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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오늘을 위로하는 희망의 노래, 뮤지컬 ‘빨래’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새로 이사를 오면 으레 이사 떡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떡은 인사와 함께 전해진 미소처럼 늘 따뜻해서 좋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가까이에 살던 또래 친구들과 같이 숨바꼭질을 하거나 자전거를 탔고 서로의 집으로 놀러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아랫집 아주머니를 만나면 너나 할 것 없이 한껏 소리 높여 반갑게 인사했다. 모두 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뮤지컬 빨래 공연 장면 내 이름은 솔롱고입니다. <사진제공 (주)씨에이치 수박>
그런데 이제는 간단한 인사 한마디 건네기조차 참 어려워졌다. 수년이 지났는데도 얼굴을 모르는 이웃이 대부분이고 작게나마 오가던 온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다.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사회에서 갈수록 조심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변화이겠지만 가끔은 그때 그 시절의 따스함이 참 그립다. 그래서 뮤지컬 ‘빨래’가 더 애틋하게 느껴지나 보다. 익숙한 듯 정겨운 관심,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는 이웃들의 모습이 꼭 예전 기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스물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한 뮤지컬 ‘빨래’가 활기찬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2005년 초연된 뮤지컬 ‘빨래’는 본래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작품으로 발표됐다가 꾸준한 개발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무려 17년이란 시간 동안 누적 관객 수 100만, 5,000회 이상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변치 않는 인기를 입증했다. 그리고 이제는 대학로 대표 창작 뮤지컬로 자리매김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작품을 수출하는 데도 성공했다. 또 대본 일부가 중·고교 교과서 일부에 실리기도 할 만큼 일찍이 우수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뮤지컬은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사는 소시민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저마다의 사연 때문에 서울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이다. 어느덧 서울살이 5년 차에 이른 나영은 낯선 동네로 이사를 와 새롭게 적응을 시작한다. 일찍이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면서 작가를 꿈꿨으나 지금은 서점 직원이 돼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책과 가까운 일을 한다는 사실은 나영에게 적지않은 위로가 됐다. 이웃집 몽골 청년 솔롱고는 그런 나영을 보고 호감을 느낀다. 날 좋은 주말, 바람을 타고 날려 온 나영의 빨래 하나가 수줍은 첫인사를 나눌 계기가 됐다. 서울살이 5년 차 이주 노동자 솔롱고도 꿈을 따라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왔지만 번번이 밀리는 월급에 아파도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신세가 점점 더 서럽다. 그래도 무지개를 뜻하는 이름을 지닌 그답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늘 자신의 몫을 다하며 미소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나영과 솔롱고에게 각각 다른 이유로 직장 내 위기가 찾아온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둘은 자연스레 서로를 위로하며 더 가까워지고 다시금 버틸 힘을 찾는다. 여기에 서울살이 45년 차 욕쟁이 주인할매와 10년 차 애교 만점 희정 엄마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뭉클했던 마음이 더 뜨거워진다.
중심인물들을 비롯해 구수한 입담을 지닌 슈퍼마켓 아저씨, 아부가 일상이 된 직장인, 만원 버스 기사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이룬 일상은 아름다운 음악들과 어우러져 작품 고유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그중에서도 ‘참 예뻐요’와 ‘서울살이 몇 핸가요’, ‘빨래’는 순수하면서도 포근한 감성을 한껏 담고 있어 특별히 손꼽힐 만큼 좋다.
배우들의 열연 또한 대단하다. 삶의 향기가 짙게 밴 생활 연기는 아직 비 오는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위로가 된다. 이웃끼리 서로 빨랫감을 붙잡고 시원하게 물기를 터는 모습은 마치 어떤 일이든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어제의 얼룩을 지우고 오늘의 먼지를 털어내다 보면 곧 빨래가 마르기 적당한 날이 올 거라는 약속이자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6월 1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개막한 이번 공연은 오는 2023년 1월 29일까지 계속된다. 올 연말에는 지역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대전, 청주, 창원 투어도 예정되어 있어 기대를 모은다.
어느 곳이나 숨 가쁘게 제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요즘, 아득해진 일상에 다독임이 필요하다면 지금 바로 뮤지컬 ‘빨래’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손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이웃들이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언제든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말이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2-10-28 1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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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배리어 프리’ 장애인 관객들이 진정으로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란 1974년 UN 장애자 생활환경 전문가 회의에서 만들어진 <장벽 없는 건축 설계>에서 소개된 개념으로 장애인들도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물리·제도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을 뜻한다. 배리어 프리가 물리적 환경개선의 의미를 넘어 정서적인 개념으로 확대되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예술계에서는 장애인 관객들이 느끼는 물리·제도·정서적 장벽이 여전히 높다.
2019년 2월 장애우인권문제연구소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가 인권위에 제출한 ‘영화관 영화자막 미제공에 따른 청각장애인 편의 제공 소홀’ 진정이 기각되면서 장애인의 문화예술 경험이 물리적으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장애인 차별금지법 시행령에는 ‘문화·예술·사업자는 장애인이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권위조차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한 것이다. 이후 문체부가 영화자막 및 화면 해설 확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내 장애인의 예술접근에 대한 인식은 제자리걸음이다.
릴렉스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통해 장애아동들이 공연 관람을 하고 있는 모습 .
그렇다면 국외 예술계에서는 장애인 관객들의 예술접근 장벽을 낮추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을까? 배리어 프리의 정의 그 자체를 실천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 HSBC가 후원하는 ‘릴렉스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 Project)’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HSBC에서 무료 티켓을 지역 초등학교에 배부해 대상 아동들을 초대하고 ‘버밍험 히포드롬(Birmingham Hippodrome)’에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자폐 및 학습장애 뿐만 아니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공연 관람 시간 동안 안전한 분위기에서 원하는 대로 반응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판매 가능한 객석의 수를 줄이고 1인당 사용면적을 넓혔다.
또,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의 자유로운 공연장 출입을 허용하고 어두운 공연장에서 불안을 느끼는 관객들을 위해 공연장 근처에 휴식공간을 마련했다. 공연관계자들도 전문 교육을 이수해 이 과정에서 발생 되는 소음을 기꺼이 감내하며 공연을 진행한다.
스마트 글래스를 착용하는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관람객들.
그 밖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 프리 사례로 앱손의 ‘스마트 글래스’가 있다. 이는 학계, 예술계 그리고 기업이 협업한 대표적인 사례로 리즈베켓(Leeds Beckett)대학교의 앤드류 램본(Andrew Lambourne) 교수, 내셔널 씨어터(National Theatre) 그리고 앱손이 함께 했다.
이 안경은 청각장애로 극장 관람을 포기했던 관객들을 위한 제품으로 공연장면을 보면서 동시에 소리를 스크립트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공연 스크립트를 소프트웨어에 입력하면 공연에 맞춰 자막이 송출되고 안경에 달려 있는 손바닥 크기의 키패드를 이용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자막의 크기, 위치, 색깔까지 조정이 가능하다. 처음 스마트 글래스를 내셔널 씨어터에서 선보일 당시 30년간 극장에 가지 못했던 관객이 “스마트 글래스 덕에 다시 극장에 갈 수 있어 기쁘다”며 극장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는 등 관객들의 만족도가 100%가 달했다.
국내 역시 예술계 자체에서 배리어 프리와 관련해 다양한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16년 초연된 창작극 ‘아빠가 사라졌다’에서는 청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해설사가 등장해 대본 및 지문을 읽어주고 무대 위 소리를 진동으로 전달하는 팔찌를 제공하는 등 청각장애인을 위해 무대 전반을 기획, 구성해 화제가 되었다. 2021년에는 ‘창작공감 : 연출’에서 ‘장애와 예술’을 주제로 시각, 청각, 뇌병변 장애, 비장애배우가 모두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다큐형식으로 들려주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때 음성 해설뿐만 아니라 한글 자막, 한국수어 통역, 이동지원 서비스 등 장애인을 위한 다차원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관람 편의를 도왔다. 이러한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장애인 관객들의 물리적 장벽이 많이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연극 아빠가 사라졌다 포스터>
미술관에서도 배리어 프리와 관련된 시도들이 이루어졌는데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이 6월 개막한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에서 수어 해설, 음성 해설, 점자 자료 등을 제공해 작품을 다각도로 감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에 열릴 ‘MMCA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과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전’ 등 연말까지 4~6개 전시에도 도입될 예정이다. 그밖에 제주 서귀포 포도뮤지엄에서는 휠체어 관객이 전시장 어디든 편안히 이동할 수 있는 무장애 동선을 도입하기도 했다.
지구화, 디지털화에 가속이 붙을수록 접근성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접근성 확대에 소외되는 계층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장벽을 없애기 위한 기초가 바로 배리어 프리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것. 장애인들이 예술에 접근하는 데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것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고 행해져야 할 것이다.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것을 넘어 인식의 장벽을 없애는 진정한 의미의 배리어 프리가 사회 전반을 아우르기를 감히 기대해 본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2-10-21 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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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오페라 <타히티 섬에서의 소동>
<사진: 주인공 디나(Dinah)가 테마송 'Island Magic'을 부르는 장면>
전 세계적으로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만큼 다재다능한 아티스트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을 대표하는 카라얀과 비견될 만한 존재감을 가진 미국출신 지휘자일 뿐더러 작곡가, 피아니스트, 작가, 방송인 등등 못 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지휘와 견줄 만큼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교향곡, 실내악, 성악곡 등 거의 모든 장르의 클래식을 아울렀으며 영화음악을 비롯하여 <온 더 타운>, <원더풀 타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뮤지컬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만능 작곡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번스타인이 오페라도 작곡했을까?
아무래도 대중적인 뮤지컬 작곡가로 각인이 되어 있다 보니 번스타인의 오페라는 상당히 생소한데 그가 작곡한 2개의 오페라가 존재한다. '타히티에서의 소동(Trouble in Tahiti)' 그리고 속편 '콰이어트 플레이스(A Quiet place)'.
특히 뉴욕타임즈로부터 찬사를 받은 '타히티에서의 소동'은 번스타인이 1952년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발표한 오페라 처녀작으로 195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현실을 그려낸 참신한 미국 오페라다.
이 오페라의 출연진은 5명으로 단출하다. 주인공 샘(바리톤)과 디나(메조 소프라노) 그리고 극의 내러티브를 받쳐주는 재즈 보컬 트리오 셋. 줄거리는 1950년대 미국 교외에 사는 한 가정의 부부간 불화를 다루고 있으며 하루 동안 전개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오페라는 짧은 일곱개의 씬으로 이루어진 단막극이다.
각 장면속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아침 식사 대화속에서 부부간의 갈등이 촉발되며 디나는 샘과 그의 비서사이 불륜을 의심하고 있으며 샘은 이를 부인한다. 디나는 오후에 아들이 출연하는 연극을 남편에게 상기시키지만 샘은 체육관에서 개최되는 핸드볼 토너먼트 경기로 인해 참석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계속되는 대화속에 의견차이를 보이며 언쟁을 벌이던 둘은 저녁에 다시 만나서 얘기를 이어가기로 한다.
2장에서는 일터에서 프로답게 일하는 샘의 모습이 부각 되며 3장에서 정신과 의사를 찾은 디나는 자신의 꿈에서 본 신비한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샘은 사무실에서 자신의 비서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4장에서 깊은 감정의 골을 엿볼 수 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샘과 디나가 서로 점심 약속이 있다며 거짓으로 둘러대고 각자 과거가 되어버린 행복에 대해 노래한다.
5장과 6장은 각각 핸드볼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직후 승리에 도취된 샘의 모습과 모자가게를 찾은 디나의 모습이 담겨있다. 디나는 오후에 영화 '타히티에서의 소동'를 보고 날 선 감상비평을 쏟아낸다. 여기서 디나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섬의 마법(Island Magic)'이 등장하는데 영화 속의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녀는 샘의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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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7장에 이르러 저녁 시간 다시 마주한 디나와 샘. 둘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디나는 자신도 아들의 연극에 불참했다고 털어놓는데 둘은 확실히 관계회복을 바라고 있지만 확신은 없다. 마침내 샘은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그의 선택은 다름 아닌 '타히티에서의 소동'.
이 작품의 참신한 매력은 '유럽풍'을 연상시키는 여느 오페라와 달리 미국인 번스타인이 바라본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1950년대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담은 시대상이 부부관계의 드라마 속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명의 재즈 보컬 트리오는 오페라에 틈틈이 등장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반어적으로 비틀며 노래에 담아낸다. 예를 들어 오페라의 첫 장면에 등장하여 부르는 곡은 교외에 사는 중산층의 삶을 예찬하는 노래로 사실은 그렇지 못한 현실을 풍자한다.
번스타인이 유일하게 음악뿐 아니라 대본까지 도맡아 작업한 극음악이라는 점 또한 흥미를 돋군다. 가사 속에 묻어나는 그의 생각과 철학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4장 이후 막간에 등장한 재즈 보컬 트리오는 화려한 욕실, 고급 쿠페자동차를 비롯하여 사치품들을 늘어놓으며 소유물이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는 식의 소비만능주의를 노래하는데 번스타인의 시니컬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부모 사이 관계를 모티브 삼아 작곡한 번스타인의 이 오페라에는 당시 남녀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5장에서 토너먼트 게임에서 이긴 샘은 "There's a law about men"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승리에 취한 샘이 전형적인 미국 남성상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들의 연극도 빼 먹은 채 타히티섬 배경의 현실도피 로맨스 영화를 볼 정도로 현실속에서 무료하고 고독한 아내 디나가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생각난 건 남편의 저녁식사를 차려주는 일이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이 오페라에 대해 '남자다움에 집착하며 일과 운동의 승부속에서 도피처를 찾는 샘과 영화들에 사로잡혀 있는 디나의 이야기"로 묘사한 바 있다. 재즈 보컬 트리오가 노래한 것처럼 겉으로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중산층 가정처럼 보이지만 내재 된 고독과 자본주의가 낳은 부작용과 상처들이 부부의 일상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번스타인의 가장 어두운 작품으로 간주 되기도 하지만 불화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않 고 관계회복을 꿈꾸는 커플의 현실적 고민속엔 희망이 내재되어 있다.
번스타인은 1950년대 사투리와 표현방식을 주의 깊게 연구하며 미국문화 본연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이 작품에 온 힘을 쏟았다. 45분이면 참신한 미국 오페라 한편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짧아서 좋다.
테마송 "Island Music"는 주인공 디나가 영화 '타히티에서의 소동'을 형편없는 영화로 치부하면서도 이국적인 남태평양 타히티섬의 환상에 젖어 부르는 노래다. 현대적 화성에 재즈의 리듬과 화성적인 요소가 가미된 절로 춤이나오는 흥겨운 곡이다.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6qzWI-fUvU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2-10-21 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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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춤으로의 초대
일상에서 멀어진 전통 예술들은 대체로 배우기 전에는 낯선 것이기 십상이지만 춤만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춤 이름은 낯설지언정 ‘들썩들썩, 덩실덩실’의 감각은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친근하기 때문이다. 전문 춤꾼만큼 다듬어진 모양새는 아닐지라도, 흥이 오를 때 사람들의 몸짓에는 예로부터 전해온 춤사위가 녹아 있다. 춤이 어울리는 결실의 계절, 늦여름에서 초겨울로 껑충 건너뛰어 버린 날씨가 조금 원망스럽지만 흥을 돋우고 열기를 피어오르게 할 춤 공연들을 만나보자.
2022 무용극 호동
『국립극장 70년사』를 보면,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두 작품이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74년에 무용극 <왕자 호동>을, 1990년과 1991년에는 무용극 <그 하늘 그 북소리>를 공연했는데, 두 작품의 안무자는 모두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인 故 송범 선생이다. <왕자 호동>은 국립무용단이 국립발레단과 분리된 후 ‘한국적인 무용극을 완성하려는 목표를 가시화한’ 시기의 작품이며, 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공연한 <그 하늘 그 북소리>는 ‘춤 중심의 무용극 시대’라 명명한 시기의 작품이다.
이러한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전통을 기반으로 한 창작 작품과 현대적인 작품 개발에 박차를 가해온 국립무용단이 올해 창단 60주년을 맞이해 무용극 <호동>을 다시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린다. 송범 원작의 작품에 세 명의 단원이 공동 안무로 참여하고 50여 명 전 단원이 무대에 설 예정이다. 거기에 더해 창작 뮤지컬 연출가이자 각색자로 정평이 난 이지나가 연출과 대본을 맡는다. 웅장하고 미래지향적인 고전의 탄생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안무자 프로젝트: 교방가요
같은 전통 춤을 기반으로 하지만, 국립무용단의 작품이 창작에 방점이 찍힌다면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전통의 보존과 복원, 재현 공연에 천착해왔다. 주로 의궤나 홀기(笏記) 등 궁중의 기록에 근거를 둔 궁중 춤이 주요 레퍼토리인데, 11월에 열리는 기획 공연에서는 조금 색다른 시도를 할 예정이다.
조선 후기 진주 목사를 지낸 정현석은 진주 교방에서 연행한 춤과 음악을 정리해 『교방가요』라는 책을 낸다. 교방(敎坊)은 조선 후기 여기(女妓)를 관장한 기관이다. 교방가요에 남아있는 춤 중에는 지역의 특색을 살린 종목뿐 아니라 궁중에서 연행된 정재(呈才) 종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교방가요가 궁중과 민간 혹은 서울과 지방의 문화 교류와 그에 따른 춤의 변화 양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자료임을 의미한다.
교방가요에 대해 심도 있는 교육을 여러 차례 실시한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하반기 자체 공모를 거쳐 교방가요의 춤 종목들을 주제로 무용단원들이 안무자로 참여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지방 정재의 복원과 재해석을 통해 교방의 춤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경계를 허물고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작업을 통해 현대의 관객이 보다 흥미롭게 전통 춤을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야류별곡(野遊別曲)
춤의 고장, 영남에 위치한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은 지역의 국가무형문화재인 동래야류를 소재로 한 공연 <야류별곡>으로 서울 원정에 나선다. 들놀음인 야류(野遊)는 영남 낙동강 동쪽에서 연행한 가면극을 부르는 이름이다. 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 연희가 모두 어우러져 종합 예술의 형태를 띠며 놀이의 내용은 문둥이 과장, 양반 과장, 영노 과장, 할미․영감 과장 등으로 이루어진다. <야류별곡>은 동래야류의 전 과장 구성을 그대로 가져오되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 춤사위인 덧뵈기춤을 기본으로 지역의 춤을 재현하거나 창작해 춤에 비중을 더했다. 감각적인 연출과 참신한 시도로, 지난 6월 부산에서 무용단 정기 공연으로 초연한 후 재미와 감동 모두를 놓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서울 공연은 10월 28일과 29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다.
또 이날치 밴드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세계인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10월 29일과 30일, 고양에서 <얼이섞다>라는 제목의 공연을 한다. MBC라디오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를 통해 소개됐던 향토민요에 그들의 춤사위를 얹는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는 늘 모호하지만 우리 소리, 우리 춤임에는 틀림없으니 여기 슬쩍 이어 붙여본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2-10-14 1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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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가사에 무게를 실은 주크박스 뮤지컬, ‘인생은 아름다워’
유독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들이 있다. 전문가들의 비평을 논외로 한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한 관객들 각자의 기대가 달랐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배꼽 빠지는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눈물 쏙 빼는 멜로드라마였다든가,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인 줄 알았더니 주연급 조연 정도였다든가 하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인 완성도와 관계 없이 야박해지고 만다. 특히 영화관람료가 오르고, OTT가 인기를 끌면서 관객들이 더욱 까다롭게 영화를 선택하고 있는 요즘, 기대심리는 감상평과 직결된다. 때문에 만족스럽게 영화관을 나오려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좋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정보란 내용이나 장르, 감독이나 출연자처럼 기본적인 것들을 넘어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영화의 핵심적인 견인 포인트가 무엇인가, 즉 어디에 방점을 두고 만들어졌는가를 아는 것이다. 물론 꼭 개봉일에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보의 수신자가 아니라 발신자가 되어야겠지만.
지난 달 말에 개봉한 ‘인생은 아름다워’(감독 최국희)에는 한국 상업영화로서는 최초로 시도된 뮤지컬 영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내용이 전혀 다르므로 한국판 ‘라라랜드’(감독 데미언 셔젤)라는 말은 장르의 유사성 하나만 따서 붙인 홍보성 문구인데, 그마저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라라랜드’의 삽입곡들은 영화를 위해 새로 작곡한 것이고, ‘인생은 아름다워’의 삽입곡들은 기존 대중음악에서 선곡한 것으로, 후자는 ‘주크박스 뮤지컬’로 불리기도 한다. 즉, 아바의 노래들로 만든 ‘맘마미아’(감독 필리다 로이드)가 성격상 ‘인생은 아름다워’와 훨씬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삽입곡의 태생이야 뭐가 됐든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은 대개 ‘음악’과 ‘춤’이 중요한 관전포인트라는 데 있을 것이다. 멋진 노래와 춤이야말로 뮤지컬 영화의 질을 격상시키고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아름다워’의 초점은 다른 곳에 맞춰져 있다. 주연을 맡은 류승룡, 염정아의 노래와 춤 실력은 매우 평범한 수준이며, 그 수준에 맞추었기 때문인지 편곡이나 안무도 소박하기만 하다. 대신 ‘인생은 아름다워’의 강점은 웃기고 울리는 드라마에 있다. 노래와 춤에 일가견이 없음에도 류승룡, 염정아 배우를 캐스팅 한 것은 이들이 폭넓은 감정을 잘 소화해낼 수 있는 뛰어난 연기자들이기 때문이며, 실제로 이들의 20년차 부부 연기는 그리 흠잡을 데가 없다. 덕분에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아내와 무뚝뚝한 남편의 여행, 그리고 가족들이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 등 서사에 몰입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꽤 진한 감동을 남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뮤지컬로 만들어져야 했을까? 여러 가지 의도를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삽입곡들의 가사다. ‘조조할인’, ‘알 수 없는 인생’, ‘잠도 오지 않는 밤에’, ‘아이스크림 사랑’ 등 4050 세대들에게 익숙한 가요들은 적재적소에 삽입되어 인물들의 감정을 뒷받침하는 내래이션 혹은 대사로 사용되고 있다. 특정 장면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 가사가 매칭되었을 때 느껴지는 신기함과 놀라움은 일부 영화에 대한 만족과 감동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가사에 무게를 실은 주크박스 뮤지컬’ 정도로 ‘인생은 아름다워’를 소개한다면 관객의 기대치와 감상평의 편차는 좁혀지지 않을까.
윤성은의 Pick 무비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접점, ‘선데이리그’
독립영화가 지루하고 어렵기만 했던 시대는 지났다. 독립영화라는 카테고리에 여전히 그런 작품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저예산 장르영화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독립영화를 일반화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이성일 감독의 ‘선데이리그’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스포츠영화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 저예산 장르영화의 좋은 예다. 한 때는 유망주였으나 이제 퇴물이 된 스포츠 선수와 그가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한 번의 기회 등 대중적인 코드들이 초반부 관객들의 흥미를 끈다.
해고와 이혼이라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한 동네 축구교실 코치, ‘준일’(이성욱)은 아마추어 풋살팀을 본선에 진출시키면 정규직으로 승격시켜주겠다는 제안에 솔깃한다. 그러나 그가 이끌어야 하는 ‘철수축구단’의 멤버들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다. 절망감에 빠져 있던 준일은 멤버들의 순수한 열정을 보게 되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승리를 향한 각오를 다진다. 철수축구단이 맹훈련에 돌입하면서 실력이 늘어가고 경기를 치러내는 장면들은 이 스포츠 영화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저 축소된 상업영화로 분류하기에 ‘선데이리그’는 다소 의외의 결말을 선택한다. 판타지를 제거한 현실의 무게감은 과거 대다수 독립영화들의 특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래도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이지는 않다. 대회를 거치며 준일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 중요해진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기 때문이다. ‘선데이리그’는 프로 리그와 아마추어 리그의 유사성에 대한 레포트이면서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의 어느 접점을 보게 하는 영화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2-10-14 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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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K-Art를 뉴트로로 읽어낸 ‘문학계의 백남준’ 구용 김영탁 탄신100주년
종합주의를 구현한 ‘한국문학의 대가’ 조망전시, 성대박물관 내년 3월31일까지
“묵념은 등대의 목줄기를 쳐다보며 별들의 숨을 쉰다. 정관(靜觀)은 바다 안개로 피화(皮化)한 가로등 불에서 소리를 발견한다.” - 김구용, 「말하는 풍경」(1959)
성균관대박물관(관장 조환)은 혼란한 한국현대사회를 독특한 색채로 구현한 문학가 구용 김영탁(1922~2001/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삶과 詩 세계를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한 《구용의 New-tro, 무위이화》 전시를 개최한다. 구용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우기(김구용 문학전집 편집을 담당)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시 정신을 논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대시인”이라며, 동양의 정신세계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정서로 표현한 ‘산문시’의 대가로 평가했다.
구용 김영탁 사진
다방과 산방 사이, 詩 세계를 탐닉하다.
구용의 본명은 영탁(永卓)이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공자의 이름[孔丘]에서 ‘구(丘)’를, 중용에서 ‘용(庸)’을 따온 필명인 ‘구용(丘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50년대 전후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한학(漢學)에 대한 깊은 소양을 바탕으로 한문 고전을 생동하는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였으며, 추사를 비롯한 전근대 한국 예술가를 깊이 숭앙했던 서예가이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였다. 구용의 삶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생존과 문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이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환기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수양했으며 동양의 고전에 흠뻑 빠져있던 동학사 사찰의 산방(山房)과 서구 최신의 문예 기조를 습득하며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유하였던 부산의 다방(茶房)을 전전했다.
최순우가 김영탁에게 보내 온 편지와 우편물
이렇듯 성과 속의 공간을 넘나드는 태도는 이후 삶에서도 이어졌다. 또한 전통 시기 옛 문인들을 애호하며 그 정신을 힘든 정신 속에서 재창조하려는 의지도 새롭게 다졌다. 본 전시의 초반파트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던 산방의 구용, 다양한 문인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다듬어간 다방의 구용, 추사 김정희로 대표되는 옛 문인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새롭게 창조해간 구용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문학계에서 불려온 ‘난해성의 벽(壁)’
시각화된 구조 안에서는 ‘초현실적 아방가르드’와 매치되며 이는 다양한 전통과 현대, 문학과 미술 사이를 융합적으로 파고드는 현시대의 다층적 콜라보를 함축한다. 전시를 통해 살펴본 구용 시의 분석과 해석들이 미완의 비평과제를 남겼다면 시각과 매치된 글씨와 그림은 오히려 ‘통시성과의 대화’를 시도한 ‘구용스타일’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서구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시학, 한시의 전통과 선시 등을 종합적으로 연결시킨 부분은 문학을 벗어난 문화재 해석과 당대 화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하되 근본을 꿰뚫는 ‘명쾌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언어에 갇힌 문학가가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취가 다양한 도판 위에 쓴 자기해석과 맞닿았을 때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용의 글씨와 그림, 초현실을 종합한 전통해석
구용이 그리고 쓴 무위자연
구용의 무위이화는 ‘통하여 이어지는 해석-전통傳統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이성자의 1974년 현대화랑 개인전 도록 속에는 당대의 여류 추상 그림을 접한 문학가의 자기 해석이 간결한 문체와 글씨 속에서 재발굴된다. 표준어를 넘어선 언어와 기호를 가로지른 섬세한 비평, 아마도 발굴되지 않은 수 많은 화가들과의 교류 속에 ‘구용의 新비평 스타일’이 담겨있을 것이다. 날 서지 않은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둥그러진 캘리그라피와 같은 글씨 형식은 구전을 자연적으로 시각화한 詩형식을 보여준다. 김구용이 「風味」(1970)에서 언급한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는 구절은 정확한 인식이 불가능한 예술해석의 다양한 취향, 이른바 보편구조를 벗어난 21세기라는 탈구조적 개별양식을 예견하고 있다.
배채기법으로 구용을 재 해석한 신제현의 <히든 사이드>
그가 읽어내려간 언어의 불협화음들은 낯설게 공존하는 ‘전통을 향한 오늘의 인식’을 보여준다. 이성자의 1972년작 <5월의 도시, 72-no.3>의 원형구조를 “푸른 거울”로 해석한 것이나, 1966년작 <음악이 필어난 잠자리>를 “부풀어 오른 행복, 별은 꽃 피리라”(1974)와 같은 리드미컬한 동시(童詩)와 같이 표현한 것은 그가 기존에 보여준 난해한 시형식과는 또 다른 순수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실제로 구용은 이성자 외에도 천경자와 같은 여류 화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시각예술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확장구조를 시세계에 반영했을지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추사 김정희에 대한 흠모에 대해 최순우 관장이 보낸 <세한도(歲寒圖)> 엽서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듯이, 구용의 네트워크와 신구고금과의 대화는 어떤 인위도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無爲而話(무위이화)의 세계관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아이같은 캘리그라피, 구용글씨에 담긴 현대성
김구용의 글씨는 최근 유행하는 한글 캘리그라피의 전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 위에 날개를 달고 여백 위로 솟는 듯한 섬세한 갈무리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폭발시키는 다이나믹하면서 순수한 마음글씨”를 지향한다. 인간의 삶을 무의식적인 자동기술법 속에서 표출한 시인이기에 구용의 심층 이미지를 드러낸 ‘시각과의 매치_콜라보 시리즈’는 더욱 강한 여운을 남긴다.
독특한 개성이 있는 구용의 글씨체
이번 전시는 이러한 기법상의 독특함을 실험적 개념 페인팅을 선보이는 신제현 작가의 <히든사이드>2022 시리즈와 연동시킴으로써 ‘전통-현대’를 뒤섞는 순환의 매치방식을 선보인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역설을 보여주는 시·공간의 주체해석은 뉴트로 문화로 예견되는 ‘현실과 메타버스’ 세계의 연동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마치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오웰 Good Morning Mr. Orwell>(1984)이 통감각적 SNS 시대를 예견했듯이, 구용의 뒤섞고 해체시키는 종합주의적 해석은 “구용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내야 한다”는 전시의 합목적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2-10-07 1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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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놀라운 재능으로 무대를 장악하다_뮤지컬 마틸다.
다섯살 꼬마 마틸다는 ‘변신’이나 ‘오만과 편견’ 같은 어른용 서적까지 모두 읽을 만큼 독서광이자 천재인 여자아이다. 하지만 마틸다의 비범함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부모와 오빠는 마틸다를 그저 괴상한 아이라 생각한다. 마틸다를 이해해주는 건 오직 초등학교 담임인 허니 선생님뿐. 그나마 학교에서도 끔찍스런 존재가 아이들을 괴롭힌다. 바로 교장인 미스 트런치블이다. 올림픽 국가대표 해머 선수 출신인 그녀는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실 창밖으로 던져버릴 정도로 무자비하고 괴상한 존재다. 미스 트런치블의 잔혹한 학교 운영이 계속되자 마침내 마틸다는 자신의 숨겨진 초능력을 활용해 복수를 시작한다. 뮤지컬 ‘마틸다’의 발칙한 상상이 돋보이는 무대위 이야기다.
원작은 노르웨이계 영국 소설가인 로알드 달의 소설이다. 우리나라 대중들에겐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작가다. ‘찰리...’ 역시 소설로 시작해 영화가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다시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던 전력이 있다. 현대사회의 문화산업 분야에서 로알드 달의 원작들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기 콘텐츠들임을 실감할 수 있다.
1916년 영국으로 이민 온 그의 부모는 인류 최초의 북극 탐험가인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 로알드 아문젠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도 로알드라 지었다. 겨우 세 살 때 누이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로알드 달은 홀어머니에게서 자라야 했다. 훗날 성인이 된 후 영국의 석유회사인 셸에 입사해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는 경험도 쌓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으로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는데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살아남는 경험을 한 후 그 사건의 충격으로 글을 쓰게 됐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최고의 아동소설 작가로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는데 늘 예상을 허락하지 않는 반전과 독특한 블랙 유머를 작품 속에 활용해 어른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이 되는 인기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그의 동화들이 “가장 대담하고, 흥미롭고, 유쾌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 책‘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바로 이런 배경 탓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상을 깨는 반전은 그의 작품들을 다양한 원 소스 멀티 유즈(OSMU)의 대상으로 활용되게끔 만들기도 했다. 특히 영화로 변신해 큰 흥행을 기록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앞서 언급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1964)’외에도 ‘마녀를 잡아라(The witches, 1983)’, ‘마틸다(1988)’ 등이 있다.
’마틸다‘를 영화로 만든 것은 작은 키에 코믹한 연기를 잘 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 배우 대니 드 비토다. 그는 영화 ’마틸다‘에서 감독 및 제작 그리고 마틸다의 철없는(?) 아버지 역으로 출연까지 하는 1인 3역을 소화해냈다. 귀엽고 당찬 주인공 마틸다로 나왔던 아역 배우 마라 윌슨은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와 ‘34번가의 기적(1994)’에 등장했던 바로 그 귀여운 꼬마 여배우로 특유의 귀엽고 사랑스런 이미지를 이 작품 ’마틸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해 큰 사랑을 받았다.
소설은 1988년에, 영화는 1996년에 만들어졌으며, 뮤지컬로 다시 탈바꿈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셰익스피어 생가로 유명한 영국 스트라트포드 어폰 에이본의 세계적인 극단인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가 역대 두 번째로 시도한 뮤지컬 작품이다(처음 만든 뮤지컬 작품은 레미제라블로 오늘날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2011년 런던 웨스트엔드로 옮겨와 막을 올린 공연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2013년 막을 연 브로드웨이 공연은 2017년 1월 종연될 때까지 자그마치 1555회의 연속 공연을 기록하는 인기를 누렸다. 영어권이 아닌 비영어권 국가 중에서는 한국어 공연이 최초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뮤지컬 ’마틸다‘는 어른보다 더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귀여운 아이들의 연기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말 무대에서도 이러한 전통은 6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됐다는 아역 배우들에 의해 충실하게 구현된다. 2022년 막을 올리는 앙코르 공연에서는 마틸다 역으로는 임하윤, 진연우, 최은영, 하신비의 네 소녀가 번갈아 무대를 꾸민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 무대에 등장했던 아역배우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인데, 물론 그만큼 아이들이 빨리 자라버렸다는 의미기도 하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아역배우를 발굴해 수준급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뜻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를 내두르게하는 아이들의 완벽한 무대위 모습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낸다. 어떻게 저 말들을 외웠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고 경악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대사와 노래를 별 거리낌 없이 소화해낸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가 더욱 궁금해지는, 극을 떠나 완연한 천재끼가 다분한 꼬마 배우들의 모습을 대견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로테스크한 교장 미스 트런치볼은 늘 남자배우가 여장을 하고 무대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 공연가에 유행하는 젠더 프리(혹은 섹스 프리) 캐스팅인데 올해 공연에서는 최재림과 장지후가 맡았다. 미스 허니 역의 방진의와 박혜미, 미세스 웜우드 역의 최정원과 강웅곤 등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2시간 넘게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이들과 가족 관객들이다. 활자가 영상으로, 또 무대로 탈바꿈되는 현대 문화산업의 부가가치 창출 방식을 여실히 체험할 수 있다. 런던이나 브로드웨이에선 극장 기념품 가게에서 책을 사들고 귀가하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과의 나들이를 서두르기 바란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2-10-07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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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장애인 예술가 – 공평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최근 장애인 이동권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여 화제가 되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복지 지원 정책의 부족함이 여과없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했다.
우리는 주위에서 생각보다 쉽게 크고 작은 신체·정신적 결함을 가진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가 치명적인 결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크고 작은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지칭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쉽게 고치지 못한다. 이는 예술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8년 문화체육부의 ‘장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2018)’에 따르면 장애예술인의 평균 활동 기간은 7.6년 정도로 짧으며 예술활동 관련 지원 경험이 없다는 응답도 62%에 달해 장애예술인의 운신의 폭이 몹시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유럽 전역 문화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장애인 예술 프로그램 운영에서 드러나는 문제점(Time to act)을 통해 국외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장애예술 지원의 필요성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설문에 응한 문화예술 종사자 절반 이상이 유럽 장애인 예술가 작품에 대한 지식, 경험, 접근성 및 포용성이 부족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언급한 설문조사 내용들의 맹점은 장애예술계를 단순 ‘지원’하는 것에 있다. 이제는 그들이 사회 곳곳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목소리를 함께 내는 것으로 인식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영국의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인 마크 브루는 “저는 예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상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예술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양성은 우리 시대의 창조적인 기회 중 하나입니다. 라고 언급하며 장애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책 마련을 촉구했다.
애플매장에서 세션을 진행중인 웨버
그렇다면 사회 및 기업은 문화예술의 다양성 확보와 장애예술계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을까.
미국 애플(Apple)은 ‘Today at Apple’을 통해 장애인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타냐 라브-웨버의 작품 활동을 들 수 있는데 그녀는 그림을 매개로 정체성, 장애인, 성별 등을 연구해온 비주얼 아티스트다. ‘Today at Apple’과 그녀는 ‘Portraits Unfold’라는 타이틀로 2018년 6월부터 10월까지 작품을 디지털 벽화로 만들어 대형스크린에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 애플TV의 ‘Global Accessibility Awareness Day’를 통해 장애인 예술가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올해 하반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 등 제품 전반에 장애인 지원 기능을 도입할 것임을 밝혔다.
토비 다이너박스사가 개발한 기술을 활용해 전시를 진행한 베키 타일러
다음으로 토비 다이너박스는 보완 대체 의사소통기술(ACC)을 통해 장애인들의 의사소통 및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베키 타일러는 ACC 기술 지원을 받은 사지마비성 뇌성마비 환자를 시선 추적 기술을 활용해 작품 창작에 성공했다. 그녀의 작품은 브리스톨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시되었으며 도예가 그레이슨 페리의 아트클럽에 소개되기도 했다. 토비 다이너박스의 ACC 기술지원 사례들은 공식 인스타그그램 @tobii_daynovox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국내외 기업이 협업을 통해 장애예술을 지원한 사례도 있다. 바로 한국의 도미넌트 에이전트와 영국의 휴먼 인스트루먼트의 ‘버즈 비트’다. 2015년 작곡가 롤프게하가 고안한 이 장치는 연주자들이 다양한 지휘 신호를 감지해 지휘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지휘자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게 도와준다. 버드 비트를 한국에 소개한 도미넌트 에이전트의 황도민 대표는 “선천적으로 시각장애가 있는데 경증이라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악기를 할 때 어려움이 있었다. 기획자로 활동하던 중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싶은 시각장애 연주자를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휴먼 인스트루먼트의 개발자이자 롤프 게하의 아들인 바하칸을 만날 수 있었다”고 개발 계기를 밝혔다.
버즈비트를 들고 지휘를 하고 있는 지휘자 진솔
버즈비트는 2019년 서울시립 교향악단의 ‘우리동네 음악회-한빛맹학교’를 통해 국내 첫 선을 보였으며 같은 해 9월 다큐멘터리 ’소리는 진동이다‘가 이집트 여성문화콘퍼런스에 상영되기도 했다.
국내 복지재단 하트-하트재단에서는 2006년부터 발달장애아들을 위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장애아동의 정신적 성장은 물론 더 나아가 음대 진학 및 전문 음악인으로 자리잡을 기회를 제공하는 이 오케스트라는 뉴욕 카네기홀, 위싱턴 존 F. 케네디 센터 등 세계적인 공연장을 비롯해 국내외 1,000여 회의 공연을 통해 국내 취약계층 오케스트라 대표 롤 모델로 자리잡았으며 장애인식 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트하트재단 오케스트라
하트-하트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지도교사였던 김미란씨는 “발달 장애 아이들도 인내심을 갖고 지도하면 비장애인들과 같은 수준에 충분히 이를 수 있다”며 ‘장애인 음악가’가 아닌 ‘음악가’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언급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에는 비록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빛나는 재능을 가진 김현우 화가의 ‘퍼시 잭슨, 수학 드로잉’이 걸렸고,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화가 겸 배우 정은혜씨의 활발한 작품 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장애는 분명 일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을 주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하는 데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기술적 지원을 통해 그들의 내부에 잠재된 예술적 생명력을 충분히 꽃피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창작자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작품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장애인 예술활동의 초기 목적이 건강과 치료였다면 이제는 창작자로서 고유한 재능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그들의 작품을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의 재고가 분명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예술계 역시 ‘장애예술계’라는 범주적 한계를 벗어던지고 하나의 예술로 공평한 예술적 잣대로 그들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2-09-30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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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기록을 들추며 소소한 기쁨을…아카이브의 매력
대부분의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은 인터넷 상에 그들의 홈페이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홈페이지를 통해 우리는 공연 일정을 알 수 있고 티켓을 예매할 수 있습니다. 또,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으며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의 역사를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기도 하지요. 공연과 리허설 사진들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대세인 요즘에도 위에서 언급한 홈페이지의 기능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비록, 일부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의 경우로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항목이 있습니다. 바로 아카이브(Archive) 입니다.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를 의미하는데 이 아카이브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존재하다보니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라고 표기되곤 합니다.
아카이브에 담겨 있는 기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의 공연 프로그램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언제 어떤 지휘자가 무슨 작품들을 지휘했다는 식의 기록이 그렇게 흥미롭겠나 하고요. 하지만, 이런 기록이 100년이 넘게 쌓여온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 오케스트라나 공연장의 유구한 역사가 이미 느껴짐과 동시에 우리가 문득 궁금해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 질문들이란 이를테면, 20세기 전반에 작곡가이자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ff, 1873-1943)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을까? 말러(G. Mahler, 1860-1911)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빈 필)를 지휘할 때, 어떤 작품들이 연주되었을까? 같은 것들이죠. 이렇게 특정 연주회의 기록을 들춰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이를 보다 긴 안목에서 관찰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프로그램 구성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기도 합니다. 필자가 이전 칼럼 <리사이틀과 협주곡>에서 다루었듯이 바이올린 리사이틀에서 20세기 전반에는 협주곡이 자주 연주되었다가 점차 협주곡 대신 소나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하나의 예이죠.
오랜 시간 쌓여간 공연 프로그램 기록을 홈페이지에 제공하는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는 1842년 같은 해에 창단된 빈 필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뉴욕 필)를 들 수 있습니다. 또, 1881년 창단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역시 앞의 두 오케스트라처럼 창단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공연들의 프로그램 기록을 제공하지요. 공연장으로는 뉴욕의 카네기홀과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 그리고 빈의 대표적인 세 공연장인 무직페라인과 콘체르트하우스, 그리고 국립 오페라 극장을 들 수 있겠습니다. 다만, 무직페라인과 스칼라 극장은 개관 시점이 아닌, 각각 1924년과 1950년부터의 공연 기록을 제공하며 빈의 국립 오페라 극장은 1955년부터는 모든 오페라 및 발레 공연 기록을 제공하지만 개관 시점인 1869년부터 1955년까지는 다수의 오페라 공연 기록만을 제공합니다.
뉴욕 필의 디지털 아카이브 화면 갈무리
이 중 뉴욕 필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매우 특별한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공연 프로그램 기록도 풍부하지만 다른 아카이브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귀한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그 자료는 바로 악보입니다. 일반 악보가 아닌 지휘자들이 직접 사용하면서 이런저런 사항들을 체크해놓은 스코어와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입니다. 이 자료의 규모는 굉장히 방대해서 현 시점을 기준으로 스코어는 4200개, 파트 악보는 무려 3만6000개가 넘을 정도입니다. 이곳에 있는 다양한 작품들의 악보에는 뉴욕 필을 거쳐간 많은 지휘자들의 손길이 담겨 있는데 대표적으로 번스타인(L. Bernstein, 1918-1990)과 토스카니니(A. Toscanini, 1867-1957), 그리고 라인스도르프(E. Leinsdorf, 1912-1993) 등이 있습니다. 심지어 말러의 표기가 담겨 있는 스코어도 있지요.
이 아카이브는 기술적으로도 굉장히 훌륭해서 스코어의 작은 부분을 계속해서 확대해도 화면의 선명도가 높게 유지되는데 이로 인해 지휘자들이 살짝 표기해놓은 부분도 생생하게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지휘자들이 악보에서 강조해놓은 부분, 템포 표기 그리고 악보 수정 등을 볼 수 있는 학문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의 경우는 어떨까요?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오케스트라와는 달리 영상 기록을 중심으로 공연 관련 기록들을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점은 흥미롭고 가치가 높지만 2000년대 이전의 공연 기록들이 부족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두 오케스트라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지요. 공연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의 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은 따로 아카이브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데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연장이었던 이 공간에서의 공연 기록들이 잘 정리되어서 따로 제공된다면 그 자체로 상당히 흥미롭지 않을까 합니다.
글을 쓰며 기록의 가치에 대해, 특히 오랜 시간에 걸쳐 기록된 것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 그 기록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 다룬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의 기록들 뿐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흥미롭고 소중한 기록들을 호기심에 들춰가며 소소한 기쁨을 맞볼 수 있는 기회가 더 자주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추천 사이트: 이번 글에서는 영상 대신 본문에서 언급한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의 아카이브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https://www.wienerphilharmoniker.at/en/konzert-archiv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https://archives.nyphil.org/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https://www.bso.org/about/archives
뉴욕 카네기홀: https://www.carnegiehall.org/About/History
밀라노 스칼라 극장: https://www.teatroallascala.org/archivio/ricerca.aspx?lang=en-US
빈 무직페라인: https://www.musikverein.at/en/concerts-archive
빈 콘체르트하우스: https://konzerthaus.at/archive
빈 국립 오페라 극장: https://archiv.wiener-staatsoper.at/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2-09-30 1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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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웃음, 사랑, 감동 그 이상!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공연포스터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철부지 괴짜 아빠’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늘 함께라 생각했던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겨진 다니엘에게 눈앞의 현실은 반드시 되돌려야 할 숙제가 됐다. 결국 그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전부를 찾기 위해 위태로운 이중생활을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세 아이의 아빠 다니엘이 아닌 사람 좋은 보모 할머니 다웃파이어 부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추억의 영화가 뮤지컬이 되어 돌아왔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코미디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Mrs. Doubtfire)’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93년 개봉 당시 전미 박스오피스 11주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 이야기를 유쾌하게 다뤄 큰 인기를 끌었다. 초보 아빠의 성장 스토리가 변장이라는 참신한 발상과 어울리면서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데, 이는 뮤지컬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참고로 무대 위 다니엘이 다웃파이어 부인으로 변신하는 데는 약 8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쉴 틈 없이 전환되는 1인 2역 퀵 체인지가 무려 열여덟 번이나 이뤄진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2015년부터 기획개발을 시작한 뮤지컬은 2019년 미국 시카고 트라이아웃을 거쳐 2021년 말경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다음 무대로 한국을 택했다. 덕분에 우리는 청소기와 빗자루를 들고 신나게 춤추던 다웃파이어 부인을 뮤지컬의 본고장인 영국 웨스트엔드보다 한발 앞서 서울 샤롯데씨어터 무대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공연장면 <사진제공 : 샘컴퍼니 >
의미 있는 초연인 만큼 출연진도 남다르다. 특히 다니엘과 다웃파이어 부인은 연기, 노래, 순발력 등 모든 부분에서 고난도의 실력을 요구하는 배역이다. 영화 속 다웃파이어 부인과 비슷하면서도 배우의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무대를 선보여야 했는데 이번 시즌 주연을 맡은 임창정과 정성화, 양준모가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여기에 신영숙, 박혜나, 김다현, 김산호, 김나윤, 박준면, 임기홍, 육현욱이 함께해 빈틈없는 무대를 선사하고 김태희, 설가은 등을 포함한 실력파 아역배우들이 작품을 더욱 탄탄하게 완성한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영화에 담긴 재미와 감동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일부 설정은 무대극에 어울리게 바꾸고 한국 관객의 취향에 맞춰 대사를 수정했다. 우선 다니엘의 아내 미란다는 잘 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인 업계 커리어 우먼 대신 현실적인 고민을 가득 품은 의상 디자이너가 됐다. 그리고 미란다의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 스튜어트 역은 피트니스 클럽 체인을 운영하는 대표로 변신했다.
다니엘이 ‘다웃파이어’ 부인이 된 배경에는 길거리를 지나던 남녀의 대화가 주요하게 작용했는데, 짧은 장면이지만 제대로 웃음 터지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여기다. 이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사회를 울고 웃게 만드는 요소들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어 만개한 웃음꽃이 질 겨를이 없다. 이는 뮤지컬 ‘썸씽로튼’을 만든 존 오페럴과 커크패트릭 형제가 각각 극본과 음악을 맡으면서 특유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 펼쳐둔 덕분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썸씽로튼’을 닮은 장면들이 반갑게 눈에 띈다. 또 자칫하면 어색해질지 모를 이야기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 황석희의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창작진들이 만든 전작을 보았다면 순간순간 연상되는 장면 때문에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란다의 남편이자 사랑스러운 세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다니엘은 그저 가족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일이 낙인 인물이다. 하지만 열다섯 큰딸 리디아마저 아빠는 과연 언제 철이 들까 걱정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성우로 일해왔지만, 또 타고난 성격 탓에 매번 마찰을 빚고 만다. 애드리브 문제로 방송국에서 해고당한 그는 평소처럼 별다른 생각 없이 아들 크리스의 생일파티를 요란하게 챙겨주다 미란다의 화를 돋운다. 지쳐버린 미란다가 결국 이혼을 선언하고, 두 사람은 법정에 선다. 다니엘이 공동 양육권을 사수하려면 3개월이라는 유예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바꿔야 했다. 그러다 미란다가 보모를 구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니엘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바탕으로 위장취업을 감행한다. 그 뒤 다니엘이 아닌 미세스 다웃파이어가 되어 가족들과 만나는 과정이 좌충우돌 스펙터클한 일상으로 그려진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막다른 골목에서 아찔한 이중생활을 감행한 아빠의 모습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언제나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헤어지고 나서야 미처 살피지 못한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고 변화하겠다 마음먹는 다니엘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작품은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함으로써 사랑을 전하는 모두를 향해 다시 한번 곁을 돌아볼 계기를 무겁지 않게 전달한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기 좋은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오는 11월 6일까지 계속된다.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적 진리가 얼마만큼 새롭고 재미있게 전달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번 가을, 다웃파이어 부인의 깜짝 비밀이 숨겨진 힐러드 가를 방문해보시길 바란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2-09-23 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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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지휘자가 없어야 할 자리
지휘자를 두지않는 오케스트라 <레 디소낭스>
심심치 않게 받는 질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데 지휘자도 보이나요?", " 지휘자는 왜 필요한가요?". 최근 롯데콘서트홀에서 스트라빈스키의 관현악곡 '봄의 제전'이 지휘자없이 무대에 올랐다. 으레 지휘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있었다.
세계 명문악단의 전 · 현직 단원 90여 명으로 구성된 '더 고잉 홈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있어도 합을 맞추기 어려운 이 작품을 지휘자 없이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화제를 모았다. 작은 편성의 챔버오케스트라가 아닌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난이도가 높은 작품을 선별하여 지휘자없이 무대에 올린 대담한 시도. 워낙 훌륭한 연주자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이고 그만큼 음악적 리스크를 압도할만한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레퍼토리에 따라 지휘자 없이 연주되는 공연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레 디소낭스와 같이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악단도 있고 지휘자를 두는 명문 악단들의 경우에도 작은 편성의 작품이나 협주곡은 지휘자 없이 연주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렇다면 지휘자를 두지 않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가진 이점이 있을까.
지휘자의 부재는 연주자들이 서로의 연주에 귀기울이며 긴밀하게 소통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특유의 유기적인 사운드와 일체감을 유발한다. 또한 지휘자의 통제가 없으므로 악기군들이 각각 자주적으로 음악을 이끌어감으로써 연주에 에너지와 생동감을 배가시킨다.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로 잘 알려진 레 디소낭스의 플루티스트 마리아 라텔라는 한 인터뷰에서 "지휘자 없는 연주는 우리가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함께 각자의 생각을 나눌 수 있고 특유의 에너지를 발산한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지휘자의 수직적인 지시가 아닌 단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의견개진이 가능하기때문에 아티스트로서의 만족감도 높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리처드 해그먼은 지휘자가 있는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의 직업만족도가 대체적으로 낮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오케스트라 입장에서 실력이 없거나 악단과 케미가 잘 맞지않는 지휘자의 의견을 듣고 협업해야 한다면 동기 부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무대에서 좋은 결과물도 기대하기 어려울 터. 훌륭한 연주자들로 구성된 집단지성은 리허설에서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다수를 만족시키는 음악적 해석을 도출해냄으로써 전체적으로 높은 만족도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덧붙여 전체 그림을 파악하고 이끌어가는 지휘자가 없기때문에 다수의 단원들이 직접 지휘자 총보를 통해 공부하는데 이는 단원들이 자신의 파트 뿐 아니라 작품 전반에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결과적으로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계점을 비롯해서 단점도 존재한다. 악단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악기군들간에 합을 맞추는데 제약이 있다. 단원들끼리 눈과 귀로 커뮤니케이션하며 호흡을 맞춰야하는데 물리적인 거리로 인해 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전면에 자리한 악장이 후방에 배치된 관악기군들과 연주 중에 교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지휘자의 정교한 통제가 없으니 앙상블의 균형이 깨지거나 흔들릴 가능성이 늘 존재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하고 특히 악장은 템포가 변화하는 지점을 잘 파악해서 싸인을 줘야하는 경우가 잦다. (간간히 지휘동작을 보여주기도한다.) 결과적으로는 음악의 흐름이 자연스럽지않고 인위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유학시절 스승이자 비엔나 필하모닉(이하 빈 필)의 악장을 지낸 라이너 퀴흘 교수님이 빈 필 단원들과 바그너의 '지크프리트 목가'를 지휘자 없이 연주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연주였지만 굳이 옥의 티를 꼽자면 템포가 변화하는 지점에서 악장이 일일이 싸인을 주다보니 음악의 흐름이 끊길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해석에 있어 단원들의 의견을 조율해야하다보니 대다수의 정서를 고려, 원칙적이고 익숙한 해석을 선택할 가능성도 높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푸르트뱅글러나 카라얀같은 명지휘자들이 뚝심있게 단원들을 설득하고 조련해나가며 비범한 해석과 사운드를 관철시킴으로써 얻게되는 역사적인 결과물들을 기대하기 힘들 수도 있다. 지휘자에게 허락된 음악적 권위가 탁월한 지휘자에게 주어진다면 악단 입장을 고려할때 충분히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케스트라가 역사의 흐름속에 발전해오면서 전문 지휘자가 등장하고 20세기부터 지휘자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지만 음악적 권위가 지휘자 한사람에게 포커싱 되어있는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와 다른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가진 나름의 예술적 역량과 매력은 분명히 기대해 볼 만하며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더 고잉 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앞으로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들의 약진을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2-09-23 1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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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음악 때문에 봐야만 할 영화, ‘외계+인 1부’
올여름 개봉한 블록버스터 중 가장 관객들을 실망시켰던 작품은 ‘외계+인 1부’였을 것이다. 최동훈 감독의 첫 번째 SF영화라는 타이틀과 캐스팅만으로 제작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개봉 후, 관객들의 혹평 속에 극장가에서 급속히 사라져갔다. 1부라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복잡한 이야기를 잘 풀어주지 않는 불친절한 내러티브,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해야 할 중심 캐릭터의 부재 등은 상업영화로서 커다란 단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CG를 비롯한 프로덕션의 수준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으며, 그 중에서도 음악의 역할과 존재감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외계인과 로봇, 비행접시가 출현에 전투를 벌이는 영화, 고려를 배경으로 도사와 신선이 출몰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무협물과 어드벤쳐, SF 장르까지 뒤섞여 있는 ‘외계+인 1부’의 음악은 장영규 감독이 맡았다. 그는 이미 ‘전우치’(최동훈, 2009) 때 최동훈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호평받은 바 있으나 훨씬 까다로웠던 이번 작품에서 더 세련된 음악을 선보였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레퍼런스가 없는 만큼 당혹스럽기도 했겠고, 142분의 러닝타임 내내 거의 음악이 끊이지 않을 만큼 방대하기도 한 작업을 매끄럽고 능숙하게 처리해낸 데서 장영규 감독의 관록이 느껴진다.
록밴드 베이시스트 출신에 소리꾼들과 함께 이날치 밴드를 만든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 영화의 음악을 이처럼 완성도 높게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싶다. 이질적 이미지와 장르가 한 장면에 담기는 만큼 시퀀스별로 다른 악기나 리듬을 사용하기 보다 그 장면이 가진 시각적 스펙터클과 액션의 리듬을 이용하고, 극적 호흡을 조절하는데 집중한 부분이 돋보인다. 전반적으로 SF 영화에 많이 나오는 의성음악(imitative music)이나 영상을 철저히 뒷받침하는 음악(underscore music)을 사용한 것 같으면서도 곳곳에 길고 짧은 멜로디를 삽입시켜 청각적 단조로움을 깨뜨렸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음악에 집중하면서 관람한다면 평가가 훨씬 높게 나올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윤성은의 Pick 무비 /
당신은 문학을 사랑하나요?, ‘9명의 번역가’
베스트셀러 ‘디덜러스’의 마지막 시리즈 출간을 위해 9명의 번역가가 한 저택으로 모인다. 출판사 사장인 ‘에릭’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디덜러스’의 결말이 유출되지 않도록 번역가들을 커다란 저택의 지하에 가두고 인터넷 환경으로부터 차단시킨다. 그러나 유출 방지에 만전을 기했던 책의 첫 10페이지가 인터넷에 공개되고, 돈을 보내지 않으면 다음 100페이지도 공개하겠다는 협박 문자가 에릭에게 도착한다. 에릭은 번역가들 중에 범인이 있다고 확신하고 범인 색출 작업에 총력을 기울인다. 번역가들은 저마다 수상한 점을 갖고 있지만 물증은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지 않고, 결국 ‘디덜러스’의 원고는 순차적으로 인터넷에 공개되고 만다.
‘9명의 번역가’(감독 레지스 로인사드, 2020)는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이 ‘인페르노’를 출간할 때 번역가들을 지하 벙커에 가두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각기 다른 언어를 할 줄 아는 번역가들이 모이고, 밀실에서 원고가 유출된다는 초반 설정은 꽤 흥미롭다. 플롯도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영화는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순행적 구성을 기본으로 하되, 그 중간 중간에 사건이 종결된 후 에릭이 교도소에서 범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시킨다. 처음에는 에릭의 정면 샷으로 에릭이 범행 과정을 추궁하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고, 그가 사건의 전말을 밝히면서 영화는 종결된다. 그러나 구미를 당기는 초반 설정에 비해 관객들이 함께 추리해 나가는 재미를 주기에는 연출이 다소 부족하고, 한 명 한 명에 개성을 부여하려 노력한 데 비해 9명의 번역가 캐릭터들도 미완성으로 느껴지며, 배우들 사이의 합도 아쉽다.
그래서 추리물로서의 매력보다는 영화의 주제에 더 주목하게 된다. 번역은 이미 쓰여진 문자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번역가의 재창작 활동을 수반한다. 번역가들은 사실상 두 개의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한낱 사업 아이템으로 밖에 보지 않는 에릭은 그런 번역가들을 강압적으로 밀실에 가두고 가드들을 배치시킴으로써 기능공으로 전락시킨다. 범인은 에릭의 태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범행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실행시킨다. 범행을 돕는 이들 또한 번역이라는 작업 및 번역가의 인권 문제에 대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후반부에는 에릭의 조수까지도 에릭을 배신하는데, 영화 중반부에 그녀가 에릭에게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그녀 행위의 복선이자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는 ‘통역은 신성한 것이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다소 코믹한 뉘앙스로 사용되었지만 이후, ‘기생충’(2019)의 번역가(달시 파켓)와 ‘기생충’ 캠페인 때 그를 도왔던 통역가(샤론 최)가 일약 스타가 된 것은 그의 이런 생각 덕분이 아니었을까. 문제가 출판사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지금이 ‘독자는 없고 소비자만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애초에 에릭 같은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은 대중들일 수도 있다. 장르적 재미보다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주목해 볼 때 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2-09-16 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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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전통이 미래다! 서예와 현대미술의 낯선 공존
“낯선 만남 : ~ @ # / 당신은 어떻게 읽나요?”
“~ @ # / 당신은 어떻게 읽나요?”라는 부제를 거꾸로 “서예를 당신은 어떻게 읽나요?”라는 문제의식으로 전환해 생각하면 간단하다. 전자에 동의하는 신세대이고 후자에 동의하는 구세대일까. 이러한 문제인식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하 서예관)의 ‘낯선 만남’이라는 기획전 안에 녹아들어 있다. ‘~’을 기계와 음악으로 해석한 [이신영x민찬욱], [정준식x이다희], ‘@’은 대형 설치 작품과 퍼포먼스로 해석한 [채송화x고숙], [송이슬x조지], ‘#’를 신구문화의 이항대립으로 보여준 [이윤정x김원진], [이완x인세인 박], ‘/’을 만남과 파생의 의미로 조합한 [윤정연x박현지],[이광호x선우훈], 이들의 콜라보는 ‘서예와 현대미술과의 만남’을 뛰어넘어 ‘전통의 보편가치를 개성 가치로 움직이는 동력‘ 그 자체를 보여준 전시이다.
예술의전당 서예관 낯선만남 콜라보 전시
현대예술, 전통 예술혼에게 길을 묻다.
전시포스터
현대예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이 평범하면서도 난해한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다. 우리는 장르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현대예술 앞에서 자주 당혹스러움을 경험한다. 하지만 ‘전위(前衛)’라는 이름으로 어떤 행위가 펼쳐진다 해도, 그것이 시각예술인지 공연예술인지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제 부질없어 보인다. 어떤 예술인지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통섭(統攝, consilience)과 융합(融合, convergence)의 시대 속에 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왜 많은 사람들은 현대예술을 위해 자본과 시간을 낭비하는가? 왜 예술작품이나 미적 대상들은 우리에게 중요하며, 우리는 왜 미적 경험을 갖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최대 수혜자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예술이 남긴 ‘나’라는 대상을 스스로 비판하고 새로이 우일신(又日新)하여 ‘신예술(New Art)’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돼야 할 것이 ‘전통 예술혼의 현대화’이다. 과거에 형성된 문화예술의 힘이 현재까지 이어져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의 고사성어 ‘법고창신(法古創新)’과 같은 맥락이다. 이 개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작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에게서 유래된 말로,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變通)할 줄을 알고 새로이 창작하면서도 법을 지킬 줄 안다면 과거보다 앞서는 새로운 전통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전시장 전경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경
MZ세대의 전통 읽기, 소재주의를 극복한 새로움
아는 것이 정말 힘인가? 한자를 해독하는 것이 권력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새로운 세대들은 문자에 담긴 의미를 직관으로 이해한다. 원인은 간단하다. 전근대 시대엔 시대인식(episteme)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언어로 보편화됐다면, 오늘의 시대엔 기술의 변화가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개성화의 변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인스타그램의 약호들로 축소되고 빠른 세대교체와 교육방식의 변화는 결과가 아닌 카멜레온처럼 빠른 옷차림을 강조한다. 말 그대로 예술의 역할론에 변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통의 현대화에는 이처럼 소재주의의 극복이 필요하다. 올해 100주년인 조선미술전람회 서·사군자부는 이미 1930년대 서예를 봉건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미술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전통양식의 전승과 명맥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속시켰던 문인(文人)미감과 서(書)의 위계질서를 탈각시킴으로써 회화를 문자 우위에 세우게 유도한 것이다. 이는 오늘에까지 ‘서예’가 미술에 포함되는 것을 경계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통을 지우고 새로움으로 나아간다는 ‘모던 아방가르드’의 신화는 최근 전통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뉴트로 컨텐츠’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현대작가들이 선택한 개성화 과정 속에서 달항아리와 민화의 브랜딩이 새로운 문화마케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안에 본질을 잃은 소재주의라는 비판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전통의 재발견은 다양한 문제점과 출혈을 떠안더라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할 도전적 가치이다.
전통과 현대의 접점, 서예를 뉴트로 하라!
그래피티, 팝아트와 엮은 서예, 전통 세대와 현세대의 접점을 던지는 문제적 전시들,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전시들은 “어떻게 개성화를 이룰 것인가. 현대미술과 어디까지 공존할 것인가.”라는 역할론과 만나게 되었다. 서예관의 역할은 결국 문제적 전시를 센세이션하게 던지면서 ‘서예의 소통’과 현대미술 속 위치정하기에 하나의 접점을 마련해야 하는 숙명을 띤 것이다. 이를 위해 문자문화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서예의 전통’을 잇는 토대전시와 ‘서예 실험을 위한 장(場)’을 위한 기획전시 운용이 지속돼야 한다. 서예의 활성화에 관한 화두는 “동시대 작가들이 우리 서예사에 왜 무관심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심사위원 그룹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사숙(私淑) 중심의 공모전 시대는 지났다. 채본(債本)에 따라 고대로 따라 하는 임모(臨模) 중심의 서예는 이제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에겐 관심 밖 이야기가 된 것이다. “작품을 봐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기성 서예계의 탄식은 서예가 미술의 또 다른 얼굴이자, 다양한 시대인식을 머금은 상징기호라는 사실이 보편화 돼야만이 사그라들 것이다. 낯섦을 공존의 가치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전통의 새로운 영토를 구축한다는 뜻이다. 미래지향적 세계관을 열어 전통과 현대의 다리를 잇는 교두보, 이것이 지금 서예관의 창조적 전시들이 끌어안은 과제가 아닐까 한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2-09-16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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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국악과 지휘자
국악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국악 관현악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양 음악이 거침없이 밀려들고 전통 음악인들이 치열하게 레퍼토리 확장을 강구했던 5~60년대, 새로운 국악 창작에 대한 시도가 다방면으로 일어나며 국악 관현악 역시 그 세를 넓혀 갔다. 1965년 창단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을 시작으로 5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전국에 수십 개의 국악 관현악단이 생겼다. 서양 오케스트라의 형태를 빌려온 국악 관현악에는 필연적으로 지휘자가 필요했다.
KBS국악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 원영석은 월간객석이 주최한 대담에서 ‘서양 악기로 연주하는 민요에서 한국적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지휘’라고 단언한 바 있다. 국악 관현악단을 이끄는 지휘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는 지휘자의 기본적인 자질 외에도 국악에 대한 이해가 얹어진다. 서양 음악과 판이한 국악곡과 악기, 연주자들의 특성을 두루 이해하고 섭렵하는 일에는 만만찮은 시간과 공력이 든다. 때로는 서양 음악의 지휘자에게 지휘봉을 내주기도 하며 교류하고, 여러 분야에 통달한 국악인들이 독학하거나 유학하며 일구어낸 국악 관현악 지휘의 영역에는 학교 등 관련 기관의 인재 양성 과정이 더해지며 점차 전문 지휘자들이 늘어가고 있는 단계이다.
국립극장의 국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 프로젝트와 국립국악원의 신진 지휘자 공모 사업인 2022 청춘, 청어람
올해 하반기에는 거장을 꿈꾸는 신진 국악 지휘자들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공연들이 이어진다. 국립극장이 지난해 말부터 진행한 ‘가치 만드는 국립극장’은 전통에 기반을 둔 공연 예술의 차세대 창작자 발굴․양성 사업으로, 전속단체인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지휘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심사를 통해 선정된 정예지, 유숭산, 이재훈 등 세 명의 지휘자가 국악 전문 지휘자들과 함께 멘토링과 워크숍 등을 거쳐 지난 8월 시연회를 마쳤다. 이들은 10월부터 차례로 <정오의 음악회> 공연에 지휘자로 나설 예정이다. 정오의 음악회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매달 꾸준히 선보이는 상설 공연이다.
이에 앞서 국립국악원은 2019년부터 공개 모집을 통해 선정한 지휘자들과 함께하는 <청춘, 청어람> 공연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이 프로젝트 역시 신진 지휘자들이 국립국악원의 관현악 공연을 책임지는 창작악단과 호흡을 맞춰보고, 실제 공연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1차 동영상 심사를 통과한 십여 명의 참가자에게는 미리 주어진 초연 곡의 스코어로 창작악단과 리허설을 진행하는 2차 심사 참가의 기회가 제공됐다. 지휘자의 스코어와 연주단에 제공한 파트보를 달리해 청음 테스트를 겸하였으며, 전문 지휘자 심사 위원뿐 아니라 실제 리허설에 함께한 연주자들도 평가에 참여해 박도현, 백승진, 이규서, 장태평 등 네 명을 최종 선정했다. <청춘, 청어람> 공연에서는 총 여섯 곡이 연주되었다. 이틀간 열린 두 번의 공연에서 네 명의 지휘자가 각각 3곡씩 맡아 무대에 올랐다. 지휘자에 따라 국악 관현악 연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해 들어볼 수 있는 이 흔치 않은 공연은, 공연장 밖에서도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국악방송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2020년에 이어진 공모에서는 두 명의 지휘자와 네 명의 협연자를 함께 선정했다. 서양 음악을 전공한 윤현진과 국악 지휘 전공인 박상후가 국악 관현악곡 세 곡과 각기 다른 협연곡 두 곡씩을 공연했다.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한 공연의 영상을 국립국악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지휘자 박상후는 창작악단 부지휘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한 해 쉬고 올해 재개한 청춘, 청어람 사업은 8월말 두 명의 지휘자를 최종 선정하고 공연 준비에 돌입했다. <2022 청춘, 청어람> 공연은 오는 11월 열릴 예정이다.
국악 관현악 연주는 창극이나 무용 공연에서도, 드라마나 영화 음악으로도 만날 기회가 많아졌지만, 국악 관현악 공연은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다. 그러나 전통 국악이 어렵기만 한 초심자라면 오히려 좋다. 기백 년 연주되며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한 서양의 관현악곡들에 비하면 따끈따끈한 신곡(?)인데다 지속적으로 공연되는 레퍼토리도 한정적이라 더욱 좋다. 패기만만한 미래의 마에스트로들이 지휘하는 대로 가을만큼 풍요로운 국악 관현악의 세계에 한 발 성큼 내디뎌볼 일이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2-09-16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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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Curtain Call)
K뮤지컬의 새로운 도전을 꿈꾸다_뮤지컬 웃는 남자.
원작은 바로 빅토르 위고가 1869년 발표한 소설이다. 영화광이라면 2012년 장 피에르 아메리스 감독이 만들고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출연했던 프랑스 영화 ‘웃는 남자(L'homme qui rit)’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당시 ‘영화 베트맨에 나오는 조커의 탄생’이라는 조금은 엉뚱한 홍보문구가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는데 일부러 얼굴을 칼로 찢어 항상 웃는 모습을 만들었다는 캐릭터 탄생의 간접적 모티브를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사실 소설의 배경이 되던 시절 유럽에서는 귀족들이 노예나 어린 아이의 얼굴을 망측하게 만들어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항상 웃는 얼굴이지만 그 웃음에 담긴 비틀린 사회에 대한 조롱과 심지어 그런 시절을 살아남아야 했던 민초들의 페이소스는 그 자체로 묘한 감상을 자아내는 매력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빅토르 위고가 가장 사랑했다는 소설이라는 별칭이 생겨난 이유도 그래서 나름 이해할 만하다.
뮤지컬로 환생한 ‘웃는 남자’는 한국 뮤지컬계의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다. 뮤지컬 ‘햄릿’, ‘모차르트’, ‘엘리자벳’ 등을 제작한 EMK 뮤지컬 컴퍼니가 5년여 세월동안 공을 들여 마침내 선을 보였던 창작 뮤지컬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체코나 오스트리아 등지 그리고 일본에서 흥행을 기록한 유럽 배경의 역사 뮤지컬을 번안 무대로 꾸몄던 제작사가 새로운 한국 뮤지컬을 향한 도전을 개시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이례적이고 또한 고무적이라 인정할 만하다. 단순히 창작 뮤지컬이 수입 뮤지컬에 비해 더 유리한 수익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장점 때문만이 아니라 창의적인 노력을 집중해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콘텐츠를 제작해냄으로써 대한민국을 단순한 소비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문화산업 환경 속의 창작 기지로서 그 성장 가능성을 선보였다는 박수받을 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웃는 남자’는 일본어로 번안돼 해외에서 막을 올렸던 진기록도 갖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하기 이전인 지난 2019년 여름 도쿄 닛세이극장에서 29회 일정으로 시작된 투어는 나고야 미소노좌, 토야마 나이카와 문화홀, 오사카 우메다예술극장과 후쿠오카 키타큐수 소레이유홀 등 모두 5개 지역을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 글로벌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진 뮤지컬 작품이 초연 두 해만에 일본을 순회했다는 기록 자체가 세계 시장에서의 한국의 위치을 알려주는 것 같아 뿌듯한 사건이었다. 우리말 초연 무대에서 양준모와 정성화가 맡았던 인정 많은 우르수스로는 오스트리아산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토드(일본 버전의 토드는 김준수가 열연했던 우리 무대와 달리 관록의 배우가 나와 비교적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를, 또 일본 제작사 토호의 빅 히트작이었던 일본어 버전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 역으로 등장했으며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사랑받고 있는 일본의 국민배우 야마구치 유이치로가 등장해 특유의 온화함과 부드러운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멋진 연기를 선보였다. 과거 뮤지컬 산업의 한류가 단지 ‘우리 것’을 ‘남’에게 파는 것에 집중했다면, ‘웃는 남자’는 이제 공연한류의 2.0시대라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흥미로운 사례가 됐다.
뮤지컬 ‘웃는 남자’의 미덕은 일단 화려한 볼거리다. 가장 뛰어난 것은 단연 무대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무대 전환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무대 디자이너인 오필영의 작품이다. 이미 전작인 또 다른 창작 뮤지컬 ‘마타 하리’를 통해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영상의 디졸브같은 자연스런 장면전환의 다양한 무대적 상상력을 실현해냈던 그는 ‘웃는 남자’에서 한층 세련된 무대적 상상력을 구체화해냈다. 특히, 주인공인 그윈플렌의 아픔을 상징하는 붉은 웃음은 단지 배우의 얼굴 뿐 아니라 무대 장치들에도 담겨 시종일관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을 통해 세워진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노래로, 이미지로, 혹은 무대 세트로 등장할 때마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시대의 비극이라는 극적인 아이러니가 가슴 저리게 펼쳐진다.
배우들의 면면도 ‘웃는 남자’가 지닌 매력이다. 올해 막을 올렸던 2022년 앙코르 버전에서는 초연 멤버였던 박효신, 박강현, 박은태가 가세해 좋은 무대를 선보였다. 여기에 민영기와 양준모가 선보이는 우르수스, 이수빈과 유소리가 만들어냈던 순수한 여인 데아, 신영숙, 김소향, 최성원, 김승대, 이상준, 김영주 등 관록파 뮤지컬 배우들의 조화는 꽤나 만족스런 무대 체험을 선사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은 뮤지컬의 소재로 인기를 누리는 경우가 많다. ‘레 미제라블’이 그랬고, ‘노트르담 드 파리’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는 이런 작품들을 ‘노블컬’이라 부른다. 물론 소설을 의미하는 ‘노블’과 ‘뮤지컬’의 합성어다. 아무래도 책에서 만났던 활자가 무대로 구체화되며 형상화되는 모습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미가 된다. 하지만 소설과 뮤지컬의 결합은 사실 따로 이름을 명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흔한 뮤지컬계의 흥행 공식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가져다 만든 ‘올리버!’나 ‘두 도시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롤’이 그런 경우이고, ‘지킬 앤 하이드’, ‘거미여인의 키스’, ‘마틸다’, 체코 뮤지컬 ‘햄릿’,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모두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흥행작들이다.
무대를 보고 원작 소설을 다시 찾아 읽는 것도 흥미로운 공연 감상법이다. 원작 소설이 한참 세월이 지난 후 다시 각광을 받는다는 ‘역주행의 신화’가 K팝에서만 목격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빠르게 성장해온 한국 뮤지컬의 글로벌 뮤지컬 시장을 향한 흥미로운 도전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반갑다. 앞으로 얼마나 큰 파괴력을 선보이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2-09-13 1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