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료
'보릿고개' 시대땐 남 살리려다 약사가 병들었지...
1954년 3월29일 창간된 약업신문이 지령 5,000호를 맞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 약업계가 비상하기 시작한 역사의 시점을 시작으로 현재 약업신문의 5,000번째 지면 발행은 약업계 전문 신문의 역사로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약업신문은 면허번호 5,000번인 약사를 어렵게 찾아 나섰다. 주인공은 바로 백광현 원로약사(사진·71세, 성균관대 약대).
현재 우리나라 약사 면허를 취득한 약사 인구가 5만5,000명을 훨씬 웃돌고 있음을 감안할 때 백광현 원로약사는 약업신문과 더불어 약업계와 약사사회 역사의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 고희(古稀)를 넘어선 백광현 원로약사를 약업신문에서 만나 아주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격동의 시대를 약학도로
1936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백광현 원로약사는 약업신문이 창간한 바로 다음 해인 1955년에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이공계를 생각했어요. 그러던 차에 당시 의대교수로 계셨던 숙부님의 영향에 약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입학한 지도 벌써 53년이 되었네요.”
연이은 국난과 전쟁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백 원로약사는 당시의 약국 상황을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4.19에 이어서 5.16혁명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지요. 대학 시절만 해도 서울에 종로통을 나가보면 난매로 재미를 보는 약국들이 우후죽순이었어요.”
당시부터 현재까지 ‘약국 1번지’로 통하고 있는 종로5가가 궁금했다.
“거기는 한 집 건너 한 집씩 대형약국이 생겨날 정도였어요. 거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도미노처럼 난매약국이 난립하게 되고…. 주택가 약국들 경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요.”
행운의 번호 5000번으로 출발한 약사인생
백광현 원로약사는 5.16혁명이 발발할 당시 군에서 갓 재대한 열혈청년의 약사였다. 제대하자마자 약사면허를 신청했는데 번호가 5,000번으로 딱 떨어지더란다.
“행운의 번호 같지 않습니까? 허허…. 면허번호로 5,000번을 받고 나니 기분 참 좋았지요.”
면허를 받은 다음해 서울 주택가에 개국한 백 원로약사는 아침 7시에 개문해 자정까지 꼬박 17시간을 매일같이 약국에 매달렸다. 지금의 약사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여름에 선풍기가 있길 하나 겨울에 히터가 있길 하나…. 겨울엔 연탄난로를 약국에 놓고 추위를 겨우 면할 정도였어요.”
‘보릿고개 시대’인지라 조제 환경 또한 열악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다.
그때 당시 의약품 발달이 지금과 같지 않아 분말 원료약으로 조제를 해야만 했다. 분진 때문에 약사의 건강에 위해를 줄 정도였다니 ‘남 살리려다 약사가 병이 나는 경우’가 딱 이때일 것이다.
“말도 마시오. 의약품도 지금같이 다양하지도 않아서 수입품이나 美 군수 의약품이 많이 유통되던 시절이었어요. 배달원들은 도매상 외에도 대형약국에서 나오는 덤핑약을 여기저기서 구입해다가 자전거로 배달했다니까요.”
의약품 유통질서가 매우 혼탁했을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그 어떤 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상처 환자 치료해 보낸 후 약장이 다 털려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은 약국 사건사고를 흔하게 했다. 백광현 원로약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업초기, 한 인사로부터 “의약품을 싸게 줄 테니 사라”는 미끼에 속을 뻔하기도 했다고. 어려웠을 시대이니 도둑도 빈번하게 출몰했다.
“한번은 약국에 환자 둘이 들어와 한 사람이 발에 난 상처를 치료해 달라지 않소. 딴에는 정성스럽게 치료해주겠다고 허리를 꾸부정하게 굽히고 치료를 해주고 환자를 잘 치료해 보내고 뒤를 돌아보니 진열장 한쪽이 텅 비어있는 거야. 놀라서 살펴보니 비싼 약이 죄다 없어져 쓴웃음만 날렸지 뭐.”
“그래도 약사는 선망의 대상”
백광현 원로약사의 개국 초인 1960년대 초는 박카스가 지금처럼 병 포장이 아닌 20ml 앰플형으로 나와 인기를 끌던 시절이다.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때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그때는 나라가 혼란스러운 때에가 다들 못살던 시절이었어요. 저소득층이 태반이었던 때에 약사의 위상은 정말 높았지요. 안정된 직업으로 인기도 많았지요.”
약사, 약국 자체를 선망하던 사회 분위기에 약사가 인기 직종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약사에 대한 호칭이다.
“그때 사람들이 ‘아저씨’, ‘약방 아저씨’라고 부르면 내가 얼마나 질색했는 지 몰라요. 너무 싫었다고. 허허….”
당시 약사가 인기를 누렸던 직종이었던 만큼 약학도의 길을 함께 했던 80여명의 학우들 대부분이 약국을 개설했다. 그 외에 병원약사나 제약회사, 관공서 등으로 진출한 동기들도 적잖게 있어 후에 대한약사회장, 분회장, 도협회장, 제약사 회장들도 생겨났다고.
백 원로약사는 당시의 자부심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정정하게 약국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더 많아요.”
백 원로약사도 현재 친구들처럼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에 위치한 경호강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약사사회 현안을 냉철하게 꼬집는 원로약사
한편 “한약 조제권 분쟁에서 아쉬운 결말이 난 것과 의약분업으로 약사의 위상이 변화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약업계 뉴스”라고 꼽는 백광현 원로약사는 40여 년 약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예전이 아닌 현재인 것 같았다.
백 원로약사는 현재 약사의 현안에도 매우 깊고 냉철한 소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명 처방도 문제고 약국 조제건 수가 편중된 것도 문제고, 일부 몰지각한 약국들이 난매를 일삼는 것도 문제고…. 이런 것들이 모두 약사 전체의 권익에 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하는 백 원로약사는 약사회와 후배 약사들에게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모두 단합해야한다고 역설한다.
“예를 들어 환자를 대할 때 이익을 볼 생각만 하면 절대 신뢰를 못 얻어요. 이것은 모든 분야에 걸쳐 해당됩니다.”
백 원로약사는 이에 더해 후배 약사들에게 약국 경영에 관한 ‘한 수’를 전해줬다.
“할 수 있는 한 성심 성의껏 환자의 질문에 대답해주고 해결해주면 자연스럽게 약사 신뢰도는 높아지는 것이고 위상도 높아지는 게 순리 아니겠소.”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다고 했던가. 원로로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담이 아닐 수 없다.
약사인생 동반자, 약업신문 고맙소
백광현 원로약사가 약학대학을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54년 초에 창간한 약업신문은 백 원로약사의 인생 동반자였다.
당시 약업계 성장이 스타트할 무렵, 업계를 전문적으로 다루어 줄만한 매체도 없었거니와 지금처럼 모든 것이 손가락 하나로 해결되는 유비쿼터스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약업신문은 지식계층이기도 한 약사들의 정보의 갈증을 해소해준 매체였던 것.
백 원로약사가 약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업으로 삼으면서 부인 이문자 여사와 단란한 가정도 꾸려 아들 백승철 씨도 번듯하게 양육해 현재 캐나다로 유학까지 보내기까지, 돌아보면 강산도 수 차례 변한 장장한 세월동안 백 원로약사의 경호강약국을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한 ‘단골’인 셈이다.
“약업신문 때문에 약업계 소식을 신속하고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앞으로도 좋은 정보 기대하고 무궁한 발전이 있길 바랍니다.”
편집부
2007.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