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편 > 不備한 현실 반추시켜 준 특종기사 “馬山藥大生 動搖” (1954. 10.)
입력 2026.09.14 13:01 수정 2026.09.1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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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업신문’이 한국전쟁 직후 문자 그대로 불모(不毛)의 현실에서 창간됐다는 사실은 굳이 새삼스레 반추해 보지 않더라도 의문의 여지가 없는 공지의 사실에 속한다.

그런데 ‘약업신문’이 ‘약사시보’라는 제호로 처음 출범했을 당시의 불모와 같았던 현실을 웅변적으로 방증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 보이는 특종기사가 창간 직후였던 1954년 10월 2일자 1면에 게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다음은 “馬山藥大生 動搖 後援會는 收拾에 汲々” 제목으로 게재된 기사의 전문이다. 참고로 제목에 사용된 ‘々’는 일본어에서 같은 한자가 반복될 때 두 번째 한자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기호이다. 여기서는 발음은 “급급”으로 하지만, 이 기호 자체의 발음은 ‘노마’이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식 한자표기 관행이 한동안 계속 사용되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운영난에 봉착한 釜山大學校 馬山藥大는 지난 25일 밤 드디어 학생들이 짐을 싸가지고 26일에는 釜山으로 가버림으로써 馬山시민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卽 25일 제 1학기 시험을 마친 同校 1․2학년 180명은 그들끼리 회의를 열고 不備한 현 시설로서는 도저히 이 以上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조건이 구비될 때까지 釜山의 從前 藝術大學 자리에서 수업을 받자는데 합의를 보고 馬山시민에게 작별성명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부산대약대의 전신이 된 마산약대 관련기사가 실린 1954년 10월2일자 기사면. ©약업신문 

래 약학대학은 일제강점기 당시 지금의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약학전문학교 1곳 뿐이었다가 해방 직후 이화여자대학교가 약학과를 신설하면서 양교체제로 접어들었고, 1950년대 들어 바야흐로 약학대학 신설 붐이 고개를 들었다.

이 중 부산대학교 약학대학은 1953년 4월 13일 종합대학교 승격과 함께 약학대학 설치가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4월 13일 부산대학교 교사와 마산여자고등학교에서 제 1회 입학시험이 시행되면서 마침내 첫걸음을 뗐다. 현재의 부산대학교 약학대학은 원래 아직 전란의 포화가 멈추지 않았던 1953년 경남 마산(馬山)에서 개교했다.

당시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를 놓고 진주(晋州)와 치열한 유치경쟁이 펼쳐졌던 와중에서 마산이 도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권위있는 교육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데 뜻이 모아지면서 집중적으로 기울여진 노력의 결실이 바로 마산약대의 개교였다. 당초 마산시는 별도의 단과대학 설립을 문교부에 요청했는데, 부산대학 소속을 전제조건으로 설립이 인가되면서 시민들의 정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명칭은 “馬山藥學大學”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마산시 측의 시설 보완약속은 끝내 이행되지 못했고, 이로 인한 학생들의 반발로 인해 부산대학교 약학대학의 馬山시대는 불과 1년여 만에 날개를 접고 말았다.

다음은 함승기 주간‧편집인 및 인쇄인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고, 10월 9일자 1면에 “馬山藥大의 敎訓”(부제목: 科學敎育은 量이 않이라 質的敎育에 置重하라) 제목으로 게재된 사설의 일부이다.

본문의 내용 가운데 “南韓 유일의 국립약대”라고 기술한 부분은 해방 이후 경성약학전문학교가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전란 중이었던 1950년 9월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지만, 부산의 가교사에 머물러 있다가 1953년 9월에야 비로소 을지로 교사로 복귀해 약학교육의 재건을 위한 첫발을 떼는 등 혼란기의 와중이었음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원문의 한자는 상당부분 한글로 변경했다.

 “國立 釜山大學校 馬山藥學大學은 창립개교 1년 有餘로 운영난에 봉착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去 10월 5일 同校 재학생 180여명이 제 1학기 시험을 끝마친 후 馬山시민에게 작별성명을 발표하고 釜山의 從前校舍에서 이동강의를 받고져 馬山을 떠나 釜山으로 移去하였다는 것이다.

馬山시민의 숙원으로 약대를 馬山에 유치하랴는 운동은 慶南高等敎育機關完成推進委員會와 該地方官民有志의 열성으로 秦效되여 다년간의 宿望을 달성하고 南韓 유일의 국립약대가 창립되였든 것이다.

< 중 략 >

馬山藥大에 있어서 재정에는 馬山 양조업계와 방직업계를 배경으로 충실한 감을 주었으며 또 30만평에 달하는 방대한 토지기증으로 국내에 훌륭한 약초원을 창립한다하여 斯界에 큰 기대를 준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전한 시설과 불충분한 교수진으로 운영한다 함은 향학의 순진한 학도들께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약학이라는 과학은 이론과 실험이 병행해야만 완전한 교육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너무나도 불비하고 열악한 약학대학의 교육환경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한 약업신문의 사설. 1954년 10월9일자 1면. ©약업신문 

이처럼 1950년대에 전국에서 약학대학이 대거 신설되었을 당시의 너무도 불비하고 열악한 교육여건 문제는 이후로도 한동안 개선될 기미를 내보이지 못했다. 그 같은 현실은 ‘약사시보’ 1958년 2월 18일자 1면에 “忠北大學 藥學科의 不祥事” 제목으로 게재된 사설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忠北大學 藥學科 在籍學徒들은 同 大學에 있어서 一, 実習施設의 完備 二, 敎授陣營의 强化라는 重要事項을 陳情의 內容으로 中央黨局에 提出한 것이 말성이 되어 그 代表者로 指目되는 一部 學徒가 學校當局으로부터 勤愼處分을 當하게 되었다고 傳聞된다.”

“忠北大學 藥學科의 不祥事” 사설은 2년에 걸친 시설확충을 위한 노력이 일단락됐지만, 당시 처발받은 학생들이 유급되거나 다른 대학에 다시 입학하는 등의 희생을 치러야 했던 상황을 소상히 전하면서 한국전쟁 종전(終戰) 이후 우후죽순처럼 약학대학이 신설됨에 따라 불모의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었던 부작용이었음을 환기시켰다. 뒤이어 “施設이 不備하였음에도 不拘하고 新築認可를 한 敎育行政 當局에도 責任이 있거니와 이러한 파行的인 敎育을 實施하고 있는 敎育者 自身에도 그 責任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임으로써 全國學界의 龜鑑으로 할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따끔하게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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