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약 가지고 놀던 소년, 최고과학자 되다!
아직 한국전쟁의 아픔도 채 가시지 않은 1960년대 흑백 톤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시절. 부모님이 운영하는 약국에서 약을 장난감 삼아 자라던 한 작은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부모님의 상점에 아픈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알맹이들을 섞은 봉지를 받아가고, 얼마 후엔 아픈 곳이 다 나았다는 일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소년은 부모님이 운영하는 상점은 '약국'이고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약'이며 그 약이란 것이 사람들의 아픈 곳을 낫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턴가 소년은 배가 아프거나 감기기운이 돌면 부모님이 환자들에게 주던 약을 눈여겨 봤다가 몰래 꺼내먹어도 보고 친구들이 아프다고 하면 짐짓 자신이 약사인 양 한두가지 약을 주기도 했다. 40여년이 지난 오늘, 그 소년은 혈관 생성의 비밀을 밝혀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자가 됐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한 다는 일의 신비로움에 빠져 머나먼 길을 걸어온 소년을 만나 그의 꿈과 열정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혈관생성의 비밀 규명 세계적 인정 받아!
지난 1일 혈관 생성 분자기전을 밝혀냄으로써 새로운 암 치료·연구영역을 개척한 공로로, 그 동안 주로 해외 유명 연구자들에게만 수여돼 왔던 호암상 의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은 서울대 약대 김규원 교수.
신기한 일, 새로운 스타에 열광하는 우리나라에서 김규원 교수의 수상은 이제 그리 신기하지도 않은 새삼스런 일이 돼 버렸다. 김 교수는 이미 자신의 연구내용을 Nature지에 등재하는 한편, 목암생명과학상, 과학기술우수논문상, 제 1회 최고과학기술인상, 이달의 과학자상, 과기부장관상 수상 등 과학자로서 국내에서 받을만한 상이란 상은 거의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황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산소농도에 따라 아세틸화 효소에 의해 혈관생성 조절 단백질의 구조변형이 일어나고 이 구조변형에 의해 단백질의 분해가 일어남으로써 혈관생성이 산소농도에 따라 조절된다는 새로운 분자기전을 규명, 혈관생성과정에 관련된 특정 단백질의 기능을 조절함으로써 혈관생성을 분자수준에서 조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세계수준의 암 연구 성과를 달성하고 치료제개발의 기반을 확립했다.
이어 뇌 중추신경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혈관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발견, 알츠하이머병이나 뇌종양과 같은 뇌혈관 관련 질병 연구와 신약개발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키도 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거둔 전화위복의 성과
이같은 김 교수의 발견은 세계적으로도 아직 이 분야에 대한 이론이 정립이 되어있지 못한 상황에서 이뤄낸 것이라 더욱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받아 왔다.
역사상의 많은 위대한 발견들이 그러하듯 김 교수의 오늘과 같은 업적도 지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한가지 목표를 이룩하고자 고민하고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는 노력 끝에 거둔 '전화위복'의 결과물이다.
귀국 초기 국내의 열악한 연구환경 속에서 기존 연구영역이던 암세포 전이에 대한 연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던 중 당시로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혈관생성에 대한 소재를 잡고 15년여의 세월동안 노력 하나로 오늘의 성과를 낳게 된 것.
1987년 귀국해 부산대 분자생물학과에 자리를 마련하기 전까지, 하버드에서 포스닥 과정을 거치며 연구해 온 과제는 생쥐에서의 암세포 전이에 대한 연구였다. 그러나 부산대에 가서는 신설학과라 함께 연구할 학생도, 실험실도, 연구 설비도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에 지원 받을 수 있는 국내 연구비 수준도 암세포 배양 등 기존 연구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 그의 연구 주제가 혈관으로 설정된 것도 이런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찾아낸 대안이었다.
"비교적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당시의 환경에서도 할 수 있었던 암과 관계된 연구영역이 바로 혈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특히 당시만 해도 세계적으로 혈관에 관한 연구가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한 이유였습니다. 싸고 쉽게 연구할 수 있는 '달걀'을 인공 부화 시키며 혈관의 생성 과정에 대한 비밀을 하나씩 연구하기 시작한지 15년여 만에 비로소 지금의 연구 성과들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당시 같이 연구했던 대학원생들과 달걀 깨서 연구하다보니 온 몸에 달걀냄새가 배어 주위사람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기도 하고, 가끔은 간식으로 연구 재료(?)를 삶아먹기도 하고, 부화 과정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태어난 병아리들이 연구실을 북적거리게 만들기도 했다고 추억하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걸핏하면 터지던 수도관, 실험 도중에도 예고 없이 끊기기 일수였던 전기, 그 와중에도 학생들과 열정 하나로 연구에 몰두하다 처음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Cancer letter - 트리터페노이드 유도체의 혈관신생 억제 활성에 관한 연구)하고 기뻐했던 일 ...
"물론 당시의 상황은 정말 힘든 것이었지만 결코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기본적인 생활 방식도 미국보다는 한국이 더 좋았고, 연구에 대한 사고 자체도 특정 부분에 매우 깊게 빠져 들어가는 미국적인 연구 풍토는 저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오게 됐고, 새로운 연구 과제를 고민하면서도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나름대로 답을 찾아 그에 몰두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욱 심도 있고 새로운 발상이 가능했고,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신약개발 시스템 구성 본격화 할 때"
그가 인간 질병치료라는 영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이어 온 모든 활동들은 '전체 속에 하나가 있고,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는 불교적인 그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읽게 된 팔만대장경 속에 들어 있는 많은 깨달음의 화두들 속에서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들이 제 삶의 많은 과정들에 해답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연계돼 있다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바라보게 됐다고 할까요? 어떻게 하면 제가 가진 능력과 처한 상황 범위 내에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를 해 나갈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기초분야 연구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 질병치료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의약품 개발로 나아갈 수 있는 다음 단계의 연구자들과의 연계 연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켜가고 있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실제 암이나 당뇨병성 망막증 등 질병의 발생, 진행 과정에 적용하는 한편, 약물 합성이나 임상 연구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질병 치료제 개발과정으로의 협력연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
더불어 그는 인간 질병 치유를 위한 신약개발을 위해 국내의 각 분야 인프라를 한데 꿸 수 있는 시스템 형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마 제가 이번 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최근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투자와 기반 형성이 이루어진 국내 연구분야에서 독특한 주제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 시작해 세계적 연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반자적 관계로 활동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성과들을 내 놓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최종 목표인 질병 치료 약물 개발을 위해서는 저 뿐 아니라 최근 국내 각 분야에서 도출되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기술들을 신약개발이라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잘 엮어내는 과정이 중요할 것입니다."
특히 이런 과정에서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영역에 보다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도록 전체 시스템을 잘 설계하고 운영해 줄 수 있는 인력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 연구실 안에서만 쏟아 붓던 에너지를 밖으로도 돌려 약학회 발전을 위한 집행부 활동에도 성심을 다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신약개발과 관련된 각 단계에서 종사하는 이들 모두가 그와 마찬가지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온 주역들임은 우리 모두가 주지해야 할 사실일 것이다. 이제 김규원 교수의 바람대로 이들의 성과가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잘 어우러져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선도적인 결과물들을 창조해 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김정준
200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