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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미국 신문배달부들의 실제 파업을 무대로 그려내다_뮤지컬 뉴시즈뮤지컬 뉴시스 2016년 공연에 등장한 뉴스보이들. ‘가판’이란 말이 있다. ‘길에서 파는 신문’이다. 우리에게 신문은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것, 요즘 세대들에겐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으로 더 익숙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 신문들은 가판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특히 미국처럼 거대한 땅덩어리에선 가가호호 신문을 배달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길에서 파는 신문은 언론사에겐 주요한 수입원이자 유통 경로일 수밖에 없었다. 8~9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출퇴근 지하철에서 신문팔이들이 동전 몇 개에 신문을 건네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가판’이다.뮤지컬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막이 오르면 무대는 뉴욕. 신문팔이들이 새로 인쇄된 신문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다. 판매 방식은 단순하다. 조금 싸게 신문을 사서 행인들에게 팔면 남은 마진이 바로 신문팔이들의 몫이다. 그날 머리기사도 중요하지만 필요하면 적절히 과장도 하고, 연민도 자아내 인수한 신문을 모두 파는 것이 신문팔이들 – 뉴시즈(Newsies)들의 수완이자 능력이다.어느 날, 신문사의 악덕 사주가 일방적으로 신문가격을 올리는 파란이 연출된다. 신문팔이 소년들을 그저 하청받는 일꾼 수준으로 생각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음흉한 계획이었다. 뉴시즈의 리더인 잭 켈리는 뉴시즈들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초의 신문사 파업을 감행한다. 폭력과 억압으로 이들을 대하던 신문사는 점차 곤경에 빠지고 결국 비겁한 수단까지 동원해서라도 이들의 파업을 막으려는 경영진과 정당한 대가를 얻기 전엔 가판을 받지 않겠다는 뉴시즈들의 충돌이 이어진다. 뮤지컬 ‘뉴시즈’에 펼쳐지는 줄거리다.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이어지는 해변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산꼭대기에 있는 뜬금없는 성을 만나게 된다. 유럽도 아닌 미국, 그곳도 서부에 왠 고풍스런 성일까 의아할지 모르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외관과 근사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서 관광명소로도 유명하다. 바로 허스트 캐슬이다. 신문재벌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이곳의 산 중턱에 중세풍의 거대한 성과 남유럽식 별장을 짓고 명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에 100인분도 거뜬히 만들었다는 조리실이나 파란색 대리석 바닥이 아름다운 수영장을 보고 있자면 당시 그가 얼마나 큰 부와 명예를 누렸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허스트가 활동한 것은 1900년대 전후다. 당시 신문구독을 위해선 값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이 등장한다. 자극적인 제호와 기사를 실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조건 한 부라도 더 팔아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박리다매’의 신문 사업이 등장한 것이다. 자연스레 가판 경쟁은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한 푼이면 살 수 있다고 해서 일전신문(Penny Paper)이란 말도 등장했다. 그렇게 큰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된 대표적인 미국의 신문재벌들이 바로 윌리엄 허스트와 조지프 퓰리처다. ‘옐로우 저널리즘’이란 말도 이 시절에 처음 생겨났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 신문은 자극적인 내용을 실어 사람들로 하여금 솔깃하게 만들어야 잘 팔렸고 그래서 요즘은 천재지변이나 국가 중대사에나 등장하는 신문의 한 면을 가로지르는 큰 글자 크기의 통단제목(banner)도 이 시기엔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쓰이는 편집기법으로 활용됐다. 옐로우 저널리즘이란 퓰리처의 아성에 도전하던 허스트가 자신이 발행하던 ‘선데이 월드'에 옐로우 키드(The yellow kid)라는 시사만화로 인기를 끌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추구했다고 해서 생겨난 표현이다. 허스트 캐슬의 서재를 찾아가면 당시 일전신문들이 줄지어 전시돼 있기도 하다. 물론 맨 마지막으로 전시된 신문에도 통단제목은 버젓이 담겨있다. ‘허스트, 세상을 떠나다’. 그의 죽음마저 자극적인 기사의 소재로 쓰인 셈이다. 뮤지컬 ‘뉴시즈’는 바로 그 격변의 미국 신문 전쟁 시대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처음에는 뮤지컬 영화로, 훗날 다시 무대용 뮤지컬로 탈바꿈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길에서 신문을 팔던 뉴시즈들은 대부분 고아나 부랑아, 가난한 아이들이었고 뮤지컬 속 악덕 기업주는 바로 퓰리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같았던 이 사건은 그러나 노보까지 직접 만들며 조직적으로 저항한 배달 소년들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는 대반전을 이뤄낸다. 뉴시즈들의 저항은 미국 노동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게 됐다. 뮤지컬 제작사는 디즈니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차용했지만 디즈니 콘텐츠들이 늘 그렇듯 뮤지컬에는 ‘세상은 아름다워라’식의 윤색도 등장한다. 퓰리처의 딸 캐서린이 파업을 주도하는 잭과 로맨스 관계로 발전한다던지, 주지사였던 루즈벨트까지 가세해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극 전개다. 원래 진짜 파업을 주도했던 역사속 인물은 ‘애꾸눈 꼬마(kid blink)’라 불렸던 외눈박이 배달부 소년 루이스 발렛이었는데 영화와 뮤지컬에서는 조연급 캐릭터인 다리가 불편한 소년 크러치로 변화된 것도 현실과 다른 뮤지컬만의 판타지다. 물론 무대가 굳이 역사의 정확한 고증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디즈니가 만들면 인어공주도 되살아나고, 아이다도 윤회한다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롭긴 힘들다. 뚜렷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가 선명해 작품의 주제가 잘 드러나는 장점도 있지만 다분히 도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결말은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악재로 작용되기 일쑤다. 덕분에 자본가에 대항해 생존을 걸고 파업을 감행했다는 뉴스보이들의 정신은 디즈니식 해피엔딩의 뻔한 결말에 가려 다소 극적인 생동감을 잃게 됐다. 언론학자 입장에선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이 뮤지컬의 가장 큰 묘미는 단연 안무다. 어깨 한 쪽에 신문을 담는 끈 가방을 걸치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소년들의 춤사위는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노래를 만든 콤비는 알란 멘켄과 잭 펠드만이다. 사실 알란 맨켄은 작사가 하워드 애쉬만과 콤비를 이뤄 80년대 디즈니의 인기 만화영화들 -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을 만들었던 바로 그 작곡가다. 작사가 하워드 애쉬만이 아쉽게 세상을 일찍 떠나 지금은 다른 예술가들과 활동하고 있다. 주제가처럼 쓰이는 노래 ‘캐링 더 배너’는 멋들어진 군무와 함께 이 뮤지컬의 상징으로 통한다. 브로드웨이에선 40번가에 위치한 네덜란더 극장에서 막을 올렸었다. 공연이 끝나면 단체 관람을 온 중고생 관객들이 자리에 남아있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역사속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육 프로그램을 별도로 운용했던 탓이다. 신문배달부들이 쓰고 다녔다는 빵모자(‘뉴스보이 캡’이라고도 불린다)나 파업 당시에 만들었던 신문의 복사본을 나눠주며 용감한 도전의 역사를 들려주면 청소년 관객들이 아무 군소리도 없이 경청하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체험이다. 물론, 문화와 예술이 교육의 도구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실감케 해주는 살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 관객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문화산업의 책임이자 의미 있는 역할이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5-02-25 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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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이함캠퍼스, 폴란드포스터전 《침묵, 그 고요한 외침_폴란드포스터》국내 유일, 최초의 대규모 폴란드포스터 전시가 새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 포스터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적인 폴란드포스터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로 양평에 위치한 이함캠퍼스(이사장 오황택)가 소장한 1만 점의 폴란드포스터 중 선정된 200점의 그래픽 전시이다. 시안쿠크, 토스카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등 현대 시각 디자이너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그래픽의 진수이자, 디자인과 예술 관련 전공자들이 꼭 봐야 하는 전시이다,폴란드항공 광고 포스터 1966년 ©이함캠퍼스 이함캠퍼스에서 펼쳐지는 폴란드포스터의 향연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1950, 60년대 폴란드포스터는 세계 그래픽 디자인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20세기 중반까지 포스터 디자인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보다 대중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듯이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디자이너들은 좀 더 함축적인 방식으로, 또 개념적인 방식으로 포스터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인 포스터가 등장한다. 이런 현상을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는 ‘폴란드포스터 학파(Polish School of Posters)’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할 정도로 높이 평가한다. 폴란드포스터 학파가 접근한 태도는 그 이후 전세계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번 폴란드포스터 전시의 특징 중 하나는 포스터를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표현의 결과물로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통해 맥락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포스터는 그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렇게 시대적 맥락을 살린 포스터가 어떻게 국가의 꿈과 기업의 기대와 개인의 욕망을 표현했는지 이번 전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타데우스트렙코프스키 ‘안 돼’ 1952년 ©이함캠퍼스발데마르 시비에르지, 선셋대로 , 1957 ©이함캠퍼스 최근 폴란드 대통령이 방한했고 폴란드와는 대규모의 무기거래가 이루어지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우호 관계가 증진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 파병으로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국에 이번 전시는 폴란드 현대사가 끊임없는 전쟁의 고통을 받으며 그런 비극으로부터 평화와 자유를 얻어낸 결과로써 포스터의 역할에 주목한다. 폴란드포스터 학파는 억압과 폭력에 부드럽게 저항한 시적인 포스터다.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는 이 시기에, 폴란드포스터가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뜻 깊은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함캠퍼스는 가구와 같은 실용적인 오브제를 컬렉션하는 미술관으로 그 위상이 독특하다.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 속의 도구들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소개한다. 오황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은 우연한 계기로 폴란드포스터를 컬렉션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1만여 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이번 전시는 그 컬렉션의 일부로서 이함캠퍼스 소장품으로 구성되었다. 앞으로 이함캠퍼스는 다양한 방향으로 폴란드포스터를 한국에 소개할 계획이다.문화예술의 가능성을 담는 큰 그릇, 이함캠퍼스이함캠퍼스 전경 ©이함캠퍼스 이함캠퍼스는 양평에 위치한 곳으로 2022년 7월 중순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함캠퍼스는 이름에 철학이 담겨있는데 이함의 뜻은 ‘이함以函’– 써 이(以), 상자함(函). 빈 상자로서. 그릇을 비워야만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듯이 다양한 문화적 시도를 담아내고 비우기를 실천하는 함(열린 공간)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화를 경험하고 성장하는 배움의 장소인 셈이다. 이함캠퍼스는 전시가 이루어지는 미술관과 전시장별관, 이함창고와, 아트샵을 겸비한 베이커리 카페 페니키아, 연회동과 사무동, 그리고 아티스트가 거주할 수 있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구성되어 있다.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과 따스한 자연이 어우러져 현대적이면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남한강을 앞에 둔 만 평 가량의 부지를 담은 콘크리트 건물들은 건명원 예술분야 위원이기도 한 ‘선(禪)의 건축가’ 김개천 교수의 건축 철학을 중심으로 구현됐다. 미술관 외관을 따라 흐르는 물길이 캠퍼스 중앙 정원으로 이어지며 대범하게 뻗은 건축 획을 따라 각각의 건물과 정원의 공간이 절묘한 변 주로 물 흐르듯 연결되어 하나의 유니버스를 이룬다.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투박하면서도 세련됨이 어우러진 건물들, 건물 외부에는 넓은 잔디밭과 조형물이 있어 사진을 찍기에 좋고 둘레길이 있어 가볍게 산책하기에도 좋다. 24년에는 경기도 유니크베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앞으로도 전시 외에 교육과 공연,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 또한 활발하게 이어질 예정이다.이번 전시에 대해 이함캠퍼스측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포스터는 그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며 "그렇게 시대적 맥락을 살린 포스터가 어떻게 국가의 꿈과 기업의 기대와 개인의 욕망을 표현했는지 이번 전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6월 22일까지. 유료 관람.2024년 11월 22일(금) – 2025년 6월 22일(일) (매주 월요일 휴관)https://ehamcampus.com/ 관람문의 031-773-7888동절기 (11월~2월) 오전 10시 - 오후 6시 (오후 5시 30분 입장 마감)하절기 (3월~6월) 오전 10시 - 오후 7시 (오후 6시 30분 입장 마감)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강남로 370-10 이함캠퍼스.<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5-02-18 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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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불편한 동반자, 무대 공포증 2014년 3월, 독일 뮌헨에서는 지휘자 다니엘 하딩(D. Harding, 1975- )이 이끄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이하 BRSO)의 연주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연주 곡목은 말러(G. Mahler, 1860-1911)의 교향곡 제6번이었습니다. 2,400명의 청중이 자리했으며 라디오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었던 이 날의 음악회는 여느 음악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사실 흥미진진한 실험이 연주 내내 진행중이었습니다. 네 명의 BRSO 단원들과 지휘자 하딩에게 심전도(ECG) 기계를 부착하여,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의 심박수를 기록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지요. 음악회에서 연주자와 지휘자가 받는 신체적인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이 실험의 목적이었습니다. 결과를 보면, 이들의 최소 심박수는 분당 80이었으며, 최고치를 기록한 사람은 하딩으로 분당 165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보통 성인의 평균 심박수가 분당 60-100이라고 하지만, 건강한 성인의 경우 분당 55-85인 것을 고려한다면, 최소 심박수 80은 상당히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고, 하딩이 기록한 최대치는 분명 정상적인 상황에 비해 매우 높은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이 실험을 바탕으로 음악가들이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프로 운동선수들 혹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 원(F1)의 드라이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날의 실황은 후에 음반으로 나왔는데, 음반 표지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6번 중 마지막 악장인 4악장에서는 유명한 ‘해머 타격’이 있습니다. 이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망치로 나무판을 때려서 매우 크고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부분인데,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4악장에서 2번 혹은 3번 등장합니다. 바로 이 해머 타격의 순간에 나타난 지휘자와 타악기 주자의 심박수 그래프를 음반 표지에 실어놓은 것인데, 지휘자 하딩의 심장은 비교적 고르게 뛰는 반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타악기 주자의 심장은 말 그대로 요동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이 타악기 주자에게 얼마나 긴장된 순간인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딩과 BRSO의 말러 교향곡 6번 음반 표지. 중앙에 주황색 줄이 있는 부분이 해머 타격 순간이다.서두에 언급한 실험에서 나타났듯이, 무대 위 음악가들의 최소 심박수가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수치보다 다소 높다는 것은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긴장을 수반하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긴장은 해머 타격의 경우처럼 크게 상승하기도 하는데, 음악가들은 이를 이겨내며 청중들에게 자신이 준비해 온 음악을 펼쳐 보이지요. 사실 어느 정도의 긴장은 좋은 연주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적당한 긴장이 집중력을 높여주어 음악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긴장의 강도가 지나치게 심해져서 그것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자리잡으면, 그것을 무대 공포증이라고 부릅니다. 심박수가 증가하며 호흡이 가빠지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덜덜 떨리는 것, 입이 바짝 마르는 것 등은 무대 공포증에 시달릴 때 나타날 수 있는 대표적인 증상들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무대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하는 유명한 연주자들에게는 무대 공포증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가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음악가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무대 공포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 Horowitz, 1903-1989)는 그 중 한 명이지요. 14세 때 가졌던 첫 연주회에서 매우 긴장했다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 Casals, 1876-1973)는 생애 말년에 그 첫 무대를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80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연주 전의 그 무서운 긴장감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무대에 서기 전에 심장에 통증을 느낀다. … 공개 연주의 생각은 아직도 하나의 악몽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언급된 독주자들은 무대 공포증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다해도,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무대에서는 무대 공포증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또한 무대 공포증으로 인한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독일 파더보른 대학(Universität Paderborn)의 2012년 연구에 따르면 오케스트라 음악가들 중 13퍼센트가 극심한 무대 공포증에, 30퍼센트가 이보다는 약한 중간 강도의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무대 공포증이 극심할 때 발생한 일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Mahler Chamber Orchestra)의 한 바이올린 단원은, 오래 전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하던 도중 느린 2악장에서 긴장으로 인해 도저히 연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무대 뒤로 걸어 나갔다가 2악장이 끝난 후 다시 무대로 들어왔다는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협연자도 아닌, 제2바이올린 단원이었던 그가 연주 도중 무대에서 걸어나갈 때의 그 절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오케스트라 구성원 중 악장을 비롯하여 각 악기의 수석 주자들이 무대 공포증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 악기 그룹을 이끄는 동시에 작품에 나오는 중요한 솔로 부분들을 연주해야 하니 그들이 받는 압박이 상당함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BRSO의 악장 안톤 바라코프스키(A. Barakhovsky, 1973- )는 한 팟캐스트에서 이 글의 서두에 언급된 실험을 언급했는데, 자신은 그 연주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만일 자신에게 심전도 기계를 달았다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그 기계가 망가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살짝 웃으며 농담조로 말한 것이긴 했지만, 악장으로서의 부담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지요. 무대 공포증은 오래 전부터 음악가들을 괴롭혀오던 것이었고, 당연히 이에 대한 논의도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논의와 연구가 누적되었다고 해서 무대 공포증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요즘에는 더 심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2015년 450여명의 미국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무대 공포증을 해결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해본 경험이 있다는 비율은 72퍼센트에 달했는데, 이는 1987년 조사에서의 27퍼센트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였지요. 아마도 과거에 비해 음악회 중계가 늘어나고 인터넷에서 수많은 음악 영상들을 너무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 이렇게 늘어난 수치의 큰 원인일 것입니다. 음악가들이 보다 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에서 45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제1바이올린 단원을 역임한 페터 브렘(P. Brem, 1951- )은 이러한 환경에서 음악가들이 더 큰 압박을 받는다고 토로했습니다. “무대 공포증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R. Buchbinder, 1946- )는 한 영상에서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대 공포증은 무대에 오르는 이와 영원히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던 것이겠지요. 많은 음악가들이 무대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릅니다. 무대 공포증이 안겨주는 두려움에 맞서며 그들의 예술 세계를 펼쳐내기 위해 오늘도 온 힘을 다하는 그들을 응원합니다. 그동안 <박병준의 클래스토리>를 애독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필자소개>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5-02-10 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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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고전과 현대를 오가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작곡가 막스 리히터 우주를 품은 예술을 품어라! 정현종 작가의 시 '방문객'의 한 구절이 크게 와닿은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인생에서 맞이하는 인연을 묘사하며 "한 사람의 인생이 온다"라는 표현을 썼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누구냐에 따라서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문화예술을 접한다는 것' 또한 예를 들어 좋아하는 전시회를 찾아 미적 자극을 얻고 기분전환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화예술, 특히 음악을 접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속에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무궁무진한 우주 혹은 세계관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현재 클래식의 연금술사로 불리며 세계적인 인지도를 누리고 있는 영국 출신 작곡가 막스 리히터. 바로크 시대의 거장 비발디의 <사계>를 현대적으로 재작곡한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하이브리드적 시공간을 품은 우주를 경험케 한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식 아날로그와 21세기 테크놀로지를 탑재한 현대인의 기술과 감성이 교차하며 절묘한 음악적 어울림을 자아낸다는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막스 리히터는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세계관과 자신의 미니멀리즘 음악의 연결고리를 착상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텍스트를 추출하여 음악 속에 배치하는 시도를 통해 두 세계관을 연결하였다. 물론 이는 순수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연히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작곡한 영화 <인터스텔라>의 음악이 흐르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지인 영화감독은 내게 "화장실에서 광활한 우주 속을 유영하고 나온 기분"이라고 했다. 한 옥타브 안에 존재하는 단 12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선율, 화성을 기본으로 다양한 리듬과 무궁무진한 음색으로 변주되어 신비한 우주의 하모니를 주조한 것이다.할리우드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오프닝 테마는 단 몇 마디의 음악으로 관객들을 모험 가득한 머나먼 은하계로 빨아들인다. 아직까지도 전세계를 매료시키며 후속작을 쏟아내고 있는 거대한 스타워즈의 유니버스(Universe)에 있어서 조지 루카스 감독이 언급했듯, 음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것이다. 존엄한(?) 과거의 클래식도 예외가 아니다.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예를 들어 보자. 죽음이라는 엄숙한 주제를 말로 설명하자면 끝없는 논쟁거리로 끝날 수 있겠지만, 말러의 음악은 죽음이 드리운 장례식에서부터 삶에 대한 회상을 거쳐 결국 듣는 이로 하여금 마른 뼈가 살아날 것 같은 거대한 부활의 메시지를 던지며 온몸을 전율케 하는 피날레를 선사한다. 결국 다시 살기 위해 죽는다는 말러의 종교적 세계관 속의 성경적 핵심 '부활'은 음악을 통해 감동적으로 완성되며 기독교와 무관한 이들의 영혼까지 어루만지며 인생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대중의 흥을 돋우기도 하고 애절한 선율로 심연을 울리는 감동의 원천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음악. 모두 의미 있는 음악의 힘이다. 하지만 음악은 더 나아가 상상을 뛰어넘는 우주의 문으로 통하는 길임을 강조하는 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는 음악이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화가 뵈클린의 미술작품 '죽음의 섬'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교향시' 죽음의 섬'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쓰게 했으며 영화 <스타워즈>는 일론 머스크의 잠재된 모험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며 스페이스 X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일단 먹고살 만해야 그 다음 예술이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인간은 일상 속의 문화예술을 통해 더 높은 가치와 정신을 함양하며 결과적으로 무한한 가치창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명배우 이언 맥켈런은 예술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결국 예술은 우리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고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케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예술은 늘 우리에게 속삭인다. "인생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크고 깊고 높다". 본 칼럼<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은 이번 회를 끝으로 여러분께 작별을 고합니다. 그 동안 클래시그널을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5-02-03 1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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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K뮤지컬 최초로 회전문 관객을 탄생시키다 - 뮤지컬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 공연장면 ©CJ ENM독일의 작은 도시 발하임. 한 청년이 우연히 인형극을 하며 신비한 모험에 들떠하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가 쓴 시는 단숨에 청년을 매료시켰고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마침내 마음을 고백하기로 하지만, 그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녀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저 바라만 볼 수 없어 마을을 떠나지만, 긴 여행에도 결국 그녀를 잊지 못하고 발하임으로 돌아오게 된다. 소용돌이치듯 얽히는 세 사람의 운명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인기 뮤지컬 ‘베르테르’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뮤지컬은 ‘공연 예술의 십자로’ 같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원 소스를 활용해 무대용 콘텐츠로 재가공한다는 의미다. 요즘 만들어지는 뮤지컬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다양한 콘텐츠 들이다. 영화, 드라마, 시, 왕년의 대중음악 등 실로 다양하다. 노블컬이란 말도 흔히 쓰인다. 뮤지컬의 원작이 소설이라서 붙여진 용어다. 말 그대로 소설의 영어 표현인 노블(noble)과 공연예술 장르인 뮤지컬(musical)의 합성어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영미권이나 글로벌 시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만의 신조어에 가깝다. 사실 뮤지컬에서 소설이 원 소스 역할을 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로, 따로 용어를 붙여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반적인 제작 경향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로 만들어진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 혹은 ‘웃는 남자’, 로버트 스티븐슨의 작품이 원작인 ‘지킬 앤 하이드’, 가스통 르루의 소설이었던 ‘오페라의 유령’, 찰스 디킨스의 소설인 ‘올리버 트위스트의 모험’을 무대로 탈바꿈시킨 ‘올리버!’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 등 그야말로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벅찰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뮤지컬이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로 활용되기에 매우 적합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노블컬이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공연으로 구현되는 예술 장르라 그만의 독특한 무대적인 문법에 따라 주제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다른 장르의 원작을 가져다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데 비교적 용이하다. 영화가 원작인 무비컬의 매력과도 일맥상통한다. 영상 문법에 따라 만들어진 영화가 무대에서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잘 알지만 혹은 이미 알고 있지만 다시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경험하게 한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별난 경험은 이런 작품들을 감상하는 첫번째 매력 포인트다.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는 바로 그런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영화 등 다양한 문화적 생산물로도 익숙한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국적으로 전개된 제작과정이다. 원작은 독일어 소설이되 이를 가져다 무대로 형상화한 것은 우리 예술가들로, 장르적 구분으로 말하자면 순수 창작 뮤지컬이다. 다른 나라 작가의 유명 소설을 가져와 우리말 무대의 뮤지컬 콘텐츠로 탈바꿈시키고, 이를 다시 또 다른 나라로 되파는 일종의 문화산업의 중계무역과도 엇비슷한 제작방식이라 흥미롭다. ‘회전문 관객’이라는 표현도 ‘베르테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N차 관객’이라고도 부르는데 우스갯소리를 조금 섞어 표현해보자면 뮤지컬 보러 공연장을 들르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공연까지 잠시 쉬러 집에 들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제작사 입장에선 여간 고마운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뮤지컬계에 이런 충성스런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30여년 쯤 전부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열정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신나게 객석으로 모여들던 사람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회전문 관객이 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수십, 수백 번 공연장을 찾았음에도 여전히 기회만 허락된다면 기꺼이 다시 보겠다는 의욕 충만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무대 위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비슷한 관심과 정보를 나누며, 각자의 해석을 덧붙여 특정 회차의 공연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되새김질하기도 한다. 의미의 재생산과 기쁨, 슬픔 등 감정을 공유하고, 개인적 체험으로서의 수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기도 한다. 영상과 차별화되는 무대만의 즐거움이다.뮤지컬 ‘베르테르’는 첫 무대가 올려졌던 2000년 당시 이른바 ‘베사모’ 신드롬을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했다. 베사모란 ‘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의 약자로 국내 뮤지컬 동호회 문화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저 작품이 좋아서 뭉친 순수한 자발적 모임으로, 소위 ‘폐인’ 관객의 등장을 알리는 시발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정말 수백번 무대를 찾은 관객들이 속출했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입장권을 더 이상 구입할 수 없어서 공연장의 음악소리라도 감상하려고 로비에 매일 출근(?)하는 열혈 관객들이 나올 정도로 비상한 인기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독일 문단의 거장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 발표했던 서간체 소설이다. 당시 괴테는 친구인 요한 캐스트너의 약혼자인 샤를로테 부프에게 첫 눈에 반해 짝사랑을 앓던 중이었는데, 비슷한 처지의 고향친구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슬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자신의 경험과 친구 이야기를 적절히 뒤섞은 소설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책을 읽은 당시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의 옷차림을 흉내 내거나 심지어 모방 자살까지 유행하면서 20대 중반의 괴테는 일약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요즘도 유명 연예인이 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보도될 때면 단골처럼 뒤따르는 ‘베르테르 효과’에 대한 우려는 바로 이런 소설의 인기와 영향력에서 기인된 것이다.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점도 있다. 매번 새롭게 막을 올릴 때 보여 주는 ‘리바이벌’의 미덕이다. 예를 들자면, 무대에 주는 토니상에만 있고 영화에 주는 오스카상에는 없는 수상부문이 바로 리바이벌 상이다. 영화는 한번 만들면 다시 만들어지는 일이 드물지만, 무대에서는 왕년의 인기 콘텐츠를 가져다 현대적으로 다시 각색하거나 새로운 재미를 부가했을 때에도 수상의 영광이 주어진다. 기계적으로 재생만 되는 영상물과 달리 무대는 매번 재연하는 과정의 예술이라서 생겨난 차이다. 뮤지컬 공연가에 ‘폐인’ 관객들이 자주 목격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수십번 봐도 사실 하나도, 단 한 번도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단초를 제공했던 제작자의 별세도 이번 앙코르 무대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 얼마 전 부음을 알린 극단 갖가지의 심상태 대표다. ‘베르테르’는 창작 뮤지컬이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이미 성악적 발성이 가능한 배우들을 대거 기용하고 실내악을 연상케하는 현악 라이브 연주를 선보여 ‘음악이 좋은 뮤지컬’이라는 자자한 명성을 누렸다. ‘오페라의 유령’ 우리말 공연의 초대 히로인이었던 크리스틴 역의 이혜경이 롯데로 등장했고, 중저음이 매력적인 김법래가 알베르트 역으로, 예민하고 서정성이 풍부한 연기로 심금을 울렸던 서영주가 베르테르 역으로 등장했었는데, 지금까지도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초연 무대의 오리지널 캐스트들이다. 지금은 중견급 배우로 성장해 안정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지만, 당시 무대에서의 풋풋한 모습을 기억하는 애호가들에게는 영원한 베르테르의 상징 같은 존재로 남아있기도 하다. 올해 막을 올린 무대에선 엄기준과 양요섭, 김민석이 전미도, 이지혜, 류인화와 함께 무대를 꾸민다. 공연장 나들이에 손수건 지참이 필수임을 절대 잊지 말자.<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5-01-21 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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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중력을 거슬러 스크린 속으로, ‘위키드’ 작년 11월에 개봉한 ‘위키드’(감독 존 추)는 1995년에 발표된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소설, ‘위키드: 사악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 보다는 2003년 초연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를 영화화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뮤지컬 ‘위키드’는 소설의 방대한 세계관을 간결하게 축약하면서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도 가볍고 발랄하게 바꾸어 놓아 2000년대 중반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로 꼽힌다. 영화 ‘위키드’도 뮤지컬의 밝은 톤 앤 매너와 음악들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소설과 달리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다. ‘위키드’의 음악들을 작곡한 스티븐 슈워츠는 뉴욕 출신으로 연극학을 전공한 후 브로드웨이에서 일하다 음악감독직을 제안받는다. 1971년에 작곡과 작사를 맡았던 ‘가스펠’은 그에게 두 개의 그레미상을 포함한 여러 상을 안겨주었고, 1970년대 중반부터 그의 공연들은 대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제작비 130억이 들어간 ‘위키드’는 10년 넘게 브로드웨이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흥행작으로, 스티브 슈워츠의 커리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그의 완성도 높은 넘버들은 화려한 세트, 탄탄한 스토리와 잘 어우러지며 계속해서 두터운 팬덤을 쌓아가고 있다. 영화의 삽입곡들은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지만, 몇몇 곡들은 촬영장에서 부른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캐릭터의 감정과 현장감을 함께 살리기 위한 훌륭한 선택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한층 높여준다. ‘위키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넘버는 ‘중력을 거슬러(Defying Gravity)’라는 곡으로 마법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엘파가’(신시아 에리보)가 마법사의 불의의 맞서기로 결심하는 대목에서 부른다. ‘한계는 무너졌어. 내 길을 갈거야...(중략)... 우리가 함께 중력을 벗어나면 아무도 우릴 막지 못할 거야’ 라는 대사가 감정적 깊이를 드러내는 스티븐 슈워츠의 강렬한 선율과 함께 ‘위키드’ part1의 대미를 장식하면 관객들의 가슴 속에서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엘파바가 무대 공연의 한계를 벗어나 스크린에서 마음껏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에서는 왜 이 뮤지컬이 영화화 되어야만 했는지도 알 수 있다. 뮤지컬의 2막에 해당하는 ‘위키드’ part2는 올 연말 개봉 예정이다. 윤성은의 픽 무비 나를 제어할 준비, ‘서브스턴스’ 데미 무어가 출연한 스릴러, ‘서브스턴스’(감독 코랄리 파르자)가 화제다. 지난 달 11일에 개봉한 ‘서브스턴스’는 연말 성수기를 맞은 블록버스터들의 공세 속에서도 스크린을 사수하며 소소하게 흥행중이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신선한 소재와 충격적 표현이 특징이다. 전자는 긍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지만, 후자는 부정적 평가도 동반한다. 이 영화는 젊음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자신을 망가뜨려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후반부의 극단적 이미지와 내용 전개는 그 욕망만큼이나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주제를 드러내는데 효과적인 방식이었는지, 영화에 대한 거부감만 조장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들 각자의 몫이다.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 때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했던 스타였지만 지금은 TV에서 에어로빅쇼를 진행하는 한물 간 배우다. 엘리자베스가 50살 생일을 맞던 날, 프로듀서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진행자를 어리고 섹시한 여성으로 교체하겠다며 그녀를 해고해 버린다. 마침 그 날, 차사고로 병원에 간 그녀에게 한 범상치 않은 간호사가 젊음과 미모를 가져다준다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권유해오자 엘리자베스는 장고 끝에 주문 전화를 건다. 놀랍게도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젊고 완벽한 미모를 가진 ‘수’(마가렛 퀄리)를 탄생시키고, 수는 엘리자베스의 후임으로 TV쇼를 맡게 된다. 단, 이 약물에는 일주일 간격으로 본래의 몸과 새로운 몸을 교체해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처음에는 수와 엘리자베스가 균형을 잘 잡아가는 듯 보였지만 점점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수는 결국 그 규칙을 깨뜨리고 만다. 그리고 수가 더 많은 날들을 점유할수록 엘리자베스의 몸은 급속도로 노화를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새로운 육체를 포기하지 못하자 수는 급기야 엘리자베스 없이 살기로 결심한다. 서브스턴스 판매자가 반복해서 말하듯 둘은 한 사람이다. 영화는 나이 든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시선, 젊음과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시각을 비판하는 한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끔찍한 최후를 보여준다. 완벽한 미모만을 스타의 조건으로 내거는 방송계의 생리도 사회악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스타일은 명확한 주제의식만큼이나 자극적이다. 카메라는 초반부터 신체나 사물을 자주 극접사(익스트림 클로즈 업)로 보여주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엽기적인 사건들과 이미지가 난무하는 후반부에서는 메스꺼움과 구토까지 유발한다. 인간의 신체는 낱낱이 분해되었다가 다시 아무렇게나 뭉쳐지고, 새해전야 쇼의 녹화장은 공포영화, ‘캐리’(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파티장처럼 새빨간 피로 물들어 버린다. 이 기괴하고도 괴팍한 마무리는 매우 독창적인 반면, 비호감도 유발시킨다. 3분의 2 지점까지 아삭한 식감을 유지하던 영화가 갑자기 쉰내가 날 정도로 폭삭 익어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설지 않은 주제를 참신한 설정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간 점이나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는 데미 무어의 농익은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단, 비위가 약한 관객들에게는 비닐 봉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5-01-13 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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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국악이란 무엇인가2024년 7월부터 국악진흥법이 시행되었다. 법에서는 국악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예술적 표현 활동인 전통 음악, 전통 무용, 전통 연희 등과 이를 재해석․재창작한 공연 예술을 말한다.’고 하였다. 전통 음악뿐 아니라 춤과 연희 그리고 이를 소재로 창작한 공연 예술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정의한 것이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나라의 고유한 음악, 서양 음악에 상대하여 우리 전통 음악을 이르는 말’ 등의 풀이보다 한층 확장된 개념이다. ‘국악’ 하면 아리랑이나 판소리 정도 떠올리던 비전공자가 국악 소식지를 만들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악의 갈래를 적어보는 것이었다. 연행 형태, 향유 계층,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구분해 정리해보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국악의 면면에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우리나라 전통 예술이 이렇게나 다양하다고? 그런 것에 대해 이렇게나 몰랐다고? ‘국악 프롤로그’를 화두 삼아 ‘국악이란 무엇인가’를 되짚어보고, 어떻게 하면 초심자로 하여금 국악의 첫 장을 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시간이 4년 남짓 되었다. 조선 시대 궁중 음악과 춤, 민간에서 발생한 노래들과 연주곡, 춤, 연희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한 창작 음악․춤․연희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한 레퍼토리를 고루 소개하고 싶었다. 예술가와 국악기, 국악을 체험할 수 있는 공연이나 축제, 공간에 이르기까지 ‘맛보기’ 정도의 정보와 지식이나마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국악 소식지를 만든 십여 년과 국악 프롤로그를 연재한 4년의 결론은 같다. 답은 유튜브 속 어느 판소리 명창 공연 영상에 달린 댓글에 있다. “드라마 정년이 보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국악 프롤로그는 알게 하는 데까지다. 공자님 말씀처럼 좋아하는 것[好之者] 그리고 즐기는 것[樂之者]으로 나아가며 더 멋진 경지에 이르려면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하다. ‘나 국악 좀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2025년은 향유자들이 의지를 불태우기에 더없이 좋은 한 해가 될 것이다. 앞서 얘기한 국악진흥법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거는 해이기 때문이다. 국악의 보전․계승과 육성․진흥 그리고 국악문화산업 활성화를 목적으로 기본 계획 수립, 전문 인력 양성 등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을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명시해두었다. 국악의 날 지정도 그중 하나로, 올해 6월 5일에 우리는 첫 번째 국악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국악의 날을 포함한 국악 주간에는 우리 전통 공연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행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질 예정이다. 아울러 9월에는 영동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린다. 충북 영동은 ‘난계국악축제’를 50년 넘게 이끌어온 곳으로, 난계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박연의 호다. 박연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음악가로, 천재 군주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예악 정비를 실현해낸 인물이다. 영동은 난계 박연이 태어난 고장으로 그가 나고 자란 심천면 고당리 일대에는 영동국악체험촌이 들어서 있다. 체험촌을 비롯해 영동 일원에서 열릴 국악 엑스포는 30개 참가국과 100만 관람객의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총 사업비 160억 원을 투입해 8개 유형의 70가지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 포스터 ©영동세계국악엑스포조직위원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국악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전해온 그 사소함이야 말로 세파에 다친 마음을 보듬어 치유하고, 단단하게 무장한 평상심으로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아닐까. 2025년 새해에 국악이 더 많은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 국악에 다가서는, 여러분의 딱 한 걸음이면 된다. <필자소개>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5-01-07 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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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윤영의 뮤지컬 오버뷰 (Musical Over:view)
거짓에 가려진 진실, 사랑을 노래하다 / 뮤지컬 <마타하리>뮤지컬 마타하리 공연장면 ©EMK뮤지컬컴퍼니세상은 늘 선택의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 살을 엘 듯한 추위와 공포, ‘살아가는 법’ 대신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던 여인에게 눈앞에 놓인 선택은 자의보다 타의에 가까웠다.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던 그가 운명처럼 만난 인연을 통해 새 이름을 얻고 향한 곳은 또 다른 위험이었다.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설 기회 역시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 선택만큼은 달랐다. 희대의 스파이라 불린 ‘마타하리’는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을 기꺼이 ‘선택’했다. EMK뮤지컬컴퍼니의 창작뮤지컬 <마타하리>가 네 번째 시즌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지난해 12월 5일 서울 LG아트센터 LG SIGNATURE홀에서 개막한 뮤지컬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로 생을 마감한 무희 마타하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만큼 역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적절한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전개는 2022년에 선보였던 3연과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특정 캐릭터의 역할을 하나로 집중하면서 몰입감을 높이고, 무대 장치나 연출 등에 섬세한 변화를 주었다. 뮤지컬 마타하리 공연 포스터 ©EMK뮤지컬컴퍼니익숙함과 새로움이 공존한 캐스팅은 올 시즌 ‘마타하리’를 향한 기대감을 높였다. 먼저 타이틀롤 마타하리 역은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옥주현, 솔라가 다시 맡았다. 그리고 마타하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연인이자 곧은 신념을 지닌 프랑스 공군 조종사 아르망 역에는 에녹, 김성식, 윤소호가 이름을 올렸고, 마타하리를 향한 끝없는 집착 탓에 모두를 위기로 몰아넣는 프랑스 정보부 소속 대령 라두 역으로는 최민철, 노윤이 함께한다. 여기에 마타하리의 구원자이자 버팀목이 된 안나 역 최나래, 윤사봉, 야망으로 가득 찬 국방부 장관 펭르베 역 김주호, 홍경수가 같이 무대에 오르며 탄탄한 팀워크를 자랑한다. 뮤지컬 <마타하리>는 ‘마타하리’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 마가레타 거투르드 젤르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 마가레타는 네덜란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과 마주하게 된다. 살고자 했던 의지는 잔인한 운명 속에서도 찬란히 빛났다. 목숨을 끊으려 숨어들었던 숲에서 신비로운 자바 여인들의 춤을 본 마가레타는 마음 깊이 위로 받으며 고통스러운 과거를 잠시나마 묻어두고 새 삶을 위한 길로 나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안나가 꺼져가던 생의 불씨에 의지를 북돋는다. ‘새벽의 눈’이라는 뜻처럼 신비롭고도 고혹적인 무희 ‘마타하리’는 불안정한 시대상마저 잊게 할 만큼 매력 넘치는 춤으로 모두의 마음을 훔친다. 유럽 사교계 유명인이 돼 승승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불쑥 다가온 아르망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꿈꾸게 만든 또 하나의 의지였다. 전쟁 속에 피어난 사랑은 마타하리가 아닌 마가레타도 행복한 내일을 꿈꿀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마타하리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질투에 휩싸인 라두 대령의 계략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국경을 넘나들며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뮤지컬 마타하리 출연진 ©EMK뮤지컬컴퍼니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에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여인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은 베일에 가려진 슬픔의 깊이만큼이나 안타까우면서도 감동적이다. 누군가는 그를 그저 ‘국가의 명을 따르지 않은 배신자’나 ‘돈을 벌기 위해 몸을 던진 스트립 댄서’ 정도로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뮤지컬은 마타하리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면모에 주목했다. 독특하게도 마타하리 이야기가 무대 위로 펼쳐지는 동안 마가레타가 같이 등장해 마타하리의 과거와 내면을 표현하는데, 가상의 존재로서 복잡한 감정을 오직 춤으로만 표현하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거짓으로 포장해야 했으나 사실 누구보다 진실했던 여인의 삶은 무대 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며 안타까움을 더한다. 마타하리 역 솔라의 무대는 완성도 높은 작품에 넘치는 매력을 선사했다. 작고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와 안정적이면서도 폭발적인 가창력, 매혹적인 음색, 한층 더 성숙해진 연기가 좌중을 압도한다. 특히 <마타하리>의 핵심과도 같은 ‘사원의 춤’과 ‘마지막 순간’은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각인된다. 여기에 무한한 사랑으로 연인의 아픔을 감싸는 아르망 역 김성식과 이번 시즌 새롭게 합류한 라두 역 노윤도 조화롭게 어울린다. <웃는 남자>, <몬테크리스토>, <지킬 앤 하이드> 등 유명 뮤지컬 작곡을 맡은 프랭크 와일드혼과 작사가 잭 머피의 아름다운 음악 외 풍성한 볼거리 또한 <마타하리>의 강점이다. 프랑스 벨 에포크 시대를 재현한 고풍스러운 세트와 200벌이 넘는 배우들의 의상은 마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느덧 얼마 남지 않은 올 연말과 다가오는 연초를 풍성하게 장식할 <마타하리>는 오는 2025년 3월 2일까지 이어진다. <필자>최윤영 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 바 있다.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 왔고 현재 한국영상대학교 미디어보이스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으며,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2024-12-27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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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바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죽음의 섬>의 첫 번째 버전비탄과 두려움이 아닌 낭만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 Op.2920세기 러시아 후기낭만의 정점을 찍은 인물로 평가받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작곡가로 통하며 이는 티켓 파워로도 증명된다. 특히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영상이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장르를 뛰어넘어 라흐마니노프의 인기는 치솟았다.3개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들만으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라흐마니노프가 내놓은 교향시 <죽음의 섬 Isle of the Dead>은 비교적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작품으로 라흐마니노프 덕후라면 지나칠 수 없는 불후의 명곡이다.1907년 5월, 본인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의 협연자로 직접 나선 그가 파리에 머무르며 마주하게 된 그림 한 점. 스위스 상징주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klin)의 '죽음의 섬'이라는 스산한 타이틀의 작품으로 흑백 복제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에 착수하여 1909년 초연 무대에 올렸다.죽음이라는 모티브에 오랫동안 경도되었던 화가 뵈클린이 그린 죽음의 섬은 관을 실은 한 척의 배에 올라 섬으로 향하는 흰 옷의 인물과 가파른 절벽과 어우러진 섬 중앙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눈길을 끄는 작은 섬을 묘사하고 있다. 첫번째 약혼자와 사별했으며 열 네 명의 자녀 중 여덟 명을 먼저 떠내보낸 그에게 죽음은 그 누구보다도 가깝고 현실적인 개념으로 다가왔을 터. 뵈클린은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는데 그림 속의 인물은 그리스 신화에서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뱃사공 카론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무명의 뵈클린을 유명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은 5가지 버전이 존재하는데 1차 세계대전 중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엽서 그림으로 통했고 독재자 히틀러도 열렬한 팬으로서 세번째 버전을 소유한 바 있다.이 그림이 주목받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스산함뿐 아니라 고요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낭만성을 자아낸다는 점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죽음의 섬은 화가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죽은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그림을 주문한 '마리 베르나'라는 여성의 요청에 의해 그림의 주요 핵심인 사공과 관이 추가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죽음으로 인한 슬픈 이별에 대한 정서 이면에 화가 본연의 낭만적 정서가 감지되는 단서이기도 하다.이 그림을 묘사하고자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분명 마냥 침울하거나 어둡기만 하지 않다. 죽음을 암시하듯 어두운 색조의 저음부로 포문을 연 음악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후기 낭만시대 특유의 관현악 색채를 한껏 펼쳐내며 서정성과 낭만성을 뿜어낸다. 도입부의 5/8박자의 변박을 통해 묘사한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죽음'으로 전진하는 배, 곳곳에 장조의 악상을 안배하여 희망의 불씨를 살린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에 대한 이상, 덧붙여 레퀴엠의 '진노의 날(Dies Irae)' 테마를 심어놓아 죽음에 대한 숙연함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림 속의 죽음에 대한 물리적 실체는 회화적인 묘사를 뛰어넘어 자유롭고 아름다운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적 악상 속에 녹아들어 있다.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염세주의자에 가까웠던 라흐마니노프가 바라본 비탄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죽음의 섬'이라는 작품을 관조적으로 묘사함으로서 듣는 이로 하여금 무거운 정서보다는 고요함과 존엄함 그리고 그 저변의 낭만적 정서로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추천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v=dbbtmskCRUY<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4-12-23 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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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종원의 커튼 콜
한국 뮤지컬 시장의 신화가 되다_지킬 앤 하이드 킬러 콘텐츠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죽여주는’ 콘텐츠라는 의미로, 일종의 게임 체인저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을 말한다. K무비의 ‘쉬리’나 ‘기생충’, K드라마의 ‘오징어 게임’이 그런 존재다. 시장은 물론 업계의 판도마저 모두 바꿔버릴 정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대한민국의 뮤지컬계에도 킬러 콘텐츠가 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 공연가에 규모의 경제라는 가능성을 증명해 준 ‘오페라의 유령’, 중년 관객을 대거 공연장으로 불러 모았던 ‘맘마 미아!’, 민족이여 일어나라를 부르짖는 엔딩 씬이 국민적 울분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줬던 ‘명성황후’ 등이 대표적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남다른, 이름값 제대로 하는 우리 뮤지컬 공연가의 흥행작들이다. 그러나 뮤지컬이 대중문화적 성격을 띠는 상업적 공연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히 우리 공연가에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이뤄놓은 성과는 간과할 수 없다. 그만큼 상징적이고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대규모 국제 회의장이었던 코엑스 오디토리움을 개조한 공간에서 처음 막을 올린 이래 우리나라 공연시장, 특히 뮤지컬 산업의 외연을 확장시키는데 큰 족적을 남긴 신화가 됐다. 객석 의자 팔걸이 한쪽으로 테이블이 펼쳐지는, 공연장이기보다 강연장같은 공간에 음향시설도 그리 좋지못한 환경이었지만,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조승우’의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삽시간에 동나버리는 인터넷 예매표 판매나 서버마저 다운되는 풍경은 한참 세월 지난 요즘도 회자되는 이 뮤지컬의 진풍경이 됐다. 대학 입시나 일반 오디션 현장을 찾아가면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자유곡이 ‘지금 이 순간’ 혹은 ‘한때는 꿈에’인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얼마나 우리 대중과 배우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인가를 여실히 미루어 짐작케 한다. 원작은 스코틀랜드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이다. 원래 제목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관한 이상한 사건 보고서’다. 런던에서 일하는 변호사인 가브리엘 존 어터슨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지킬 박사와 지옥에서 온 듯 잔인했던 사내 하이드씨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을 2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기술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1886년 발표됐던 원작 소설은 단지 추리물로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나 내면, 정신분열증, 특히 한 사람의 내면에 여러 다양한 인격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내용을 담아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미권에서는 아예 ‘지킬과 하이드’라는 표현 자체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기 내면의 또다른 자아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으로 쓰일 정도다. 일설에 의하면 스티븐슨 스스로가 환각제를 먹고 이 소설을 썼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소설 집필 당시 그는 인근의 병원으로부터 ‘맥각’이라 불리던 버섯류의 환각제 치료를 받았던 기록이 있기 때문인데, 사실 여부야 어쨌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인격분리의 생생한 체험은 아마도 그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튼 소설 자체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출판 첫 해에 4만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10여년 세월 동안 25만부가 팔려 스티븐슨이 집필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됐다. 소설의 인기는 수많은 파생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그마치 120여종이 넘는 영화의 등장으로도 이어졌다. 물론 이는 여러 패러디나 괴물(?) 캐릭터로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에서의 활용 등은 제외한 수치로, 만일 이마저도 포함시킨다면 파악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소설을 뮤지컬을 만든 사람은 프랭크 와일드혼과 영국 태생의 극작가 레슬리 브리쿠스다. 처음 아이디어를 구상했던 80년대 후반에는 작곡가 와일드혼이 작가였던 스티브 쿠덴과 초안을 마련하며 제작을 시도했으나 투자자를 찾지 못해 결국 좌절했고, 훗날 브리쿠스가 새롭게 크리에이티브 팀으로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뮤지컬화가 궤도에 오르게 됐다. ‘지킬 앤 하이드’의 흥행이 유독 우리 시장에서 더욱 폭발적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브로드웨이에서 선보였던 오리지널 캐스트의 공연은 맨해턴 45번가의 플리머스 극장에서 1997년 시작돼 5년 여간 1500여회의 공연을 이어갔다. 비교적 장기에 걸친 공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킬 앤 하이드’는 브로드웨이 공연판의 전형적인 흥행적으론 손꼽히지 못한다. 종연 후 남게 된 대규모의 손실이 큰 탓인데, 초기 투자비였던 7백만 달러의 약 75% 가량만을 회수하는 ‘망작’ 수준에 머물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기 위해 스키드 로우의 리드 싱어였던 세바스찬 바흐나 늘씬한 미녀들이 해변을 거니는 ‘베이 워치’ 그리고 인간과 대화하는 자동차가 등장했던 ‘전격Z작전(원제는 나이트 라이더였다)’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인기 TV 탤런트 데이비드 하셀호프 등 스타 캐스팅을 활용하는 무대를 꾸몄지만, 역시 흥행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던 셈이다.투자비를 건지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뮤지컬로서의 인기마저 외면당했다 뜻은 아니다. 사실 ‘지킬 앤 하이드’의 명성은 흥행 뮤지컬로서가 아니라 음악적 매력에서 기인됐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제작되어진 음반의 종류도 다양하다. 처음 화제가 된 것은 본격적인 무대 개막에 앞서 음악을 선보이기 위한 콘셉 앨범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이 올려지기 훨씬 이전인 1990년에 공개됐는데, 흥미로운 것은 아직 본격적인 공연이 올려지기 이전이라 지킬박사를 맡은 배역이 하이드씨를 연기하듯, 뮤지컬 배우 린다 에더가 지킬의 약혼녀인 리사(훗날 엠마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와 사창가 밤무대 여인인 루씨 역을 모두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음반은 훗날 뮤지컬 애호가들로부터도 희귀음반이라 불리는 인기를 모았고, 음악이 좋은 뮤지컬이라는 명성도 얻게 했다. 나라나 도시마다 성공적인 공연이 등장하며 여러 언어로 번안된 라이선스 공연 음반들도 등장했다. 1997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는 프랑스 음반이 발표됐고, 1999년 독일 베르멘에서는 독일어 버전이 처음 공개됐다. 이어 스페인 마드리드 캐스트, 헝가리 부다페스트 캐스트, 오스트리아 비엔나 캐스트, 일본 토쿄 캐스트, 체코 프라하 캐스트, 스웨덴 스톡홀름 캐스트 음반이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진기록을 이어갔다. 우리말 버전의 음반은 2004년과 2008년에 각각 만들어졌는데, 앞의 경우가 하이라이트 음반의 성격이 강했다면 훗날 제작된 앨범은 전곡 수록 및 전 캐스트의 참여 앨범이어서 특별한 의미가 담긴 사례로 남게 됐다. 매번 앙코르 무대가 꾸며질 때마다 완성도를 더한 무대와 극 전개의 간결함, 조화롭고 역동적인 앙상블의 호흡은 2024 앙코르 공연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들의 세대교체도 눈에 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로 나오는 홍광호의 인기는 극장 천장이라도 뚫을 기세지만, 함께 출연하는 전동석과 김성철의 무대 역시 도전적이고 매력적인 무대를 잘 선보이고 있다. 관록의 여배우 윤공주는 선민, 김환희와 무대를 꾸미고 있고, 최수진과 손지수의 엠마도 안정적이다. 정상급 역량의 주연들과 흥미로운 세대교체가 작품의 생명력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지킬 앤 하이드’는 특히 남자 주인공이 멋있는 작품이다. 1인 2역의 매력 탓이다. 커튼콜이 가장 인상적이란 세평도 있다. 최고의 장면은 ‘지금 이 순간’이 불리는 실험실의 모습이다. 지킬 박사가 처음으로 하이드씨로 변하는 숨 막히는 격정을 선보인다. 2막 후반부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동시에 연기하는 ‘대면’도 수많은 패러디가 만들어진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얼굴의 반쪽이 지킬이고, 다른 쪽이 하이드인 극중 묘사는 배우에게는 난이도가 높아 괴롭지만 관객에게는 상상을 자극하는 매력을 만들어낸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의 이중성과 흡사하다고 할까. 할 말 많고, 사랑도 많이 받는 흥미로운 뮤지컬 작품이다.<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2024-12-16 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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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서울역 인근, 국내최초 장애예술인 활동을 위한 전시공간 개관 2024년 12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국내 최초로 장애예술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각예술전문 전시공간 '모두미술공간'을 개관한다. 전시 《감각한 차이》는 이를 기념하는 매우 의미 깊은 전시이다. 서울역이라는 장소는 아마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장소적 상징성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뛰어난 국내 철도 교통의 허브라는 점이다. 12월, 이곳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별관 5층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공들여 준비한 <모두미술공간>이 새롭게 출발한다. 모두미술공간은 국내 최초로 마련되는 시각예술분야 장애예술 전문 공간이다. 장애예술과 장애예술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신진 장애예술가 발굴을 목표로 조성된 전시공간으로 해외에서도 그 사례를 자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엄정순 예술감독, 보는 가치에 대한 우화적 서사 이번 개관전 《감각한 차이》의 엄정순 예술감독은 ‘보는 것’에 대한 근원적 물음의 답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를 통한 서사적 작업으로 풀어내 온 미술작가이다. 동시에 27년 동안 아트랩 ‘우리들의 눈’ 디렉터로 시각장애인들에게 시각예술을 가르쳐 온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애’에 대한 관점부터 남다르다. 엄감독은 이번 전시를 기획하며 ‘장애’와 ‘장애예술’을 ‘감각’과 ‘감수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대입하여 제안하였다. 장애라는 단어를 감각의 결핍이 아닌, 감수성이라는 예민함을 통해 발현되는 창의성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의 당연한 감각의 사용을 불가피하게 대체된 감각으로 재배치하는 장애인들의 능력은 부족함이 아닌 예민함으로 시각화되며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비일반적인 신체언어를 구사하는 과정에서 수집되는 경험의 조각들을 비일상적 채널로 배출해 내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일상이자 우리에겐 특별함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개관전에서는 장애와 비장애, 신진과 경력 등을 구분 짓지 않고 각자가 경험한 감각의 차이를 작품으로 표현한 작가 5팀(6인)으로 구성, 이들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담담하게 풀어낸다.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AI를 활용한 테크환경으로 관객들이 전시를 경험하며 불편하지 않도록 모두를 위해 높은 관람접근성을 제공하도록 배려하였다. 전시장에서의 기본적인 작품해설은 물론, 전시 환경과 관람 방법까지 스마트폰만 있다면 누구나 폭넓게 제공받을 수 있어, 무장애(Barrier-free)를 넘어 포괄적(inclusive) 전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를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접근성 매니저를 통해 전시장을 관리하며 쉬운말 해설, 시각장애인 사전 관람 등의 환경을 조성, 장애예술 씬에서의 예술적 의미와 기술적 환경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점자와 사운드로 만나는' 감각의 차이 전시는 두 개의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제1전시실은 하나의 감각이 변환되며 다른 관점으로 표현되는 ‘감각의 차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전시는 엄정순 감독이 직접 디렉팅한 <감각의 벽> 작품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물리적 경험을 선사할 270권의 점자책이 바람에 흔들리는 상태로 구현될 이 작품은 다감각으로 접근하는 미디어 인터렉티브 작품이다. 입력을 기다리는 화면에는 질문이 표시되며 관객의 답변은 점자로 변환되어 점자책 위에 투사된다. 물리적 언어 위에 디지털 언어라는 레이어가 중첩되는 것이다. 이 점자는 0과 1로 구현되는 디지털 시스템의 원리에 맞춰 AI의 도움과 사운드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조화로운 5도 화음으로 매칭된다. 64가지 경우의 수가 관객의 언어에 따라 새롭게 조합되며 모두가 다르게 선택한 나만의 차이를 촉각과 시각, 그리고 청각까지 연계된 반응형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 원우리 <96 BPM(스틸컷)>_단채널 영상 고정매체, 흑백, 2채널 사운드, 빔프로젝터 벽면 투사, 00:07:27_ 2024 (사진 촬영_ 현진식)작곡가이자 사운드 아티스트인 원우리의 영상작품 <96 BPM>은 그가 보청기 사용자인 무용수 고아라와 함께 2년간의 협업을 통해 창작한 작곡의 결과물이다. 작가는 작곡의 과정과 결과를 극도로 추상화하면 그 본질은 긴장과 이완이며 이는 결국 들숨과 날숨이라는 관계를 통해 호흡으로 지속된다고 말한다. 무용가의 몸짓을 통해 긴장과 이완이 담긴 음악적 대화를 7분 남짓의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하였다. 김령문, 백승현 부부작가의 코너 <언덕 위의 파도>는 서로 다른 주제로 작업해 온 두 작가가 낯선 세계와 마주할 때 깨어지는 감각의 경험과 그로 인해 확장되는 새로운 차원의 감각을 설치와 영상 작품으로 담아낸다. 관객 참여형 작품인 김령문의 작업은 언덕 위에서 석고로 제작된 ‘곱고 소중한’ 구를 굴러 떨어뜨려 깨뜨리는 대형 설치작품이다. 백승현의 앞으로 던지기 작업은 독일 유학 중 빵집에서 겪은 밀가루 반죽의 노동 과정을 흙덩어리로 치환, 작가로서의 정체된 상황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통해 실존적 감각으로 풀어낸다. 신진 장애예술가의 탄생과정을 톺아보다 제2전시실은 새로운 장애예술 작가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다양성 및 장애예술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성장하는 작가와 해외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서 장애예술가가 탄생하기 위한 배경과 과정을 톺아보는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좁은 시야를 가진 박찬별 작가는 아트랩 ‘우리들의 눈’을 통해 어릴때부터 미술 전문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술대학에 진학했고, 비장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좁은 시야를 자신만의 특화된 감각으로 활용한 100여 점의 ‘0호 캔버스’ 작품 <나, 그리고 백 개의 망원경>으로 자신만의 관점을 선보인다. 서귀포의 미술 커뮤니티 ‘사단법인 누구나’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강승탁은 호랑이, 늑대 같은 맹수를 화려한 색감으로 즐겨 그리는 발달장애 작가이다. <무지개 호랑이>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작가는, 어느덧 이를 통해 껍질을 벗고 작업에 몰두한다. “그림을 그리는 즉시 행복해진다”라고 말하는 그는 멘토링과 개인전 등 커뮤니티의 지원을 통해 예술적 역량을 키워가며 활동하고 있다. 강승탁 <무지개 늑대> 캔버스에 아크릴릭_73x53cm_2021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회화 작품과 더불어 아카이브 영상을 소개, 그의 내면세계를 심도있게 관찰해본다. 동경 시내 교통의 요지인 시부야에서 장애 커뮤니티 <시부야 폰트>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디렉터 라일라 카심은 지역 미술 워크숍을 통해 시작된 장애인들과의 연대를 기관과 일반인까지 연결한 성공사례를 보여준다. 스스로도 휠체어 이용자인 그는, 커뮤니티가 겪는 고립을 최소화 하기 위한 노력으로 디자인 스쿨과의 연계 프로세스를 통해 오픈소스를 개발, 판매까지 이어왔고 각종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였다. 장애인들의 스케치를 폰트와 패턴으로 생산해 내고 있으며 유니클로, 구글폰트 등 세계적 브랜드와 협업하였다. [감각한 차이] 공식포스터 전시명 : 감각한 차이 Sensing Difference일정 : 2024. 12. 12.(목) ~ 2025. 02. 07.(수)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연휴 휴관 (입장료 무료)참여작가 : 강승탁, 김령문x백승현, 라일라 카심(Laila Cassim), 박찬별, 원우리(WONWOORI) 총 5팀(6명) 라운드 테이블 : 2023. 12. 20. (금) 14~15:30 모더레이터 안현정 / 패널: 박찬별, 손영옥, 엄정순, 정현, 홍해지 <필자소개> 안현정씨는 예술철학전공 철학박사출신의 문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관, 유중재단 이사,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24-12-09 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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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병준의 클래스토리
누가 악보대로 연주하래?방영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해설에 감탄하며 보게 되는 클래식 음악 입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번스타인(L. Bernstein, 1918~1990)이 이끌었던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Young People’s Concerts)’ 시리즈입니다. 1958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CBS 방송사를 통해 전파를 탄 이 시리즈는 총 53회 방영되었습니다. 청소년이라고 하면 보통 중고등학생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제 방영 화면을 보면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객석에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어린 청중들 앞에서 번스타인이 풀어낸 다섯번째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고전음악이란 무엇인가? (What is Classical Music?)” 여기에서 번스타인은 우리가 흔히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장르의 음악과 비교해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정의한 클래식 음악은 이것이었습니다. ‘정확한(exact) 음악’. 작곡가가 악보에 기록한 대로 연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지요.클래식 음악은 정말 악보대로 연주하는 음악일까요? 오래 전 기록된 악보를 탐구하고 당대의 연주 관습도 연구해가며 작곡가의 의도를 소리로 표현해내려 노력하는 음악가들을 보면 이 정의는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클래식 음악 연주를 살펴보면 지휘자나 연주자 혹은 가수가 ‘의도적으로’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번스타인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 자신도 악보를 수정하여 지휘하곤 했으니까요. 다만, 그가 내린 정의는 어린 청중들 앞에서 보다 보편적인 클래식 음악의 특성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는 관습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야는 바로 오페라입니다. 악보에는 적혀져 있지 않은 고음이 추가되기도 하고, 어느 부분이 통째로 삭제되거나 추가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베르디(G. Verdi, 1813~1901)의 대표적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1막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 비올레타(Violetta)의 긴 아리아 ‘이상해 … 아 그인가 … 언제나 자유롭게(È strano! … Ah, fors’è lui … Sempre libera)’가 나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진실된 사랑에 떨리는 마음을 느리게 노래하는 전반부와 그 사랑을 부정하며 현실에서 즐겁게 살아갈 것이라고 빠르게 노래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는 아리아이죠. 통상적으로 이 아리아의 느린 부분에서는 같은 선율이 가사만 달리한 채 반복되는 부분이 삭제되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베르디가 적어놓지 않은 긴 고음이 추가됩니다. 드물게 공연되는 오리지널 버전과 비교해보면 통상적인 버전은 2분 정도의 긴 반복을 덜어냄으로써 곡의 흐름에 속도감이 한결 더해졌으며 마지막 고음의 추가로 보다 화려하게 마무리되지요.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출처: opera-online.com테너의 고음을 들을 수 있는 유명한 아리아로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에 나오는 만리코(Manrico)의 아리아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Di quella pira)’가 있습니다. 힘찬 느낌으로 진행되는 이 아리아의 절정은 마지막에 테너가 내는 높은 도(High C)음에 있으며, 모두가 그 음을 기다리지요. 테너 도밍고(P. Domingo, 1941~ )가 그의 자서전 ‘나의 첫 인생 40년(My First Forty Years)’에서 “테너들은 그 소리를 내려고 피가 마르는 듯하며 그 때문에 궤양이 생길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던 이 음은, 고생하는 테너들에게는 억울하게도 베르디의 악보에는 없습니다. 베르디는 그보다 낮은 솔(G)을 썼을 뿐이었지요.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도 불분명한 높은 도로 끝나는 관습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서, 도밍고에 따르면 이 높은 음을 낼 수 있는 테너를 찾지 못해 전체 오페라 제작이 때로 무산되기도 할 정도라고 합니다.높은 고음 한 두개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관현악곡이 오페라 중간에 추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에서인데, 전체 2막으로 된 이 작품에서 2막의 마지막 장면 직전에 그의 레오노레 서곡 제3번이 삽입되곤 합니다. 거의 15분이 소요되는 이 거대한 서곡이 극 중간에 추가되는 것은 말러(G. Mahler, 1860~1911)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 전체 흐름이 조금 어색해지는 느낌은 있지만, 듣는 재미를 더해주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측면이 분명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오페라처럼 극 음악이 아닌 기악음악 분야에서는 어떨까요? 오페라에서처럼 두드러지는 느낌은 아니지만, 기악곡에도 악보와 일부러 다르게 연주하는 관습은 존재합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J. Strauss II, 1825~1899)로 대표되는 빈 왈츠를 전통적으로 연주할 때가 그 한 예입니다. 악보에는 왈츠 특유의 3박자 리듬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만 실제 연주할 때에는 두번째 박을 조금 일찍 세번째 박을 조금 늦게 연주함으로써 악보 그대로의 연주보다 생동감 넘치는 매력적인 왈츠가 탄생합니다.왈츠보다 더 진지하게 다가오는 음악, 이를테면 베토벤의 교향곡에도 악보와 다르게 연주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824년 완성된 교향곡 제9번 <합창>입니다. 곡의 2악장에서 목관 악기의 선율이 현악기에 묻혀버린다는 문제가 19세기에 이미 제기되었지요. 바그너(R. Wagner, 1813~1883)는 금관 악기인 호른이 목관 악기의 선율을 같이 연주하게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악보를 바꾸어서라도 선율이 잘 드러나게 하는 것이 작곡가의 의도를 살리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바그너의 이 방식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 많은 지휘자들에 의해 선택되었습니다. 많은 음반에서 이를 들을 수 있으며, 원전성이 많이 강조된 요즘에도 이 방식을 택하는 지휘자들이 존재합니다. 2010년에 틸레만(C. Thielemann, 1959~ )이 빈 필을 지휘한 영상을 보면 이 부분에서 카메라가 아예 호른 연주자들을 비춰주는 것도 볼 수 있지요.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왜 작곡가가 기록한 대로 연주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작곡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악보에 적힌 것을 따르려 노력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각 시대마다 연주 관습이 존재하며 이는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악보에 없는 음을 추가하거나 악보의 일부를 삭제하는 것도 이러한 관습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겠지요. 무조건 악보 그대로의 연주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오페라에서의 관습에 대한 도밍고의 말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베르디 자신도 자주 삽입과 삭제를 허용하였고, 더욱이 마구잡이로 뜯어고치는 일과, 용인할 수 있거나 유익한 관행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20세기 초반과 비교하면 현재는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의 중요성이 많이 강조된 시대라고 합니다. 이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어떻게 변화해갈 지 지켜보는 것은 과거의 관습을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롭지 않을까요?추천영상: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 (La donna é mobile)’ 입니다. 젊은 파바로티가 노래했는데, 악보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영상입니다. 시원한 고음으로 노래를 마무리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만, 정작 베르디의 악보와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지요. 베르디가 이 버전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합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vBnkRdyzRcE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2024-11-29 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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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왁스만 VS 사라사테
바이올린으로 듣는 명곡, 오페라 카르멘 19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데 사라사테오페라 <카르멘>은 스탠더드 레퍼토리로서 오페라 속의 서곡이나 아리아만 잘 알려진 게 아니라 오페라 전반에 걸친 음악 대부분이 일반 대중들의 귀에 익숙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클래식이다.작곡가 조르주 비제 특유의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와 낭만적 화성이 발군의 시너지를 내며 다양한 작곡가들이 앞다퉈 음악을 차용하거나 편곡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바이올린 레퍼토리에서 오페라 카르멘의 주선율을 주제로 가장 널리 연주되는 작품은 무엇일까. 현재 스페인 출신 작곡가 파블로 데 사라사테가 편곡한 '카르멘 환상곡'과 미국의 영화음악 작곡가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각각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며 골고루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세기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의 카르멘 환상곡 속에는 바이올린이 구사할 수 있는 갖가지 테크닉이 녹아있고 성악을 기악적으로 멋지게 탈바꿈시킨 거장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난이도가 높은 더블 스톱( 두개의 줄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을 비롯하여 하모닉스, 피치카토 등 현란한 현악 연주 기법들이 곳곳에 안배되어 있다는 사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아리아로 손꼽히는 '하바네라'에서 주선율을 장식음들로 꾸며 다양한 음역대를 활용한 점에 있어서 거장의 솜씨가 느껴진다.이 작품의 탁월함은 워낙 악기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작곡가의 작품인지라 심플한 카르멘의 선율에 다채로운 바이올린의 테크닉적인 요소를 덧입혀 원곡의 감성은 살리면서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소적인 면모를 확실이 챙겼다는 점이다. 영화 <선셋대로>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프란츠 왁스만왁스만은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음악 작곡가답게 직설적이면서도 극적인 효과를 노린 음악어법을 사용했다. 언뜻 생각해보면 할리우드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바이올린을 위한 클래식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 있을 터. 독일계 유태인이었던 왁스만은 드레스덴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던 정통파로 나치의 탄압을 피해 L.A에 정착하여 명성을 떨친 영화음악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1946년 영화 '유머레스크'에 삽입되었던 '카르멘 환상곡'을 접한 명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의 권유에 응한 왁스만은 이 음악을 콘서트용 음악으로 확장, 지금의 카르멘 환상곡이 탄생하게 되었다.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은 낮은 음역대에서 단숨에 4옥타브 위로 솟아오르는 강렬한 솔로 도입부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자아낸다. 현악기에 해당하는 디테일하고 다양한 기법들보다는 오리지널 선율 중심으로 빠른 패시지를 부각시켰으며 예를 들어 더블 스톱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속도감에서 오는 현란한 효과를 노렸다. 왁스만은 곡의 엔딩 또한 폭주하는 템포 속에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튕기어 소리를 내는 기법)를 활용하여 곡의 말미를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어떤 면에서 할리우드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사라사테와 왁스만 두 작품 모두 오페라 카르멘에 등장하는 음악을 선곡함에 있어서도 탁월함이 돋보인다.5개의 악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사라사테의 카르멘 환상곡은 4막 간주곡 '아라고네즈'로 포문을 연 뒤 잘 알려진 '하바네라', 이중창 '세비야 성벽 근처'등 인기 있는 선율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열정적인 도입부를 시작으로 고즈넉한 3악장을 지나 '세비야 성벽 근처'의 관능적인 선율에서 이어 화려한 엔딩으로 선택된 집시의 노래 (Les Tringles Des Sistres Tintaient)는 빠른 템포로 휘몰아치는 쾌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경쾌한 오페라의 오리지널 서곡으로 시작하는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은 순서는 다르지만 '하바네라', '아라고네즈', 이중창 '세비야 성벽 근처' 등 마찬가지로 카르멘을 대표하는 곡들로 엮여있으며 사라사테의 왁스만과 비교해 선율적인 측면에서 좀 더 담백하게 편곡되어 주 멜로디가 더욱 명징하게 들리는 특징이 있다. 또한 빠른 스케일 속에 간간이 들리는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현대미가 돋보인다. 바이올린 테크닉적인 측면에서는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라사테가 좀 더 밀도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 또한 매력적인 이유는 오페라 카르멘의 오리지널함과 'show'적인 요소를 한껏 머금은 바이올린의 기교가 맞물리며 최상의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오페라 카르멘의 매력적인 주선율과 더불어 바이올린의 다채로운 기교를 맘껏 접할 수 있는 카르멘 환상곡은 클래식 입문자에게 있어 클래식을 더 가까이하고 싶게 만드는 완벽한 촉매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24-11-22 1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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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추억을 소환하는 명곡들의 향연, ‘베놈: 라스트 댄스’ 베놈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베놈: 라스트 댄스’(감독 켈리 마르셀, 이하 ‘라스트 댄스’)가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순항중이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심비오트’는 소름끼치는 이빨과 징그러운 혀, 음산한 목소리를 가진 외계생명체다. ‘에디 브룩’(톰 하디)과 한 몸이 된 ‘베놈’은 다혈질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심비오트로, 에디를 종종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3편까지 오는 동안 에디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자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안티히어로로서의 캐릭터가 잘 구축되었는데, 이제 조금 적응이 되나 했더니 이별을 고한다. ‘라스트 댄스’는 베놈이 작별의 수순을 차근히 밟아 종극에는 섭섭함과 아쉬움을 폭발시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40대 이상의 추억을 소환하는 노래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는데, 각 장면마다 가사와 리듬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강한 인상을 남긴다. 베놈이 말의 몸과 결합해 에디를 태우고 위험천만한 레이싱을 펼치는 장면에는 퀸의 ‘돈 스탑 미 나우(Don’t Stop Me Now)’가 삽입되어 웃음을 유발시키고, 베놈이 첸아주머니와 함께 스위트룸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는 아바의 ‘댄싱 퀸(Dancing Queen)’이 사용되었다. ‘댄싱 퀸’은 다소 진부한 선택이었지만, 두 사람(?)이 합을 맞추며 추는 춤에 이만큼 어울리는 곡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에디를 라스베가스까지 태워다주는 친절한 ‘마틴’ 가족은 캠핑카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스페이스 오더티(Space Oddity)’를 부른다. 우주선을 타고 떠난 톰 소령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담긴 이 노래는 어쩐지 외계생명체와 지구인의 신비로운 동행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에디가 베놈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마지막 신에서 흐르는 곡은 마룬 파이브의 ‘메모리즈(Memories)’다. 마룬 파이브의 리더, 애덤 리바인이 절친한 친구였던 조던 필드스테인을 추모하며 만든 이 노래는 한 몸이었던 에디를 위한 베놈의 희생을 기리기에도 더없이 적절한 곡이다. 이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관객들도 많은데, 베놈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가사를 계속 되뇌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널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Cause I can’t reach out to call you, but I know I will one day, yeah)’ 윤성은의 Pick 무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공포의 근원, ‘롱레그스’ ‘롱레그스’(감독 오즈 퍼키스)는 미국에서 1억 천 달러 이상의 극장 수입을 거둬들인 ‘올해의 독립영화’다. 여성 FBI 요원이 연쇄살인마를 쫓는다는 설정 때문에 개봉 당시 ‘양들의 침묵’(감독 조나단 드미, 1991)과 비견되며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은 비록 개봉 이후 상당 부분 과장된 것이라는 실관람객 리뷰들로 덮이게 되었지만, 공포영화로서 이례적인 흥행만으로도 이 영화가 특별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롱레그스’는 1974년 오리건주의 한 소녀가 집 앞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4:3 비율의 화면에 보이는 외딴 2층집과 을씨년스러운 설경 안에서 이 의문의 남자는 소녀에게 이상한 말들을 건네는데, 처음에는 소녀의 눈높이를 보여주려는 듯 남자의 입까지밖에 화면에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부분에서야 괴기스러운 사운드와 함께 얼굴 전체가 드러난다. 자신을 ‘롱레그스’라 말하는 남자, ‘코블’(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은 여느 사탄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기괴한 메이크업으로 뒤덮여 있다. 이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롱레그스’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 중 하나로, 이 영화가 시간적 순서나 논리에 구애받지 않는 한 편의 악몽이라면 꿈에서 깬 뒤에도 계속 떠오를 이미지 중 하나다. 다음 장면은 90년대 중반에 FBI 요원이 되어 있는 그 소녀,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불안한 얼굴로 넘어간다. FBI는 지난 30년간 열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내와 딸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을 조사중이다. 신입 요원임에도 초능력이라 할 만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리는 중요한 단서들을 척척 찾아내더니 모든 사건의 배후에 코블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집에 침입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리는 코블에게 공범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더 깊숙이 사건을 파헤치다가 급기야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롱레그스’에는 관객을 갑자기 놀래키는 장치(점프 스케어)도 거의 없고, 초자연적 존재가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드는 종류의 공포도 없다. ‘세븐’(감독 데이빗 핀처, 1995)처럼 범죄 미스터리물로서의 서사가 탄탄하거나 경악할 수준의 반전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신들의 응집력이 다소 떨어지고, 설명이 생략된 부분이 많아 이야기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기도 어렵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에게 ‘롱레그스’가 통했던 것은 이 영화에서 혼란에 빠진 동시대 미국 사회의 초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딸이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는 아버지, 아주 오래전 물건들까지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는 과거라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구세대를 표상한다. 일부러 원래 시간적 배경보다 더 먼 과거처럼 꾸민 세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던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미국은 가부장적인 아버지, 남편에게 순종적이기를 강요당했던 주부들을 양산했고, 딸들 또한 인형과 동일시되는 삶을 세뇌당했다. 오즈 퍼킨스 감독은 가장 친근하고 무해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와 가정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존재를 종교인과 인형, 검은 연기 등으로 표현해냄으로써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다. ‘롱레그스’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응당 미국과 같은 흥행 성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공포의 근원을 대입해 볼 때, 분명 공감할 만한 지점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필자소개>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4-11-15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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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국악 Prologue!
이날치의 귀환 11월 5일, 밴드 이날치의 신곡이 발매됐다. ‘발밑을 조심해’와 ‘봐봐요 봐봐요’ 두 곡이 첫 번째 싱글 「낮은 신과 잡종들」에 실렸다. 2집 정규 앨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발밑을 조심해’는 애니메이션으로, ‘봐봐요 봐봐요’는 다시 한 번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합을 맞춘 뮤직비디오로 제작해 유튜브에 공개했다. 매달 싱글을 발표해 총 열두 곡으로 완성될 2집에는 새로이 만들어 낸 세계관을 바탕으로 엮은 이야기가 담길 예정이다.이날치 신곡 ‘낮은 신과 잡종들’ ‘이날치’는 원래 판소리의 중흥기라 일컬어지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의 이름이다. 19세기 초는 판소리 열두 마당이 갖추어졌으며, ‘전기 8명창’이라 불린 명창들의 시대였다.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김제철, 신만엽, 송광록, 박유전, 황해천, 주덕기, 김성옥 등이 이에 속한다. 음악적으로 풍성해진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했던 소리꾼들은 이들과 구분하여 ‘후기 8명창’이라 하는데, 이날치를 비롯해 박만순,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정근, 송우룡, 김창록, 김찬업 등이 당대의 명창들이다. 8명창이라고 하나 이론가들에 따라 견해가 달라 전․후기 각각 십여 명의 소리꾼이 거명되곤 한다.1939년 조선일보에 이때의 명창들을 소개한 ‘조선소리 내력기’라는 글이 실렸는데, 후기 명창을 소개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우후죽순의 기세로 일어났던 명창들의 이름을 열거하여 보면 전해종, 신만엽, 김세종, 정창렬, 정춘풍, 김정근, 이날치, 방만춘, 박만순 등으로서 이들 중에서도 ‘이날치’가 그중 유명하였다. (중략) 이날치의 제자로서 배희근, 이창윤, 김채만 같은 명창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판소리 중고제 명창인 심정순의 아들이자 국악 이론과 실기를 겸비했던 심재덕이 쓴 글로, 후기 명창 중 이날치를 첫손에 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날치는 시대를 풍미한 명창들 사이에서도 도드라지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예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거나,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거나, 어려서부터 소리꾼의 자질이 뚜렷했다거나 하는 전사(前事)는 애초에 그의 몫이 아니었다. 전라남도에서 태어나 머슴으로 살던 그가 광대들과 어울리다 줄타기 명인이 되었고, 소리꾼을 꿈꾸며 열 살도 더 어린 박만순과 박유전의 문하생을 자처하여 수련해 득음에 이르렀고 마침내 국창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극적이다. 명창 박만순의 수행 고수를 하다가 푸대접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이날치는 절차탁마한 끝에 박만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창이 되었다. 식자층의 애호를 받았던 박만순에 비해 이날치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은 소리꾼이었다 한다. 새소리, 종소리 등을 똑같이 흉내 내어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정말 새가 날아들었다는 일화, 심청가 몇 대목을 불러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재상을 울린 일화 등도 초상화 한 점, 녹음 한 점 남기지 않은 19세기의 인물을 단숨에 한 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부상시키기에 손색이 없다.국립창극단 ‘이날치전 ’ 공연 포스트국립창극단은 11월 14일부터 창작 창극 <이날치傳>을 선보인다. 기록으로 남은 이날치의 삶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대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간 예인의 일대기를 되살려낼 예정이다. 이날치 역은 이광복과 김수인이 번갈아 맡아 40여 명의 출연진과 무대에 오른다. 줄광대 시절의 이날치를 보여주기 위해 줄타기 신동으로 알려진 남창동도 대역으로 나선다.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박만순, 송우룡, 김세종, 박유전 등 실존 인물들도 소환된다. 명창마다의 특징이 드러나는 소리 작창은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인 윤진철 명창이, 연출은 창작집단 타루의 정종임 대표가 맡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물러가고 어느새 올해도 끝자락이다. 어깨와 발목에 매달린 일들은 다를 바 없는데, 해가 저문다 하니 괜히 조바심이 인다. 날쌔게 줄을 잘 타서 혹은 성격이 칼날 같아서 날치라 불렸다는 사나이. 머슴에서 줄광대로, 고수로, 소리 광대로, 끝내는 국창으로까지 불렸다는 그의 서사가,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부르는 노래가 우물쭈물하다 한 해의 끝에 다다른 우리를 다독이는 것 같다. 괜찮아. 늦지 않았어. 가만히 가만히 조용히 조용히 봐봐요 봐봐요. 이날치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LEENALCHI <필자소개>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2024-11-08 09: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