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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960년대부터 인쇄설비를 도입하고 자체 제작 시스템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고, 창간 직후에는 외부 신문사에 인쇄‧제작을 외주하면서 첫 걸음마를 뗐다.
1950년대 본지의 인쇄‧제작을 대행한 곳은 1949년에 창간된 일간지 ‘태양신문’(太陽新聞)이었다. 진보적인 논조의 신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태양신문’은 다수의 신문들이 군웅할거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이전투구 상황 속에서도 창간 직후부터 짧은 기간이나마 상당한 유력지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무게를 싣게 한다.

우리나라 언론계의 거목으로 ‘동아일보’ 탄압사건이 발발했을 때 편집국장직을 사임하면서 항거했던 송건호(宋建鎬)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은 자신의 저서 ‘한국 현대 언론사’(1990년 7월 三民社 발행) 82페이지 상단에서 반정부적이고 이적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1949년 5월 ‘서울신문’에 내려진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정간처분에 맞선 당시 언론계의 대응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담수회에 참가한 언론계 간부들이 이와 같은 요지로 이 대통령에게 재고를 요청하였으나, 이승만 정부로부터 신통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 담수회 멤버들은 ‘자유신문’, ‘국도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부인신문’, ‘경향신문’, ‘태양신문’, ‘한국일보’, ‘평화일보’ ‘서울타임즈’, ‘수산경제신문’ 등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승만을 시종일관 지지해 온 ‘동아일보’까지도 여기에 서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언급된 ‘담수회’(淡水會)는 서울의 주요 일간신문과 통신사의 편집국장들로 구성된 모임이어서 당시의 대표적인 언론인 단체였다. 섣부른 예상대로 ‘태양신문’이 그저 여러 후발 군소지들의 하나에 불과했다면 담수회와 같은 당시 최고 유력지들의 모임에 결코 명함을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인용문에 포함된 ‘한국일보’는 착오로 보인다는 점을 덧붙여 둔다.
그럼에도 불구, 광고시장이나 독자층이 모두 협소했던 열악한 현실에 더해 창간 직후 전란까지 겪어야 했던 만큼 ‘태양신문’은 경영이 녹록지 못했고 결국 본지 창간 직후였던 지난 1954년 4월 25일 장기영(張基榮)에게 판권이 이양된 후 잠시 발행을 지속하다 같은 해 6월 8일자 제 1,236호를 마지막으로 ‘한국일보’로 제호가 변경되기에 이르면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은행가 출신의 장기영은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위탁경영해 부활을 이끈 인물인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백상예술대상’에 등장하는 백상(百想)이 바로 장기영의 호(號)이다.
장기영은 1950년대 초에 한국은행 부총재, 1960년대 중반에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등을 역임한 중량급 인사이자 국회의원에까지 오른 정치인이었다. 이후에도 국제 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했고 1972년에는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 부장과 함께 방북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장기영은 1954년 6월 9일 ‘한국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으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한국 최초로 상업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의 닻을 올린 ‘한국일보’는 가십성‧오락성 기사를 대폭 늘린 데다 일요판 부록을 발행하고 1958년부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1971년부터 봉황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른 신문사들과는 사뭇 결이 다른 차별화된 행보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덕분에 ‘한국일보’는 지난 1970년대까지는 ‘동아일보’와 함께 양대 일간지 체제를 구축한 메이저 신문으로 군림했다.

지금은 흔히들 ‘조동중’또는 ‘조중동’이라고 부르지만 적어도 1980년대 초‧중반 무렵까지는 ‘조동한’이라는 말이 통용됐다. 지금도 ‘4대 일간지’라고 하면 ‘한국일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 ‘한국일보’는 출생신고(즉, 창간)와 관련해서 서로 엇갈린 두가지 유형의 의견들이 양립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하나는 장기영이 ‘태양신문’의 판권을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장기영이 ‘태양신문’의 제호를 ‘한국일보’로 변경한 것일 뿐인 데다 지령(紙齡) 또한 그대로 계승했으므로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태양신문’의 마지막 발행호였던 제 1,236호를 뒤이어 ‘한국일보’의 창간호가 제 1호가 아니라 제 1,237호로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 ‘한국일보’의 인터넷 홈페이지 연혁 면에도 “태양신문이 모태”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본지가 창간 직후 한동안 ‘태양신문’에 인쇄‧제작을 외주해서 발간했고 이 ‘태양신문’이 ‘한국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이후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는 신문의 외주 인쇄‧제작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분명한 팩트이다.
그래서일까? 1963년 10월 31일자 3면에 “소아마비 자선음악회 6日 市民會館에서 開催” 제목의 기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기사를 보면 不具者福祉委員會가 주최한 이 자선음악회는 한국일보, 연세대醫大學生會, 약업신문, 興一藥品이 공동후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不具者福祉委員會는 小兒痲痺 兒童을 爲한 慈善音樂會를 한국일보社 藥業新聞社 興一藥品 延世大總學生會의 後援을 얻어 11月 6日 낮(하오 2時, 3時 30分) 밤(7時 30分) 3回에 걸쳐 市民會館에서 갖는다.”
이와 함께 본지 공무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경영난이 지속되었던 ‘태양신문’ 공무국 재직자 가운데 일부가 본지로 이직했거나 스카웃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게다가 ‘한국일보’의 사시(社是)는 원래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였던 것이 현재는 “春秋筆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不偏不黨의 자세”로 바뀌었다. 여기서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말은 본지의 역대 재직자들에게 너무나 낯익은 표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보면 문득 놀라움이 고개를 쳐들게 한다.
언뜻 멀게만 느껴지지만 달리보면 무척이나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어 보이게 하는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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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960년대부터 인쇄설비를 도입하고 자체 제작 시스템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고, 창간 직후에는 외부 신문사에 인쇄‧제작을 외주하면서 첫 걸음마를 뗐다.
1950년대 본지의 인쇄‧제작을 대행한 곳은 1949년에 창간된 일간지 ‘태양신문’(太陽新聞)이었다. 진보적인 논조의 신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태양신문’은 다수의 신문들이 군웅할거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이전투구 상황 속에서도 창간 직후부터 짧은 기간이나마 상당한 유력지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무게를 싣게 한다.

우리나라 언론계의 거목으로 ‘동아일보’ 탄압사건이 발발했을 때 편집국장직을 사임하면서 항거했던 송건호(宋建鎬)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은 자신의 저서 ‘한국 현대 언론사’(1990년 7월 三民社 발행) 82페이지 상단에서 반정부적이고 이적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1949년 5월 ‘서울신문’에 내려진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정간처분에 맞선 당시 언론계의 대응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담수회에 참가한 언론계 간부들이 이와 같은 요지로 이 대통령에게 재고를 요청하였으나, 이승만 정부로부터 신통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 담수회 멤버들은 ‘자유신문’, ‘국도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부인신문’, ‘경향신문’, ‘태양신문’, ‘한국일보’, ‘평화일보’ ‘서울타임즈’, ‘수산경제신문’ 등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승만을 시종일관 지지해 온 ‘동아일보’까지도 여기에 서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언급된 ‘담수회’(淡水會)는 서울의 주요 일간신문과 통신사의 편집국장들로 구성된 모임이어서 당시의 대표적인 언론인 단체였다. 섣부른 예상대로 ‘태양신문’이 그저 여러 후발 군소지들의 하나에 불과했다면 담수회와 같은 당시 최고 유력지들의 모임에 결코 명함을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인용문에 포함된 ‘한국일보’는 착오로 보인다는 점을 덧붙여 둔다.
그럼에도 불구, 광고시장이나 독자층이 모두 협소했던 열악한 현실에 더해 창간 직후 전란까지 겪어야 했던 만큼 ‘태양신문’은 경영이 녹록지 못했고 결국 본지 창간 직후였던 지난 1954년 4월 25일 장기영(張基榮)에게 판권이 이양된 후 잠시 발행을 지속하다 같은 해 6월 8일자 제 1,236호를 마지막으로 ‘한국일보’로 제호가 변경되기에 이르면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은행가 출신의 장기영은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위탁경영해 부활을 이끈 인물인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백상예술대상’에 등장하는 백상(百想)이 바로 장기영의 호(號)이다.
장기영은 1950년대 초에 한국은행 부총재, 1960년대 중반에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등을 역임한 중량급 인사이자 국회의원에까지 오른 정치인이었다. 이후에도 국제 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했고 1972년에는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 부장과 함께 방북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장기영은 1954년 6월 9일 ‘한국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으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한국 최초로 상업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의 닻을 올린 ‘한국일보’는 가십성‧오락성 기사를 대폭 늘린 데다 일요판 부록을 발행하고 1958년부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1971년부터 봉황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른 신문사들과는 사뭇 결이 다른 차별화된 행보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덕분에 ‘한국일보’는 지난 1970년대까지는 ‘동아일보’와 함께 양대 일간지 체제를 구축한 메이저 신문으로 군림했다.

지금은 흔히들 ‘조동중’또는 ‘조중동’이라고 부르지만 적어도 1980년대 초‧중반 무렵까지는 ‘조동한’이라는 말이 통용됐다. 지금도 ‘4대 일간지’라고 하면 ‘한국일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 ‘한국일보’는 출생신고(즉, 창간)와 관련해서 서로 엇갈린 두가지 유형의 의견들이 양립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하나는 장기영이 ‘태양신문’의 판권을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장기영이 ‘태양신문’의 제호를 ‘한국일보’로 변경한 것일 뿐인 데다 지령(紙齡) 또한 그대로 계승했으므로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태양신문’의 마지막 발행호였던 제 1,236호를 뒤이어 ‘한국일보’의 창간호가 제 1호가 아니라 제 1,237호로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 ‘한국일보’의 인터넷 홈페이지 연혁 면에도 “태양신문이 모태”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본지가 창간 직후 한동안 ‘태양신문’에 인쇄‧제작을 외주해서 발간했고 이 ‘태양신문’이 ‘한국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이후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는 신문의 외주 인쇄‧제작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분명한 팩트이다.
그래서일까? 1963년 10월 31일자 3면에 “소아마비 자선음악회 6日 市民會館에서 開催” 제목의 기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기사를 보면 不具者福祉委員會가 주최한 이 자선음악회는 한국일보, 연세대醫大學生會, 약업신문, 興一藥品이 공동후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不具者福祉委員會는 小兒痲痺 兒童을 爲한 慈善音樂會를 한국일보社 藥業新聞社 興一藥品 延世大總學生會의 後援을 얻어 11月 6日 낮(하오 2時, 3時 30分) 밤(7時 30分) 3回에 걸쳐 市民會館에서 갖는다.”
이와 함께 본지 공무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경영난이 지속되었던 ‘태양신문’ 공무국 재직자 가운데 일부가 본지로 이직했거나 스카웃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게다가 ‘한국일보’의 사시(社是)는 원래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였던 것이 현재는 “春秋筆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不偏不黨의 자세”로 바뀌었다. 여기서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말은 본지의 역대 재직자들에게 너무나 낯익은 표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보면 문득 놀라움이 고개를 쳐들게 한다.
언뜻 멀게만 느껴지지만 달리보면 무척이나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어 보이게 하는 부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