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쓰기 좋아한다. 심지어 자기 부인을 ‘우리 와이프’라고 말할 정도이다. 외국인들은 ‘our wife’ 라는 이 표현에 황당해 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처럼 ‘우리’라는 표현을 애용하게 된 것은 옛날부터 농어촌 등에서 함께 모여 일하던 공동체 습관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라는 말의 어감 (語感)은 서구인들이 쓰기 좋아하는 ‘나’라는 말보다 덜 야박해 보여 좋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동네’라는 표현에는 왠지 모를 따듯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이 ‘우리’라는 표현에 한두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생겼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크기를 너무 작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제법 큰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 식구, 우리학교, 우리 팀, 우리 지역’처럼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일컬을 때 ‘우리’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란 말을 ‘남’이란 말의 반대어(反對語)로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편’ 소속이 아니면 ‘남의 편’으로 보고, 심하면 ‘적(敵)’으로까지 본다. 이럴 때의 ‘우리’에서는 ‘우리끼리만’이라는 배타성(排他性)이 엿보인다.
사전을 보면 ‘우리’라는 단어는 ‘돼지우리’와 같이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 (畜舍)’ 또는 ‘울타리’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말 장난 같지만 우리는 우리를 너무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려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오늘날 보수 또는 진보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 나름대로의 ‘우리(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우리’라고 부르는 것 같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지만 걱정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남이나 적’으로 간주(看做)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을 ‘진영(陣營)의 논리’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진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은 온통 ‘우리 편’과 ‘적’과의 싸움터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세상이 싸움터이면 인생은 필연적으로 싸움일 터이다. 그런 세상, 그런 인생에 무슨 평화와 평강(平康)이 있겠는가? 우리는 세상이 진영간의 싸움터로 바뀌는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싸움터로 만들 권리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모두가 진영이라는 ‘작은 우리(울타리, 틀)’를 깨고 드넓은 밖으로 나오도록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크기를 키우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배타적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틀이 아니라, 우리와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포용하는 ‘이해의 폭’으로서의 ‘우리’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대립된 진영 간에 공감하는 영역(공감대; 共感帶)이 발견될 것이고, 이 공감대가 넓어질수록 진영 간의 대립에 의한 사회적 불안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삶에 평화와 평강이 찾아 오게 될 것이다.
최근 ‘힐링 캠프’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인기 탤런트 차인표씨가 인도와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 헌신하는 내용을 보았다. 또 얼마 전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하여 현지에서 순교하신 이태석 신부님의 일대기를 보았다. 진한 감동이었다. ‘우리’의 개념을 ‘인류’ 전체로 확대하고 있는 이런 분들의 고귀한 삶이 있기에 아직 지구에 평화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정치판이 ‘작은 우리’간의 진영 싸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각 진영의 투사(鬪士)를 지도자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이제 진영 간의 화해를 이끌어 낼 포용력을 갖고, ‘인류’ 전체를 ‘우리’로 이해하는 비전을 가진 ‘점잖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총선의 날 4월 11일을 맞는 간절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