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의약품법규학의 3가지 의미
지난 10월 5일 열린 제3회 한국의약품법규학회에서 필자는 약사법규학 등 법규과학의 3가지 의미를 설명한 바 있다.
약사법규의 첫 번째 의미는 약업의 활동공간을 규정해 주는 기능으로서이다. 예컨대 우리는 약제학, 조제학 등 이론을 공부하는 학문을 약학의 핵심학문이라고 해서 중요시 해 왔다.
그러나 조제에 관한 이론을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만약에 법규에 의해 약사의 조제권이 박탈당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지식은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조제는 약사가 하는 일이다' 라는 법규의 정의가 핵심학문의 존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2009년부터 도입되는 6년제 약학교육이 온전한 약사의 배출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세포막과 세포질에 해당하는 교육을 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약사법규의 두 번째 의미는 과학의 논리로 포장된 무역장벽으로서의 쓰임이다. 선진국들은 그들의 앞선 과학 기술을 과시하며 일정 수준 이상의 순도나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의약품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규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규제수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나라가 몇 나라 되지 않을 때 그 법규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그 몇나라 의약품의 독점적 유통을 보장해 주는 수단이 되고, 나아가 다른 나라 의약품의 세계 시장 진입을 차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항생제는 폐기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런 항생제라도 있으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나라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규제의 수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학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역 장벽의 높이를 결정하는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약사법규의 3번째 의미는 '평가과학'으로서의 쓰임새이다. 기초과학이 왜 (why)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응용과학은 어떻게 (how)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제 시대는 어떤 (which)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평가과학의 시대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과학에 대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 난 것이다. 한나라의 규제 수준을 어느 수준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자연과학적 사실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의 경제수준, 민도, 소비자의 의식 수준, 생활습관, 전통, 기타 정치학적 상황까지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않으면 안되는 문제이다.
자연과학적 입장에만 근거하여 순도 100% 짜리 의약품, 그리고 전혀 부작용이 없는 의약품만 세상에 유통될 수 있도록 규제수준을 높인다면, 그런 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편익을 도모하겠다는 과학 본래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적 인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요소까지를 고려하여 (즉 평가하여) 어떤 규제 수준 (지렛대의 위치)을 결정짓는 학문이 법규학인 점을 생각하면 법규학이야말로 평가과학의 대표선수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일본은 이미 Regulatory Science를 우리와 달리 법규과학이 아닌 평가과학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세계를 보면서 법규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2007-11-06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