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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프로레슬러와 매미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3-09-11 10:15 수정 최종수정 2013-09-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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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5월 육군 사병을 34개월 만기로 제대하고 약 3년간 영진약품 시험과 및 연구과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세관 업무를 담당하는 본사의 천OO과장님한테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하면서도 멋있게 생긴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프로레슬러였다. 인품마저 점잖아 사내 평판도 좋았다. 그에게 무얼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어 보니, 당시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솔코세릴이라는 연고제의 원료를 수입해서 세관에서 통관시키려고 하는데 문제가 좀 생겼다는 것이다. 세관 측 담당자는 이 원료가 그 약 제조에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하라고 했단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내용은 잘 모르니 나보고 같이 가서 설명을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회사 일이기도 하고, 또 설명 못할 일도 아니기에 그러기로 하였다. 막상 그와 함께 길을 나서 보니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프로레슬러와 왜소하기 짝이 없는 내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란! 정확히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서부 서울역에 위치한 세관에 들어서자 그는 나에게 “약사님,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이 담당자입니다. 그 사람한테 설명 한번 해 주세요” 해 놓고는 자기는 저만치 떨어진 구석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내 설명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여 세관 직원에게 설명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천 과장이 내게로 오더니 “약사님, 설명 다 하셨나요?’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나보고 좀 비키라는 눈짓을 하더니 곧 세관 직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설명을 하였으니 통관시켜 주시죠”.

세관 직원은 무언가 이해가 덜 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중얼중얼거렸다. 금방 통관시켜 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자 천 과장은 두 손으로 직원의 책상을 짚으며 그 우람한 상체를 세관직원에게 쑥 디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따지는 것이었다. “이 원료가 무엇에 쓰이는지 약사님 불러다 설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약사님 모시고 와서 설명 했습니다. 그런데 왜 통관을 안 시켜 줍니까?” 천 과장에게 있어서 내 설명으로 세관 직원이 이해가 되었는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추궁하는 것은 ‘담당자 불러다 설명하라고 해서 설명했는데 왜 딴 소리냐?’는 단순한 것이었다. 우람한 체격의 천 과장의 위세에 움칠한 세관 직원은 금방, “아, 물론 통관 시켜 드려야죠” 하며 쩔쩔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알량한 지식으로 세관 직원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더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천 과장은 결코 무례하게 말하거나 고함을 치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상체를 디밀었을 뿐인데, 그 즉시 세관직원이 설득(?)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체격 큰 사람이 한없이 부러웠을 뿐만 아니라, 왜 천 과장이 회사에서 점잖게 처신할 수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당대 최고의 프로레슬러임을 모르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가 점잖게 처신해도 상대방들이 다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그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상대방은 그가 비록 점잖게 말 하더라도, 여차하면 자기를 하늘 높이 들어 던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내 체격이 왜소해서 늘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생각해 보니, 내 체격이 작아 다행이었던 점도 없지 않아 보인다. 우선 나는 남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한다. 잘못 화냈다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뭐, 그런 오해가 꼭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또 만약에 내가 덩치가 컸으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다가 상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태어난 대로 감사하며 사는 외에 무슨 방도가 달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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