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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약사에게 번역이 필요한 이유
편집부
입력 2025-12-08 09:42 수정 최종수정 2025-12-2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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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약사.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핵 스릴러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House of Dynamite)>에는 약국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정체불명의 미사일이 본토를 향해 날아오는 일촉즉발의 상황, 대통령은 핵 가방을 들고 다니는 군사보좌관에게 대응 옵션을 보고받는다. 긴박한 가운데 보좌관이 전문 용어를 쏟아내자 대통령은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주문한다. "자네는 종일 들고 다니지만 난 처음 구경해. 무슨 식당 메뉴판 같네. 좀 도와달라고."

당황한 참모는 그제야 비유를 든다. "사실 저는 레어, 미디엄, 웰던이라 부릅니다."

이 장면은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매일 벌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약사는 약물이라는 강력한 무기의 전문가인 참모이고, 환자는 내 몸이라는 영토의 안위를 결정해야 하는 대통령이다. 약사가 의약 정보를 쉽게, 스테이크 굽기처럼 직관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친절해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이 환자의 생존과 직결된 결정을 돕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약학대학에서 우리는 정교하고 학문적인 언어를 습득한다. 작용제, 길항제, 반감기, 생체이용률 같은 용어들은 전문가들끼리의 소통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도구다. 하지만 이 도구가 약국에서 환자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면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거대한 장벽이 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라고 부른다. 내가 아는 것을 상대방도 알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내가 아는 복잡한 개념을 상대방의 눈높이로 낮추지 못하는 현상이다. 문제는 환자가 약국을 찾을 때 대부분 신체적,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라는 점이다. 통증이 있거나, 열이 나거나, 병원에서의 긴 대기로 지쳐 있다.

이럴 때 "이 약은 NSAIDs 계열 진통제라 위장관 점막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라는 설명은 환자의 뇌에서 튕겨 나간다. 대신 "이 약은 빈속에 드시면 위벽을 긁어내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쓰릴 수 있어요. 꼭 밥이라는 방패를 치고 드세요"라는 설명은 뇌리에 박힌다.

무엇보다 의약 정보를 쉽게 설명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영화 속 대통령이 설명을 듣고 핵 버튼을 누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듯, 환자 역시 이 약을 먹을지 말지, 수술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최종 권한을 가지고 있다.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보의 비대칭이 극심한 상황에서 그런 동의는 어려운 일이다. 약의 치료상 유익과 부작용을 환자가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결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항응고제(와파린)를 복용하는 환자에게 "INR 수치 모니터링이 필요하며 비타민 K 섭취를 주의하라"고 말하는 것과, "이 약은 피를 묽게 만듭니다. 청국장이나 녹즙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약효가 떨어져 피가 다시 끈적해질 수 있어요"라고 설명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후자의 설명을 들은 환자만이 오늘 저녁 식탁에서 무엇을 먹을지, 건강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쉬운 설명은 약사가 독점하고 있던 정보 권력을 환자에게 이양하여, 그들이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돕는 과정이다.

구체적이고 쉬운 비유는 환자의 행동을 바꾼다. 천식 흡입기를 “잘 흔드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스무 번 흔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따르기 쉽다. 복약 이행(Adherence)은 강요가 아니라 이해에서 나온다. 환자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자신의 언어로 납득했을 때 비로소 약사의 지시를 따른다.

"어려운 내용을 비전문가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좋은 이론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약사의 진정한 실력은 화려한 전문 용어의 나열이나 난해한 지식의 과시에 있지 않다. 가장 복잡하고 전문적인 약학적 지식을, 약국을 찾아온 사람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최고의 전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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