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羅州吳氏와 訓要十條
김하준〈해외개발 사장〉
최근 KBS에서 연속적으로 방영하고 있는 고려무대의 사극, `王建'과 `帝國의 아침'에 등장하는 장화왕후는 나주호족 吳多麟의 딸이며, 吳多麟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개국공신중의 한사람이다. 오다린은 왕건이 吳氏姓을 후에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부터 오씨로 보여진다.
羅州는 백제의 故地이며, 후백제의 주 據點인 전주, 광주의 후방에 위치했음에도 왕건에 적극 협력하였다. 예로부터 평양·해주·개성·나주지역은 대외교역이 활발하였고, 중국계의 사람들이 세력을 떨치던 지역이었다. 나주의 오다린은 왕건과 마찬가지로 중국계의 해상무역세력의 이민으로 보여지며, 그러한 연유로 적극적인 협조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吳氏와 王氏는 中國 및 우리나라의 기록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姓들이다. 吳씨의 유래를 보면, 고대 중국 양자강부근 吳나라에 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손자 류양이 천자로부터 오씨성을 하사받고, 吳나라의 王이 되어 吳씨가 생겼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모든 오씨의 도시조 오첨은 류양의 46세손으로 500년(신라 지증왕1년)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함양에서 22년간 살다가 중국에 다시 건너갔고, 오첨의 둘째 아들 오응은 함양에 그대로 살았다. 오응의 12대손은 중국에 들어가 살다가 후손 오연총(오첨 18대손)이 고려 문종때 정착하여 오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오연총의 6세손 오수권이 3형제를 두었는데, 1216년 고려 고종 3년에 큰공을 세워 장남 오현보는 해주군에 봉해져 해주오씨의 시조가 되고, 나주·울산·고창·평해·함평 등으로 분관되었고, 둘째아들은 동복오씨의 시조가 된 후 군위로 분관, 셋째아들은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된 후, 화순·함양·장층·흥양 등으로 분관된 것으로 되어 있다.
오씨의 족보에 선조들이 중국과 우리나라를 왕래하면서 거주해 온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력이었음을 확신할 수가 있으며, 본관 중 나주·해주·울산 등은 중국계 해상세력의 거점과 일치한다.
그런데 발해 멸망시(태조 9년) 공부경 吳興이 고려로 망명한 기록이 있어 그 후손이 있었을 것이고, 고려 개구공신 오다린이 이미 고려 개국전부터 나주에 거주해 왔는데, 나주오씨가 고려 고종이후(1216년이후) 생겨난 것으로 된 것은 의문점이며, 한세대를 대략 25년으로 볼 때 류양이 기원전 650년대 사람으로 된 점도 신빙하기가 어렵다.
오씨는 기원후 262년대 중국의 魏, 蜀, 吳 삼국시대의 吳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訓要十條에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 것으로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湖南地域 차별의 根源으로 여겨지고 있다. 왕건의 개국에 큰 도움을 준 오다린은 나주사람이고, 그의 딸 장화왕후는 2대 혜종의 어머니이다. 또한 신숭겸은 곡성사람이고, 최지몽과 도선대사는 영암사람이다. 이들은 왕건에게 없어서는 안될 충신이었으며, 가장 측근의 인물들이었다.
이로 볼때,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호남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지방에 흐르는 금강의 지류, 공주강 북쪽(古代에 外는 北쪽을 의미했음) 천안지역의 現 차령휴게소가 소재한 고개이남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지금의 木川지역을 한정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금강이남, 차령산맥 이남의 호남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따르던 세력으로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하여, 왕건이 평정후에 동물의 이름으로 성을 삼도록 했으며, 象·牛·獐·馬씨가 이에 해당되며, 그 後孫들이 후에 목천尙씨·목천于씨·목천張씨·목천馬씨로 漢子를 바꿨다.
그런데 이중 목천馬씨의 유래를 보면, 백제 시조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올 때 馬黎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馬씨가 백제 건국시에 나타나고, 백제 멸망후 백제복구운동을 한 마육황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육황의 8대손인 마순흥이 고려 정종때 목천군에 봉해진 후 목천마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약간의 의문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목천지역으로 한정된 훈요십조가 호남지역으로 변질, 해석되고 확대되었을까? 이는 나주호족 오다린의 딸인 장화황후의 아들 혜종과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청주장군 유긍달의 딸 신명순성황태후 劉씨의 소생인 3대 정종과 4대 광종이 장화황후계를 배척하기 위해 변질시켰을 가능성이 있고, 신라계의 외척이 득세하기 시작한 8대 현종때 백제계를 견제하기 위해 변질·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2002-07-05 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