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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날카롭게 파고든 핏빛 교향곡, 뮤지컬 ‘스위니토드’
추악한 욕망이 행복했던 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순간, 거대한 복수는 이미 예견됐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영문도 모른 채 추방당해야 했던 남자가 다시 돌아왔을 때, 성실하고 순진했던 이발사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오로지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며 때를 기다린 살인마만 존재할 뿐이었다.
스위스토드 공연포스터
뮤지컬 ‘스위니토드’가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지난 12월 1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한 이번 공연은 작품 프로덕션인 오디컴퍼니 창립 20주년 기념 마지막 라인업인데다, 작품 속 명곡들을 탄생시킨 천재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이 타계한 지 약 1년 만에 올라온 공연이라 더욱 특별한 의미를 품었다. 또 앞 시즌 ‘스위니토드’에서 러빗부인 역으로 놀라운 무대를 선보였던 전미도, 김지현, 린아와 더불어 완전히 새롭게 캐스팅된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이 타이틀 롤 스위니토드 역을 맡아 신선한 조화를 선보일 예정이어서 더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실제로 개막 초반 개최된 ‘스위니토드’ 프레스 콜에서 본 배우들의 합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모습이었다. 이밖에 김대종, 박인배, 진태화, 노윤, 윤석호, 윤은오, 최서연, 류인아 등 대단한 실력으로 뭉친 출연진이 함께 완성한 무대는 매서우리만큼 서늘한 요즘 날씨와도 잘 어울린다. 이처럼 여러모로 눈여겨볼 만한 이번 시즌 공연은 오는 3월 5일까지 계속된다.
찢어질 듯한 굉음이 무대 위로 날아들면 비로소 광기 어린 복수극의 서막이 오른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발사 벤자민 바커는 그의 아내를 탐한 터핀 판사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먼 곳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무려 15년이 흐른 뒤에야 젊은 선원 안소니의 도움을 받아 플릿가로 돌아온다. 그는 스위니 토드라 이름을 바꾸고 자신의 전부를 앗아간 이들을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다 그가 살던 집 아래층에서 파이 가게를 운영하던 러빗부인으로부터 아내 루시와 딸 조안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면도칼을 잡는다.
공연장면 <사진제공 : 오디컴퍼니>
하지만 불타는 복수심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때마침 조안나를 수양딸 삼아 기르던 터핀 판사의 검은 속내가 또 한 번 드러나고, 스위니토드가 세운 계획에도 속도가 붙는다.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대상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간다. 어느새 인간 전체를 향한 혐오로 가득 차버린 그에게 이발소를 찾아온 손님들은 그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손님이 없어 고심하던 러빗부인의 파이 가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넣은 파이가 새롭게 출시되면서 인기몰이를 한다. 작품은 이처럼 놀랍고 잔혹한 이야기를 음울하면서도 유쾌하게 펼쳐낸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을 배경으로 전해진 도시 괴담이 오늘날 인기 뮤지컬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오페라 등 장르도 다양하게 변주됐다. 그중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선보이고 있는 오늘날 뮤지컬은 런던의 어두운 골목에 방치된 폐공장을 본뜬 무대, 섬뜩한 분장, 실감 나는 무대 장치와 소품으로 앞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스티븐 손드하임이 남긴 완벽한 음악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토리가 어울려 만든 결과물이 무척 파격적이면서도 흥미롭다. 특히 어떤 뮤지컬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넘버들의 향연이 가장 인상적인데, 워낙 치밀한 전개가 돋보이다 보니 작곡이라기보다는 설계에 더 가까울 정도다. 제멋대로 펼쳐지는 듯한 불협화음 속에서도 완벽히 들어맞는 음표들의 짜임새가 예사롭지 않다. 배우들의 노래로 완성된 핏빛 교향곡이 기묘한 불행을 연주하는 동안 관객들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귀족주의가 팽배했던 당대 분위기 속 초기 산업혁명이 싹을 틔운 도시에는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했다. 물론 과도기를 겪는 시기라면 어느 사회나 다 비슷할 것이다. 뮤지컬 ‘스위니토드’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성의 상실과 권력자들의 추악한 위선,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인간상을 보여주며 갈수록 급변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결국 스위니토드 역시 비참한 삶을 견디게 만든 세상을 향해 이성을 잃고 목적 없이 칼을 휘두른다. 사회 부조리와 더불어 썩어빠진 권력자들을 힐난하던 그조차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무자비한 악행을 저지르고 마는 결과가 무척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 같은 이야기는 곳곳에 마련된 풍자와 유머 코드 덕분에 마냥 불편하거나 무겁지만은 않게 전해진다.
어쩌면 꽤 차갑고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새 작품 안에 완벽하게 빠져든 자신을 발견한 순간 흠칫 놀라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번 겨울, 뮤지컬 ‘스위니토드’가 선보일 매력에 푹 빠져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해 본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2-12-23 1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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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트럼펫 협주곡의 양대산맥, 하이든 그리고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으로 쓰였던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고전파 시대 협주곡은 드물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자들의 아침 기상 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대중적이고 기분 좋은 희망감을 안겨주는 이 협주곡은 아직까지도 트럼펫 레퍼토리의 뺴놓을 수 없는 감초다. 또한 하이든 생애 마지막 협주곡이자 당시 협주곡 악기로서 비주류였던 트럼펫의 위상을 승격시킨 곡이기도 하다. 불세출의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과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트럼펫 협주곡이 하나 더 있다. 작곡가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의 트럼펫 협주곡이며 둘은 작곡 시기도 비슷하고 닮은 점이 많다.
사실 훔멜이라는 이름은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면 생소하게 들릴법한데 그도 그럴것이 훔멜의 작품 중에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연주되는 곡은 트럼펫 협주곡이 거의 유일하다. 고전파하면 교과서에서 배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훔멜은 당대를 대표하던 위대한 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빈 고전파를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안톤 바이딩거(Anton Weidinger)가 고안해낸 키 트럼펫
맹모삼천지교라 했던가. 훔멜 만큼 이상적인 음악환경을 누렸던 작곡가는 드물다. 8세 훔멜의 재능을 간파한 모차르트는 어린 그를 제자로 들여 2년 동안 자신의 집에서 무상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인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궁정악장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하이든에게서 오르간 레슨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1792년 비엔나로 건너온 베토벤과 같은 시기에 둘은 음악 레슨을 받았으며 뛰어난 천재이자 모난 성격의 소유자였던 베토벤과 자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평생 진한 우정을 나눴다. 전쟁 교향곡으로 불리는 베토벤의 <웰링턴의 승리> 초연무대에서 직접 무대에 올라 타악기 연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베토벤은 훔멜에게 자신이 죽게 되면 피아노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처럼 그는 위대한 작곡가들과 교류하며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며 모차르트 스타일의 연주법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테크닉적인 요소를 가미하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훔멜 역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곡가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탓(?)에 후대에 잊혀진 걸출한 작곡가 중 한 명이다. 뉴욕 타임즈는 훔멜의 걸출한 피아노 작품들을 소개하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위상에 가려진 작곡가로 훔멜을 꼽은 바 있다.
1804년 초연되었던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1958년 다시 발견된 계기는 메릴 뎁스키라는 예일대 학생의 리사이틀이었다. 대영박물관으로부터 발굴된 악보를 제공받아 자신의 연주회에 소개할 예정이었지만 악보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보스톤 심포니의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르만도 기탈라에게 악보를 보낸다.
1964년 이 곡을 녹음한 기탈라 덕분에 이 작품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수많은 트럼페터들은 이 명곡을 앞다퉈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과도 연결고리가 있으며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하이든의 뒤를 이어 에스터하지 궁정악장으로 취임한 훔멜은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악단의 간판 트럼펫 연주자였던 안톤 바이딩거를 위해 작곡했다. 바이딩거는 반음계 연주가 가능한 키 트럼펫을 고안해낸 혁신적인 인물로 하이든과 훔멜의 신임을 받았다.
음악적 내용에 있어서도 닮은 점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둘은 3악장 구조의 Allegro- Andante- Allegro라는 틀을 택하고 있으며 악곡 형식에 있어서도 1악장의 소나타 형식, 2악장의 두도막 형식 그리고 3악장의 소나타 론도 형식으로 구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3악장 전반부에 등장하는 트릴 패시지는 리듬에서 근소한 차이를 보일 뿐 음고가 흡사해서 하이든에 대한 오마주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물론 차이점도 엿볼 수 있는데 하이든은 트럼펫 고음 특유의 화려함을 살린데 반해 훔멜은 참신하게도 트럼펫의 중저음을 부각시켰다.
흥미롭게도 두 협주곡 모두 잊혀졌다가 다시 발굴된 케이스로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은 1899년 브뤼셀에서 파울 한트케라는 인물에 의해 자필 악보 형태로 다시 발견되었고 훔멜 또한 1958년 메릴 뎁스키라는 예일대 학생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작곡시기에 있어 불과 7년 밖에 차이나지 않고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둘 모두 바이딩거라는 트럼펫 연주자를 위해 작곡했으니 닮은 점이 많은 건 어찌보면 당연지사이다.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은 1804년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곡으로 오늘날에도 새해에 어울리는 클래식 베스트로 자주 손꼽히는 곡이다. 따뜻한 서정성과 기분좋은 설레임을 선사하는 훔멜 협주곡과 함께 희망찬 2023년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하이든 못지 않는 생기넘치는 리듬감과 선율로 희망감을 선사하는 훔멜 트럼펫 협주곡의 3악장을 추천한다. 유독 몸이 무거운 아침 출근길에 이 곡을 들으면 정신적 환기는 물론 활기가 샘솟을 것이다.
*유튜브 링크 추천
https://www.youtube.com/watch?v=hR8H8CSojis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2-12-23 1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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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지속가능한 K-문화를 위하여 - 지역문화 양성을 위한 노력
슈가의 솔로곡 ‘대취타’를 혹시 들어본 적 있는가. 불어서 연주하는 취악기와 때리는 타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의미의 ‘대취타’는 조선시대 왕의 행차부터 군대행진에 이르기까지 공식행사에서 연주되던 음악이다. 송현석 학예연구사는 음원이 발매된 2020년 당시 뉴스인터뷰를 통해 “국악이 대중음악에 실험적 요소로 들어와 노출될 때 보통 국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오는데 대취타의 경우 대취타를 충분히 각인할 수 있도록 드러내고 있다”며 대중음악에 전통음악을 전면으로 내세웠음을 언급한 바 있다. 대취타가 수록된 슈가의 앨범(믹스테이프)은 비공식음원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200’차트 11위에 오르는 등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고조선 건국 이래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시간이 쌓아올린 궤적 아래 문화의 정통성과 고유함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엔터테인먼트와 패션을 중심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려는 시도는 꾸준하지만 한국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전에도 접했을 법한 익숙한 소재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이 때야말로 문화가 더 풍성해지고 깊이를 더할 양적• 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의 형성은 역사와 전통, 사회적 맥락뿐만 아니라 지리적 특성까지 모두가 결합된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적인 노력에 지역문화 양성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내 지역문화의 적극적인 양성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도 절실하지만 기업의 지원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국내외에서 문화 양성을 위해 기업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들을 소개해본다.
스미소니언 국립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 전경
먼저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모든 사람의 배경 즉 문화, 유산, 경험을 높게 평가한다”는 신념 아래 북미 원주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미소니언 국립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의 설립 및 전시 지원으로 2021년에 “Nation to Nation: Treatie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American Indian Nations”라는 전시를 후원했다.
박물관 지원 외에도 매년 11월 미국의 ‘원주민 기념의 달’ 기념행사를 지원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미국 원주민 작가들의 작품 8점을 보존하기 위한 비용을 전액 지원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북미 원주민 고객을 위한 원주민 직원 네트워크 서비스 뿐만 아니라 금융 관련 교육, 원주민 채용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원주민 지역을 지원하고 있으나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화 예술 지원이다.
다음은 호주에서 원주민 문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호주 콴타스 항공”이다. 그들은 항공사가 가진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지역문화 양성에 힘쓰고 있는데 바로, 1994년부터 호주 원주민들이 전통문양 그림을 선정해 비행기에 새겨 운항하는 것이다. 1991년에는 보잉 787-9에 에밀리 케임 켄와리의 “얌 드리밍”을, 2005년에는 패디 베드포드의 “멘두우르지”를 보잉 737-800에 새겼다. 그 밖에도 르네 쿨리차가 호주 서쪽 사막 풍경을 표현한 “야나니 드리밍”, 호주 자연색에서 영감을 받은 “우날라 드리밍” 등 원주민 작가들의 작품이 꾸준히 콴타스와 함께 하고 있다. 또, 항공기 이름을 원주민 언어에서 선정한 단어로 지어 원주민들의 언어가 잊히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작품 관련 굿즈를 판매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운영해 원주민들이 자립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원주민들의 전통 문양을 활용해 디자인된 콴타스 항공의 비행기
지역문화는 아니지만 전통문화 지원에 적극적인 국내기업도 있다. 크라운 해태에서는 전통 공연 육성을 위해 “남산국악당”과 “락음국악단”을 창단해 지원하고 있다. 특히 락음국악단의 경우 크라운 해태의 회장 윤영달이 직접 ‘즐겁고 행복한 음악 예술’이라는 의미의 ‘락음’을 직접 지어주었으며 이는 민간기업에서 순수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례적인 사례다. 윤영달 회장은 북한산을 오르다가 우연히 들은 대금소리에 반해 전통문화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이 계기가 되어 기업차원에서 문화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사례들을 살피다보면 결국 기업의 전통문화 지원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문화예술 지원 마케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효과를 살펴봄으로써 기업이 국내 전통문화 지원에 적극적일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마케팅 효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기업의 정당성 확보다. 문화 예술 지원을 통해 긍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면 투자유치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기업 활동의 폭 확대로 이어진다. 둘째, 시장 점유율 확대로 문화콘텐츠를 통해 높아진 기업인지도는 더 이상 제품만을 보고 선택하지 않는 현대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유도해 충성고객 유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셋째, 고용자 복지 혜택으로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조직 문화를 개선할 후 잇으며 이는 신규지원 확보로 이어진다. 또, 기업 내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직원의 복지 및 창의력, 직무 만족도를 증대시킬 수 있고 생산력 확대로 연결된다. 즉, 기업이 문화예술 육성에 적극적일수록 기업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충성 고객 확보 및 신규 직원 유치가 용이해지며 이는 생산성 확대로 이어져 결국 소비자들이 기업의 제품을 찾는 선순환고리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국내 지역 문화 양성으로 구체화시킨다면 지역민들에게 기업의 긍정적 이미지를 인식시켜줄 수 있고, 이는 지역 자체가 기업의 충성고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국 기업과 문화가 상생하고 공존을 꾀할 때 궁극적으로 기업, 문화예술이 다채로워질 수 있다. 특히 그 관심이 지역사회로 향해 지역문화가 발전하게 된다면 이는 결국 전통문화의 새로운 도약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문화가 곧 국력이 되는 정보미디어사회에서 K-문화의 깊이있는 성장을 위해 우리 모두 숙고할 때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2-12-21 1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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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음악 ‘올빼미’
‘올빼미’(감독 안태진)는 류준열, 유해진, 최무성, 박명훈 등 출연 배우들의 이름값에 비해 비교적 조용히 개봉했지만 높은 완성도와 대중적 화법이 입소문을 타면서 오랫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는 웰메이드 사극이다.
시간적 배경은 조선시대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8년만에 귀국하는 시점으로 역사적 기록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빈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 가슴 졸이게 만드는 스릴러로 만들어냈다.
가상의 인물인 ‘천경수’(류준열)는 어두울 때만 앞을 조금 볼 수 있는 침술사다. 주맹증과 비슷하지만 경수는 밝을 때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맹인이므로 그의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 설정에 기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존 인물들과 사건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경수가 어의의 조수로 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경수는 궁에서 아픈 동생을 만날 날만 기다리던 중 어둠 속에서 소현세자의 암살을 목도하고 만다.
시각장애를 가진 주인공에게는 청각적 자극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올빼미’의 사운드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몇몇 장면들에서는 주인공의 시야와 사운드의 강약 및 질감이 일체감 있게 흘러가도록 연출되었다. 동시에 사실상 영화 속 인물들은 들을 수 없는 음악, 즉 스코어(score)는 관객들이 경수가 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나름대로 추리해 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스릴러에서 많이 사용되는 현악기의 날 선 선율뿐 아니라 오직 살아남고자 하는 경수의 절박함, 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모술수의 추악함 등이 다양한 리듬과 톤으로 담겨 있어 영화에 대한 호평에는 음악의 역할도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올빼미’의 음악감독인 황상준은 90년대부터 영화계에 들어와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히말라야’(2015) 등 블록버스터부터 ‘말임씨를 부탁해’(2022)와 같은 독립영화까지 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올해는 추석 시즌 흥행작이었던 ‘공조2: 인터내셔날’(2021)에 이어 또 한 편의 대표작을 갖게 되었다. 부디 12월에도 입소문이 이어져서 여전히 배고픈 극장가에 활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이토록 끔찍하게 아름다운 사랑, ‘본즈 앤 올’
열여덟 살이 된 ‘매런’(테일러 러셀)은 자신에게 남다른, 그것도 아주 끔찍한 욕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친구의 집에서 걷잡을 수 없는 본능 때문에 친구의 손가락을 물어뜯은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야반도주해 다른 지역으로 간다. 그러나 아버지도 매런의 출생신고서와 그동안의 일을 육성으로 기록한 테이프 하나를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린다. 혼자 남겨진 매런은 자신에게 식인습성의 유전자를 물려준 어머니를 찾아 긴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을 떠난지 얼마 안 되어 매런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터’들을 만나게 되는데 ‘설리’(마크 라이런스)에게는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리’(티모시 샬라메)에게는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식인이라는 자극적 소재로 인해 영화는 종종 잔혹한 살육 장면들을 전시한다. 순수하고 착한 10대 소녀가 허겁지겁 입가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터들의 잔인함 자체가 아닌,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기에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이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매런은 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정신병원에 처참한 몰골로 감금 되어 있는 엄마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리 또한 가정폭력 때문에 가족에게까지 이터의 본색을 드러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괴로워한다. 좀비나 뱀파이어와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기도 한 이터들은 사람을 해친다는 죄책감과 존재론적 무력감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고독한 사냥을 계속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깊이 빠져든 매런과 리는 이터의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함께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잠시 평범하게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지만 또 다른 위협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이터는 현실에서 성별, 인종, 장애 등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로 인해 차별 받고 소외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르다. ‘아이 엠 러브’(2009),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로맨스를 다루어온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스릴러 장르가 주는 섬뜩함과 긴장감도 충분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 테일러 러셀, 티모시 샬라메의 애절한 사랑 연기가 그들의 고통에 깊이 이입하게 만든다. 극도로 불안해하면서도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선택지는 자살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두 사람의 생에 대한 몸부림과 서로에 대한 간절함이 공들이 영상에 잘 포착되어 있다. 슬픈 로맨스에 더 비중을 두면서 카니발리즘까지도 미학적으로 연출하는 거장의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2-12-16 1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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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대한제국 황실의 잔치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9월부터 오는 12월 25일까지, 상설전시관 서화실에서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를 선보인다. 테마전의 제목은 <대한제국 첫 궁중 연회>. ‘신축진찬도’는 신축년인 1901년에 펼쳐진 궁중 잔치(진찬進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의 궁중 연회를 그림으로 그려 만든 병풍이 여러 점 전해지는데, 신축진찬도가 담긴 병풍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처음 열리는 연회의 장면을 담고 있다. 이로부터 십 년이 채 되지 않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며, 국권을 피탈하기에 이른다. 이미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던 그때, 대한제국 황실은 무슨 연유로 잔치를 열었을까?
대한제국 이전,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예악의 나라 조선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도구로 궁중의 잔치를 활용했다. 궁중 잔치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은 왕을 칭송하고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왕은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왕실 어른에게 효를 다하는 모습으로 만백성의 모범이 되고자 했다. 조선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축년 5월에 열린 대한제국 황실의 첫 번째 잔치는 그해 71세가 된 황실의 큰 어른, 효정왕후(명헌태후)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행사는 왕후를 위해 마련한 잔치 ‘내진찬’에 이어 밤에 열린 ‘야진찬’, 사흘 후 황제가 베푸는 ‘익일회작’, 황태자가 베푸는 ‘재익일회작’ 등의 순서로 엿새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각각의 잔치는 신축진찬도 병풍의 3~9폭에 그림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그림 속에는 당시 경운궁이라 불린 덕수궁을 배경으로 펼쳐진 황실 잔치의 풍경이 놀라울 만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같은 해 7월에는 고종황제의 오순五旬을 축하하는 잔치 ‘진연進宴’이 열린다.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의 궁중 연향宴享은 진풍정, 진연, 진찬, 진작, 진하, 회례연, 회작 등 잔치의 내용, 주최자 등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술잔을 올린다는 의미의 진작進爵, 음식을 올리는 절차인 진찬이 조선 후기에는 진연보다 규모가 작은 연향의 하나로 각각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7월에 열린 ‘신축 진연’은 5월에 열린 ‘신축 진찬’에 비해 규모가 큰 잔치라 할 수 있다. 신축진연도가 그려진 병풍에는 ‘내진연’에 앞서 ‘외진연’이 그려져 있다. 외진연이 황제를 중심으로 황태자와 신료들이 참석하는 공식적인 행사라면, 내진연은 황실 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가 여성인 잔치이다. 따라서 외진연 그림에는 남성 무용수인 ‘무동’이, 내진연 그림에서는 여성 무용수인 ‘여령’이 등장한다.
임인년(2022년) 12월 16일부터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공연 <임인진연>은, 신축년의 이듬해인 임인년(1902년) 열린 진연 중 내진연을 재현하는 무대다. 임인년에도 4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진연이 거행되었는데 4월은 고종 황제가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였고, 11월에는 고종의 즉위 40년을 축하하기 위해 황태자가 올린 잔치였다. 4월의 잔치가 대부분 경운궁 함녕전에서 베풀어졌던 것과 달리 11월의 내진연은 새로 지은 관명전에서 펼쳐졌다. 공연은 120년 전의 관명전 앞뜰을 무대 위에 옮겨놓아 관객들이 황제의 시선에서 춤과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왕이 황제에 오른 후 베풀어진 연향 그림에서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바뀐 여러 의장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무대 위에 공들여 되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대한제국 첫 궁중 연회>
국립국악원 공연 <임인진연>
신축년 5월의 진찬이 대한제국의 첫 궁중 연회였다면, 임인년 11월의 진연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잔치였다. 궁중의 춤과 음악은 아름다우나 마냥 흥겹지 않고, 고요한 가운데 장엄히 흘렀을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임인년의 끝자락에,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춤과 음악을 보고 들었을 이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닥쳐올 시간 앞에 그들이 갖고자 한 것은 비장함이었을까, 아니면 평상심이었을까. 우리는 그들의 잔치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2-12-16 1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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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2022 문화예술계를 견인한 다섯 이슈들
"AI 아티스트, 메타버스 예술계, 이건희 컬렉션, 프리즈 서울과 K-아트"
AI 프로그램 ‘미드저니’로 생성한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1등을 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2022년 달력도 어느덧 마지막 한 장만 펄럭이고 있다. 국내 문화예술계 가장 핫한 이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마주하며 발달한 기술력의 영향과 이건희 컬렉션, 국내외를 강타하며 오간 예술 행사들의 영향이다. 그 가운데 이건희컬렉션은 유서 깊은 서구 유럽의 기증문화를 국내에 되새기는 계기가 됐고, 지방 및 해외순회 전시까지 예정돼 있어 국민들의 정서를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밖에 NFT아트와 메타버스를 중심으로 이어진 AI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은 공연·시각 모든 범위에서 도전에 대한 진단이 한창이다. 국내외 대중문화를 견인한 한류의 영향으로 권위있는 음악상을 받은 한국 음악가들과 미술계를 강타한 K-아트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특히 프리즈 서울이 한국에 진출해 1조원대 미술시장을 여는 등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2022년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다이나믹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내일을 준비 중이다.
AI 아트 논란, 예술가치에 대한 도전
메타버스 공연의 일상화를 보여주는 '이프랜드'의 콘서트 장면
지난 9월 8일자 중앙일보의 진중권 칼럼은 “인공지능, 시대의 흐름인가 예술의 종언인가”를 통해 미국의 한 온라인 게임 제작자가 AI 프로그램 ‘미드저니’로 생성한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1등을 한 내용을 다뤘다. 미드저니는 사용자가 채팅창에 무언가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4장의 이미지를 5분 안에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유저들은 그 가운데 특정 이미지를 선택해 주제와 색 등을 바꾸거나 배경, 스타일 등을 변경할 수 있다. AI가 생성한 작품이 디지털 아트를 선도한다는 것은 알파고의 등장 이후 두려움에 떨었던 AI에 대한 관심이 이제 우리 생활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계산 기능을 넘어 창조성과 독창성의 영역을 건드리는 AI의 알고리즘은 인간들의 창조물을 바탕으로 한다. 알고리즘의 창작은 미술뿐 아니라 작곡, 시·소설을 쓰는 것은 물론, AI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사회적 제도와 인식보다 변화가 빠르다. 카카오가 올해 기술윤리위원회를 신설한 것도 이를 우려한 결과다. 여러 사례에서 보듯 AI가 만든 창작물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에 대한 윤리적 공방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메타버스 예술계, 활용범위 어디까지 왔는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의 광주 순회전
코로나19의 장기화로 현장감이 중요한 공연과 전시를 대안한 온라인의 발전은 이제 메타버스 예술계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졌다. 회복을 위한 방안이 온오프라인 콘텐츠의 다각화를 발빠르게 견인했다. ‘메타버스’는 이제 생소한 단어가 아닌 트렌드가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가상공간이나 VR 체험 등이 이미 예술계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넘어 일상이 된 것이다. 과거 ‘팬덤문화’를 이끌던 오프라인의 힘은 이제 아티스트의 콘서트나 굿즈들을 메타공간으로 바꿔놓았고, 코로나19 이후 소통에 제약이 생기자 유튜브와 같은 OTT 플랫폼을 통해 아티스트의 무대를 보는 ‘조회 수’에 따라 광고와 자본이 붙는 시스템이 일반화 되었다. 오프라인 전시와 공연처럼 아티스트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라이브 방송과 메타버스 등을 통해 집안에서 즐기는 문화들이 확산된 것은 기술발전을 통한 상용화가 우리 삶의 질을 바꿔놓은데 기인한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 지방과 해외 순례까지 나선다.
지난 9월 열린 프리즈 서울의 뜨거운 현장
역대 최대 규모 기증 사례를 보인 이건희컬렉션이 서울의 뜨거운 관심을 뒤로하고, 지방과 해외 순회전에 나선다. 문화 향유의 장으로 기능한 국립광주박물관 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4개월간 23만명이 북적인 전시답게 내년 1월 29일까지 뜨거운 반응을 이어간다. 국내 미술계 가장 핫한 이슈를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2만 3천여 점에 달하는 기증품 가운데 고미술품 2만 1천600여 점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산하 국립박물관에, 국내외 거장들의 미술작품 1천40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각 작가의 연고지 미술관에 기증됐다. 이건희 컬렉션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국보부터 고갱·모네·피카소 등 해외 거장의 작품까지 포함돼, 많은 시민들이 한눈에 걸작들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광주, 대구, 청주 지역을 순회한 기증전은 이미 미국 시카고미술관·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해외전시까지 예약돼 있다. 기증품을 어떻게 하루속히 국민에게 공개할지가 관건인 가운데, 다양한 유물에 대한 정보들은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을 통해 내년 1월부터 만날 수 있다.
안방으로 진출한 프리즈 서울, K-아트의 향방은?
2022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콩쿨에서 우승한 양인모
프리즈 서울은 세계 최대 아트페어 주관사인 프리즈가 런던, 뉴욕,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아시아 최초로 우리나라 서울에서 2022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개최한 아트페어이다. 9월 2일에는 VIP와 언론을 대상으로 한 사전 공개가 이뤄졌고 9월 3~5일까지 일반 관람객 방문이 진행됐다. 프리즈 서울은 런던에서 처음 시작한 프리즈가 세계 다섯 번째로 출범시킨 페어로, 아시아 첫 개최지로 서울이 선택되면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프리즈는 2003년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미국 뉴욕(2012년)과 로스엔젤레스(2019년)로 확장한 아트페어로, ▷스위스의 아트 바젤(Art Basel) ▷프랑스의 ‘피악(FIAC)’과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로 꼽힌다. 해외 미술계가 국내 안방으로 잠입해 들어온 것과 맞물려, K-POP을 미국에 대중화시키고 메인스트림으로 이끈 주역으로 방탄소년단(BTS)의 성공과도 맞물려 있다. 방탄소년단은 CNN 선정 2010년대 음악을 변화시킨 10대 아티스트로 비욘세, 테일러 스위프트, 드레이크 등과 함께 뽑히기도 했다. 이는 클래식 음악계로까지 확대돼 세계 음악계를 좌지우지한 유태인 파워에 한국음악인들의 도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세계 예술계에 도전장을 낸 K-아트의 한국인 파워가 대두된 것이다. 국제콩쿨의 예만 들더라도 이제 웬만한 콩쿨에서는 한국인의 등장이 놀랍지 않을 만큼 일반화 되었다. 세계무대에서 K-아트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세계 정상을 향해 달리는 한국인 아티스트들의 새해가 열리고 있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2-12-09 1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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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기상천외한 스토리속에 담긴 가족 뮤지컬의 묘미를 만나다_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크리스 콜롬버스 감독하면 ‘나홀로 집에’ 시리즈나 ‘해리 포터’를 떠올리기 쉽다. 영화에 진심인 열정적인 관객이라면 ‘그렘린’, ‘리틀 네모’ 혹은 ‘박물관이 살아있다’를 떠올릴 수도 있다. 마치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는 그리스 신화 속 미다스 왕처럼 헐리웃의 흥행감독으로 유명했던 그가 1993년 세상에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던 작품이 있다. 바로 ‘미세스 다웃파이어(Mrs.Doubtfire)’다. 남자 주인공이 노인풍의 여장을 하고 등장해 관객들을 배꼽잡게 만들었던 기상천외한 스토리의 영화다. 그리고 요즘 이 코미디 영화는 다시 무대용 뮤지컬로 환원되며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대형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던 원작 영화는 로빈 윌리암스의 매력을 한껏 담아내 시선을 끌었다. 원래 스탠딩 코미디언 출신이던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애드립을 더해 속사포처럼 대사를 이어가는 자신만의 매력을 담아내 조곤조곤하면서도 쉬지 않고 폭소를 자아내는 보모 할머니 다웃파이어 여사의 코믹하고 정감 넘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그가 또다른 영화를 통해 선보였던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나 ‘굿모닝 베트남’의 방송진행자 아드리안 크로노와 엇비슷한 연장선상의 캐릭터라고도 볼 수 있다. 혼자 집안 청소를 하면서 빗자루나 유선 청소기를 이리저리 들고 흔들며 엉덩이춤을 추는 장면이나 길거리 건널목에서 소매치기를 다소 과격(?)하게 제압하는 코믹한 상황은 영화관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2,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는 자그마치 4억 4,130만 달러라는 초대박 흥행을 기록하며 엄청난 흥행기록을 달성했다.
뮤지컬로 환생한 것은 2021년의 일이다. 처음 영화를 무대로 옮겨올 아이디어가 구상될 시기에는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의 음악을 만들었던 알란 멘켄과 ‘씨티 오브 엔젤’, ‘신데렐라’ 등의 작사가인 데이비드 지펠 그리고 실제 영화에서도 다니엘의 동생 프랭크 역으로 나왔던 걸걸한 목소리의 성소수자 하비 피어스타인이 참여하기로 예정돼 있었다(그는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에서 거구의 엄마 에드나로 등장했던 바로 그 배우다). 그러나 제작진의 협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극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됐다, 결국 ‘애들이 줄었어요’, ‘치킨 런’, ‘샬롯의 거미줄’ 등의 영화음악을 만들었던 캐리와 웨인 커크패트릭 형제 그리고 역시 이들과 함께 뮤지컬 ‘썸씽 로튼!’에서 코믹한 설정과 기상천외 스토리로 타고난 익살을 선보였던 존 오페럴이 작사, 작곡, 극본을 협업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연출을 맡았던 제리 작스는 뮤지컬 ‘스모키 조스 카페’와 뮤지컬 ‘시스터 액트’를 만들었던 인물로 ‘아가씨와 건달들’의 1992년 리바이벌 무대를 통해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 연출상을 수상한 관록의 예술가다.
원래 2020년을 목표로 제작이 진행됐으나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단 3회 만에 문을 닫아야 하는 뜻하지 않은 곤경을 겪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쇼는 멈출 수 없다’는 관계자들의 노력이 더해지며 재개막이 모색됐고, 결국 브로드웨이에서 지난 2021년 12월 막을 올리게 됐다. 좋은 흥행 성적을 보여준 가장 큰 원동력은 역시 배꼽잡게 만드는 유머와 재치 가득한 주연 배우의 익살 덕분이었다. 영화를 봤다면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스토리가 다시 무대만의 창조와 변환 작업을 이뤄내며 수많은 각색과 첨삭, 진화를 통해 새 생명을 얻어낸 셈이다. 무엇보다 스피디한 대사와 시종일관 미소짓게 되는 기발한 설정 그리고 주연을 맡았던 브로드웨이 배우 롭 맥클루의 천연덕스런 애드립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맥클루는 뮤지컬 ‘애비뉴 Q’에서 인형들의 성인용 유머로 익살을 떨고, 뮤지컬 ‘썸씽 로튼!’에서 세익스피어를 질투해 점쟁이를 찾아가 ‘햄릿’ 대신 뮤지컬 ‘오믈릿’을 만드는 기상천외함을 선보였으며, 뮤지컬 ‘비틀주스’에서 초보 유령 아담으로 분해 무대를 폭소 도가니로 만들었던 바로 그 넉살좋은 배우다. 보모 할머니 분장을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속사포처럼 뱉어내면 미소짓지 않을 관객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만의 완성도있는 캐릭터를 선보여 인기를 누렸다.
우리말 무대에서는 세 명의 배우가 주연을 맡아 무대에 등장했다. 스크린 속 배우와 가수를 오가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임창정, 다양한 무대에서 폭넓은 변신을 선보이며 마니아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뮤지컬 배우 양준모 그리고 이제는 자타공인의 뮤지컬 블루칩으로 통하는 정성화가 그 주인공들이다. 뒷모습으로 엉거주춤 엉덩이춤을 추는 사진을 활용한 브로드웨이의 홍보 포스터와 달리, 우리말 프로덕션은 주인공들의 특수분장한 얼굴 사진을 전면으로 내세워 한국 공연만의 특성을 보여줄 것임을 드러내놓고 보여주기도 했다. 세 배우의 치열한 각축이 느껴질 정도로 흥미진진한 선의의 경쟁도 펼쳐졌는데, 특히 영화의 로빈 윌리암스와는 차별화된 개성을 선보여 많은 박수를 이끌어 냈다.
아역 배우들이나 약방의 감초같은 조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애니’, ‘마틸다’,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 ‘프랑켄슈타인’ 등 크고 작은 무대에서 이미 검증된 아역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거니와 신영숙과 박혜나, 김다현, 김산호, 김나윤, 박준면, 임기홍, 육현욱 등 뮤지컬계의 내로라하는 개성강한 배우들의 가세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특수분장이다. 또 다른 뮤지컬 작품으로 만들어졌던 ‘미녀는 괴로워’에서 날씬한 여배우를 통통한 몸매로 만들었던 특수효과 속 비주얼 변화를 보는 재미가 이 작품에선 한층 업그레이드돼 무대를 수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니엘과 다웃파이어 여사를 오가며 마치 1인 2역을 보여주는 듯한 주연 배우들의 기상천외한 연기의 변신, 여기에 관객들마저 헷갈릴 정도로 두 캐릭터를 순식간에 오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과 이야기 설정 그리고 무대만큼이나 익살스런 뮤지컬 음악들의 조화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물론 골치 아픈 현실을 잠시 떠나 웃고 즐기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무대의 매력은 요즘 관객들에게 가장 어필할 이 작품 최고의 매력이다. 손꼽아 앙코르 무대를 기다리게 되는 인기 가족 뮤지컬이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2-12-09 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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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카덴차의 변천
독주자와 악기의 매력을 오케스트라와의 조화 속에 두드러지게 음미할 수 있는 협주곡은 클래식 음악에서 언제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장르입니다. 바로크 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곡가들이 이 매력적인 장르에 그들의 개성 넘치는 흔적을 남겨놓았지요. 모든 협주곡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르에서 맛볼 수 있는 매혹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카덴차(Cadenza)입니다. 카덴차는 독주자가 (혹은 독주 그룹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부분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협주곡의 첫째 악장의 끝 무렵에 배치되며 독주자는 곡의 테마들을 화려하게 변주하면서 청중에게 자신의 실력을 각인시키지요.
원래 카덴차는 기악곡이 아닌 성악곡에서 비롯되었는데 성악가가 아리아의 마지막 부분을 즉흥적으로 화려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흥적으로’ 곡의 테마를 변주할 수 있는 능력은 카덴차가 협주곡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고전 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당시의 카덴차는 기본적으로 작곡가의 영역이 아닌 연주자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지요. 단, 독주 악기가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일 경우에는 작곡가가 작곡 단계에서 카덴차를 완성하곤 했는데 이 또한 당시의 카덴차에서 즉흥 연주가 중요했음을 시사합니다. 독주자가 둘 이상일 경우 즉흥 연주의 합을 맞추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고전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많은 피아노 협주곡 음반들을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카덴차를 연주했다고 음반에 표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차르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즉흥 연주 실력 또한 탁월했고요. 그가 남긴 많은 피아노 협주곡들은 기본적으로 그 자신이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모차르트는 카덴차를 작곡할 필요가 없었지요. 총 30곡에 이르는 그의 모든 피아노 협주곡 중 독주 피아노가 둘 이상인 협주곡 두 곡(KV 242, KV 365)을 제외하고 카덴차가 작곡 과정에서 만들어진 곡은 23번 협주곡(KV 488) 단 하나입니다. 왜 모차르트가 이 곡에서는 카덴차를 함께 작곡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레빈(R. Levin, 1947- )은 이 곡이 모차르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연주를 위해 작곡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지요.
현재 남아있는 모차르트의 카덴차들은 많은 경우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카덴차를 이런 방식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예시를 모차르트가 직접 제시한 것이었지요. 기본적으로 즉흥으로 연주해야 했던 당시의 카덴차 악보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렇듯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거나, 혹은 실력이 부족한 연주자를 위해 작곡가가 도움을 주는 과정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카덴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은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 협주곡 5번(Op. 73)입니다. 1808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작곡된 이 협주곡의 첫 악장 후반부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협주곡처럼 “이제 카덴차가 등장하는구나” 하고 예상되는 지점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 부분을 연주자가 자유롭게 카덴차를 연주할 수 있도록 비워두지 않고 직접 작곡한 다음 중요한 지시를 덧붙입니다. “카덴차를 연주하지 말고, 다음 부분을 바로 이어 연주할 것” 베토벤이 작곡한 이 ‘다음’ 부분은 피아노가 혼자 카덴차처럼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케스트라가 합류하며 절정으로 치닫지요. 이를 통해 베토벤은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애 버렸는데 이는 곡의 첫 부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 곡은 당대로서는 이례적으로 시작하자마자 피아노의 카덴차가 등장합니다. 베토벤이 음표 하나하나 모두 세세하게 적어놓은 짧은 길이의 카덴차인데, 곡의 구성상 연주자에게 변형의 가능성을 일체 허락하지 않지요.
“카덴차를 연주하지 말고, 다음 부분을 바로 이어 연주할 것”이라는 베토벤의 지시 사항에서의
그 ‘다음 부분’에 해당되는 부분. 베토벤의 원본을 깨끗하게 옮겨 적은 악보. (출처: Beethoven-Haus Bonn 홈페이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에서처럼 작곡가가 대체 불가능한 카덴차를 직접 작곡하는 경향은 이후 대세가 됩니다. 카덴차 분야에서 베토벤처럼 후대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곡가로는 멘델스존(F.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을 들 수 있겠습니다. 1844년에 완성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Op. 64)의 첫 악장에서 카덴차는 악장의 끝 무렵이 아닌 중간에 위치하는데 이후 차이코프스키(P. I. Tchaikovsky, 1840-1893)와 시벨리우스(J. Sibelius, 1865-1957)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그리고 프로코피예프(S. Prokofiev, 1891-1953)의 피아노 협주곡 2번(Op. 16)에서 악장의 중간에 위치하는 카덴차를 볼 수 있지요.
카덴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작곡가는 바로 쇼스타코비치(D. Shostakovich, 1906-1975)일 것입니다. 각각 4악장으로 구성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Op. 77)과 첼로 협주곡 1번(Op. 107)의 카덴차는 유명한데, 첼로 협주곡에서는 3악장 전체가 카덴차이기도 하지요. 긴 호흡 속에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처절함이 진하게 느껴지는 두 곡의 거대한 카덴차는 이 분야의 역사에서 빛나는 순간으로 계속 기억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현재에 다다른 카덴차. 카덴차라는 이름으로 앞으로는 어떤 매력을 지닌 곡들이 탄생하게 될까요? 카덴차의 역사를 빛낼 곡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추천영상: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가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입니다. 5분이 넘게 소요되는 거대한 카덴차(3악장)는 이 곡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거대하다는 인상은 단순히 긴 길이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 안에 담겨 있는 음악의 극적인 흐름이 워낙 대단하기에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요하게 시작하여 점차 격렬해지며 4악장으로 이어지는 이 카덴차에서 악기 한 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커다란 에너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을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dxI2IO7qTpE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2-12-02 1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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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근본적인 의문에 과감히 물음표를 던지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같은 상황도 관점을 달리하면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 물론 보편적으로 통하기 어려운 변화일지라도, 관점의 차이는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며 시사점을 안긴다. 과거 일부 종교인으로부터 문제작으로 지목받았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바로 그러한 작품의 대표작이 아닐까 싶다. 당연한 희생이라 여겼던 메시아의 죽음에 또 다른 의미가 담겼다면, 우리는 과연 그로부터 얻게 된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진제공 : 블루 스테이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맞이하는 시즌으로, 지난 11월 10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한 이번 공연은 오는 2023년 1월 15일까지 계속된다.
7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확연히 달라진 무대와 의상으로 기대감을 높였다. 작품 분위기와 어울리도록 훨씬 세련되게 바뀐 덕분에 몰입감도 같이 상승한다. 아마 이전 시즌을 본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은 현대 뮤지컬계를 이끄는 두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의 협력으로 탄생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20세기 뮤지컬의 본격적인 신화를 이룩한 두 천재 예술가의 20대 청년 시절이 녹아든 걸작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작품 곳곳에서 젊은 혈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날카로운 전자 기타 소리와 함께 시작된 오프닝은 단숨에 시선을 무대로 이끄는 주역이다. 저항의 상징과도 같은 록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작품은 구조부터 오페라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뮤지컬이지만 ‘록 오페라’라 불리기도 한다. 또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되는 성스루 뮤지컬이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더 집중할 필요가 있지만, 장면 전환이 깔끔하고 가사도 명확해서 접근하기 쉬운 편이다.
예수 최후 7일간의 행적을 무대로 옮긴 작품은 성서로 전해진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았다. 다만 발표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뮤지컬답게 파격적인 형식과 캐릭터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이는 종교적인 의미를 부각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에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결과로 보인다. 또 익히 잘 알려진 성인(聖人)의 행적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 접근함으로써 다양한 사고를 유도해 감상의 깊이를 더하고자 했다.
먼저 지저스(예수)는 메시아나 신적인 존재로 그려지기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톱스타처럼 등장한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엄청난 인파를 몰고 다니는 지저스와 그런 그를 향해 계속해서 ‘호산나(Hosanna)’를 외치는 군중이 마치 연예인과 그를 추종하는 열혈 팬클럽 같다. 하지만 그 역시 두려움을 느끼고 좌절할 줄 아는 존재로,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자기 죽음이 갖게 될 의미에 의문을 품으면서 괴로워한다. 믿음을 악용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구원만을 바라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신을 향한 원망을 감추지 않는 지저스의 외침이 매우 신선하다. 이런 인간적 고뇌는 작품을 대표하는 명곡 ‘겟세마네(Gethsemane)’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사진제공 : 블루 스테이지>
‘배신자’ 유다는 신의 계시에 이끌려 일찍이 정해진 운명을 완수하기 위한 도구이자 희생양으로 쓰였다. 이는 기존에 유다를 향해 쏟아지던 부정적 시선을 뒤엎는 시도다. 그는 지저스의 낮은 행보를 보면서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원히 배신자로 기억될 운명에 고통스러워하는 유다도 새롭다. 지저스를 밀고한 후,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그를 향해 ‘잘했다 유다, 불쌍한 유다’라며 어디선가 울려 퍼지던 동정의 목소리는 마치 천상으로부터 들린 소리처럼 표현했다.
지저스를 향해 뜨겁게 열광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죽이라 외치는 폭도로 변한다.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새 우상과도 같던 지저스는 군중들로부터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돼 그의 생살여탈권을 손에 쥔 빌라도조차 두렵게 한다. 모두 예정된 대로 흘러갔을 뿐이지만, 마지막 지저스가 남긴 한마디를 듣고 나면 마음이 더욱 묵직해진 기분이 든다.
이번 시즌 공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열두 제자의 리더 ‘지저스’ 역은 마이클 리와 임태경이 맡는다. 그리고 그와 대적하는 제자 ‘유다’ 역은 한지상, 윤형렬, 백형훈, 서은광이 맡게 됐다. 천상의 목소리로 지저스를 위로하는 마리아 역에는 김보경, 장은아, 제이민이, 유대 총독 빌라도 역에 김태한과 지현준이 캐스팅됐다. 또 작품 속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는 헤롯은 육현욱, 전재현이 맡았으며 이한밀과 김바울이 대사제 가야바를, 마지막으로 시몬은 신은총이 연기한다. 여기에 앙상블이 같이 꾸민 무대도 상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처럼 혁신적이면서도 다채로운 작품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 세기를 초월한 현대적 감각, 한껏 자유로운 무대를 만나보고 싶다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추천한다. 분명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2-12-02 1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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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속의 추모음악 '님로드'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롤 손꼽으라면 단연 1순위는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잉글랜드 은행이 발행한 20파운드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을정도로 그는 국민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영국 제2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대학 졸업식 개회식 및 퇴장음악으로 자리매김하며 전세계적으로 영국의 위상을 드높인 작품이다.
위풍당당 행진곡과 더불어 영국의 상징적인 음악이자 동시에 국가 행사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곡을 고르라면 엘가의 '님로드( Nimrod)'가 대표적이다. 행진곡과는 상반된 분위기의 느린 악장으로 음악이 자아내는 고결한 엄숙함이 좌중을 숙연하게 만든다. 엘리자베스 여왕 곁을 70여년간 지킨 필립공이 자신의 장례를 위해 지정한 곡일 정도로 영국 왕실의 신뢰를 받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사진 제목: 엘가의 지휘로 '님로드(Nimrod)'가 연주되었던 타이타닉 희생자 추모 음악회 광경
영국의 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된 위풍당당 행진곡의 거국적인 배경과는 달리 '님로드'는 <수수께끼 변주곡>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을 가진 작품속의 9번째 변주에 해당되는 곡이다. 흥미롭게도 <수수께끼 변주곡 op.36>은 엘가 주변 인물들을 묘사한 곡으로 1899년 완성되었으며 14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대편성 관현악 곡이다.
어느 날, 바이올린 수업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한 엘가가 피아노 앞에 앉아 떠오르는 악상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는데 아내의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아내의 권유에 탄력을 받아 악상을 변주하기 시작한 그는 결국 수수께끼 변주곡이라는 인생작을 완성시킨다. 이 작품은 거의 무명이었던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이기도 하다.
14개의 변주 중 상당수 도입부에 알파벳 이니셜이 적혀있는데 예를 들어 제1변주의 C.A.E는 엘가의 아내 '캐롤라인 엘리스 엘가', 제4변주의 W.M.B는 지인이였던 하스필드의 지주 '윌리엄 미스 베이커'...이런 식으로 지인들의 이름을 수수께끼 풀어내듯 암시해놓고 그들의 초상을 음악적으로 녹여내었다.
14개의 변주에는 인물의 특징 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소소한 에피소드도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제11변주는 엘가와 엘가의 지인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조지 싱클레어가 강가를 걷던 도중 애완견 불독이 강물에 빠지고 말았는데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기위해 헤엄치는 장면서부터 절박하게 짖는 모습을 위트있게 음악에 담아내었다.
1911년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에대해 "유머의 정신에서 깊이있는 진지함으로 이어진다"라고 자평한 바 있다. 14개의 변주중에서 진지함의 정수가 담겨있는 변주는 단연 제9변주 '님로드'다. 님로드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용맹한 '사냥꾼'이었으며 바벨탑 건축을 주도했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이 변주는 엘가의 음악인생에 있어 둘도 없는 조언자였던 아우구스트 예거(August Jäger)라는 사람을 주제삼았다. 그렇다면 예거가 아닌 님로드라는 제목을 붙여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 또한 엘가라는 영국인의 위트이자 말장난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예거'는 독일어로 사냥꾼이라는 뜻으로 님로드와 같은 의미다.
엘가는 제9변주에서 느린 템포속에 장중함을 담아 친구에대한 애정과 존경을 드러내었는데 작곡가 자신을 주제삼은 마지막 피날레 변주에 사랑하는 아내를 주제로 한 제1변주와 제9변주에 '님로드'를 인용한 것은 그의 인생에 예거라는 인물의 비중이 컸다는 방증이다.님로드는 예거와의 찐한 우졍의 징표였던 것이다. (예거는 심지어 엘가에게 마지막 변주곡을 확장할 것을 권유했는데 엘가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덧붙여 엘가는 숨어있는 선율적 수수께끼도 제시했다고 했는데 정확히 어떤 선율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잘 알려졌다시피 현재 제9변주 '님로드'는 곡의 배경과 상관없이 현재 독립적인 추모곡으로 연주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역사적으로 볼때 타이타닉의 침몰과 연관이 있다. 영국에서 출발하여 미국 뉴욕을 향하던 타이타닉의 비극적인 침몰 소식을 듣고 473명의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었고 런던의 로얄 알버트 홀에서 추모공연이 열렸다. 특히 이 공연은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8명의 연주가들을 기렸는데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를 직접 선곡하여 자신의 지휘로 연주했다. 이때부터 영국을 대표하는 추모음악으로 널리 퍼졌단는 설이 유력하다. 단순히 절친한 친구에게 헌정한 곡을 추모음악으로 간주하는 것이 볼편하다는 견해도 있는데, 작곡가 자신이 애도의 음악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므로 무리가 없어보인다.
최근 내한한 베트남 국립 오케스트라는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며 첫곡으로 님로드를 연주했다. 소중한 생명에 대한 애달픔이 엘가의 음악을 통해 배가되는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유튜브 링크: 지휘-콜린 데이비스 경 연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https://www.youtube.com/watch?v=sNXmw27grOE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2-11-25 1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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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아바타’와 제임스 호너
지난 달 개최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아바타: 물의 길’(감독 제임스 캐머런, 2021) 편집 영상이 약 18분간 공개되었다. 2009년작 ‘아바타’(감독 제임스 캐머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에서 본 영화로 알려져 있기에 13년만에 공개된 2편에 대한 관심 또한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2편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나비족이 된 제이크 설리와 아내 네이티리의 모험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판도라 행성의 바닷속이 주요 공간이다. 2편의 수중 액션 신은 13년 동안 진화된 혁신적 CG 기술로 구현되어 1편이 개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편의 음악은 기존 SF 장르의 영웅 서사를 따르면서도 ‘아바타’ 시리즈가 추구하는 환경 및 민족문화 보존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방향으로 작곡됐다. 음악감독이었던 제임스 호너는 민족 음악학자와 함께 작업하면서 나비족의 테마들을 만들어냈는데, 영화 후반부, 나비족이 이크라와 말을 타고 출격하는 장면부터 인간의 최첨단 병기들과 맞붙는 장면에는 클래식 악기들에 말발굽 소리, 이크라가 내는 소리, 나비족의 언어, 물소리 등을 뒤섞어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연결되어 있는 판도라 행성의 공간 및 나비족 전투의 특수성을 잘 살려냈다.
제임스 호너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과 작업해 오면서 ‘타이타닉’(1997)의 음악도 담당한 바 있는데, 스코어 뿐 아니라 그 해 최고의 오리지널 송이었던 ‘My Heart Will Go On’을 윌 제닝스와 함께 작곡해 오스카상과 그래미상, 골든 글로브상까지 모두 거머쥐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5년에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는데, ‘아바타: 물의 길’의 음악은 그의 동료였던 영국 출신 작곡가, 사이먼 프랭글랜이 맡았다. 1편의 테마들을 어떻게 편곡했을지, 바닷속 자연의 소리와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조화시켰을지 궁금하다. 사이먼 프랭글랜 역시 스코어 뿐 아니라 대중음악에 뛰어난 작곡가이므로 2편의 오리지널 송 또한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윤성은의 Pick 무비
그 달던 복숭아는 어디에서 왔을까, ‘알카라스의 여름’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1차산업 종사자들의 이야기는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땀방울 없이는 우리 앞에 단 한 번의 식탁도 차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복숭아 농장을 일구며 살아가는 대가족의 이야기, ‘알카라스의 여름’(감독 카를라 시몬)은 감독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고, 모든 나라에 농업이 있기에’ 보편적인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영화다. 농장일이나 농촌 생활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등장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에 공감하고 이입하도록 만드는 연출력에서 올해(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의 위엄이 느껴진다.
복숭아 농장과 가족이 삶의 전부인 키메트는 부모님과 아내, 3남매의 가장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동생 부부와 아이들도 자주 키메트를 방문해 농장은 북적대기 일쑤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햇살처럼 이들의 삶에는 에너지가 넘치고, 잘 익은 복숭아처럼 가족들의 관계도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농장의 실소유주인 피뇰이 부지개발을 이유로 키메트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면서 일가족은 혼란에 빠진다. 대신 피뇰은 키메트에게 태양전지판 관리직을 제안하지만 농부가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키메트는 제안을 거절하며 피뇰을 거칠게 대한다. 이후, 전지판 사업을 고려해보는 여동생과 키메트의 갈등, 집안에 힘이 되고 싶지만 무기력함을 느끼는 큰 아들의 일탈 등이 크고 작은 사건으로 펼쳐지다가 이야기는 애써 담담하게 씁쓸한 결말에 다다른다.
농장의 아름다운 풍광을 몇 컷의 사진처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와 집 뒤 쪽으로 포크레인이 나무를 밀고 있는 마지막 부감 샷은 뚜렷이 대비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농장 풍경 직후에 ‘알카라스의 여름’(원제: 알카라스)이라는 제목이 뜨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알카라스’임을 천명했던 영화는 마지막 신에서 농장이 파괴되는 모습을 포착하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삽입시킨다. 그러나 과연 이 가족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감독은 포크레인과 아이들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긍정적으로 답한다. 천진한 아이들의 뜀박질은 포크레인의 움직임보다 동적이고, 목소리는 포크레인의 육중한 기계음을 불식시키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영화의 중반부에서도 농장의 어두운 상황과 별개로 싱그러운 자연에 파묻혀 식사를 나누고 잡담을 나누는 대가족의 모습이 즐겁고 행복하게 묘사된다. 거부와 저항이 무색하게도 시대는 변할 수밖에 없지만, 그 변화 속에 사라져간 시간과 기억들은 잊지 않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2-11-18 1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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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국악과 라디오
다음 해 소식지 발간을 계획하는 시기가 오면, 종이책을 계속 만들 거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곤 한다. 지난 십여 년 사이, 전자책은 꽤 익숙한 매체가 되었다. 한때 종이책의 종말을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종이책은 건재하다. 환경이나 자원 등의 문제를 논외로 하면, 온갖 기능이 집약된 문명의 이기로도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을 단계별로 차근차근 누릴 새도 없이 다종다양한 매체가 명멸하는 시대, 라디오 역시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또 하나의 구식 미디어다. 3D를 넘어 4D 효과를 구현하는 콘텐츠들이 즐비하지만, 아직도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보내는 이들이 많은 덕이다.
재단법인 국악방송의 ‘국악FM방송’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한 국악방송은 남원, 경주, 부산, 전주, 제주 등 가청 지역을 넓혀가는 한편, 광주국악방송․대전국악방송을 차례로 개국하며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또 2019년 말에는 국악방송 TV를 개국해 TV 프로그램도 송출하고 있다.
개국 초기 홍보용 카세트테이프로 국악방송을 알리던 시기를 지나, 개국 10주년 무렵에는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에 ‘덩더쿵 플레이어’를 설치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제는 국악방송 애플리케이션 ‘덩더쿵’을 비롯해 각종 통신사의 AI스피커나 앱에서도 쉽게 국악방송을 만날 수 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국악의 바다에서 유유자적 헤엄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악방송이라고 해서 온종일 국악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요일별․시간대별 청취자 특성에 맞춰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각각의 프로그램에 다채로운 코너를 두고, 공개방송이나 각종 이벤트를 통해 청취자 참여를 유도하는 등 여느 라디오 방송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악을 특화한 프로그램이 조금 많고, 선곡 리스트에 국악이 조금 많을 뿐이다.
국악방송의 아침을 여는 프로그램, ‘솔바람 물소리’와 ‘창호에 드린 햇살’은 2001년 시작해 20여 년간 청취자들의 아침맞이를 돕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들이다. 아침 5시부터 김성필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함께하는 ‘솔바람 물소리’가 차분하고 따뜻하게 잠의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나면, 7시부터는 한층 경쾌한 ‘창호에 드린 햇살’이 햇살지기 허희 평론가와 함께 출근길에 동행한다.
이어지는 ‘국악산책’은 2011년부터 故 최종민, 유은선, 김영운, 송지원 등 국악학자들이 주로 맡아 진행했다. 모두 국악 지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전하는 데 앞장서 온 이들이다. 국악의 ‘아명’이 무엇인지, ‘다스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담백한 설명이 음악에 곁들여져 국악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들어도 좋을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2시부터 방송되는 ‘바투의 상사디야’는 소리꾼 이상화와 김봉영이, 토요일과 일요일의 ‘온고을 상사디야’는 소리꾼 방수미와 강길원이 디제이로 나선다. 흥 많고 재치 넘치는 소리꾼들의 입담이 나른한 오후의 텐션을 한껏 끌어올린다.
오후 4시에는 타악 연주자 황민왕이 진행하는 ‘노래가 좋다’를 통해 다채로운 전통 성악곡을 만날 수 있고, 6시에는 해금 연주자 김보미가 진행하는 ‘맛있는 라디오’가 이어진다. 오후 8시부터 방송하는 ‘FM국악당’은 국악 공연 실황을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콘텐츠와 미디어가 흔하다. 옅은 난향이 후각을, 덤덤한 평양냉면이 미각을 오히려 섬세하게 한다. 온몸의 긴장을 풀고 하나의 감각에 집중하는 휴식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국악은 라디오를 통해 만나면 좋겠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2-11-18 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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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아트테이너를 넘어 대중을 끌어안은 예술로, 감성으로 그린 그림"
미술계를 움직이는 아트테이너들, 막강한 아트파워를 통해 대중문화와 순수예술 사이의 거리 좁히기를 시도한 이들에겐 ‘좋고 싫음’, 이른바 호불호(好不好)라는 명제가 따라 붙는다. 솔비, 나얼, 하정우, 박기웅, 조영남, 임하룡 등 이른바 대중문화계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의 개인전과 아트페어 출품은 여느 예술가와 다를 바 없다. 박기웅과 나얼처럼 실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들도 있지만 솔비나 송민호처럼 탁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다양한 이슈를 가로지르며 화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구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진정성이 맞는가?’란 물음표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은 “미술대학 나온 것을 파워(클래스)로 생각하는 시각”(진중권)에서 기인한다. 박수근, 고흐, 프리다 칼로, 바스키아 등도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음을 상기한다면 이들이 인정받는 길은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자신의 이름보다 작품이 먼저 보이게 하는 행보가 아닐까 싶다.
장혜진, 발라드의 여제가 그린 자연의 숨결
장혜진의 소요인상, 전시 포스터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발라드의 여제, 숨소리도 노래로 소화하는 가수 장혜진의 전시《소요인상(逍遙印象)》(11.9-12.3)이 갤러리치로(www.gallerychiro.net)에서 열린다. 대표곡은 ‘꿈의 대화’, ‘완전한 사랑’, ‘키 작은 하늘’, ‘내게로’, ‘그 남자 그 여자’을 감성어린 목소리로 들려준 장혜진은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프로페셔널음악학과와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에서 퍼포밍아트학 석사, 상명대학교에서 공연예술경영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양여자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로 활동중이다. 하지만 그가 그려낸 유려한 자연은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의 솜씨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겪은 경험의 순간을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포치(布置)하는 방식, 스냅 사진과 같은 정경(情景; 감흥어린 경치)을 평판화 느낌의 오리지널 페인팅으로 전환하는 작업들이 그것이다. 먼발치에서 보면 아카데믹한 중견 화가의 그림 같지만 알고 보면 도전하지 않은 장르가 없는 ‘종합예술가’로서의 면모가 반영된 것이다.
장혜진 작가와 인터뷰 중 작업실 일부
장혜진이 그림에 입문한 것은 산행과 여행을 즐기는 습관 때문이다. 내편 네편을 가르지 않고 산하에서 삶과 철학을 체득하며 관조해서인지 그림에서도 노래처럼 삶의 메시지가 읽힌다. 한나절은 거친 산에 매달려 동양화 속 작은 인물이 되었다가, 한나절은 싸리 눈을 맞고도 살아난 꽃의 내면을 그린 미시적 관찰자가 된다. 노래하는 음유시인 마냥 탈속(脫俗)을 꿈꾸는가 싶더니, 낙엽 소리, 산짐승들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형형색색의 모래 바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드리워진 거대한 사막의 모뉴먼트가 붉은 암반과 수풀 고원으로 둘러싸인 자이언 캐니언을 장혜진은 손의 에너지 속에서 소환된다. 벗겨낸 자연인 듯 보이지만 그 안에도 동물들이 살고 삶의 에너지가 자리한다. 직선보다는 곡선을 추구하고 파도를 타는 듯한 리드미컬한 선율도 느껴진다. 그리면서 완성되는 무계획의 계획이 그림 안에 담긴다. 장혜진의 자연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의 음색이 그림 안에 녹아있음을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작품 세계, 꽃이었나 하면 산이 되고 그리는 자체가 자신이 되는 풍경들 속에서 비우고 채우는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고독에 빠지고 고독에 절망한다. 삶은 소멸하면서 생성을 꿈꾼다. 그렇게 삶의 순환을 노래한 장혜진의 작품 세계는 자연에서 삶의 절망과 번뇌를 문지르며 희망을 캐는 순응하는 예술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작품(음악/그림)을 보는 객관화된 모습들 속에서 내가 좋으면 타인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직관을 믿고 붓 가는 대로 그리는 이유다. 그림 속 동물은 나 자신의 모습이다.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인연들, 색과 색 사이에 뜨거움과 차가움이 넘나드는 까닭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찰나 속에서 각기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암벽등반을 통해 거시적 안목을, 트래킹을 통해 관찰하는 자세를 익힌다. 노을을 즐기는 일상에서 ‘소요인상’에 대한 서사가 시작된 것이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솔비의 케이크, 논란이 된 작품_Just a Cake
앞서 언급한 대로 해프닝이 예술언어로 편입된 지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한국사회에 내재한 보수성은 새로움을 양산하는 묘한 동력이 된다. 그 안에서 소비되는 대표적인 아티스트가 ‘솔비×권지안’이다. 아트테이너라는 이유로 어떤 퍼포먼스와 매체를 시도해도 예술성 앞에 ‘화면 어딘가에 나오는 이슈메이커’라는 기제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익명성 뒤에 숨은 다수에게 확인되지 않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감시당하지 않는 셸터(Shelter=작업실)에 몸과 마음을 의탁한다. 그렇게 작업에 몰입하면 기계적으로 작동하던 ‘관음의 메커니즘’은 ‘새로운 예술을 위한 동력’이 되어 치유를 위한 대상들을 탄생시킨다. 2020년 12월 제프 쿤스의 케이크 를 표절했다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이 된지 1년, 골칫덩어리였던 케이크는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Just a Cake)를 여는 희망의 기폭제(Piece of Hope)로 기능 중이다.
솔비의 케이크, 논란이 된 작품 Just a Cake, 2020
권지안(솔비), Piece of Hope 2021 Mixed media on canvas, 182x228cm
(2021)시리즈는 스튜디오 1층의 베이커리 카페의 제빵사들과 조카와 했던 클레이 아트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비정형 더미의 케이크들에 대한 사회적 이슈로부터 시작됐다. 크리스마스를 위한 고아원 아이들의 후원을 위해 제작된 케이크 더미들은 SNS에 공개되자마자 정체불명의 유령 계정들로 인해 ‘제프쿤스 표절' 이라는 악플 공격과 확인 안 된 기사들 속에서 표절로 낙인을 찍혔고 제프쿤스의 거대한 알루미늄의 조각품과 권지안의 먹는 케이크라는 이중 해석 속에서 작가도 의도도 ‘상처덩어리’가 됐다. 케이크가 가진 ‘축하와 감사’의 기능은 상처로 도배된 채, 사이버불링(Cyber-bullying; 보이지 않는 폭력)과 옐로우 저널리즘에 대한 작가해석과 만나 어딘가 있을 또 다른 피해자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로 전환됐다. 수많은 이슈와 만나온 작가는 세상과 자신이 느끼는 편견과 혼란, 그 자체를 예술의 해프닝으로 삼는다. 이를 다원예술(회화·조각·설치·행위·미디어 등)로 풀어온 작가는 2006년부터 솔비(Solbi)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여성 K-Pop가수라는 정체성 또한 작품에 녹여낸다. 아카데믹한 화단에서의 비난도 10년간의 꾸준한 작품 활동 속에서, 의심과 시도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로 바꿔 가는 중이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 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2-11-10 1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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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Curtain Call)
현대인의 시각으로 예수의 죽음을 발칙한 상상을 더해 구현하다
예수는 락 스타처럼 노래하고 열 두 사도는 히피족처럼 옷을 입고 다닌다!? 황당한 이야기같지만 이런 내용으로 만든 뮤지컬이 있다. 곧 우리말 앙코르 공연의 막이 오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이다.
국내에서는 종교인들이 단체관람 가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원작이 올려졌던 서구에서는 종교인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국내에도 일찌감치 소개됐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아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막달라 마리아의 ‘어떻게 그를 사랑하나'는 잘 알고 있지만 유다도 자살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모른다. 또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기 전 마지막 고뇌를 담은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가 헤비메탈 가수의 창법처럼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불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심지어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으면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절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하늘에선 “잘 했다 유다, 불쌍한 유다”라는 천상의 노래까지 들린다. 폭넓은 상상을 보태자면 유다가 배신했기 때문에 예수는 순교할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종교적으론 차라리 불경스럽다고까지 할만한 발칙한 가정이다.
뮤지컬을 만든 사람은 영국의 천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이다. 21살의 앳된 나이에 자신보다 세 살 연상이었던 작사가 티모시 라이스와 함께 만든 문제작이다. 1971년 브로드웨이의 마크 헬링턴 극장에서 ‘수퍼스타’가 초연될 때 극장 밖에서는 흥분한 기독교인들의 데모가 소용돌이쳤다. 우유부단한 예수, 불쌍한 유다라는 극 내용을 용납할 수 없을뿐더러 예수를 수퍼스타라 부르는 것 자체가 신격모독이라는 항의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유태인들도 데모대에 합류했다. 극중 분열양상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 유태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점철됐다는 불만 탓이었다. 그러나 격렬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연일 만원사례를 이뤘고 음반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음악적으로 봐도 ‘수퍼스타’는 흥미로운 장르다. 바로 록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록 음악이 대중화됐지만 60~70년대의 사정은 달랐다. 록 음악은 당시 서구를 휩쓸던 젋은이들의 음악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상징이었다. 로이드 웨버는 이 작품에서 록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로만 이뤄진 하나의 전위적인 실험극을 시도하려 했다. 하긴 2000년전 예수가 기존 사회에 대한 저항정신의 기수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실로 절묘한 대비인 셈이다.
로이드 웨버의 실험정신은 캐스팅에서도 돋보였다. 공연에 앞서 발매된 ‘수퍼스타’의 두 장짜리 컨셉 앨범을 보면 재미있다. 예수 역으로 전설적 록 밴드인 딥 퍼플의 리드 싱어 이안 길런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72년 발표된 그들의 대표곡 ‘스모크 언 더 워터(Smoke on the Water)’는 지금도 젊은 밴드들의 인기 레퍼토리로 통하는 록음악의 전설이다. 그런 딥 퍼플의 리드싱어가 예수로 나왔으니 가히 충격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던 셈이다. 우리로 치자면 BTS나 블랙 핑크의 멤버가 사극에서 세종대왕이나 명성황후 역을 맡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유명한 사랑 노래 ‘어떻게 그를 사랑하나’도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달콤한 사연만을 담은 것이 아니다. 극중에서 노래를 부르는 막달라 마리아는 몸을 파는 창부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에 대한 기대나 환상 따위가 남았을 리 만무하다. 또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그녀는 군중들에 의해 돌팔매질 당해 죽을 수도 있는 미천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사랑에 빠졌고, 그 대상이 늘씬한 바람둥이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존경받는 인물 – 예수였다. 무대에서의 초연 때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부동의 마리아 역을 맡은 여배우는 이본느 엘리만인데 이 노래 하나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부동의 인기 스타로 등극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복희가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이 역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뮤지컬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창부역의 여배우들(?)이라 인정할 만하다.
50여년 연륜의 뮤지컬 ‘수퍼스타’는 지금도 여전히 성장 중이다. 98년부터 전 영국을 순회한 30주년 기념공연은 초연 못지않은 과감한 무대 표현과 실험정신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었고, 또 최근에는 대형 아레나에서 펼쳐지는 계단식 구조의 야외 공연장 버전이 큰 인기를 누렸다. 리메이크의 인기는 단지 서양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이클 리나 박은태가 등장해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과거 기독교인들의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으며 로이드 웨버가 ‘수퍼스타’를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2000년전 예수의 죽음을 아무 치장 없이 오늘에 재조명해 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극중에서 유다는 “예수, 당신은 왜 하필 매스 미디어도 없는 이런 옛날에 태어났지? 차라리 20세기를 선택했다면 TV며 신문이며 난리 났을 것 아니오... 당신이 말하는 하늘나라엔 부처님도 있소? 마호멧의 기적은 그저 PR을 위한 과대포장이었나?”라고 노래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러나 뮤지컬 속 노랫말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믿어서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이브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다윈의 진화론도 믿는 현대인들에게 묻는 고약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희생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하는 이 뮤지컬의 별스런 재미이자 백미다.
2022년 앙코르 무대에선 마이클 리와 임태경, 한지상, 윤형렬, 백형훈, 서은광, 김보경 등 내로라하는 뮤지컬계 스타들이 대거 무대에 등장한다. 기적도, 부활도 하지 않는 예수라는 파격과 실험의 정신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해석될지 벌써부터 객석의 반응이 궁금하다. 한아름 기대와 호기심을 품고 50주년 기념 한국공연의 역사적인 개막을 기다려본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2-11-04 1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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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모차르트의 피아노로 모차르트를 연주한다면…
‘한 작곡가가 사용하던 악기로 그의 작품을 연주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매력을 지닌 것일까요? 아마도 그 매력의 정도는 그 작곡가가 살았던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전반에 명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ff, 1873-1943)의 피아노로 그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보다,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로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매력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그들이 사용했던 악기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는 유명한 피아노 제작사인 스타인웨이(Steinway)가 만든 것인데, 그 소리는 기본적으로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피아노 소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베토벤의 피아노는 현대 피아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포르테피아노(Fortepiano)였기에,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현대적인’ 피아노 소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요. 그렇기에 베토벤의 피아노로 그의 작품을 연주한다는 것은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왠지 베토벤이 작곡하면서 상상했을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그 소리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체험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연주자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악기로 연주할 때, 당대의 연주 양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그리고 오늘날 사이에는 20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시간 동안 악기들의 모습과 소리만 변한 것이 아니라, 연주 양식 또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정 옛 작곡가의 악기로 연주한다는 것의 가치를 살리려면, 당대의 연주 양식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반영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고된 일이지만, 이 과정을 거쳐서 탄생했던 음반들은 옛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크게 넓혀 주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던, 베토벤 당대의 악기로 당대의 연주 양식을 살려 녹음된 그의 교향곡 전곡 음반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지요.
최근 굉장히 가치있고 흥미로운 음반 하나가 발매되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사용하던 포르테피아노로 연주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ECM New Series 2710-16)입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이 그의 포르테피아노로 녹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연주는 피아니스트이자 고전음악 특히 모차르트 음악 연구로 명성이 높은 음악학자인 로버트 레빈(R. Levin, 1947- )이 맡았습니다. 이 음반에 사용된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는 안톤 가브리엘 발터(A. G. Walter, 1752-1826)가 1782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차르트가 이 악기를 1785년부터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이 음반의 책자에 해설을 쓴 음악학자 라이징어(U. Leisinger, 1964- )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미 1785년 이전에 연주용 악기로 이 포르테피아노를 얻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 (출처: classicfm.com)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는 현대의 피아노보다 작습니다. 표준적인 현대 피아노가 88개의 건반으로 7 옥타브 정도의 음역을 갖고 있는데 비해,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는 61개의 건반으로 5 옥타브에 이르는 음역을 갖고 있지요. 건반을 누르면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원리는 같은데,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는 그 해머가 현대 피아노에 비해 작고, 현을 때리는 속도가 현대 피아노보다 더 빠르다고 레빈은 설명합니다. 현도 현대 피아노에 비해 더 가늘고, 더 느슨하게 조여져 있는 차이가 있지요. 나무로 만들어진 해머가 얇은 가죽으로 쌓여 있는 것도, 양털을 압축한 펠트로 해머를 감은 현대 피아노와 다른 점입니다.
그렇다면, 레빈의 음반을 통해서 울리는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 소리는 어떨까요? 현대 피아노처럼 맑고 영롱하며 부드러운 소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고풍스러움과 생생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울림은 단연 일품입니다. 현대 피아노와는 많이 다른 이 울림은 처음부터 낯설기보다는 신선하게 다가오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나, 이 음반의 진정한 매력은 모차르트의 악기로 모차르트를 연주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고 가장 큰 매력은 18세기 연주 양식 특유의 ‘반복(repeat)’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레빈은 음반 해설집을 통해, 그리고 유튜브 영상을 통해 당시 연주에서 반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합니다. 핵심은 그가 인용한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C. Ph. E. Bach, 1714-1788)의 글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지요. “반복에서의 변화는 오늘날 필수적인 것이다.” 즉, 당시에는 어떠한 구간이 반복되어 연주될 때, 방금 연주했던 부분을 악보 그대로 다시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에 의해 상당히 자유롭게 변화되었던 것이었지요. 얼마나 매력적으로 악보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는 당연히 연주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었고요.
이러한 양식을 반영한 레빈의 연주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그 변화의 정도는 예상을 뛰어 넘습니다. 선율에 장식음이 조금 섞이는 정도가 아니라 선율 자체가 바뀌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심지어 화성이 바뀌거나 박자가 원래보다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레빈의 매력적인 연주는 정말 모차르트가 자신의 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연주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레빈의 연주는 악보의 충실한 재현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론,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에서 그의 방식만이 정답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모차르트의 악기로 당대의 연주 양식을 적극 반영한 이 연주는 오래도록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깊어져 가는 가을, 레빈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모차르트 연주의 매력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추천영상: 레빈이 연주한 모차르트의 소나타 10번 K. 330 중 2악장입니다. 한 부분이 반복되거나 앞의 선율이 뒷부분에 다시 등장할 때,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 귀 기울여 감상하신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만약 악보를 놓고 감상하신다면, 그 흥미는 더욱 커지겠지요. 반복에서의 변화 폭이 상당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다는 느낌없이 전체적으로 잘 조화되고 있는데, 이는 연주자의 뛰어난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차르트 당대의 연주 양식이 반영된 레빈의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를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rtBzYSTR8xM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2-10-28 1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