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월에 제대한 나는 대학원 1학년 2학기 복학을 기다리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던 나는 심심하면 동아제약에 다니는 대학 동기 두 명 (K군과 W군)이 한 방에서 살고 있는 용두동 근처의 하숙집을 찾곤 했다. 하숙집에는 흔히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밥상을 디밀어 주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별로 예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씨는 비교적 괜찮은 아가씨라서 가끔 찾아 간 나에게 여러 번 밥을 주었다.
어느 날 그 집에 가보니 충청도 공주 출신의 K군이 내게 편지 한 통을 내밀며 읽어 보라고 하였다. 내용인즉 고향 공주에 계신 K군의 아버지께서 K군에게 보낸 편지인데, ‘참한 처녀가 있으니 이 참에 내려와 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혹시 그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참한 처녀도 많으니 아무튼 꼭 내려와 선을 보라’는 내용이었다. K군은 나더러 공주까지 같이 내려 가자고 하였다. 딱히 할 일도 없던 터라 나는 그러자고 하였다. 며칠 후 둘이 버스를 타고 공주 K군의 집에까지 가게 되었다.
친구 집에 도착하자 친구 어머니가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요컨대 내일 시내 다방에서 신부감을 만날 터인데 나도 거기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가서 신부감을 보고 난 다음, K군더러 ‘색시감이 좋으니 결혼을 하라’고 부추기라고 당부하셨다.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드렸다. 다만, ‘제가 봐서 신부감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제법 신중한 답변을 드렸다.
다음날 공주 시내에 있는 모 다방에 갔다. 신랑 측에서는 K군과 그의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총 4명이 나가 앉았고, 신부 측에서는 신부감만 혼자 나왔다. 내가 보니 신부감은 첫 눈에 미인이었다. 나는 K군에게 결혼하라고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부모님은 이내 자리를 비켜주셨다. 그리고 K군과 신부감은 공주천 뚝방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순간 나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면 얼마나 멋쩍고 어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데이트에 동행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맹세컨대 당시 나는 엄청난 희생 정신을 발휘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뚝방길을 걷는 내내 동행하면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재담으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두 사람은 얼마 후 결혼하게 되었는데, 나는 내가 이 두 사람의 결혼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큰 사례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산지도 제법 세월이 흘러 간 어느 날, 나는 그 두 사람이 나를 전혀 고마워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실망하였다.
두 사람에게 들어 보니 공주천 뚝방길을 걸을 때, 함께 따라 나선 나 때문에 오히려 분위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귀찮았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공명심(功名心)이 무참히 깨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K군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살신성인 (殺身成仁)의 심정으로 데이트에 동행했던 것인데…. 다만 친구 부인은 내 공 (功)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실토하였다. 즉 나 때문에 자기 남편이 그렇게 키가 작은 줄 당시에는 몰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작은 키가 K군의 결혼에 도움이 된 사실을 위로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내는 지금도 그 때의 나를 ‘주책 바가지’라고 비판한다. 친구가 선보는 자리에 나간 것부터 뚝방길 데이트에 동행한 것까지의 모두가 주책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의 비판이 백 번 옳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일을 계기로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내는 친구의 약혼식에 신부의 친구 자격으로 나왔다가 나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회상하면 그래서 늘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