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떠나던 무렵은 공교롭게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때문에 '해외의료봉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던 시기이다. 설상가상 출발 바로 전날엔 두 번째 인질 희생소식까지 전해지는 바람에 졸지에 주위로부터 ‘무모한’ 혹은 ‘과시욕에 빠진 볼런티어(volunteer)’ 쯤의 묘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이 어수선한 시기에....."로 시작되는 어머님의 걱정 섞인 잔소리(?)와 가족 친구 지인들로부터 애정 어린(?) 충고도 따갑게 들어야 했지만....
약간의 불안함을 안고 떠난 목적지는 인도네시아 서부자와주 수카부미군에 위치한 가나안 농군학교. 7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서 다시 버스로 꼬불꼬불 5시간가량 들어가야 하는 곳, 인도양과 닿아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산 중턱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있다.
![]() |
낯선 땅, 결코 호의적이지 않는 이곳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개간하여 건물을 짓고 농작물을 키우느라 농군학교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겠지만, 잘 가꿔진 농장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림 같은 인도양을 바라보는 '방문자'에게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마치 에덴동산에 휴양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번에 함께 한 일행은 의사 7명과 약사, 간호사 3분, 그리고 도와주는 봉사자까지 대략 30여 명. 보통은 내과, 외과 정도로 구성되는데 이번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산부인과, 치과, 초음파 기계를 동반한 방사선과까지 합류하게 되어 구성이 훨씬 다양해졌다.
통역을 위해 현지에서 합세한 교민 봉사팀까지 합하면 의료봉사팀의 총 인원은 대략 40여 명 정도. 그 중에서 약사는 나 혼자여서 약국에 대한 전체관리 및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할 부분이었다.
약국은 의료봉사활동에서 언제나 가장 바쁘고 힘든 곳이다. 때문에 인원이 많을수록 좋지만 무한정 인원을 끌어 쓸 수는 없는지라 대략 10여 명 정도 선에서 팀이 꾸려진다.

팀원들은 각자 일을 맡게 되는데 약을 조제하는 주 업무(당연히 약사가 한다) 외에도 봉투를 쓰거나 약포지를 끼워주거나 약포장기를 눌러주는 담당도 있고, 연고나 시럽을 담아주거나 복약지도를 하거나 안내나 통역 담당, 하다못해 전동 분쇄기 대신 약을 갈아주는 일명 '갈쇄'(이번 봉사활동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담당까지...세분화하고 분업화 되어 일을 한다.
사실은 한 가지씩 책임을 지워놓아야 중간에 힘들어도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몇 년 전엔 약국에 사람이 모자라 인도네시아 현지도우미와 함께 팀을 꾸렸었는데 일이 힘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안보이더니 오후 늦게는 한, 두 명 남고 모두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봉투를 쓰거나 연고를 담아주는 일,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단순 업무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과중한 업무로 돌변한다. 조제한 약을 약포장기에서 눌러주는 간단한 일 역시 쉬지 않고 줄곧 눌러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지나면 어지간한 남자들도 어깨 통증을 호소하게 된다. 종일 서있어야 하니 다리 아픈 건 물론이고...
![]() |
약국에서 조제만큼 중요한 일은 약의 총량을 파악하고 약이 소모되는 속도를 조절하는 일이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져온 약의 총량을 확인하는 일.
간혹 짐이 분실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조제가 시작되기 전, 효능별 수량파악을 하고, 질환별로 다 갖춰졌는지 확인해야한다.
신기한 것은 왜 짐을 쌀 때와 펼쳐놓을 때 이렇게 달라 보이냐는 거다.
짐을 꾸릴 때는 약이 정말 많아 보여 이만큼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하며 들고 왔는데 막상 도착해서 펼쳐 놓으면 "이게 다야?" 싶은 게, 혹시 풀지 않은 짐이 있나 뒤적거리기도 하고, 짐 담당하신 분에게 잃어버린 거 아니냐고 다그쳐 보기 일쑤다.
또 한 가지, 어째서 꾸리고 또 꾸리고 챙기고 또 챙겨도 매번 두고 오는 약들이 생기는 건지....
이번 역시 위장운동 조절제, 항히스타민제 등 요긴한 몇 가지가 통째로 빠져 버렸다. 짐 꾸릴 때 부족할까봐 추가로 몇 통을 더 사서 넣기 까지 했는데...
이렇게 되면 솔직히 암담하다. 그 많은 피부병, 위장병을 뭐로 치료해야 하나?
어쨌든 안 가져온 약을 한국으로 다시 가지러 갈 수는 없는 거고... 어쩔 수 없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때부터는 약사로서의 실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항히스타민제가 없으면 스테로이드나 신경안정제를 용량조절해서 쓰고, 위장운동 조절제는 복합소화제 중에서 성분을 찾아내 응용하는 식으로 부족한 약은 가지고 있는 약을 최대한 활용하여 빈틈을 메워줘야 한다.
아무리 봉사활동, 무료 투약이라고는 하지만 효과도 없는 조제를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의료봉사활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언제나 부족한 약품이다.
많은 부분 의사들이 제약회사로부터 찬조를 받지만 질환들이 거의 준 종합병원 수준이다 보니 찬조만으로 메워지지 않는 약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약들을 구입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지출되는 돈도 꽤 된다. 아무리 저렴한 약을 찾아 구입해도 워낙 많은 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액이 만만치가 않다.
비행기 값, 체재비까지 각자 본인 부담인 상황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약값까지 부담지우기도 쉽지 않아 이렇게 저렇게 메워보지만 약에 대해서는 늘 모자람에서 오는 갈증이 있다.
이번에 준비한 약도 금액으로 따지면 대략 1,000만원 어치. 금액으로는 적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현지에서는 약이 부족했다.
약을 무한정 준비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고간 약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가도록 분배하고,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오는 환자까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면, 또 수술이나 다른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해 약을 마지막까지 비축하고 있으려면 약의 소모속도를 조절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다음호에 계속>
| 인기기사 | 더보기 + |
| 1 | [약업분석] HLB그룹 이자비용 489억원…총차입금의존도 평균 27% |
| 2 | 코아스템켐온, 오송 공장 세포처리시설 허가 획득…첨단재생의료 사업 본격화 |
| 3 | “왜 제약·바이오 공장은 일반 스마트팩토리로 부족한가” |
| 4 | [2026 기대되는 신약] ⑧ 고혈압 치료제 ‘박스드로스타트’ |
| 5 | 동아제약 '노드라나액', 약국 건조증 치료 새 지평 제시… "잡히지 않는 속건조, 바르지 말고 체워라" |
| 6 | 여성 약사 60%·50대 최다…약사 사회 '여초·고령화' |
| 7 | 최초 GLP-1 유전자치료제 임상 승인...6월 유럽서 개시 |
| 8 | [바이오 멀티버스] 어린이날 떠올린 탈리도마이드…오가노이드가 지킬 의약품 안전성 |
| 9 | 약사회, 시민사회 접점 확대…"한약사·성분명처방 국민 눈높이로" |
| 10 | FDA, 의약품 임신 안전성 자료 개선지침 공개 |
| 인터뷰 | 더보기 + |
| PEOPLE | 더보기 + |
| 컬쳐/클래시그널 | 더보기 + |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떠나던 무렵은 공교롭게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때문에 '해외의료봉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던 시기이다. 설상가상 출발 바로 전날엔 두 번째 인질 희생소식까지 전해지는 바람에 졸지에 주위로부터 ‘무모한’ 혹은 ‘과시욕에 빠진 볼런티어(volunteer)’ 쯤의 묘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이 어수선한 시기에....."로 시작되는 어머님의 걱정 섞인 잔소리(?)와 가족 친구 지인들로부터 애정 어린(?) 충고도 따갑게 들어야 했지만....
약간의 불안함을 안고 떠난 목적지는 인도네시아 서부자와주 수카부미군에 위치한 가나안 농군학교. 7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서 다시 버스로 꼬불꼬불 5시간가량 들어가야 하는 곳, 인도양과 닿아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산 중턱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있다.
![]() |
낯선 땅, 결코 호의적이지 않는 이곳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개간하여 건물을 짓고 농작물을 키우느라 농군학교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겠지만, 잘 가꿔진 농장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림 같은 인도양을 바라보는 '방문자'에게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마치 에덴동산에 휴양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번에 함께 한 일행은 의사 7명과 약사, 간호사 3분, 그리고 도와주는 봉사자까지 대략 30여 명. 보통은 내과, 외과 정도로 구성되는데 이번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산부인과, 치과, 초음파 기계를 동반한 방사선과까지 합류하게 되어 구성이 훨씬 다양해졌다.
통역을 위해 현지에서 합세한 교민 봉사팀까지 합하면 의료봉사팀의 총 인원은 대략 40여 명 정도. 그 중에서 약사는 나 혼자여서 약국에 대한 전체관리 및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할 부분이었다.
약국은 의료봉사활동에서 언제나 가장 바쁘고 힘든 곳이다. 때문에 인원이 많을수록 좋지만 무한정 인원을 끌어 쓸 수는 없는지라 대략 10여 명 정도 선에서 팀이 꾸려진다.

팀원들은 각자 일을 맡게 되는데 약을 조제하는 주 업무(당연히 약사가 한다) 외에도 봉투를 쓰거나 약포지를 끼워주거나 약포장기를 눌러주는 담당도 있고, 연고나 시럽을 담아주거나 복약지도를 하거나 안내나 통역 담당, 하다못해 전동 분쇄기 대신 약을 갈아주는 일명 '갈쇄'(이번 봉사활동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담당까지...세분화하고 분업화 되어 일을 한다.
사실은 한 가지씩 책임을 지워놓아야 중간에 힘들어도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몇 년 전엔 약국에 사람이 모자라 인도네시아 현지도우미와 함께 팀을 꾸렸었는데 일이 힘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안보이더니 오후 늦게는 한, 두 명 남고 모두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봉투를 쓰거나 연고를 담아주는 일,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단순 업무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과중한 업무로 돌변한다. 조제한 약을 약포장기에서 눌러주는 간단한 일 역시 쉬지 않고 줄곧 눌러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지나면 어지간한 남자들도 어깨 통증을 호소하게 된다. 종일 서있어야 하니 다리 아픈 건 물론이고...
![]() |
약국에서 조제만큼 중요한 일은 약의 총량을 파악하고 약이 소모되는 속도를 조절하는 일이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져온 약의 총량을 확인하는 일.
간혹 짐이 분실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조제가 시작되기 전, 효능별 수량파악을 하고, 질환별로 다 갖춰졌는지 확인해야한다.
신기한 것은 왜 짐을 쌀 때와 펼쳐놓을 때 이렇게 달라 보이냐는 거다.
짐을 꾸릴 때는 약이 정말 많아 보여 이만큼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하며 들고 왔는데 막상 도착해서 펼쳐 놓으면 "이게 다야?" 싶은 게, 혹시 풀지 않은 짐이 있나 뒤적거리기도 하고, 짐 담당하신 분에게 잃어버린 거 아니냐고 다그쳐 보기 일쑤다.
또 한 가지, 어째서 꾸리고 또 꾸리고 챙기고 또 챙겨도 매번 두고 오는 약들이 생기는 건지....
이번 역시 위장운동 조절제, 항히스타민제 등 요긴한 몇 가지가 통째로 빠져 버렸다. 짐 꾸릴 때 부족할까봐 추가로 몇 통을 더 사서 넣기 까지 했는데...
이렇게 되면 솔직히 암담하다. 그 많은 피부병, 위장병을 뭐로 치료해야 하나?
어쨌든 안 가져온 약을 한국으로 다시 가지러 갈 수는 없는 거고... 어쩔 수 없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때부터는 약사로서의 실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항히스타민제가 없으면 스테로이드나 신경안정제를 용량조절해서 쓰고, 위장운동 조절제는 복합소화제 중에서 성분을 찾아내 응용하는 식으로 부족한 약은 가지고 있는 약을 최대한 활용하여 빈틈을 메워줘야 한다.
아무리 봉사활동, 무료 투약이라고는 하지만 효과도 없는 조제를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의료봉사활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언제나 부족한 약품이다.
많은 부분 의사들이 제약회사로부터 찬조를 받지만 질환들이 거의 준 종합병원 수준이다 보니 찬조만으로 메워지지 않는 약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약들을 구입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지출되는 돈도 꽤 된다. 아무리 저렴한 약을 찾아 구입해도 워낙 많은 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액이 만만치가 않다.
비행기 값, 체재비까지 각자 본인 부담인 상황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약값까지 부담지우기도 쉽지 않아 이렇게 저렇게 메워보지만 약에 대해서는 늘 모자람에서 오는 갈증이 있다.
이번에 준비한 약도 금액으로 따지면 대략 1,000만원 어치. 금액으로는 적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현지에서는 약이 부족했다.
약을 무한정 준비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고간 약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가도록 분배하고,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오는 환자까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면, 또 수술이나 다른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해 약을 마지막까지 비축하고 있으려면 약의 소모속도를 조절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