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의약품 정책의 중심은 제품이 아니라 환자다”
이형기
<캘리포니아주립대학샌프란시스코분교약학대학 부교수, 디렉터, 의약품개발과학센터, UCSF Washington DC Center>
배경 및 문제제기
2006 년 7월 26일 보건복지부는 의약품의 선별등재 제도 도입을 주요내용으로 하는「국민건강보험요양급여의기준에 관한 규칙」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또한, 이 규칙의 시행세칙 마련을 위해「신의료기술등의 결정 및 조정 기준」개정안이 입안예고된 바 있다. 이들은 의약품 비용지출을 억제하는 여러 대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약제비적정화방안」이라고불린다. 한편, 지난 11 월 23 일에는규제개혁위원회본회의에서 보건복지부의 개정안이 거의 원안대로 통과됨으로써 제도시행을목전에두게됐다.
「약제비적정화방안」의골자는다음과같이크게셋으로나누어볼수있다.
1. 포지티브리스트(positive list): 우수한비용-효과성(cost-effectiveness)이 입증된 의약품만 건강보험의 급여를 인정. 선별등재라고도 함.
2. 일방적약가인하: 최초복제의약품이등재될때신약의가격을 20% 인하하고, 복제의약품가격은 인하된 신약가격의 80%로 산정.
3. 건강보험공단의 가격협상력 강화: 예상사용량에 근거한 상한 가격 결정.
이후 1 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30% 이상 사용량이 증가한 의약품의 가격을 재조정(가격-수량 연동제).
약가통제로 약제비지출을 억제할 수 있는가?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은 직접적인 약가통제 수단을 사용해 약제비 지출을 억제하겠다는 정책의지를 담고있다. 즉, 비용-효과성평가에 근거한 선별등재, 약가인하, 건강보험공단 의약가협상력 강화, 가격-수량연동제 등은 모두 약제비 지출을 ‘약가’ 측면에서 접근한 정책 수단들이다.
따라서, 정부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약가통제를 통해 약제비 지출을 절감할 수 있다는 충분한근거(evidence)가 제시돼야 한다. 구체적으로, 약가가 약제비 지출을 결정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이며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들의 영향은 미미하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또한, 실제로 약가를 통제함으로써 약제비 지출을 절감한 경험적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약가 이외에도 약제비 지출을 결정하는 중요한, 그러나 쉽게 간과되는 다른 요소가 있다는것이다. 요컨대, ‘수요자’가 매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약 소비량을 가리킴이다. 또한, 약소비량을 결정하는 수요자, 즉 환자의 가치 체계는 비용-효과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정부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약가통제의 효과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약제비지출 = 약가 약소비량’이라는 관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다. 즉, 정부의 주장처럼 약가를 통제해 약제비 지출을 절감하려면 다음 두가지 전제조건이 ‘모두’ 만족돼야 한다.
그런데, 「약제비적정화방안」이 약가통제의 수단으로 제시한 선별등재제도가 시행되면 신약, 특히 혁신적인 신약이 가장 먼저 규제의 장벽에 부딪힐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은 상대적으로 고가이며, 도입초기에 신약의 진정한 혁신성을 판단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가의 신약은 건강보험의 급여대상에서 제외될 개연성이 높다.
물론, 이 과정에서 건강보험공단은 약제비 지출을 절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을 사용하려는 의사나 환자의 수요까지 건강보험공단이 통제할 수는 없다. 결국 새제도에서는 늘어난 약가부담이 고스란히 환자와 그 가족에게 전가되는 셈이다. 더욱이, 국가전체로 보아서는 오히려 약가부담이 증가하는 기현상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왜냐하면, 환자는 구매력을 바탕으로 건강보험급여의 대상에서 제외된 신약의 가격을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이다.
약가 통제가 약제비지출 감소로 이어진다는 정부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한 두 번째 전제 조건은 약가 통제의 전후에 약소비량의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원리의 기본을 이해하면 이러한 가정이 타당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가격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수요의 증가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약물치료에 대한 의존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일방적인 약가 인하는 고가약 사용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춤으로써 약소비량의 촉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심해지면 약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처방 또는 약소비행태와 같은 도덕적 해이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정부는 가격을 수량에 연동시키는 방안도 함께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과잉규제에다 사유재산권침해의 소지가 높다. 무엇보다도 이는 이미 약소비량이 늘어난 다음에 사후약방문격으로 적용될 조치이므로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수량이 늘어 가격을 낮추면 이는 또다른 약소비량 증가의 유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한나라의 정책을 결정할 때 타당한 근거의 제시나 입증없이 입안자의 막연한 기대나 또는 일방적 주장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다. 사실, 이 정부는 ‘근거제시’를 입버릇처럼 되뇌왔다. 예를들어, 정부는 의료계를 향해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en, EBM)’ 의 실시를 요구하고, 심지어는 이를 이용해 다분히 당근과 채찍의 양면성을 띤 보건의료정책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정부가 언제 한번이라도 ‘근거중심정책(Evidence Based Policy)’을 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어, 복지부와 심평원은 2004 년 7월부터 약물 사용평가(Drug Use Review, DUR) 제도를 강제적으로도입했다. ‘병용금기’ 또는 ‘특정연령대금기’ 라고이름붙여진 170 여 개의 경우를 미리 정해놓고, 전산심사를거쳐의사의 처방이 조제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한 게 이 제도의 골자다. 정책의 주창자이며 집행자인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DUR 제도가 ‘의약품의처방이적절하고의학적으로필요하며 부정적인 의학적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또는 시스템”이라고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가?
결국 직접적인 약가통제수단을 통해 약제비지출을 줄이겠다는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은 이론적 바탕에서도, 경험적 증거 측면에서도, 그리고 과학적 근거의 제시라는 관점에서도 모두 실격이다. 약가통제로 약제비 지출이 억제된다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의 기대처럼 약제비지출이 절감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개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다른 나라의 반복된 경험들이 이러한 우울한 예측을 뒷받침 하고 있다. 결국, 「약제비적정화방안」은표면적타당성(face validity)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약가통제는모두를패자로만드는정책
정부의 「약제비적정화방안」에 따르면, 곳간 열쇠를 맡은 집사가 이제는 안방을 차지하고 주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형국이다. 당연히, 이것은 처음 기대와는 다르고, 옳지도 않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저비용 저급여로 시작했다. 물론,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이글의 논점대상 밖이다. 중요한 것은 저비용은 그동안 크게 바뀐 게 없는데, 급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 정부는 ‘보장성을 80%까지 확장하겠다’라는 식의 선심성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들어오는 보험료는 제한돼 있거나 미미한 수준으로 증가하는 데도 급여의 내용과 범위를 무작정 넓히면 재정이 거덜난다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포지티브리스트제도시행의 최대 수혜자는 재량권을 극대화한 보건기관으로 그 중심인 복지부를 비롯,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험공단 등 정부조직이 될것”이라는 지적은 매우 정확하고 의미심장하다. 동시에, 정부(건강보험공단)는「약제비적정화방안」이 원안대로 시행되더라도 결국 패자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제도시행과는 관계없이 재정운용의 효율성과 관료적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번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선별등재제도가 실시되더라도 진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강변해 왔다.
약가통제, 특히 선별등재제도는 신약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림으로써 환자의 건강수준을 감소시킴은 물론, 약제비를 제외한 기타 의료비의 지출을 늘려 건강보험의 재정을 악화시킨다는 증거들이 쌓여 있다.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은 국민의 건강을 떨어뜨려 보건의료의 패자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다. 더 나아가, 건강수준의 감소로 의료서비스 이용이 늘어나 보험재정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국민은 추가비용을 부담함으로써 또 한번 패자가 되는 셈이다.
이제, 제약기업에 대해서 생각해보자.「약제비적정화방안」이 의약품의 공급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제약기업이 일차적인 패자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단순히 제약기업의 수익성이 감소하는 정도로 사안이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비용-효과성은‘ 전가( 傳家) 의보도( 寶刀)’ 인가?
비용-효과성이라는 용어가 자주 또는 주권처럼 국민들의 애국적 감성을 자극하는 언사들과 개념적으로 동치인 양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됐다. 어쨌든, 정부는 비용-효과성을의약주권과결합시킴으로써일단국민으로부터「약제비적정화방안」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비용-효과성은 그동안 보건의료분야의 엘리트였던 의료계, 또 미운털이 박힌 다국적 제약기업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좋은 도구처럼 인식된다.
과연 비용-효과성이 의약품 또는 치료법 선택의 최고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잘못 통용되고 있는 개념의 혼란부터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비용-절감(cost-reduction)’ 이 마치 비용-효과성처럼 오해되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나, 이 둘은 절대로 같지않다. 특히, 보건의료분야에서 비용-효과성은 거의 대부분 비용-상승에 근거 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인 성과변수(outcomes variable)를 이용한 비용-효과분석이 ‘정립(established)’된 학문적 진리인양 잘못 알고 있다. 이는 특히 정부나 전문성이 결여된 시민단체들의 주장 중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비용-효과분석의 실효성은 차치하고라도 그 개념과 방법론적기준에대한합의조차아직이루어지지않은상태이다.
비용-효과성은 의약품 허가유무를 판단하는 유효성(efficacy), 안전성(safety)과는 달리 보편타당한 포괄적 기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시점과 상황이 달라지면 비용-효과성의 결론을 외삽(extrapolation)하거나 일반화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비용-효과성 분석의 결과를 이용해 의약품의 선별등재를 결정하는 과정에 여러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비용-효과 성분석 결과를 제대로 해석해 타당한 급여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막대한 비용과 투자가 전제 돼야 하는 일이다.
비용-효과성에 근거해 의약품의 선별 등재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방법론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호주처럼 비용-효과 분석을 타당하게 실시할 수 있는 자원과 경험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지 검정된 바 없다. 물론, 정부는 스스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강변 했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라든가 잘 생겼다라든가 하는 말처럼 이것은 본질적으로 남들이해야 의미있는 주장이다.
이처럼 효용과 실현 가능성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정부가제도 시행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이해하기 힘들다. 비용-효과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정부부터 먼저 제도 운용의 비용-효과성을 따져야 하는 게 아닌가?
따라서 비용-효과 분석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혁신적인 의약품이 환자에게 사용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해당의약품이 환자에게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효과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더 큰 잘못을 범하는 일이다.
약가 통제는 혁신의 적
우리나라의 제네릭 의약품의 판매량 및 매출액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자. 첫째, 우리나라는 비교적 철저한 약가통제를 시행해온 나라이다. 따라서, 제네릭 의약품의 판매량시장 점유율이 낮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훨씬 높은 제네릭 의약품의 판매량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다.
둘째, 판매량 시장점유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매출액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높다. 그래서, 매출액 시장점유율 대비 판매량 시장점유율의비(value to volume ratio)가 아주 높다.
사실, 이러한 결과에 우리나라 의약품제도의 모든 문제점이 녹아있다. 그리고, 이것이 약가통제를 위주로한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이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매출액 시장점유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판매량 시장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제네릭 의약품이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된 시장원리에 따라 유통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제네릭 의약품이 가격경쟁력을 근간으로 시장을 점유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또한, 판매량 시장점유율이 높기는 하지만 미국 등에 비해 아주 높지는 않은 데 반해 (47% 대 69%), 매출액 시장점유율은 무려 다섯배(49% 대 11%)에 달한다는 것은 제네릭의약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찰은 그동안 국내의약품시장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무엇보다, 정부는 제네릭 의약품을 생산하는 국내제약회사를 지원한다며 지나치게 높은 제네릭 의약품 가격, 즉 오리지날약의 80%를 허용하는 매우 편향적인 선심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가격을 받은 국내제약회사들이 제대로 된 신약을 개발함으로써 국민건강의 증진에 기여한 바는 없다.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도덕적 해이이다. 즉,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감당했던 연구중심의 제약기업과는 달리 이들 국내제약기업은 거의 무임승차(free rider)해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무임승차 뒤에는 고가의 제네릭 의약품, 그나마 그것도 제대로 된 질관리를 거치지 않고 생물학적 동등성을 입증함으로써 제네릭 의약품의 허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현재 허가제도에서도 직접 생물학적동등성을 입증하지 않고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국내제약기업의 무임승차는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주장처럼 우리나라의 약제비가 과다하게 지출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경쟁의 원리에 근거한 의약품 유통 및 약가정책을 펴지 못한 정부의 실책 때문이다. 결코, 보건의료계라든가 혁신적 신약을 개발해 국민건강의 증진에 이바지 해온 제약기업 탓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의료계와 환자가 무분별하게 의약품을 사용하고, 신약개발을 한 제약기업이 대단한 폭리라도 취하는 것처럼 매도함으로써 타당성이 결여된 약가 통제 위주의「약제비적정화방안」을 밀어 붙이는 이 정부의 도덕적 해이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해치-왁스만법이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던 이면에는 정부가 어설프게 시장에 개입해 약가를 통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즉, 연구중심의 제약기업은 강력한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통해 혁신을 중단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동시에 특허만료 후 양질의 제네릭 의약품이 저가에 공급될 수 있던 것은 시장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약가통제는 혁신의 적이다. 모방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차등적 약가통제는 더욱 큰 적이다.
특히 건강보험공단이 제약기업을 상대로 약가협상을 진행할 때 보험재정의 안정적 운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예상은 근거없는 추측이 아니다.
결국, 건강보험공단과 제약기업의 약가협상이 매끄럽지 못하면 의약품 등재는 지연되고, 이는 국민(환자)의 의약품 접근권이 제한됨을 의미한다. 아무리 비용-효과성이 입증된 의약품이라할지라도 보험급여의 대상으로 최종 등재되는 과정이 매우 험난해질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약가협상이 지연됨으로써 이 기간동안 모든 약제비가 환자와 그 가족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떠넘겨질 수도 있다. 그리고, 신약의 경우에 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이 본질적으로 ‘제품중심적(product-centered)’이기 때문이다. 비용-효과성에 근거해 의약품의 선별등재를 판단할 집중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비용-효과성을 판단하기 까다로운 경우(marginal cost-benefit)이다.
이처럼 비용-효과성판단이 어려워도 비용절감의 가치가 환자치료의 가치보다 우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제품중심적 사고다.
아울러, 선택가능한 의약품의 수가 많을수록 맞춤형 치료를 통해 환자의 건강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약제비 절감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제품중심적 사고의 또다른 단면이다.
반면에, 약가통제와 같은 대(對)집단규제조치가 개개 환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예상하고 검토하려면 환자 중심적 사고가 필수적 이다. 예를 들어, 만일 이 약이 보험등재되면 ---또는, 등재되지 않으면 ---지금 내앞에 앉아 있는 가상의 환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환자 중심적 사고라는 말이다.
물론 환자 중심적 사고에서도 비용-효과성을 검토할 수 있지만, 이 경우 비용이나 효과는 집단의 평균에 가려 실체가 불분명한 관념적 객체가 더이상 아니다. 예를들어, ‘이 약의 치료율은 49%이기 때문에 비용-효과성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제품 중심적 사고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환자 중심적 사고에서는 0%(치료실패) 또는 100%(치료성공)만이 있을 따름이다.
약가통제처럼 제품 중심적인 사고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보건의료가 본질적으로 ‘환자중심적(patient-centere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자중심적 관점에서 볼 때, A 약이 B 약보다 비용-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보건의료제공자에게는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수많은 퍼즐조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은 이제 모든 보건의료인들이 환자 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제품 중심적으로 사고해야 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요컨대, 「약제비적정화방안」은 단순히 약가통제를 통한 약제비 절감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건의료인의 직업적 신조를 다시 검토해야 하는 단계까지 연결돼 있는 것이다.
결 론
「약제비적정화방안」의 실효성이 매우 의심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정부가 약가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재료비 성격이 강한 약제비를 통제함으로써 정책의 효과를 쉽게 가시화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료비를 깍는 것은 의료서비스의 급여 수준을 줄이는 것보다 훨씬 정치적 부담이 적은 방안이다.
정책입안자 또는 집행자로서 정부는 상이한 목표들 사이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하거나 우선 순위결정과정의 공정성이 훼손된다면 정책의 성공을 확신하기 힘들다. 모든 정책은 타당한 이유와 함께, 정책 목표가 예상한 대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경험적 증거가 뒷받침 돼야 한다. 더욱이 이 모든 과정은 법적테두리(legal framework)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약제비적정화방안」은 다양한 이해당사자집단(stakeholder) 중에서공급자인제약기업에만초점을맞춤으로써출발부터균형감각을상실했다. 더큰문제는, 성공가능성이높지않은이정책으로부터초래될각종부작용의짐을, 모든이해당사자집단이멋모르고나눠지게생겼다는사실이다.
약가통제로약제비지출이감소한다는근거는없다. 오히려다른나라의예들은약가통제로약소비량이증가하고결국은약제비지출이증가했음을보여준다. 약가통제와의 약품 선별 등재는 정부의 관료적 재량권만을 극대화 해, 이미 다른 영역에서 진행돼 온 보건의료정책의 실정을 고착화 시킨다. 의약품에 대한 접근이 제한돼 국민의 건강수준은 떨어지고, 반기업적환경이조성됨으로써모두가패자로전락하는구도가펼쳐질것이다.
비용-효과성은 보편타당한 포괄적 기준이 아니며, 의약품 선택의 최상위 기준은 더더욱 아니다. 약가통제는, 모방 의무임승차를 용인하는 허술한 국내 지적재산권 보호제도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혁신의 대가에 대해 정당한 값을 치루지 않는, 염의(廉義)없는 사회풍토를 조장할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 경쟁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의약품정책의 중심은 제품이 아니라 ‘환자’ 가 돼야 한다.
적절하고 합리적인 의약품 소비를 유도함으로써 국민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약제비적정화방안」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제도로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약제비적정화방안」은 재고돼야 한다.
편집부
2007.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