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메이저 제약社 '색깔 마케팅'
군대시절 먹어 보았던 빨간약·파란약 얘기가 아니다.
아직까지 완전 용도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냉전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색깔논쟁'을 펼치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일반적으로 푸른색은 남성적인 것을 상징하고, 분홍색은 여성性을 대변하며, 파스텔톤 색채는 심리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메이저 제약기업들이 이처럼 색깔이 암시하는 메시지를 자사제품(pill)의 외관에 접목시키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약물 자체의 외관이나 색깔·이름 등에 관심을 보이는 환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제 알약은 무조건 희고 둥글어야 한다는 상식은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자였던 밥 돌 의원의 요즘 별명은 '비아그라를 파는 노점상'(a pitchman for Viagra)이다. 그가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를 "귀여운 푸른색 친구"(little blue friend)라고 언급했기 때문. 뉴욕 소재 롱아일랜드大에서 제약마케팅을 강의하는 데이비드 민 박사는 "분홍색 '비아그라'를 만들어 팔 제약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 남성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띄고 있는 '비아그라' 정제의 모양이 대표적인 남성 스포츠로 손꼽히는 미식축구에 쓰이는 공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링 의약품 '로섹'은 "자줏색 알약"(purple pill)임을 주지시킨 광고가 매출을 더 많이 끌어올린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환자들은 치매를 앓고 있지 않은 한, 정작 이 항궤양제의 이름은 가물거리더라도 알약의 색깔과 頭韻을 적용해 P자가 겹쳐진 닉네임을 떠올리며 "아! 자주색 알약"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친다는 것이다.
사실 '로섹'의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은 많은 제약기업들이 이른바 '색깔 마케팅'에 눈을 돌리게끔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머크社는 뼈의 모양을 본떠 생산해 왔던 골다공증 치료제 '포사맥스'의 형태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마치 뼈를 삼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는 일부 환자들의 볼멘소리에 마냥 나 몰라라 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 대신 머크는 흰색 알약 표면에 뼈 모양을 새겨 넣기로 했다.
이와 관련, 美 약학회 존 숌머 회장은 "제약기업들은 저마다 환자들이 자사가 생산한 제품들을 다른 회사의 제품들과 손쉽게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약물의 색깔과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가시적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매일 수많은 약을 먹어야 하므로 쉽사리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절실할 수 밖에 없는 노인들의 약물투약이 한결 용이해졌다는 것은 한 예라는 것이다.
약물 색깔과 형태에 개성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FDA가 약물복용시 수반될 수 있는 모든 부작용 위험성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TV광고를 내보낼 수 있도록 허용했던 지난 1996년부터.
오늘날 환자들은 광고를 통해 인지도를 높인 특정약을 처방해 주도록 의사에게 요구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비록 해당약물이 환자 자신에게 최고의 효과가 기대된다거나 가장 저렴한 제품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에 따라 환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제약기업들이 투자하는 광고비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지난해에만 총 25억달러 정도가 지출되어 99년도에 비해 2배나 급증했을 정도다.
그러나 비영리 연구단체인 국립의료관리연구소의 스티븐 핀들리 소장은 "약의 모양을 디자인하는 데 지출되는 금액 등 모든 비용은 어떠한 형태로든 약가인상에 반영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케팅에 많은 돈이 투입될수록 약가가 오르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
이 때문인 듯, 제약기업들은 특정한 색깔이나 브랜드 네임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 '영업비밀'임을 이유로 입을 다무는 것이 대체적인 추세이다. 다만, 알약의 색깔이 특정한 질병과 연관되어 결정되는 구석이 없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가령 빨간색처럼 선명한 색깔은 강한 약효와 신속한 효과발현을 시사하므로 두통약과 진통제에 애용되고, 항우울제는 진정효과가 있는 파스텔톤 색깔을 띄는 경향이 많다는 식이다.
미국에서 톱-셀링 항우울제의 하나에 속하는 '팍실'은 용량에 따라 노란색·분홍색·자주색·녹색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일라이 릴리社는 지난달부터 '푸로작' 주 1회 투여용 녹색·흰색 캡슐제형에 대한 광고캠페인에 착수했다.
화이자社는 "고령자들이 각기 다른 캡슐색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분석하기 위한 의도로 스위스 바젤大 신경학연구소팀이 97년 수행했던 연구결과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연구에 따르면 녹색은 가장 폭넓은 호감을 자아내는 색이고, 분홍색은 심장박동수를 완화시키는 효과를 이끌어 내며, 빨간색은 흥분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심리학자이자 제약산업 마케팅 컨설턴트로도 일하는 카롤린 슐러 박사는 "색깔 마케팅은 생화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결과로 탄생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제약기업들이 죽음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을 신제품 정제에 씌우는 일은 죽어도(?)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오늘날 제약메이커들은 모서리를 경사각으로 처리하거나 직사각형, 삼각형, 광택나는 젤라틴 피복(coated) 제품, 두가지 색깔을 띈 야누스 캡슐 등 자사제품들이 한층 세련된 외관을 과시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제약기업들은 또 첨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신식이름을 신약에 붙이고자 하는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한 마케팅 전문가는 "최근들어 '혁신성'을 암시하는 문자인 'Z'를 애용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항우울제 '졸로푸트', 항궤양제 '잔탁', 알러지 치료제 '지르텍', 금연보조제 '자이반', 콜레스테롤 저하제 '조코' 등이 그가 꼽은 대표적 사례들.
미국에서 희고 둥근 알약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 부터이다. 매사추세츠大 약대 에릭 맥 교수는 "당시는 처방약 분야에도 바야흐로 대량생산 방식이 본격 도입되던 시점"이라고 말했다.
맥 교수는 이어 "40~5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사제품을 불법 생산된 복제품들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양한 색깔을 정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면 최근에는 합법적으로 생산된 제네릭 제품들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 자사제품들의 외관을 화려하게 꾸미려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 예로 로슈社는 진정제 '바륨'이 85년 특허만료됐지만, 알약 중간부분에 'V'자를 새겨 넣어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방법으로 제네릭 제품들의 공세를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알약의 디자인을 바꾸는 것은 처방착오율을 감소시키기 위한 의도도 담겨진 포석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편 일라이 릴리社는 월경기간 중 불쾌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내놓은 신제품의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 이 약물은 '푸로작'과 생물학적 동등성을 확보하다 못해 아예 똑같은 제품이지만, 릴리측은 녹색 알약을 삼키는 일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다. 미국에서 녹색은 항우울제를 대변하는 색깔로 인식되고 있다.
릴리가 여성을 암시하는 색깔인 분홍색이나 엷은 자주색을 입혀 '사라펨'(Sarafem)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이유다.
이덕규
2001.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