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 타이틀 텍스트
<98> 기다렸다 말할 걸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2-03-28 10:53 수정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스크랩하기
작게보기 크게보기
며칠 전 대학 후배 댁 혼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어떤 후배 하나가 나를 따라와서는 “선배님, 저기 앉아 있는 분이 누구세요?” 물었다. “내 친구 K야”라고 대답했더니, 그 후배 얼굴이 하얘지면서, “아 큰일 났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접시를 들고 K 옆에 앉았더니 그 친구 왈, 저 후배가 아는 척을 하길래 “야 너 요새 혈색 참 좋다”고 했더니 그 후배 답하여 가로되 “야 임마, 네 혈색이 더 좋다”고 했다나. 순간 머리가 띵 했지만 ‘아마 저 녀석이 날 잘못 알아 본 모양이구나’ 생각했단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후배는 곧 우리 자리로 오더니 “선배님, 제 동기로 잘못 알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며 사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네가 알고도 그랬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말 때문에 낭패를 본 사례 몇 가지가 머리에 떠 올랐다.
 

내가 군대 사병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사례1) 정기 휴가를 나갔다가 귀대하면서 ‘마리아 상사’라고 별명이 붙은 선임하사 댁에 들렀다. ‘마리아 상사’란 말끝마다 “이O의 XX들 말이야” 하는 그의 말 버릇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 댁에 들른 것은 무언가 뇌물을 좀 바쳐 귀대 후의 내 신분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어둑어둑한 방안에 들어 가 인사를 마치는 순간, 부엌 쪽 문이 열리며 한 노인네가 밥상을 들고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인사성 바른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되십니까?”라고. 그런데 그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내가 크게 실수한 느낌이 엄습하였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선임하사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냐, 우리 마누라야”라고 하는. 그 때 나는 “아! 이제 나는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비슷한 실수는 수십년이 지난 요즘에도 반복되고 있다. (사례2) 오랜 만에 옛 제자를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냥 “잘 지내?” 라고 만 하는 것이 좀 그래서 한번은 “그래 지금 어느 회사 다니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제자 대답 왈, “지난번에 D제약 다닌다고 말씀 드렸었는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괜히 물어 봤네 생각하며 머쓱해 한 적이 있었다. (사례3) 한번은 어떤 영악한 제자를 만났는데 그는 내가 이름을 물어 보기도 전에 “교수님, 저 누군지 또 모르시죠?” 라고 선수(先手)를 치는 것이었다. 아마 얼마 전에도 내가 그 제자의 이름을 몇 번 물어봤던 모양이다. (사례4) 이 정도의 망신(?)은 약과이다. 언제인가 나이가 좀 든 제자가 찾아 왔길래 “이제 너도 장가가야지?” 했더니 “교수님, 지난번에 딸 낳았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하는 게 아닌가?

나의 대학 동기 C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처음 약국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를 업고 약국에 와서, “우리 아이가 감기가 들어서 그러니 약 좀 주세요” 했단다. C는 친절하게도 업힌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여태 무얼 하셨어요?” 하며 아주머니를 좀 나무랐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친구를 바라보더니, “약사님, 얘는 안 아파요,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했다나. 그 친구는 그 때 결심했단다. ‘조금만 기다리자. 그러면 상대방이 다 말하게 되어 있다’ 라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리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오랜만에 누구를 만나면 그냥 온화하게 웃으며 기다리기로 하였다. 괜히 아는 척, 자상한 척 먼저 말을 걸었다가 불필요한 망신을 자초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다렸다 말하기’는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면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고 자기 이름, 직장, 가족 상황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설명해 주게 되어있는 것이다. 혹시 나처럼 순간 기억력이 부실한 분들은 이 ‘기다렸다 말하기’를 한번 시도해 보시면 어떨른지.

전체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98> 기다렸다 말할 걸
아이콘 개인정보 수집 · 이용에 관한 사항 (필수)
  - 개인정보 이용 목적 : 콘텐츠 발송
- 개인정보 수집 항목 : 받는분 이메일, 보내는 분 이름, 이메일 정보
-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 기간 : 이메일 발송 후 1일내 파기
받는 사람 이메일
* 받는 사람이 여러사람일 경우 Enter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 (최대 5명까지 가능)
보낼 메세지
(선택사항)
보내는 사람 이름
보내는 사람 이메일
@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98> 기다렸다 말할 걸
이 정보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
스크랩한 정보는 마이페이지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