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산업 세계지도 다시 만들자!
세계지도는 시대마다 달랐다. 유럽인도, 아시아인도 그들이 아는 세상만 담아 세계지도를 그렸다. 13세기경 제작된 ‘헤리퍼드(Hereford) 세계지도’는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고, 12세기로 추정된 세계 최초의 인쇄 지도 ‘고금화이구역총요도’는 중국의 왕권사상이 바탕이다. 지금도 일본이 사용하는 세계지도는 일본이 중심이다. 지도에는 세계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는 그의 책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뜨인돌 펴냄)에서 “세계사를 큰 흐름으로 이해할 때 국가의 번영을 ‘중심의 이동’으로 인식하는 매우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설파했다. 물론 시대착오적인 생각은 벗어던져야 한다. 이런 시선에서 글로벌 화장품 시장의 중심이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한국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현재(present)를 제대로 알 때 다음(next)이 움직이고, 온다. <편집자 주> 얼마전 화장품업계만이 아니라 재계가 깜짝 놀라는 일이 생겼다.지난 7월 초 중국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맞춰 열린 ‘한-중 경제통상협력 포럼’에서 국내 연사로 나선 기업은 단 한 곳이었는데, 화장품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업은 아모레퍼시픽그룹이었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위상이 높다는 의미다. 한류 열풍도 아모레퍼시픽그룹에 힘을 실어 주었지만, 1964년 국내산 화장품으로는 처음으로 해외 수출에 성공한 후 90년대 초반 중국 시장에 진출한 아모레퍼시픽그룹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가는 것이다.
한국 ‘세계 중심’ 아니다 하지만 국내 화장품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아직’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대한화장품협회가 지난 6월 내놓은 ‘화장품 시장 현황’ 보고서를 보면, 2013년 세계 화장품 시장 규모에서 미국이 35,371백만달러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일본(26,582백만달러), 중국(21,857백만달러) 순이다. 한국 시장 규모는 10위(6,830백만달러)에 턱걸이 했다. 세계 화장품 시장을 점유율로 따지면 한국은 2.8%에 그쳤다. 미국 14.3%, 일본 10.8%, 중국 8.9%, 브라질 6.6%, 독일 6.2%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세계 100대 화장품 기업을 보아도 2012년 매출액 기준 세계 1위 기업은 로레알그룹이 큰 성을 만들고 있다. 유니레버, 피앤지, 에스티로더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다. 국가별로 보면, 100대 기업에 미국 30개사, 프랑스 14개사, 일본 13개사, 이탈리아 10개사, 독일 8개사, 영국 6개사, 브라질 4개사가 힘을 주고 있다. 한국은 3개사(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에이블씨엔씨)에 그쳤다. 세계 50대 화장품 브랜드를 보면, 1위 로레알, 2위 에이본, 3위 팬틴, 4위 니베아, 5위 도브 순이다. 한국은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로 단 한 개였다. 관세청의 발표한 수출입 현황 자료에서도 2013년 수출은 전년대비 25.9% 증가한 1,231,289천달러, 수입은 전년대비 2.9% 증가한 1,275,188천달러로, 무역적자 43,899천달러를 기록했다. 수출 국가도 아시아권에 편중됐다. 2013년 한국이 수출한 국가별 점유율은 중국 24.4%, 홍콩 17.5%, 일본 12.3%, 미국 8.6%, 대만 7.6%, 태국 6.5%, 싱가포르 3.3%, 말레이시아 3.2%, 베트남 3.1%, 러시아연방 1.9% 순으로 아시아권이 대부분이다. 유럽은 영국 0.8%, 프랑스 0.3%에 불과했다.한류의 영향이 많이 받고 있는 동남아시아에서도 한국 화장품 브랜드 최초 상기도는 21.5%로 대부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을 정도다. 한류가 일고 있지만 ‘한국 화장품 구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응답은 56.8%나 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국내 어느 기업의 한 대표는 화장품업계 원로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중국 시장에서는 조금씩 정착하고 있는데, 다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겉보다 속’이 먼저정부는 이 기업가의 고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지난 6월 열린 ‘2014 화장품 정책 설명회’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관계자는 “화장품산업은 한류를 이용한 수출 확대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래성장동력산업으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취약한 화장품산업 생태계 △해외 브랜드 인지도 미약 △대외환경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 고조 △소비자의 안전 및 품질 요구 수준 증대 △수출 증가를 위한 국내외 국제변화에 적응이 극복과제라고 정부는 제시했다.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화장품 원료 안전관리 제도 구축 △CGMP(우수화장품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확산 등 글로벌 수준의 화장품 품질 확보 △허위·과대표시·광고 근절을 위한 모니터링 강화 △화장품 분류 확대 및 규제합리화 등을 내놓았다.이에 앞서 2013년 9월 식약처와 보건복지부는 공동으로 오는 2020년까지 우리나라 화장품산업을 세계 7대강국에 진입시키겠다는 ‘2020 G7 프로젝트’를 발표한 바 있다. 그만큼 이 프로젝트에는 화장품산업에 관한 모든 정책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특히 이 프로젝트에서 정부는 R&D 투자 비율을 생산규모 대비 4% 수준으로 확대를 유도하고, 정부 R&D 투자의 점진적인 확대를 통해 기술수준을 선진국 대비 2018년까지 90%로 격상해 글로벌 Top 브랜드 제품 개발을 지원한다고 밝혔다.국내 화장품 기업은 R&D 투자비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본지가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경제총조사’를 분석한 결과, 2010년말 기준 화장품산업의 경상연구개발비는 0.5%, 화장품 제조업의 경상연구개발비는 0.74%에 불과했다. 한 중저가 브랜드숍 화장품기업은 2011년 R&D가 0.67%였다. 사실상 ‘미투상품(me too)’만 내놓는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정부는 R&D 예산 확보에 힘썼다. 하지만 정부에게도 현실의 벽은 높았다.2014년 글로벌 화장품 신소재 및 신기술 연구개발 부문 예산은 항노화 화장품 지원 사업이 국회 예결위에서 4억5,000만원이나 깎였다. 그나마 글로벌 화장품 육성 인프라 구축 부문 예산은 2013년 28억7,300만원에서 45억2,600만원으로 늘었다. 이에 대해 화장품업계는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제품 개발이 먼저라는 의견이다. 최근 화장품업계는 OEM·OEM에서 생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모두가 배고픈 ‘치킨 게임’화장품업계가 생각하는 ‘손톱 밑 가시’는 무엇일까.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정리한 규제개혁 건의서에 따르면, 화장품업계는 △화장품 표시·의무사항 적정화 △화장품 제조판매업자 교육 합리화 △탄력적인 CGMP 제도 △원료 시험 합리화 △행정처분 현실화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꼽았다. 특히 화장품업계는 글로벌 경쟁력을 위한 미적·감성적 요소를 고려할 때 현행 표시·광고 제도는 규제가 너무 심하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11월 열린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화장품 표시·광고’ 세미나에서 아모레퍼시픽 이정자 제도협력팀장은 “지나친 광고규제는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저하하고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질병치료 효과를 제외하고 기업의 연구개발 활동 결과를 활용한 표현을 인정하고, 글로벌 기준에 맞지 않는 조항 폐지와 함께 화장품업계의 자율적 법규준수 강화를 위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이처럼 정부와 화장품업계는 글로벌로 가는 길을 다소 다르게 본다. 함께 타고 가는 기차가 아니라 마주보고 대립하는 철길로도 보인다.지금, 한국 화장품만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한국 브랜드가 중국시장을 조금씩 장악하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중국 화장품이 한국 시장에 진출할 수도 있다. 실제로 중국 기업의 한국내 화장품·세제(3류) 상표출원이 증가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중국기업의 한국내 화장품·세제 상표 출원은 1998~2008년에는 299건에 불과했으나 2009~2014년 6월까지 506건으로 207건(69.2%)이나 늘었다. 특허청 관계자는 “중국이 브랜드 육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만큼 우리 기업들 또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명품 브랜드 육성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이뿐 아니라 중국 자본이 한국 브랜드와 공장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화장품 지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그런만큼 정부는 FTA, 나고야의정서, 동물실험, 기후변화, 중소·중견기업 생태계 육성 등 기업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힘든 분야를 지원해주고, 기업은 시장변화에 맞춰 연구개발과 마케팅 전략 수립에 매진해야 한다. 특히 해외시장에서 국내 기업은 제살깎기식 출혈경쟁을 조심해야 한다. ‘치킨(겁쟁이) 게임’은 한국 화장품산업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안용찬
201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