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편 > ‘藥業新聞’ 창간 주도한 咸承基(함승기)사장..그는 누구인가?

‘약사시보’는 원래 등사기로 일일이 프린트해서 약업계 종사자들이 돌려보는 형태의 매체로 발간되었던 ‘약사주보’(藥事週報)를 이어받아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의 전신인 대한무역약종상협회(大韓貿易藥種商協會)가 기관지 형식의 타블로이드판 4면 주 1회 발행신문으로 창간하면서 첫걸음을 뗐다.
그냥 “기관지”라고 하지 않고 굳이 “기관지 형식의”이라고 한 것은 당시 ‘약사주보’의 경영이 협회와는 무관한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등사기로 일일이 프린트해서 약업계 종사들에게 배포하는 굳은 일을 자임했던 주인공이 바로 훗날 창간을 주도한 함승기(咸承基) 사장이다.
이 ‘약사시보’는 우리나라 전문언론 사상 가장 오랜 연륜과 전통을 보유한 본격적인 의약전문지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본지는 해방 이후 보건부(현재의 보건복지부)에 특채되어 한방담당관과 총무과장 등을 역임한 후 대한무역약종상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했던 함승기에 의해 본격적인 신문발간을 위한 준비작업이 착수됐다. 창간 준비작업은 정부 환도와 함께 1953년 10월 대한무역약종상협회가 서울로 올라와 중구 입정동(笠井洞) 광덕빌딩에 사무실을 둔 시점부터 거의 함승기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 본지 1976년 6월 28일자 14면에 게재된 이선주(李善宙‧생약학) 교수의 기고문 “回憶의 뒤안길”(부제: 停年退職 老敎授의 回顧) 28회 원고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藥業新聞의 전신인 藥事時報는 처음에 종로 3가 건너편의 廣德商會라는 韓式 2층집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郭仁榮, 咸承基, 洪鉉五, 崔永來씨 등이 활약했다. 이때 갓 졸업한 韓大錫교수(서울大藥大)도 同紙와 무척 친한 사이였다.“
함승기 사장과 관련해서는 홍현오 前 사장이 집필한 ‘한국약업사’ 276페이지를 보면 대강의 프로필이 게재되어 있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경영하기 어려웁고, 지속하기 어려웁고, 뿌리박기 어려운 약업전문지의 신문경영을 하나의 기업으로 처음 성공시킨 사람이 함승기(咸承基‧現 藥業新聞 社長)이다. 함승기는 강원도 출신으로 청년시절에는 체신부의 관리로 있었으나 일제시대 강권으로 조선생약통제주식회사(朝鮮生藥統制株式會社)가 설립되자 생산과장(生産課長)이란 요직에 발탁되어 삼천리 전역에서 생산되는 생약의 자원조사와 생산지도, 집하에 이르는 큰일을 맡아 방방곡곡을 편력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자 보건 부문에서 한방관계(韓方關係)의 행정사무관으로 들어가 일하다가 부산 피난 때 五二년 四월 대한무역약종상협회(大韓貿易藥種商協會)가 창설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전무이사(專務理事)로 취임하였다. 그가 약업전문지 관계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왜냐하면 그는 벌써 약업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록 통신형태의 프린트판이었기는 하나 기관지로 약사주보(藥事週報)를 발행하여 회원에게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약업사’ 276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서울에 환도하면 우리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약업신문을 합시다. 약업인의 회관으로 빌딩도 설 겁니다”라면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한국약업사’에서 언급된 ‘조선생약통제주식회사’는 1939년 강점기에 설립되었던 의약품 배급회사 ‘조선의약품통제주식회사’(朝鮮醫藥品統制株式會社)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는 동암선생의 이력서를 보면 1942년 8월 생산과장으로 재직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함승기 사장이 8‧15 해방 이전에 몸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강원약업(주)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조선의약품 산하 28개 통제 자회사들 가운데 강원도 지역을 관장하는 업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홍현오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상과를 다니다 중퇴한 후 해방 직후부터 언론계에 투신해 여성잡지 ‘여성계’(女性界) 편집장, 종합잡지 ‘신태양’(新太陽) 편집장, 서울신문사 기획위원 및 연감 편집실장 등을 거쳐 ‘약업신문’에서 주간, 사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약사시보’가 창간된 후 문자 그대로 한 두 차례 신문의 편집을 마친 후 곧바로 물러났고 후임으로 4월 한만상(韓晩相) 편집국장이 취임했다.
한만상 편집국장은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 1기 출신으로 일본에서 ‘일간제경타임스’(日刊帝京타임스) 편집장, ‘의사공론’(醫師公論) 정보부장 등으로 의학관련 잡지 편집에 종사하다 국내로 돌아와 ‘조선의약신보’(朝鮮醫藥新報)의 주간 겸 편집국장, ‘의사시보’(醫事時報) 주간 등을 맡았던 인물이다.
창간 당시의 함승기 주간‧편집인 및 인쇄인이 대한무역약종상협회 초대회장이라는 메리트를 신문경영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옹립했던 곽인영 사장으로부터 10개월여 만에 판권을 인수한 것은 정부가 개인에게도 신문발간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 것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10개월여 만에 판권을 인수했다고 하는 것은 후대에 잘못 전해진 부분으로 보인다. 신문합본을 펼쳐보면 함승기 사장이 본지 사장에 취임한 시기는 1956년이 아니라 실제로는 1958년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958년 함승기 사장이 취임한 이후 신문경영은 비로소 본궤도 위에 올라섰고 오늘날과 같이 대표적인 의약 전문언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확고한 초석이 다져질 수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점은 함승기 사장이 ‘약사시보’의 창간사를 직접 작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단지 신문경영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뜬 사업가일 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창간 직후부터 유려한 글들을 빈도 높게 본지에 게재한 한사람의 저널리스트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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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편 > ‘藥業新聞’ 창간 주도한 咸承基(함승기)사장..그는 누구인가?

‘약사시보’는 원래 등사기로 일일이 프린트해서 약업계 종사자들이 돌려보는 형태의 매체로 발간되었던 ‘약사주보’(藥事週報)를 이어받아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의 전신인 대한무역약종상협회(大韓貿易藥種商協會)가 기관지 형식의 타블로이드판 4면 주 1회 발행신문으로 창간하면서 첫걸음을 뗐다.
그냥 “기관지”라고 하지 않고 굳이 “기관지 형식의”이라고 한 것은 당시 ‘약사주보’의 경영이 협회와는 무관한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등사기로 일일이 프린트해서 약업계 종사들에게 배포하는 굳은 일을 자임했던 주인공이 바로 훗날 창간을 주도한 함승기(咸承基) 사장이다.
이 ‘약사시보’는 우리나라 전문언론 사상 가장 오랜 연륜과 전통을 보유한 본격적인 의약전문지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본지는 해방 이후 보건부(현재의 보건복지부)에 특채되어 한방담당관과 총무과장 등을 역임한 후 대한무역약종상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했던 함승기에 의해 본격적인 신문발간을 위한 준비작업이 착수됐다. 창간 준비작업은 정부 환도와 함께 1953년 10월 대한무역약종상협회가 서울로 올라와 중구 입정동(笠井洞) 광덕빌딩에 사무실을 둔 시점부터 거의 함승기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 본지 1976년 6월 28일자 14면에 게재된 이선주(李善宙‧생약학) 교수의 기고문 “回憶의 뒤안길”(부제: 停年退職 老敎授의 回顧) 28회 원고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藥業新聞의 전신인 藥事時報는 처음에 종로 3가 건너편의 廣德商會라는 韓式 2층집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郭仁榮, 咸承基, 洪鉉五, 崔永來씨 등이 활약했다. 이때 갓 졸업한 韓大錫교수(서울大藥大)도 同紙와 무척 친한 사이였다.“
함승기 사장과 관련해서는 홍현오 前 사장이 집필한 ‘한국약업사’ 276페이지를 보면 대강의 프로필이 게재되어 있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경영하기 어려웁고, 지속하기 어려웁고, 뿌리박기 어려운 약업전문지의 신문경영을 하나의 기업으로 처음 성공시킨 사람이 함승기(咸承基‧現 藥業新聞 社長)이다. 함승기는 강원도 출신으로 청년시절에는 체신부의 관리로 있었으나 일제시대 강권으로 조선생약통제주식회사(朝鮮生藥統制株式會社)가 설립되자 생산과장(生産課長)이란 요직에 발탁되어 삼천리 전역에서 생산되는 생약의 자원조사와 생산지도, 집하에 이르는 큰일을 맡아 방방곡곡을 편력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자 보건 부문에서 한방관계(韓方關係)의 행정사무관으로 들어가 일하다가 부산 피난 때 五二년 四월 대한무역약종상협회(大韓貿易藥種商協會)가 창설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전무이사(專務理事)로 취임하였다. 그가 약업전문지 관계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왜냐하면 그는 벌써 약업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록 통신형태의 프린트판이었기는 하나 기관지로 약사주보(藥事週報)를 발행하여 회원에게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약업사’ 276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서울에 환도하면 우리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약업신문을 합시다. 약업인의 회관으로 빌딩도 설 겁니다”라면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한국약업사’에서 언급된 ‘조선생약통제주식회사’는 1939년 강점기에 설립되었던 의약품 배급회사 ‘조선의약품통제주식회사’(朝鮮醫藥品統制株式會社)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는 동암선생의 이력서를 보면 1942년 8월 생산과장으로 재직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함승기 사장이 8‧15 해방 이전에 몸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강원약업(주)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조선의약품 산하 28개 통제 자회사들 가운데 강원도 지역을 관장하는 업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홍현오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상과를 다니다 중퇴한 후 해방 직후부터 언론계에 투신해 여성잡지 ‘여성계’(女性界) 편집장, 종합잡지 ‘신태양’(新太陽) 편집장, 서울신문사 기획위원 및 연감 편집실장 등을 거쳐 ‘약업신문’에서 주간, 사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약사시보’가 창간된 후 문자 그대로 한 두 차례 신문의 편집을 마친 후 곧바로 물러났고 후임으로 4월 한만상(韓晩相) 편집국장이 취임했다.
한만상 편집국장은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 1기 출신으로 일본에서 ‘일간제경타임스’(日刊帝京타임스) 편집장, ‘의사공론’(醫師公論) 정보부장 등으로 의학관련 잡지 편집에 종사하다 국내로 돌아와 ‘조선의약신보’(朝鮮醫藥新報)의 주간 겸 편집국장, ‘의사시보’(醫事時報) 주간 등을 맡았던 인물이다.
창간 당시의 함승기 주간‧편집인 및 인쇄인이 대한무역약종상협회 초대회장이라는 메리트를 신문경영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옹립했던 곽인영 사장으로부터 10개월여 만에 판권을 인수한 것은 정부가 개인에게도 신문발간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 것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10개월여 만에 판권을 인수했다고 하는 것은 후대에 잘못 전해진 부분으로 보인다. 신문합본을 펼쳐보면 함승기 사장이 본지 사장에 취임한 시기는 1956년이 아니라 실제로는 1958년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958년 함승기 사장이 취임한 이후 신문경영은 비로소 본궤도 위에 올라섰고 오늘날과 같이 대표적인 의약 전문언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확고한 초석이 다져질 수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점은 함승기 사장이 ‘약사시보’의 창간사를 직접 작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단지 신문경영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뜬 사업가일 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창간 직후부터 유려한 글들을 빈도 높게 본지에 게재한 한사람의 저널리스트였다고 하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