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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재 女流시인 이 옥 봉 <제4話>
편집부
입력 2016-06-01 09:36 수정 최종수정 2016-12-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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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있다. 어부들은 시체가 배 근처로 밀려오면 장대로 밀어버렸다. 골치 아픈 일이 싫어서다. 시체를 발견하면 관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전후사정을 말해야 하는 것들이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귀찮은 것이다.

 

옥봉의 시체가 동해에서 날이 맑은 날엔 조선의 발해만도 보인다는 산동성까지 떠밀려갔다. 명(明)나라 때다. 시체는 기름먹은 종이로 마치 수의를 입듯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다. 종이를 풀어내자 그 속엔 깨알 같은 쓴 시가 가득 채워져 있다. 천고의 절창으로 칭송받는 ‘강함구몽활(江涵鷗夢闊)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천입안수장(天入雁愁長)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를 보고 깜작 놀랐을 것이다.

시체엔 신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쓰였다. 시체는 바다를 얼마나 파도와 물살에 밀려 떠돌았는지 몰골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부패되었다.

그때 마침 고위관리가 그곳을 지나다 어부들의 행동을 보고 군사를 시켜 시체를 끌어냈던 것이다. 관리는 옥봉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양지 바른 곳에 묻게 하고 한지에 있는 시가 너무 뛰어나 그냥 버리기엔 안타까워 필사하여 ≪이옥봉 시집≫을 만들었다. 그 후 관리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원로대신이 되었다.

그동안 조선은 두 차례 임금이 바뀌어 광해군(1575~1641)에 이어 인조)1595~1649)가 보위에 올랐다. 명나라도 쇄락하여 후금의 호시탐탐 침략을 받고 있었다. 그즈음에 관리는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주었으나 이제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군사를 보내달라는 황제의 국서를 가지고 온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자 조선의 접빈사(接伴使·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임시직 벼슬)들이 환영을 나왔다. 그런데 접반사 일행 중에는 조희일(趙希逸·1575~1638)이 있었다. 명나라 관리는 옥봉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문재에 뛰어났으니 자연스럽게 항아(姮娥·달에 있는 여신)를 뺨칠 천하일색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나라 사신은 자연스럽게 조선에 오게 되자 그동안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공은 혹시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이란 사람을 아시오? 공의 성씨가 조씨이니 행여 아는 사람일수도 있어 묻는 것이요...” 사신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조희일은 주저 없이 “아 예 그분은 저의 가친(家親)이십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가친에 대해 물으시는지요?”라고 말하며 놀라워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가지 아버지에 대해 벼슬까지 알고 왔으니 궁금증이 더해졌던 것이다. 조희일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사신은 더욱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면 공은 혹 이옥봉이란 여인을 알고 있습니까?” 사신은 더욱 진지하게 물었다. “예 그분은 아버님 소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신께선 그 여인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번엔 조희일이 더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사신은 그때 필사하여 만든 ≪이옥봉 시집≫을 꺼내 놓았다. 사신과 접반사는 밤새 술을 주거니 받거니 대취하였다. 사실 옥봉은 조원을 따라 여러 곳에서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조원은 삼척·성주 등지에서 부사로 지냈다. 이대 옥봉은 자연스럽게 남편 조원을 따라갔다. 정부인은 한양에 있으며 소실 옥봉은 부임하는 현지에 동행하였다. 그들은 사랑이 서로 애틋했을 것이다. 사내는 조강지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소실은 객지이지만 안방주인의 주역이 될 수 있어서다.

옥봉은 소실로서 2세를 생산하지는 못했으나 여자의 역할과 풍류반려로선 조원에겐 과분한 여자였을 것이다. 특히 문재(文才)에선 오히려 남편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졌었다. 하지만 삶은 불행하였다. 미인박명 아닌 ‘여류문재’ 박복이었다. 옥봉은 시문에만 뛰어나지 않았다. 미모도 뛰어났으며 목소리 또한 아름다워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여인이었다.

옥봉은 겨우 불혹(不惑)을 살았다. 결혼을 두 번 했으며 수많은 시를 섰으나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삶도 죽음도 불행했으나 그녀의 시는 불후(不朽)하였다. ‘반평생 시로 궁한 팔자/ 새소리 속에 한해 봄날은 간다./ 미쳐 구르는 버들 솜 봄 눈인냥 나부끼고/ 가벼운 복사꽃 어지런 바람에 쫓긴다.’ 어디에선가 금방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치 세이렌(치명적 아름다운 그리스 신화 주인공) 음성 같다.

비범했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는 여류다. 16세기는 조선 한문학사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선조시대 문학적 성황을 지칭)로 일컬을만한 문화적 전성기였다. 또한 성리학적으로서도 율곡 이이·퇴계 이황 등이 이룩한 소위 조선 성리학이 융성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 옥봉이 도도하고 장엄하게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쳤다. ‘절묘 하다는 명예 모두 어린사람이니/ 동방에 모자의 이름이 떨치오./ 그대의 붓이 떨이지면 바람이 놀래고/ 내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을 울리오...’ ≪적자에게 준다≫ (贈嫡子)다. 적자란 조원의 둘째 아들인 조희철 이었을 것이다.

조희철은 초서와 예서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의 글씨가 얼마나 유명했으면 어느 대군의 집에서 겨우 열 살 남짓한 그에게 명정(銘旌)을 써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옥봉이 그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을 놀래고 내 시는 귀신을 울린다 했다. 어린 나이에 예술적 재능을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는 정실부인의 아들인 조희철과 자신의 신적 재능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귀신도 울린다.’는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701~762)의 시를 지칭하는 일이니 그녀 자신이 시선에 필적하는 시인이란 왕손 후예로서의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일 게다. 사실 조원이 옥봉에게 자유롭게 시를 쓰도록 방임했다면 오늘날 후학들이 뛰어난 여류시인이란 절창의 시들이 창작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29번지 1호 경복고등학교 터에는 운강대(雲江臺)란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이 있다. 또 그 옆엔 효자동의 유래가 새겨진 오석비(烏石碑)가 있다. 선조(宣祖·1552~1608)때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의 집터다. 그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쪽엔 북촌(北村), 서쪽엔 서촌(西村)이 있었던 육조를 움직이는 역사의 산실이다.

풍류를 즐긴 이봉은 어느 날 이곳에 와 조원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옥봉을 소실로 부탁했을 게다. 절창이 탄생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하다. 삶은 불행했으나 작품은 불후한 주인공 옥봉은 이역만리에서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아마 영혼이라도 오매불망 사랑했던 조원의 곁(산소)을 잠도 못 이룬 채 오늘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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