이 의문에 대해서는, 2개의 피크가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각 사람에서의 약물의 흡수속도정수(ka)와 소실속도정수(ke)의 크기에 따라 피크가 1개로 보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가설을 제안하였다. 이 가설은 ka와 ke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시뮬레이션 연구를 통해 그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가설, 즉 ‘특수한 약물이나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면, 경구투여된 약물의 혈중농도 패턴은 원칙적으로 피크가 1개가 아니라 2개가 나타난다’는 가설은 약물동태학의 기본 전제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또한 ‘혈중농도 패턴이 사람에 따라 고유하다’는 사실도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는 이와 관련된 일련의 연구 결과를 몇 편의 논문으로 학술지에 발표하고, 또 1992년 미국 캔자스대학 주최로 열린 제25회 Higuchi 심포지엄에서 구두(口頭) 발표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흡족할 정도의 논문을 쓰지 못했다. 후학(後學) 중 누군가가 이 가설을 멋지게 정리해 논문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03-30 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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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6>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의 도입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8
이번에는 석사 과정 학생에게 국내 최초로 ‘생물학적동등성시험(生物學的同等性試驗, bioequivalence test, 이하 생동성시험)’을 연구하게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1986년, 나와 대학 동기로 일동제약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H가 나의 석사 과정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미래 동향에 대비하기 위하여 생동성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이 연구는 피험자(volunteer)들을 어떻게 모집 선정하고, 식사는 어떻게 제공하고 채혈은 어떻게 하며 비용과 시험 공간은 얼마가 필요한지 등을 조사하는 일종의 파일럿 연구였다. 이때 일동제약에서 만드는 ‘큐란’ [라니티딘(ranitidine) 함유 정제]을 시험약(test drug)으로, GSK의 ‘잔탁(Zantac)’을 대조약(reference drug)으로 선정하여, 두 약을 1주일 간격으로 교차 투여 (2x2 cross-over)한 후 HPLC로 분석한 라니티딘의 혈중 농도를 바탕으로 두 약이 생물학적으로 동등(同等)한지 여부를 판정하였다. 연구는 2년 안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H는 1988년 ‘라니티딘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이라는 제목으로 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생동성시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약대 교수 휴게실에 배달되고 있는 일본공정서협회(日本公正書協會) 발간의 『의약품연구(醫藥品硏究) 』라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이 잡지에는 일본의 생동성시험에 대한 해설이 연재되고 있었는데, 나는 머지않아 이 시험이 우리나라에 도입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측하고 미리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시험에서 약물 투여와 혈중농도 분석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것은 두 약의 혈중농도 데이터가 ‘동등’한지 여부를 통계학적으로 판정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두 약이 “통계학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판정은 Student’s t-test를 사용해서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동등’하다는 판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두 약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동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 판정에 필요한 피험자의 수가 약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몇 사람에게 약을 투여해 보면 동등성 여부를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건 시험을 해 보아야 압니다”라고 대답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중에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에서 생동성 시험 규정을 만들 때에도 이 통계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에 생동성시험을 도입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 연구는 1989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제네릭 의약품의 승인 신청 시 생동성시험 자료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데 견인차(牽引車) 노릇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험 데이터를 가지고도 통계학적으로 두 약의 동등성 여부를 판정하기는 제법 복잡하였다. 그래서 시험 데이터만 입력하면 동등성 여부의 판정은 물론 최종보고서까지 자동으로 프린트 아웃되는 『생물학적동등성 판정 통계 프로그램(K-BE test) 』을 개발하여, 1998년과 2002년에 프로그램 등록을 하였다. 이 개발은 컴퓨터를 잘 아는 대학원생인 S와 L가 주도하였다.
이 통계 판정 프로그램의 개념도 『의약품연구』에 나와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이 K-BE test를 식약청에 제공하여 우리나라의 생동성시험 판정을 위한 공식 통계처리 프로그램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생동성시험의 기반을 대폭 넓힐 수 있도록 이 프로그램을 전국의 모든 생동성시험 연구자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아마 그동안 국내에서 수행된 수많은 생동성시험 중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은 연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와 우리 연구팀이 국내 제약산업의 발전에 작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연구를 계기로 ‘생동성시험의 권위자’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평판을 얻었는데, 이 평판이 내가 2003년 식약청장으로 부름 받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2023-03-15 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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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5> 석사과정 논문 지도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17
나는 30년간(1983-2013)의 재직 기간 동안 118명의 석사를 지도하면서 되도록 그들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투고하게 하였다. 그들 중 제일 먼저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 (J. Pharm. Sci. 76(1987, 784-787))에 석사 학위 논문을 게재한 사람은 J군이었다.
그의 연구내용은 사람이 테오필린 정제를 복용하였을 때의 타액(唾液) 중 약물 농도를, 간단히 이 정제의 시험관내 (in vitro) 용출(溶出, dissolution) 속도를 측정함으로써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행(先行) 연구에 따르면 타액 중 농도는 혈중 농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결국 이 약에 대한 간단한 in vitro 시험으로부터 이 약의 in vivo 혈중농도 프로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워낙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보지 못하던 시절이라 대학원생들과 함께 매우 기뻐했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 때에는 논문의 본문은 타이프라이터로 치고, 그래프는 일일이 손으로 그린 다음, 각 3부씩을 딱딱한 종이 사이에 끼워서 항공 등기 우편으로 학술지의 편집위원장에게 보내야 했다. 당시에는 이메일 투고가 없었다. 한 두 달을 초조하게 기다리면 마침내 Fedex로 회신 편지가 온다. 그 때 봉투를 뜯어 심사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읽을 때의 두근거림이란! 오랫동안 논문을 투고하다 보니 다 읽지 않아도 편지가 ‘I regret.’으로 시작되면 거절된 것이고, ‘I am pleased’로 시작하면 채택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운 좋게 채택(accept)되었음을 확인하면 야호!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채택보다는 거절(reject)되었다고 써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거절되었을 때의 좌절감은 상당 기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채택이나 거절보다는 ‘첨부한 지적사항을 반영하여 수정(revision)해서 다시 보내주면 재고(再考)하겠다’는 회신을 받는 경우가 제일 많았는데, 이런 회신만 받아도 희망을 가질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지도한 석사과정 학생들의 연구 논문의 키워드들을 보면, 생체내이용률, 소장 흡수, 지속성 방출, 약물동태, 제어방출, 경구 DDS, 용량의존적 체내동태, 담즙배설, 직장(直腸)흡수, 경비(經鼻)흡수, 신장해(腎障害), 간장해, 생물학적동등성시험, 한방약, 용출, 타액 중 약물농도, 지속성 정제, 인터페론, 음주와 약물동태, 뇌 중 약물농도, 신장 배설, 인터루킨, 프리포뮬레이숀, 다중(多重)피크 현상, 포뮬레이션, aucubin, 이온토포레시스, 경피투여, 부위 특이적 흡수, 팽윤하이드로젤, 프로리포솜, 가용화, 간 타게팅, asialofetuin, 리포솜, 담즙산, 간 마이크로좀, 간담배설, 마이크로캡슐, PVP-하이드로젤, 유기양이온의 간수송, 유리(遊離)간세포, 모세담관막 소포체, 쇄자연막 소포체, 혼합미셀, 패치, 프로드럭, BBB관문의 개방, 하이드로코티손의 피부 흡수, gliclazide의 가용화, 하이드로젤 연고, 간세포 배양계, 연어 칼시토닌 함유 프로리포솜, 위장관운동 촉진제, P450, P-gp, Caco-2 세포단층막, LLC-PK1 세포단층막, 호르몬 disrupter의 영향, berberin, P-gp, LPS 유발 급성 염증 모델, rMRP2, 유기양이온수송체(OCT), oct2, rOCT1, YH439, 실험적 콜레스타시스, SNEDDS, GFP tagging, oat3, 이온 페어 형성, 고체 분산, 장관운동 촉진, 항 비만 효과, BCRP, efflux, influx, 키토산 마이크로스피어, floxacin의 기관지 송달, 지실, ghrelin 수용체, motilin 수용체, 마크로파지 송달, gemifloxacin, 아미노산 수송체, naringin 등으로 매우 다양하였다.
연구 주제가 이처럼 다양했다는 것은 실은 내 지도가 몇 가지 주제에 집중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지도 능력의 한계 때문에 깊이 있는 지도를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2023-02-22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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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64> 박사 논문 지도 – 삶속의 작은 깨달음 16
내 이름으로 박사 학위를 준 학생은 총 21명이다. 첫 졸업생은 조교수 발령을 받은 지 12년 만인 1995년에 학위를 준 H이다. 그는 유기 양이온의 간담(肝膽) 수송 기전을 연구해 Drug Met. & Dispos. 27(1999)에 발표했다. 그 후 나는 약물의 체내동태 기전(pharmacokinetics)을 분자 레벨에서 밝히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H는 나중에 도쿄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박사후연구를 한 다음, BMS사에서 신약개발 관련 연구를 한 후 귀국해 국내 유명 제약회사에서 사장으로 활약 중이다.
1996년에는 L이 EGF의 경피(經皮) 흡수를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1998년에는 K 교수님의 제자인 Y와, L교수님의 제자인 C와 K가 부분적으로 내 지도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K(L 교수님 학생)와 S, L, J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K는 록소프로펜의 인체 내 약물동태를, S는 관절염 치료를 위한 방사성 동위원소 화합물의 제조를, L은 시클로스포린 A의 약물동태와 P-gp와의 관련성을, J는 니코틴의 경비(經鼻) 흡수를 통한 혈중 농도의 지속화 방안을 연구했다. 2001년에는 S, H 등이 유기 양이온의 막 수송기전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2001년에는 L이 위장관운동 촉진제가 라니티딘의 위 장관 흡수에 미치는 영향을, 또 중국 국적의 동포인 L이 신약후보물질인 YH1885의 소장상피세포 투과 기전을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2003년에는 S가 칼시토닌의 소장흡수를, L이 영양결핍이 간수송체의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2005년에는 C가 4급암모늄인 TBuMA의 모세담관막 투과 기전을, 2006년에는 K가 TBuMA의 소장흡수를, 2008년에는 H가 오플록사신함유 마이크로스피어를 이용한 폐 마이크로파지 송달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2009년에는 J가 고지혈증에서 간 Oct1의 발현 감소에 의한 메트포민의항당뇨작용 감소 기전을, K(중국동포)가 신장해시 Oat1 및 Bcrp의 발현 감소 기전을, L이 폐결핵 시 ABC 및 SLC 수송체의 mRNA 발현 변화를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또 2009년에는 중국 심양약대 Cui 교수의 위탁생인 Y가 키토산으로 표면을 수식한 나노입자가 혈액 중에서 일시적인 회합체를 형성함으로써 폐에 선택적으로 이행한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2010년에는 동아제약의 K가 엑세나티드의 지속성 제제의 약물동태로, 오유경 교수와 공동지도한 K가 올리고핵산염약물의 송달로 학위를 받았다. 2012년에는 K가 ‘항암제의 아미노산 유도체화를 통한 암세포 이행성 개선’으로, C가 ‘헤마토포르피린 수식 나노파티클을 이용한 독소루비신의 간암이행성 개선’으로 학위를 받았다.
2013년에 나는 S와 ‘유기 양이온의 수송 및 ion-pair 가설’이란 제목의 종설을 공동 발표했다. 여기에서 나는 (1)분자량>200인 4급암모늄 화합물(HQA)은 간세포의 쇄자연(sinusoidal)막에 발현돼 있는 OCT1이라는 influx 수송체 단백에 의해 인식되어 간세포 속으로 들어간 다음, (2)간세포 내에서 담즙산염(BS)과 ion-pair 복합체(IP)를 형성하는데, (3) 이 IP가 모세담관(canalicular)막에 발현되어 있는 P-gp라고 하는 efflux 수송체 단백에 의해 인식돼 능동적으로 담즙으로 배출되는데, (4)1~3의 과정이 간이 HQA를 해독하는, 즉 HQA의 3상(Phase III) 대사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분자량 <200인 4급암모늄 화합물(LQA)은 간세포 안에서 BS와 IP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P-gp를 통해 담즙으로 배설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분자량>200인 4급암모늄은 주로 답즙으로 배설되지만, <200인 4급암모늄은 주로 소변으로 배출되는 신비한 현상(분자량 threshold)’의 기전을 명쾌하게 밝힐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좀 더 깊은 연구를 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과제들이다.
2023-02-08 10: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