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시대가 요구하는 藥劑師, 이번에 새로 생기는 조선약학교"
1918년 4월 28일자매일신보에위 제목 하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경성에 약학교가 생긴다 함은 이미 보도한바 있다. 이에 대하여 창립 고문인 총독부의원 약제관 요시끼 (吉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설립을 계획한 조선약학교는정말로 약에 대한 학문을 알아 상당한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종래 경성에는 사립 조선약학강습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16년4월에 조선약제사 시험규칙이 발포된 뒤에 조중응자작 이외 유력한 약업자의 주선으로 설립된 것이나 아직 완전한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학교로는 이번의 약학교가 처음이다.
그런데 강습소는 속성을 위주로 하여 극히 단기에 대강의 약학의 이론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못하여 여기를 졸업하더라도 약제사의 전기 (前期) 시험을 받을 자격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용의 문제로 후기 (後期)의 교육을 베풀 설비가 없었던 까닭이다. (중략)옛날부터조선에는한약이 비상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명한 의술이들어오면서 양약을 사용하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시대의 진운 (進運)을 따라약업이 발달하는 것은 크게 치하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종종 위험을 일으키는 자가 적지 않으니 이는 바로 약제사의 소양이 빈약하고 자격이 충분치 못한 결과로 매우 한심한 일이다.
(중략) 일본에서는 제약 산업이 발전하여 매우 훌륭한 약이 얼마든지 제조되고 있지만 조선에는제약산업이라고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략) 요컨대 지금 조선은 진실한 학문이 있고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 생기는 약학교는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약제사를 양성코자 함이다”.
2. 조선약학교의 교사 (校舍)의 역사
1914년 하기약학강습회 및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는 장교통에 있는 장훈학교 교사를 빌려 써야 했기 때문에 강습회는 여름방학에, 강습소는 야간에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 조선약학교가 설립되면서 자체교사를 갖게 되었는데, 1989년 발간된 <일본식민지교육정책사료집성 vol. 50> 내에 있는 ‘경성약학전문학교 일람’으로부터조선약학교의 교사와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18년 6월 1일조선약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장소는 종로 5정목에 있는 [구 동대문 분서 (分署) 자리]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린 가건물이었다. 동년 6월 21일 99명의 신입생으로 개교식을 거행하고 수업을 개시하였다.
(2) 1918년 8월 1일에는 학교 위치를 남대문 시장 남쪽의南米倉町 284번지로 변경하는 인가를 받았다. 동년 10월 9일에는 총독부에서 무상으로 빌린 구 훈련원 부지 2000여 평 (황금정 6정목 18 번지, 현재 을지로 6가 중구구민회관 부지)에서 교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 (地鎭祭)를 거행하였다.
(3) 1919년 5월 23일, 상기 황금정 6정목에 목조 기와집 (사진 1, 출처: 홍현오 저, 한국약업사, 약업신문사, 1972)을 낙성하여 학교를 이전하고, 동년 6월 2일 신교사에서 시업식을 거행하였다. 서울대 약대 동창회는 1991년 이 자리에 서울대 약대 교적비 (사진 2)를 세웠다.
▲ 조선약학교 교사 (현 을지로 6가 중구 구민회관 부지). 1922년 제10회 조선약학회 총회 기념으로 찍은 사진.
▲ 조선약학교의 을지로 교사 자리에 1991년에 세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적비. 비석에는 ‘1918년 이래’라고 쓰여 있으나‘1919년 이래’가 맞는 것 같다.| 인기기사 | 더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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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가 요구하는 藥劑師, 이번에 새로 생기는 조선약학교"
1918년 4월 28일자매일신보에위 제목 하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경성에 약학교가 생긴다 함은 이미 보도한바 있다. 이에 대하여 창립 고문인 총독부의원 약제관 요시끼 (吉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설립을 계획한 조선약학교는정말로 약에 대한 학문을 알아 상당한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종래 경성에는 사립 조선약학강습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16년4월에 조선약제사 시험규칙이 발포된 뒤에 조중응자작 이외 유력한 약업자의 주선으로 설립된 것이나 아직 완전한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학교로는 이번의 약학교가 처음이다.
그런데 강습소는 속성을 위주로 하여 극히 단기에 대강의 약학의 이론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못하여 여기를 졸업하더라도 약제사의 전기 (前期) 시험을 받을 자격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용의 문제로 후기 (後期)의 교육을 베풀 설비가 없었던 까닭이다. (중략)옛날부터조선에는한약이 비상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명한 의술이들어오면서 양약을 사용하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시대의 진운 (進運)을 따라약업이 발달하는 것은 크게 치하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종종 위험을 일으키는 자가 적지 않으니 이는 바로 약제사의 소양이 빈약하고 자격이 충분치 못한 결과로 매우 한심한 일이다.
(중략) 일본에서는 제약 산업이 발전하여 매우 훌륭한 약이 얼마든지 제조되고 있지만 조선에는제약산업이라고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략) 요컨대 지금 조선은 진실한 학문이 있고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 생기는 약학교는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약제사를 양성코자 함이다”.
2. 조선약학교의 교사 (校舍)의 역사
1914년 하기약학강습회 및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는 장교통에 있는 장훈학교 교사를 빌려 써야 했기 때문에 강습회는 여름방학에, 강습소는 야간에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 조선약학교가 설립되면서 자체교사를 갖게 되었는데, 1989년 발간된 <일본식민지교육정책사료집성 vol. 50> 내에 있는 ‘경성약학전문학교 일람’으로부터조선약학교의 교사와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18년 6월 1일조선약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장소는 종로 5정목에 있는 [구 동대문 분서 (分署) 자리]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린 가건물이었다. 동년 6월 21일 99명의 신입생으로 개교식을 거행하고 수업을 개시하였다.
(2) 1918년 8월 1일에는 학교 위치를 남대문 시장 남쪽의南米倉町 284번지로 변경하는 인가를 받았다. 동년 10월 9일에는 총독부에서 무상으로 빌린 구 훈련원 부지 2000여 평 (황금정 6정목 18 번지, 현재 을지로 6가 중구구민회관 부지)에서 교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 (地鎭祭)를 거행하였다.
(3) 1919년 5월 23일, 상기 황금정 6정목에 목조 기와집 (사진 1, 출처: 홍현오 저, 한국약업사, 약업신문사, 1972)을 낙성하여 학교를 이전하고, 동년 6월 2일 신교사에서 시업식을 거행하였다. 서울대 약대 동창회는 1991년 이 자리에 서울대 약대 교적비 (사진 2)를 세웠다.
▲ 조선약학교 교사 (현 을지로 6가 중구 구민회관 부지). 1922년 제10회 조선약학회 총회 기념으로 찍은 사진.
▲ 조선약학교의 을지로 교사 자리에 1991년에 세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적비. 비석에는 ‘1918년 이래’라고 쓰여 있으나‘1919년 이래’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