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단독]국민건강보험공단과 국내 에이즈 환자단체 간의 비공식 간담회 석상에서, ‘벼랑끝 전술’을 방불케하는 한국로슈의 ‘푸제온주’ 약가협상 태도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26일 진행된 건보공단 약가협상부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등 에이즈 환자단체와의 간담회는 국내에 대부분의 혁신신약을 공급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사의 ‘힘’이 여실히 드러난 자리였다.
한국로슈, 약값이 싸서 이익 덜 남는다
한국로슈의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주’는 기존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가 먹어야하는 신약으로, 지난 2004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90mg/ml 한 바이알당 2만4996원의 약가를 받고 국내 시판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로슈는 ‘약값이 싸다’는 이유로 시판허가와 관계 없이 ‘푸제온주’를 팔지 않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심평원에 약가조정신청을 냈다. 그리고 지난해 말 심평원이 ‘약가인상’을 골자로 한 한국로슈의 의견을 수용, 건보공단과의 협상이 시작됐으나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간담회가 진행된 26일 건보공단에 따르면, 심평원이 약가조정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한국로슈의 두 번째 약가조정신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일정 수준의 약가인상을 통해서라도 환자들이 요구하는 ‘푸제온주’를 한국로슈가 판매토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로슈는 건보공단과의 최종 약가협상에서 기존 약가의 20%를 훌쩍 넘는 높은 약가 인상폭을 요구, 결국 양측의 입장차이로 협상이 결렬됐다는 것.
최종 약가협상 당시, 건보공단은 환율변동, 환자 본인이 투여해야 하는 주사제인점 등 약가인상 요인이 부족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지만, 한국로슈는 약가인상에 관한 근거 제시도 없이 건보공단의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건보공단은 현재 받아 놓은 2만5천원의 약가로도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을 폈지만, 오히려 한국로슈는 이익이 없어서 못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더욱 내야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에 건보공단이 에이즈 치료 등에 쓰이는 재원이 고갈될 경우 다른 곳에 쓰는 돈을 돌려서라도 재원을 확보할테니 우선 ‘푸제온주’를 공급하라는 절충안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한국로슈는 심평원에서 넘어온 것이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도상의 한계…‘푸제온주’ 시판 강제 수단 없어
한국로슈가 심평원, 건보공단 등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입장을 강력히 고수하는 이유는 약가조정신청 협상이 결렬되도 우리 정부가 ‘푸제온주’의 시판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그것으로 끝인 셈이다.
물론 협상결렬에 대한 최후 수단인 보건복지부 ‘약제급여조정위원회’의 판단이 남아 있지만, 한국로슈는 여기서 결정된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푸제온주’의 국내시판을 안할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환자들은 에이즈 치료제가 절실히 필요하더라도, 적어도 국내에서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푸제온주’를 구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관련, 이날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에이즈 환자 A씨(8년간 투병)는 “8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현재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고, 미국의 자선단체로부터 치료제를 공급받고 있는 실정”이라며 “로슈의 행동은 환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이어 A씨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 아니냐”며 “국가가 이러한 횡포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또한 에이즈 환자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B씨도 “정부가 이제는 국민 생명 보호를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할 때가 됐다”며 “특허강제실시권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간담회에 참석한 건보공단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지금의 상황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이라고 본다”며 “공단도 환자단체들과 같은 생각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이즈 환자, ‘푸제온주’ 버릴수도 없고…‘진퇴양난’
사실 ‘푸제온주’에 대한 최종 결론은 매우 단순할 수밖에 없다. 약가협상 결렬에 대한 최후 조정수단인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푸제온주’를 상정하지 않고 한국로슈가 약을 공급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두거나, 한국로슈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 약을 공급토록 하는 방안 두 가지이다.
일단 공단 측은 ‘푸제온주’를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상정하지 않는 방안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4년째 시판되지 않았던 상황이나 자체적을 조사한 ‘푸제온주’ 처방 현황 등을 분석해 볼 때, 다른 에이즈 치료제를 통한 환자 치료가 가능다는 예측을 해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일뿐, 실제 환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기 이전에 ‘협상결렬’을 선언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이날 간담회에서 건보공단이 환자단체에 “푸제온주가 실제 에이즈 치료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환자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실제 ‘푸제온주’가 아닌 기존 치료제를 통해 에이즈 치료가 어느 정도 가능하고 향후 출시될 값싸고 효과 좋은 약을 기다리며 버틴다고 해도, 당장 에이즈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 입장에서는 단 하나의 치료제라도 절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제온주’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생명 빛’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필수적인 의약품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필수적인 의약품’이란 점이 한국로슈와 같은 다국적 제약사들에게는 강력한 약가협상의 수단으로 작용, 높은 약가를 주장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설령 복지부와 건보공단이 ‘푸제온주’를 필수의약품이 아니라고 판단하더라도, 환자단체 등에서 ‘푸제온주’를 강력히 요구한다면 한국로슈는 자신들이 원하는 약가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환자들은 ‘푸제온주’를 필수의약품으로 요구할 수도, 비싼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
이에 대해 에이즈 환자단체 관계자는 “환자에게 약이 필요한지 아닌지 수위를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만약 계속 그렇게 한다면 필수약제의 기준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관계자는 “실제로 푸제온주가 환자들에게 어느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치료제인지 약 자체가 시판되지 않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다국적제약사의 횡포에 이끌려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등 에이즈 환자단체는 이번 주 중으로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한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며, 복지부 약제급여팀에 ‘약제급여조정위원회’ 참석을 정식으로 요청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