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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요, 호외~
호외(號外‧extra edition)는 미국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주간지 ‘보스턴 뉴스레터’(The Boston New Letter)가 창간된 해인 지난 1704년 그 해에 당시 근해에 출몰하던 6명의 해적들에 대한 처형사실을 보도한 6월 30일자 발행호가 첫 번째 사례인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한말 당시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지난 1902년 2월 19일 조선(朝鮮)의 국운을 뿌리째 흔든 영일동맹(英日同盟)의 체결소식을 알리기 위해 호외를 발행한 데 이어 1905년 11월 22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전말을 낱낱이 보도한 호외를 장안에 뿌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1936년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소식을 알린 호외는 우리 언론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호외는 이를테면 종이신문 시절에 최신 업데이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버전(version)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호외는 과거에 전문신문과는 아무래도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말이라는 지적에 무게를 싣게 한다.
하지만 ‘약사시보’는 1958년 3월 29일자 발행호 이외에 별도의 1매 짜리 호외를 같은 날자로 발간했다. 후면은 백지상태인 가운데 광고없이 전면만 인쇄된 “第 四回 施行 藥師國試 合格者 名單(제 4회 시행 약사국시 합격자 명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1958년 3월 29일자 호외는 ‘약사시보’ 창간 이후 처음으로 발행된 호외였던데다 아마도 우리나라 전문신문 전체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최초의 호외 발간사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해 보인다.

“全學界의 關心을 모으고 있든 今年度 第 四回 藥師國家試驗 結果는(二月 二十一日부터 三日間 서울‧釜山‧大邱‧光州 等 四個 都市서 施行) 試驗終了 後 滿三十日만인 今 二十九日 上午 一◯時에 發表되었다.
이번 試驗에 總 應試者는 全國 九個 藥大서 六一五명이었는데 九二.七%인 五百七十一名이 合格되어 好成籍을 示顯하였다. 이날 合格者 發表現場인 保健社會部 別館 後庭에는 그간 애태우고 기다리든 受驗生들이 이른 아침부터 답至하여 緊張된 表情으로 壁報에서 各自 自己番號를 찾으려고 발돋움을 해가면서 大混亂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번 試驗의 合格者 發表期日이 諸般事情에 依하여 若干 늦어졌음으로 大部分의 受驗生들은 地方으로 歸鄕하고 서울에 滯留치 않음에서인지 이날 發表現場에 나온 學生들은 自己番號 以外에 同僚들의 當落의 與否를 알아낼라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었다. 한편 이번 試驗에는 韓國人으로서 外國에서 修學한 二名도 應試한 바 있었는데 不幸이도 失格되었다고 한다.“
합격자 명단은 수험번호와 성명의 순서로 총 571명의 합격자들이 빼곡하게 지면을 채웠다. 1958년의 제 4회 약사국시에는 총 615명이 응시하고 571명이 합격해 92.7%(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통계에서는 92.8%)의 합격률을 나타냈다. 이 호외는 아마도 각 약학대학에 집중적으로 배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이 1950년대에 시행된 약사 국가시험의 연도별 응시인원, 합격인원 및 합격률을 집계한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 1950년대 연도별 약사 국가시험 응시 및 합격 현황
년 도 | 회 차 | 응시인원 | 합격인원 | 합격률 |
1955 | 1 | 189 | 171 | 90.5% |
1956 | 2 | 261 | 252 | 96.6% |
1957 | 3 | 541 | 524 | 96.9% |
1958 | 4 | 615 | 571 | 92.8% |
1958 | 5 | 65 | 52 | 80% |
1959 | 6 | 746 | 609 | 81.6% |
1959 | 7 | 181 | 152 | 84% |
※ 자료출처: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1958년이라면 기존의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이외에 1953년에 일제히 설립되어 당시에는 아직 신설약대에 속했던 성균관대학교, 중앙대학교, 부산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및 효성여자대학교(현재의 대구가톨릭대학교) 등의 초창기 졸업생 다수와 1954년 문을 연 대구대학교(현재의 영남대학교), 조선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등의 첫 졸업생들이 배출된 해인 데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 체제로 운영되었던 각 대학들이 1954년 환도와 함께 본교로 복귀하면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학생들이 사회로 배출되기 시작한 원년에 해당하는 때이다.
이 때문일까? 1958년의 약사국시에는 전년도의 541명에 비해 훨씬 많은 인원이 응시한 것으로 나타났고 당연히 시험에 대한 관심도 또한 크게 높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이외의 약학대학 졸업생들이 약사국시에 처음으로 응시한 해는 지난 1957년이었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이 제한적이고 대단히 열악했던 당시의 현실에 미루어 볼 때 약사국시 합격자 명단 호외는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큰 관심을 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온라인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기 직전이었던 지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약업신문’ 편집국은 해마다 약사국시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오면 합격 여부를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했던 까닭에 며칠 동안 업무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본지의 약사국시 합격자 명단 호외는 단순히 합격 유무를 알리는 기능 이외에 ‘약사국시’라는 인생대사를 치른 졸업생들에 의해 그냥 버려지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합본철 자료를 살펴보면 ‘약사시보’의 호외는 ‘약업신문’으로 제호가 바뀐 이후인 지난 1969년 3월 13일자 본호와 별개의 4개면으로 다시 한번 발간됐다. 호외 1면을 보면 “18回 藥師國試 合格者 발표”(부제: 9百85명 合格(81.6%)‧首席(수석)에 金敬順(김경순)淑大(숙대)양” 제목의 관련기사에 이어 합격자 응시번호와 이름이 빼곡하게 게재되어 있다. 뒤이어 1970년 3월 9일에도 호외가 거듭 발행되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전문신문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호외는 1990년대 초에 들어 외부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밥그릇 싸움’ 또는 ‘집단이기주의’로 치부되었던 약사와 한의사의 한약조제권 분쟁이 발생했을 당시 대한약사회와 대한한의사협회의 기관지들인 ‘약사공론’과 ‘한의사협보’(현재의 ‘한의신문’)에 의해 이례적으로 연이어 발행되면서 회세를 집결하고 이해당사자들의 여론을 결집시키는 데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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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요, 호외~
호외(號外‧extra edition)는 미국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주간지 ‘보스턴 뉴스레터’(The Boston New Letter)가 창간된 해인 지난 1704년 그 해에 당시 근해에 출몰하던 6명의 해적들에 대한 처형사실을 보도한 6월 30일자 발행호가 첫 번째 사례인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한말 당시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지난 1902년 2월 19일 조선(朝鮮)의 국운을 뿌리째 흔든 영일동맹(英日同盟)의 체결소식을 알리기 위해 호외를 발행한 데 이어 1905년 11월 22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전말을 낱낱이 보도한 호외를 장안에 뿌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1936년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소식을 알린 호외는 우리 언론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호외는 이를테면 종이신문 시절에 최신 업데이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버전(version)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호외는 과거에 전문신문과는 아무래도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말이라는 지적에 무게를 싣게 한다.
하지만 ‘약사시보’는 1958년 3월 29일자 발행호 이외에 별도의 1매 짜리 호외를 같은 날자로 발간했다. 후면은 백지상태인 가운데 광고없이 전면만 인쇄된 “第 四回 施行 藥師國試 合格者 名單(제 4회 시행 약사국시 합격자 명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1958년 3월 29일자 호외는 ‘약사시보’ 창간 이후 처음으로 발행된 호외였던데다 아마도 우리나라 전문신문 전체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최초의 호외 발간사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해 보인다.

“全學界의 關心을 모으고 있든 今年度 第 四回 藥師國家試驗 結果는(二月 二十一日부터 三日間 서울‧釜山‧大邱‧光州 等 四個 都市서 施行) 試驗終了 後 滿三十日만인 今 二十九日 上午 一◯時에 發表되었다.
이번 試驗에 總 應試者는 全國 九個 藥大서 六一五명이었는데 九二.七%인 五百七十一名이 合格되어 好成籍을 示顯하였다. 이날 合格者 發表現場인 保健社會部 別館 後庭에는 그간 애태우고 기다리든 受驗生들이 이른 아침부터 답至하여 緊張된 表情으로 壁報에서 各自 自己番號를 찾으려고 발돋움을 해가면서 大混亂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번 試驗의 合格者 發表期日이 諸般事情에 依하여 若干 늦어졌음으로 大部分의 受驗生들은 地方으로 歸鄕하고 서울에 滯留치 않음에서인지 이날 發表現場에 나온 學生들은 自己番號 以外에 同僚들의 當落의 與否를 알아낼라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었다. 한편 이번 試驗에는 韓國人으로서 外國에서 修學한 二名도 應試한 바 있었는데 不幸이도 失格되었다고 한다.“
합격자 명단은 수험번호와 성명의 순서로 총 571명의 합격자들이 빼곡하게 지면을 채웠다. 1958년의 제 4회 약사국시에는 총 615명이 응시하고 571명이 합격해 92.7%(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통계에서는 92.8%)의 합격률을 나타냈다. 이 호외는 아마도 각 약학대학에 집중적으로 배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이 1950년대에 시행된 약사 국가시험의 연도별 응시인원, 합격인원 및 합격률을 집계한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 1950년대 연도별 약사 국가시험 응시 및 합격 현황
년 도 | 회 차 | 응시인원 | 합격인원 | 합격률 |
1955 | 1 | 189 | 171 | 90.5% |
1956 | 2 | 261 | 252 | 96.6% |
1957 | 3 | 541 | 524 | 96.9% |
1958 | 4 | 615 | 571 | 92.8% |
1958 | 5 | 65 | 52 | 80% |
1959 | 6 | 746 | 609 | 81.6% |
1959 | 7 | 181 | 152 | 84% |
※ 자료출처: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1958년이라면 기존의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이외에 1953년에 일제히 설립되어 당시에는 아직 신설약대에 속했던 성균관대학교, 중앙대학교, 부산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및 효성여자대학교(현재의 대구가톨릭대학교) 등의 초창기 졸업생 다수와 1954년 문을 연 대구대학교(현재의 영남대학교), 조선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등의 첫 졸업생들이 배출된 해인 데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 체제로 운영되었던 각 대학들이 1954년 환도와 함께 본교로 복귀하면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학생들이 사회로 배출되기 시작한 원년에 해당하는 때이다.
이 때문일까? 1958년의 약사국시에는 전년도의 541명에 비해 훨씬 많은 인원이 응시한 것으로 나타났고 당연히 시험에 대한 관심도 또한 크게 높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이외의 약학대학 졸업생들이 약사국시에 처음으로 응시한 해는 지난 1957년이었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이 제한적이고 대단히 열악했던 당시의 현실에 미루어 볼 때 약사국시 합격자 명단 호외는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큰 관심을 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온라인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기 직전이었던 지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약업신문’ 편집국은 해마다 약사국시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오면 합격 여부를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했던 까닭에 며칠 동안 업무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본지의 약사국시 합격자 명단 호외는 단순히 합격 유무를 알리는 기능 이외에 ‘약사국시’라는 인생대사를 치른 졸업생들에 의해 그냥 버려지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합본철 자료를 살펴보면 ‘약사시보’의 호외는 ‘약업신문’으로 제호가 바뀐 이후인 지난 1969년 3월 13일자 본호와 별개의 4개면으로 다시 한번 발간됐다. 호외 1면을 보면 “18回 藥師國試 合格者 발표”(부제: 9百85명 合格(81.6%)‧首席(수석)에 金敬順(김경순)淑大(숙대)양” 제목의 관련기사에 이어 합격자 응시번호와 이름이 빼곡하게 게재되어 있다. 뒤이어 1970년 3월 9일에도 호외가 거듭 발행되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전문신문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호외는 1990년대 초에 들어 외부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밥그릇 싸움’ 또는 ‘집단이기주의’로 치부되었던 약사와 한의사의 한약조제권 분쟁이 발생했을 당시 대한약사회와 대한한의사협회의 기관지들인 ‘약사공론’과 ‘한의사협보’(현재의 ‘한의신문’)에 의해 이례적으로 연이어 발행되면서 회세를 집결하고 이해당사자들의 여론을 결집시키는 데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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