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료
“마드리드의 창녀를 떠올리며...”
낚시 기사일까? 당신이 낚였다면 동료, 선후배 약사들에게 조금은 충격적인, 하지만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이금신 약사의 뜻은 ‘통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기사나 책의 제목은 보수적이고 건전한(?) 약사사회에 던지기 불편한 단어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건전한 제목을 슬며시 들이민 기자에게 그녀가 이런 자극적인 제목을 써 줄 것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신대흥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이금신 약사가 지난 1989년부터 95년까지 남편 강필운 교수와 함께 생활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의 신선한 가치관적 충격을 동료 약사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이 약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강필운 교수가 번역, 출간한 스페인 베스트셀러 ‘모두가 창녀다’라는 책 한권.
남편이 낸 책이니 좀 잘 팔렸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그렇게만 치부해버리기엔 자신의 과거와 스페인에서의 색다른 경험을 소개하며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는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 이상의 진솔함이 있었다.
“약대를 졸업할 때 까지 이과 과목 중심의 교육을 받으며 세상을 보는 가치관도 그와 비슷해져 있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의 낙천적이면서도 포용력 있는 태도와 가치관을 경험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스스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됐죠. 때문에 그 중 인상 깊었던 한 가지 추억인 이 책의 번역을 남편에게 적극 권유하게 됐습니다.”
스페인에서 ‘모든 여자는 창녀다’라는 원제로 발간돼 ‘창녀’라는 단어를 통해 많은 세상사를 풀어간 이 책은 스페인 최고의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대표적 지식인들 사이에 여성 인권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작품이다.
이금신 약사는 이 책이 우리나라와 같은 유교문화권, 특히 점잖은 약사 사회에서 수용되기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색다른 소재 및 관점과의 만남을 통해 동료 약사들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논평>
최근 스페인 시의회와 지자체 선거에서 야당의 몇몇 정치가들은, 정부산하 기관인 스페인 여성단체장 미리암 테이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조그만 출판사 엘 코브레에서 에느란 미고야가 쓴 단편집 ‘모두가 창녀다’를 출간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작품 속의 두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과 강간범들이 강간을 예찬한다. 이 책이 출판되고 나자마자 이 출판사 사장인 미리암 테이와 그녀를 여성협회장으로 임명한 노동부 장관 에두아르도 사플라나의 사임을 요구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을 책을 출판하고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을 조장했다는 비난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날마다 일간지에 오르내리는 여성 학대와 살인사건에 대한 소식은 스페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브뤼셀에서 유럽의회 사회당 의원인 엘레나 발렌시아노와 소라야 로드리게스는 미리암 테이가 성폭력과 아동 성학대를 찬양한 범죄의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부가 그녀의 직위를 해제하지 않고, 또한 법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고 유럽위원회에 고발했다.
이 책과 출판사 사장, 그리고 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신문사에는 독자들의 항의성 편지가 끊임없이 쇄도하고 있다. 그들은 “흑인들은 대부분 선한 이웃이고, 게이들은 모두 친절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간혹 들어봤지만, 이 사회에서 단 한번이라도 우리 같은 강간범들이 전부 다 나쁜 놈은 아니라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제3세계나 동유럽에서 일어나는 몇몇 전쟁에서 여자들을 겁탈하는 것이 가장 야만적인 행위라는 소리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수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분명 그건 그렇지 않다. 누가 무슨 권리로 그따위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는가? 여자를 강간하고 살려두는 것이 강간하지 않고 죽이는 것보다 백번 낫다. 나는 여자를 죽일 능력도 없고 또 그럴만한 배짱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여자들을 강간하고 나서 어떠한 후회도 해 본적이 없다”같은 표현이 들어있는 책의 출판을 허용한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여론의 압력에 결국 엘 코브레 출판사는 서점가에서 책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누구도 소설의 등장인물을 작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 에르난 미고야의 항변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페인 영화의 세 거성 부뉴엘, 브를랑가, 알모도바르는 가정폭력을 전파시킨 죄로 무기형에 처해졌어야 될 것이다.)
기회주의자건 위선주의자건 아니면 단순히 무식해서건 간에 모두들 미리암 테이와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모두가 창녀다’를 맹목적으로 몰아세웠다. 문학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권위주의 체제하의 문학(성직자, 공산주의자, 파시스트)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문학이 엄격한 사전검열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담은 텍스트들이 무방비상태에 있는 독자들을 폭력범, 테러리스트, 살인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학의 허구성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그들의 이러한 사고 뒤에는 자유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깔려있다.
소설, 시, 드라마, 콩트 속에 담겨져 있는 공포가 장티푸스처럼 독자들에게 전염된다면, 삶은 오래전에 이 지구상에서, 아니면 적어도 문명사회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단지 문맹인과 야만인들만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문학이 난폭함, 피, 괴물, 천한 것들 그리고 가장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타락한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문학을 조금만 읽든지 아니면 전혀 읽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수없이 많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가장 위대한 소설 ‘티란테 엘 블랑코’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영웅이 카르메시나 공주의 처녀성을 빼앗는 부분이다. 너무나 멋진 에피소드라 읽을수록 작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기쁨이 넘쳐흐른다. 나는 이 이야기가 들어있는 장을 적어도 6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나는 파리 한 마리도 죽인 적이 없다.
스페인어로 쓰인 고전작품 중에서 ‘돈키호테’ 만큼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읽은 작품은 ‘라 셀레스티나’이다. 이 작품은 연극형식으로 된 소설로 창녀, 마녀, 뚜쟁이 펨프들이 주 등장인물들이다. 이들이 연출해내는 성과 사랑 앞에서 나는 구역질이 난다. 그러나 끔찍한 폭력과 추잡스런 사랑의 이야기로 구성된 그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거부할 수 없는 설득력을 획득해 독자들을 사로잡고, 모든 반대여론을 극복했다.
수많은 끔찍한 내용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나타나는 식인풍습이나 근친상간부터 리차드 해리스의 소설들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의 잔인한 식인장명들까지, 아니면 조나단 스위프트의 판타지 같은 것들이다. 다 알다시피 조나단은 아일랜드의 인구과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롯왕의 처방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애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다.
문학이 인생을 독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다.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책에는 우리들 내면에 살고 있는 유령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 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마 우리는 그들 속에서 질식하지 않고, 우리의 인생은 더욱 살맛이 나게 된다. 우리는 우리지 책이 아니다.
몇몇 문학사에서 나타나는 열병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지나치게 몽상적이고 광적인 그 열망들을 우리는 가슴 속 깊숙이에서 우리 것으로 만든다. 나는 이것을 잘 설명하지 못하겠는데, 예를 들어 조지 바타이 같은 위대한 사상가는 ‘문학과 악’에서 명확하게 밝혀내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요구하는 상상이나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의 실현에 도달하는 길은 운명이 우리에게 준 것과는 다른 방식을(훨씬 더 강렬하고, 물불 안 가리고, 광적인) 요구한다.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허구 덕분에 실제 삶이 안고 있는 그 모든 제한과 한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학이 태어났다. 그래서 문학은 온갖 모험으로 가득 찬 것이다. 예술의 마법 덕분에 우리는 순수한 환상 속에서 대리인생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허구의 삶은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고, 사회공존이 가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삶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것-우리 개성의 본능적이고 굶주리고 파괴적인 측면-을 되돌려 주고, 우리의 잃어버린 인간본연의 총체성에서 우리를 다시 만든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쁜 사상을 만연시켜 사회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사회를 나쁜 사상에서, 수많은 폭력적 행위들이 푹푹 곪고 있는 인성의 지하실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자유로운 상상은 “괴물을 낳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방차원적이며, 집단변비를 위한 관장약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파괴적으로 침입하는 유령들을 억압할 때 더욱 더 그렇다.
조지 오웰이 쓴 수필 중 이 테마에 관한 명작이 있다. “영국 범죄의 타락”. 에르난 미고야의 여성혐오적인 상상력과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여성 살해와 구타 사이에서 원인결과 관계를 찾고 있는 선동가들에게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스페인 사회는 생활습관이 빠르게 근대화되고, 시대착오적인 전통적 구조 속에서 차별받고 억압받으며 살아오던 여성들이 빠른 속도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성들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허구가 어떠한 검열이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사회가, 이러한 인간적인 창조력의 근원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들로 구성된 교도관에 의해 통제되고 막히는 사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
순결한 베일이 자유로운 문학 상상력을 강제로 억압하던 빅토리아 여왕시대 영국에서 최악질의 범죄가 일어난 것이 우연은 아니다. 물론 세이드의 소설들이나 에르난 미고야의 단편들에서처럼 모든 문학이 다 “저질”은 아니다. 인간 삶의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이며 자비로운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숭고한 상상력을 발휘한 그런 “저질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나 문학행위와 허구의 구성은 존재의 총체성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사과처럼 쪼갤 수 없다. 전통적으로 문학에서 그 유령들은 특별한 탈출구를 찾았다. 그 유령들의 공격적이고 뒤틀리고, 또 한번씩 사악한 속성 때문에 우리 남자와 여자들은 그들과 같이 살아가기가 더 힘들게 되었다. 이 악마들은 우리에게 면박을 주고 놀라게 하는데, 우리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를 모른다.
문학이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인성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괴물들이 허구 속에 투영됨으로써 사악함을 잃게 되고, 언어에 의해 길들여짐으로서 고분고분해지고 고상함을 지니게 되고 시민권도 얻게 되는 것이다.
김지호
200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