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나는 강원도 원주 38사단에서 훈련을 마치고 경남 사천 (泗川)에 있는 ‘육군항공학교’라는 부대에서 항공기 정비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학교 교장이었던 모 중령은 늘 우리에게 ‘너희들이 졸병 계급장을 달았다고 인간이 졸병인 것은 아니다. 너희도 장교 계급장을 달면 바로 장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며, 졸병들에게 하기 쉽지 않은 프라이드 교육을 하곤 하였다. 이런 지휘관 때문이었을까? 육군항공학교는 여러 면에서 드물게 모범적인 부대이었다.
그러나 그 부대에 대한 쓰라린 추억이 있다. 그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어느 초가을 날 그 먼 곳까지 어머니가 큰 매부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손에는 튀김닭 두 마리와 떡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경기도 김포에서 사천까지 그야말로 ‘진주라 천리길’을 기차를 타고 오신 것이었다. 사천은 진주 (晋州) 옆 동네이었다. 어머니는 김포 시골집에서 직접 기르신 토종닭 두 마리를 잡아 들고 시외 버스로 30리 길인 부평(富平)까지 나오셔서 튀김집에 부탁해서 튀김닭을 만드셨다. 떡도 어머니가 직접 만드셨을 것이다.
나는 천리길을 마다 않고 찾아 와 주신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이 시리게 좋았다. 그러나 찾아 오신 날은 마침 평일이었고 시간은 일과 (日課) 중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나는 닭과 떡을 중대 본부에 맡겨 놓고 어머니와 이야기 꽃을 피웠다. 1시간쯤 지났을까? 아쉬운 면회를 끝내고 중대 본부로 닭과 떡을 찾으러 갔다. 그랬더니 중대 본부에 있는 기간병 x들이 그걸 싹 다 먹어 치웠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 닭과 떡을 맛은커녕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아무리 군대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새까만 쫄병이자 피교육생인 내가 무얼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속절없이 속으로만 분노를 삭이고 지냈었다. 그 때 그 기간병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내 닭과 떡을 다 먹어 치웠을까?
나는 휴가를 나갔을 때는 물론이고 제대한 후로도, 그리고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이 사건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 닭과 떡을 구경도 하지 못한 줄 아셨다면 아마 어머니는 그 즉시로 홧병이 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어머니께 큰 불효를 한 것 같아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비슷한 일로 어머니께 불효를 한 사건이 하나 더 생각난다. 1981년쯤인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찾아 동경에 오셨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엿 한 보따리와 흰 떡 한 보따리를 해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엿을 잘 고는 (만드시는) 분이셨다. 엿과 떡의 양은 두 분이 어떻게 다 끌고 오셨을까 궁금할 정도로 많았다. 어머니는 ‘무얼 무겁게 이렇게 많이 갖고 오셨냐’ 고 인사를 드린 아내의 말에 은근히 섭섭해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 목동에 사는 큰 누이가 자기 좀 나누어 주고 가시라는 걸 완강하게 뿌리치고 애 써 다 끌고 왔는데, 며느리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으니 그러실 만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불효를 했다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이 아니다. 며칠 후 두 분이 한국으로 떠나신 다음날, 아침에 일어 나 보니 부엌에 두었던 한 자루나 되던 흰떡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알고 보니 마루 바닥 에 난 구멍 속으로 밤새 쥐가 다 물어 간 것이었다. 어떻게 쥐가 그 많은 떡을 하룻밤에 다 물어 갈 수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아마 김포 쌀로 만든 흰떡이 일본 쥐들에게도 무척 맛이 있었던 것 모양이다. 실로 허망한 사건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짐짓 잊은 척하고 살았다. 끝내 어머니께 말씀 드리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아셨으면 무척이나 상심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정성을 부실하게 관리한 불효가 지금도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다음달 5월에는 어버이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