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영 (캘리포니아주 약사)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TSE 당일,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빈자리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그 많은 학생들이, 하나같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창한 답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시작은 했지만, 주변의 그 막힘 없는 답변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느리고 간단하고, 또 짧은 답변들이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답변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10초 이상이나 남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덧붙일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앉아 있기도 했고, 또 마지막의 가장 길고 어려운 질문에는 거의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몇 마디 하다 시간이 끝나 버렸다.
확실히 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디에도 리포팅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나왔는데, 한 달 뒤 50점이라고 찍힌 성적표가 날아왔다(TSE는 60점 만점에 55점, 50점 등 5점 단위로 점수가 매겨지는데, 미국 약사가 되려면 50점 이상이 필요했다).
주변의 소음을 이겨보려고 거의 악을 쓰다시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 통한 것인지?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하고 얼른 NABP와 캘리포니아 주 보드에 별도 비용을 들여 리포팅을 했다.
일단 한 가지를 끝내놓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더 생겼다. 그래서 인터넷에 토요반 모임방도 개설하고, 케이블TV 영화를 벗어나 극장으로 가끔씩 진출하기도 하고, 월드컵 거리응원도 나가 보고, 11월에는 난생처음 TOEFL도 치렀다. 강의가 두 바퀴를 도는 사이 딴 세상 얘기 같기만 하던 약물치료학과도 어느 정도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국여행비자도 손에 쥐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고 미국으로 시험 보러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프로세스가 중지되고 향후 시험일정은 무기한 연기된 것이었다. 시험정보 교환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FBI 수사가 진행되었고, 일부 관련자들에 대해 이미 받은 점수를 취소함은 물론, 재응시조차도 영구히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 중에도 피해를 입은 다수가 있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The show must go on”, 강의는 여전히 진행되었고, 다만 인터넷 공개 모임방은 즉시 폐쇄한 후 현재의 비공개 클럽으로 옮겼다.
시험 재개를 기다리는 동안 소셜 번호나 얻어놓자는 생각에 나는 당시 유행하던 하와이 운전면허 시험 길에 올랐다. 그사이 연애, 결혼을 겪으며 임신 중이었던 몸으로 약간의 불안함 속에서도 무사히 필기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함께 갔던 일행들 중 나와 다른 한 분에게는 어쩐 일인지 소셜 번호가 발급되지 않은 바람에 그냥 하와이 구경이나 하고 온 셈이 되었다.
그러던 중 3월에 드디어 시험공고가 났는데, 원하는 날짜와 장소를 개인적으로 정할 수 있었던 컴퓨터시험에서 다시 예전의 종이시험으로 돌아가 매년 6월과 12월에만 시험을 실시한다며 첫 시험을 6월 22일로 발표했다.
그간 여유를 부리다가 갑자기 시험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수험생이 된 우리는 부랴부랴 공부모임을 만드는 한편 시험 다음날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로 1일 관광을 갈 계획까지 포함한 여행일정도 잡았고, 또 나는 시험날에서 정확히 한 달 후가 출산 예정일이었으므로 고민 끝에 아이를 낳고 올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막상 시험날, 공부했던 내용은 하나도 안보이고 하루 온종일 기본기가 충실한지만을 집요하게 테스트 당하다가 호텔에 돌아온 나는 절망에 빠졌다. 함께 간 다른 동료들도, 큰 사건이 있고 난 후의 첫 시험이라, 의도적으로 어렵게 낸 것이 아니었겠냐는 견해들이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 새로 공부를 해서 12월에 또 시험을 치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졌으므로 한국으로 돌아와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한 학생 남편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살아나갈 일, 또 깨어진 나의 꿈 등을 생각하며 눈 앞이 캄캄했는데, 어느 날 성적표가 날아왔다. 커트라인에서 12점을 간신히 넘긴 합격이었다. 그냥 눈물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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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E 당일,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빈자리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그 많은 학생들이, 하나같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창한 답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시작은 했지만, 주변의 그 막힘 없는 답변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느리고 간단하고, 또 짧은 답변들이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답변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10초 이상이나 남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덧붙일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앉아 있기도 했고, 또 마지막의 가장 길고 어려운 질문에는 거의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몇 마디 하다 시간이 끝나 버렸다.
확실히 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디에도 리포팅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나왔는데, 한 달 뒤 50점이라고 찍힌 성적표가 날아왔다(TSE는 60점 만점에 55점, 50점 등 5점 단위로 점수가 매겨지는데, 미국 약사가 되려면 50점 이상이 필요했다).
주변의 소음을 이겨보려고 거의 악을 쓰다시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 통한 것인지?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하고 얼른 NABP와 캘리포니아 주 보드에 별도 비용을 들여 리포팅을 했다.
일단 한 가지를 끝내놓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더 생겼다. 그래서 인터넷에 토요반 모임방도 개설하고, 케이블TV 영화를 벗어나 극장으로 가끔씩 진출하기도 하고, 월드컵 거리응원도 나가 보고, 11월에는 난생처음 TOEFL도 치렀다. 강의가 두 바퀴를 도는 사이 딴 세상 얘기 같기만 하던 약물치료학과도 어느 정도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국여행비자도 손에 쥐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고 미국으로 시험 보러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프로세스가 중지되고 향후 시험일정은 무기한 연기된 것이었다. 시험정보 교환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FBI 수사가 진행되었고, 일부 관련자들에 대해 이미 받은 점수를 취소함은 물론, 재응시조차도 영구히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 중에도 피해를 입은 다수가 있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The show must go on”, 강의는 여전히 진행되었고, 다만 인터넷 공개 모임방은 즉시 폐쇄한 후 현재의 비공개 클럽으로 옮겼다.
시험 재개를 기다리는 동안 소셜 번호나 얻어놓자는 생각에 나는 당시 유행하던 하와이 운전면허 시험 길에 올랐다. 그사이 연애, 결혼을 겪으며 임신 중이었던 몸으로 약간의 불안함 속에서도 무사히 필기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함께 갔던 일행들 중 나와 다른 한 분에게는 어쩐 일인지 소셜 번호가 발급되지 않은 바람에 그냥 하와이 구경이나 하고 온 셈이 되었다.
그러던 중 3월에 드디어 시험공고가 났는데, 원하는 날짜와 장소를 개인적으로 정할 수 있었던 컴퓨터시험에서 다시 예전의 종이시험으로 돌아가 매년 6월과 12월에만 시험을 실시한다며 첫 시험을 6월 22일로 발표했다.
그간 여유를 부리다가 갑자기 시험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수험생이 된 우리는 부랴부랴 공부모임을 만드는 한편 시험 다음날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로 1일 관광을 갈 계획까지 포함한 여행일정도 잡았고, 또 나는 시험날에서 정확히 한 달 후가 출산 예정일이었으므로 고민 끝에 아이를 낳고 올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막상 시험날, 공부했던 내용은 하나도 안보이고 하루 온종일 기본기가 충실한지만을 집요하게 테스트 당하다가 호텔에 돌아온 나는 절망에 빠졌다. 함께 간 다른 동료들도, 큰 사건이 있고 난 후의 첫 시험이라, 의도적으로 어렵게 낸 것이 아니었겠냐는 견해들이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 새로 공부를 해서 12월에 또 시험을 치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졌으므로 한국으로 돌아와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한 학생 남편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살아나갈 일, 또 깨어진 나의 꿈 등을 생각하며 눈 앞이 캄캄했는데, 어느 날 성적표가 날아왔다. 커트라인에서 12점을 간신히 넘긴 합격이었다. 그냥 눈물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