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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다시 돌아온 고양이들의 대축제, 뮤지컬 ‘캣츠’ 내한 공연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고양이들을 위한 단 7주간의 축제가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3월 12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선보이는 이번 오리지널 내한 공연은 2022년 말부터 김해, 세종, 부산을 거쳐 지난 1월 20일 예정된 서울 여정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캣츠’는 오랜만에 만나는 오리지널 연출까지 더해져 더욱 반갑다. 우선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잠시 사라졌던 젤리클석이 부활했고 인터미션을 활용한 플레이타임도 다시 진행된다. 또 지난 2020년에 선보였던 40주년 기념 공연 ‘캣츠’의 경우,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일부 배우들이 고양이 분장을 한 채로 메이크업이 된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연기를 해야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마스크를 쓰지 않아 그새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배우들과 직접 교감하고 소통하며 작품에 푹 빠져들 수 있게 됐다.
<캣츠 공연장면, 사진제공 에스앤코>
뮤지컬 ‘캣츠’는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과 더불어 Big4 뮤지컬이라 불리는 메가 뮤지컬 대표작 중 하나로, 그 중 ‘오페라의 유령’을 탄생시킨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만든 또 하나의 명작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대문호 T.S 엘리엇의 시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바탕에 두고 재미난 상상력을 더해 만든 뮤지컬인데, 1981년 영국 초연 당시 놀랍게도 처음에는 실패를 점치던 사람들의 우려 속에 무대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특성을 가진 시를 가지고 제작한 작품인데다 모든 캐릭터가 고양이들로만 구성돼 있다 보니 과연 이런 시도가 관객들에게 통할 수 있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이 모든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이 곧 증명됐다.
비교적 실험적인 시도에 가까웠던 뮤지컬 ‘캣츠’는 단순한 전개를 뛰어넘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표현뿐만 아니라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 환상적인 무대 연출로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공연이라는 점 또한 장점으로 작용했다. 현재까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공연했고, 한국 뮤지컬 역사상 최초로 누적 200만 관객 기록을 세우기도 한 역사가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뮤지컬 ‘캣츠’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다.
뮤지컬 ‘캣츠’에는 각기 다른 사연과 성격을 지닌 젤리클 고양이들이 잔뜩 등장한다. 매해 열리는 고양이 축제 ‘젤리클 볼’에서는 이들 중 오직 단 한 마리의 고양이만이 새 삶을 얻게 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혜로운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부터 ‘Memory’의 주인공 그리자벨라, 인기 만점 ‘스타 고양이’ 럼 텀 터거, 책임감 강한 ‘리더’ 멍커스트랩, 나타날 때마다 긴장감을 더하는 ‘악당’ 맥캐버티, 의상부터 남다른 ‘마술사 고양이’ 미스터 미스토펠리스, 관능적인 매력을 지닌 봄발루리나 등 작품 속 고양이들은 캐릭터가 뚜렷한 데다 각각 지닌 매력도 상당하다. 그래서 ‘캣츠’를 반복해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캐릭터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실감 나는 분장을 한 채로 고양이의 습성까지 완벽히 익혀 표현하는 배우들 덕분에 젤리클 고양이들을 향한 애정은 갈수록 깊어진다. 작품은 이런 고양이들이 무대에서 펼쳐낸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또 하나의 작은 세계에 닿을 수 있도록 생생하게 풀어낸다.
<캣츠 공연장면, 사진제공 에스앤코>
무대는 고양이들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재미나게 꾸며두었다. 낡은 타이어와 버려진 오븐, 자동차 등은 과장됐다 싶을 정도로 상당한 크기를 자랑한다. 고양이들에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보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그만큼 녹록지 않을 세상살이가 떠올라 조금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나게 무대를 누비며 축제를 즐기는 젤리클 고양이들의 모습에 금세 마음이 다시 따스해진다.
아름다운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그리자벨라의 ‘Memory’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아름다운 외양으로 사랑받았으나 험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어느덧 볼품없이 늙어버린 고양이는 생애 마지막 희망을 담아 간절히 노래한다. 처음에는 그리자벨라를 차갑게 외면했던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곁으로 모여들고, 고독했던 그의 삶에 온기가 더해진 순간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벅차다.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듣게 된 ‘Memory’는 변함없이 대단한 위로다.
이 밖에도 뮤지컬 ‘캣츠’에는 고양이들의 습성을 알고 친해지는 법, 고양이가 간직한 비밀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물론 극 중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객들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전개지만, 이처럼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깨달음이 담긴 작품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기회에 뮤지컬 ‘캣츠’가 준비한 마법 같은 무대에 한껏 취해보시길 바란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3-02-22 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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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북산 5인방의 심장박동 같은 음악, ‘더 퍼스트 슬램덩크’
7080 세대들의 학창시절을 즐겁게 해주었던 농구만화, ‘슬램덩크’가 다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1월 4일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하 ‘더 퍼스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때문인데, 박스오피스를 역주행 하더니 급기야 1위까지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서점가에서는 원작 만화 및 관련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캐릭터 굿즈를 판매하는 백화점 팝업스토어 앞에는 개장 전날부터 밤새워 줄을 서는 이들도 많으니 하나의 현상이라 할 만하다. 레트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오래 되었지만 이제 소비의 주축이 된 세대들이 십대 시절의 추억에 보여주는 애정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진한 것 같다.
‘더 퍼스트’는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경기장면에 송태섭의 성장드라마를 간간이 삽입시키면서 진행된다. 느리고 감성적인 플래시백이 농구경기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으나 북산 5인방 각각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팬들의 가슴을 본격적으로 설레게 하는 것은 다섯 명의 선수가 거친 댓생으로 완성되면서 일본 록밴드 ‘더 버스데이’의 강렬한 음악이 흐를 때부터다. 오프닝곡으로 사용된 ‘LOVE ROCKETS’는 베이스, 드럼, 기타 등 악기가 하나씩 추가되면서 시작되는데, 음악에 맞춰 선수들의 이미지가 하나씩 만들어지도록 연출되었다. 연주도 좋지만 보컬의 독특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산왕전이 시작되기 직전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려준다. 북산 5인방의 심장박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또한, 1997년에 결성된 일본 록밴드 ‘텐피트’가 부른 ‘제ZERO감’은 뒤쳐졌던 북산고의 역공 장면과 엔딩에 삽입되었다. ‘더 퍼스트’를 위해 2년이나 공을 들여 만들어진 곡인 만큼 치열한 경기의 박진감과 열기에 오차 없이 접착되어 있어 관객들의 머릿속에도 오래 남는다. 영화가 끝난 후 음악만 들어도 슬램덩크의 감동을 다시 살아나는 것은 물론이다. ‘슬램덩크’ TV판에서 사용되었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와 비교해서 들어보면 ‘더 퍼스트’의 훨씬 빠르고 격렬해진 경기 장면 컨셉을 더 확실히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윤성은의 Pick 무비
바빌론 같았던 영화사, 바빌론 같은 영화, ‘바빌론’
영화 호사가들 사이에서 올 상반기 최고의 기대작 중 한 편으로 꼽혔던 ‘바빌론’(감독 데미안 셔젤)이 지난 1일, 베일을 벗었다. ‘위플래시’(2014), ‘라라랜드’(2016)로 잘 알려진 데미안 셔젤 감독과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의 만남이라는 크레딧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다음 달 12일에 개최되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3개 부문 후보에 올라있다. 그러나 거기에 감독이나 배우들의 이름은 없다. 현지 평단의 반응도 엇갈리는 편이다. ‘아티스트’(감독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2011), ‘헤일, 시저’(감독 조엘 코엔, 에단 코엔, 2016), ‘맹크’(데이비드 핀처, 2020) 등 할리우드 영화사의 한 때를 조명했던 작품들이 아카데미 회원들, 혹은 적어도 비평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바빌론’은 유성영화의 시대로 넘어오기 직전(1926년)부터 시작해 이 시기를 반추한 기념비적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감독 진 켈리, 스탠리 도넌)가 극장에 걸렸던 1952년에 끝이 난다.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매니’(디에고 칼바)는 할리우드 유명인사들의 파티를 위해 코끼리를 고용주의 집으로 끌고간다. 코끼리가 언덕을 올라가지 못하자 조련사는 코끼리의 엉덩이를 자극해 배변을 하게 만드는데, 코끼리가 싸지르는 그 분변을 쫄딱 맞고 만다. 말 그대로, 더럽게 웃기는 이 장면은 바로 이어 등장하는 퇴폐적 파티와 비정상적인 영화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이다. 영화 촬영장에서 누군가는 꿈을 보고,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인기와 명예를 얻지만 교만과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던 그들의 삶은 이미 비참한 몰락을 담보하고 있다. 한편, 영화 후반부에서 ‘넬리’(마고 로비)는 할리우드 투자자들의 고상한 면상에 구토를 해대기도 하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위선에 대한 감독의 정직한 반응이자 태도라는 점에서 코끼리의 분변과도 맞닿는 데가 있다.
영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장 중요하고 세계적인 도시였으나 일순간에 멸망해 버린 향락의 바빌론처럼, 무성영화기를 꽃 피워던 할리우드 시스템과 스타들도 새로운 시대 앞에서 명멸하듯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잭’(브래드 피트)과 넬리, 매니의 운명은 그 씁쓸함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영화의 서사도 바빌론이라는 도시 운명의 하락 곡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중반을 한참 넘어서까지 개성 있는 캐릭터와 블랙코미디로 영화적 쾌감을 극대화시키던 ‘바빌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패기도 논점도 잃고 무너져 내려버린다. 초반부터 몇 차례 레퍼런스로 사용한 ‘사랑은 비를 타고’의 주요 장면을 다시 한 번 통으로 삽입시키면서 감성을 자극하려 애쓰는 에필로그는 감독조차 이야기의 결론을 맺지 못해 갈팡질팡 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화사의 변혁기에 사라져버린 스타들을 향한 애도와 영화 매체에 대한 애정이 크고 작은 균열을 일으키다가 결국 바벨탑을 붕괴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봐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갈등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추천 쪽이다. 실망스러운 뒷부분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즐거운 작품이므로. 그리고 영화가 사라질 것이라 말하는 시대에 유의미한 쟁점들을 던져주므로.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이 논쟁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3-02-17 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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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달에 살던 토끼가 ‘속세’로 내려온 까닭은
계묘년은 검은 토끼의 해라 토끼 관련 전시들도 많이 열리고 있다. 예술문화 속 토끼는 무엇을 상징하는 동물인가?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에서 토끼는 영리하고 잔꾀가 많은 동물로 의인화된다. 불교에서 토끼는 보시행을 상징한다. 기독교의 헌금과 유사한 불교의 보시는 대가 없이 베풀고 나누는 덕행이다. 불교 설화에 의하면 보시를 결심한 토끼, 원숭이, 수달, 승냥이에게 제석천이 배고픈 나그네로 위장해 시험을 했는데 토끼만이 스스로 자기 몸을 태워 보시하려 하자 제석천이 감동해 토끼를 구하고 달에 새겨 놓았다고 한다. 달나라의 신성한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 이야기는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기독교 중심의 서구 문화권에선 전혀 다른 상징으로 구전됐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제프쿤스의 토기>
예수가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을 경축하는 부활절의 아이콘이 토끼다. 교회의 부활절 행사에서는 토끼 복장을 한 사람이 삶은 달걀을 나눠 주는 풍경이 흔하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토끼 미국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의 조각으로, 풍선처럼 구현한 104㎝ 크기의 조형작품이다. <토끼>는 2019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110만달러(당시 약 1084억원, 현재 기준 약 1125억원)에 낙찰됐다. 얼굴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고, 앞발에 당근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귀엽고 앙증맞게 형상화했다. 달에 살던 토끼가 지상으로 내려온 까닭은 여러 긍정적 상징요소 때문이다.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다양한 토끼 전시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백남준 효과 <달에 사는 토끼>, 토끼효과 노리는 관광지들
나무 토끼가 TV에 나오는 달을 본다. 달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 2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백남준 효과> 전시에서는 백남준의 작품 <달에 사는 토끼>를 만날 수 있다. 달에 있어야 할 토끼가 TV를 통해 달을 보고 있다는 설정은 지금 보아도 파격적이다. 2023년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한다. 무엇이든 온라인 세상과 연결된 오늘날, 백남준의 시도는 토끼를 자기화한 선지자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백남준의 작품,<달에 사는 토끼>
이 전시는 백남준과 백남준이 한국미술계에 끼친 영향, 역할을 조명한다. 토끼 작품 전시는 전국 단위로 기획돼 다양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울대공원도 이달 26일까지 토끼 조형 작품 23점을 전시하는 '2023 점프 프로젝트' 야외 전시를 이어간다. 경남 창원 창원역사민속관에서도 '묘(卯)한 토끼그림전'을 통해 토끼 캐릭터 '베니' 등 60점의 토끼를 선보인다. 용인 에버랜드의 15m의 초대형 토끼 조형물 '래빅, 전남 목포 대반동 유달 유원지 '목포 오키토끼'가 포토존, 부산 해운대에 마련된 대형 토끼 조형물, 충남 예산군 예당호 야외공연장 입구에 마련된 검은토끼와 흰토끼 한 쌍도 많은 언론에서 조명됐다.
국립민속박물관 《새해, 토끼 왔네》
전시제목: 계묘년 토끼띠 해 특별전 《새해, 토끼 왔네》
전시기간: 2022. 12. 14.(수) ~ 2023. 3. 6.(월)
전시장소: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2
전시내용: 토끼의 생태에 얽힌 민속 이야기 / 십이지장식품 토끼 등 70여 점
이 전시는 지혜로움, 민첩함에서부터 달 토끼, 부부애까지 토끼의 여러 민속 상징을 외형과 습성 등 생태와 결합하여 전시한다. 대표 작품인 <화조영모도 – 토끼와 모란(花鳥翎毛圖)>는 토끼와 모란을 함께 그려 부부애와 화목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화조영모도 10폭 병풍 중 한 폭이다. <풍차(風遮)>는 목 뒤를 덮고 볼을 감쌀 수 있게 하여 추위를 막는 여성용 방한 모자로, 안쪽에 토끼털을 덧댄 볼끼뺨과 턱을 덮기 위한 겨울철 방한구를 부착하였다. <문자도 – 치>는 ‘치(恥)’자에 달 속에서 방아 찧는 토끼를 그린 문자도이다.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죽은 뒤 해마다 매화꽃이 피고 달빛이 밝게 빛이 났다(首陽梅月 夷齊淸節)는 고사를 형상화하여 ‘치’자도에는 토끼, 달, 매화나무를 함께 그려 넣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는 ‘토끼’ 작품 찾기
고려 12세기 청자의 정수를 보여주는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고려 12세기 국보)는 귀여운 토끼 세 마리가 향로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작고 검은 눈동자의 토끼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토끼는 귀여운 외모와 달리 향로를 가뿐히 받치고 있을 만큼 힘이 세 보인다. 이 향로는 몸체가 연꽃 모양으로 불교와 관련된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십이지 토끼상>은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능묘 수호의 의미가 부여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19세기 말 <백자 청화 토끼 모양 연적>은 파도를 내려다보는 토끼 형상으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속 토끼가 연상된다. 예로부터 토끼는 재치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달에서 방아를 찧는 옥토끼는 고려시대 청동 거울과 조선시대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새해 토기왔네>
또한 사나운 매가 토끼를 잡으려는 상황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 여러 점 전한다. 이는 매로 토끼를 잡는 전통적 사냥방법을 반영한 것이며, 제왕(매)의 위엄 앞에 교활한 소인배(토끼)가 움츠린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둥근 달을 보는 토끼> (조선19세기) 두 귀를 쫑긋 세운 토끼가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다. 토끼는 예로부터 달에서 방아를 찧으며 불사약을 만드는 영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문화재의 상징과 역사를 통해 토끼와 달을 연결시킨 옛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3-02-17 1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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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가야금 병창의 명인들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30여 명의 연주자가 가야금을 한 대씩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장구 장단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연주가 시작된다. 곧 가야금 가락 위에 노래가 얹어진다. 향사 박귀희 선생이 작곡한 신민요가 흥을 돋운다. ‘가야금을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 또는 ‘노래하며 가야금을 타는 연주 형식’을 일컬어 ‘가야금 병창(竝唱)’이라고 한다.
지난 2021년 향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사)가야금병창보존회가 주최하는 공연이 열렸다.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이하, 가야금 병창 보유자)이자 박귀희 선생의 제자였던 안숙선, 강정숙 명인을 비롯해 여러 전수자와 이수자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2022년에는 금농 정재국(예명: 정달영) 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강정열 명인과 제자들이 펼치는 공연이 열렸다. 강정열 명인 역시 정달영 선생의 뒤를 이어 남자 가야금 병창의 계보를 잇는 예능 보유자다. 향사와 금농 모두 20세기 초 활약한 가야금 병창 명인 오태석의 제자들이다.
지금은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지만 악가무에 두루 통달했던 옛 예인들 중 가야금 병창을 선보인 이들은 소리에 일가견이 있는 가야금 연주자였거나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는 판소리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가야금 병창을 주 종목으로 하는 이들 역시 가야금 병창 연주가로도, 소리꾼으로도 불리며 연주와 소리에 두루 능통해야 한다.
조선 시대 ‘사습놀이’에 기원을 두고 1975년 다시 시작한 전주대사습놀이는 판소리, 농악, 무용 등의 부문에서 명인 명창 자리를 두고 겨루는 경연이다. 1985년 11회 대회부터 가야금 병창 부문을 신설했는데 이때 병창 부문 장원은 강정숙 명인이었으며 또 다른 보유자인 강정열 명인은 같은 해 기악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한편, 지난해 판소리계의 프리마 돈나 안숙선 명창은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1997년 가야금 병창 보유자가 된 지 25년만에 보유 종목이 바뀐 것인데,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이 가야금 병창에 대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안숙선 명창은 어린 시절부터 가야금 산조 예능 보유자인 이모와 판소리 흥보가 예능 보유자인 외삼촌을 비롯해 이름난 명인, 명창들에게 가야금과 판소리를 두루 사사했다.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인 김소희 선생과 가야금 병창 보유자인 박귀희 선생의 애제자이기도 했는데, 박귀희 선생이 한발 앞서 그를 후계자로 낙점했다. 판소리 명창으로 국창의 반열에 올랐으나 그는 가야금 병창 보유자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왔다. 동생 안옥선과 함께 녹음한 음반을 비롯해 가야금을 타며 노래하는 그의 영상을 유튜브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며 가야금 병창 예능 보유자 자격은 해지되었다. 남원의 아기 명창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영원한 춘향’이란 타이틀의 무게를 짊어지고 온 거장에겐 조금 더 맞춤한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그가 지켜온 가야금 병창은 재예를 물려받은 제자들이 대물림하며 이어나갈 것이다.
안숙선 명창의 가야금 병창(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새타령, 남원산성 등의 민요와 창작한 곡들을 제외하면, 오래전부터 불려온 가야금 병창곡들은 대부분 ‘단가(短歌)’에 속하는 곡들이다. 짧은 노래를 의미하는 단가는 판소리를 하기 전에 소리꾼이 목을 풀고,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불렀던 노래를 가리킨다. 주로 산천경개를 묘사하거나 옛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판소리의 한 대목이기도 하고, 판소리와는 무관한 내용의 노래들도 있다.
호남가, 죽장망혜, 녹음방초와 같은 단가 그리고 춘향가 중 사랑가,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수궁가의 고고천변 등이 자주 불리는 가야금 병창곡들이다. 단가와 마찬가지로 애절한 느낌의 계면조보다는 씩씩한 우조나 웅장한 느낌을 주는 평조 선율이 많다. 선율 악기인 가야금에 장구를 곁들여 반주하므로 원곡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대규모 인원이 함께 연주하며 노래하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해 초심자들도 흥겹게 감상할 수 있다.
가야금 병창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창작 가야금 병창곡에서 가야금 병창극까지 내용과 형식 면에서 풍요로워지는 중이다. 천주미와 이선의 유튜브에서 창작곡과 뮤직비디오, 병창극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두 사람과 박혜련, 서태경이 의기투합한 연구모임 ‘현재’는 가야금 병창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위한 작업의 결과물을 지난해 8월 음원으로 출시하기도 했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3-02-14 0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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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도시괴담속 알싸하고 삐딱한 현대사회 풍자의 재미를 즐긴다_뮤지컬 스위니 토드
스위니 토드 공연 장면 <사진제공 : 오디컴퍼니>
산업혁명 이후, 가파른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발호와 빈부격차의 심화, 그리고 계급사회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영국은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용광로였다. 지금도 런던을 여행하면 그 시절의 모습을 따라 거닐어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이 없을 정도다. 물론 유럽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유도 비슷하다. 바로 역사를 직접 밟아보며 느낄 수 있는 시간여행의 묘미다.
절대왕권을 둘러싼 끔찍한 영국 역사의 배경이 된 런던 타워와 타워 브리지, 세계 표준시로 유명한 그리니치 전망대, 레스터 스퀘어나 옥스퍼드 써커스같은 인파 가득한 도심 풍경,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한 노팅힐, 산책하기 좋은 햄스테드 히스, 하루종일 딤섬을 파는 차이나 타운과 트렌디한 소호 거리, 버킹검궁, 하이드 파크, 과학사나 자연사박물관, 테이트 모던, 코벤트 가든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바쁜 관광명소가 즐비하지만, 역사적인 대도시의 빛과 그림자를 체험하고 싶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특별한 길이 있다. 바로 런던 구시가의 플리트 스트리트다.
한때는 영국의 언론사들이 밀집해있는 신문의 거리로 유명했다. 조판을 짜서 인쇄기로 신문을 찍어내던 시대엔 온갖 정보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울퉁불퉁 돌바닥이나 골목길에는 오래된 상점이나 노포들도 많고, 저마다 사연 가득해 보이는 예스런 풍경이 해리 포터에나 나옴직한 마법사의 마을 – ‘다이아곤 벨리’로 통할 것 같은 느낌마저 보여준다. 바로 뮤지컬 ‘스위니 토드 – 플리트 스트리트의 악마 이발사’의 배경이 됐던 장소다.
런던의 이발사 벤자민 바커는 아름다운 부인, 어린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의 유지이자 귀족인 터핀 판사는 바커 부인의 미모를 탐했고, 결국 억울한 누명을 씌워 그에게 유배형을 내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런던으로 돌아온 그에게 이발관 아래층 파이가게 주인 러빗부인이 부인은 겁탈을 당한 뒤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딸 조안나는 판사의 수양딸이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판사가 그 딸과 결혼하려 하고 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복수심에 불타게 된 바커는 자신의 이름을 스위니 토드로 바꾸고, 언젠가 이발소에 면도를 하러 찾아올 판사에게 죽음을 선물하기 위해 연습삼아 무작위로 연쇄살인 행각을 벌이게 된다. 사건이 더욱 기괴하게 전개됐던 것은 러빗 부인이 시체들을 유기해 고기파이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았던 것인데, 당시 육류를 먹기 어려웠던 빈민층이나 피지배계급 사람들에게 값싸고 고기 가득한 파이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성공을 하지만, 복수에 눈이 멀어 주변을 알아보지 못했던 스위니 토드의 사연이 반전을 이루며 한탄을 자아내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별한 이 뮤지컬만의 묘미를 잉태해낸다.
스위니 토드 공연 장면 <사진제공 : 오디컴퍼니>
뮤지컬이 인기를 누리면서 ‘무차별 살인’을 자행한 이발사와 그 사체로 인육파이를 만들어 팔았다는 파이가게 사연이 실제 있었던 사건인가가 애호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물론 실제라 믿는다면 억측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 오래된 도시의 뒷골목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괴담 수준의 소문들을 짜깁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더 스트링 오브 펄스(The string of Pearls)’라는 매체에 1846년부터 일 년여에 걸쳐 연재되었던 3류 괴기소설이다. 정론지와 대중지의 구분이 명확한 영국의 매체 환경을 감안하자면, ‘카더라’ 통신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괴담에서 파생되어진 문화콘텐츠라 부를만 하다. 물론 그런 배경 탓에 뮤지컬은 사건 그 자체의 진실여부가 중요하다기보다 이 과정에서 문뜩문뜩 눈치 채게 되는 인간성 말살에 대한 풍자, 복수에 눈이 어두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비판, 산업혁명 이후 극명하게 대립되던 계급 갈등과 빈부 격차 그리고 대도시의 사악함에 대한 날선 은유 등에 더욱 뒷맛이 진하게 남는 체험이 가능하다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무대보다 뮤지컬 영화로 먼저 각광을 받기도 했다. 괴짜 감독 팀 버튼이 2007년 발표했던 동명 타이틀의 뮤지컬 영화가 큰 인기를 누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밀히 따지자면 물론 영화보다 무대가 훨씬 앞섰다. 뮤지컬이 만들어진 것은 1979년이고, 영화는 이보다 30여년 뒤인 2007년에 개봉했다. 사실 뮤지컬의 세계적 인기를 고려해본다면 뮤지컬 영화의 등장은 오히려 다소 뒤늦은 감조차 없지 않다. 팀 버튼은 학창시절부터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는 후문도 있는데, 이런 탓인지 영화에는 원작 뮤지컬에 대한 팀 버튼 해박한 지식과 심도있는 표현이 덧붙여져 더욱 그로테스크한 재미를 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팀 버튼의 페르소나라는 조니 뎁이 스위니 토드로, 또 ‘전망좋은 방’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인상 깊은 조연으로 완성도를 더해주던 헬레나 본햄 카터가 러빗 부인으로 등장해 환호를 이끌어냈다.
지금은 명을 달리한 ‘해리 포터’의 스네이프 교수 앨런 릭먼도 터핀 판사역으로 나왔다. 하지만, 영화는 뮤지컬의 영상적 재연이라기보다 팀 버튼 방식으로 재해석된 이색적인 전개를 선보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 오히려 무대가 궁금해지고, 또 반대로 무대를 알면 영화의 파격이 더욱 알고 싶어지는 별스런 즐거움을 잉태해냈다고 평가할 만하다.
결코 대중적이라고 볼 순 없지만, 특별한 매력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뮤지컬 작품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뮤지컬은 젊은 여성 관객이 대부분이요, 솜사탕식 사랑 이야기뿐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특별하고 유별난 존재다. 뮤지컬에는 으레 드레스 입은 궁중 무도회가 등장하고, 왕가의 비리나 귀족들 연애담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단 한번 보고’ 이야기하자 시비라도 걸고 싶다. 꼭 공연장을 직접 찾아보길 진심으로 추천한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3-02-14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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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예술을 통한 삶의 치유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영혼의 미술관’을 통해 예술이 인간을 위한 도구일 수 있다면 무엇을 위함이며 또 어떤 구체적인 이득을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예술이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다스리기 위한 치유의 도구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술의 발달, 매체의 다원화 등으로 세상은 점점 더 얽히고 설키며 인간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데 반해 정서적 안정이나 연대를 도모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로 인해 육체 피로도는 경감되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 피로도는 증가했고, 따라서 신체의 건강 뿐만 아니라 정서적 건강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의미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예술을 통한 정서치유는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의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다. 다행히 예술치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디즈니는 그들의 창작능력을 환우들을 위해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디즈니 캐릭터를 활용한 환우 맞춤형 애니메이션 스토리를 제작한 것이다. 병원에서 MRI 시술을 하는 동안 보여줄 것을 목적으로 제작한 이 애니메이션은 특히 어린 환우들에게 효과적이다. 디즈니의 스토리텔링과 캐릭터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병원에서 느낄 수 있는 두려움,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시키고 긴장감을 낮춰주는 것이다.
또 의료로봇회사 오픈 바이오닉스와 디즈니가 협업한 ‘히어로 암(Hero Arm)’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생체 공학적 의수에 디즈니 캐릭터 디자인을 결합해 의수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거두고 사용하는 데 자신감을 가지며 심리적인 편안함을 갖게 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의수는 가볍지만 튼튼해 최대 17파운드까지 들어올릴 수 있고, 아이들의 취향에 맞춰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커버 디자인을 적용하였다. 디즈니는 환우들이 직면한 상황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예술을 활용하고 있다.
구찌 아틀루션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벽화를 그리고 있는 참가자
반면 럭셔리 패션브랜드 구찌는 메시지 전달에 초점을 맞춘 예술치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예술을 통해 아픔을 포용하고 통합하며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트 월 프로젝트’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다. 뉴욕, 런던, 밀라노, 홍콩, 상하이에서 완성된 아트 월은 상처받은 여성, 어린이를 위로하고 그들이 목소리를 대변한다. 각 도시에서 진행된 아트월은 각각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뉴욕에서는 어린이들의 미래와 꿈을, 밀라노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루는 식이다.
특히 2022년에는 뉴욕과 우간다의 어린이들이 함께 참여해 교통사고로 사망한 우간다 나쿠와데 지역의 학생을 추모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는 치유와 회복,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촉진하고 욕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구찌는 ‘아트 월 프로젝트’로 2020년 유엔난민기구가 수여하는 난민 통합을 위한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럭셔리 브랜드를 넘어 사회에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예술치유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예술치유허브’는 지역사회가 주체가 되어 운영하는 예술치유 센터다.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하고 위로받으며 재활까지 도모하는 공간을 목표로 하는 이 곳은 예술가 스튜디오, 갤러리, 다목적홀, 주민 창작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치유 프로그램을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것은 물론 예술 단체들의 창작활동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국내에서 기업들이 예술치유를 추구한 사례로는 올림푸스 한국과 현대해상이 있다.
올림푸스 한국이 운영하는 ‘아이엠카메라(I am Camera)’는 카메라를 통해 나를 표현할 기회를 얻고 정체성을 찾는 것이 목적인 사진 예술 교육 프로그램으로 오랜 병원 생활로 지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운영한다. 올림푸스 한국 사장 오카다 나오키는 “오랜 시간 병마와 싸워 온 환우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마음의 여유와 자존감을 되찾고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가 됐길 바란다.”며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언급한 바 있다.
현대해상 역시 체험형 모션 인터랙티브 놀이공간 “힐링 정글”을 서울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이대서울병원 내에서 운영하며 환우들이 가상동물과 소통하고 놀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바 있다.
환자를 만나고 있는 디즈니 영화출연자
위에 제시된 국내외 사례들은 기업과 예술이 결합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한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트(SDSN)'은 '2022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62위로 조사대상 149개국 중 중위권에 해당한다. 이는 GDP 10위권 내 국가들 중에서는 하위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들의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함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수치다. 예술 치유에 대한 관심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기업, 국가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질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수치이기도 하다.
예술치유의 핵심은 사회의 연대와 공감에 있다. 디즈니의 히어로암은 의수 사용자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연대를 도모하고, 구찌는 아트월을 통해 소외된 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공감을 유도한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상징과 메시지들이 개개인에게 강력하게 와닿기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과 기업 및 국가의 관심은 필수적이다. 사회를 포용하는 매개체로 예술이 인식되고 활용될 때 그 치유의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3-02-06 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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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직캠의 매력을 담아
‘직캠’이라는 단어, 많이 들어보셨나요? 직캠은 ‘직접 촬영한 동영상’을 줄인 말입니다. 우리가 캠코더나 휴대전화기를 이용해 촬영하는 모든 동영상은 사실 직캠인 셈인데 일반적으로 이 말은 한 개인이 가수의 공연 혹은 리허설 현장을 직접 촬영한 영상을 가리킵니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다채로운 화면을 담아내는 방송 화면과는 달리 직캠은 대부분 한 가수의 모습만 계속해서 담아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방송 화면에는 비춰지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고 흥미롭지요. 이 특별함은 구성원이 여러 명인 아이돌 그룹인 경우 더 커집니다.
사실, 개인이 이렇게 촬영한 직캠을 공유하는 것은 초상권 문제로 비화될 수 있지만 직캠 자체가 홍보에 도움이 되고 팬층을 더욱 두텁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삼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대중 음악 공연에서 직캠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요.
외국에서는 팬캠(Fancam)이라고 불리우는 이 직캠. 클래식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현재 클래식 음악 공연 도중에 한 개인이 허락없이 공연 장면이나 연주자를 촬영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청중이 자유롭게 촬영이 가능한 때는 공연 순서가 다 끝난 후 이루어지는 커튼콜 정도이지요. 비록 개인이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을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도 일부 클래식 음악 영상물에는 직캠의 매력을 가득 담은 기능이 존재합니다.
바로 멀티 앵글(Multi Angle) 기능인데 이 기능은 주로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물에 존재합니다. 이 기능을 활성화시키면,지휘자를 비추는 카메라, 일명 지휘자 카메라(Conductor Camera)를 통해 영상물 속 공연 내내 지휘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청중석에서 바라보는 지휘자의 모습이 아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바라보는 지휘자의 모습입니다.
지휘자 카메라의 한 예. 지휘자 리차드 판스(Richard Farnes)가 장장 15시간 가까이 걸리는 바그너의 니벨룽엔의 반지 전곡을 지휘하는 영상을 담았다.
(스크린샷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JWhRThHJGoE)
이 기능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지휘자가 각각의 악기군에 어떻게 사인을 주는지, 템포나 다이나믹이 변화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의도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지 등을 볼 수 있지요. 또 오케스트라 앙상블이 간혹 흐트러질 때나 실수가 있을 때 지휘자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지휘자의 표정을 계속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영상에서도 지휘자의 표정은 자주 잡히곤 하지만 그 표정이 다른 각도의 화면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중간중간 등장하는 것과 한 작품이 연주되는 내내 비춰지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요. 작품의 흐름에 따라 지휘자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통과 환희 같은 감정들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이것이 때로 그 어떤 화려한 앵글보다도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상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C. Abbado, 1933-2014)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들을 들 수 있습니다. 2001년 2월 로마에서 촬영된 영상물 중 교향곡 3, 5, 6, 7번에 지원되는 멀티 앵글을 통해 그의 지휘 모습을 잘 볼 수 있지요. 당시 한창 위암 투병 중이어서 부쩍 수척해진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깝지만 동시에 야윈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의 표정 변화는 감상자를 한껏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특히 교향곡 5번 중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순간과 교향곡 6번 5악장의 절정에서 보여지는 그의 표정은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요.
지휘자 카메라로 한 지휘자를 관찰한다고 할 때 어떤 지휘자의 모습이 가장 매력적일까요?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다를 것이지만, 한 지휘자의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언급되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카를로스 클라이버(C. Kleiber, 1930-2004)입니다. 보는 이를 빠져들게 하는 리드미컬한 그의 지휘 모습은 늘 회자되곤 하는데 그의 지휘 모습만을 담은 영상은 몇 개 존재합니다. 정식으로 출시된 영상물은 아니며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영상들은 모두 오페라를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담은 것인데, 1970년대 중반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공연 일부분과, 1994년 빈에서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 Strauss, 1864-1949)의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 공연 전체입니다.
대부분 이 영상들은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를 직접 볼 수 없는 곳에서도 지휘를 볼 수 있도록 지휘자 정면에서 촬영한 모니터 영상인데 화질도 음질도 좋지 않지만 더없이 귀중한 기록임에는 틀림없지요. 각각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 길고 복잡한 작품들을 클라이버가 성악진과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며 이끄는 모습은 감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한 영상에서는 장미의 기사를 지휘하는 도중 성악진의 큰 실수가 나오자 클라이버가 실망한 나머지 지휘하면서 얼굴을 감싸쥔다거나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동작을 취하는 등 일반적인 영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liFpkJyRAM).
여러 장점들을 갖춘 흥미로운 기능인 멀티 앵글. 무척이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기능을 갖춘 클래식 영상물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중음악 영상물에서는 ‘멀티’라는 명칭에 걸맞게 선택할 수 있는 앵글의 수도 더 많지만 클래식 음악 영상물에서는 그 명칭이 무색하게 지휘자 앵글 정도가 추가되는 것도 아쉽지요. 대중 음악에서는 공연을 생중계하며 멀티 앵글 기능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시스템이 클래식 음악 공연에도 도입되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귀중하고 흥미로운 기록들을 정식 영상물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합니다.
추천영상: 본문에서 언급한 클라이버의 영상입니다. 1994년 빈에서 공연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 중 3막입니다. 무대 화면과 클라이버의 지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어서 가치있는 영상이지요. 극의 절정을 이루는 유명한 3중창과 이어지는 듀엣 장면에서의 그의 지휘 모습은 감상자를 더 몰입하게 합니다. (47분 45초부터 시작). 화질과 음질이 최상은 아니어서 아쉬운데, 이 영상이 정식 영상물로 출시되면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9di4OoE7FE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3-02-06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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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불멸의 연인이 남긴 흔적을 찾아서, 뮤지컬 ‘베토벤'
△ 뮤지컬 베토벤 공연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 컴퍼니>
뮤지컬 ‘베토벤; Beethoven Secret(이하 뮤지컬 ‘베토벤’)’이 드디어 본격적인 개막 소식을 알렸다. 월드 프리미어 초연으로 한국에서 선보이는 뮤지컬 ‘베토벤’은 EMK뮤지컬컴퍼니의 다섯 번째 창작 뮤지컬이다. 제작과 개발 기간에만 총 7년이 소요될 만큼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작품으로, 뮤지컬 ‘모차르트!’ ‘레베카’ ‘엘리자벳’의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 및 오케스트레이션을 맡은 실베스터 르베이가 다시 한번 합작해 만들었다. 자연히 기대감은 더 커졌다.
그러나 위대한 음악가이자 다시 없을 천재, 영웅 같은 모습의 베토벤을 기대했다면 생각과는 다른 전개에 조금 놀랄 수도 있다. 창작자들은 작품 개발 초기부터 베토벤의 인간적인 모습과 고뇌,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 변화를 담고자 했고 그 중심에 사랑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40대의 베토벤이 음악가로서 최고로 명성을 날리던 때이자 청력 상실이라는 고통과 마주하게 된 시기인 1810년부터 1812년에 집중해 서사를 풀어간다.
△ 뮤지컬 베토벤 메인포스터 <사진제공 EMK뮤지컬 컴퍼니>
뮤지컬에 등장한 모든 이야기는 한 통의 편지로부터 출발했다. 평생 홀로 살았던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품에서 발견된 ‘불멸의 연인’을 향한 편지는 대상이 누군지 끊임없이 논의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작품은 신원 미상의 편지 속 주인공으로 추측된 여러 인물 가운데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안토니는 이미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끝내 그 사랑이 이뤄질 수는 없었겠지만,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불신의 늪에 빠져 살던 베토벤이 운명처럼 만난 안토니 덕분에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껍질과 제약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불멸의 음악들을 남겼으리라는 가정이다. 이런 서사를 완성하는 데는 물론 역사적 사료와 다양한 근거들도 어느 정도 기반이 됐다.
작곡 방향 역시 베토벤의 원곡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흘러갔다. 기악곡을 성악곡으로 바꾸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이는 관점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한계가 될 수도 있다. 뮤지컬 문법에 따라 장르 특유의 옷을 입고 새롭게 선보인 음악들 모두 어디선가 많이 들어봄 직한 멜로디가 나타난다. 먼저 베토벤이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며 노래한 ‘사랑은 잔인해’에는 ‘비창’으로 잘 알려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 Op.13’이 담겼다. 이 곡은 그가 직접 작품에 ‘Pathétique’라는 제목을 붙여 더욱 특별하게 여겨지는데, 이런 곡이 가진 의미를 뮤지컬에서도 주요하게 다룬 셈이다.
또 넓게 확장되는 무대를 중심으로 파격을 더한 1막 엔딩 넘버 ‘너의 운명’에서는 ‘교향곡 제5번 Op.67 운명’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이 장면은 이어질 2막을 향한 기대감을 드높인다. 아픈 과거와 현재를 뒤로한 채, 혼령들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되새겨야만 했던 음악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으면서도 그에게 단 하나 희망으로 떠오른 여인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이처럼 여러모로 실험적인 뮤지컬이지만 리프라이즈(reprise)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어렵다고 느껴지기 쉬운 클래식 음악의 장벽을 낮추면서 관객들이 더욱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시도가 새롭게 다가온다.
다만 일부 장면 연결의 자연스러움과 더불어 전반적인 서사에 개연성을 더할 필요는 있다.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에게도 아직 풀어가야 할 숙제가 남은 듯했다. 지난 1월 19일 뮤지컬 ‘베토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들은 영원불멸의 음악을 남긴 인물의 삶을 재조명하는 작품에 몸담고 있다는 점에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관객들이 더 크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더욱더 힘쓰겠다는 말을 공통으로 전했다. 전 세계 초연이기 때문에 오는 부담도 컸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반응을 훨씬 빠르게 접할 수 있어 더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선 배우들은 작품에 완벽히 몰입한 모습으로 큰 박수를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을 맡은 카이는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최고의 무대를 선보이며 놀라움을 더했다. 집중해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배우의 얼굴에 베토벤의 모습이 겹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대단하다. 과연 이런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그가 얼마나 치열한 고민과 해석을 이어갔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또 고전적인 성악 발성과 로큰롤 스타일 편곡이 들어간 넘버의 어울림도 매우 돋보였다.
안토니 브렌타노 역의 조정은 역시 가슴을 울리는 감성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극에 깊이를 더한다. 특히 그간 행복하지 않았던 삶을 애써 위로하고 다독이다 결국 아픈 현실을 인정하고 마는 ‘괜찮아 난’과 루드비히와 이별 후 시간이 흐른 뒤 다시금 삶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매직문(Magic Moon)’을 부를 때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 인물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두 배우가 이뤄낸 조화는 초연의 아쉬움마저 잠시 접어둘 만큼 뛰어났다.
뮤지컬 ‘베토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랑은 존재만으로도 특별하며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갖가지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끌 힘이 바로 이 ‘사랑’에 있다.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탐구하길 꿈꾸거나, 혁신에 가깝도록 재탄생한 베토벤의 이야기가 궁금한 당신에게 뮤지컬 ‘베토벤’을 권한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3-01-31 1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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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에 대하여
△아르페지오네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
작곡가 슈베르트는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작곡한지 얼마 되지 않아 1824년 11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Arpeggione Sonata, D. 821)'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르페지오'가 화음을 분산시켜 연주하는 주법이다 보니 아르페지오 연주가 강조된 작품으로 추측하기 쉬울 터. 하지만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빈의 악기 제작자 슈타우퍼(J.G. Stauper)가 개발한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를 위해 쓰여진 곡이다. 결국 악기의 이름이 작품 제목으로 사용된 것.
기타 첼로(Guitarre-Violoncell)로 불리기도 했던 아르페지오네는 기타의 프렛 지판에 첼로를 연주하는 듯 악기를 세워 여섯 현을 활로 마찰시켜 연주하는 찰현악기 형태로 두 악기의 속성이 결합된 악기다. 따뜻한 음색의 내성적인 성향의 악기로 음량이 크지 않은 대신 감미롭게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로 '사랑의 기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19세기 초는 혁신적인 악기 제작 붐이 일었던 시기였는데 당시에 아르페지오네를 닮은 비슷한 악기들이 여렷 존재했다고 한다.
화음 연주에 용이하고 폭넓은 음역대를 자랑했으며 독일 언론으로부터 "bezaubernd schön(매혹적으로 아름다운)"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이 악기는 현재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을까? 아쉽게도 19세기 초, 10년 남짓 잠시 주목을 받던 이 악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 철혈 재상으로 불렸던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회의 이후 시민들의 대외활동이 제약을 받으며 소규모의 살롱 연주회가 성행하던 시점에 작은 음량에 감미로운 사운드가 매력적인 아르페지오네는 꽤 괜찮은 선택지였을 터. 숙련된 비르투오소 빈센츠 슈스터(Vincenz Schuster)의 위촉으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가 작곡되었고 1824년 11월 초연 무대와 더불어 슈미트, 비른바흐와 같은 몇몇 작곡가들이 아르페지오네의 보급에 힘을 보태며 이 악기를 위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낭만시대에 접어들며 대규모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대세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음량이 풍부한 악기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결국 음량의 한계가 명확한 아르페지오네가 금새 설자리를 잃어버린 건 당연한 귀결.
사실 음악사에서 철저히 잊혀진 이 생소한 악기의 존재를 현대인에게 각인시킨 유일한 작품이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현재 첼로, 비올라의 주요 레퍼토리이자 슈베르트의 실내악 작품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이 곡이 첼로나 비올라의 음역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며 특히 첼로 연주에 있어서 고음역대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여간 연주하기 까다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뺴놓을 수 없는 낭만파 실내악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이유가 뭘까?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의 한계를 뛰어넘은 슈베르트의 천재적인 음악성 때문일 것이다.
이 곡을 작곡했던 당시, 27세의 슈베르트는 잘 알려진 대로 성병에 감염되어 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극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시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란다"라며 깊은 절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슬픔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 사람들을 가장 기쁘게 한다"라는 덧붙임과 함께. 현실의 비애가 묻어나는 서정적인 선율과 솟아오르는 희망감이 어우러진 이 작품에서 슬픔을 재료 삼아 천재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킨 슈베르트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슈베르트 사후 43년이나 지난 1871년 출판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첼로, 비올라 이외에도 수많은 악기로 편곡되며 슈베르트의 진가를 입증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고티에르 카푸송은 "이 곡에서 느껴지는 연약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다"라고 했으며 이 곡의 음반으로 찬사를 받은 바 있는 비올리스트 앙투안 타메스티는 "쇼를 위한 음악이 아닌 내면적인 음악"이라고 평했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주시간은 약 20분 정도로 짧은 편이라 한번에 세 악장을 연달아 들어보길 권한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의 주제를 닮은 서정적 선율과 희망찬 2주제의 대비가 아름다운 1악장과 슈베르트의 장기를 잘 살린 가곡 풍의 2악장 그리고 론도 형식의 3악장은 비엔나 풍의 선율과 재기 발랄한 헝가리 민속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지루할 틈이 없다. 시대 속에 잊힌 악기 아르페지오네. 하지만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는 사실.
*추천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A1Y9-ajhMGw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3-01-26 1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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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절반의 성공 ‘영웅’
지난 연말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감독 제임스 카메론, 2022)의 스크린 점령에도 불구하고 해를 넘기면서까지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는 한국영화가 있다. ‘영웅’(감독 윤제균, 2022)은 2009년 초연된 동명의 창작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으로, 개봉 안중근 의사의 최후 1년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들이 크게 성공을 거둔바 있는 만큼 한국에서도 뮤지컬 영화 제작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던 상황에서 ‘영웅’은 일종에 시험대에 오른 작품이다. ‘인생은 아름다워’(감독 최국희, 2022)가 본래 인기 있던 대중음악들을 삽입한 일명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면 ‘영웅’은 이 각본만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공연으로 무대 규모면에서도 영화의 블록버스터급이라 할 수 있으며, 장중한 음악과 화려한 안무로 10년 넘게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 ‘영웅’에는 오상준 작곡가가 작곡한 31곡의 넘버 중 16곡이 그대로 담겼다. 영화 초반부의 ‘단지동맹’은 비장하고, 조마리아 여사가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도 심금을 울리지만 안중근 의사가 ‘누가 죄인인가’를 열창하는 부분은 공연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불리한 재판 중에도 당당하게 임하는 도마의 모습을 강조해 연출되었다. ‘누가 죄인인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하나하나가 정확히 관객들에게 박히도록 한 곡 안에서 박자의 변화를 많이 준 곡으로, 뮤지컬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넘버로 꼽힌다.
사실, 연출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아쉽다. 신과 신 사이가 잘 붙지 않는 부분이 많고, 노래 장면에서 카메라 워크도 진부하며, 편집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검증된 뮤지컬을 영상화시켜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과 뮤지컬 장르에 적합한 배우들을 기용해 음악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배고픔을 다 달래주지 못한 첫 술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다음 뮤지컬 영화를 기다려 본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기다림, ‘3000년의 기다림’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알라딘, 아니 지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현실의 고달픔 때문일 것이다. 알라딘을 처음 접했던 유년기에는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던 일상의 무게, 그저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의 버거움이 어깨를 짓눌러올 때 우리는 간절히 지니를 불러본다. 부귀영화를 다 누렸을 법한 노장 감독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수식어가 잘 들어맞는 ‘3000년의 기다림’(2022)은 팔순이 멀지 않은 할리우드의 거장, 조지 밀러 감독이 강렬한 SF 액션 판타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처음 내놓은 신작이다. 가족영화인 ‘꼬마 돼지 베이브’나 ‘해피 피트’ 시리즈도 연출한 바 있으니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지금, 램프 속의 지니를 불러냈을까.
‘알리테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통달한 서사학자다. 그녀는 새롭고 강렬한 이야기를 갈구하면서도 이미 평생을 함께 한 수많은 이야기들에 지쳐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녀는 이스탄불에 출장을 갔다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유리병 하나를 사게 되는데, 그 안에 갇혀있던 ‘진’이 봉인해제 되고 만다. 그녀가 소원을 빌어야만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진에게 알리테아는 그간의 사연을 묻고, 진은 자신이 3000년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여기서 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허구다.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은 성경에 등장하고, 무스타파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무라드와 이브라힘 형제는 오스만 제국 때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즉, 진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판타지를 가미해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창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삶의 낙으로 삼는 수용자(독자, 관객 혹은 시청자)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다. 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모두 현재에 충실하라는 교훈으로 끝난다며 소원 빌기를 거부하던 알리테아 또한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의 카리스마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진의 사랑 이야기는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순애보 보다 강하고 깊어서 알리테아는 마침내 진심으로 소원을 빈다. 진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진은 그녀가 평생 연구해온 이야기의 원천이자 이야기 자체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알리테아는 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거대한 서사의 일부이자 주체가 된다.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콘텐츠를 순식간에 안방에 들여다 놓을 수 있는 시대지만 신선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다. 평생 온갖 이야기를 상상해온 노장 감독에게 ‘3000년의 기다림’은 어쩌면 그 욕구의 절정에서 기획된 작품일지 모르겠다. 진과 알리테아의 사랑은 연인간의 로맨스일 뿐 아니라 매혹적인 콘텐츠에 대한 창작가와 수용자의 열정으로도 읽힌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블록버스터 또한 누군가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3-01-20 1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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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
매화를 노래하다
동지를 지나며 해가 점점 길어지고 새해도 밝았지만 올겨울은 여전히, 유독 춥다. 응달이나 산비탈의 눈도 좀처럼 녹지 않고, 웅크린 사람들의 어깨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칼바람 속에서 매화가 얄팍한 꽃받침 한 겹 여미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향기를 이루는 인내와 투지의 꽃. 바야흐로 매화의 계절이 오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람 임포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에 초가를 지어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은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삶을 살았다 전해진다. 집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과 사슴을 기르며, 꽃이 피면 시를 짓고 사슴에게 술심부름을 시켰다는 은둔거사. 임포의 삶을 동경하여 그를 소재로 그린 ‘매화초옥도’, ‘매화서옥도’ 등이 조선에서도 유행하였다고 한다.
△ 전기, 매화초옥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용미의 시 ‘나의 매화초옥도’는 그중, 전기(田琦, 1825~1854)가 그린 ‘매화초옥도’를 묘사하고 있다. ‘천 리 밖 은은하게 번지는 서늘한 향을 듣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라 읊은 시인은 그림을 보며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를 함께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초옥의 창가에 피리를 불며 앉아 있는 녹의(綠衣)의 선비는 오경석이다. 거문고를 둘러메고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오는 붉은 옷의 사내는 전기, 자신일 테다. 눈 덮인 길을 걸어 산속에 있는 벗을 만나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찾아가는 이나 기다리는 이, 누구의 마음으로 보아도 만개한 매화만큼 환해지는 풍경이다.
퇴계 이황 역시 매화를 지극히 아꼈음을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매화를 소재로 한 시만 100여 편이 남아 있는데,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그중 94편을 고르고 옮겨 다듬고 그림을 더해 낸 책이다. 십여 년 전 퇴계학자 김기현과 시인 안도현, 화가 송필용이 의기투합하여 엮었다. 퇴계 선생의 시에서 매화는 그의 시름을 덜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벗으로 묘사되어 있다.
옛 사람들의 글과 그림에서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꽃이지만, 노래 ‘매화타령’에서는 그 화자가 여인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 더야 어허야 에-디여라 사랑도 매화로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도 독수공방이 상사난(相思難)이란다
어저께 밤에도 나가 자고 그저께 밤에도 구경 가고 무삼 염치로 삼승 버선에 볼받아 달람나
나 돌아감네 에에헤 나 돌아감네 떨떨거리고 나 돌아가노라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 더야 어허야 에-두견이 울어라 사랑도 매화로다
- 경기 민요 ‘매화타령’ 중
한 여인이 홀로 앉아 버선을 기우고 있다. 노란 봄볕이 환한 마당에는 매화 꽃잎이 난분분하다. 드문드문 고개를 들어 꽃 구경을 하자니 심화가 인다. 어쩌면 방안에는 어제도 그제도, 밤마다 밖으로 나돈 인사가 쿨쿨 자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확 나가버릴까 보다’ 하는 으름장도 혼잣말로 놓아본다. 후렴구는 마치 ‘사랑도 한때로다’라고 하는 것 같다.
경기 민요 명창들뿐 아니라 하춘화나 김세레나 등 대중가수들이 부른 ‘매화타령’의 음원도 여러 개다. 두 번째달이 현대적으로 편곡한 ‘매화타령’은 반주 악기를 적게 편성해 송소희의 노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매화야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를 온다
옛 피었던 가지마다 피엄즉도 허다마는
춘설이 하 분분허니 필지 말지 허노매라
- 가사 '매화가' 중
정가로 분류되는 십이가사 중에도 ‘매화타령’이 있다. ‘매화가’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처음 세 구절을 빼고는 매화와 무관한 노랫말로 이어지지만 이 역시 애타는 연심과 시름을 내용으로 한다. 국가무형문화재 가사 보유자 이준아가 2021년 발매한 「12가사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아우름 소리」에는 각각 다르게 편곡한 ‘매화가’를 이윤진과 박진희가 불러 담았다.
퇴계 선생의 ‘재방도산매’ 4절 마지막 두 구를 김기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只今人境雖非舊 지금인경수비구 / 那忍風流墮杳然 나인풍류타묘연
오늘날 세상은 옛날 같지 않지만 / 그러한 풍류를 어찌 차마 버릴 수 있을까
계절을 완상하여 글로 그림으로 노래로 남기고, 그와 더불어 시름을 달랬던 조상들의 풍류가 아득하고도 향기롭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3-01-13 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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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대한사람 누구라도 마음 울컥할 감동을 담아내다_뮤지컬 영웅
△ 공연장면 1 그날을 기억하라
2023년 시작부터 무대와 스크린을 통해 같은 뮤지컬이 막을 올려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웅’이다.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울컥한 감동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향반 지주 출신으로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유년시절부터 개화된 사고를 지니며 자랐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교육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력도 있다. 1909년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당시 의사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하얼빈 중앙역을 찾아가면 안중근 의사에 관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그가 남긴 편지와 서책들, 여러 자료들을 지나면 중앙역 내부가 보이는 창문에 도착한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1번 플랫폼 바닥에는 안중근 의사나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 서 있었던 장소를 기록한 동그라미나 세모 같은 표식들이 그려져 있다. 묵직한 현실감으로 느껴지는 엄숙한 순간이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무덤은 아직 발견조차 못했다. 형장의 이슬로 생을 다한 그의 시신을 일제는 연골을 제거해 무릎을 꿇린 채 관에 담아, 후세 사람들이 찾아볼 수 없게 훼손시키고 아무도 모르게 감춰버렸다는 후문만 무성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꿈꾸던 독립된 조국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그릇된 역사관을 지닌 이들의 존재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 서글프고 안타깝다.
뮤지컬은 2010년 안중근 의사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창작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명성황후의 시녀였던 설희 캐릭터를 상상해 추가하는 등 제작사인 극단 에이콤의 흥행작 ‘명성황후’와 여러모로 흡사해 혹자는 ‘명성황후’ 후속편 성격을 지닌 것 같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형 무대를 화려한 비주얼로 포장하고, 보수적인 국가관과 애국심을 마케팅에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두 작품 간에는 분명 유사점이 많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는 국가 정체성이 사실 선조들의 피와 희생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절로 숙연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총성이 무대를 가를 때면 객석에서 절로 박수가 터져 나오는 분명한 이유다.
역사속 기록을 그대로 담아내려 했던 제작진의 의도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매력이다. 역사적인 포살의 순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모두 7발의 사격을 가했다. 이중 4발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나머지는 혹시라도 다른 이를 오인했을 경우를 대비해 주변 인물을 겨냥한 것이었다. 무대에서는 실제로 일곱 발의 총성이 울리는데, 전후사정을 알고 보면 마음으로부터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 공연장면 2 저격 현장
뮤지컬 ‘영웅’이 지닌 첫 번째 미덕은 우선 음악에 기인한다. 몇 번만 듣다보면 어느새 입가에 맴도는 선율을 느낄 만큼 매력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결심하는 1막 후반부의 음악들은 그야말로 중독성이 강하다. 뿔 나팔 소리나 규칙적인 템포의 박자감은 마치 마카로니 웨스턴 스타일의 미국 영화음악을 연상케도 하는데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절묘한 조화마저 느껴진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살짝 떠오르는 선율과 음악 스타일이다.
비주얼적인 완성도는 이 작품이 지닌 또 다른 매력이다. 도시적 이미지나 자연의 풍경을 적절히 활용해 공간감각을 연출해낸다. 파쿠르(Parcour)를 활용한 역동적인 안무와 무대 구성, 철골 구조물을 오르내리며 전개되는 입체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극 전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도 담아낸다. 일반 대중들에겐 야마카시라는 파쿠르 팀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움직임은 '투사(鬪士)를 위한 코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는 군대에서 장애물 통과 훈련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인 '파쿠르 뒤 콩바탕(parcours du combattant)'에서 유래된 것인데, 점차 야외 운동 프로그램으로까지 확장된 개념이다. 무대에서 만나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기민하고 민첩해 보이는 이유다. 파쿠르의 무대적 적용은 특히 영상을 적절히 활용한 공간 창출과 어우러져 꽤나 만족스러운 시각적 체험을 잉태해낸다. 덕분에 이들이 형상화하는 장면들, 예를 들어 일본 순사와 숨바꼭질을 벌이는 독립투사들의 추격씬 등은 창작 뮤지컬에서 좀체 만나기 힘들던 ‘보는’ 재미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특히 백미를 이루는 기차 세트의 활용은 잔상이 오래 남는 이 작품의 백미다. 영상으로 표현되던 달리는 기차가 삽시간에 세트로 변환되며 객석의 탄성을 자아낸다. 무대에 실물 크기의 기차가 실제 등장하는 것은 다른 유명 무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드문 사례다. 우리나라 공연 관계자의 노하우와 창의력이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목격할 수 있어 흥미롭다.
△공연장면3 추격
뮤지컬 ‘영웅’은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 막을 올리는 기념비적 성과도 이뤄냈다. 이제는 비행기로 두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서슬 퍼런 일제 시절, 몇 날 며칠 동안 동토(凍土)를 횡단하는 열차를 타고 그곳에 다다랐을 독립투사들의 마음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노랫말처럼, “타국의 태양, 광활한 대지”에서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고 하늘에 맹세”했던 선열들의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무대로 그리고 영화로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이들에겐 교육적인 목적에서라도 꼭 보여주고 싶은 창작 뮤지컬이다.
영화와 무대의 흥행을 저울질하는 언론들도 있다. 솔직히 무의미한 비교다. 1950년대 뮤지컬 영화들과 달리 요즘 만들어지는 영상용 콘텐츠는 무대와 ‘효과적인 거리두기’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를 본 관객들은 영화의 ‘파격’이 궁금해 상영관을 찾고, 영화의 리얼리즘을 즐긴 사람들은 원작 무대의 ‘진정성’을 느껴보려 공연장을 찾는다. ‘시카고’가 그랬고, ‘맘마미아!’나 ‘레 미제라블’도 뮤지컬 영화가 흥행할수록 공연의 관객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 창작 뮤지컬 ‘영웅’은 어떤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게 될까. 궁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려본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3-01-06 1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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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마우리치오 카텔란, 에드워드 하퍼, 김환기 회고전 등 주목
흑묘(黑卯年) 검은 토끼해, 영특한 토끼의 기운처럼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문화예술계를 잇는 온라인과 기술집약적 이슈들은 대거 확대될 예정이다. 영화 아바타의 성공이 예견하듯 메타버스 속 가상공간에서의 경험이 확장되고, 부동산 경기 하락과 금리 인하로 인해 ‘투자중심의 문화’에서 ‘향유중심의 문화’로 시대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메타버스 전시공간의 확장에 대해 논의하고, 새롭게 전개될 국내외 전시들을 다양하게 진단해보고자 한다.
메타버스 전시의 확장, 가상현실 속 아바타와의 만남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라이브 방송과 메타버스를 통해 집안에서 즐기는 새로운 문화가 확산되며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메타버스란 웹상에서 아바타를 이용하여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하는 따위처럼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관련 생태계의 패러다임의 확장을 예고하는 가운데, 메타버스를 활용한 미술 플랫폼들을 늘어났다. 대표적인 플랫폼이 제페토는 증강현실(AR)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사용자를 닮은 캐릭터, 아바타를 만드는 서비스다. 또 SNS 기능도 접목돼 있어 이용자끼리 여러 가상공간에서 문자·음성·이모티콘 등으로 교류할 수 있으며, 가상세계 안에서 이용자들이 모여 게임을 하거나 춤을 추는 등 다양한 활동도 즐길 수 있다.
△ CAD 도면 제작으로 모듈화된 전시장 공간을 기획한 실감형 스마트 갤러리 플랫폼 ‘MOVE K’
최근 다양한 브랜드들과 협업하여 브랜드 세계를 만들어 내는 등의 제휴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로블록스 전시도 늘고 있다. 로블록스는 미국의 게임 제작업체로 높은 자유도를 기반으로 다양한 플레이 패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용자들은 레고와 유사하게 생긴 아바타로 자신의 모습을 꾸밀 수 있고, 이 아바타를 통해 다른 사용자와 교류할 수 있다. 그밖에 ‘MOVE K’는 실감형 스마트 갤러리 플랫폼으로 CAD 도면 제작으로 모듈화된 전시장 공간을 기획, 이를 3DS MAX를 이용해 구현한다. 각 전시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기법들을 유동적으로 추가해, 기존 온라인 전시와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이며, 플랫폼은 모바일, PC, 태블릿 등 다양한 디바이스에서 접근할 수 있는 스트리밍 방식으로 서비스될 예정이다. 믐(MEUM)은 실시간 온라인 3D 전시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로, 2D 작품 사진에서 조각, 오브제와 같은 3D 작품도 구현할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전시장에는 지인을 초대하여 실시간 대화를 나누거나 제스처를 통한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 또한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믐 서비스 내에서 판매하기 원하면, 심사를 통해 스토어에 등록할 수 있다. ‘걸어본'은 실제공간을 촬영해 구축한 디지털 공간 제공으로 웹브라우저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전시 관람이 가능하다. 카카오톡, 이메일, SNS 등으로도 전시회를 쉽게 공유할 수 있다. 가상전시 제작을 의뢰하면 걸어본이 제공하는 전시공간을 온라인으로 둘러보며 선택하면 된다. 전시 작품의 이미지, 영상, 텍스트, URL링크, 도슨트 오디오 등을 첨부해 초안을 만들어낸다. 이후 의뢰인에게 송부해 수정사항과 개선사항을 피드백 한 후 웹사이트를 완성하는 방식이다.
2023년 놓쳐선 안 될 해외 거장들의 전시
한국 미술시장이 거래총액 1조원을 가뿐히 넘긴 2022년이 ‘아트페어와 갤러리의 해’였다면 2023년은 ‘비엔날레와 미술관의 해’가 될 전망이다. 경기침체로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시장 위축은 불가피하다. 반면 한 번 맛본 예술 경험의 속성상 미술과 등 돌리고 살기는 어렵다. 안목을 충족시킬 새로운 예술을 찾아 대형 비엔날레와 귀한 미술관 전시를 찾는 발길은 더욱 분주해질 듯하다. 이에 부합하듯 에드워드 호퍼부터 김환기까지 명성 자자한 거장전과 다채로운 비엔날레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미술계의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10년만의 회고전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1월31일부터 열린다. 이미지는 '운석맞고 쓰러진 교황(2001)’
올해 미술전시의 화려한 포문을 열 주인공은 ‘미술계의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운석맞고 쓰러진 교황(2001)을 선보이는가 하면, 작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2011)이 열렸을 때 돌연 은퇴를 선언한 괴짜다. 황금으로 만든 변기 ‘아메리카’(2016)가 도난당하고,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둔 작품 ‘코메디언’(2019)을 누군가가 먹어버리는 해프닝으로 더 유명해진 문제아이기도 하다. 삼성문화재단의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은 1월 31일부터 카텔란의 국내 첫 개인전이자, 2011년 구겐하임 회고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4월 미국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한다. 이미지는 '심야의 인물들’
4월에는 20세기 미국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한다. 지난해 10월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시작한 호퍼 개인전의 연장선상에 놓인 전시다. 실제로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이 국제적인 작가들의 전시를 자주 선보이는데 지난주에 선보인 키키스미스 전시도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2023년 눈여겨볼 국내 작가의 전시와 비엔날레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은 1여 년의 리노베이션을 끝내고 4월 김환기 회고전으로 재개관 한다. 작가의 40년 예술 여정을 되짚으며 90여 점을 선보일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건희컬렉션으로 기증된 ‘여인들과 항아리’, 리움 소장품 ‘영원의 노래’를 비롯해 한국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우주(완벽한 대칭으로 감동을 준 작품 유니버스)’ 등 김환기의 명작을 한 자리에 모두 선보일 예정이다. ‘단색화’에 쏠린 관심을 이어갈 한국미술의 거장급 작가군으로 기대를 모아온 ‘한국의 1960~70년대 실험미술’ 전시가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막 올린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순회전으로 기획돼 이미 지난해 열렸어야 할 전시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연됐고, 7월까지 서울에서 열린 후 9월에 뉴욕으로 옮겨간다. 이승택·김구림·정강자·이건용·이강소·성능경 등 실험미술 대표작가들의 100여점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중섭·박수근과 함께 한국적 정서를 품은 3대 국민화가로 꼽히는 장욱진의 회고전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6월에 개막한다.
△ 3대 국민화가로 꼽히는 장욱진의 회고전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6월에 개막. 이미지는 '길위의 자화상’
아시아 최고의 비엔날레로 자리잡은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4월 7일부터 94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한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수석큐레이터 이숙경 예술감독이 진두지휘하는 올해 전시의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이다. 전 지구적 위기 앞에 예술이 이 어떤 타협과 화합의 계기를 만들지 30개국 80여 팀 작가들과 머리를 맞댄다. 공예의 가치에 집중한 청주공예비엔날레는 9월1일부터 45일간 충북 청주시 문화제조창 일원에서 열린다.
△ 상반기 최대 행사로 치러질 광주비엔날레 2023의 주제어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강재영 예술감독이 ‘사물의 지도-공예, 세상을 잇고 만들고 사랑하라’는 주제로 20여개국 80여 작가가 참여하는 본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 올 가을 치러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포스터
9월에는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지에서 열린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도 문화예술계는 더욱 활성화 될 전망이다. 정치와 경제의 격변 속에서 문화가 시대를 선도하는 ‘스마트 컬쳐 리딩’의 시대, 아티스트들의 안테나가 시대변화를 다른 분야보다 더 빨리 예고하고 있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3-01-06 1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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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기업 예술 후원의 새로운 방향 모색
국내에도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후원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경우 코로나 시기로 공연계가 불황에 힘겨워하고 있던 시기에도 비대면 공연을 계속 진행하는 등 클래식계를 꾸준히 지원해왔고, 롯데그룹은 국내 공연장 최초로 ‘빈야드’식 공연장을 건설해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재계의 리더들은 음악회를 주최하거나 공연장을 창설하고, 매년 행사를 진행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클래식계를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이는 음악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경영에 관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술 인재 양성이다.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것은 음악계의 발전은 물론 기업 문화의 발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다.
금호아시아나의 창업주 박인천이 출자해 설립한 금호문화재단은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장학금 수여는 물론 명품 고악기를 무상으로 대여하고 연주자들에게 항공권을 지원하기도 한다.
특히 ‘금호 영재’ 시리즈는 45년 간 1000여 명의 음악영재를 발굴한 국내 음악 영재들의 등용문이다. ‘금호 영재 콘서트’에서는 만 14세 이하의 음악 영재들을 발굴해내는가 하면, ‘금호 영아티스트 콘서트’는 만 15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자리로 실내악단까지 구성해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지아, 플루티스트 조성현 등도 금호가 발굴해낸 인재들이다.
반면 CJ 문화재단의 경우 대중음악 분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CJ음악장학사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중음악 분야 인재를 지원하는 글로벌 장학사업으로 2022년에도 10명의 인재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했다.
또, 튠업(TUNE UP), 스테이지업(STAGE UP), 스토리업(STORY UP) 등으로 영역을 세분화해 젊은 창작자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튠업’은 인디 뮤지션들의 음반 제작 및 홍보 마케팅을 지원하고, ‘스테이지업’에서는 뮤지컬 창작자들이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재정 및 공간 지원 사업을 진행한다. ‘스토리업’은 단편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신인 영화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그 밖에 유재하 음악경연 대회를 개최하고 미국 버클리 음대 내 보스턴 컨서바토리와 협업해 우리나라 문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국내 기업들이 인재 개인을 양성하는 장학사업이나 콘서트 홀 등의 공간지원에 좀 더 적극적이라면 해외 기업들이 인재를 지원하는 방식은 조금 다른 결을 띤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업체 타코벨은 ‘Feed the Beat’ 캠페인을 통해 신인 음악가들을 지원한다. 이 캠페인에서는 독특하게 타코벨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프트카드를 후원하는데 매년 200여 팀이 이 기프트카드로 투어 중 식사를 해결한다. 타코벨은 투어를 다니는 음악가들을 선정해 500달러 상당의 타코벨 상품권을 제공하는 대신 그들은 공연장에서 타코벨을 언급해주는 식이다. 타코벨의 입장에서는 식사를 무료로 지원해주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홍보효과까지 얻어가는 셈이다. 관객들에게 “타코벨 음식을 먹었다”고 언급해줌으로써 그들이 사랑하는 음악가를 지원했음을 각인시키는 것은 물론 기업에 대한 호감도도 상승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다. 이는 단순 음악인재 양성을 넘어서 음악가와 기업이 상생해나가는 새로운 방식의 지원책이다.
기타를 전문으로 다루는 악기 브랜드 깁슨은 예술 교육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인재 양성보다 그들의 브랜드를 사랑하는 대중을 향한 지원사업을 진행한다.
내셔널 공립학교에 깁슨 기타와 앰프, 기타줄, 기타 스탠드 등 음악수업에 필요한 물품을 직접 지원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깁슨의 악기를 사용할 기회를 늘린다. 브랜드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호가 성인 이후에도 이어져 잠재적 충성고객을 확보한다는 긍정적 측면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깁슨 세대 그룹이라는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신인 기타리스트 및 작곡가들이 유명 기타리스트들에게 일대일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앞서 언급된 해외 기업들 사례들은 단순 지원을 넘어서 음악과 브랜드의 연결점을 쌓아가는 방향으로 지원사업을 진행한다. 이는 브랜드에 대한 선호를 유도하고 긍정적 이미지를 단단하게 구축해나가는 상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DHL은 신인 음악가 발굴 및 육성 프로젝트 ‘FAST-TRACK’을 진행하고 있다. ‘내일의 음악을 오늘 배송합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유니버설 그룹(UMG)과 협업해 신인뮤지션을 발굴하고, DHL의 글로벌 네트워킹을 활용해 그들을 전 세계에 소개해 글로벌 스타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DHL의 프로젝트는 브랜드가 가진 상징성을 음악에 적용시킨 사례라 볼 수 있다. 슬로건 자체에 DHL의 정체성인 ‘배송’을 포함시켜 음악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함과 동시에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DHL의 강점을 새로운 매체와 연결시켜 브랜드의 새로운 지향점을 고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브랜드의 특수한 이미지가 강해 이미지 개척에 한계를 느끼는 브랜드들이 벤치마킹할 수 있는 사례다.
소개한 사례들을 통해 기업이 예술을 지원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효과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기업이 예술을 후원하는 목적에는 기본적으로 브랜드 이미지 쇄신 혹은 긍정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신인 인재 양성은 출발선에 선 예술가들에게 탄탄한 재정적 토대를 마련해 줘그들의 음악적 역량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기업의 브랜딩에 미치는 직접적인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앞선 국내 기업의 예술 후원은 기업의 이미지 쇄신보다는 인재 양성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해외 기업의 사례는 보다 상생의 가치를 생각하고 지원을 펼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 예술 지원이 꼭 기업의 브랜딩과 연관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업의 예술지원이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업의 직접적인 이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 문화예술의 성장과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문화예술지원에 대해 생각해볼 때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2-12-30 1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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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협주곡과 카덴차, 서로 다른 개성의 공존
1809년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은 그의 다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시킵니다. ‘황제’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지난 칼럼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카덴차의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베토벤이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카덴차와 당시에 통상적으로 카덴차가 위치하는 곳에 카덴차 대신 써놓은 악구 모두 베토벤이 직접 작곡함으로써, 연주자에 의한 자유로운 변형의 가능성을 없애버렸기 때문이지요. 카덴차가 본래 독주자가 홀로 작품의 주제를 즉흥적으로 변주해가며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부분임을 생각한다면, 황제 협주곡에서 베토벤이 카덴차를 다루는 방식은 그 성격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황제 협주곡이 완성되었던 1809년 즈음에, 베토벤은 다수의 카덴차들을 작곡합니다. 이 카덴차들은 그가 이전에 지었던 피아노 협주곡들(1-4번)과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작품(Op. 61a), 그리고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피아노 협주곡 20번(KV 466)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악보들은 그의 제자이자 중요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Rudolf Erzherzog von Österreich, 1788-1831)의 음악소장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 존재한 베토벤의 카덴차는 총 17개로, 그 중 대부분이 1809년경 작곡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베토벤이 상당한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자신의 제자의 부탁으로 지은 카덴차들이었지요. 1836년에 출판된 모차르트의 협주곡에 쓴 카덴차와는 달리, 베토벤이 자신의 협주곡들에 쓴 카덴차들은 그가 사망하고 나서도 한참 후인 1864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때에는 17개의 카덴차들 중 12개가 출판되었는데, 모든 카덴차들이 출판된 때는 1967년에 이르러서였지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4번에서 그가 쓴 카덴차들이 오늘날 연주자들에 의해 가장 빈번하게 선택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이 작품들을 창조해냈고 가장 잘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작곡가 자신이 만든 카덴차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지요. 이와 같은 생각은 역시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모차르트가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차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많은 연주자들이 선택하는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카덴차. 그런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아쉬움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그만큼 연주자 개인의 카덴차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그들만의 개성이 줄어든다는 데에 그 아쉬움이 있습니다. 같은 베토벤의 카덴차를 연주하더라도, 연주자 A와 B의 연주는 당연히 다르고, 이 다름을 비교하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카덴차 자체가 다르다면, 그 흥미는 더 커질 수 있겠지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연주자만의 개성 넘치는 카덴차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작곡가가 지은 카덴차가 그 협주곡에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되는 것이 아닐까?’ 이 지점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베토벤이 지은 피아노 협주곡 1-4번의 카덴차에 대한 평가입니다. 대부분 1809년경 지어진 이 카덴차들은, 각각의 협주곡이 완성된 시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1806년에 완성된 4번 협주곡과는 3년여의 차이를, 1801년에 최종 완성된 1번과 2번 협주곡과는 8년여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요. 1801년에 최종 버전이 탄생했다지만, 이 두 협주곡들의 작곡이 1790년대에 사실상 거의 끝났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8년이라는 차이는 조금 더 늘어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 카덴차들은 두말할 필요없이 훌륭하지만, 그 스타일이 원래의 협주곡들과 차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토벤 연주로 명성이 높은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W. Kempff, 1895-1991)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4번을 연주하면서 베토벤의 카덴차가 아닌, 자신이 직접 작곡한 카덴차를 사용했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시간 차이를 두고 완성된 협주곡과 카덴차 사이의 스타일 차이는 악기의 차이에서도 기인합니다. 카덴차를 작곡하던 당시, 베토벤은 새로운 피아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를 만드는 회사마다 소리의 차이가 상당했으며 피아노의 성능이 빠르게 변화하던 베토벤 당대에 ‘새로운 피아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안에 담겨진 변화가 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베토벤이 카덴차들을 작곡하면서 당연히 새로운 피아노의 성능을 잘 살리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카덴차에서의 음폭이 일부 협주곡에서보다 더 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베토벤의 새로운 피아노가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것보다 더 넓은 음폭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베토벤이 작곡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KV 466) 1악장 카덴차, 첫 페이지
(출처: Beethovenhaus Bonn 홈페이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카덴차에서 보여지는 스타일의 차이가 그의 카덴차의 가치를 다소 떨어뜨릴까요?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809년 당시의 베토벤의 스타일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으니까요.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나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이 협주곡을 위한 베토벤의 유명한 카덴차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토벤만의 개성은 모차르트의 이 협주곡이 갖고 있는 극적인 면을 더욱 부각시켰지요.
작곡가가 비워둔 카덴차의 매력은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많은 연주자들이 예전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작곡가 자신의, 혹은 크라이슬러(F. Kreisler, 1875-1962)나 요아힘(J. Joachim, 1831-1907)처럼 유명한 연주자의 카덴차를 연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적지 않은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카덴차를 선택함으로서 그 표현의 다양성을 더하였지요. 때로는 작곡 당시의 연주 양식을 충분히 살리면서, 또 때로는 현대적인 색채를 가미하며 협주곡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작품 안에서 서로 다른 개성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협주곡 안의 카덴차. 익숙한 협주곡의 울림 속에 예상치 못한 특별한 흥미를 더해줄 개성 넘치는 카덴차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탄생되기를 바래봅니다.
추천영상: 베토벤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하였습니다. 이 편곡 작품은 현재 자주 연주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곡에는 존재하지 않는 베토벤의 카덴차가 이 편곡 작품에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지요. 독주 피아노에 팀파니를 포함시킨 1악장 카덴차의 독창적인 면은 특별한데, 적지 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카덴차를 바이올린으로 편곡해서 연주했습니다. 소개하는 영상은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의 연주입니다. 코파친스카야는 베토벤의 카덴차에 본인의 개성을 거침없이 녹여냈는데, 원래의 팀파니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더하였지요. 강약의 폭을 확대시킨 매우 강렬한 느낌의 이 카덴차 연주는 베토벤의 스타일과는 상당히 이질적이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현대의 연주자만이 선보일 수 있는 카덴차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지요. (카덴차는 19분49초부터 등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r9KmgDFwMc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2-12-30 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