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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6> 건강기능식품 소비기한 이야기
기한이라고 다 같은 기한이 아니다. 원래부터 약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약에 표시된 기한은 사용기한이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은 판매도 할 수 없지만 사용해서도 안 된다. 유통기한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식품에도 유통기한이 아니라 소비기한이 표시된다. 그렇다면 건강기능식품은? 건강기능식품도 식품이다. 이제부터는 건강기능식품에도 소비기한이 표시된다.
소비기한이란 식품에 표시된 보관방법에 따라 보관할 경우 먹어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말한다. 유통기한은 80년대의 유산이다. 그때는 냉장 유통, 진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식품이 지금보다는 쉽게 상했다. 지금은 다르다. 냉장고에 개봉하지 않고 넣어둔 식품은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멀쩡할 때가 많다. 음모론에 끌리는 사람은 요즘 식품에 전보다 보존제를 많이 넣어서 그런 거라고 의심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식품의 제조, 유통, 보관 기술이 좋아졌을 뿐이다. 소비기한은 품질변화시점까지 기간을 100%라고 하면 그 80-9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유통기한은 식품 품질변화시점까지의 60-7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유통기한을 버리고 소비기한을 채택한 것은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유통기한은 영업자 중심의 표시제이다. 파는 사람은 더 이상 팔 수 없는 기한이다. 하지만 소비자 관점에서 유통기한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는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처럼 생각한다. 유통기한만 지나면 버리는 사람이 많단 얘기다. 소비자에게 유통기한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그냥 용어를 바꾸는 게 이번 변화의 핵심이다. 소비기한은 소비자 중심의 표시제이다. 명시된 기간까지만 소비하고 그 날짜가 지나면 버리라는 거다.
정리해보자. 약은 사용기한, 건강기능식품은 소비기한이다. 용어가 다르지만 소비자 관점에서 의미는 같다. 기한이 지나면 버리면 된다. 약은 환경을 생각하여 그냥 버리면 안 되고 약국이나 보건소에 가져다 줘야 한다. 언론 보도와 블로그에는 보건소나 약국, 주민센터에 비치된 별도의 전용수거함에 버리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약국에 그런 전용수거함을 갖춘 곳은 드물다. 건강기능식품은 식품이니까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도 될 것 같은데 막상 찾아보면 정확한 규정이 없다. 우리 대부분은 환경에 예민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둔감한 사람들이다. 포장지나 용기에서 알약만 꺼내서 봉투에 따로 담아 버리는 것조차 귀찮아한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이나 소비기한이 지난 건강기능식품을 버리고 나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폐기에는 과정이 필요하며 비용이 든다. 불필요한 폐기를 줄이기 위해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꾼 건 잘한 일이다. 이제는 그래도 발생하는 약품과 건강기능식품 폐기를 어떻게 제대로 다룰 것인가 논의해야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맘껏 소비만 하고 지르면서 살던 시절은 잊자. 자고 일어나면 언제 또 감기약, 해열제조차 구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조금 꺼림칙하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버리기 전에 정말 버리는 게 맞나 고민이 필요하다.
이번에 변경된 소비기한은 건강기능식품에 해당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약은 사용기한이다. 그런 약의 사용기한을 설정할 때는 장기보존시험과 가속시험 결과를 사용한다. 장기보존시험은 의약품의 저장조건에서 사용기간을 설정하기 위해 실제로 오래 보관시 안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속시험은 그런 저장조건을 벗어나 단기간에 조금 더 가혹한 조건에서 안정성이 어떤지 보는 거다. 가속시험 결과와 다르게 장기보존을 해보면 오랫동안 별다른 변화없이 약효를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코로나19로 의약품 품절대란에 시달린 세계 각국에서 정부가 나서서 일부 의약품의 사용기한을 연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도,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보관한 약품은 사용기한 이후 15년이 지나도 사용에 문제가 없었다는 미국 FDA 연구 결과를 참고할 만하다. 약이나 건강기능식품은 주방이나 화장실처럼 습도가 높은 곳을 피해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선반에 보관하는 게 좋다. 약의 사용기한이나 건강기능식품의 소비기한은 모두 개봉하기 전의 이야기다. 개별 포장된 제품을 제외하고는 개봉 뒤에는 기한이 줄어들 수 있다. 보관과 기한 문제에 더 진지한 관심을 갖자. 아껴야 잘 산다.
2023-02-08 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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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5> 약에 관한 흔한 오류 정리
이 칼럼을 쓴 지 5년이 넘었다. 내가 쓴 글 덕분인지 알 길이 없지만(딱히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약에 대해 잘못 전해지던 이야기 몇 가지가 바로잡힌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자몽과 약에 대한 설명은 이제 조금 정리되어 간다. 2018년 10월 10일 포도와 약에는 그런 상호작용이 없다고 지적하는 글을 썼다. 아직도 가끔 그런 틀린 설명이 나오는 블로그가 눈에 띄지만 관련기사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다만 아직도 잘못된 설명이 방송에 종종 나온다. 자몽주스를 마시고 두세 시간 띄어서 약 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렇지 않다. 자몽과 약의 상호작용이 있을 경우에는 24~72시간까지 지속되므로 웬만큼 시간 간격을 두어도 상호작용을 피할 수 없다. 혈압약 중에도 펠로디핀 성분의 약처럼 자몽, 자몽주스를 피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행히 모든 약이 자몽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자몽을 너무 좋아해서 꼭 먹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몽과 상호작용이 없는 약으로 바꿀 수 있는지 의사, 약사와 상담하길 권한다.
쿨파스, 핫파스는 냉찜질, 온찜질과 다르다. 냉찜질은 혈관을 수축시키고 붓기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온찜질은 48시간 뒤에 부기가 어느 정도 빠지고 나서 해야 한다. 온찜질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며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파스는 다르다. 쿨파스는 냉감각, 핫파스는 온감각을 자극하지만 실제로 해당 부위를 덥히거나 식히지는 못한다. 쿨파스 속 멘톨이 냉감각을 자극한다고 해도 그 부위의 혈관이 수축하진 않는다. 혈관은 오히려 확장한다. 멘톨 함유 젤을 바르거나 스프레이를 뿌리면 시원한 느낌에 더해 피부가 차가워질 때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젤에 들어있는 알코올이 증발하거나 스프레이가 기화하면서 열을 빼앗기 때문이지 멘톨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얼음팩과 온찜질을 함께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핫앤쿨파스는 존재한다. 이런 파스는 반대자극제이다. 냉온감각을 함께 자극하면 그런 자극으로 인해 뇌가 바빠져서 반대로 통증을 덜 느끼게 된다. 운동하다가 다쳐서 통증이나 부기가 심할 때는 병원에 먼저 가야 한다. 설명이 복잡해서인지 아직도 냉온파스를 냉온찜질처럼 쓰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방송에 자주 나온다. 단순하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틀린 이야기는 빼버리거나 아니면 조금 복잡하더라도 제대로 설명하는 게 낫다.
혈압약과 바나나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한 경우다. 혈압약을 복용 중인 사람은 바나나를 먹으면 안 된다는 설명이 있다. 반대로 혈압약으로 이뇨제가 사용될 경우 바나나를 먹어야 한다는 설명이 있다. ‘일부’라는 수식어를 빼버리면 이렇게 불필요한 혼동을 유발한다. ARB(안지오텐신II 수용체 차단제)라고 불리는 계열 혈압약은 우리 몸에서 칼륨이 빠져나가는 것을 억제한다. 칼륨이 덜 빠져나가니까 칼륨 함유 식품을 너무 많이 먹으면 곤란하다. 바나나, 오렌지와 같은 과일, 대부분의 채소에는 칼륨이 많이 들어있다. 평소 먹던 대로 먹으면 보통 큰 문제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좋다는 방송을 보고 녹즙, 해독주스, ABC 주스를 마시면 혈중 칼륨 수치가 너무 높아져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고혈압 약이 여기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ARB 계열 고혈압약(발사르탄, 텔미사르탄, 칸데사르탄, 로사르탄 등)이 대표적이고 국내에서는 적게 쓰는 ACEI 계열 혈압약도 비슷하다. 이뇨제 중에서도 칼륨을 보존하는 성격을 띄는 것들(스피로노락톤, 에플레레논, 트리암테렌, 아밀로라이드 등)을 복용 중일 때는 칼륨 섭취 과잉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티아지드 계열 이뇨제(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HCTZ), 루프 이뇨제(푸로세미드)를 복용 중일 때는 반대로 칼륨 배출이 늘어나서 체내 칼륨이 부족해질 수 있다. 이럴 때는 칼륨 섭취를 늘리기 위해 매일 바나나 1개 또는 오렌지주스 1잔을 마시는 게 도움이 된다.
방송가는 아직도 중학생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 중학생 수준에 맞춰 얘기해달라는 주문이다. 이야기가 조금만 복잡하면 시청자들이 힘들어한다며 정색한다. 이는 중학생에 대한 모독이다. 어른이 되면 마치 공부 안 해도 창피하지 않은 자격을 얻게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냥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조금 복잡하다고 무시하고 살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공부는 현실이다, 누구에게나.
2023-01-26 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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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4> 소염제와 해열제 어떻게 다른가
소염제와 해열제 중에 뭐가 나을까? 일상에서 이 둘을 용도에 따라 구분해서 써야 할 일은 거의 없다. 해열, 진통을 목적으로 사용할 때 약을 하루에 두 번 또는 세 번, 시간과 회수를 지켜가며 여러 날 꾸준히 복용하는 경우라면 차이가 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보통 병의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통제를 처방받을 때다. 일상에서 가벼운 두통이나 근육통으로 진통제를 찾을 때는 소염제, 해열제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대표적 진통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해열진통제와 해열소염진통제다.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 같은 해열진통제는 열을 가라앉히고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지만 염증에는 효과가 없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입 가능한 해열제는 아세트아미노펜 한 가지다.) 애드빌, 부루펜(이부프로펜), 낙센, 탁센(나프록센)과 같은 해열소염진통제는 해열, 진통에 더해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소염제(NSAID)면 해열진통효과도 있는 거지 염증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다. 보통 용어를 축약해서 해열제, 진통제, 해열진통제, 소염진통제 등으로 이야기하니까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약 성분에 따라 체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달라서 같은 소염진통제여도 지속시간이 6~8시간인 이부프로펜은 하루 3번, 최대 12시간까지 지속되는 나프록센은 하루 2번 복용해야 한다.
가정상비약으로 해열제와 소염제를 용도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로 용량 때문이다. 약국에 이부프로펜은 200mg, 400mg 두 종류가 있다. 보통 하루 400mg으로 세 번을 복용한다. 그러면 하루 복용량은 1200mg이 된다. 이 정도를 복용할 경우에는 염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크지 않다. 이부프로펜을 하루 2400mg 복용하면 항염 작용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정도 용량에서도 해열진통제인 아세트아미노펜과 효과 차이가 크지 않다. 무작위 이중맹검 임상시험으로 아세트아미노펜 4000mg/일, 이부프로펜 저용량 하루 1200mg/일, 이부프로펜 2400mg/일을 4주 동안 복용하도록 하고 무릎 골관절염 증상 완화를 비교한 결과 세 그룹 간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4주라는 기간은 이러한 임상시험 기간으로서는 짧지만 실제 가정에서 이 약을 사용할 때는 해당하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이부프로펜 사용설명서 상에 표시된 기간을 보자. 감기에 복용할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5일, 의사 또는 약사의 지시 없이 통증에 사용하는 기간은 성인 10일, 소아 5일, 발열에는 3일 이상 복용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짧은 기간을 일반적 복용법에 따라 사용할 때 해열제인 아세트아미노펜과 소염제인 이부프로펜이 유의미한 차이를 내긴 어렵다. 예외적으로 생리통(월경통)의 경우에는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같은 소염제가 해열, 진통만 있고 소염 작용이 없는 아세트아미노펜보다 낫다. 생리통을 겪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프로스타글란딘 혈중 수치가 2-4배 정도 높은데 소염제는 이들 염증매개물질이 더 적게 만들어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버틸수록 통증유발물질이 증가한다. 초기에 약을 복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방송에서 자주 보여주는 약에 대한 설명이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에 소염제를 먹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 해열제를 먹어야 할까 용도에 따라 구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복용 방법 상 주의사항과 부작용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게 좋다. 소염진통제는 빈속에 먹으면 속이 쓰리거나 복통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위장관계 부작용은 하루 1200mg을 복용할 경우보다 2400mg을 복용할 때 좀 더 자주 생긴다. 식후에 바로 복용하는 게 제일 좋고 공복일 때는 우유나 요거트라도 함께 먹는 게 낫다. 해열제는 빈속에 먹어도 무방하다. 소염제 복용 뒤에 피부 붉어짐, 두드러기, 안면부종(얼굴 특히 눈이나 입술 주변이 붓는 것) 같은 과민반응이 있었던 사람은 사용을 피해야 한다. 특히 술 마신 다음 날은 이런 부작용이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드물지만 해열제에도 과민반응이 있는 사람이 있다. 신장, 심장 기능이 손상되거나 심부전이 있었던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의 없이 소염진통제 복용을 피해야 한다.
2023-01-12 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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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3> 빈속에 먹는 약 이야기
왜 어떤 약은 빈속에 먹어야 할까? 이유는 약마다 다르다. 어떤 약은 다른 약이나 음식과 함께 먹으면 흡수가 덜 되기 때문에 빈속에 먹어야 한다. 갑상선 호르몬제,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소장은 십이지장, 공장, 회장으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 약물은 소장이 시작되는 부분인 십이지장에서 흡수된다. 하지만 갑상선 호르몬제라고 부르는 레보티록신은 주로 공장(jejunum)에서 흡수된다. 위에서 레보티록신이 흡수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위에 아무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 머무는 동안 위산과 접촉하면서 알약 속 약성분이 녹아나온다. 지난해 이탈리아 연구진은 리뷰논문에서 이렇게 위에서 알약이 붕해되고 약 성분이 용해되는 과정이 갑상선 호르몬제 흡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위의 산도에 영향을 주어 약 성분이 용해되는 것을 방해하고 장에서 갑상선 호르몬이 흡수될 때 경쟁해 약 성분이 덜 흡수되게 할 수 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주로 아침 빈속에 30분~1시간 식전에 복용하도록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약을 먹고 나서 30분~1시간을 기다린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아침 식전 복용이 어려운 사람은 저녁 식후 2시간 간격을 두고 자기 전에 복용해도 효과에 큰 차이가 없다는 2020년 메타분석 연구결과가 있다. 아침 식전 복용이 제일 안정적이지만 그렇게 하기 힘든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의해 복용 시간대를 바꾸는 것도 고려 가능하다. 다만 매일 동일한 시간에 식사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복용해야 약이 흡수되는 정도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칼슘보충제, 철분제와 같은 약은 갑상선 호르몬제와 결합해 흡수를 방해한다. 제산제, 위산억제제(PPI)도 갑상선 호르몬제의 흡수를 저해한다. 이런 약을 복용 중일 때는 갑상선 호르몬제와 최소한 4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복용하는 게 좋다.
어떤 약은 위산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식전에 복용해야 한다. 페니실린 계열의 일부 항생제는 위산과 반응해 약효를 잃어버린다. 이런 약은 위산과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로 할수록 흡수가 잘 된다. 음식과 함께 복용하면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2~3시간으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에 오래 머물면 위산이 약물 분자와 반응해 약효를 잃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프로바이오틱스도 식전에 복용 또는 섭취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위산과 접촉을 막는 코팅 공정을 거쳐 제조한 프로바이오틱스는 식후에 복용해도 별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위산에 취약한 약물이어도 장용정처럼 위에서 녹지 않도록 코팅을 한 경우에는 식후에 복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특수 코팅을 한 알약은 부수거나 갈면 안 된다.
흡수가 잘 안 되는 약은 빈속에 복용해야 그나마 최대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비스포스페이트 계열의 골다공증 약물은 빈속에 먹어도 겨우 1% 정도밖에 흡수되지 않는다. 음식이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흡수율이 더 낮아진다. 알약으로 삼켜서는 아예 흡수가 되지 않는 약도 있다. 덩치가 너무 큰 약물 분자가 그렇다. 아미노산 여러 개가 결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펩타이드는 먹어서는 흡수되지 않으므로 통상 주사하는 방식으로만 투여 가능하다. SNAC(sodium N-(8-[2-hydroxylbenzoyl] amino) caprylate)와 같은 흡수촉진제를 쓰면 덩치 큰 펩타이드 약물이 위장관에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당뇨치료약 세마글루티드는 SNAC와 함께 만든 알약으로 먹어서 복용이 가능하다. SNAC는 위에서 국소적으로 pH를 높여서 약물 흡수를 높이고 위산에 약물 분자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준다. 대신 복용방법은 까다로운 편이다. 아침 식전 30분에 다른 어떤 약보다 앞서 복용해야 한다. 물도 반 잔(120mL)만 마셔야 한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흡수촉진제 성분이 희석돼 약 성분의 흡수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용해도 흡수되는 약 성분은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주사하는 대신 먹을 수 있는 알약이라는 건 커다란 장점이다.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제형, 새로운 성분의 약이 늘어난다. 약사는 역시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다.
2022-12-28 1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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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2> 치매신약 이야기
지난 9월 말 알츠하이머 병 치료제 레카네맙 3상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면서 개발사인 바이오젠 주가가 40% 이상 뛰었다. 18개월 동안 초기 치매환자 1,795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임상시험에서 약을 투여한 쪽이 위약보다 인지기능 저하가 27%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의 효과에 대해 제약회사에서 내세우는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상대위험감소(RRR)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라시보 그룹보다 27% 감소라지만 실제로는 치매 증상을 평가하는 18점 척도에서(CDR-SB) 겨우 0.45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절대위험감소(ARR)로 보면 다소 애매한 수치다. 초기 치매환자는 임상시험에 사용한 척도를 기준으로 1년에 0.5~1.4 정도씩 점수가 낮아진다. 영국 런던대학에서 치매를 연구하는 론 하워드 교수는 1년에 최소한 1점의 차이를 내야 약효가 의미 있다고 본다. 18개월에 0.45점은 임상적으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만한 결과이다.
게다가 2B상 임상시험에서 이미 결과가 편향됐다. 약물을 고용량으로 투여하다보니 치매위험인자인 APOE4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투여군에서만 중도에 탈락했고 그로 인해 위약군은 치매위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71%로 투여군(30%)에 비해 높았다. 이렇게 되면 약효 때문에 차이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양쪽 그룹에 치매위험도에 차이가 있어서 결과가 다르게 나온 건지 알 수가 없다. 12개월에 비해 18개월로 투여 기간이 늘어나자 약효가 줄어드는 듯 보였다는 걸 지적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신약의 효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전문가도 많다. 초기 알츠하이머 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기간을 보통 평균 6년으로 본다. 레카네맙의 효과가 6년 이상 지속된다면 그 기간을 19개월 더 늘릴 수 있다. 아직까지 알츠하이머 병 치료에 효과적인 약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효과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안전성이다.
지난 11월말 뉴 잉글랜드 의학저널(NEJM)에 연구 결과가 실리면서 이번 임상 3상 시험 데이터가 공개됐다. 임상시험에 참여한 사람 2명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개발사인 에자이는 이들 사망자가 레카네맙 때문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밝혔다. 하지만 레카네맙이 작용하는 기전을 살펴보면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레카네맙과 같은 항체치료제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환자의 뇌와 혈관에서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 덩어리를 제거한다. 항체가 이들 단백질에 달라붙으면 인체의 면역체계가 작동하여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쉽게 말해 혈관에 달라붙은 베타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청소되면서 혈관이 약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혈관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뇌출혈이 생기기 쉽다. 이번 임상시험 레카네맙 투여군에서는 13명이 뇌출혈이나 뇌졸중 증상이 나타난데 반해 위약군에서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경우는 2명에 불과했다. 뇌졸중 치료나 예방을 위해 혈전 용해제나 항응고제를 사용할 경우에는 레카네맙 투여시 뇌출혈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내년 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레카네맙을 신약으로 승인하더라도 이 약을 누구에게 사용할 것인가 까다롭게 기준을 정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대단한 성공은 아니다. 하지만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아밀로이드 플라크를 방치해도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질 수 있다. 아밀로이드 단백질에 직접 작용하는 항체 대신 플라크 속 아포지단백 E (ApoE)에 결합하는 항체를 사용하여 단백질 덩어리를 제거하는 항체(HAE-4)도 연구 중이다. 동물실험에선 플라크를 없애면서도 염증으로 뇌가 붓거나 뇌출혈이 생기는 부작용이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알츠하이머 병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되는 타우 단백질이 엉겨 붙는 것을 막는 신약(hydromethylthionine mesylate, HMTM)도 개발 중이다. 이 약은 경구, 즉 먹는 약이라는 점에서 주사제보다 편리하다. 임상 3상 시험에 실패하긴 했으나 위약으로 사용한 물질(메틸렌 블루)에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개발사측 설명도 일리 있다. 과학은 이렇게 실패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2022-12-16 1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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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1> 약을 안전하게 쓰는 법
약으로 인해 사고가 날 때가 있다. 원인은 다양하다. 효과 없는 약을 잘못 사용하거나 약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약을 과용하거나 반대로 너무 적은 양을 쓰거나 또는 약과 약의 상호작용 때문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의사, 약사, 간호사, 환자 모두 사람이니 실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약과 관련된 실수는 치명적이다. 의료진이 실수하지 않도록 체계를 잘 만들고 운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근에는 약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환자의 능동적 참여도 강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환자참여를 중요시한다. 환자가 그저 주는 대로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일 게 아니라 의사, 약사와 함께 팀을 이룬 것처럼 적극적으로 치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올 때도 간단한 확인 절차를 통해 약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우선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확인해야 할 이름은 두 가지다. 처방전과 조제된 약이 자신의 것이 맞는지 체크하고 처방전에 기록돼 있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도 자신의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생각보다 동명이인이 많다. 두 번째로 자신이 받은 약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 두는 게 중요하다. 특히 부작용이나 알레르기를 경험했을 때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어떠한 약성분이 원인이 됐는지를 꼭 확인하여 이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때 구체적으로 어떤 부작용이나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는지 함께 기억해두면 좋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도 자신이 알레르기나 부작용을 경험한 약 이름은 평생 기억해두는 걸 습관으로 하길 권한다. 상품명이 성분명보다 더 기억하기 쉽다. 암기하기 어려울 때는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좋다.
약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상호작용 위험도 커진다. 같은 약이 중복 처방되는 경우를 DUR 시스템으로 거르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모든 약이 처방약은 아니다. 처방약과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한 일반약이 중복될 수도 있다. 약사라고 내가 집에 어떤 가정상비약을 두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 자신이 복용중인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약의 상호작용이나 부작용, 그리고 중복 투약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단골 약국 한 곳에서 '약력(藥歷) 관리'를 받는 것도 좋다. 약력이란 내가 사용 중인 약의 전체 리스트를 말한다. 현재 의료체계상 의사, 약사라도 내가 어떤 약을 복용 중인지 전체 리스트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본인이 복용 중인 처방약(또는 처방전), 일반약(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 가능한 약), 건강기능식품을 한 곳에 모아두고 사진을 찍어두면 유용하다. 캐나다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약들을 약국에 가져가서 약사와 환자가 함께 리뷰하면서 혹시 모르고 있는 약과 관련한 문제들이 있는지 점검하는 서비스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주기도 한다. 2019년 네덜란드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약 관련 문제를 한 건 찾아낼 때 무려 1100만원(8270유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약사와 환자의 만남을 두 전문가의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약사는 약의 전문가이고 환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문가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는 본인이 제일 많이 알고 있다. 환자 본인이 그런 개인 정보를 의료진과 공유하고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알약의 색깔이나 이름이 바뀌었을 때 의도적인 것인지 실수인지 환자가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질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말자. 의사나 약사가 질문을 기피하는 경우에는 더 좋은 병의원이나 약국을 찾아가자. 미래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길이다.
약의 올바른 복용방법과 부작용을 알아두는 것도 환자 스스로 챙겨야 할 몫이다. 아무리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도 약의 실제 사용자인 환자가 그걸 기억못하면 소용이 없다. 약의 보관방법과 사용기한에 대해서도 잘 알아둬야 한다.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게 약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2-11-24 2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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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20> 혈압 측정이 중요한 이유
겨울이 오고 있다.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집에서 혈압을 체크해보는 것이다. 가정용 혈압계가 아직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비용을 절약해서라도 하나 구입하는 게 좋다. 나에게 고혈압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혈압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008년 분당서울대병원 연구 결과 노인 고혈압 환자 33.9%는 자신이 고혈압인 줄 모르고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미국 연구 결과도 이와 비슷하여 성인 35.3%가 자신이 고혈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한고혈압학회에 따르면 40~49세 성인이 자신이 고혈압인줄 아는 비율은 44.8%에 불과하다. 이삼십대 환자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고혈압인 줄 아는 사람 비율이 17.4%밖에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혈압이 상승한다. 수축기 혈압이 20 mmHg, 확장기 혈압이 10 mmHg 올라갈 때마다 심장병, 뇌졸중 위험이 두 배로 높아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 있다. 고혈압을 방치하면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치매 위험이 높아진다. 신장에도 부담을 주어 신장 기능이 저하되고 신장병을 앓게 될 위험이 커진다. 혈관 내피에 지나친 압력이 가해지면 미세한 손상이 생긴다. 손상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으면서 지방, 콜레스테롤, 칼슘이 쌓여 플라크가 만들어진다. 이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고 혈압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면 좁아진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기 십상이다. 2015년 독일 연구에 따르면 24시간 동안 기온이 2.9°C 내려가면 뇌졸중 위험이 11% 높아진다.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은 사람의 경우는 무려 30%가 높아진다.
불행히도 증상으로는 자신이 고혈압인지 알 수 없다. 고혈압이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러니 응급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신의 혈압을 정기적으로 체크하는 것이다. 혈압에 쓰이는 용어는 알고 보면 쉽다. 흔히 수축기 혈압은 위쪽 혈압, 확장기 혈압은 아래쪽 혈압이라고 부른다. 위쪽 혈압이 더 중요하다. 2021년 미국심장협회지에 실린 성인 107,599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위쪽 혈압이 심장병 사건이나 사망 위험을 예측하는데 더 중요한 지표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쪽 혈압은 50세 미만일 경우에 추가적 의미가 있다. mmHg는 수은 밀리미터라고 읽는데 과거에 수은을 이용한 혈압계를 사용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단위이다. 요즘에는 환경 문제로 인해 수은 혈압계를 사용하지 말도록 권장한다.
집에서 혈압을 재면 병의원에서보다 5에서 10 정도 낮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를 보면 긴장하여 혈압이 높게 나오기 때문인데 이를 가리켜 백의(white coat) 고혈압이라고 부른다. 음식을 먹거나 커피나 술을 마신 뒤, 운동 직후에도 혈압이 높게 나온다. 흡연도 마찬가지다. 이런 활동 뒤에는 최소한 30분 또는 1시간 뒤에 혈압을 측정해야 한다. 다리를 꼬고 앉거나 팔을 탁자에 받치지 않고 늘어뜨려도 혈압이 높게 측정될 수 있다. 편안한 의자에 등을 받치고 양발은 바닥에 평평하게 대고 앉아서 5분 정도 기다렸다가 혈압을 재는 게 좋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혈압을 재기 전에 다녀와야 측정에 영향이 없다. 혈압을 재는 도중에는 조용히 있자. 말하면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 커프가 너무 느슨하거나 꽉 조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끔 양팔 혈압을 모두 재어 보는 것도 좋다. 2020년 연구 결과 양팔 측정치가 10 mmHg 이상 차이가 나면 사망 위험이 10%까지 더 높아질 수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양팔 혈압 측정치가 다를수록 동맥 혈관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혈압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니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측정하는 게 좋다. 1-2분 간격을 두어 두 번 이상 측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집에서 혈압을 쟀는데 고혈압이 의심된다고 해서 자가 진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가까운 병의원에 방문하여 상담 뒤에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2022-11-11 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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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9> 왜 졸린가
약이 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실제로 독성이나 부작용이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통 졸음을 유발하는 약을 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어떤 약은 먹어도 졸리지 않은데 어떤 약은 복용하고 나면 졸린 걸까? 약성분이 뇌로 들어가서 진정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체가 뇌로 모든 약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뇌는 혈관뇌장벽(Blood-brain barrier)라는 보호장치로 둘러싸여있다. 혈액 속에 약물 분자가 있다고 해도 뇌 속으로 전부 들어가지는 못한다. 혈관뇌장벽에 의해 투과성이 선택적으로 제한된다. 이런 식으로 관문을 통해 필요한 것들만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걸러내는 방식으로 뇌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뇌의 에너지원이 되는 포도당은 받아들이고 고분자 물질은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세균이나 독성 물질은 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뇌 손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약이라고 특별대우를 받지 못한다. 약물 분자도 혈관뇌장벽을 통과하지 못하면 뇌 바깥의 혈관을 타고 나머지 조직이나 장기에서만 작용한다.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이어도 중추신경계에서 졸음을 유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혈관뇌장벽 때문이다. 감기나 알레르기비염에 자주 사용되는 항히스타민제가 대표적이다. 1세대 항히스타민제로 감기약에 주로 쓰이는 클로르페니라민, 트리프롤리딘 같은 약성분은 혈관뇌장벽을 통과한다. 그래서 졸음을 유발한다. 로라타딘(클라리틴) 같은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혈관뇌장벽을 잘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간은 통과할 수 있어서 사람에 따라 졸음 부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다. 3세대 항히스타민제로 불리는 펙소페나딘(알레그라)은 혈관뇌장벽을 전혀 통과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는 약을 복용한 사람과 위약(플라시보)을 복용한 사람에게서 졸음, 진정 부작용을 경험하는 빈도에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체로 분자 크기가 작고 지방에 잘 녹는 약물일수록 혈관뇌장벽을 통과하여 뇌 속으로 전달되기 쉽다. 반면 덩치가 큰 분자나 물에 잘 녹는 약물은 통과하기 어렵다. 같은 항히스타민제여도 3세대 약물은 뇌혈관장벽을 통과하지 못하고 1세대 약물은 잘 통과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감기약에 사용되는 1세대 항히스타민제가 독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혈관뇌장벽을 통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MSG(monosodium glutamate)는 혈관뇌장벽을 거의 통과하지 못한다. 인체가 만들지 못하는 필수아미노산은 뇌로 들여온다. 하지만 글루탐산은 뇌에서 만들어 쓸 수 있다. 굳이 혈관뇌장벽을 통과시켜 들여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1968년 뉴 잉글랜드 의학 저널(NEJM)에 중국계 이민자 의사인 로버트 호 만 쿽이 짧은 레터로 의문을 제기한 이후 지난 50여 년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연구했다. 이때부터 중국음식증후군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결론은 명확하다.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정도의 글루탐산으로는 뇌 속의 글루탐산 레벨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
1970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에서는 11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루에 131에서 147g까지 MSG를 섭취하도록 했다. 조미료 범벅인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섭취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MSG를 매일 같이 14일~24일 동안 먹고 나서도 아무도 건강상 이상이나 중국음식증후군 증상을 경험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조미료를 쓰면 수지타산도 안 맞겠지만 쓴다고 좋아할 손님도 없다. MSG는 설탕과 달라서 너무 많은 양을 쓰면 불쾌하게 여길 수 있다. 미국 피츠버그 의대 존 펜스트롬 교수는 그런 이유로 실제 일상에서 섭취하게 되는 MSG의 양은 한정적이라고 지적한다. 펜스트롬 교수는 2018년 리뷰 논문에서 일상식으로 섭취하게 되는 MSG가 뇌 속 글루탐산 농도를 상승시키거나 뇌 기능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뇌 속으로 들어가서 뇌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졸음을 유발하기는 어렵다.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고 졸리면 그건 조미료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식곤증이란 얘기다.
2022-10-27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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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8> 사람만 통풍에 걸리는 이유
사람은 왜 통풍에 취약한가? 요산을 대사하는 효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을 포함한 일부 영장류는 요산을 알란토인으로 대사하는 효소를 만들 수 없다. 유전자가 있기는 한데 기능을 잃어버린 위유전자(pseudogene)이다. 알란토인은 요산보다 소변에 10~100배 더 잘 녹는다. 요산을 알란토인으로 대사하는 효소(uricase)를 가지고 있는 다른 동물에게는 통풍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이런 중요한 효소를 잃어버렸을까? 아직 정확한 답은 모른다.
일부에서는 영장류가 비타민C를 합성하는 능력을 상실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요산을 축적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추측한다. 요산은 인체 내에서 강력한 항산화물질로 작용할 수 있으니 비타민C를 못 만들어서 부족한 부분을 요산으로 채우는 방향으로 한 게 아니냐는 거다. 하지만 2021년 <분자 생물학과 진화> 학회지에 실린 미국 연구팀의 논문에서는 비타민C 합성 능력 상실과 요산 대사 효소 상실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비타민C가 모자란 부분을 요산으로 채우려고 했다는 것은 가설일 뿐 신빙성이 낮다는 것이다.
반대로 비타민C를 섭취하면 통풍 위험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미국임상영양학회지에 2022년 5월 실린 연구 결과 하루 비타민C를 500mg 섭취하는 사람은 통풍으로 진단 받을 가능성이 12% 줄어들었다. 이런 효과는 체질량지수(BMI)가 25 미만인 정상체중인 사람에게서 두드러졌다. 이 연구는 미국 남성 의사 14,641명을 대상으로 한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인과 관계를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통풍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인데다가 다른 연구에서도 이미 통풍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서는 비타민C에 별 효과가 없다는 쪽 결과가 다수이다. 비타민C 보충제를 통풍환자에게 권장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또 다른 가설은 인체가 요산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게 산화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요산이 인체를 보호하기 위한 물질이라는 설명이다. 통풍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물 실험 연구 결과를 놓고 보면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다. 2018년 발표된 연구 결과, 요산분해효소가 작동하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암컷 생쥐의 수명이 정상 생쥐보다 연장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2020년 발표된 다른 연구에서는 요산이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의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불행히도 이러한 동물 실험 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힘들다. 요산은 양날 선 검이다. 인체 내에서 항산화제로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산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사람에게서 혈중 요산수치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고혈압, 내장 비만, 인슐린 저항성, 이상지질혈증 위험이 높아지는 것과 연관된다. 2022년 8월에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 실린 연구 결과 급성 통풍 발작이 있고 나서 뇌졸중, 심근경색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을 겪을 위험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풍 발작 직후 60일 이내에 이러한 심혈관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통풍 발작이 없었던 사람에 비해 거의 두 배 정도로 높았다. 요산이 인체 내에서 어느 정도까지 항산화물질로 작용하든 간에 그 효과가 산화적 스트레스가 높아진 상황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요산분해효소를 잃어버린 게 과당을 섭취하면 지방으로 대사, 축적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다. 과일로 먹는 거야 무방하지만 음료로 액상과당을 과잉섭취하는 것은 통풍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인체에서는 만들 수 없는 요산분해효소를 투입하면 통풍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런 취지로 만든 약이 있다. 유전자재조합 기술로 돼지와 개코원숭이의 요산분해효소를 변형하여 만든 약(Pegloticase)이다. 하지만 고가인데다가 면역 반응이나 부작용 문제로 잘 쓰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사람이 아주 오래 전 상실한 효소를 되살려 약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용되는 약과 생활습관 조정으로도 통풍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다. 과음, 비만, 과체중은 모두 산화적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인체가 요산을 더 많이 만들도록 방치하지 말자. 체중 조절, 금연, 운동, 식이 조절로 혈중 요산 수치를 10~18%까지 낮출 수 있다. 비록 통풍을 완치할 수는 없지만 잘 관리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걸 기억하자.
2022-10-13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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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7> 항산화제 이야기
세상에는 선악을 가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항산화제는 건강에 좋은가 나쁜가? 그때그때 다르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난 뒤에 항산화제를 섭취하는 것은 운동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
운동을 하면 인체가 에너지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활성산소종이 생겨난다. 산소가 쇠를 녹슬게 하듯 우리 몸의 노화를 촉진한다는 바로 그 산화물질이다. 그러니 운동을 하고 나서 비타민C, 비타민E 같은 항산화제를 섭취하면 몸에 활성산소종이 끼치는 영향을 줄여 건강에 더 유익할 것만 같다. 운동 뒤에 항산화제가 근육 통증을 줄이고 빠른 회복을 돕는다는 생각에 운동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항산화제를 삼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2017년 코크란 리뷰에서 50건의 연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내놓은 결론이다. 운동 뒤에 항산화제를 보충해줘도 근육통이 특별히 더 빨리 줄어들지 않는다. 운동 뒤 6시간이 지나도 그렇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14년 노르웨이 연구팀이 54명의 젊은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항산화제가 운동 효과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쪽은 비타민 C 1,000mg, 비타민 E 235mg을 주고 다른 한쪽에는 플라시보를 주어 비교한 결과이다. 일주일에 3~4회 고강도 운동 프로그램을 11주 동안 계속한 뒤에 보니 세포의 발전소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의 생성과 관련된 지표가 플라시보 그룹 쪽에서 더 분명하게 증가한 것이다. 반대로 항산화제를 운동 뒤에 섭취한 쪽 참가자에게서는 증가가 덜 나타났다.
적포도주 속 항산화물질로 잘 알려진 레스베라트롤을 섭취한 경우에도 결과가 비슷했다. 2013년 덴마크 연구팀은 27명의 60대 남성을 대상으로 한쪽에는 레스베라트롤 250mg, 다른 한쪽에는 가짜약을 주고 2개월의 운동 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했다. 운동은 확실히 건강에 유익했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나 동맥 혈압과 같은 심혈관계 건강 지표가 향상됐다. 하지만 운동하면서 가짜약을 먹은 플라시보 그룹에 비해 레스베라트롤 투여 그룹은 그 효과가 떨어지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운동을 한 뒤에 생겨나는 활성산소종을 절대악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다. 하지만 활성산소종은 절대악이 아니다. 인체에 침입한 세균과 바이러스를 제거할 때도 사용되고 손상된 인체 세포의 복구를 위한 신호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운동은 근육을 미세하게 손상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인체에 부담을 주는 과도한 운동은 해로울 수 있다.) 하지만 손상된 근육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근육이 더 튼튼해지며 인체는 더 건강해진다. 운동 뒤에 항산화제를 고용량으로 섭취하면 이런 복구과정을 이끄는 신호가 약해져서 운동의 건강 증진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그렇다고 항산화제를 섭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섣부르다. 한 가지 항산화제를 너무 고용량으로 섭취하지 않는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항산화물질은 어디에나 있다. 채소, 과일에 풍부하고 커피에도 많이 들어있다. 채소를 많이 먹지 않는 사람의 경우 하루 섭취하는 항산화물질의 절반 이상이 커피에서 온다. 커피 한 잔에는 200~550mg의 항산화물질이 들어있다. 음식, 음료 속의 항산화물질은 다양하다. 음식을 하나의 성분처럼 여기는 환원주의를 피해 골고루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면 된다. 염증을 줄이고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당뇨치료제 메트포르민의 경우에도 운동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작용기전상 추측이 가능한 결과이다. 메트포르민은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나는 세포호흡을 줄인다.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대사 반응이 제한되니까 인체 세포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더 활성화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메트포르민이 암 예방이나 수명 연장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운동을 할 때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를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건강이 향상되는 효과는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뇨병 환자들이 메트포르민을 중단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는 아니지만 장수에 도움이 될까 봐 메트포르민을 복용 중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다. 약에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유익을 최대로 하고 해를 최소로 줄이는 용량과 용법이 있을 뿐이다.
2022-09-29 1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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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6> 운동해도 살빠지지 않는이유
수렵 채집인과 도시인의 하루 소비 칼로리는 얼마나 다른가? 별 차이가 없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북부 초원 지대에서 평균적으로 하루 14km를 걷는 하드자족 남성과 산업화된 국가에 사는 성인 남성의 에너지 소비량은 동일하다. 체중이 같다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매일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든, 도심의 빌딩 숲에서 거의 대부분을 앉아서 생활하든 일일 소비 칼로리가 같다는 이야기다. 미국 듀크대학교의 인류학자 허먼 폰처가 10년에 걸쳐 여러 차례 하드자족 야영지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연구한 결과이다.
폰처의 연구 결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하루 3000kcal를 소비하면서 운동은 거의 하지 않던 성인이 하루 500kcal를 운동으로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칼로리 소모가 늘어난 만큼 살이 빠져야 맞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몸은 마치 하루 일정한 금액만 생활비로 지출하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안 하던 운동에 하루 500kcal를 소비하면 나머지 2500kcal을 가지고 어떻게든 맞춰 생활한다. 제한된 일일 에너지 소비량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온혈동물에게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쥐를 계속 빈둥거리도록 하거나 또는 쳇바퀴를 주어 돌리면서 활동량을 늘려도 에너지 소비량은 처음에만 조금 증가할 뿐 일정하게 유지된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운동을 해도 에너지소비량이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체중이 조금 줄어들 수 있지만 인체는 곧 운동에 소모한 열량에 맞춰 다른 항목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인다. 그러므로 운동으로는 살을 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운동이 건강에 유익한 이유가 된다. 운동으로 열량을 소비하는 만큼 다른 활동에 사용할 에너지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에너지 예산이 줄어들면 생명 유지에 필수적 활동에 우선순위를 두고 쓰게 된다. 그러니 우선순위가 낮은 일에는 에너지 소비가 줄어든다. 염증에 쓸 에너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규칙적 운동이 만성 염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유다. 반대로 과식으로 칼로리가 남아돌 때는 체중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염증도 증가한다. 같은 맥락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도 덜 민감해진다. 운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스트레스에 반응할 에너지가 넘쳐나지만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에 더 적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하루 제한된 에너지를 용돈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운동에 적당량을 써서 몸이 나머지 칼로리를 아껴 쓰도록 만들 때 건강에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경우에는 생명에 필수적 활동에도 사용할 에너지가 모자라서 건강에 도리어 해로울 수도 있다. 2022년 2월 아일랜드 연구팀의 메타분석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삼 분 걷는 정도로도 충분히 유익하다. 식후 60~90분 내에 2~5분 정도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도 혈당치를 개선하는 데 유의할만한 효과가 나타났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피트니스센터에 가지 않아도 된다. 평소에 몸을 좀 더 자주 움직여서 소비 칼로리를 늘려주는 정도로도 건강에 충분히 유익하다.
물론 운동이 다는 아니다. 현대인의 식생활이 원시인과 달라져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은 흔하다. 폰처는 원시인의 식단이 저탄고지라고 주장하는 자칭 전문가에 대해 개탄한다. 모를수록 더 용감하다는 것이다. 식물성 식품은 화석으로 잘 남지 않는 경향이 있고 20세기 초 인류학이 여성이 기여한 식품 공급량을 과소평가했기에 생긴 오해일 뿐, 수렵채집인의 식탁은 저탄고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폰처의 설명이다. 현존하는 수렵채집인 인구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하드자족, 치마네족, 슈아르족의 매일 섭취 칼로리에서 65% 이상이 탄수화물이라는 그의 지적은 저탄고지에 흔들린 사람이라면 눈여겨볼 만하다. 본래 인간은 구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는 잡식동물이지 탄수화물과 지방의 비율을 생각하며 먹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폰처는 자신의 방대한 연구 결과를 모아 2021년 <운동의 역설>이란 책을 냈다. 2022년 7월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칼로리, 체중, 운동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2022-09-14 1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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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5> 알츠하이머 논문조작 논란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론이 가능한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 이론이나 그 이론으로 풀려는 문제를 잘 모른다는 신호로 여겨야 한다.” 알츠하이머 연구에 딱 맞는 말이다. 그동안 아밀로이드 베타 플라크가 치매의 원인이라는 가설은 치매 연구에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1906년 독일의 정신과의사이며 신경해부학자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기억 상실, 인지장애와 치매 증상을 겪은 사망자를 부검하여 뇌에서 단백질 덩어리를 발견했다. 전체 치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알츠하이머 병은 최초 발견자인 알츠하이머 박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과학자들은 아밀로이드 베타라고 불리는 끈끈한 단백질이 뭉쳐서 플라크(plaque)를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밀로이드 베타 플라크가 염증을 유발하여 신경세포의 오작동을 유발하고 종국에는 신경세포를 죽여 치매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제까지 가장 유력해 보이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지난 7월 21일 사이언스지에 실린 기사가 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2006년에 발표되어 2,300회 이상 인용된 중요 연구논문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논문에 실린 이미지가 복사-붙여넣기 방식으로 조작된 걸로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해당 논문뿐만 아니라 후속 논문에서도 비슷하게 수상한 점이 보이고 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며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 하지만 이번 의혹 제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2006년 논문이 실린 학술지는 <네이처>이다. 의혹 제기 기사는 <네이처>의 유력한 경쟁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2006년 연구를 주도한 실뱅 레스네와 캐런 애쉬는 이후 명성을 얻으며 저명한 연구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연구에 의혹을 제기한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매튜 슈레그 교수는 공매도 투자자의 변호인에게 의뢰를 받아서 레스네와 애쉬의 연구논문을 분석했다. 공매도 투자자 두 명도 저명한 신경과학자이다. 이들은 처음에 카사바 사이언스라는 미국의 바이오기업이 신약으로 개발 중인 시무필람(simufilam)이란 물질과 관련한 연구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하여 조사를 의뢰했다. 그런데 그걸 파헤치는 과정에서 16년 전 화제가 되었던 주요 연구논문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스토리이다.
학계에서는 자성하는 목소리가 크다. Aβ*56 (아밀로이드베타 스타 56 또는 에이베타 스타56으로 읽는다)라는 단백질이 알츠하이머 병의 원인이라는 논문 내용은 당시 아밀로이드 베타 가설이 흔들리고 있던 상황에서 가설을 옹호하는 쪽에 힘을 실어줬다. 이 연구논문이 아니어도 아밀로이드 베타 연구의 큰 축이 흔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학계에는 “Publish or Perish”라는 말이 있다. 논문을 출판하거나 아니면 멸망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다. (주요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하거나 아니면 망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며 자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렇지만 학술지에는 대중매체와 비슷한 속성이 있다. 실패한 연구결과는 관심 밖이고 그래서 잘 싣지 않는다. 과학자들도 사람이어서 저명한 연구자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레스네가 발견했다는 Aβ*56를 재현한 과학자는 없었다. 하지만 Aβ*56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연구논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학자인 데니스 셀코의 2008년 논문 두 건이 고작이다.
과학자들도 사람이다.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은 그런 오류를 걸러낸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네이처> 같은 저명한 학술지에 실린 연구논문도 조작될 수 있다면 수많은 다른 학술지는 이런 조작에 얼마나 취약할 것이란 말인가. 다행히 요즘은 Pubpeer처럼 출판된 연구논문에 대해 토론하고 검토하여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 놀라운 발견과 스타연구자에게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팩트체크를 하는 과학자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2022-08-25 2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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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4> 팍스로비드 리바운드 이야기
팍스로비드 리바운드가 화제로 떠올랐다. 지난 7월 3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에 다시 확진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무증상이지만 검사 결과 코로나19 양성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앞서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도 팍스로비드 치료를 받고 나서 재확진이 된 바 있다.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까지 재확진되면서 팍스로비드 치료 효과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다.
팍스로비드 치료를 받고 난 뒤에 재확진이 되었다고 해서 바이든이 다시 새로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변이에 감염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활동을 멈췄던 일부 바이러스가 다시 증식을 재개하면서 재확진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평생 바이러스 연구에 전념한 의사이며 바이러스 학자인 데이비드 호 박사는 자신이 코로나19에 걸린 것을 기회로 삼아 이를 조사했다. 팍스로비드 투약 기간 중에 바이러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변하는지 매일 검사해본 것이다. 69세인 호 박사는 팍스로비드 처방 대상자였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바로 다음날부터 팍스로비드 복용을 시작했다. 2일차에는 PCR 검사 결과 양성이 나타났지만 4일부터 9일까지는 신속항원검사 결과 음성이었고 5일차, 7일차 PCR 검사도 음성이었다. 그러다가 10일째 다시 가벼운 코로나19 증상(두통, 콧물, 기침)이 나타나고 집에서 신속항원검사로 양성이 나왔다. 이어진 PCR 검사로도 양성이었다. 하지만 유전자 시퀀싱으로 비교 결과 그가 새로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아니었다. 바이러스가 변이하여 약에 저항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낫고 나서 다른 변이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전 감염이 팍스로비드 투약으로도 완전히 낫지 않고 있다가 재발한 것으로 봐야 맞다는 것이다.
호 박사는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팍스로비드 리바운드를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자신을 포함해 10명의 리바운드 경험자를 대상으로 쓴 연구논문은 아직 프리프린트 단계로 공개된 상태이다. 제조사인 화이자에서는 이런 재발을 경험하는 사람이 전체 투여 환자의 1-2%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그보다는 훨씬 높게 나타난다고 보는 전문가 의견이 많다. 10-15%까지 달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팍스로비드 리바운드는 왜 일어날까? 정확한 기전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와있는 연구 자료를 보면 약효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일부 바이러스가 약으로 인해 증식하기 어려워진 상태에서 활동을 정지하고 있다가 약 복용을 중단하는 시점에 다시 활동을 재개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두고 팍스로비드 투여 기간을 늘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검사결과가 다시 양성이 된다고 해서 증상이 심하거나 치명적인 것은 아니어서 치료기간은 그대로 5일을 유지해도 된다는 의견이 아직 대다수이다. 다만 검사에서 다시 양성이 나오는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자가격리를 해야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호 박사의 케이스 리포트에서도 재확진 기간 동안에 가족에게 바이러스가 옮은 사례가 두 명 있었다.
간혹 재확진이 된다고 하여 팍스로비드로 치료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증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이 백신에 접종하지 않은 상태로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약물 치료는 입원 및 사망 위험을 크게 낮춘다. 반면에 건강하며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의 경우에 팍스로비드를 투여한다고 얻는 이득은 크지 않다.
과학은 진보한다.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현대의학도 그와 함께 변한다. 코로나19의 예방과 치료에 대한 지식도 지난 2년 반 동안 크게 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모든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는 게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돌팔이 유사의학이다. 1976년부터 2022년까지 무려 46년 동안 뉴욕타임스 건강 칼럼을 쓴 제인 E. 브로디는 독자에게 작별 인사하며 마지막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머리에 새겨두고 싶은 명언이다.
2022-08-11 1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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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3> 왜 남자가 단명하는가
남자가 나이 들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머리털과 근육만이 아니다. Y염색체도 잃어버린다. 남성의 노화가 진행되면서 일부 체세포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다. 남성은 여성보다 기대수명이 짧다. 세계적으로 남성의 기대수명이 여성보다 5년 짧다. 한국인의 경우 2020년 남성의 기대수명은 80.5세로 남성의 86.5세에 비해 6년이 짧다. 이런 기대 수명의 차이는 흡연, 음주, 위험 추구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행태 차이보다는 염색체가 더 큰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과학자들은 남성의 노화과정에서 Y염색체가 사라지는 현상이 남성이 여성보다 단명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Y염색체가 사라지는 현상은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됐다. 인간의 혈중 백혈구 수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백혈구에 Y염색체가 없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다. 원래 사람의 체세포에는 염색체가 23쌍으로 모두 46개 들어있다. 이 중 성염색체는 여성의 경우 XX, 남성의 경우 XY로 들어있다. 그런데 일부 남성의 백혈구에서는 Y염색체가 사라지고 없어서 염색체가 45개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적혈구, 혈소판에는 핵이 없으며 따라서 염색체도 없다. 미토콘드리아에만 염색체가 관찰된다.) 이런 현상은 모든 체세포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백혈구를 검사하면 확인이 제일 쉽다. 2019년 영국 연구 결과, 70세가 되면 남성의 43.6%에서 일부 혈액세포 중 Y염색체가 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93세가 되면 남성의 57%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 혈액세포가 관찰된다. 일부 노인 남성의 경우 세포의 80%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다. 비유하자면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책들을 복사하는데 Y염색체 책은 빼놓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다.
Y염색체가 사라지는 것과 남성의 노화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는 연구는 전에도 많았다. 2020년 호주 연구팀은 229종의 생물을 대상으로 성 염색체를 조사하여 수컷보다 암컷이 평균적으로 17.6%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2022년 7월 14일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는 남성이 Y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리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생쥐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골수세포에서 Y염색체를 제거했다. 실험군 생쥐 38마리에게는 골수를 제거한 뒤 Y염색체를 제거한 골수세포를 이식했고 대조군 생쥐 37마리에게는 Y염색체가 그대로 들어있는 골수세포를 이식했다. (백혈구는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Y염색체가 사라진 골수세포를 이식한 생쥐의 백혈구 모두에게서 Y염색체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다수에서 사라졌다. 백혈구 세포 중에 Y염색체가 안 보이는 것들이 49~81%였다. 인간 남성이 노화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생쥐 실험을 통해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험 결과 백혈구에서 Y염색체가 사라진 생쥐는 단명했다. 골수 이식 600일 뒤에 대조군 생쥐의 60%가 살아남았지만 Y염색체가 일부 사라진 생쥐 쪽은 겨우 40%만 생존했다. 심장 근육의 수축력에서도 차이가 컸다. 15개월 뒤에 심근 수축력을 비교해보니 Y염색체가 소실된 생쥐의 경우 20% 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심장근육에 질긴 결합조직이 쌓이는 섬유화증이 Y염색체를 소실한 생쥐에 나타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2009년 영국 연구에서 인간 남성의 경우 나이 들면서 심장의 펌프 기능이 젊었을 때보다 20-25% 줄어들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70대에도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 동물 실험 결과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인간 남성의 심장이 노화에 더 민감한 것도 Y염색체 소실 때문일지 모른다.
Y염색체 소실 때문에 암, 심장병, 사망률이 증가하는 것인가 아직 확실치는 않다. 이번 실험에서도 Y염색체를 소실한 생쥐의 심장에 나타난 변화가 치명적인 정도는 아니었다는 반론이 있다. 더 장기적인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Y염색체 소실이 남성의 건강에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남성의 Y염색체 소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딱 하나 금연뿐이다. 흡연하면 Y염색체가 사라진 혈액세포가 나타날 가능성이 비흡연자보다 최대 네 배 크다. 금연하자.
2022-07-27 2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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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12>자외선차단제 이야기
오늘 날이 흐리다. 바깥에 나가는데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야 할까. 오늘의 자외선 지수를 검색하면 내가 있는 지역의 자외선 지수를 확인할 수 있다. 여름에는 자외선 지수가 매우 높음 또는 위험인 날이 많다. 날씨가 흐린 날은 보통 단계로 낮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외선 차단에 유의해야 한다. 2-3시간 노출 시 피부화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름은 자외선을 모두 막아내진 못한다. 자동차 유리창은 UVB는 차단할 수 있지만 UVA는 투과시킨다. UVA는 피부노화의 주범이다. 28년 동안 트럭을 몬 운전사의 한쪽 뺨이 두껍고 주름지도록 변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12년 4월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이 분 사진이 실린 이후 이 트럭 운전사는 여름이면 매년 호출된다.
옷도 마찬가지다. 옷으로 가려주는 게 햇볕 노출보다는 낫다. 긴 소매 옷을 입는 게 자외선 차단에 좋은 이유다. 하지만 옷으로 자외선을 모두 차단할 수는 없다. 옷감에 따라 자외선을 흡수, 차단하는 정도가 다르다. 2010년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 리뷰 논문에 의하면 폴리에스터나 울이 면, 아마실, 레이온보다 자외선 흡수력이 더 좋다. 하지만 여름에 폴리에스터나 울로 만든 옷을 입으면 열이 잘 방출되지 않아서 더울 수 있다. 연구진은 폴리에스터를 다른 섬유와 혼방하면 그런 단점을 보완하면서 자외선 차단 효과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
삼베, 모시, 성긴 면으로 만든 옷은 공기가 잘 통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햇빛도 더 잘 통과시킨다. 자외선 차단이 더 잘되는 촘촘하게 짜인 원단으로 만든 얇은 옷을 안에 하나 더 입으면 도움이 된다. 흰옷이 자외선을 반사하니까 좋을 거라고? 그렇지 않다. 색이 진한 파랑, 검정색 옷이 자외선 흡수를 더 잘하여 차단 효과가 크다. 대신 적외선도 잘 흡수하니까 더 덥게 느껴진다는 문제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원단이 두꺼우면 얇은 옷보다 자외선 차단이 잘 되지만 더위를 이겨내기 힘들다. 여러 번 세탁한 옷은 탈색으로 자외선 흡수가 덜 될 수 있지만 대신 옷이 줄어들면서 섬유가 더 촘촘하게 되어 자외선 차단이 나을 수도 있다. 세제 속에 들어있는 형광 증백제 성분도 자외선을 흡수하여 차단에 도움이 된다. 옷이 물에 젖으면 옷감이 빛을 산란시키지 못하여 자외선 차단 효과가 떨어진다. 물놀이할 때 티셔츠를 입어도 일광화상을 막을 수 없는 이유다.
옷은 입으면 즉시, 그리고 입고 있는 동안 자외선을 차단해주며 UVA, UVB를 모두 차단해주는 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모자도 그렇다. 하지만 자외선 차단제는 외출 30분 전에 발라줘야 하고 2시간마다 다시 발라줘야 한다. 제품에 따라 UVB는 차단효과가 좋은데 UVA 차단은 약한 경우도 있어서 선택에 주의가 필요하다. UVB는 SPF(Sun Protection Factor) 수치가 높을수록, UVA는 PA(Protection grade of UVA) 다음에 +가 여러 개 붙을수록 차단율이 더 좋다. 전에는 SPF를 시간으로 환산하여 1시간에 일광화상을 입는 사람이라면 SPF15인 제품으로 15시간 동안 화상 없이 햇볕에 머물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 FDA(식품의약국)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햇빛 에너지 자체가 시간별로 다르다. 오전9시에 1시간 햇볕 노출로 받는 에너지의 양은 오후1시로 치면 15분에 불과하다. 자외선 차단제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자외선을 흡수하여 열에너지로 방출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자외선 차단제 자체의 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 흔히 물리적 자외선 차단제로 불리는 미네랄(징크 옥사이드, 티타늄 디옥사이드) 함유 제품은 주로 빛을 산란, 반사하는 식으로 자외선을 차단하므로 효과가 좀 더 오래갈 수 있다. 하지만 야외 활동을 하면서 땀이 나거나 물에 씻겨서 자외선 차단제가 벗겨지면 효과가 줄어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실내나 그늘에 주로 머문다면 서너 시간마다 한 번씩 덧발라줘도 무방하다. 하지만 수영하고 나서 또는 땀을 많이 흘린 뒤에는 즉시 다시 발라야 할 수도 있다. 대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나서는 피부에 흡수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므로 외출 15-30분 전에 미리 바르는 게 좋다. 참고로 미네랄 성분 자외선 차단제는 바르자마자 효과를 낼 수 있다. 피부노화, 피부암 예방을 위해 자외선 차단제는 부지런히 바르도록 하자.
2022-07-13 1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