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바람직한 R&D방향]글로벌화 대응방안 마련하라
국내 제약 산업 구조의 재편
그동안 시장에서 제네릭 의약품 중심으로 성장해온 국내 제약 사업은 한미FTA와 약제비 적정화 방안 등 경영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는 일련의 제도적 변화들 속에서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최근의 제도 변화와 그로 인한 제네릭 사업 환경의 악화는 국내 제약업계의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촉발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제약 산업 구조 재편에 있어 예상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자면, 매출액 100억 미만의 군소 제약사들이 정리되고 상위 제약사들의 시장 지배력이 강화될 것이란 점이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전면 시행되면 동일 성분 의약품 중 일부만 보험급여 대상으로 등재되고, 대다수의 약품들이 퇴출될 것이기 때문에 단순 제네릭 중심으로 영업을 해오던 군소 제약사들이 정리될 전망이다.
보험급여 대상에서 제외되는 회사들의 유일한 탈출구는 보험과 무관한 일반의약품 영업을 확대하는 것이지만, 일반의약품 시장은 이익률이 낮고 경쟁이 심한 레드오션 시장인데다 식약청의 의약품 생산시설 기준 강화 계획(GMP 로드맵)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군소 제약사들이 정리되면 다국적 제약사의 국내 법인들과 국내 상위 제약사들의 시장 점유율이 더 확대되면서 대형 제약사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근의 환경변화는 경쟁력이 취약한 군소 제약사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것이지만 상위 제약사들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그동안 진척이 없었던 제약업계의 구조조정 역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약업계 환경변화가 국내 상위 제약사들에게 기회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회요인일 뿐 현실화 될지 여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국내 제약 산업 점유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퍼스트제네릭이든 개량신약이든 국내 제약사들이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글로벌 제약사로 한 단계 도약하려던 국내 제약 산업의 꿈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모든 군소 제약사들이 퇴출 대상 명단에 오르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군소 제약사들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며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을 것이다.
예컨대 군소 제약사들은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니치(Niche)마켓의 공략,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피해갈 수 있는 비급여 시장의 공략, 취급품목의 전문화 및 특성화 등을 통해 새로운 환경변화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결국 급변하는 환경변화 속에서 제약사별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단계별 맞춤형 대응방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전 세계 제약 산업 '분업구조'로의 편입
그렇다면 현 국내 제약 산업의 수준(상위 제약사 기준)을 고려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제약 산업의 글로벌화를 추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국내 제약사들에게 가장 적절한 발전 모델은 '디스커버리 영역'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고착화 되고 있는 신약개발 분업구조 속으로 편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국내 제약사들이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이 찾고 있는 신규 신약후보물질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기술력을 배양하고 해외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내 제약사 규모가 상대적으로 영세한 상황이어서 연구비가 신약 개발을 위한 임계 규모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글로벌 신약의 개발에는 수천억 원의 연구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독자적으로 신약 개발을 완료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한 것이다. 따라서 비임상이나 임상 초기단계까지 개발한 후, 거대 다국적 제약사에 라이선스하는 방식이 최선의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해외시장 진출 노력의 활성화
한미 FTA와 약제비 적정화 방안으로 인해 국내 시장에서의 제네릭 사업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므로,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내 상위 제약사들을 중심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려는 노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시장 진출은 그 방법과 목표에 따라 단기 전략과 중장기 전략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제네릭과 개량신약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여 세계 50위권 규모의 외형 성장을 이루는 것이고,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신약을 개발하여 세계 20위권의 글로벌 제약사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먼저 단기 전략을 살펴보면 국내에서의 제네릭 및 개량신약 개발 경험을 토대로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과 동남아시아, 중동, 중남미 등 개도국의 제네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현재 국내 제약사들은 제네릭 및 개량신약 개발 능력은 있으나, 해외시장에서의 특허 및 허가 문제와 국제 기준에 미달하는 생산설비 문제로 인해 완제품 수출은 거의 못하고 원료 의약품만 일부 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식약청의 GMP 로드맵에 따라 국내 제약사들의 생산설비가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기 때문에, 각 나라의 제도적 특성에 맞는 특허 및 허가 전략을 잘 세운다면 제네릭 수출을 통해 현재의 국내 매출에 맞먹는 매출 확대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전 세계 제네릭 의약품 시장은 물량으로는 전체 의약품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지만, 매출액으로는 2004년 기준 396억 달러(약 40조원)로 전체 의약품 시장(같은 해 5,500억 달러)의 7%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 시장 규모가 8조원 정도이고 1위 기업의 연 매출이 5천억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세계 제네릭 시장이 국내 기업들에게는 작지 않은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시장의 예를 들면, 제네릭 의약품이 출시되면 의료보험 회사들의 정책 때문에 제네릭 처방이 급증해서 6개월 안에 오리지널 시장의 70% 정도를 잠식하게 되며, FDA의 허가를 먼저 통과하여 1st 제네릭으로 등록되면 후발 의약품이 나올 때까지는 오리지널 약가의 70% 정도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10억 달러 시장의 블록버스터 신약에 대해 1st 제네릭 출시가 성공한다면 6개월만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 하더라도 2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며, 이는 국내 10위권 기업들의 1년 매출액에 해당한다.
미국의 경우 도매 유통망이 소수 기업을 중심으로 잘 구축돼 있고, 제네릭 의약품은 약효에 대한 별도의 마케팅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케팅을 위한 제휴 없이도 미국 시장 진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제네릭 의약품의 미국 시장 진출 時 가장 큰 난관은 특허 분쟁에 대응하는 것인데, 이는 기술적으로 특허 회피 전략을 잘 세우고 1,000~1,500만 달러 정도의 소송비용을 감수할 수 있으면 극복 가능한 장애물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개량신약은 기존 오리지널 제품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단순 제네릭에 비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고, 적절한 기술적 혁신이 수반될 경우 투입된 노력에 비해 큰 수익을 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국내는 제제 기술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품목에 따라서는 해외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개량신약 개발이 가능하다는 점은 국내 제약 산업에 있어 큰 기회요인이 될 수 있다.
신약개발…국내 역량 총결집 해야
제네릭과 개량신약을 통한 해외시장 진출은 매출 확대와 외형성장을 위한 단기적 전략은 될 수 있으나, 글로벌 제약사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600조원 규모의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20위권의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체 개발한 신약 제품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제네릭과 개량신약을 통한 외형성장을 도모하면서도, 중장기적으로는 신약개발에 집중하여 사업구조를 신약중심으로 전환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국내 제약사들 역시 신약개발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서 그 동안 신약개발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으며, 최근의 환경변화로 인해 이러한 노력이 보다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현재 국내 제약 산업의 자원과 역량으로는 신약개발 회사로 곧바로 전환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부와 학계, 연구소 등의 지원도 필수적이라고 본다.
특히 산학연 협력을 통해 디스커버리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정부는 산학연 협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산학연 협력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과제로는 출연연구소의 연구 수행 체제 개선,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적정 포트폴리오 설계, 정부연구개발사업의 공동연구 제도 개선,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기술료 제도 개선, 라이선스 전문가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산학연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는 신약개발지원센터의 설립, 신약개발전략위원회의 운영, 신약개발 전문펀드의 운용을 제안할 수 있다.
이미 적정 포트폴리오 설계나 신약개발지원센터 설립 등의 과제는 과학기술혁신본부 등을 통해 정책화 되고 있은 상황이다. 남은 과제로는 기술료 제도 개선이나 라이선스 전문가 양성, 신약개발 전문펀드의 운용 등이 있다.
신약 후보물질에 대한 국내 주체들 사이의 기술 이전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약 개발 분야에서 위험 분산을 위해 관행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라이선스 계약 방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기술료 제도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즉 해당 후보물질을 발굴하는데 투입된 정부출연금액의 규모와 상관없이 그 물질이 창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의 규모에 따라 계약 규모가 결정되고, 계약 금액의 지불도 주체들이 합의한 방식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계약 선도금이 투입된 정부출연금보다 적더라도 계약 체결에 문제가 없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국내외 주체들 사이의 원활한 협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라이선스와 협력 계약을 실무적으로 잘 추진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많아질 필요가 있고, 선진국에서 관행으로 정착된 사례들이 국내에서도 폭 넓게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들은 협력이 많아질수록 민간 부문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부도 단기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교육 프로그램은 어느 한 기관이 추진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신약 개발 전문 펀드는 제약업계의 부족한 신약 개발 재원을 보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온 정책 과제이다. 신약 개발 프로젝트별로 투자를 한다는 취지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라는 이름으로 제안되기도 하였다.
이 펀드는 특정 신약 개발 프로젝트의 개발비용(주로 비임상시험부터의 개발비용)을 지원하고, 그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수익이 발생할 경우 사전에 합의된 이익 배분율에 따라 수익을 배분함으로써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는 펀드이다.
이 펀드는 기본적으로 신약 개발의 자금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부수적으로는 위에서 언급된 시스템 실패 영역을 보완해주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즉 펀드의 운용사가 산학연의 신약 개발 과제 중 유망하지만 기업에 이전되지 못하고 있거나 개발비용이 없어서 사장될 처지에 있는 과제들을 발굴하여 개발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기존의 혁신 체제가 지원하지 못하는 과제들을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펀드의 운용을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라이선스 전문가에게 위탁할 경우에는 이러한 역할이 보다 적극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
제약사 과감한 R&D 투자 필요
결국 신약개발의 최종 주체는 정부나 출연연구소가 아닌 제약사라고 할 때, 제약사들의 과감한 투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국내 제약사들은 타 업종에 비해 매우 견실하며,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투자를 위한 자금 여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그간 국내 제약사들이 과감한 혁신 보다는 현실에 안주했던 면이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국내 제약사들이 보수적인 형태의 경영방식으로 안정적인 수익과 성장을 도모했다면, 이제는 보다 과감하게 자기혁신을 추구해야 하며 어느 정도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개발 자체가 모험이라는 태생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각오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손정우
200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