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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경연(競演), 겨루어 넓히다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20년 전쯤 신춘문예는 문학청년들이 앓는 늦가을의 열병 같은 것이었다. 공신력과 권위를 갖춘, 흔치 않은 등단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등단이 장밋빛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업 작가를 꿈꾸지 않았음에도 그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괜히 들뜬 마음으로 마감에 쫓기며 스산한 계절을 보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도전의 기회가 매년 주어진다는 것이 안도와 설렘을 동시에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새해 벽두부터 대부분의 응모자와 함께 쓰라린 패배와 좌절을 맛봐야 했지만 말이다. 국악 분야에도 신춘문예와 같은 경연대회들이 있다. 올해 국악계의 등용문은 화창하고 좋은 계절에 열린다. 4월부터는 온 나라 국악경연대회가, 5월에는 전주대사습놀이, 6월에는 동아국악콩쿠르가 시작될 예정이다. 전주대사습놀이 공연장면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동아국악콩쿠르는 1985년에 시작해 올해로 39회를 맞이한다. 판소리, 정가, 현악기, 관악기 등 4개 부문을 일반부와 학생부로 나누어 개최하다 점차 종목별로 경연 부문이 세분화 되었다. 올해 일반부는 작곡, 판소리, 가야금, 거문고, 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병창․민요 등 8개 부문으로 치러지는데, 가야금 병창․민요 부문은 아쟁 부문과 격년제로 시행하고 있다. 43회에 접어든 온 나라 국악경연대회는 1981년에 ‘전국국악경연대회’라는 명칭으로 기악․성악․무용 3개 부문을 전공자와 비전공자로 나누어 경연을 치르기 시작했다. 1986년 대회부터는 전공과 비전공의 구분을 없애고, 1994년부터는 기악 부문을 현악과 관악 부문으로 나누었다. ‘전국국악경연대회’라 이름 붙인 대회가 늘어나자, 2006년 대회 명칭을 ‘온 나라 국악 경연대회’로 변경하고, 무용 부문을 분리해 ‘온 나라 전통춤 경연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경연 부문도 순차적으로 세분화해 올해는 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장단 및 고법, 정가, 민요․가야금 병창, 판소리, 작곡 등 총 11개 부문으로 치러진다. 두 경연대회 모두 국적에 제한이 없으므로 명실공히 세계 대회라 할 수 있겠다. 동아국악콩쿠르의 일반부 참가 자격은 만 35세까지로 나이 제한이 있고, 온 나라 국악경연대회는 만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지만 35세 이상의 참가자는 드문 편이라 두 대회 모두 국악 인재 발굴 및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회에 가깝다. 전주대사습놀이 공연장면 반면, 조선 후기의 ‘대사습대회’에 기원을 둔 ‘전주대사습놀이’는 1975년 처음 개최할 당시부터 명인․명창들이 겨루는 대회로 시작했다. 판소리, 농악, 무용, 시조, 궁도 등 5개 부문으로 개최하다 점차 종목을 늘리고, 판소리 부문 등 몇 개 부문은 일반부와 명창부로 나누어 경연을 진행했다. 2000년대 들어 혜성같이 나타난 20대 참가자가 장원을 차지한 후부터는 명인․명창부 참가 자격이 만 30세 이상으로 바뀌었으나, 그 후에도 천재성을 지닌 예인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해 30대에 명창부 장원에 오르곤 한다. 내로라하는 명인들을 수상자로 배출한 대회인만큼 경쟁이 과열되어 한때 침체기를 겪기도 했다. 올해는 블라인드 심사를 도입하는 등 대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역사가 오랜 경연대회의 역대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지금은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이들의 이름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경연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이도 있고, 동상을 받고 이듬해에 다시 도전해 은상을 받고 차근차근 기량을 높여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이들도 많다.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며 정진한 결과일 것이다. 국악 경연대회를 담당하는 부서에 근무하면 진행요원으로 투입되는 일이 생긴다. 경연장 문 앞에서 마주한 참가자들의 잔뜩 얼어붙은 표정과 바르르 떨리는 손끝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전염되곤 한다. 올해도 덩달아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래를 짊어질 예인들의 입장과 퇴장을 돕게 될 것이다. 세상 후련한 혹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경연장을 나설 그들 모두에게 그날 내디딘 한 걸음이 더 큰 성장의 동기와 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3-04-14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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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귀에서 계속 맴도는 그 목소리 ‘스즈메의 문단속’극장가의 비수기로 불리는 시즌인데도 개봉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400만 명의 관객동원을 눈 앞에 둔 영화가 있다. 국내에서 3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너의 이름은’(2016)을 연출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팬덤과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 한국영화의 침체 등이 맞물려 빚어낸 결과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에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를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한 소녀와 저주에 걸려 의자가 된 한 청년의 로드 무비이자 환상적인 모험담으로 풀어낸 부분이 인상적이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일본의 트라우마를 위로하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유사한 재난을 막고자 하는 간절함이 잘 드러나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영상을 압도할 만큼 강렬한 음악들이 여러 번 사용되는데, 실사 영화였다면 다소 과하다고 느껴졌겠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그런대로 무난하게 받아들여진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시작해 여러 차례 반복되는 ‘뚜뚜루 루루루’ 로 시작하는 주제곡 ‘스즈메’는 2003년생인 ‘토아카’가 불렀다. 그녀는 앳된 음색에 슬픔 한 스푼을 떨어뜨린 듯한 섬세한 목소리로 보컬 오디션에서 제작진을 매료시켰고, 그녀의 소감대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 세계관의 일부’가 되었다. 음악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꾸준히 작업해왔던 밴드, 래드윔프스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영상 음악을 작곡해온 진노우치 카즈마가 함께 맡았다. 진노우치 카즈마는 오케스트라와 전자 음악을 함께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작풍이 특징인데, 이번 영화에 합류하면서 래드윔프스의 노다 요지로가 가지고 있던 음악적 색깔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었다. 이들은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오케스트라 녹음을 진행했으며, 수많은 명작에 참여했던 세계적 음악팀과 함께 ‘스즈메의 문단속’을 완성시켰다. 영상의 스케일 때문이 아니라 사운드나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영화관에서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윤성은의 Pick 무비실패는 또 다른 기회를, ‘리바운드’ 스포츠 영화, 그 중에서도 농구 관련 영화가 붐이다. 3040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성공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 최근 나이키사의 ‘마이클 조던 영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어’(감독 벤 에플렉)도 개봉했다. 농구를 하는 신은 나오지 않지만, 농구화 라인에서 다른 회사들에 밀려 있던 나이키가 ‘에어 조던’을 런칭하기까지의 과정 중, 당대 최고의 농구 선수들 이름과 마이클 조던의 전설적인 플레이가 등장한다. 왕년에 농구를 좋아했거나 에어 조던 라인 좀 신어본 분들에게는 선물 같은 작품이다. ‘에어’와 같은 날, 작년에 촬영을 마친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도 베일을 벗고 관객들을 만났다. ‘리바운드’는 2012년, 대한농구협회장기 전국 고교부 결승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부산중앙고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부산중앙고는 한 때 농구명문이었으나 이 대회 전에 농구부가 해체될 위기까지 맞는다. 새로운 코치로 부임한 강양현 코치는 길거리 농구판을 전전하던 학생 6명을 모아 가까스로 대회에 출전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예선 2회전 때 쇄골을 다쳐 5명의 선수가 결승까지 단 한 번의 교체 없이 뛰게 된다. 실화 바탕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거부당했을 이야기다.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중앙고 출신의 전직 프로선수, 강양현이다. 그는 선수로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경기를 완전히 망친 후, 선수들과 다시 의기투합해 드라마틱한 역사를 써내려간다. 영화 전반부는 강양현에 무리하게 코믹한 캐릭터를 부여한 장면들이 세련되지 못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행동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어 아쉬움이 남지만 대회장면에 집중한 후반부에서는 스포츠 영화의 박진감과 감동, 두 가지 포인트가 잘 살아난다. 오직 농구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뭉치게 된 여섯 명의 고교 선수들도 매력적이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10대들이 각기 다른 환경과 성격으로 인한 갈등을 극복하고 훈련과 시합을 통해 한 팀이 되어가는 모습은 어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모든 스포츠는 선수들의 노력과 도전을 응원하고 고무시키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복싱에는 쓰러진 선수에게도 잠시 쉬었다 일어날 수 있는 기회, 즉 열 번의 카운트다운이 있다. 야구는 타자가 홈을 떠났다가 다시 홈으로 돌아와야 점수를 낼 수 있는 스포츠다. 출루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응원하는 것은 그가 점수를 내기 위한 힘든 여정을 마치고 다시 홈(집)으로 돌아오기를 응원하는 것과 같다. 농구에는 리바운드가 있다. 골을 넣는데 실패하면 동료 선수에게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약 10년 전, 길거리에서 중앙고 농구 골대 밑에 모였던 고등학생들이 준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관객들도 다시 인생의 리바운드를 위한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3-04-14 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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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동시대 인물서사, 권순철·박치호·서정태·정현·한효석를 주목하라”2023년 갤러리끼(대표 이광기)가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전 <들숨 날숨 인간풍경(DEULSOOM-NALSOOM, The Humanscape>(4.14~6.10)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아울러 관조하는 권순철, 박치호, 서정태, 정현, 한효석(가나다순)의 진지한 성찰을 다룬다. 인간을 자연 속에서 다뤄온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동양적 자연관은 인간을 우월한 위치(일점 투시의 원근법과 같은)에서 다룬 서구의 시각보다 거시적이고 사유적이다. 들숨날숨 인간풍경 포스터 ‘인간풍경(Humanscapes)’은 2000년대 들어 유행한 ‘신체풍경(Bodyscapes)’ 테마와 달리, ‘사람 사이의 길(人間之道)’을 종합적 관점에서 모색한다. 전시는 스치는 바람의 흔적처럼 ‘들숨과 날숨/어제와 오늘’을 순간인 듯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전시장을 메운 작품들과 사람들의 들숨 날숨에 ‘인간의 숲’이 들썩이기 때문이다.동시대 인물화에 대한 다층의 가치해석우리 시대의 인물화는 솔직담백한 우리의 몸짓을 담는다. 그런 의미에서 《들숨 날숨 인간풍경》은 동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화가들의 시선을 통해, 인물화를 다시 복권 시키는 중요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인간의 몸, 신체를 넘어 자아와 타자를 연결 짓는 ‘숨=생(生)=실존(實存)’에 대한 작가 5인의 인간해석을 통해 욕망, 상처, 희망, 불안 등에 대한 비판과 공감의 시선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다른 조형 언어가 ‘인간풍경’에서 만났을 때, 각각의 작품들은 들숨과 날숨을 가진 또 다른 생명체로 기능할 것이다. 서로 다른 행간 속에서 ‘관람자의 인간해석’은 다양하고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장르와 기법이 다른 작가 5인의 인간풍경은 ‘어떻게 더하고 빼느냐’에 따라 달리 읽힌다는 것이다. 치밀한 완전성 속에서 자기 세계를 확립한 작가들의 ‘긴장과 이완/들숨 날숨’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작품 이상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거칠지만 진실한 영혼의 날숨, 권순철의 인물화권순철 작가권순철(b.1944, kwun Suncheol) 작가는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50여 년간 줄곧 그림을 그려왔다. 그림의 모티프는 주로 한국의 산과 바다. 그리고 한국인의 초상이다. 세파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온 노인의 얼굴은 작가 특유의 두꺼운 마티에르와 거친 붓 터치를 거쳐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인간의 얼굴을 모티프로 예술과 종교의 상관 관계를 형상화하는 작품들은 ‘인물화의 최고 경지’에 이른 노화가의 심연을 드러낸다. 작가는 1991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이씨레뮬리노 시에 있는 옛 탱크정비공장을 개조하여 46개의 아틀리에를 이룬 ‘소나무회’의 초대 회장이었다. 공장지대를 예술의 허브로 바꾸는 시대의 맥락 속에 한국 미술사의 중요 행보를 이끈 것이다. 작가가 고난과 역경을 날숨의 시선으로 표현하면, 풍파와 인고(忍苦)의 세월들은 들숨이 되어 우리 모두를 위로한다. 그림 속 인물들이 겪어온 여러 삶들이 모여 ‘한국인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부유하는 몸의 표류, 박치호의 들숨 박치호 작가박치호(b.1967, Park Chiho) 작가는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개인의 상처와 사회 현실과의 관계를 거대한 어둠을 머금은 묵직한 몸의 서사로 표현한다. 파편화된 신체의 형(形)을 바다의 부유물과 같은 표류의 장(場)으로 묘사하면서 ‘부분과 전체가 상호교류하는’ 삶의 순환과정을 이야기한다. 전남도립미술관의 (2022) 전시에서 “모든 사람은 상처를 안고 태어났고, 신체는 상처의 집(集)이며 이를 직면하고 치이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작가는 상실과 삭제라는 윤곽선이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시선을 통해 결핍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트라우마를 들이마시는 순간, 우리는 내면 깊숙이 감춰왔던 진정한 자아와 만날 수 있지 않을까.관능과 감정이 뒤섞인 푸른 날숨, 서정태의 채색서정태 작가 서정태(b.1952, Suh JungTae)는 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한국 채색화만을 고집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진채(眞彩)의 세계를 탐색해 왔다. 여기서 진채란 내면과 외연을 종합한, 종합주의적 해석의 한국채색화를 말한다. 한국화의 전통에서 보자면 서정태의 작업은 자연에서 파생된 치밀한 자기수양의 과정과 연결된다. 초기작에서 보이는 노골성, 솔직한 관능, 진정성을 끊임없이 파고들어, 세상과 삶을 일체화시키는 근원적 욕망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푸른 색조에 스며든 ‘눈이 큰 여인상’은 시대를 관찰하는 ‘작가 자신’의 표상이지 않을까 한다. 현실을 직시한 관찰자의 시선은 지금-여기 서슬 푸른 근원적 욕망 속에서 새로운 생명성을 갖기 때문이다.거칠게 생략된 부드러운 인간조각, 정현의 들숨정현 작가 정 현(b.1956, Chung Hyun)은 인간과 물질에 내재된 생명력을 조각 언어로 찾아가는 작가이다. 철길을 지탱하던 폐침목, 철근, 아스팔트, 석탄 찌꺼기 콜타르 등 쓸모(생명력)를 다한 산업 폐기물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한다. 작가는 연필 드로잉, 녹 드로잉, 콜타르 드로잉 등을 바탕으로 ‘쓸모없음’의 가치에 새로운 생명력을 가미한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주재료로 사용한 침목은 형상을 거칠게 생략하되 나무의 질긴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 재료가 지탱해온 시간과 생명력을 극대화한다. 공허한 대상들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현대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조각 사이에, 인간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정현의 들숨, 이른바 ‘실존미학’이 담겨 있다.시지각을 뒤섞은 덩어리진 껍질, 한효석의 날숨한효석 화가한효석(b.1972, Hyoseok Han)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겨낸 듯한, 고깃덩어리 같은 유화와 조각을 통해 욕망과 자본의 문제 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해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영국 사치갤러리 큐레이터팀이 선정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34명에 선정(2012년)되었다. 벗겨진 피부의 살점들은 ‘고깃덩어리’라는 느낌보다, ‘고통덩어리’를 송두리째 벗겨내는 속 시원한 감정까지 부여한다. 인간에 내재한 ‘시지각적 오류’를 ‘덩어리진 껍질’로 환원시킨 것이다. 한효석의 인물을 보면 구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날 것의 감각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웃음 앞에 내면의 상처를 감춘 조커'가 떠오른다. 기괴함이 주는 묘한 유머를 대상화하는 '개념적 날숨’이 자리하기 때문이다.<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3-04-07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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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알고 봐야 더 재미있는 고양이 축제의 감상법_뮤지컬 캣츠 뮤키컬 캣츠 군무 한 장면 유난히 오해가 많은 작품이 있다. 뮤지컬 ‘캣츠’가 그렇다.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박수를 치고 공연장을 나서는 글로벌 관객들과 달리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작품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제대로 감상했다는 방증이다. 뮤지컬 ‘캣츠’는 원작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국 작가 T. S. 엘리엇이 발표한 시집이 원작이다. T. S. 엘리엇은 카톨릭 신자였다. 어느 날 그는 종교적 후견인이 되는 대부(Godfather)가 됐고 어린 대자(Godchild)에게 인생의 교훈을 들려주고 싶어졌다. 그런데, 자신의 대자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고양이를 의인화한 시들을 그에게 전해준다. ‘캣츠’는 바로 그 시들을 담아 만든 시집을 가져다 무대로 만든 작품이다.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어릴 때 자기 전에 부모가 꼭 읽어준다는 국민시집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다. 소설도 아니고 시집이 원작이니 줄거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이 작품은 그 유명한 시집 속에 담긴 활자로 된 시구 하나하나가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이미지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 감동적이어서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이다. 당연히 제대로 감상하려면 시집을 꼭 먼저 읽어야 한다. 시집의 우리말 제목도 정확히 말하자면 오류가 있다. 영어로 쓴 원제에는 ‘지혜롭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가 언급되게 된 것은 굳이 따지자면 주머니쥐(Possum) 탓이다. 서양 사람들에게 주머니쥐는 지혜의 상징이란 말이 있다. 그래도 굳이 그 의미를 담아 번역하자면 지혜로운 것은 고양이들이 아닌 주머니쥐다. 여기에도 숨겨진 시적 상상력이 있다. ‘영리한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바라본 고양이들의 세계란 의미는 사실 T.S.엘리엇을 의미하는 중의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부르는 작가 엘리엇의 별명이 바로 주머니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제목은 지혜로운 주머니쥐의 이야기도 되고, 이제는 나이가 지긋해져 더 현명해진 T.S.엘리엇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시집제목다운 중의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곱씹어 생각해볼수록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말 공연이 처음 막을 올릴 당시, 국내 언론지상에선 ‘캣츠’를 두고 창녀 고양이의 사연이 담긴 작품이란 기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늙은 암코양이 그리자벨라를 두고 쓴 표현이다. 대표적인 이 작품의 잘못 알려진 오류다.여주인공 그리자벨라 극 안에서 그리자벨라가 몸 파는 고양이란 표현은 사실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새벽녘까지 어스름한 번화가 뒷골목을 서성였다는 노랫말은 있다. 저작권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해적판 버전이 스스럼없이 공연되던 시절, 하늘로 올라 환생한다는 이야기에 종교적 해석을 덧붙이고 싶었던 국내 제작진에 의해 왜곡된 정체불명의 해석이다. 사실 이런 해석으로는 ‘캣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자벨라가 창녀 고양이라면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노래 ‘추억(Memory)’의 내용은 영 이상해지기 때문이다. 해석하자면 손님들이 몰려왔던 화려한 날들을 그리워하며 환생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화류계 최고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된다. 국내 초연 당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제작진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그리자벨라와 막달아 마리아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려했던 무리한 해석 탓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리자벨라는 창녀 고양이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바라보면 미소짓게 됐던 매력넘쳤던 고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었던가, 이제는 인생의 뒤안길에서 주름만 남은 회한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됐다. 그러니 그녀가 노래하는 찬란한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고 그립고 또 애절할 수밖에 없다. 털이 숭숭 빠진 낡은 코트와 큰 옷깃에 의미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영국에서 이런 옷깃의 의상을 입은 나이든 여성은 역사속 인물을 떠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해가 지지 않던’ 시절의 영국 여왕인 메리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다. 어찌보면 화려한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의 노랫말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찬란했던 대영제국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선정성 논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캣츠’가 등장할 당시 서구 사회에서는 바디 페인팅의 예술성에 대한 적지않은 사회적 반향과 논란이 등장했었다. 퍼포머의 알몸 위에 예술적인 무늬나 그림을 그리는 현대적인 예술 행위인 바디 페인팅은 오늘날 신체를 캔버스 삼아 채색을 시도함으로써 회화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개념미술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캣츠’가 처음 제작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불식되지 않았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무용수의 타이즈 차림에 마치 바디 페인팅을 연상케하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그래서 한때 선정성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의 이면에는 사실 서양 사람들의 고양이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있다. 고양이하면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관능적이고, 섹시하다는 평소의 생각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마치 ‘쿨 캣(cool cat)’이란 표현이 진짜 고양이가 아닌 요염하고 관능적인 멋쟁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영국 록밴드 퀸은 아예 ‘쿨 캣’이라는 노래를 발표한 적도 있다. 물론 느긋하게 매력적인 사람에 대한 노래다). 고양이에 대한 느낌에서 조금 결이 다른 우리나라는 그래서인지 처음 이 뮤지컬이 소개될 당시 극장 안팎으로 비명이 난무하는 별난 풍경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객석 사이로 고양이들이 돌아다니자 여성 관객들이 소름끼쳐하며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꼬리라도 잡아채보려 손을 뻗는 서양 관객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나라도 강아지 못지않게 고양이 좋아하는 애묘 인구가 많아졌고, 애완동물에 관련된 산업들도 크게 성장하고 있다. 고양이들의 속성을 알게해주는 TV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한다. 한때 뮤지컬 ‘캣츠’의 공연장 로비에 아기 고양이들을 풀어놓으면 어떨까 싶은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 마음이 밑바탕이 되면 더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캣츠’다. 꼭 염두에 두고 감상해보기 바란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3-04-07 1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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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Arts For Everyone. Music For Everyone!
Arts for Everyone, Music for Everyone.
클래식계에서는 다소 유명무실하다 여겨졌던 이 슬로건이 기쁘게도 현실이 되어가는 중이다.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흘러가던 클래식계가 일반 대중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공연예술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의 본질적인 성격이 변화한 것은 아니다. 변화한 것은 클래식을 알리고 들려주는 방식이다.
롯데 콘서트홀의 홍보 담당자가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바 있듯 이전의 클래식 공연 홍보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고 아날로그적으로 포스터 광고, 초대권 배포 등 공연장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연히 이런 홍보방식으로는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만 정보가 공유될 수 밖에 없었고 규모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모하면서 SNS에 사진을 게시하는 것만으로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빠른 속도로 알릴 수 있게 되고, 기존 관객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아티스트가 직접 공연을 홍보하고, 대중들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홍보방식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투셋바이올린(TwoSetViolin)
아티스트가 주체가 되어 성공한 마케팅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먼저 투셋바이올린(TwoSetViolin)을 들 수 있다. 대만계 오스트레일리아인 에디 첸(Eddy Chen)과 브렛 양(Brett Yang)으로 구성된 이 바이올린 듀오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가벼운 유머코드를 가미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해 젊은 층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83만 명에 이르는 그들은 거대한 팬덤의 규모 덕택에 세계 투어에서 매진 행렬을 기록 중이다.
또, 200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해 이제는 중견 피아니스트로 자리잡은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 역시 55만 명에 육박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해 SNS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연 전 대기실의 모습부터 공연 실황, 신보 알림까지 본인이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서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Ray Chen)
대만계 호주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Ray Chen)은 “앞으로는 대중적 라이프 스타일로서 클래식 음악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말하며 때로는 클래시컬하게 때로는 친근하게 대중들에게 다가간다. 그는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스팅(Sting)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아케인(Arcane)’의 음악에 참여하였고, 아이유의 ‘밤편지’를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해 연주하기도 해 애니메이션 팬들과 국내 대중음악 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최근 그의 행보에서 가장 주목할만 한 점은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연주영상을 직접 올리고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클래식 앱 ‘토닉(Tonic)’을 공동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음악을 공유하는 것이 꿈’이라는 그의 포부에도 걸맞지만 클래식이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국내에서도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노력 중인 아티스트들이 많다. 피아니스트이자 평창대관령음악제 음악감독을 역임한 손열음은 지난 해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해 인터뷰는 물론 디지털 피아노로 터키 행진곡 변주곡을 연주해주기도 하는 등 대중들이 클래식에 대해 갖고있던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클래식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거듭난 조성진 역시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며 대중들의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더 나아가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노력중이다. 이미 2016년부터 대중음악과의 협업에 적극적이었던 피아니스트 랑랑은 빅뱅과의 콜라보에 이어 2020년 자선 콘서트에서는 셀린 디온, 존 레전드 등 팝가수와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협업이 빛을 발한 사례는 올해 2월에도 있었다. 바로 프랑스 영부인 브리짓 마크롱(Brigitte Macron)이 주최하는 자선행사 “Le Gala des Pieces Jaunes”에서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Gautier Capuson)과 대니얼 로자코비치(Daniel Lozakovich)가 블랙핑크와 선보인 콜라보 무대다. 카퓌송은 ‘핑크베놈’ 무대에서 반주를 더해 힘을 실어주었고, 로자코비치는 ‘셧 다운’의 샘플링 원곡인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독주 및 반주를 선보였다. 특히 활의 현이 끊어지도록 열정적인 연주를 선보였던 로자코비치의 무대에서 대중음악 팬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 모습은 프랑스 전역 및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에 공개되었다. 아티스트들 간의 이러한 협업 방식은 서로의 음악을 팬들에게 소개하는 장이 되어준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고 클래식을 대중음악처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인식시키는 시너지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런 협업들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클래식 음악가들의 탁월한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유튜브 및 다양한 채널을 통해 공연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대중들은 아티스트의 인지도보다 그들이 가진 진짜 실력을 궁금해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SNS의 활용과 타 장르와의 협업은 도구에 불과하며 팬들이 아티스트에게 공명하고 열광하는 지점은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오랜 시간 갈고닦아온 ‘실력’에 있다는 것 역시 잊지말아야 한다.
혹자는 클래식이 ‘클래식답지 못한’ 행보를 보이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클래식 역시 계속해서 살아있는 음악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필수적이다.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질높은 공연을 위한 강도 높은 연습 뿐만 아니라 자기 홍보를 위해 직접 뛰어야 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클래식이 ‘모두를 위한 음악’에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아티스트들의 열린 자세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앞으로 클래식의 목표를 시대와 경계를 뛰어넘는 음악의 정수로서 대중음악이 가진 티켓파워를 뛰어넘는 것으로 삼는다면 클래식 음악이 새롭게 진화하고 영역을 확장시키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3-03-31 1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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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순수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뮤지컬 '어린 왕자'
뮤지컬 어린왕자 공연장면 <사진제공 HJ컬쳐>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어.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어린 시절 자그마한 손으로 집어 들었던 소설 ‘어린 왕자’는 당시 열 살 남짓했던 내게 알 듯 말 듯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 찬 책이었다. 하지만 친구가 필요했던 노란 머리 어린 왕자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유리병 속 빨간 장미꽃과 여우 그림만큼은 마치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할 기억처럼 깊이 각인됐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에 꽂힌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났다. 세월이 흘러 다시 읽은 ‘어린 왕자’ 이야기는 마치 어른이 될 나를 손꼽아 기다린 듯했다. ‘어린 왕자’와의 만남은 상상했던 정도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뮤지컬 ‘어린 왕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별로 떠나기 전, 그가 남기고 간 인사처럼 ‘어린 왕자’는 정말로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그저 독자였던 내가 그새 달라졌을 뿐이다.
한국 창작뮤지컬 ‘어린 왕자’는 프랑스 소설가이자 비행사였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세계적인 명작 소설을 낭독형 뮤지컬로 창작하면서 작품에 어울릴 만한 무대 문법을 더해 완성한 결과다. 지난 2018년 초연 이래 어느덧 네 번째 시즌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특히 원작 소설 ‘어린 왕자’가 출간된 지 80주년을 맞이한 해이기도 해 더욱 뜻깊은 시즌이 됐다. 게다가 이 작품은 지난해 해외로도 수출되면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증명했다. 덕분에 이번에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대만 공연팀의 1회 특별 무대도 같이 선보여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새로운 시즌을 이끌 주역들 또한 기대를 모은다. 먼저 ‘생텍쥐페리’ 역은 정동화, 안재영, 동현이 맡았고 ‘어린 왕자’ 역으로는 이우종, 황민수, 정지우가 출연한다. 그리고 ‘나’ 역을 맡은 송영미, 정우연, 주다온이 무대에 올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배경과 함께 지난 3월 4일 시즌 첫 공연을 선보인 뮤지컬 ‘어린 왕자’는 오는 4월 23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만날 수 있다.
작품은 원작이 가진 매력을 충실하게 담으면서도 뮤지컬의 특성 역시 잊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독자로부터 검증된 소설 속 명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연극적인 요소까지 적절히 살려 스토리가 주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첼로와 바이올린, 피아노가 어울린 즉석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서정적인 선율을 타고 흐른 연주 덕분에 공연장은 훨씬 더 풍성한 감동의 물결로 가득 채워진다. 또 공연장 구조상 객석과 무대 사이 거리가 무척 가까운데, 바로 눈앞에서 생생한 연기와 노래를 선보이는 배우들을 보면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원작 속 삽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색색의 조명으로 밝힌 소품들까지 저마다 또렷한 이미지로 남아 마지막까지 긴 여운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소설 ‘어린 왕자’를 아껴왔던 관객이라면 새로운 장르의 옷을 입은 뮤지컬 ‘어린 왕자’에도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비행기 고장으로 인해 사막 한복판에 불시착하게 된 ‘나’는 어디선가 나타난 소년 ‘어린 왕자’와 만난다. 줄곧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소년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면서, 마음으로 봐야만 볼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계기가 된다. 순수성을 잃은 어른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던 그림과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은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 세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모순의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사연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문득 적잖은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80분에 걸친 시간 동안 무대 위로 펼쳐진 이야기는 오늘날 어른들에게 마음속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숨 쉴 순수함과 미처 알지 못한 행복을 일깨워 준다.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한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들은 한때 어린아이였을 모두를 위해 작품 곳곳에 살아 숨 쉬듯 빛을 낸다. 한참 동안 피지 않은 나의 꽃이 피어나길 기다리던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던 ‘어린 왕자’의 말도 마치 언젠가 피어날 저마다의 나날들을 그리는 희망이 된다.
비록 멀어져 버린 시간이지만, 순수로 가득했던 세계로 잠시나마 돌아가 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을 활짝 열고 충분히 길들 준비가 되었다면 올봄, ‘어린 왕자’가 기다리는 별에 한 번쯤 방문해 보자. 뮤지컬 ‘어린 왕자’는 분명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꿈 같은 세상을 당신에게 한 아름 선사할 것이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3-03-31 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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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하나의 작품, 세 개의 무대, 세 명의 지휘자
벌써 꽤 오래전인 2007년 여름, 비올라 주자로 처음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Lucerne Festival Academy)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름이면 세계 곳곳에서 젊은 음악가들이 일정 기간 동안 모여서 유명한 지휘자 및 앙상블 연주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리허설과 공연을 하는 프로그램들이 열리는데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P. Boulez, 1925-2016)에 의해 2004년 창설된 이 아카데미는 우리가 흔히 낯설어하고 또 난해하다고 여기는 현대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여타의 프로그램들과 뚜렷하게 구분되지요.
2007년 당시 기대와 설렘을 안고 루체른에 도착한 젊은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야심찬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 Stockhausen, 1928-2007)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작곡한 <세 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루펜 (Gruppen für drei Orchester)>을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어 ‘그루펜’은 그룹들(Groups)이라는 뜻인데 얼핏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모여서 이런 제목이 지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여기서의 그룹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공통된 특성에 따라 결합된 음들의 그룹을 의미합니다. 그 특성이란 강약, 악기 음색, 음역과 같은 것들이죠.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작품을 연주한다고 할 때 어떤 궁금증들이 우선 떠오를까요? 아마 오케스트라의 규모와 배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작곡가 자신이 악보에 매우 명확하게 표기해 두었는데 <그루펜>의 연주를 위해서는 총 109명의 연주자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타악기들과 피아노, 그리고 전자 기타까지 등장하는 다채로운 편성을 지니고 있지요. 각 오케스트라의 악기 편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규모는 매우 균등해서 오케스트라 1에는 37명의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2와 3에는 각각 36명의 연주자가 자리합니다. 그리고, 3명의 지휘자가 각각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됩니다.
그렇다면 3개의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자리할까요?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무대에 조금씩 떨어져 앉는 것이 아니라, 각 오케스트라는 독립된 무대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연주회장에서 보는 무대, 그러니까 청중석 정면의 무대에는 오케스트라 2가, 청중석 왼편에는 오케스트라 1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오케스트라 3이 자리하게 되지요. 그런데 각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자리할 때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무대에서 지휘자는 청중을 등진 채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며 지휘합니다. 그런데, 청중석을 둘러싼 세 개의 무대에서 지휘자들이 청중을 등진 형태로 지휘를 하면 지휘자들끼리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는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연주할 때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연주자들이 청중을 등지고, 지휘자가 다른 지휘자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벽 쪽에서 청중석 방향으로 서서 지휘합니다.
앙상블 앙테르콩탕포랭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그루펜> 공연 장면. 청중석을 오케스트라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지휘자들이 서 있는 방향이 일반적인 공연과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크린샷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34_SfP7ZCXA)
약 25분 정도 걸리는 <그루펜>의 악보를 보면 템포 변화도 심하고 변칙적인 박자 구성도 많으며 리듬도 복잡해서 어떻게 이 작품을 연습해서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심지어 이 작품에는 분명 동시에 연주하는데, 오케스트라들이 서로 다른 템포와 박자 기호를 갖고 있는 부분들도 존재합니다. 독립적이라는 말이 실감나지요. 2007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리허설은 단계별로 차곡차곡 진행이 되었습니다. 리허설 일정은 각 오케스트라가 따로 연습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한 오케스트라 전체가 함께 연습하는 것에 앞서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파트가 따로 연습을 했지요. 이후에 각 오케스트라 별로 모여 연습을 한 후에야 세 오케스트라가 한 곳에 모여 리허설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첫 전체 리허설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고 혼란스러웠는데, 첫 휴식 시간이 되자, 한 더블 베이스 연주자가 지금까지 겨우 세 음 연주했다고 “Just Three Notes!”라고 소리칠 정도였습니다.
<그루펜>을 몇 번 지휘해본 래틀(S. Rattle, 1955- )이 “짜증나게 복잡하다 (irritatingly complex)”고 묘사한 이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지휘자들의 입장에서도 큰 도전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동시에 다른 지휘자들과도 합을 맞춰야 하니, 그들의 어깨는 대부분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보다 더 무겁겠지요. 이 작품의 준비 과정을 담은 영상들을 보면 지휘자들이 그들의 연습 시작 과정에서 오케스트라 없이 악보만 놓고 열심히 박자를 세며 서로 합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의 공연보다 확실히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함을 알게 해 주지요.
전체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각 지휘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서로 간에 소통이 힘들고, 청중석에서 음악이 어떻게 들리는지 지휘자가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지휘자가 리허설 도중 오케스트라에게 계속 연주하라고 지시한 후 본인은 청중석으로 가서 음향을 파악하곤 하지만, <그루펜>에서 지휘자가 자리를 비우면 연주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슈톡하우젠은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 꼭 마이크와 모니터 스피커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서로 소통하라고 권했고, 전체 음향을 잘 파악하기 위해 음향감독을 리허설 때 청중석에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지요.
연주하기 까다로운 작품 <그루펜>. 얼핏 복잡하게만 느껴지는데, 이 작품을 굳이 연주회장까지 가서 들어볼 가치가 있을까요? <그루펜> 연주에 참여해본 입장에서 느꼈던 아쉬움은, 이 작품을 청중석에서 들어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연주회장에서 청중은 대게 자신의 앞에서 울려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청중을 세 면에서 둘러싸게 되어 청중은 소리의 울림 한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비록 익숙한 어법은 아니지만, 다채로운 악기 편성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음향을 말 그대로 입체적으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현장에서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한 <그루펜>은 세계적으로도 자주 연주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작품의 공연 소식을 어디에서든 접하게 된다면, 흔치 않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우리 나라에서도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천영상: 현대음악 연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앙상블 앙테르콩탕포랭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2016년 연주입니다. 종종 화면을 셋으로 나누어 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각 오케스트라가 때로 서로 다른 템포와 박자로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영상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잘 살렸으며, 연주 또한 뛰어나서 <그루펜>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4_SfP7ZCXA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3-03-24 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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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슈베르트가 내기를 하게 된 이유
슈베르트의 못 이룬 꿈, 오페라
10대 시절 슈베르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평생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을 꿈꿨던 작곡가 슈베르트. 19세기 작곡가들에게 있어서 오페라는 부와 명성의 상징이었다. 가곡의 왕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600여 편이 넘는 주옥같은 가곡을 작곡했던 슈베르트는 같은 성악적 장르라고 볼 수 있는 오페라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여러 요인을 꼽을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의 수많은 스케치와 미완성 오페라들로 미루어보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에도 불구, 짧은 단편 가곡과는 다른 긴 호흡이 중요한 극 음악 작곡에서 엿보이는 구조적 결함과 비즈니스와 흥행의 논리가 깊숙이 작용하는 오페라 업계에 발을 들여놓기엔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이 걸림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뉴욕타임스는 슈베르트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를 소개하며 슈베르트가 오페라 장르에 실패했던 이유에 대해 "음악은 아름답지만, 오페라의 형식과는 괴리가 있다"라는 평을 내놓은 바 있다.
1820년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에서 초연되었던 '마술하프'와 같이 나름 반응이 괜찮았던 오페라도 있었지만 그의 오페라는 대부분 상연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가장 잘 알려진 오페라 중 하나인 '피라브라스'는 음악적인 내용에 있어서 찬사를 받고 있지만 극적 완성도가 결여되어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웨일즈 국립 오페라의 에이든 랑 대표는 이 오페라에 대해 " 슈베르트가 걸출한 송라이터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두 시간 반 동안 고작 2개의 아리아를 제외하고 끊임없이 연속되는 앙상블 형태 음악은 음악적 전개에 있어 훌륭하지만 오페라 연출에 있어서는 매우 힘들다"라며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그가 작곡한 11개의 완성된 오페라와 수많은 미완성 형태의 극 음악은 슈베르트의 오페라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데 여기 전해내려오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 로시니는 19세기 유럽 오페라계를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엔나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는데 1822년 로시니가 비엔나를 처음 방문하기 전 1817년, 로시니의 작품들이 비엔나 무대에 올랐고 차례로 흥행에 성공하며 그의 인기를 입증했다. 로시니의 대표적인 오페라 '탄크레디(Tancredi)' 공연에 참석했던 슈베르트. 평소 로시니의 음악적 역량은 인정했지만 로시니의 대중적인 음악적 스타일을 비꼬곤 했는데 그의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오페라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자 심기가 불편했던 터. 과대평가라고 생각한 슈베르트는 로시니 스타일의 음악은 단시일에 작곡이 가능하다고 공언하며 결국 그의 친구들과 비싼 와인을 내걸고 내기를 하게 되었고 로시니 스타일을 음악에 고스란히 담은 2개의 오페라 서곡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작품들은 '이탈리안 스타일 서곡(Overture in the Italian Style)'으로 불리며 작품 번호 D590, D591를 부여받았고 이태리적 감성을 담은 유니크한 슈베르트의 작품으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오페라로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던 로시니의 입지가 부러웠던 슈베르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기도 하는 짠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가곡에서 드러나는 슈베르트 특유의 서정적인 악상과 극적인 완성도가 결합한 슈베르트의 오페라가 존재했다면 오늘날 오페라 극장의 주 레퍼토리로 명맥을 이어갔을 것이다. 현재 이탈리안 스타일 서곡을 비롯하여 그가 작곡한 상당수의 오페라 서곡들이 독립적으로 클래식 레퍼토리로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클래식 애호가들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이탈리안 스타일 서곡 D.591을 추천한다. 고전시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느린 서주로 시작하지만 이내 경쾌함을 탑재한 현악 반주에 귀에 쏙 박히는 이태리 감성의 멜로디가 매력적인 알레그로가 대조를 이룬다. 다양한 악상기호를 대거 곳곳에 안배함으로써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로시니의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점진적인 크레센도 (로시니 크레센도) 또한 슈베르트는 놓치지 않고 음악 속에 잘 활용히고 있다. 다소 과장된 음악적 표현들이 로시니의 음악을 유희적으로 모방한 흔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eWaKi8OCudw&t=211s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3-03-24 1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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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다시 듣는 말러 교향곡 5번 ‘타르’
이 영화는 음악영화가 아니다. 오케스트라 연주 장면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니 주인공이 지휘자이자 작곡가라고 해서 ‘아마데우스’(감독 밀로스 포만)나 ‘카핑 베토벤’(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같은 영화를 상상하면 오산이다. 아카데미 6개 부문의 후보에 올라있지만 음악상은 빠져있다.
‘타르’(감독 토드 필드)는 연주 신들을 많이 배치하기 보다 최고의 지위에 오른 지휘자가 어떻게 몰락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에 초점을 더 두고 있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실력을 지녔지만 공감능력은 부족한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특유의 냉정함과 권력으로 오케스트라를 휘두르다가 옛 연인의 자살, 어린 첼로 연주자와의 루머 등으로 늪에 빠진다. 불행히도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던 그녀는 이런 경우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도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의 주제곡 중 하나인 말러 교향곡 5번이 등장한다. 사실, 말러 교향곡 5번을 널리 알린 영화는 ‘타르’에서도 언급되듯이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었다. 쇠약해진 작곡가가 베니스에서 아름다운 소년을 발견하고 예술과 순수에 대해 되새김질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여러 감독들이 사랑한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는 말러가 19살 연하의 아내 알마 쉰들러를 향해 바친 낭만적인 곡이다. 그러나 말러는 이후 계속 사양길을 걷게 되는데, 첫 딸이 죽은 후, 알마의 외도가 계속되자 말러는 정신과 상담을 받다가 몇 년 후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래서 말러 교향곡 5번은 콘텍스트적 맥락에서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내포하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 남편의 죽음, 즉 서래와 해준의 사랑과 이별을 동시에 예견하는 곡으로 사용되었고, ‘타르’에서는 커리어의 정점에서 내리막길로 향하는 리디아의 위치를 암시한다. 말러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극중 타르의 롤모델이기도 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을 먼저 들어본다면 더 의미 있는 영화 감상이 될 것이다.
윤성은의 Pick 무비
누구에게나 가능한 구원 ‘더 웨일'
아카데미 시상식을 아무런 이해 관계 없이 보게 된 게 몇 년만인가. 2020년 ‘기생충’(감독 봉준호)이 여섯 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고 작품상까지 거머쥔 후, 2021년도에는 윤여정(‘미나리’)씨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작년에는 그녀가 남우조연상을 발표하기 위해 다시 무대 위에 섰다. 올해는 기대작이었던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이 최종 후보에 오르는데 실패하면서 아쉽게도 한국영화인을 아카데미 무대에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올해 아카데미 후보작들을 살펴보면, 블록버스터부터 독립영화까지, 리얼리즘 영화부터 SF 영화까지,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각 작품의 완성도나 의미도 매우 뛰어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2년 이상 주춤했던 영화산업이 다시 일어나고, 개봉 편수도 많아진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멀티버스 세계관을 바탕으로 중국계 이민자들이 삶과 가족의 의미를 되찾아가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가 10개 부문에서 11개(명)의 후보를 냈고,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감독 에드워드 버거)와 ‘이니셰린의 밴시’(감독 마틴 맥도나)가 9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작품상을 제외한 두어 개의 후보에 오르는데 그쳤음에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있다. ‘더 웨일’(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은 남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이자 대중들에게 추천하기에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272킬로그램의 거구인 ‘찰리’(브렌든 프레이저)는 온라인 대학 강사로 집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간호사 ‘리즈’(홍 차우)는 찰리의 건강 상태가 몹시 악화되었음을 직감하지만, 찰리는 병원에 가기를 거부한다. 대신 찰리는 오랫동안 인연을 끊고 살았던 딸 ‘엘리’(세이디 싱크)에게 연락해 매일 찾아와서 에세이를 완성시키면 전재산을 주겠다고 말한다. 엘리는 자기가 어릴 적 아내와 딸을 버리고 동성 애인과 떠나 버린 아빠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지만 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들은 오랜 앙금을 털어내기 시작한다.
2012년 초연된 동명 연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는 찰리의 집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단 6명의 인물만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번갈아 나누는 대화나 감정은 대작들에 버금갈 만큼 심오하다. 영화에서는 큰 상처와 갈등으로 관계가 얼룩져 있던 가족들이 화해할 수 있을까 라는 세속적 질문과 어떠한 과오와 실패가 있었던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라는 종교적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주조연급 등장인물들이 모두 한 번씩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각자가 가장 큰 슬픔을 느끼는 순간이기에 모두 다른 감정이 녹아 있다. 그 눈물에는 거짓이나 과장이 없고, 관객들에게 억지로 따라 울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들 스스로 그 인물들에 이입하며 눈시울이 붉어질 뿐이다. 사랑, 용서, 화해, 구원 등 인류가 끊임없이 고민해왔으나 답을 얻지 못했던 주제들로 따뜻한 정찬을 차려낸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3-03-20 1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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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 포커스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 열풍,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
세계를 대표하는 팝아트의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석달(1.26-4.16)의 일정으로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무료전시를 차치하고라도, 세계적인 브랜드 루이뷔통과의 콜라보로 대중적 유명세를 탄 작가이자 ‘일본 전후세대’를 나타내는 지식인 아티스트로 비춰진 전시, 기다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남짓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인스타그램들은 ‘#무라카미좀비’라는 독특한 신조어를 양산하면서 전시 전후의 문화까지 바꿔놓고 있다. MZ세대의 #플렉스(FLEX) 문화를 예견한 ‘평준화된 문화시대’를 보여준 무라카미의 #슈퍼플렛 열풍의 결과가 아닐까.
이우환은 왜 무라카미 다카시를 부산에 소개했는가.
부산시립미술관에 2015년 상설 전시관인 '이우환 공간'이 생겼는데, 관람객들의 반응이 줄어들자 이우환 화백이 “내 친구들을 데려오겠다”고 제안하면서 이번 전시가 마련되었다. 이우환 작가와 장르는 다르지만 현대미술사의 중심에서 예술관을 공유하는 작가들을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공간에서 함께 조명하자는 취지의 프로젝트이다. 2019년 안토니 곰리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2020년 미디어아티스트 빌비올라의 개인전, 2021년에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국내 최대 회고전이자 첫 유작전이 열렸다.
이우환 작가가 무라카미 다카시에게 전한 편지 내용에 따르면, "무라카미의 작품은 얼른 보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다시 보면 독이 있고 강한 비판성이 감춰져 있어 지나칠 수 없다." 그가 창조한 시그니쳐 캐릭터 DOB(도브), 탄탄보 그리고 무라카미 플라워는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언뜻 기괴한 모습도 품고 있다. 그 미묘한 이중성은 보는 이들에게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귀여움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작품 속 암시되는 주제인 원전ㆍ환경오염ㆍ전쟁 등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효과, 좀비문화와 슈퍼플렛 사이에서 ‘동시대 문화읽기’
일본식 팝아트는 ‘오타쿠(オタク) 문화와 무라카미 다카시’로 요약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떠오른 아톰중심의 애니메이션 문화가 무너진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상 세계를 만들었고, 이는 일본사회의 개인주의와 대중문화를 함의하는 새로운 코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1962년에 태어난 무라카미는 일본식 팝아트와 비지니스 사이를 오가며 오타쿠식 사유방식을 상업화시킨 대표적인 팝아티스트다. 여기서 오타쿠란 “우키요에, 망가, 아니메, 게임 등 일본 특유의 문화체계를 팝아트로 대변되는 서구 미술사의 문맥에 얹어 놓는 일”이자, “일본에만 존재하는 이른바 팝아트와 오타쿠를 결합한 전략 ‘포쿠’(POKU)와 소비문화의 덧없는 소모성과 얄팍함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위한 ‘슈퍼플랫’(Superflat)”을 세계 미술시장에 내다 파는 획기적인 전략이다. 실제 스스로를 오타쿠 예술가로 칭하는 무라카미는 도쿄예술대학 박사과정 재학 중에 오타쿠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것을 고급예술로 끌어올리는 슈퍼플랫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 좀비’ 전시 장면 (촬영: 안현정 평론가)
슈퍼플랫은 19세기 서양 회화와 전통적인 일본의 재료, 기법, 그리고 관습이 혼합된‘일본화’를 멈추고 신비적이고 명상적인 스토리텔링을 애니메이션과 같은 ‘네오팝’에 몰입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이 이론은 실제 일본미술의 대중예술화에 큰 기여를 했다. 말 그대로 일본 사회의 만연한 소비문화와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현상들, 성도착증과 같은 이슈들을 팝아트의 한 맥락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특히 2002년 캐릭터화된 무라카미의 슈퍼플랫은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루이비통 홍보 애니 제작에 참여하는 등 루이비통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키덜트 열풍의 예술화를 선도했다. 금박을 붙인 전통 회화나 일본 우키요에(浮世繪)를 바탕으로 서구미술의 평면성과 융합시키는 행위는 무라카미의 마스코트인 ‘미스터 도브(Mr. DOB)’를 통해 가시화되었고, 미국 팝아트를 무분별하게 모방하던 일본 미술계에 새로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번 부산시립미술관의 전시에서 전면에 내세운 ‘좀비미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문화속 ‘좀비문화’, 무엇이 우리를 좀비로 만드는가.
좀비는 무섭고 징그러운 존재처럼 읽힌다.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이미지로 표현되는 현대인의 문명이 좀비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좀비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시체. 컴퓨터에서 시스템 자원을 점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프로세스. 악성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다른 사용자나 프로그램을 조종하는 컴퓨터. 만약, 좀비 미학이 인터넷 문화와 소비문화 속 도태될까 봐 걱정하는 현대인의 불안을 좀비라고 표현한 것이라면 두 번째 정의가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간단하게 생각해서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이미지로 표현되는 현대인의 문명이 좀비로 표현된 걸 수도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 좀비’ 전시 장면 (촬영: 안현정 평론가)
이에 관해 정확한 답을 찾고 싶었지만, 좀비 미학을 다룬 논문은 없었고,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도 좀비 미학에 대해 이렇다 할 쉬운 정의를 내려놓지 않았고, 전시회 후기를 모두 읽어도 좀비 미학에 대해 설명하거나 좀비 미학을 이렇게 생각했다는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정확한 정의를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좀비 미학은 디지털화된 현대문명 속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 공포 때문에 등장한 키덜트와 같은 정상성에서 벗어난 모습을 말하는 미학이론이라고 정리해보았다.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3-03-17 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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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여성 국극의 귀환
올 3월에는 계획이 있었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만화나 소설 원작의 공연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으나, 웹툰을 창극으로 만드는 것은 보기 드문 시도이니 꼭 한 번 봤으면 싶은 공연이었다. 예매가 시작된 것을 알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공연 횟수도 많고, 아이돌이 출연하는 뮤지컬도 아니고… 하는 안일한 생각. 덕분에 3월의 공연 나들이는 무산되었다. 창극 <정년이>는 공연 두 달을 앞두고 전 석 매진되었으며, 추가로 오픈한 3회차 공연의 관람권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창극 정년이 (출처: 국립극장)>
웹툰 <정년이>는 1950년대 대중을 휘어잡았던 '여성 국극'을 소재로, 국극 배우를 꿈꾸는 소녀 윤정년의 성장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흔치 않은 소재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탄탄한 서사와 흠 잡을 데 없는 그림까지. 호평 일색인 댓글과 높은 평점, 연재 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인기로 단행본 출간과 창극 및 드라마 제작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다. 유튜브의 여성 국극 영상에 달린, 웹툰을 보고 찾아왔다는 댓글들이 양질의 콘텐츠가 일으키는 선순환을 증명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여성 국극은 대체 무엇일까? 왜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공연이 된 것일까?
'여성 국극'은 모든 배역을 여성 출연자가 맡아 공연하는 창극을 이르는 말이다. 창극은 한때 우리나라 고유한 형식의 연극이라는 뜻에서 '국극(國劇)'이라 불렸다. 1962년 국립창극단의 창단 당시 이름도 '국립국극단'이었다. 여성 국극은 박녹주, 김소희, 박귀희, 임춘앵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여류 명창들이 뜻을 모아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를 시발점으로 본다. 이들은 1948년 춘향전을 소재로 한 창립 공연 <옥중화>를 시작으로, 한국 전쟁 중에도 대중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공연을 이어갔다. 소리꾼과 고수가 전부인 판소리와 달리, 수십 명이 무대에 올라 화려한 세트를 배경으로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기존 창극에 비해 소재도 훨씬 다채로웠다. 대중의 입맛과 눈높이에 맞춤하게 만든 여성 국극에 관객들은 열렬히 화답했다. 인기와 비례해 늘어난 수입은 동호회를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모임을 떠난 이들이 각자 만든 국극단 수가 열 곳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 국극의 쇠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한정된 전문 인력에 비해 늘어난 작품 수, 예술적 기량이 충분하지 않은 출연진의 기용, 볼거리에 치중한 작품 제작, 예산 관리 등에 취약하여 겪게 된 운영난, 인기 배우들의 은퇴, 영화나 TV 같은 대중 매체의 출현 등등. 대중예술로 구분되었던 여성 국극은 전통 예술 지원 정책의 대상에서도 제외된 채 쓸쓸히 무대 밖으로 밀려났다.
201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에는 여성 국극에 평생을 바친 노배우들의 십 년 전 모습이 담겨 있다. 주류에서 멀어진 지 오래이나 7, 80줄에 들어선 그들은 여전히 모임을 하고 간간이 공연을 하며 여성 국극의 명맥을 이어간다. 2012년 타계한 여성 국극의 왕자 조금앵 역시 영화 속에서 팔십의 노구를 이끌고 무대에 오른다. 웹툰의 글작가는 남역 전문 배우였던 그가 팬의 요청으로 결혼사진을 찍어준 일화를 비롯해, 실존 인물들이 웹툰 속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차별과 제약이 뚜렷이 존재하던 시절, 유리천장을 뚫고 솟구쳐 올랐던 시대의 영웅들은 이제 그들과 함께 늙어버린 오랜 팬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이야기의 소재가 된 여성 국극은 새로운 세대의 팬층을 거느리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문화유산을 융성하게 하는 길이 한 갈래뿐일 리는 없다. 창극 정년이와 드라마 정년이, 정년이의 무한한 확장과 성공을 기원한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3-03-17 1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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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주크박스 뮤지컬의 신화가 재연되길 기다린다_뮤지컬 맘마미아
얼마 전 조용필의 음악으로 만드는 뮤지컬의 대본 공모가 있었다. 반세기 넘게 그의 음악을 즐기며 살아왔던 세대들에겐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열광할 수밖에 없을 소식이다. 흥미로운 시도가 잉태할 ‘물건’이 벌써부터 자못 궁금하다.
왕년의 히트곡을 무대용 콘텐츠로 쓴다. 주크박스 뮤지컬이라 불리는, 요즘 세계 공연가의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 형식이다.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친숙한 선율의 음악을 무대에서 그것도 라이브로 재연하는 재미는 견주기 힘든 즐거움이다. 게다가 원곡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팀이 해체돼 다시 그 음악을 라이브로 즐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무대가 주는 즐거움은 더욱 배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요즘 글로벌 극장가에는 새로 막을 올리는 뮤지컬의 세 편중 한 편 꼴로 주크박스 뮤지컬이 만들어지고 있다. 퀸의 음악으로 만든 ‘위 윌 록 유’,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스 오프 유나 쉐리, 빅 걸 돈트 크라이등으로 유명한 남성4인조 그룹 포 시즌스의 음악으로 만든 ‘저지 보이스’, 빌리 조엘의 음악이 담긴 ‘무빙 아웃’, 스파이스 걸스의 히트곡들이 등장하는 ‘비바 포에버’, 티나 터너의 음악들로 꾸민 ‘티나!’, 베리 매닐로우의 노래가 소재인 ‘코파카바나’, 유브 갓 어 프렌드로 유명한 캐롤 킹의 노래들로 꾸민 ‘뷰티풀‘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올려지고 있다. 아바의 ‘맘마 미아!’가 불러온 세계 공연가의 흥미로운 현상이다.
<2019년 맘마미아 공연의 한 장면>
1970~80년대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스웨덴 출신의 혼성그룹 아바가 처음 세계 관중들 앞에 등장했던 것은 1974년 4월 6일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렸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였다. 워털루로 대망의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세계 음악계에 화려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바라는 팀 이름은 그룹의 멤머였던 아그네사와 비요른, 베니 그리고 애니 프리다의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것으로, 초창기에는 길게 이름을 붙여 나열하다가 너무 거추장스러워 짧게 줄여서 사용한 것이 오늘날의 이름이 됐다.
아바는 서구 대중음악 역사상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등과 함께 가장 많은 히트곡을 배출한 불멸의 스타로 흔히 손꼽힌다. 모든 곡들이 팀의 남자멤버였던 비요른과 베니가 직접 만든 것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던 댄싱 퀸, 머니 머니 머니, 페르난도, 테이크 어 챈스 언 미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해냈다. 특히, 전성기라 할 수 있는 79년에서 80년까지의 2년 동안에는 치키티타, 김미 김미 김미, 아이 해브 어 드림, 더 위너 테이츠 잇 올, 슈퍼 트루퍼 등 5곡의 챠트 1위곡을 연속 발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에 발표된 노래는 1982년작 언더 어택이다. 이 노래 이후 멤버들간의 불화로 결국 팀은 해체됐다. 하지만 아바의 인기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90년대 들어 아바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전개됐고, 그 결과 예전의 히트곡들을 모아서 발매한 앨범인 ‘아바 골드 - 그레이티스트 히트’, ‘모어 아바 골드’, ‘땡큐 포 더 뮤직’ 등이 심지어 전성기 보다 더 높은 판매고를 달성하는 인기를 누리게 된다.
아바의 음악으로 만든 뮤지컬에 대한 구상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팀 해체 이후에도 뮤지컬계에서 꾸준히 활동해오던 비요른과 베니는 비지스의 음악들로 꾸며진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를 관람했고, 자신들의 히트곡에 적절한 스토리를 가미해 가족용 뮤지컬로 꾸민다면 좋은 공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수소문 끝에 영국의 여성 극작가 캐더린 존슨을 만났고, 그녀는 대부분 아바의 노래들이 가족이나 형제, 연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 착안해 그리스 지중해의 작은 섬에서 40대 미혼모 도나가 20살의 예쁜 딸 소피의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기상천외한 ‘핏줄 찾기’의 코믹 스토리를 더해 극으로 완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녀의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것은 노랫말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이야기를 꿰어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던 노래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활용되고 재해석되는 ‘별스런’ 재미를 만끽하게 됐다. 예를 들어,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이 사랑의 시간을 원망하며 부르는 노래인 네임 오브 더 게임은 아빠일지 모를 빌에게 딸일지 모를 소피가 엄마와의 사랑놀이로 태어난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의미로 탈바꿈된다. 또, 걷기 전에 춤추고, 말하기 전에 노래 불렀다는 쌩큐 포 더 뮤직의 가사는 아빠 후보 셋과 소피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종의 복선이자 매개체 역할을 한다. 뚱뚱한 엄마 친구 로지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테이크 어 챈스 온 미는 그야말로 공연장을 폭소의 도가니로 만든다. ‘마음 바꿔 바라보면 맨 앞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보일 것’이라는 노랫말이 마치 처음부터 이 장면을 위해 쓰여진 것처럼 극적 전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묘미를 선사하기 떄문이다. 영어권 관객들이 무릎을 치며 교묘한 스토리의 재치와 유모에 박장대소를 하게 되는 이유다.
새 봄을 맞아 뮤지컬 ‘맘마 미아!’가 다시 막을 올린다. 최정원과 신영숙, 홍지민, 김영주, 박준면 그리고 가수 출신인 김정민, 장현성, 이현우, 민영기, 탤런트로 활약하던 송일국 등이 김환희, 최태이 등 신세대의 풋풋한 배우들과 조화를 이루는 재미는 오랜 무대를 통해 잘 숙성된 완성도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특히, 젊은 관객 뿐 아니라 중장년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는 이 작품만의 매력은 특히 인상적인 뒷맛을 남긴다. 연령이나 성별을 뛰어넘는 작품의 매력이 엄마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장을 찾는 세대공감의 문화체험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반갑다. 올해 무대는 또 어떤 신기록을 잉태해낼까. 흥겨운 마음으로 막이 오르길 기다린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3-03-13 1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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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선민의 공연예술 글로벌 Now!
예술을 통한 환경보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021년 발표한 ‘문화예술의 친환경적 도입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 이슈는 인간의 행위이자 삶의 방식 즉,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제 환경보호의 문제는 캠페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으로 보다 심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체득된 문화의 형태야말로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기에 예술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이런 기조에 발맞춰 예술가들 역시 그들의 작품을 통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려는 시도를 활발히 해나가고 있다. 대중들에게 가장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환경과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양한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먼저 오스트리아의 디지털 아티스트 알퍼 도스탈(Alper Dostal)은 ‘미술관 에어컨이 녹아내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상상을 시작으로 작품을 전개해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뜨거운 전시회(Hot Art Exhibition)”을 열었다. 고흐, 몬드리안, 뭉크, 마그리트의 작품 등 기존의 명작을 3D를 활용해 흘러내리는 모습을 연출한 이 전시회는 신선한 아이디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화가 치즈처럼 흘러내리는 그로테스크한 연출을 통해 뜨거워진 지구가 이후 인류의 문화를 어떻게 녹여버릴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상기시킨다.
또, 포르투갈의 작가 바네사 바라가오(Vanessa Barragao)는 섬유 산업 폐기물로 인해 멸종 위기에 놓인 산호를 표현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의 작품 ‘코랄 가든(Coral Garden)’은 카펫 공장에서 버려진 폐양탄자의 뜨개를 풀어 다시 뜨고 일일이 손으로 묶고 매듭을 지어 완성되었다. 그녀는 작품을 공개하며 “섬유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오염도가 심한 일 중 하나다. 사용되는 재료와 기계는 많은 양의 폐기물을 생산하고 대기로 연기를 내뿜는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은 바다를 파괴하고 산호가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든다.”며 “이번 작품은 산호초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생태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음악계에서도 환경오염의 심각성과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시도가 이전부터 있어왔다. 틱톡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배경음악 ‘Experience’의 작곡가이자 빙하 위의 피아니스트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i Einaudi)는 2016년 11월 ‘북극을 위한 비가(Elegy for the Arctic)’을 발표하고 녹아내리는 빙하 한가운데서 직접 연주한 영상을 선보였다. 그린피스 캠페인 ‘북극을 지켜라(Save the Arctic)’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영상은 1,5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올리며 큰 화제가 되었는데, 피아노 선율 뒤로 들리는 빙하가 녹아내리는 물소리와 잔잔한 파도소리가 마치 북극의 눈물처럼 느껴진다. 거기에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빙하가 무너져내리는 굉음이 함께 들리는 순간은 마치 북극이 우리에게 지구와 생명체들의 위기가 머지않았음을 경고하는 것 같다.
더불어 연극계에서도 탄소중립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홍보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영국의 연극단체 ‘피그풋(Pigfoot Theatre)’은 탄소중립극단이라는 슬로건 아래 환경을 위한, 환경에 의한 연극과 축제를 제작하는 단체다. 청소년들이 이끌어가는 이 단체는 기획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움직임에 나타나는 탄소발자국을 기록하고 스스로 전기를 생산하며, 모든 소품들을 재활용으로 제작한다. 더불어 단체 내부 활동에 그치지 않고 워크숍을 개최해 많은 사람들이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더불어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계의 인상적인 움직임들이 국내에서도 포착되고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지난해 5월, 대림미술관에서는 신진 아티스트 23팀이 참여한 ‘기묘한 통의 만물상(TONG’s VINTAGE)’전이 열렸다. 전시의 섹션은 분해속도에 따라 유리-플라스틱-철-천-나무-종이-친환경 순으로 구성되었으며 ‘환경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일상의 작은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전시는 각 아티스트들이 한데 뜻을 모아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환경 다자정상회의 ‘2021 P4G 서울 정상회의’의 일환으로 외교부 정상회의 준비기획단이 공동주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그 밖에 전시 자체는 무료였으나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CHANGEWEMAKE를 통해 관람객들이 실제로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사례를 인증해야만 입장이 가능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밖에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업사이클링 전문 브랜드 큐클리프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공연에 사용된 폐현수막과 폐악보를 재활용한 굿즈를 선보였다. 관객들에게는 음악회의 추억을 굿즈를 통해 소장하고, 사용된 악보들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대신 귀여운 파우치와 카드지갑으로 재탄생한다는 점에서 일석이조다. 제작에 참여한 큐클리프 관계자는 “제작과정 자체가 쉽지는 않지만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예술계의 고민이 현실에 반영되고, 관객에게도 의미있는 소비를 돕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기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담배꽁초나 버려진 레고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환경 예술가 톰데이닝어는 “예술가는 안테나이고, 커뮤니케이터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 작업은 은유적이다. 내 작품을 통해 대중이 환경문제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사용된 쓰레기들을 보며 더러움이 아닌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그리고 원래는 버려졌을 것들에서 새로운 쓰임새와 의미를 직관적으로 찾아낸다. 예술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직관성이다. 직관적인 경험에 의한 인식의 변화만큼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없다. 예술이 환경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2023-03-10 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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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조명의 매력이 더해질 때
연극과 오페라 그리고 뮤지컬 등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조명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조명은 때로 무대 전체를 형형색색의 빛깔로 화려하게 수를 놓기도 하고,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주인공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며 청중의 모든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기도 하지요. 반면, 극음악이 아닌 성악이나 기악 음악이 연주되는 공연에서 조명의 역할은 많은 경우 제한적입니다. 이 경우 조명은 무대와 청중석의 밝기를 각각 알맞게 조절해주는 정도의 역할에 그치지요. 물론 좋은 공연을 위해서 이러한 조명의 역할은 필수적이지만, 일반적으로 음악회에서 조명이 기억에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말이지요.
그런데, 조명의 매력이 음악에 더해질 때 굉장히 멋진 공연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 사례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작곡가가 작품의 구성에 조명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경우와 반대로 작곡가는 조명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연주자가 판단하여 음악의 흐름에 조명을 더한 경우입니다.
우선, 첫번째 경우를 살펴볼까요? 두 대의 솔로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닛케(A. Schnittke, 1934~1998)의 작품 ‘하이든 식의 모츠-아트 (Moz-Art à la Haydn)’는 무대가 어두운 가운데 조용히 시작됩니다. 그러다 점차 커져간 음악이 격렬해질 때 무대가 갑자기 환하게 밝혀지죠. 보통의 연주회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서 진행되는 음악이 어느덧 마무리될 즈음, 연주자들이 한 두 명씩 무대에서 퇴장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하이든(J. Haydn, 1732-1809)이 작곡한 ‘고별 교향곡’의 마지막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인데 이 때 조명도 서서히 어두워지고 끝내 무대는 다시 캄캄해 집니다.
1977년 작곡된 이 작품에서 조명이 음악의 흐름에 따라 밝기가 조절되는 것이라면, 음악의 흐름에 따라 색채의 변화를 꾀한 작품도 있습니다.
바로 1910년 완성된 스크리아빈(A. Scriabin, 1872~1915)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 (Prométhée. Le Poème du feu, Op. 60)’ 입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에 합창까지 등장하는 커다란 편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악보에는 독특한 파트가 존재합니다. 바로 ‘색채 키보드(Tastiera per luce)’ 파트입니다. 색채 키보드는 건반을 누르면 특정한 색을 비추는 기능을 지닌 악기를 의미합니다. 악보에 표기된 음을 누르면 특정 색을 비추는 것이지요. 악기라기보다는 장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데 이 작품이 초연되었던 1911년 당시에는 스크리아빈의 이상에 맞는 악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이 파트를 제외한 채 초연되었습니다.
스크리아빈은 음악과 색채의 조합이 이루어진 공연을 보지 못한 채 191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세월이 흐르며 조명 기술은 발달했고 이를 이용하여 다양한 색채를 음악의 흐름에 따라 연주홀 전체에 수놓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다만, 색채 키보드 파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하여 스크리아빈의 정확한 의도를 알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 파트는 대부분 두 음으로 된 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렇다면 동시에 두 색채를 어떤 방식으로 내야하는지 의문이 있는것이지요. 만일 스크리아빈이 오늘날처럼 그의 음악이 근사한 색채의 조명과 함께 공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면 그의 이상을 더 명확하게 실현시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 예일 대학교 심포니 홀에서 공연된 스크리아빈의 ‘프로메테우스’
(출처: https://activetheory2100.com/mysticchord.html)
위와 같은 경우와는 반대로, 작곡가는 조명에 대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 연주자의 판단으로 조명을 더해 멋진 공연을 창조해낸 사례로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예전에 아바도(C. Abbado, 1933-2014)가 말러(G. Mahler, 1860~1911)의 교향곡 9번을 지휘하면서 음이 점차 사라져가며 끝나는 4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명을 점점 어둡게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음악이 끝났을 때 연주홀에 있는 모두가 어두움 속에서 청각적, 그리고 시각적 고요에 휩싸이게 되었지요.
보다 적극적이며 정말 굉장하다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로는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의 ‘정화된 밤 (Verklärte Nacht, Op. 4)’ 공연을 들 수 있습니다. 원래 현악6중주 편성인 이 작품은 독일의 시인 데멜(R. Dehmel, 1863-1920)의 시 ‘두 사람 (Zwei Menschen)’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고 음악은 시의 내용을 따라갑니다. 시는 달빛이 비치는 숲을 걷고 있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데 여자가 남자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였다고 고백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용서하며 그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공연에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시간적으로는 밤에, 공간적으로는 숲 속에서 일어난 것을 나타내듯 기본적으로 굉장히 어두운 조명을 채택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황량하고 스산한 숲길을 거닌다는 구절을 음으로 옮긴 시작부분은 청중이 연주자의 모습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깔려 있지요.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조명의 밝기나 색채가 시의 내용에 맞춰 변화됩니다. 예를 들어, 여자의 고백을 들은 남자가 여자를 용서하며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지점에서 차가운 느낌의 푸르스름한 조명이 따스한 느낌의 붉은 색 계통의 조명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보통 이렇게 어두운 무대에서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기 위해 보면대에 작은 램프를 설치하는데 이 공연에서는 그 램프의 빛조차 없애고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연주자들이 25분이 넘게 걸리는 이 변화무쌍한 곡을 모두 외워서 연주하였습니다. 그것도 지휘자 없는 공연에서 말입니다. 연주자들이 보통의 이 작품 공연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한 것인데 이 대담한 시도 끝에 탄생한 공연을 직접 현장에서 접한 청중들은 음악을 감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체험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명의 매력을 음악에 담는 시도는 물론 잘못하면 억지스럽고 유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이루어진다면 정말 커다란 매력을 지닌 공연 및 영상이 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주홀이나 영상 매체를 통해 우리는 음악을 듣지만 동시에 보기도 하니까요. 조명의 매력을 음악에 제대로 더하여 음악 자체도 더 빛나는 공연 및 영상이 앞으로 더 많이 제작되기를 바래봅니다.
추천영상: 본문에서 언급한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쇤베르크 ‘정화된 밤’ 공연 영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영상인데, 강약의 진폭을 더 무리없이 잡아내지 못한 음향이 조금 아쉽습니다. 되도록 큰 화면으로 그리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상한다면 이 공연의 진가를 조금 더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연주자들의 노력과 악장의 빈틈없는 리드, 섬세한 조명 조절과 치밀한 기획까지 보면 볼수록 많은 부분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h5Xc-rUef4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3-03-10 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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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듣는 재미, 작곡가 풀랑크
신 고전주의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를 소개하며
프랑시스 풀랑크(1899~1963)
"이 음악이 클래식 장르 맞나요?" 가끔 이런 질문을 듣게 되는 클래식 작품들이 있다.
재즈풍의 관현악과 라틴 리듬이 어우러진 거슈윈, 번스타인의 음악이나 풍성하고 유려한 할리우드 사운드를 발산하는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작품은 대중적인 음악과 접점을 이루며 클래식에 대한 선입견을 허물기도 한다.
20세기 전반을 풍미했던 프랑스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1899~1963) 또한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의 이분법적 경계가 모호한 작곡가다. 특히 변화무쌍한 음악과 귀에 쉽게 꽂히는 명징한 선율로 인해 흥미로운 클래식으로 통하지만 동시에 영국의 가디언지가 풀랑크의 음악을 "표절이 심하고 구조가 취약한 음악"으로 단편적으로 소개한 바 있듯이 오리지널함이 결여되어있고 클래식의 장르적 순도를 떨어뜨린 음악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접근법은 다른 작곡가들과는 조금 다르다.
풀랑크는 난해한 아방가르드 스타일이 대세였던 20세기 전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6인조'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던 풀랑크는 그들이 지향했던 신 고전주의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신고전주의란 20세기 전반, 독일의 극대화된 낭만주의와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반기를 들며 고전시대의 명료한 양식에 현대미를 접목한 음악 사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들 6인조는 작곡가 에릭 사티와 극작가 장 콕토를 추종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만능 예술가로 손꼽히는 장 콕토는 " 구름, 파도, 수족관, 물의 요정, 밤의 향기를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상에 뿌리내린 일상의 음악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이상향이나 신화적 세계관이 아닌 실재하는 '일상'에 근거를 둔 미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풀랑크의 음악언어는 모호하거나 형이상학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세속적이다. 심오한 주제도 유머와 해학을 곁들였다. 초월적인 위대한 작품에 대한 욕심보다 일상에서 접하는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수렴하여 자신의 개성을 담아 매력적인 작품들을 써 내려갔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스윙 재즈의 선두주자 베니 굿맨의 의뢰로 작곡된 클라리넷 소나타는 전통적 소나타 형식이지만 3악장 피날레는 재즈의 경쾌함이 돋보이며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의 2악장의 도입부는 모차르트에 대한 오마주로 빈 고전파 양식을 그대로 차용했으며 흥미롭게도 영화음악적 요소들도 가미되어 있다. 그가 높이 평가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무조적 반음계주의에 대항한 온음계 음악 양식, 팬디어토니시즘의 영향도 그의 다른 작품들 속에 찾아볼 수 있다. 빈 고전음악,영화음악, 재즈, 샹송 등 어떤 시대나 장르도 가리지 않았고 삶 속에서 마주친 예술적 영감들을 솔직하게 음악에 담았다.
덧붙여 그는 L.A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20세기를 대표하는 멜로디의 장인'으로 소개될 정도로 '선율미'에 있어 타고난 작곡가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오마주한 샹송 스타일의 즉흥곡 15번이든, 신앙에 관한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는 오페라 <카르멜 파 수녀들의 대화>든 멜로디의 윤곽이 뚜렷하고 중독성이 강하다. 그가 가곡에 애착을 보였던 것도 멜로디에 있어 탁월한 재능이 뒷받침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요커지는 풀랑크에 대해 '경쾌하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멜로디스트'라고 평했다.
다채로운 음악적 스타일에 신 고전주의적 명쾌함과 서민적인 프랑스인의 해학과 유머를 더했고 그 중심에는 빼어난 선율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의 음악이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다는 평에 격하게 공감할 수 밖에.
피아노를 위한 15개의 즉흥곡 중 마지막 15번은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를 위한 오마주다. 성공한 가수였지만 기구한 일생을 살았던 그녀를 대변하듯 단조로 일관하지만 우울한 감성보다는 열정적이고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역시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ETFcTMU1JA
장 콕토가 얘기했듯 모호하고 뜬구름잡는 예술이 아닌 일상의 미학이 엿보이는 풀랑의 음악이 우리의 일상에도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노래소개:에디트 피아프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3-02-24 10: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