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획] ‘약업 70년‧약업신문 70년’ 시리즈를 시작하며
‘약업신문’은 2026년 8월 19일자로 대망의 지령(紙齡) 6,000호를 발간한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지난 1954년 3월 29일, 고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듯 문자 그대로 불모(不毛)의 땅에서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출생신고를 마친 이래 ‘약업신문’은 지난 72년여 동안 항상 의약계와 호흡을 함께 하고 역사의 현장들을 지키면서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의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특히 ‘약업신문’은 지난 2024년 3월 29일로 창간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내 언론계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지는 일찍이 ‘약업신문 70년史’를 발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원고를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끝에 2025년 8월경 A4 용지 600매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의 집필작업을 매듭지었다.
이에 본지는 우선 지령 6,000호 발간을 계기로 ‘약업신문 70년史’의 원고 중 일부내용들을 발췌해 ‘약업 70년‧약업신문 70년’이라는 제목의 연재물로 지면에 요약‧게재 한다. <편집자 주>
언론계 초유의 100面 신문발행..“약업신문과 같이 하라” (1967. 12.)

“이 해도 다 져므러가는 오늘 12월 28일, 이 날자에 발행되는 本紙가 바로 千號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一千’이란 數字는 簡單하나 ‘한 一’字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여기까지 걸어오기란 險難하고도 먼 余程이였다. 더욱 月刊도 아닌 ‘週刊’이란 소걸음으로 걸어왔기 때문에 13年 9個月이란 時間이 걸렸다.
< 중 략 >
本紙가 藥業界라는 特殊分野를 擔當하는 專門紙로서 孤孤의 聲을 올린 것은 서울 還都 直後의 일이였다.아무도 專門新聞의 役割이나 機能에 對해서 認識해 주지 않는 쓸쓸하고도 외로운 길이였다. 그러나 廢墟 속에서 再建을 막 시작한 藥業界만은 本紙를 切實히 必要로 하였다.“
윗글은 본지가 1967년 12월 28일자로 대망의 지령 1,000호를 발간하면서 기사면의 맨 앞면에 해당하는 3면에 게재한 기념사의 일부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바와같이 일간(日刊)도 아니고 주간(週刊)이라는 소걸음으로 창간 이후 물경 13년 9개월 만에 지령 1,000호를 발간하는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이와 관련, 기념사 바로 아래 공간에 편집후기 성격으로 게재된 ‘藥街’ 칼럼난에서도 “新聞에서 紙齡 1,000號가 뭐 그리 대단할 것은 없겠지만 週刊新聞으로서 또는 週 2回刊으로서의 紙齡 1,000號는 좀 다르다. 週刊紙를 통털어서, 또 藥業界의 專門紙를 모두 돌아봐도 紙齡 1,000號는 初有의 劃期的인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자부심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참고로 1960년대는 해방 직후 전국민의 문맹률이 80~90%를 넘나들었을 정도로 너무나 높았던, 지금과는 천양지차의 현실을 배경으로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한글을 그냥 소리나는 대로 쓰도록 하는 문자표기 정책을 시행한 여파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던 시기이다.
혹시라도 불모의 열악한 현실을 핑계삼아 당시의 본지 편집진이 최소한의 교정‧교열 및 윤문 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신문을 날림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아 보인다는 일말의 노파심에서 덧붙여 보는 사족(蛇足)이다.
오히려 본지의 지령 1,000호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해당신문이 무려 100페이지로 인쇄‧제작되었다고 하는, 당시로선 대단히 이례적이고 획기적이었던 사실이다. 새삼스런 이야기겠지만, 1960년대는 국민 대다수가 아직 빈곤과 기아(饑餓)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여서 해마다 ‘보릿고개’를 울면서 넘어가야 했던 시절이다. 당연히 뭐든 물자가 크게 부족한 시절이었고, 신문용지 또한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이 대판(大版: broad sheet‧표준판) 360×520mm 크기로 발간된 국내의 일간신문들은 1970년대 말까지도 통상적으로 4면, 8면, 또는 12면 정도의 분량으로 신문을 제작‧발간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같은 판형(版型)의 차이를 감안하고, 지령 1,000호가 기념특집호였음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그 옛날 1960년대에 신문을 100페이지 분량으로 발간했다는 것은 아마도 국내 언론계에서 전례가 없는 초유의 개가이자 기념비적인 뉴스거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창간 당시부터 ‘약업신문’에 몸담은 이래 1980년대 초까지 재직하면서 편집국장, 논설위원 및 주간 등을 두루 역임한 홍현오(洪鉉五) 前 사장이 저술하고 (주)한독약품의 후원(발행자‧金信權, 발행소‧한독약품)으로 1972년 4월 발간한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 277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창간 당시 타블로이드 四면으로 시작한 약사시보는 해마다 증면(增面)을 단행하여 六◯년에는 통상 二四면 발행이라는 한국 신문 사상 최다면(最多面)을 자랑하게 되었고 제호를 약업신문(藥業新聞)으로 개제하고 六二년에는 주 二회 발행을 단행하여 그 후 쏟아져 나온 의약전문지 중 줄곧 선두에서 달렸다.
六八년에는 고속도 윤전기와 일관작업의 자가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一천호 기념으로 一백면의 방대한 기념특집을 내놓아 업계를 놀라게 하였다. 공보부 당국에서도 불실한 주간신문사에게 ‘약업신문과 같이 하라’는 모범으로 제시하기 일수이고 함승기는 한국주간신문협회의 회장으로 계속 연임되었다.“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1960년대에 본지가 신문을 100페이지로 발간한 일이 1954년 창간 이후 10여년 동안 줄곧 탄탄하게 다지고 켜켜이 쌓아올린 깊은 내공과 저력이 오롯이 드러나고 반영된 상징적인 결과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자금력이 풍부하고 부족함 없어 보이는 인력-풀을 보유하고 있는 미디어 매체라고 하더라도 가히 대하소설 한편의 분량에 맞먹을 만한 100페이지짜리 두툼한 신문을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본지가 1960년대에 지령 1,000호를 100페이지로 인쇄‧제작한 일은 국내 언론사의 한 페이지를 특필할 만한 핫-뉴스였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으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조병화(趙炳華) 선생이 지령 1,000호 8면에 게재한 축시 “겨레의 몸에 건강의 물줄을”의 일부를 게재하면서 ‘약업 70년‧약업신문 70년’ 연재물의 첫회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불로의 영약은 없다해도
보다 튼튼히
보다 단단히
보다 활발히
보다 오래
보다 평온과 강한 몸과 생명
그것을 경작, 관리해 옴에
1000호의 지령
강하여라
그 보람!
나라의 몸, 겨레의 몸으로 축하함에
감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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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기획] ‘약업 70년‧약업신문 70년’ 시리즈를 시작하며
‘약업신문’은 2026년 8월 19일자로 대망의 지령(紙齡) 6,000호를 발간한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지난 1954년 3월 29일, 고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듯 문자 그대로 불모(不毛)의 땅에서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출생신고를 마친 이래 ‘약업신문’은 지난 72년여 동안 항상 의약계와 호흡을 함께 하고 역사의 현장들을 지키면서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의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특히 ‘약업신문’은 지난 2024년 3월 29일로 창간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내 언론계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지는 일찍이 ‘약업신문 70년史’를 발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원고를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끝에 2025년 8월경 A4 용지 600매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의 집필작업을 매듭지었다.
이에 본지는 우선 지령 6,000호 발간을 계기로 ‘약업신문 70년史’의 원고 중 일부내용들을 발췌해 ‘약업 70년‧약업신문 70년’이라는 제목의 연재물로 지면에 요약‧게재 한다. <편집자 주>
언론계 초유의 100面 신문발행..“약업신문과 같이 하라” (1967. 12.)

“이 해도 다 져므러가는 오늘 12월 28일, 이 날자에 발행되는 本紙가 바로 千號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一千’이란 數字는 簡單하나 ‘한 一’字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여기까지 걸어오기란 險難하고도 먼 余程이였다. 더욱 月刊도 아닌 ‘週刊’이란 소걸음으로 걸어왔기 때문에 13年 9個月이란 時間이 걸렸다.
< 중 략 >
本紙가 藥業界라는 特殊分野를 擔當하는 專門紙로서 孤孤의 聲을 올린 것은 서울 還都 直後의 일이였다.아무도 專門新聞의 役割이나 機能에 對해서 認識해 주지 않는 쓸쓸하고도 외로운 길이였다. 그러나 廢墟 속에서 再建을 막 시작한 藥業界만은 本紙를 切實히 必要로 하였다.“
윗글은 본지가 1967년 12월 28일자로 대망의 지령 1,000호를 발간하면서 기사면의 맨 앞면에 해당하는 3면에 게재한 기념사의 일부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바와같이 일간(日刊)도 아니고 주간(週刊)이라는 소걸음으로 창간 이후 물경 13년 9개월 만에 지령 1,000호를 발간하는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이와 관련, 기념사 바로 아래 공간에 편집후기 성격으로 게재된 ‘藥街’ 칼럼난에서도 “新聞에서 紙齡 1,000號가 뭐 그리 대단할 것은 없겠지만 週刊新聞으로서 또는 週 2回刊으로서의 紙齡 1,000號는 좀 다르다. 週刊紙를 통털어서, 또 藥業界의 專門紙를 모두 돌아봐도 紙齡 1,000號는 初有의 劃期的인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자부심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참고로 1960년대는 해방 직후 전국민의 문맹률이 80~90%를 넘나들었을 정도로 너무나 높았던, 지금과는 천양지차의 현실을 배경으로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한글을 그냥 소리나는 대로 쓰도록 하는 문자표기 정책을 시행한 여파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던 시기이다.
혹시라도 불모의 열악한 현실을 핑계삼아 당시의 본지 편집진이 최소한의 교정‧교열 및 윤문 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신문을 날림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아 보인다는 일말의 노파심에서 덧붙여 보는 사족(蛇足)이다.
오히려 본지의 지령 1,000호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해당신문이 무려 100페이지로 인쇄‧제작되었다고 하는, 당시로선 대단히 이례적이고 획기적이었던 사실이다. 새삼스런 이야기겠지만, 1960년대는 국민 대다수가 아직 빈곤과 기아(饑餓)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여서 해마다 ‘보릿고개’를 울면서 넘어가야 했던 시절이다. 당연히 뭐든 물자가 크게 부족한 시절이었고, 신문용지 또한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이 대판(大版: broad sheet‧표준판) 360×520mm 크기로 발간된 국내의 일간신문들은 1970년대 말까지도 통상적으로 4면, 8면, 또는 12면 정도의 분량으로 신문을 제작‧발간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같은 판형(版型)의 차이를 감안하고, 지령 1,000호가 기념특집호였음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그 옛날 1960년대에 신문을 100페이지 분량으로 발간했다는 것은 아마도 국내 언론계에서 전례가 없는 초유의 개가이자 기념비적인 뉴스거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창간 당시부터 ‘약업신문’에 몸담은 이래 1980년대 초까지 재직하면서 편집국장, 논설위원 및 주간 등을 두루 역임한 홍현오(洪鉉五) 前 사장이 저술하고 (주)한독약품의 후원(발행자‧金信權, 발행소‧한독약품)으로 1972년 4월 발간한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 277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창간 당시 타블로이드 四면으로 시작한 약사시보는 해마다 증면(增面)을 단행하여 六◯년에는 통상 二四면 발행이라는 한국 신문 사상 최다면(最多面)을 자랑하게 되었고 제호를 약업신문(藥業新聞)으로 개제하고 六二년에는 주 二회 발행을 단행하여 그 후 쏟아져 나온 의약전문지 중 줄곧 선두에서 달렸다.
六八년에는 고속도 윤전기와 일관작업의 자가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一천호 기념으로 一백면의 방대한 기념특집을 내놓아 업계를 놀라게 하였다. 공보부 당국에서도 불실한 주간신문사에게 ‘약업신문과 같이 하라’는 모범으로 제시하기 일수이고 함승기는 한국주간신문협회의 회장으로 계속 연임되었다.“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1960년대에 본지가 신문을 100페이지로 발간한 일이 1954년 창간 이후 10여년 동안 줄곧 탄탄하게 다지고 켜켜이 쌓아올린 깊은 내공과 저력이 오롯이 드러나고 반영된 상징적인 결과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자금력이 풍부하고 부족함 없어 보이는 인력-풀을 보유하고 있는 미디어 매체라고 하더라도 가히 대하소설 한편의 분량에 맞먹을 만한 100페이지짜리 두툼한 신문을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본지가 1960년대에 지령 1,000호를 100페이지로 인쇄‧제작한 일은 국내 언론사의 한 페이지를 특필할 만한 핫-뉴스였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으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조병화(趙炳華) 선생이 지령 1,000호 8면에 게재한 축시 “겨레의 몸에 건강의 물줄을”의 일부를 게재하면서 ‘약업 70년‧약업신문 70년’ 연재물의 첫회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불로의 영약은 없다해도
보다 튼튼히
보다 단단히
보다 활발히
보다 오래
보다 평온과 강한 몸과 생명
그것을 경작, 관리해 옴에
1000호의 지령
강하여라
그 보람!
나라의 몸, 겨레의 몸으로 축하함에
감사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