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
'위기의 제약호', 돌파구는 있는가
리베이트 차단, 다국적제약 시장 확대 단초될 수 도
약가인하 필요하면 단계적 적용이 순리
2009년, 한국의 ‘제약 號’가 위기다.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국가 경제에 일익을 담당하며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국가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제약호가 흔들리고 있다.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약산업 세계 10대 강국에 들어선 한국의 제약산업은 글로벌로 짜여진 국내외 시장에서 유수의 다국적 제약기업과 경쟁이 아닌, 생존에 급급한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 잘 넘기면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분석도 많지만, 현재가 어렵다.
‘위기’, 현재의 제약산업과 제약사들이 처한 현실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제약계 내에서는 큰 제약회사, 중소제약사 가릴 것 없이 생존에 대한 고민이 팽배하다.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도 계속하고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cGMP공장 건설 등에 수백억에서 수천억씩 투자하고 있지만, 수년 전부터 이어져 정점에 오른 정부의 정책은 이 같은 제약계의 투지와 의지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리베이트 근절법, ‘저가구매 인센티브제’를 통한 약가인하 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올 8월 1일부터 발효된 ‘리베이트 근절법’은 사실상 국내 제약사들의 영업 마케팅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리베이트 근절법 발효, 경쟁력은?
그간 국내 제약사들이 의사들에 대한 리베이트 제공으로 매출을 키워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매출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진짜 문제는 리베이트를 제공할 수 없게 되며 발생하는 제약계 내 역학관계의 변화다.
의사들이 그간 리베이트를 근거로 제네릭을 처방해 왔다고 가정할 때, 리베이트 제공 금지는 역으로 오리지날 제품을 보유한 다국적제약사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약사들이 적극 동참의지를 비추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한 켠에 품고 있는 이유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리베이트 수수여부에 상관없이 의사들이 제네릭을 처방하면 좋은데, 사실 제약계 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보지 않는다. 리베이트가 만연하던 시절에도 다국적제약사들이 시장점유율을 높여 왔는데, 원천 봉쇄되면 뻔하다”며 “매출 하락도 중요하지만 국내 시장을 토종 제약사들이 지킬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제약사들이 점유율이 계속 떨어질 것이고, 역전되거나 더 떨어지면 회생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제약사들의 체질개선을 통한 경쟁력 강화 유도는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당장 그 시기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것. 여기에는 국내 제약사들이 무너지면 건강보험재정 안정화에도 역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시각도 깔려 있다.
정부 유통TF팀, 약가인하 드라이브
실제 제약계에서는 저가구매 인센티브제로 대변되는 약가인하가 적용되면 리베이트를 주지 못하는 데 따른 경쟁력 상실에 더해 파급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리베이트야 진일보한 영업 마케팅력으로 커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약가인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
다른 제약사 관계자는 “업계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많다. 이를 계기로 제약사들이 연구개발 생산 마케팅으로 가면, 결과적으로 국내 제약산업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며 “하지만 약가가 계속 인하되면 제약사들은 연구개발에 투입할 자금이 없어진다. 신약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약가인하로 이 자금을 확보할 수 없으면, 연구개발을 통한 신약개발과 이를 통한 국제 경쟁력 확보라는 공식이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인 비전제시가 안된 상태에서 약가인하를 목적으로 만 밀어붙이기에는 따질 것이 많다는 진단이다.
한국제약협회가 보건복지가족부 ‘의약품 가격 및 유통 선진화 TF' 주최로 지난달 28일 열린 토론회에 불참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
제약 도매, 저가인센티브 반대
‘의약품 가격 및 유통 선진화 TF의 약가제도 개선 방향과 대원칙이 제약산업의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어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리베이트야 개별 제약사들이 감수할 문제지만, 저가구매 인센티브 등 약가인하 정책은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저가구매 인센티브로 리베이트는 줄겠지만 요양기관의 작용에 의해 가격이 한없이 내려가면 당장은 아니겠지만 몇 년 후면 제약사의 연구개발은 없어지고 글로벌시대에 생존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의약품유통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제약산업이 힘들어지면, 이 영향은 마진으로 경영하는 도매업계에 고스란히 올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때문에 제약계와 달리 실거래가상환제도에 대한 개선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도매업계에서도 저거구매 인센티브제는 제약계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유통가 한 인사는 “정부가 제약산업 유통산업 선진화를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살아서 이익을 내야 투자도 하고 선진화도 한다. 저가구매 인센티브를 하면 이익 내기가 불가능해지는데 무슨 선진화냐. 발을 뻗을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구개발 투자 여건 조성해줘야
제약계 일각에서는 공장 건설에 대해서도 불안해하고 있다. 미국 유럽 수출을 위해 cGMP 공장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고 있지만,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많다.
cGMP 공장에서 밸리데이션에 맞게 충실하게 생산된 의약품이라 해도 미국 유럽 등 선진 의약품 시장에서 쉽게 받아들여줄 지 의문이라는 것.
정부의 유도대로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 쫓아가면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다. 제약산업 구조조정을 목적으로 한 정책이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이든 정부정책에 충실히 따르고는 있지만, 동남아 시장에 대한 수출을 강화하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블록버스터의약품 특허만료, 연구개발 생산성 악화, 허가규제 강화, 의약품가격통제 등 다양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 글로벌 의약품시장에서 거대 다국적제약사들은 복합적인 위기극복을 위해 상대적으로 고성장하고 있는 제네릭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제약사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력 확보도 좋고, 내수시장 한계에 봉착한 국내 제약사들이 세계 속의 제약으로 뻗어나가려면 갖추기는 해야 할 것”이라며 “ 하지만 미국과 유럽도 자국 내 제약사들을 보호하는 추세다. 갖추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무조건 압박과 압력을 넣을 일만도 아니다. ”고 지적했다.
수출은 화두가 됐고, 구조조정과 체질개선도 좋지만, 국내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달러 빚’을 내서라도 반드시 갖춰야 하는 식으로 진행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제약계에서는 연구개발에 있어서도 한마디 하고 있다. 국내 제약산업계가 신약연구개발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일천한 역사 속에서도 많은 신약을 내놓으며 신약 강국의 위치에 들어섰지만, 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실제 국내 제약사들이 연구개발을 등한시 했던 것도 아니다.
국내 주요 연구개발중심 제약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비율은 매출액 대비 연평균 6.2%에서 6.6%로 다국적제약기업들 보다 매출액 대비 투자비율 면에서 열세지만 순이익 대비 투자비율은 70% 이상으로 다국적제약사보다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제약산업연구개발 백서 2009', 2008년 71.5%, 2009년 74.3%)
리베이트가 없었으면 그만큼 투자여력이 더 많았을 수는 있지만, 연구개발을 등한시했던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결국 리베이트 근절 공감대는 형성된 만큼, 국내 제약산업의 체질을 개선하고 선진화를 유도하는 정책과 함께 재원과 시스템 부족으로 기술경쟁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추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권구
2009.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