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일본의 ‘藥史學雜誌’를 보면 ‘한국근대약학교육사 자료-일한병합시대를 중심으로’라는 흥미로운 논문 (Vol. 44, No. 1, pp 31-37)이 게재되어 있다. 필자는 2007년 ‘약학회지’에 ‘한국약학사’라는 제목의 논문 (이하 ‘약학사’, 제51권 제6호 361-382)을 쓴 바 있는 데 그 논문을 보완도 할 겸 일본 논문의 내용 일부를 이하에 소개 한다.
1) 전사 (前史)
1910 (明治 43)년에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약제과 (3년제)가 설치되었으나 1년만에 폐지되었다. “당시 조선의 민도 및 습관이 의약분업 제도를 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따금씩 소수의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은 오히려 의학진흥을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졸업생이 있었는지는 불명이다.
2) 약학강습소
1915 (大正4)년 6월 자작 (子爵)인 조중응 (趙重應)씨를 소장 (所長)으로 하여 ‘약학강습소’가 설립되었는데, 이 강습소는 사립장훈학교 (長薰)로서 야간에 조선인 약업가의 자제를 교육하였다.
3) 조선약학교
1918년 4월 15일, 경성에 사는 약종상 (藥種商)인 일본인 2사람 (문헌에 따라 3인)이 대표로 조선약학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6월 7일에 인가를 얻어 1918년 6월 21일에 자작인 조중응씨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서울대약대 요람 2007년 판에 1919년 6월에 개교되었다는 기록은 오류인 듯). 교사 (校舍)는 현재 남대문 시장 남쪽 (당시 南米倉町 284번지)에 있는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렸다 (약학사에서는 종로 6가의 30평 기와집). 1918년 7월 11일에 종로 5정목 (丁目) 29번지 (현재 종로5가 하나은행 부지)로 이전하였다. 1919년 5월에 황금정 8정목 (黃金町 8丁目, 현재 중구 을지로 6가 중앙구민회관 자리)에 있는 훈련원 (訓練院, 구 한국군 연병장) 부지 약 2000평을 총독부로부터 무상으로 받아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약학사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서울약대 동창회는 우리나라 근대 약학의 발상지인 이 자리에 1991년 9월 12일 (당시 회장 한명승) 교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교사는 나중에 약전 (藥專, 약학전문학교)으로 승격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학교는 본과 1년 + 별과 (別科) 1년의 총 2년제로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조선 내에서 약제사가 되었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1920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약제사 시험에서 30명의 응시자 중 11명이 합격하였고, 그 중 한국인 이호벽씨 (국산 약사 1호)와 신경휴씨 (국산 약사 2호)가 1, 2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무시험으로 받은 면허는 조선 내에서만 통용되는 면허이었고,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받은 면허는 일본 영내 어디서나 통용되는 약제사 면허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본과에서는 매일 5시간씩 수업을 하였고, 별과에서는 매일 밤 3시간씩 수업하였다. 1년 차 본과에서는 수신 (修身), 수학, 독일어, 광물학, 물리학, 화학, 식물학, 분석학, 제약화학, 생약학 과목을 배우고, 2년 차 별과에서는 분석학, 제약화학, 생약학, 위생화학, 약품감정, 약국방, 조제학, 약제학을 배웠다. 이 학교에는 일본인은 심상소학교 (尋常小學校) 졸업생, 조선인은 보통하교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정원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서 50인 이었다 (100인이라고 기록된 문헌도 있음). 학비는 1학년은 월 1원 50전, 2학년은 여기에 월 1원의 실습비를 더 내야 했다.
1925년 3월 16일에는 고시 제 41호에 의해 조선약학교는 약학교로 공식 인정되었다. 또 1925년에 조선약학교는 2년제에서 3년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3년제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이 논문에서 처음 보는 기록이다. 1925년부터 교장은 약제사인 국봉전길 (國峰專吉, 다른 문헌에서는 국봉수길 國峰壽吉)씨였다. 1929년 (필자는 약학사에서 1930년을 주장)에 조선약학교는 사립경성약학전문학교 (藥專)로 승격되었다. 藥專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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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일본의 ‘藥史學雜誌’를 보면 ‘한국근대약학교육사 자료-일한병합시대를 중심으로’라는 흥미로운 논문 (Vol. 44, No. 1, pp 31-37)이 게재되어 있다. 필자는 2007년 ‘약학회지’에 ‘한국약학사’라는 제목의 논문 (이하 ‘약학사’, 제51권 제6호 361-382)을 쓴 바 있는 데 그 논문을 보완도 할 겸 일본 논문의 내용 일부를 이하에 소개 한다.
1) 전사 (前史)
1910 (明治 43)년에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약제과 (3년제)가 설치되었으나 1년만에 폐지되었다. “당시 조선의 민도 및 습관이 의약분업 제도를 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따금씩 소수의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은 오히려 의학진흥을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졸업생이 있었는지는 불명이다.
2) 약학강습소
1915 (大正4)년 6월 자작 (子爵)인 조중응 (趙重應)씨를 소장 (所長)으로 하여 ‘약학강습소’가 설립되었는데, 이 강습소는 사립장훈학교 (長薰)로서 야간에 조선인 약업가의 자제를 교육하였다.
3) 조선약학교
1918년 4월 15일, 경성에 사는 약종상 (藥種商)인 일본인 2사람 (문헌에 따라 3인)이 대표로 조선약학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6월 7일에 인가를 얻어 1918년 6월 21일에 자작인 조중응씨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서울대약대 요람 2007년 판에 1919년 6월에 개교되었다는 기록은 오류인 듯). 교사 (校舍)는 현재 남대문 시장 남쪽 (당시 南米倉町 284번지)에 있는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렸다 (약학사에서는 종로 6가의 30평 기와집). 1918년 7월 11일에 종로 5정목 (丁目) 29번지 (현재 종로5가 하나은행 부지)로 이전하였다. 1919년 5월에 황금정 8정목 (黃金町 8丁目, 현재 중구 을지로 6가 중앙구민회관 자리)에 있는 훈련원 (訓練院, 구 한국군 연병장) 부지 약 2000평을 총독부로부터 무상으로 받아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약학사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서울약대 동창회는 우리나라 근대 약학의 발상지인 이 자리에 1991년 9월 12일 (당시 회장 한명승) 교적비를 건립하였다. 이 교사는 나중에 약전 (藥專, 약학전문학교)으로 승격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학교는 본과 1년 + 별과 (別科) 1년의 총 2년제로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조선 내에서 약제사가 되었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1920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약제사 시험에서 30명의 응시자 중 11명이 합격하였고, 그 중 한국인 이호벽씨 (국산 약사 1호)와 신경휴씨 (국산 약사 2호)가 1, 2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무시험으로 받은 면허는 조선 내에서만 통용되는 면허이었고,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받은 면허는 일본 영내 어디서나 통용되는 약제사 면허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본과에서는 매일 5시간씩 수업을 하였고, 별과에서는 매일 밤 3시간씩 수업하였다. 1년 차 본과에서는 수신 (修身), 수학, 독일어, 광물학, 물리학, 화학, 식물학, 분석학, 제약화학, 생약학 과목을 배우고, 2년 차 별과에서는 분석학, 제약화학, 생약학, 위생화학, 약품감정, 약국방, 조제학, 약제학을 배웠다. 이 학교에는 일본인은 심상소학교 (尋常小學校) 졸업생, 조선인은 보통하교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정원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서 50인 이었다 (100인이라고 기록된 문헌도 있음). 학비는 1학년은 월 1원 50전, 2학년은 여기에 월 1원의 실습비를 더 내야 했다.
1925년 3월 16일에는 고시 제 41호에 의해 조선약학교는 약학교로 공식 인정되었다. 또 1925년에 조선약학교는 2년제에서 3년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3년제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이 논문에서 처음 보는 기록이다. 1925년부터 교장은 약제사인 국봉전길 (國峰專吉, 다른 문헌에서는 국봉수길 國峰壽吉)씨였다. 1929년 (필자는 약학사에서 1930년을 주장)에 조선약학교는 사립경성약학전문학교 (藥專)로 승격되었다. 藥專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