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약학을 대표하는 과학자이신 大河 洪文和교수님께서 7월 28일에 별세하셨습니다.
이 비보를 받고서 슬픔을 잠겨 있었으나, 홍교수님의 탁월한 지도력, 훌륭하신 인격, 원만한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약학 연구와 교육 발전, 보건행정의 향상 및 과학의 대중화에 커다란 불멸의 업적을 이룩한 사실들을 온 누리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삼가 조의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홍교수님께서는 1916년 5월 1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읍에서 출생하셨으나 3세때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하게 되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평양에서 마치셨습니다
1937년에 경성약전(서울대 약대 전신)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후 모교에 조교로 4년간 근무 하셨습니다. 그 동안 독학으로 공부하여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면허를 받으셨고, 1942년부터 3년간 경성제대부속병원(서울대학교 병원 전신)내과에서 수련의로 근무하셨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일본 관리들이 한꺼번에 물러나게 되어 홍교수님이 <전매청 제염시험장>장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그 당시 소금, 담배 및 홍삼이 전매품 이어서 일반 상인들이 제조할 수 없었습니다.
염전과 시험장이 주안에 있었는데 직원들이나 그 가족들이 병에 걸리면 진료가방을 들고 각 집에 찾아가 무료로 치료해주셨습니다. 직원들의 결혼식에 주례로도 봉사하셨습니다.
30대 초반부터 주례를 서다보니, 광복 30주년 되던해에 모 언론사가 그 기념행사의 일부로써 최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결혼 주례 최대 기록보유자가 홍교수님이셨습니다. 1950년에 약대가 서울대학교로 합병되자 홍교수님이 조교수로 모교에 돌아왔습니다.
1953년에 교무과장으로 계실 때 약대의 학보로 <약원>창간을 적극 추진하셨으며 서울대 단과대학 학보중 가장 역사깊은 간행물이 되었습니다. 1955년 미국 파이퍼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고 Purdue대학교 약대 Martin 교수지도하에 연구하셨는데 1년만에 석사학위를 획득하는 진기록을 남기셨습니다.
그때에 시작한 실험을 귀국후에도 꾸준히 추진하여 드디어 1962년에 서울대학교 약학박사 제1호의 테이프를 끊으셨으며, 그 뒤를 이어 다른 교수들도 차례로 박사학위를 받도록 적극 도와 주셨습니다.
1961년 5?16혁명이 성공한후, 군사정부에 차출되어 문교부 과학기술국장으로 1년간 파견 근무한 적도 있었습니다. 1962년 약대 학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약대의 발전에 적극 기여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의 무기약품제조화학 강의는 약대3대 명강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그 밖에 물리화학과 약학 영어도 강의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이 소금에 관한 전문 지식이 해박하시고 <약원>창간호에 <소금>이라는 시를 지어 발표하셨기 때문에 약대생들이 홍교수님을 <소금박사>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홍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미국의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Linus Pauling교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홍교수님이 손수 그리신 유화이었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도 직접 창작하여 <조선미술전>에 출품하시면 입선되기도 하였습니다.
1967년에 대학약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약학회의 발전에 기여하셨는데, 서울대 약대 교수중에서는 한구동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회장직을 맡으신 것입니다. 1966년 국립보건원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보건행정의 최고 수행기관에서 의약품 허가, 전염병 관리, 식품품질관리 등의 업무를 향상시키셨습니다.
아세아 각국의 약사회들이 모여 창설한 FAPA(아세아 약학연맹)의 부회장으로 취임하시어 각국 간의 정보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였고, 총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성대하게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부터 <아세아 약학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여 7년간 학술교류를 적극 추진하셨습니다.
1978년에 고려인삼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옛날의 전매청 직원들의 협조로 학회 활동을 적극 추진하여 초창기의 기초를 튼튼히 만드셨습니다. 1970년에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1977년 과학저술인협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셨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약과 건강에 관한 프로가 필요하면 꼭 홍교수님을 모셔다가 출연시켰습니다. 또한 일간지와 주간지에도 약과 건강에 관한 상식을 고정 칼럼으로 연재하였으며 이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셨으니 총 20여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으며 그 일부는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보건사회부 <대학약전>편찬위원 및 중앙약사 심의위원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셨습니다. 약사와 의사 면허를 겸비한 분이 많지 않아되 특별히 인기가 높았으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대기업 사원교육에 강사로 전국 방방곡곡에 불러 다니셨습니다.
국립보건원 원장의 임기가 끝나고 나서 쉬고 계실 때, 서울대학교 한심석 총장이 홍박시님을 생약연구소(천연물과학연구소 전신)교수로 1970년 복직시키시어 한약의 과학화 연구에 몰입하셨으며 연구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셨습니다.
홍 교수님은 1981년 제22대 대한약사회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은 1981년 8월에 정년퇴임하시어 명예교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퇴임후에는 방송 출연, 교양 강의, 원고 집필, 결혼 주례, 등으로 더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홍교수님이 받으신 상이 많아 모두 기억나지 않으나 대표적인 상으로 대한약학회 학술본상(1959년), 약업신문사 동암약의상)(1963년), 한국생약학회 학술상, 국민훈장 동백장(1974년), 제17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봉사상(1984년)이 있습니다. 홍교수님이 수집하여 소장하셨던 진귀한 서적들을 <한독약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시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홍교수님의 많은 업적들을 소생이 부족한 필력으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홍교수님의 자당께서는 1986년 일요일에 교회에 건강하게 다녀오시고 나서 그 다음날 월요일 98세 돌아가신 장수혈통이었으므로 홍교수님의 건강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었습니다.
홍교수님께서는 퇴직하신후 약계 모 신문사 편집국장과의 대담에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한국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을 보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홍교수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나니 비통 할 뿐입니다.
학교에서 퇴근길에 종로의 <낭만>에 들려 재미있는 담론을 해주시던 시간들이 영원한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홍교수님이 덕을 넓게 펴시어 저 세상에서도 축복받으시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명복을 조용히 빌겠습니다.
문하생 김병각 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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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보를 받고서 슬픔을 잠겨 있었으나, 홍교수님의 탁월한 지도력, 훌륭하신 인격, 원만한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약학 연구와 교육 발전, 보건행정의 향상 및 과학의 대중화에 커다란 불멸의 업적을 이룩한 사실들을 온 누리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삼가 조의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홍교수님께서는 1916년 5월 1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읍에서 출생하셨으나 3세때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하게 되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평양에서 마치셨습니다
1937년에 경성약전(서울대 약대 전신)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후 모교에 조교로 4년간 근무 하셨습니다. 그 동안 독학으로 공부하여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면허를 받으셨고, 1942년부터 3년간 경성제대부속병원(서울대학교 병원 전신)내과에서 수련의로 근무하셨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일본 관리들이 한꺼번에 물러나게 되어 홍교수님이 <전매청 제염시험장>장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그 당시 소금, 담배 및 홍삼이 전매품 이어서 일반 상인들이 제조할 수 없었습니다.
염전과 시험장이 주안에 있었는데 직원들이나 그 가족들이 병에 걸리면 진료가방을 들고 각 집에 찾아가 무료로 치료해주셨습니다. 직원들의 결혼식에 주례로도 봉사하셨습니다.
30대 초반부터 주례를 서다보니, 광복 30주년 되던해에 모 언론사가 그 기념행사의 일부로써 최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결혼 주례 최대 기록보유자가 홍교수님이셨습니다. 1950년에 약대가 서울대학교로 합병되자 홍교수님이 조교수로 모교에 돌아왔습니다.
1953년에 교무과장으로 계실 때 약대의 학보로 <약원>창간을 적극 추진하셨으며 서울대 단과대학 학보중 가장 역사깊은 간행물이 되었습니다. 1955년 미국 파이퍼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고 Purdue대학교 약대 Martin 교수지도하에 연구하셨는데 1년만에 석사학위를 획득하는 진기록을 남기셨습니다.
그때에 시작한 실험을 귀국후에도 꾸준히 추진하여 드디어 1962년에 서울대학교 약학박사 제1호의 테이프를 끊으셨으며, 그 뒤를 이어 다른 교수들도 차례로 박사학위를 받도록 적극 도와 주셨습니다.
1961년 5?16혁명이 성공한후, 군사정부에 차출되어 문교부 과학기술국장으로 1년간 파견 근무한 적도 있었습니다. 1962년 약대 학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약대의 발전에 적극 기여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의 무기약품제조화학 강의는 약대3대 명강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그 밖에 물리화학과 약학 영어도 강의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이 소금에 관한 전문 지식이 해박하시고 <약원>창간호에 <소금>이라는 시를 지어 발표하셨기 때문에 약대생들이 홍교수님을 <소금박사>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홍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미국의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Linus Pauling교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홍교수님이 손수 그리신 유화이었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도 직접 창작하여 <조선미술전>에 출품하시면 입선되기도 하였습니다.
1967년에 대학약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약학회의 발전에 기여하셨는데, 서울대 약대 교수중에서는 한구동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회장직을 맡으신 것입니다. 1966년 국립보건원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보건행정의 최고 수행기관에서 의약품 허가, 전염병 관리, 식품품질관리 등의 업무를 향상시키셨습니다.
아세아 각국의 약사회들이 모여 창설한 FAPA(아세아 약학연맹)의 부회장으로 취임하시어 각국 간의 정보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였고, 총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성대하게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부터 <아세아 약학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여 7년간 학술교류를 적극 추진하셨습니다.
1978년에 고려인삼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옛날의 전매청 직원들의 협조로 학회 활동을 적극 추진하여 초창기의 기초를 튼튼히 만드셨습니다. 1970년에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1977년 과학저술인협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셨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약과 건강에 관한 프로가 필요하면 꼭 홍교수님을 모셔다가 출연시켰습니다. 또한 일간지와 주간지에도 약과 건강에 관한 상식을 고정 칼럼으로 연재하였으며 이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셨으니 총 20여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으며 그 일부는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보건사회부 <대학약전>편찬위원 및 중앙약사 심의위원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셨습니다. 약사와 의사 면허를 겸비한 분이 많지 않아되 특별히 인기가 높았으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대기업 사원교육에 강사로 전국 방방곡곡에 불러 다니셨습니다.
국립보건원 원장의 임기가 끝나고 나서 쉬고 계실 때, 서울대학교 한심석 총장이 홍박시님을 생약연구소(천연물과학연구소 전신)교수로 1970년 복직시키시어 한약의 과학화 연구에 몰입하셨으며 연구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셨습니다.
홍 교수님은 1981년 제22대 대한약사회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은 1981년 8월에 정년퇴임하시어 명예교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퇴임후에는 방송 출연, 교양 강의, 원고 집필, 결혼 주례, 등으로 더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홍교수님이 받으신 상이 많아 모두 기억나지 않으나 대표적인 상으로 대한약학회 학술본상(1959년), 약업신문사 동암약의상)(1963년), 한국생약학회 학술상, 국민훈장 동백장(1974년), 제17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봉사상(1984년)이 있습니다. 홍교수님이 수집하여 소장하셨던 진귀한 서적들을 <한독약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시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홍교수님의 많은 업적들을 소생이 부족한 필력으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홍교수님의 자당께서는 1986년 일요일에 교회에 건강하게 다녀오시고 나서 그 다음날 월요일 98세 돌아가신 장수혈통이었으므로 홍교수님의 건강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었습니다.
홍교수님께서는 퇴직하신후 약계 모 신문사 편집국장과의 대담에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한국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을 보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홍교수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나니 비통 할 뿐입니다.
학교에서 퇴근길에 종로의 <낭만>에 들려 재미있는 담론을 해주시던 시간들이 영원한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홍교수님이 덕을 넓게 펴시어 저 세상에서도 축복받으시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명복을 조용히 빌겠습니다.
문하생 김병각 봉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