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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 '따뜻한 말 한마디'는 감성적인 수사 넘어 강력한 ‘경영 자산’
따뜻한 말 한마디 이충우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실버비즈니스학과> 짙어가는 오월의 녹음만큼 캠퍼스는 분주하고 눈 부신 햇살 속에서 학생들의 생각이 점차 단단해지는 시기입니다. 최근 동네 피부과에 다녀왔습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내원객의 대부분은 50대 이상의 실버층입니다.간단한 진료 후 항생제 처방전을 들고 바로 옆 약국으로 향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곤거리는 제 또래 여성분들의 대화에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요컨대 약사의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태도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좀 멀어도 상가 1층 약국이 친절하니 다음부터는 그리로 가자”는 그분들의 대화가 메아리처럼 제 귀를 맴돌았습니다.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처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대개 비슷합니다. 눈 맞춤 없는 건조한 복약 지도, 성분별 유의 사항조차 적혀 있지 않은 약 봉투, 확인차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침묵. 머쓱한 기분에 약국 내부를 둘러보니, 상품 진열과 인테리어마저 ‘이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라는 힌트를 주더군요.소비자의 구매 결정 과정을 이 상황에 대입해 보면 명확해집니다. 처방 약이라 할지라도 소비자의 구매 과정에는 엄연히 ‘서비스 경험’이 존재합니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경험 여정(Journey of Experience)’이라 부릅니다. 이 여정에서 고객이 좋아했던 경험은 ‘터치 포인트(Touch Point)’, 고객이 싫어했던 나쁜 경험은 ‘페인 포인트(Pain Point)’가 됩니다.이 처방약국의 사례를 서비스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핵심은 명확해집니다. 서비스 디자인이란 고객의 경험 여정에서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강조하여 전체적인 만족도를 높이는 작업입니다. 약국을 경영하는 약사는 의료 전문인이자, 의료 소비자와 최전선에서 만나는 ‘서비스 제공자(Service Provider)’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약국 경영의 첫걸음은 고객의 경험 여정에서 페인 포인트를 어떻게 제거하고, 터치 포인트를 어떻게 강화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최근 약업계의 뜨거운 화두이자 우려의 대상인 ‘체험형·창고형 약국’도 이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산업 전문 방송(채널i)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정보의 비대칭 해소와 소비자 욕구의 다변화로 인해 창고형 약국의 선호가 앞으로도 증가할 거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약국을 찾는 고객의 지형은 이미 크게 바뀌었습니다. 인구통계학적으로 50대 이상 실버층이 급증했을 뿐 아니라, 가치 소비 측면에서 가격 민감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특히 심리학적으로 건강을 더욱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소비하는 ‘셀프 메디케이션(Self-Medication)’ 경향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지금의 의료 소비자는 정보 탐색에 능숙하고, 주체적인 선택을 원하며, 건강을 삶의 질과 활동성의 문제로 인식합니다. 최근 급증하는 1인 가구 트렌드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가족이 곁에서 약을 챙겨주고 병원에 동행하며 생활 속 건강을 돌봐주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돌봄 구조가 빠르게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동네약국이 단순히 ‘조제와 판매’라는 기능적 공간을 넘어, 초고령사회에서 건강한 장수(Longevity)를 지원하는 ‘생활 밀착형 플랫폼’으로 재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소비자 관점에서 창고형 약국은 넓은 공간, 다채로운 품목, 정돈된 진열, 그리고 직접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특히 해외여행 등에서 월그린이나 마츠모토 기요시 같은 대형 드럭스토어를 경험하며 느꼈던 편의성과 가성비의 만족감은, 정보 탐색과 자기 결정 성향이 강한 소비자에게 강력한 터치 포인트로 작용합니다. 즉, 창고형 약국의 등장은 단순한 규모의 대형화가 아니라 약국 서비스의 ‘소비자 경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입니다.그렇다면 초고령사회에서 동네약국의 본질적인 경쟁력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이를 ‘롱제비티(Longevity)’ 관점에서 바라보면, 약국의 가치는 단순히 소비자 선택의 넓이만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택을 돕는 약사의 신뢰성, 복약을 지속하게 만드는 동기 부여, 그리고 일상 속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의료 소비자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서비스 마케팅의 7P 믹스 중 ‘피플(People)’, 즉 사람이 핵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서비스 마케팅에서 사람은 단순히 노동력이 아니라 ‘브랜드 경험 그 자체’입니다. 약사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질문의 방식과 설명의 깊이가 곧 약국의 ‘서비스 품질(Service Quality)’로 이어집니다. 고객이 기억하는 약국의 이미지는 화려한 인테리어보다 약사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인데요. 특히 고령층 고객에게 약사는 단순한 판매자가 아니라 강력한 건강 조언자이자 과학적 판단을 돕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 많은 약국은 여전히 고령층을 그저 ‘행동과 답변이 느린 나이 든 고객집단’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고령층 고객 역시 정밀하게 세분화(Segmentation)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국내 1차 베이비붐 세대(1954~1963년생)는 대면 소통과 관계를 선호합니다. 통기타와 청바지 문화를 향유했던 이들은 정서적 교감을 통해 신뢰를 쌓으며, 전문가의 권위를 중시합니다. 반면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는 다소 다른 특성을 보이는데요. ‘신인류’와 ‘X세대’로 불리었던 이들은 사화와 개인을 분리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첫 세대입니다. 이들은 일방적 설명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이 약이 필요한지,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생활 습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복합적으로 따져 묻는 주체성을 보입니다.따라서 앞으로의 약국 서비스는 핵심 고객층의 특성을 명확히 파악한 약사의 ‘커뮤니케이션 역량’에 좌우될 것입니다. 단지 상대를 나이 든, 그저 신체 기능이 저하된 소비자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체적인 선택권을 가진 ‘고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전문 용어 대신 쉬운 말로 설명하되 결코 얕잡아 보지 않고, 반복해서 설명하되 가르치려 하지 않으며, 노화의 맥락을 이해하되 그 불편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약사의 전문성은 오롯이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지식을 능수능란하게 발휘하는 역량에서 차이가 나타날 것입니다.특히 지난 3월부터 시행된 ‘돌봄통합지원법’ 체계 안에서 약사의 역할은 더욱 도드라질 것입니다. 통합돌봄 대상자 대부분이 다제약물을 복용하는 만성질환 고령층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에서 통합돌봄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동네약국이 먼저 친숙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일상적인 건강 관리의 접점에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주효할 수 있습니다.“요즘 식사는 어떠세요?”, “이 약 드시고 속이 불편하진 않으셨나요?”, “지난번보다 혈압은 좀 안정되셨나요?” 같은 짧지만 따뜻한 말들은 단순한 친절의 범위를 초월합니다. 이는 약사가 나의 건강 상태와 라이프스타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나를 일회성 구매자가 아닌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이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속 깊은 함의입니다.초고령사회에서 이 ‘따뜻한 말 한마디’는 감성적인 수사를 넘어 강력한 ‘경영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고객이 약국을 조제와 판매만 이루어지는 물리적 장소로만 기억하게 할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약사님, 즉 사람을 떠올리게 해야 합니다. 창고형 약국이 가격 효율성과 다양한 선택 대안을 내세울 때, 동네약국은 오직 자신만이 줄 수 있는 관계의 지속성으로 경쟁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네약국의 사람 중심의 서비스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경쟁력을 가지게 됩니다. 똑같은 약이라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건네느냐에 따라 고객이 느끼는 가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국, 사람의 경쟁력이 곧 약국의 경쟁력이 되는 이유입니다.마무리하겠습니다. 롱제비티 시대, 초고령사회의 약국은 분명 지역 커뮤니티의 일상적 건강 거점이자 가장 친밀한 건강 관리의 파트너이어야 합니다. 창고형 약국의 등장은 체험형 소비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지역 커뮤니티라는 본질적 관점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창고형 약국의 태생적 한계는 분명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사람이 답’이라는 동네약국의 존재 이유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6-06-04 0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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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롱제비티(Longevity) 시대, 일본 약국업계 경영의 대전환
<연재를 시작하며>우리나라는 지난해를 기점으로 전체인구의 20%가 만 65세 이상이 되는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이는 단순히 초고령화라는 인구 문제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발생할수 있는 위기상황에 봉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적 이슈로 부상한 고령사회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검토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특히 통합돌봄과 재택요양 등 보건의료 측면에서의 제도적 보완과 시행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고령사회와 건강한 장수]라는 제목으로 약국경영 측면에서의 대응방안을 전문가 3인의 릴레이 기고를 통해 조망해 보고자 한다. 집필진으로 이현이 박사(주 자티스 대표), 방준석 숙명여대 약학대학 교수, 이충우 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교수가 참여한다. <편집자> 롱제비티(Longevity) 시대, 일본 약국업계 경영의 대전환: 조제중심에서 전 생애 주기 건강관리 플랫폼으로이현이 대표아날로그의 나라 일본, 약국에서 디지털의 미래를 마주하다 얼마 전 일본 시장에 진출을 준비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과 미팅을 가졌다. 일본 헬스케어 시장은 규모가 크고 매력적이지만, 디지털화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는 것이 고객의 고민이었다. 흔히 일본은 ‘아날로그의 나라’로 기억된다. 여전히 팩스를 사용하고, 도장 문화를 고집하며, 매뉴얼과 서류를 중시하는 모습은 디지털 강국을 자부하는 우리에게는 다소 더디고 답답한 구시대적인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를 위한 치열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시스템의 안전성, 예측 가능성, 책임 명확성을 추구하는 ‘아날로그적 디지털’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특히 약국만큼은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지고 있다. 디지털이 아날로그의 휴먼터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약국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약국 10곳 중 8~9곳은 이미 전자처방전 대응 시스템을 구축했다. 조제 로봇이 처방 데이터를 받아 환자가 도착하기 전 약을 준비하고, 약사는 태블릿으로 복약 이력을 실시간 확인하며 상담과 지도에 집중한다. 일본 약국은 지금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디지털 헬스케어의 최전선으로 변모하고 있다. 롱제비티 시대가 왔다. “150은 정말 패셔너블한 숫자입니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합니다.(150 is a very fashionable number now. I have no doubt it will happen. No question)” 알토스 랩스의 스티브 호바스 박사가 올해 초 타임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세계적인 노화과학자인 그는 노화를 측정 가능한 생물학적 과정으로 보고, 건강수명 연장 가능성을 강조한다. 실리콘밸리는 이제 죽음을 운명이 아닌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간주하며, 롱제비티라는 거대한 관점의 전환과 함께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학계의 초점도 이동했다. ‘기대수명’보다 ‘건강수명(healthspan, 질병이나 장애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간)’의 연장이 핵심과제가 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 건강수명과 기대수명 사이의 격차가 평균 9.6년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무병장수가 인류의 새로운 공통 과제가 된 것이다. 롱제비티는 더 이상 고령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로모니터의 2025년 글로벌 소비자 트렌드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65%가 단기 효과보다 장기적 건강에 초점을 맞춘 식품 선택을 선호한다. 전 세대가 건강수명에 투자하는 시대가 됐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전환의 가장 일상적인 접점에 약국이 있다. 전문가인 약사가 매일 수많은 시민을 만나는 공간, 동네 약국이야말로 롱제비티 헬스케어의 최전선이다. 롱제비티 이코노미, 일본 96조 엔 시장의 실체 MIT Age Lab의 조지프 코글린 박사는 ‘롱제비티 이코노미(Longevity Economy)’를 50세 이상 인구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경제 활동의 총합이자, 이들이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 전반으로 정의한다. 미국 은퇴자 협회(AARP)와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분석에 따르면 50세 이상 인구가 세계 경제에 기여하는 규모는 2050년 약 118조 달러의 GDP 임팩트를 창출할 것으로 전망된다. 헬스케어, 예방의학, 웰니스, 디지털 헬스 등 관련 산업군이 이 거대 생태계의 중추를 이룬다.일본은 롱제비티 이코노미의 최대 실험장이다. 세계경제포럼(WEF) 2025년 9월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롱제비티 이코노미 규모는 2023년 기준 96조 엔에 달하며, 2040년에는 115조 엔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헬스케어 29조 엔, 돌봄 및 간병 11.7조 엔, 라이프스타일 관련 산업이 55.7조 엔으로 구성된 거대 생태계다 <그림1>. 2025년 총무성 통계 기준 65세 이상 인구 3,619만 명이 전체의 29.4%를 차지하는 일본에서 이 숫자들은 추상적 전망이 아니라 이미 움직이는 현실 시장이다. <그림 1> 일본 롱제비티 이코노미 규모 (출처: 미즈호 은행, 2025.1) 시장의 양적 팽창과 함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소비 주체의 질적 진화다. 미즈호은행 2025년 보고서는 일본 고령자의 건강 상태와 취업률이 지난 15년 사이 사실상 ‘5년 젊어졌다’고 분석한다. 이 ‘마이너스 5세’ 효과는 단순한 숫자 변화가 아니다. 고령자가 5년 더 건강하게 사회에 머물게 됨으로써 의료, 복지 등 사회적 비용이 획기적으로 절감되는 ‘장수 배당’ 효과가 발생한다. 실제 내각부의 고령사회백서(2024)에 따르면 60대 후반의 절반이 현직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는 고령자가 더 이상 수동적 부양 대상이 아님을 방증한다. 스스로 건강에 투자하며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생산성을 유지하는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가 롱제비티 이코노미의 주역으로 부상하면서, 아픈 환자를 사후적으로 돌보는 공간을 넘어 활력을 지원하는 ‘롱제비티 거점’으로서 약국의 역할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 롱제비티 소사이어티, 전 세대 헬스케어와 약국의 재정의 일본 정부는 ‘고령사회대책대강’을 통해 전 세대가 건강하게 공생하는 장수사회 설계를 국가 과제로 삼았다. 그 핵심이 후생노동성이 추진하는 ‘지역 포괄 케어(거주지에서 의료와 돌봄, 예방을 통합 제공하는 인프라)’와 이를 실천하는 거점으로서의 약국이다. 2025년 일본의 의료비 지출은 46조 엔을 초과했다(후생노동성, 2025). 일본 정부의 계산은 단순하다. 마이너스 5세의 임팩트처럼, 건강수명 1년 연장이 의료비 및 연금 지출의 절감으로 이어진다. 롱제비티 기술과 예방적 헬스케어 투자는 복지 확대가 아닌 국가의 재정 생존 전략이다.이러한 구조 속에서 약국에 주어진 역할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처방전을 받아 조제하고 건네는 ‘대물(對物)’ 기능은 이제 자동화 등 기술로 대체 가능한 기본값이 되었다. 국가는 약사에게 복약지도의 질 향상, 다제병용관리, 재택의료 지원, 생활습관 개선과 상담, 치매 및 우울 조기 스크리닝이라는 ‘대인(對人) 기능’을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2021년부터 시행된 ‘지역연계약국, ‘건강서포트 약국’ 인정제도를 통해 이를 제도화했다. 전 세대 롱제비티의 실천 거점으로서 동네 약국의 재정의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10조 엔 돌파, 진화하는 일본의 약국 업계 일본체인드럭스토어협회(JACDS)에 따르면 2025년 드럭스토어 업계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10조 엔을 돌파했으며, 2030년까지 13조 엔, 3만 5천 점포라는 목표로 제시했다. 성장엔진은 조제수요 확대와 헬스케어 다변화다. 리테일 강자들조차 전문적인 상담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조제 기능을 강화하고 식품 부문을 헬스케어와 결합하며 체질을 혁신하고 있다.시장 재편도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일본 유통 공룡 AEON그룹의 주도로 일본의 양대 드럭스토어인 웰시아 홀딩스와 쓰루하 홀딩스가 합병하며 일본 최대 드럭스토어 연합체가 탄생했다. 물류일원화와 구매 및 조제 데이터의 통합 시너지를 통해 그룹 차원의 종합헬스케어를 실현하겠다는 포석이다. 2021년 경영통합을 이룬 마쓰키요코코카라&컴퍼니 역시 고객 생애가치(LTV) 극대화 전략으로 2031년 매출 1조 3천억 엔의 자력 성장을 목표로 내걸었다. 스기 홀딩스는 지역 헬스케어 네트워크 구축과 아시아 시장 진출이라는 독자 노선을 택했다. 결국 이 모든 방향은 하나다. 일본의 약국은 ‘약을 파는 곳’에서 ‘생애 전반의 건강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약국 DX, ‘기다리는 곳’에서 ‘이미 준비된 곳’으로 약국 경험의 재설계 일본 약국 디지털전환(DX)의 핵심 축은 전자처방전이다. 후생노동성과 디지털청에 의하면, 올해 3월 시점 약국의 전자처방전 도입률은 89.5%에 달한다. 같은 시기 의료진료소(의원) 25.8%, 병원 19.4%에 그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후생노동성은 ‘의료DX 비전 2030’ 로드맵에서 2030년까지 모든 의료기관에 전자처방전을 보급하되, 약국은 2025년 7월 사실상 전면 도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림2>전자처방전의 의미는 종이의 디지털 대체에 그치지 않는다. 전국 의료기관과 약국을 잇는 처방 정보 공유 기반 위에 온라인 복약지도, 개인건강기록(PHR) 연계 복약수첩 앱 등 민간의 혁신서비스가 다층적으로 쌓이는 건강 플랫폼 구조다.<그림 2> 일본의 시설별 전자처방전 도입 현황(시설별) (자료: 후생노동성, 디지털청. 2026.3)현장의 변화는 더 구체적이다. 이른바 ‘Pharma Tech’로 불리는 약국 테크놀로지가 관련 기업이 약국의 디지털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림3>. 오카피 파마시시스템이 운영하는 ‘도도쿠스리’는 처방전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전송하면 온라인 복약지도 후 자택이나 지정장소에서 약을 받을 수 있는 완전 비대면 조제 서비스다. 올해 1월부터는 JR동일본과 제휴해 도쿄의 야마노테선 역 내 물품보관함에서 약을 수령하는 서비스를 개시하였다<그림4>. 바쁜 직장인이 출퇴근길에 약을 찾아감으로써 복약지속률을 높이는 발상이다. 조제현장의 자동화도 주목된다. 메디컬 유어즈(Medical yours)의 조제로봇 ‘리들 퍼피스(RIEDL Phasys)’는 세계 유일의 완전모듈형 로봇으로, AI 이미지 인식을 통해 1박스당 약 5초라는 세계 최고 수준 피킹속도를 구현한다. 전자처방전 데이터를 클라우드를 통해 로봇에 직접 전송해 환자 도착 전 조제를 완료하는 시스템은 특허를 취득했다. 재고관리 분야에서는 쿠리오네(9Lione)가 OCR 기반 실시간 재고 업데이트와 AI 수요예측 및 발주최적화를 제공하고, 이야쿠루는 약국 간 잉여 혹은 부족 의약품을 매칭하는 플랫폼으로 재고를 현금화하는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MG-DX의 ‘야쿠큐빈(薬急便)’은 조제 약국을 전개하고 있는 일본조제주식회사에 특화된 접객 AI 에이전트를 통해 접수업무를 자동화하고 약사는 복약지도 등 대인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구현한다.<그림 3> PHARMA TECH 카오스 맵(Chaos Map) (출처: 株式会社ツールポックス(ToolPox)) <그림 4> 오카피 파머시의 JR 동일본 스마트 로지스틱스와의 역 내 물품보관함 처방약 수령 서비스 (출처: TOPPAN 홀딩스 주식회사)수가 정책이 DX 도입을 견인하는 구조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 약국DX가 실질적으로 진전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가 수가(진료보수) 체계를 통해 DX 도입을 경제적으로 유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도 진료보수 개정에서 ‘의료DX추진체제정비가산’이 신설됐고, 2026년도 개정에서는 이를 더욱 강화 재편했다. 전자처방전 도입, 온라인 복약지도 실시, 복약데이터 공유 등 DX 요건을 충족한 약국에 가산점이 부여되는 구조다. ‘의료DX 비전 2030’ 로드맵, 디지털청의 전자처방전 도입 현황 실시간 대시보드, 후생노동성의 도입 보조금 지원과 목표 조정 등, 정밀하게 설계된 부처 간 협력 생태계가 기술 기업들의 혁신적인 솔루션을 현장에 안착시키는 힘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일본은 기술의 화려함보다 제도적 수용성에 집중하며, 구슬로 어떤 목걸이를 만들 것인가, 즉 기술을 제도와 정책으로 꿰는 방식에 집중하며 롱제비티 소사이어티의 기반을 차근차근 다져 나가고 있다.런던경영대 교수이자 스탠퍼드대 장수연구센터 자문교수인 앤드류 스콧은 인구구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고령화 사회의 관점에서 우리가 나이 드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더 긴 삶의 이점을 활용하는 롱제비티 소사이어티의 관점으로 그 초점을 확대할 필요를 강조하며, ‘다단계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강수명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 건강수명을 일상에서 관리해 주는 기술적 허브가 바로 DX로 무장한 약국이다. 조지프 코글린이 지적했듯 ‘고령자의 숨은 욕구’를 가장 가까이서 읽어낼 수 있는 공간 역시 동네 약국이다.한국은 디지털 강국의 자부심이 있고, 약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구슬은 충분하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그 구슬을 꿰는 실, 수가 구조와 정책 인센티브라는 제도 설계가 과연 충분히 갖춰져 있는가. 세계가 주목할 만큼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사회가 만수무강의 롱제비티 소사이어티로의 여정을 시작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필자 소개>이현이 박사(경영학)는 일본 비즈니스 전문가이자 경영컨설팅 기업 ㈜JaTIS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능률협회컨설팅(JMAC)과 국내 경제단체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경영혁신 컨설팅을 수행해 왔다. 일본의 정책·산업·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공공정책, 산업 및 지역 혁신, 인적자원 분야에서 연구와 자문을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롱제비티 비즈니스와 고령사회 대응 전략, 특히, 헬스케어 및 의약 산업의 구조 변화에 관해 한국과 일본의 제도와 시장을 비교하며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제시하고 있다.
2026-04-15 1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