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로슈, 유일한 해답은 M&A!
105년 전통을 자랑하는 스위스 로슈社의 무기명주식이 급락함에 따라 M&A를 위한 사전경지작업으로 이원화된 현행 지분구조를 단순화하는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무기명주식(bearer shares)은 주권에 성명을 기재하지 않고 주주명부의 명의개서를 하지 않은 채 주권의 교부만으로 권리가 양도되는 주식.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설립자의 가족들이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로슈의 무기명주가는 올들어 3분의 1이 빠져나가 1만3,580스위스프랑(7,790달러)을 기록중이다. 현재 무기명株는 1995년 이래 최저가로 거래되고 있다. 좀 더 활발히 거래되고 있는 비의결권株도 사정은 매한가지여서 지난달 말 현재 1만2,500프랑에 머물렀다.
전통적으로 로슈의 지분구조는 무기명주식 160만株와 비의결권주식 700만株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무기명株가 전체 시가총액의 80% 정도를 점유해 왔다. 이들 두가지 주식의 배당금은 동일한 수준이나, 유일한 차이점은 무기명株의 경우 의결권이 있어 회사경영에 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로슈의 지분은 설립자의 가족인 프리츠 호프만과 아델레 라 로슈가 주식의 50.01%와 현금의 10% 미만을 보유 중이며,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기업사냥꾼 마르탱 에브너가 16.8%를 소유하고 있다. 에브너는 지난해부터 지분구조의 단순화를 요구해 왔다.
로슈가 향수사업부 지보단(Givaudan)을 매각(spin-off)하고, 독자적 권리를 지닌 경영자들을 충원한 것도 그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라는 후문이다.
이와 관련, 줄리어스 베이어은행의 애널리스트 데니스 앤더슨은 "주가 급락의 결정적 요인은 로슈가 대형 M&A를 위해 지분구조 단순화를 강구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로슈는 이원화된 지분구조를 변경할 의향은 없지만, 필요하다면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었다.
실제로 애널리스트들은 로슈가 톱 클라스 제약기업으로 남고자 한다면 M&A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는 데 입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있은 주주총회에서 지난 78년 이래 로슈를 이끌어 온 프리츠 게르버 회장이 퇴진한 것도 로슈의 경영방침 변화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신임회장인 프란츠 휴머(54세)는 "새로운 경영진은 남다른 야망을 갖고 있으며, 향후 이를 확실한(tangible) 행동으로 실천에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최고의 제약기업으로 꼽혔던 로슈는 지난해 제약매출 성장률이 1% 남짓에 그쳤을 정도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애널리스트들은 앞으로도 로슈가 평균치 이하의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익의 대부분을 창출해 주던 품목들의 특허가 대부분 만료되었기 때문. 블록버스터 신약이라곤 발매 2년이 채 못되어 매출액 10억달러를 넘어선 비만치료제 '제니칼'이 거의 유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95년도만 하더라도 로슈는 유럽 주식시장에서 로열 더치 쉘社와 브리티시 텔레콤社에 이어 시가총액 3위에 올랐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었다. 96년 6월까지도 시가총액 740억달러로 머크(810억달러)에 이어 2위를 지켰고, 화이자나 그락소웰컴은 로슈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로슈는 점점 '메이저 리그'(?)에서 밀려나는 양상을 보여 왔다. 그동안 머크社의 시가총액이 1,720억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났고, 그락소·스미스클라인비참 및 화이자·워너램버트의 잇단 통합으로 각각 2,650억달러와 1,700억달러로 비대해진 반면 로슈는 여전히 740억달러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로슈는 '톱 5'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지난 10여년 동안 3~4년 간격으로 제넨테크·신텍스·베링거 만하임 등을 인수하는 데만 200억달러 이상의 비용을 투자했었다. 애널리스트들은 로슈가 세계 1위의 제약시장인 미국에서 입지를 강화하고 취약한 제품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M&A에 나설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로슈는 지난 97년 102억달러 규모로 베링거 만하임을 인수할 당시 모든 채무를 청산했었다. 애널리스트들은 로슈가 30억프랑의 순자산(net cash)과 280억프랑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매물로 나와 있는 듀퐁 제약사업부 등을 쉽사리 인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미 로슈에 비해 2~3배 규모로 커버린 화이자·머크·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과 어깨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듀퐁을 인수하는 것만으로는 함량미달이라는 점.
이에 따라 톱 클라스 제약기업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위스의 라이벌업체 노바티스 등도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바티스도 미국시장 진출확대를 바라는 로슈의 니드를 충족시켜 줄 황금의 결합 파트너는 못된다는 지적이다. 노바티스도 미국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해 왔기 때문.
로슈가 미국에서 파트너를 물색하고, 미국 주식시장 상장을 추진할 것이라는 추정도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로슈가 지분구조를 단순화하는 일이 선결과제라는 것이다.
이덕규
2001.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