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학대학을 입학했을 때, 약사국시에 합격했을 때, 내 약국을 개국했을 때 약사로서 가지는 자부심과 사명감은 소중한 기억이다.
그 자부심을 간직한 채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이라는 기적을 팔 수 있는 약사이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아침마다 되뇌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약국도 소매업이다 보니 약국을 경영하면서 느끼는 후회나 어려움은 보람을 만끽하는 만큼에 비례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약국경영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어려움, 기쁨과 슬픔을 인터넷이나 소모임등을 통해 공유하는 약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연 내가 잘한걸까' '그 영업사원 밉더라'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나' 등등...
내 이웃 약사들이 경험한 일견 재밌고 일견 화나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살짝 한번 들여다보자.
△옆집 약국은 싸게 팔던데..
한 환자가 A약사에게 조제약을 내보이며 항의를 시작한다.
자신의 남편이 똑같은 약을 다른 약국에서는 훨씬 싸게 지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처방인지 확인을 부탁했지만 의사에게 똑같은 처방을 요구했다며 약사에게 화만 낼 뿐이다.
결국 병원에까지 전화를 걸어 처방이 다른 경우임을 확인해 줄 수밖에 없었다.
A약사는 환자에게 도둑 취급받는 자신의 처지가 스스로도 안쓰럽다.
△경쟁약국에 취직한 근무약사
B약사는 1년간 함께 일하던 근무약사와 고용조건을 두고 마찰을 일으켰다.
채용 당시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생각도 했지만 오히려 번거롭고 비인간적인 것 같아 채용조건을 구두로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그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근무약사는 불합리한 근무조건과 경력을 내세우며 처우개선을 요구했지만 가뜩이나 처방건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어서 결국 이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당한 건 일주일 후 그 근무약사가 길 건너 경쟁약국에 취직해 버젓이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B약사는 약국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 경쟁약국에 있는 것도 불안하지만 조건만을 따라 철새처럼 이동하는 일부 약사들의 모습이 최소한의 의리마저 저버린 것 같아 야속하기만 하다.
△의사는 되고 약사는 안된다(?)
C약사는 얼마전 아토피 박람회에서 속상한 일을 당하고 아직까지도 기분이 나쁘다.
이 박람회는 일반인들도 관람이 가능했지만 한켠에 의약사 전용 부스가 설치돼 제약사들이 홍보를 펼치고 있었다.
이 약사는 관람을 하던 중 목이 말라 某 제약사가 마련한 시식용 음료와 과자를 먹으려 다가갔다.
그러자 대뜸 여직원이 '이건 의사선생님들 용으로 준비한 것이라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애초에 '의사와 약사용 부스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화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얼른 빠져나왔지만 차별에서 오는 당혹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반품은 나 몰라라
한가한 오후 某 제약사 직원이라며 불쑥 찾아와선 '인근 ○○의원에서 ○○약이 처방될테니 약은 아무 도매상에서나 주문하라'고 한다.
또 약국과 전문약 직거래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또 처방바뀌면 남는 약 반품은 어떻게 하면 되냐'고 했더니 '그건 모르겠다'며 명함도 안주고 가버린다.
이 약사는 분업이후 눈에 띄게 고압적으로 변한 제약사들의 영업태도와 반비례해 끝없이 추락하는 약사들의 위상을 접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의원 인테리어비를 책임져달라(?)
처방건수가 주요한 경영수단이 되다 보니 병의원 인근 입지를 둘러싼 부동산브로커들의 농간이 갈수록 극성이다.
D약사는 얼마전 부동산업자로부터 약국 2층에 이비인후과 입점을 책임져 줄테니 의원 인테리어비 3천만원과 소개료 명목으로 1천만원을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새롭게 약국을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고민 끝에 결국 거절했지만 이 업자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계속해서 다른 조건을 제시하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결국 몇 달 후 업자와는 상관없이 의원이 입점해 일단락됐지만 약국경영이 계속 어려웠다면 과연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을 지 '자존심과 생활의 경계'를 되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