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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 의약품의 오남용에 대한 단상
2018. 2. 7일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2016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의 항생제사용량이 34.8 DDD(Defined Daily Dose)로 집계되어 OECD 국가 중 1위이다. 이 수치는 하루 동안 1000명중 34.8명이 항생제 처방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국내 항생제 처방은 의약품사용량을 집계하기 시작한 2008년 26.9 DDD에서 꾸준히 늘어 2013년 30 DDD를 넘어섰고 2014년 31.7 DDD로 정점을 찍은 뒤 2015년 31.5 DDD로 미미하게 줄었다가 2016년에 다시 전년에 비해 10.4% 증가하면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OECD 건강통계 2017’에 보고된 2016년 기준 OECD 평균항생제 소비량은 21.1 DDD로 국내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가장 적게 처방하는 스웨덴 13.7 DDD의 2배 이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항생제 내성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국민보건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별 항생제 내성률은 한국 67.7%, 일본 53%, 프랑스 20.3%, 영국 13.6%이다. 항생제의 내성이란 세균이 항생제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 항생제의 효과가 없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항생제 내성이 발생하는 원인은 항생제의 오남용 때문이다. 병원성 세균이 항생제 내성을 갖게 되면 치료가 어려워 심한 경우 환자의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
한국의 항생제사용량은 OECD국가 중 1위이다
우리국민의 의약품사용실태를 보면 총진료비 중에서 약제비가 점유하는 비율이 매우 높아 2015년 기준 32.4%로 OECD국가 중 1위이어서 의약품 과다사용에 따른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의료보험 진료환자 중 의약품을 처방받은 환자는 85.8%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특히 입원환자에 대한 처방비율은 99.1%에 이르고 있다. 의료보험 진료환자 중 주사제를 처방받은 환자의 비율은 56.6%로 WHO의 권장치인 17.2%에 비하여 3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환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했을 때 처방을 받은 의약품의 종류(수)는 외래환자가 4.2종, 입원환자가 6.3종으로 WHO 기준인 1~2종에 비하여 많은 실정이다. 의료보험진료환자에 대한 항생제 처방비율은 58.9%로 WHO 권장치인 22.7%에 비해 매우 높다. 항생제의 사용 적합율은 평균 67.4%로 나머지 경우에는 감염에 대한 뚜렷한 확증이 없이 예방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항생제는 약제비 중 33.1%를 차지하므로 내성율 증가 이외에 약제비 절감 차원에서도 의약품의 적정사용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또 약제비 중 주사제 처방비율은 33.4%로 약제비의 1/3을 주사제가 차지하고 있으며 주사제는 경구약보다 5~40배 정도 고가이다. 이와 같이 항생제를 비롯하여 의약품의 사용량이 WHO의 권장치를 훨씬 초과하는 심각한 수준이다.
의약품의 오남용은 의료전문인만이 고민할 일이 아니고 전국민이 관심을 가져야할 심각한 문제이기에 지난날 의약품의 오남용을 줄이고자 의약분업실시를 앞장서 제안했던 사람으로서 의약품의 오남용문제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길이 없을까하여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서 이 글을 쓴다.
시범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가 의약분업 실시의 최적기
의약분업은 의약품의 오남용을 막기 위하여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보사부가 의약분업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경부터이다. 의약분업을 실시하기 위하여 실시당사자인 의학협회와 약사회가 참여하는 의약분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에서 의약분업을 실시하기 전에 분업을 실시할 적당한 지역을 선정하여 시범의약분업을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의약분업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하기로 하였다. 의약분업 방식은 처방발행을 의사의 자율에 맡기는 임의분업과 서구식 완전분업방식이 의약사단체간에 팽팽히 맞서 두 방식 모두 시범분업을 실시한 후에 그 성과에 따라 의약분업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시범분업을 실시한 결과 임의분업은 의사의 처방발행실적이 저조하여 실패하였고 서구식 강제분업은 성공적이어서 기대했던 성과가 나와 시범분업에 적용했던 분업방식을 채택하여 의약분업을 실시하기로 보사부 방침이 확정되었다. 의학협회와 약사회의 협의를 걸쳐 시범분업을 실시한 후 2년여의 노력 끝에 어렵게 의약분업실시방침이 결정된 것이다(1997.7.17일, 7.21일 필자가 기고하여 약업신문에 게재한 목포시 시범의약분업의 값진 경험 참조).
의약분업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의사의 처방발행방안은 필자가 제안한 방안으로 응급환자 등 처방을 발행할 수 없는 경우에만 예외를 두기로 한 것으로 현재 실시하고 있는 의약분업방식이다.
보사부방침이 결정됨에 따라 약사법 개정 등 그 후속 조치를 준비하고 있던 1985년 2월경 정부 개각이 있었고 이때 보사부장관도 교체되었다. 신임 장관께서는 보사부 현안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의약분업의 실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 실시를 보류할 것을 지시하였다. 필자는 당시가 의약분업을 실시할 적기라고 판단하였고, 지금까지도 그때 의약분업의 실시가 연기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당시를 의약분업 실시의 적기로 보았던 이유는, 첫째, 시범사업이 성공하면 의약분업을 실시하기로 의학협회와 약사회간에 합의가 되어 있어서 의약분업실시의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었고, 둘째, 당시는 아직 항생제 내생의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약분업의 시행으로 인한 효과가 그만큼 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15년이 지난 2000년 7월 1일에 의약분업이 실시되었다. 한림대학 차흥봉 교수가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부임한 후에 의약분업이 실시된 것으로 차흥봉장관은 지난날 의약분업을 실시하기 위해 시범사업을 벌이던 시기에 보사부 사회보험국 보험제도과장 자리에서 시범사업을 도우신 분이다. 차장관은 1999년경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부임한 후 필자에게 연락하여 지난날의 의약분업에 대한 자료를 요청하여 1997년 약업신문에 게재한 목포시 시범의약분업의 값진 경험의 기고문 등의 자료를 제공하면서 의약분업에 대하여 자문한 바 있었다. 필자의 자문을 포함한 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여 의약분업을 실시하신 차장관님과 수고한 모든 관련 공무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의 의약품오남용 실상
의약품의 오남용 실상과 관련하여 필자가 지난날 병원 현장에서 경험했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1978년 약정국 약품수급담당관직에서 국립의료원 약제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필자가 부임한 시기가 그해 8월이었는데 약품비 예산을 다 쓰고 남아있지 않아 재고가 없는 의약품을 구입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 때 진료부에서 병원에 재고가 없는 의약품 2~3종을 요청하였다. 이 중 두 품목은 항생제이고 한 품목은 일반의약품이었다.
필자는 환자의 진료에 지장을 주어서는 아니되므로 병원이 보유한 재고부터 확인하였던바 항생제는 페니씰린제제인 앰피씰린캡슐과 아목사씰린캡슐을 비롯하여 테트라사이클린, 클로람페니콜 등의 제제의 재고가 상당기간 쓸 수 있는 양이 확보돼 있었고 진료부에서 요청한 일반의약품은 오래 전부터 써오던 제품의 유도체이었는데 종전에 쓰던 제품(주사제)은 약국제제실에서 제조하여 상당기간 쓸 수 있는 재고가 비축돼 있었다.
진료부에서 요청한 항생제는 2,3세대 항생제로 쓰여지는 세파로스폴린계 항생제의 주사제이었는데 약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항생제로 대체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절차를 거쳐 항생제를 사용한 환자들의 의무기록을 찾아보았다. 이 병원에서 검사한 항생제의 감수성시험결과에 의하면 다행스럽게도 약국에 보유하고 있는 항생제는 대부분 감수성이 양호(양성)한 것으로 나와 있었고 특히 기초 항생제인 페니씰린이 양호하여 유효한 것으로 나타나있었다.
필자는 원장의 지침과 의견을 듣기 위하여 약제비의 예산실정, 의약품의 재고 현황, 항생제의 감수성시험결과 등을 원장에게 보고하였다. 원장은 필자의 보고를 받은 후 진료부의 과장과 약제과장으로 구성된 약품회의를 소집하여 병원이 보유하고 있는 의약품을 우선적으로 쓰도록 하고 부득이 의약품을 구입하여야 할 경우 근거자료를 첨부하여 신청하도록 지침을 주었고 의약품을 바르게 쓰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예컨대 먹는 약과 주사제는 약효가 같으므로 이 병원에서 실시한 항생제의 감수성시험결과에 따라 병원이 보유한 먹는 항생제 페니씰린으로 치유가 가능하면 그 약을 처방하는게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그 이후 병원에서 구입하여 써오던 위 3종의 의약품 처방은 나오지 않았다. 이 당시 앰피씰린은 1캡슐(1회용량) 값이 100원, 아목사씰린은 1캡슐에 200원이었고 세파계 항생제주사는 1바이알에2000원이었다. 이 병원에서 쓰는 약제비 중 위 3종의 약제비가 매우 높은 사용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약제비를 많이 절감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일을 계기로 의약품의 오남용을 예방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고 의료인들이 협조하면 의약품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항생제의 감수성시험결과를 보아 우리국민들에게 아직까지는 항생제의 내성이 문제되고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국내 항생제의 내성에 대한 보고사례도 거의 없었다.
또 한편 입원환자의 진료비 중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확인하였던바 38%이었고 이 수치는 그 이후인 1990년 건강보험공단이 집계한 약제비의 사용비율과 일치하였다. 그 당시 병원약사회의 정보교류로 다른 의료기관에 대한 약제비의 사용비율에 대하여도 확인하였던바 비슷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무렵 선진국에서는 진료비 중 약제비의 사용비율이 10%내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경까지 현장에서 의약품의 오남용실상 을 목격했고 의료인들의 의지가 있으면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들이 필자가 약정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의약분업실시를 앞장서서 제안했던 이유이고 의약분업을 실시할 최적기를 놓쳐 아쉬워하는 까닭이다.
맺음말- 의약품의 오남용을 줄이기 위한 고민
의약분업은 의사의 진료와 약사의 투약을 분리 전문화하여 의료의 질을 향상시켜 국민에게 양질의 진료를 제공하고 의약품의 오남용, 부적절한 투약, 과잉투약을 방지하여 국민건강을 증진시키고 의료비와 약제비를 절감할 수 있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의약분업을 실시한 후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약제비의 사용측면만 살펴보고자 한다.
복건복지부자료에 의하면 총진료비 중 약제비의 비율과 항생제의 사용비율이 OECD국가 중 1위이다. 또한 의료보험 진료환자의 대부분이 의약품의 처방을 받고 있고 그중 주사제의 사용비율. 항생제의 사용비율, 처방받은 의약품의 종류(수)가 모두 WHO의 권장기준을 수배씩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의약분업을 실시한지 18년이 지났지만 의약품의 오남용, 부적절한 투약, 과잉투약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경구투약이 가능한 환자는 주사제를 경구투약으로 대체하여 주사제처방을 줄이고 환자가 처방을 받는 의약품의 종류(수)와 부적절한 항생제투약을 WHO가 권장한 기준까지 줄이는 방안이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닌가 사료된다.
항생제 오남용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일반감기환자에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사례와 예방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들고 있다. 일반감기환자에게 처방하는 항생제 사용비율이 48%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일반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므로 항생제가 감기증상의 치료에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한편 사람에게 유익한 유산균 등을 사멸하여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또 일반감기약으로 치유가 되지 않은 환자에게 2차 감염을 우려하여 추가검진도 하지 아니하고 항생제를 예방적으로 투약하여 오남용하는 사례도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병의원 치과에서 가벼운 수술을 한 후 항생제를 처방하는데 이 경우에도 항생제를 쓰지 않아도 자연치유될 환자가 많을 것이다. 의료기관이나 병의원에서 치료할 목적으로 항생제를 쓰는 환자에게 항생제의 감수성검사를 한 후 투약할 항생제를 선택하여 처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병의원에서는 감수성시험을 하지 아니하고 처방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경우에도 감수성시험을 의무화하여 감수성이 양호한 항생제를 선택하여(가능한 기초항생제) 처방하도록 하는 방안은 없을까?
일반감기환자에게 처방하여 오남용되는 항생제와 예방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항생제의 상당량이 항생제 내성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항생제의 사용량을 OECD 평균수준까지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워 항생제 오남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에 필자는 이미 항생제의 오남용으로 밝혀진 감기환자의 항생제 처방과 일부 예방목적으로 투약하는 항생제의 오남용성 처방, 감수성검사를 필하지 아니하고 치료제로 쓰는 항생제 처방은 보험급여를 제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의약품의 오남용 문제로부터 건강하게 지켜나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할 때이다.
<감사의 말씀>
지난 3월30일 연재를 재개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30년전 이야기인데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로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들과 전화, 이메일, 문자메시지로 직접 성원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씀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끝으로 필자가 공직에서 수행했던 일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좋은 결실을 맺을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필자소개> 이창기 박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후 원광대학교에서 약학박사학위와 미국지구환경대학원(EEU)에서 명예환경과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사회부 국립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후 내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공기사, 연구관. 국립보건원 마약시험과장, 분석4과장. 보건사회부 약정국 마약과장, 약무과장, 약품수급담당관, 국립의료원 약제과장, 약정국장, 약무식품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립보건원 안전성 연구부장, 국립보건안전연구원장(초대), 국립환경연구원장(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을 거쳐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중앙약사심의위원,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충북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환경한림원 회원으로 있다.
2018-07-23 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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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5> 의약품 등의 품질관리에 대한 이야기
의약품은 공산품과 달리 질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 사람에게 직접 투여하는 물질로 국민 보건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약업자는 기업본래의 영리추구에 앞서서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숭고한 사명감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공식품이나 건강보조식품, 기능성식품을 제조 판매하는 기업도 마찬가지로 국민건강을 위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조업자에게 법으로 생산제품에 대한 자가시험을 하여 허가받은 기준에 적합한 제품만 판매하도록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업체는 이 책임과 의무를 잘 이행하여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으나 책임의식이 부족한 일부업체에서는 부정불량의약품과 부량식품을 생산판매한 사례가 발생해왔고, 성실한 업체에서도 고의가 아닌 과실로 불량제품이 시중에 유통될 수 있으므로 사후 품질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약품은 80년대 초까지도 연초에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신년업무보고에 부정 불량의약품 근절이라는 사업계획이 포함되었고 불량식품근절문제는 4대 사회악에 포함될 만큼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주요해결과제이다.
제약업계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50년대, 60년대에 외국에서 원료의약품을 수입하여 완제의약품을 생산하고 있을 즈음에 무허가 부정의약품이 생산되어 장터, 유원지 등의 노상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허가받은 일부 제약업소에서도 허가사항 대로 제조하지 아니하고 주성분의 함량을 줄여 값싸게 유통시킨 사례도 허다하였다. 이 시기에 일반의약품으로 허가받은 의약품에 마약 메사돈을 넣어 유통시킨 사건도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국의 시설기준이 강화되고 품질관리, 약사감시감독이 엄격해지면서 부정의약품을 제조한 업소를 정비하여 이후 부정의약품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이후 70년대 후반부터 외국에서 비싸게 수입해오던 원료의약품의 국산화가 가속화되면서 국산 원료의약품으로 완제의약품을 제조하게 되었고, 내가 약정국장 재직시 84년부터 KGMP를 실시하게 되어 90년대 초경 KGMP제도가 정착되면서 불량의약품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약품이라 함은 무허가 제품이나 허가사항을 위반하여 함량을 줄여 생산한 제품을 말하고 불량의약품은 제조과정에서 오류나 실수로 허가기준에 부적합한 제품을 구별하여 일컫는 말이다. 그 후 80년대 후반에 물질특허제도가 도입되면서 국가독성연구기관이 설치되어 국내에서 독성시험 등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면서 90년대부터 신약개발에 진입하는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한편 내가 약무식품국장직에 있을 때 식품행정은 약무행정에 비하여 많이 뒤져 있었고 식품업계의 품질관리는 초보단계이어서 국내상위의 식품회사도 시험실 규모가 작아 완벽한 장비시설을 갖춘 제약회사의 연구시험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KGMP)에 준한 식품위생관리기준을 제정하여 식품업계에 권장하였고 그 당시 큰 회사들은 시험실을 확장하고 장비시설을 보강하여 가공식품의 원료와 제품의 자가시험을 수행하였다. 이때 나는 시험실을 갖추지 못한 식품제조업체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식품연구소를 식품공업협회에 설치하도록 적극 권유하였고 이를 협회회장단과 회원들이 받아드려 협회내에 식품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식품제조업소는 영세업소가 많고 그 중에는 앞에서 얘기한 국민건강을 위하는 책임의식과 사명감이 부족한 업소와 원료를 공급하는 업소가 있기 때문에 아직도 불량식품이 근절되지 않고 있어 한 때 식품행정을 맡아 불량식품을 추방하고자 노력하였던 사람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의약품 등을 품질관리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 품질검사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의약품과 식품의 품질검사는 국립보건원과 시도보건환경연구원이 수행해왔고, 먹는 물, 하천수 등의 수질검사와 대기오염측정은 국립환경연구원, 시도보건환경연구원, 국가출연연구기관 등에서 수행해왔다. 의약품 등을 품질검사하는데는 분석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70년대까지 분광광도계(자외선, 적외선)가 많이 활용되었으나 이 기기로 분석이 안되는 의약품도 많아서 어려움을 겪었다. 복합제제 의약품은 분리정량이 거의 불가능하였고 기기 조작에 익숙하지 못한 검사자에게는 오류가 흔히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초경부터 새로 개발된 정밀분석기기로 고속액체크로마토그래프법(HPLC), 질량분석법(GS/MS)과 같은 분석장비가 국내에 도입되어 활용되면서 화학물질의 분석에 혁신이 이루어졌다. 복합제제를 포함한 모든 의약품의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검사과정에서의 오류도 최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식품에 첨가되는 유해물질의 검사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환경분야에서도 국내에서 초기에 설치된 소각시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발암성물질 다이옥신의 함량검사결과에 대한 신뢰성의 시비도 질량분석법(GS/MS)의 검사로 종식되었다.
위에서와 같이 의약품과 식품의 품질에 대한 1차적 책임은 제조업자에게 있다 할 것이나 유통되는 제품에 대한 품질관리의 책임은 이를 관리 감시하는 공직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직자는 국민보건상의 위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엄격하게 품질관리를 하여야 할 것이다.그러나 한편으론 품질관리를 위해 가검물의 채취에서부터 가검물의 검사, 검사결과에 대한 처분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여 선량한 제조업자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지난날 이와 같은 사례도 가끔 있었기에 오랫동안 실무자로 시험검사업무도 담당해보았고 검사업무를 지도감독하는 자리에도 있었고, 검사결과를 심사하고 처분하는 책임자의 자리에서 일하기까지 의약품 등의 품질관리 전반에 대하여 직접 경험했거나 지켜본 몇가지 사례를 들어 보고자한다. 이 사례에서 품질관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막기 위해 가검물수거는 누가 어떻게 하여야하고 검사는 누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하고 검사결과에 대한 심사나 판단은 어떤 사람이 해야하고 시험결과 부적합제품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이 나올 것이다.
사례 1.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60년대에 국내에서 과실 쥬스로 처음 선보인 토마토쥬스가 생산판매되고 있었다. 맛이 좋아 수년간 많이 팔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모대학에서 검사한 결과 이 제품에서 농약성분인 비에치씨(BHC)가 검출되었다고 일간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그날부터 이 토마토쥬스는 시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후 법정에서 검사결과가 잘못되었다고 밝혀져 명예는 회복됐으나 회사는 이미 문을 닫은 이후이었다. 이 비에치씨성분은 그 당시 분석기술로는 포라로그래프법으로 분석하여야 하는데 이 분석기기는 국가연구기관에나 비치돼 있을 뿐 대학연구실에는 갖출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례 2. 김에서 대장균이 검출되어 수출이 중단됐다
한국산 김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품중의 하나로 예로부터 일본에 수출해왔고 70년대에도 양질의 김을 수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일간신문에 김에서 대장균이 검출됐다고 보도되었다. ‘김에서 대장균 우글우글‘이란 제목으로 어느 대학에서 검사한 결과를 대서특필하였다. 이 기사로 일본에 잘 팔리던 김수출은 한동안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 시험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가검물의 채취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보도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김에서 대장균이 나와 식중독이 발생하였다는 보고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사례 3. 시약을 잘못써서 물에서 중금속 카드뮴이 나왔다
90년대 초 모연구소에서 서울시민이 마시는 한강원수를 검사한 결과 물에서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 카드뮴이 검출되었다는 시험검사결과가 발표되어 서울시민에게 걱정을 끼친 일이 있었다. 내가 국립환경연구원(현 국립환경과학원) 원장직에 있을 때이었고 국립환경연구원에서도 같은 시기에 한강원수를 검사한 결과 카드뮴이 검출되지 않았다. 카드뮴이 검출된 시험과정을 조사하였던 바 물을 검사하면서 시약을 잘못 쓴 것으로 밝혀졌다. 이 검사를 할 때 물을 채취하여 액성조정제로 넣는 시약인 질산은 특급시약을 써야하는데 1급시약을 썼고 사용된 1급시약 중에는 불순물로 카드뮴이 함유돼 있고 그 함량이 시약의 라벨에 표시되어 있었음에도 검사자의 부주위로 실수를 한 것이다. 한강원수에 카드뮴을 넣어 시험한 검사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검사기관은 검사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수질전문 검사기관인데도 검사자의 실수로 이와 같은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검사자의 책임의식이 절실한 사례라고 보여진다. 또 한편 이와 같이 검증되지 아니한 검사결과를 발표하는 사례도 지양되어야 할 문제라고 사료되었다.
사례 4. 부정항생제 사건
1965년 메사돈사건을 겪은 다음해에 발생한 사건이다. 60년대 초부터 일반의약품에 마약 메사돈을 넣어 시중약국에서 팔던 시기이었으니 부정의약품이 얼마나 많이 나돌았겠는가. 이 무렵 경구용 항생제가 많이 팔리고 있었는데 허가사항 대로 제조하지 아니하고 주성분의 양을 적게 넣어 제조한 부정항생제가 적발된 것이다. 약사감시원이 시중에서 수거하여 검사한 결과 주성분의 함량이 표시된 양의 절반이하이었다고 한다. 이 부정항생제는 포장용기에 표시된 용법대로 복용하면 상용량에 미달하여 약효가 없는 것이므로 치료제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이 부정항생제는 검사결과에 따라 품목제조허가가 취소되고 시중에 유통되는 제품도 수거폐기하게 되었다. 메사돈사건 이후 마약을 몰래 넣어 부정의약품을 제조한 제약회사는 물론 주성분의 함량을 속여 부정의약품을 제조판매한 회사는 모두 허가가 취소되고 시설이 부실한 회사도 취소되거나 일정기간 내에 시설을 보완하도록 업무정지 처분을 하였고, 부정의약품을 제조판매할 수 없도록 단속을 강화하였다. 메사돈사건을 계기로 부정의약품을 근절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제약산업으로 발전하는 전기가 된 것이다.
사례 5. 감기약에 허가받은 원료의약품에 없는 티아민을 넣어 마약을 넣은 것으로 오해받은 사례
196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일반의약품 중에서 마약 메사돈을 검출한 이후 여러 회사에서 메사돈을 넣은 부정의약품을 제조판매하였다는 사실이 연일 보도됨에 따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검찰에 마약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어 마약원료의 수입경로와 제조판매한 제약회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메사돈 원료를 수입하여 보세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한 제약회사가 제조판매한 감기약을 검사기관에 의뢰하여 검사하였던 바 제조허가를 받은 원료의약품(처방) 중에 없는 성분미상의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회신을 받았다. 수사기관에서는 이 성분미상의 물질이 메사돈인 것으로 의심하여 이 의약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결과 이 의약품 중에서 마약성분은 검출되지 아니하였고 성분미상의 물질은 티아민(비타민B1)이었음을 확인하여 감정결과를 회신한 바 있었다. 수사기관에서 조사한 마약원료는 메사돈을 합성하는 2종의 전단계 전구물질인데 그 당시에는 마약법에서 마약으로 지정되어있지 않았었고 메사돈사건 이후에 합성마약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사례 6. 성분미상의 물질을 밝히는데는 영감이 있어야 한다
메사돈사건의 발생으로 의약품의 국가시험연구기관이 이를 밝히지 못하였다 하여 실추된 국립보건원의 위상을 제고시키고자 1967년경 정부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으로 계시던 홍문화 교수님을 국립보건원 원장으로 발탁하였다. 홍문화 원장님은 국립보건원을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키겠다며 기관 명칭부터 국립보건연구원으로 바꾸고 연구사업을 활성화시키는데 진력하셨다.
나는 그해 8월경 홍문화 원장님의 권유로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친정인 국립보건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후 어느날 원장님이 찾으셔서 갔더니 가검물인 막걸리 술을 주시면서 이 술에 무슨 약물이 들어있는지 검사의뢰가 들어왔는데 내게 시험분석해보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업무소관과 상관없이 내게 명하신 것이다. 나는 이 가검물 막걸리의 맛을 보았더니 씁쓸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막걸리에 고삼(苦蔘)을 넣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삼은 고미건위제로 쓰는 한약재인데 씁쓸한 맛을 내려고 넣은 것으로 추정됐다.
나는 부정의약품 중에서 메사돈을 밝혀낼 때도 메사돈이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대조시험할 메사돈 표준품이 없어서 메사돈을 합성까지 하여 표준품을 제조한 후에 메사돈을 검출하는 방법을 찾았다. 사례 5에서 성분미상의 물질이 티아민인 것으로 추정한 경우와 또 한 예로 병원에서 오약투여로 사고가 발생한 약물이 투약한 황산마그네슘이 아닌 브롬화칼륨임을 밝혀냈을 때도(1997.4.21일 약업신문 게재) 황산마그네슘 대신 브롬화칼륨을 투약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모두 내가 추정했던 대로 밝혀졌다. 성분미상의 물질을 찾아내는 데는 그 물질이 무엇일거라는 영감이 있어야 다음 시험검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막걸리 중에 고삼의 분말이나 고삼즙을 넣었다면 그 당시 분석기술로는 밝히기 쉽지 않았다. 고삼성분을 확인할 방법도 없고 분석기기도 없을 때이다. 연구대상이었다. 나는 메사돈을 검출할 때 활용했던 박층크로마토그래프법(TLC)을 응용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메사돈을 검출할 때만 해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TLC를 실시하기 때문에 그 재료들을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서 내가 직접 고안하여 TLC흡착판을 만들어 이용하였는데 이 무렵 나는 TLC법을 이용하여 한국산 대마의 성분을 연구하면서 TLC흡착재료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이 TLC방법으로 고삼의 성분을 분리하여 그 성분들을 발색시킬 수 있는 시약이 있는지 조사하였던 바 가능성이 보여 이 방법을 실시하였는데 가검물인 막걸리에서 추출한 성분과 대조물질인 고삼을 추출한 성분이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네번 모두 영감이 적중한 것이다. 시험검사를 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은 영감으로 추정했던 물질이 구상했던 방법으로 시험하여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을 때 몹시 기쁘고 재미있고 행복하였다. 나는 시험결과물(TLC로 분리한 고삼의 성분을 발색시킨 반점을 확인할 수 있는)을 원장님에게 가져가서 고삼을 밝혀낸 결과를 보고하였다. 원장님은 아주 반색하면서 시험결과를 민원인에게 발송하도록 지시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원장님은 내게 또 다른 과제를 주셨다. 그 다음해인 1968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약학연맹(FAPA)에서 나더러 학술발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 과제는 의약품의 품질관리와 직접 관련이 없지만 잠시 얘기하고자한다. 홍문화 원장은 대학 은사님이시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나를 아껴주셔서 개별적으로 가끔 찾아뵙고 좋은 말씀도 들어왔었는데 내가 메사돈을 밝혀냈을 때 적극 성원해주셨고 원장님으로 오신 후 연구원으로 불러주셔서 더 가까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나는 원장님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그 때부터 FAPA에서 보고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나는 보건연구원 마약시험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해에 착수한 연구사업 중에 한국산 아편의 지역별 성분연구과제를 선정하여 전국 각 시 도에 앵속을 재배하였고 아편을 채취하여 모르핀, 코데인, 테바인 등의 아편알칼로이드 성분함량을 비교연구하고 있었는데 이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로 작정하고 연구논문을 영어로 작성하여 서투른 영어실력에 논문을 모두 외어서 FAPA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고 그 뒤 김형국 연구사(후일 약품부장 역임)와 공동연구자로 된 이 논문은 유엔 Narcotics 잡지에 게재되었다.
사례 7. 품목허가가 취소될 뻔한 의약품이 불문처리된 행정처분사례
1983년경 약무식품국장직에 있을 때 품목허가를 취소하는 행정처분 결재서류가 나의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처분사유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수입한 안약인데 이 의약품을 보사부에서 허가받은 기준 및 시험방법에 따라 검사한 결과 생균수시험결과가 부적합으로 판정되어 행정처분기준에 허가취소사유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서류에 결제하기 전에 이 제품은 수출한 나라에서도 쓰고 있을 터인데(수입시 자국에서 판매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첨부함) 제약선진국인 일본제약회사가 사람이 쓸 수 없는 의약품을 한국에 수출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고, 한국에서 검사하여 부적합판정을 받아 품목허가가 취소되면 이 의약품이 반품되고 손해배상문제가 발생될 것이라는 생각과 또 한편으로 혹시 이 생균수기준이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 안약을 수출한 일본제약회사에 확인해보고 행정처분을 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되어 담당자를 불러 수입업소에게 문제된 이 제품의 기준 및 시험방법에 대하여 확인해 보도록 지시를 하였다. 이 안약을 수입한 제약회사가 일본제약회사에 확인한 결과 일본 후생성에서 처음 허가받은 기준 및 시험방법 중에서 생균수기준이 변경되었다며 변경허가 받은 일본 후생성 허가서류를 제출하였다. 나의 추측대로 생균수기준이 바뀐 것이었다.
문제된 제품은 변경허가를 받은 기준 및 시험방법에 따라 제조한 제품이라고 하였다. 나는 변경허가 된 기준에 따라 재시험을 하도록 지시하였고 재시험한 결과 이 기준에 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수입업소로 하여금 이 제품의 수입허가사항 중 기준 및 시험방법을 변경하도록 지시하여 허가사항을 변경하였고 그 제품은 취소처분사유가 소멸되어 불문처리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입업자가 보사부에서 허가받은 기준 및 시험방법이 그 이후 이 제품을 수출한 회사에서 변경허가를 받은 사실을 몰라서 기준 및 시험방법 변경허가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의약품은 품질검사결과 부적합 판정을 받아 행정처분사유가 발생했을 때 제약업자 또는 수입업자가 부적합 판정에 대하여 소명할 수 있는 청문제도가 있다. 업자의 소명자료를 심사하여 타당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재검사를 하는 등 재조사를 받을 기회가 있음에도 이 경우 업자가 소명을 하지 아니하여 업자에게 모든 귀책사유가 있다고 할 것이나 민원부서 공직자는 민원인이 민원사항에 대하여 잘 몰라서 이행하지 못한 경우에는 민원인에게 알려주고 선도하는 행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필자소개>이창기 박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후 원광대학교에서 약학박사학위와 미국지구환경대학원(EEU)에서 명예환경과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사회부 국립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후 내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공기사, 연구관. 국립보건원 마약시험과장, 분석4과장. 보건사회부 약정국 마약과장, 약무과장, 약품수급담당관, 국립의료원 약제과장, 약정국장, 약무식품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립보건원 안전성 연구부장, 국립보건안전연구원장(초대), 국립환경연구원장(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을 거쳐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중앙약사심의위원,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충북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환경한림원 회원으로 있다.
2018-04-27 1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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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 88올림픽에 대비 식품접객업소시설을 선진국수준으로 개선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주방을 개방하였다
내가 약무식품국장으로 재직하던 1981년 9월에 88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었다. 그 이전에 서울로 결정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대비하여 식품접객업소의 화장실과 주방시설을 위생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내가 하여야할 일이었다. 화장실은 대변 소변을 배설하는 변소와 손을 씻고 화장을 할 수 있는 세면대 등이 설치되어있는 장소이다.
영어로는 restroom, washroom, toilet, WC(water closet) 등으로 표현하는데 우리나라 화장실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80년대 초 우리나라 식품접객업소의 화장실 실태를 살펴보면 전문음식점, 유흥음식점, 양식레스토랑, 고급중,일식식당, 호텔, 고층건물 등에 있는 식품접객업소와 도심 일부업소를 제외한 한식 대중음식점은 대부분 재래 수거식 변소로 되어 있었고 세면대 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주방의 실상은 어떠했는가? 역시 고급음식점을 제외한 대다수 영세업소의 경우 주방이 객실에서 볼 수 없도록 벽으로 막혀있었고 조리시설도 비위생적이었다. 한편으론 한식의 경우 손님에게 제공했던 음식을 주방에 모아 다른 손님에게 내놓은 사례도 많았다. 올림픽경기 때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이 서울의 뒷골목을 관광하다가 식당에 들려 식사 전에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세면대도 없는 불결한 수거식 화장실이었다면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식품접객업소의 시설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전국 7만5천여개 업소의 화장실을 세면대를 갖춘 수세식으로 바꾸고 주방조리시설을 위생적으로 개선하면서 고객이 객실에서 주방조리실을 볼 수 있도록 주방을 개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대로 시설을 개선하려면 대다수 업소는 화장실 면적을 늘려야 하므로 건물의 증개축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도시계획법에 따라 재개발지역으로 고시되어 증개축이 불가능한 건물도 많았고 영세업소의 시설자금도 지원하여야 될 것으로 생각되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련부서에 협조요청을 하였는데 올림픽준비작업은 범정부적으로 추진하는 일이여서 건물 증개축허가와 시설자금 융자문제는 잘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각시도의 협조를 받아 전국 식품접객업소 7만5천2백18개소 중 2만6천5십개 업소의 화장실과 주방의 시설을 1983년에 개선하였고 남은 업소는 1984년에 모두 개선완료하였다. 이와 같이 올림픽을 대비한 식품접객업소의 시설개선은 정부부처간 협조가 잘되고 시 도의 협력과 시행당사자인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짦은기간에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식품접객업소의 화장실은 선진국수준의 수세식화장실로 바뀌었고 주방은 전 업소 모두 개방되어 조리사가 위생적으로 조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식당에서 깨끗한 화장실과 위생적인 주방을 보면 그 때 애썼던 보람을 느낀다.
주문식단제 권장실시
한식식단을 위생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고객이 주문한 식단을 제공하도록 주문식단제를 권장하였다. 기본식단 이외의 음식은 고객이 주문한 음식만 제공하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 실시로 한식 중에서 탕류인 곰탕, 설렁탕, 갈비탕, 찌개 등 단일식단은 김치 깍두기 등 기본찬류를 먹을만큼 제공하거나 식탁에 덜어먹도록 준비하여 쉽게 정착되어 갔으며 한정식식단은 중국식, 일식 , 양식처럼 몇가지 음식을 차례로 적당량을 제공하여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잘 추진되고 있었다. 다만 재래 한정식백반은 여러 가지 반찬을 함께 주는 식단이어서 반찬을 남기지 않게 알맞게 주도록 권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주문식단제는 시행하면서 초기에는 고객들이 반찬을 적게 준다고 불평하여 어려움도 있었으나 이 제도의 시행으로 음식을 많이 남겨 음식 쓰레기로 버리는 양이 많이 줄었고 특히 고객이 먹다 남은 음식이 다시 나오는 일은 사라지게된 것이다. 이 제도를 실시하는데 TV 방송국의 협조가 컸던 사실도 기억에 남는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고속도로의 주문식단 한식백반 자율식단, 회사 학교 교회 공공기관의 구내식당, 한식뷔페식당, 식탁 위에 덜어먹는 김치그릇을 비치한 곰탕 설렁탕식당 등의 식단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개고기를 먹는 국민이라고 올림픽개최를 반대하는 동물애호가 단체 이야기
80년대초만 해도 개고기를 파는 음식점 앞에는 보신탕이라는 붉은 깃발을 달고 진열장에는 개머리고기를 진열해 놓은 것을 밖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의 광화문, 종로 등 큰길가에 보신탕집이 있어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 외국관광객에게는 이 광경이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고, 가끔 카메라에 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침 이때는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외국 손님들이 이용할 식품접객업소의 위생시설개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때이었는데 외무부를 통해 당혹스런 공문이 접수되었다.
공문의 내용은 외국의 동물애호가협회에서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문제 삼아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반대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동물애호가협회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1980년경에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 신약의 개발과정에서 독성시험용 실험동물의 사용도 문제 삼고 있으며 특히 개나 고양이는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단체다. 이 협회의 주장내용은 애완동물인 개를 잡아먹는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도록 세계 각국에 호소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되어있고 외무부에서 보내온 공문에는 동물애호가협회의 잡지가 증거물로 첨부되어있었다.
그 잡지에는 한국에서 개를 목매달아 몽둥이로 때려잡는 칼라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먹는 개라고 모양이 다르겠는가. 더욱이 잘 생긴 각종 개들을 도살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었고 내가 보기에도 잔인해보였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협회가 한국에서 식용으로 먹는 개는 애완용이 아니고 식용 개가 따로 있다고 해명한다고 이해가 되겠는가. 동물애호가협회가 반대한다고 해서 이미 서울로 확정된 올림픽 개최도시가 바뀌는 일은 없겠지만 이 단체가 여러 나라에 알렸을 때 개고기를 먹지 않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는 없는 것이다. 외무부에서는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만 어떤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랬다. 그렇다고 해서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먹지 못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심지를 제외한 면단위에서만 보신탕을 조리해 팔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행정조치를 하고 나니 일부 업소는 도심근교 면단위로 이전을 하여 개업을 하고, 일부업소는 큰 도로변에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오리탕이라는 간판을 걸고 오리고기와 개고기를 같이 요리해서 팔았다. 어떤 업소는 삼계탕과 염소고기를 겸하여 보신탕을 팔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보신탕 간판이 오리탕, 삼계탕 등으로 위장하더니 어는 날 “사철탕”으로 바뀌었다. 보신탕은 여름에 많이 먹지만 즐기는 사람은 사철을 가리지 않고 먹기 때문에 “사철탕” 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생긴 것이다.
88올림픽에 대비하여 식품접객업소의 화장실과 주방시설을 개선하고, 한식식단을 위생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주문식단제를 실시하도록 하고, 보신탕업소를 이전하게 하는 조치 등은 업자에게 경제적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적법허가를 받아 영업하고 있는 업소에 강제할 수 없는 행정조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짦은 기간동안에 개선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은 88올림픽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어야 한다는 성숙한 국민의식에서 모든 업소가 자발적으로 추진한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필자소개> 이창기 박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후 원광대학교에서 약학박사학위와 미국지구환경대학원(EEU)에서 명예환경과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사회부 국립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후 내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공기사, 연구관. 국립보건원 마약시험과장, 분석4과장. 보건사회부 약정국 마약과장, 약무과장, 약품수급담당관, 국립의료원 약제과장, 약정국장, 약무식품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립보건원 안전성 연구부장, 국립보건안전연구원장(초대), 국립환경연구원장(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을 거쳐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중앙약사심의위원,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충북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환경한림원 회원으로 있다.
2018-04-20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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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 한약업사제도폐지와 관련된 해묵은 민원해결
한약업사시험문제와 이해단체간의 분쟁
1981년 제5공화국이 탄생되면서 야당 국회의원인 천명기 의원이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 해 8월 국립의료원 약제과장(부이사관)으로 재직하던 나는 약정국장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경기도에서 한약업사시험실시 공고를 하였다가 보사부가 경기도에 시험실시를 연기하도록 요청하여 보류되었고 그 전년도에도 다른 도에서 시험실시 공고를 하였다가 연기한 사실이 있다고 하였다. 한약업사시험은 1975년에 경남도에서 실시한 이후 계속하여 보류해왔다고 한다. 한약업사시험문제는 7년동안 시험실시를 보류하고 연기해온 해묵은 미결민원사안으로 되어 있었다.
한 약업사제도는 일제 강점기의 한약종상에서 유래돼 1953년 약사법 제정시 보건의료자원이 절대부족하여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지역에 예외적으로 국민보건증진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위해 영업지역 영업범위에 제한을 두고 시행된 제도이다. 병의원, 약국이 없는 동, 읍, 면에서 허가를 받아 한약을 팔 수 있는 업종으로 동에 1명, 읍, 면에 2명의 한약종상을 허가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일반 매약을 팔 수 있는 약종상과 함께 생긴 제도로 약종상은 약방을, 한약종상은 한약방을 개설하여 허가지역에서 매약과 한약을 판매하였다. 그 후 의사, 한의사, 약사 등의 전문인력이 많이 배출되면서 이와 같은 구제도를 폐지하고자 1971년에 약사법을 개정하여 약종상 제도는 폐지되었고 경과조치로 이미 허가받은 약종상은 약업사로 개명되면서 허가받은 지역에서 약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한약종상은 국회심의과정에서 폐지되지 아니하고 그 명칭만 한약종상이 한약업사로 바뀌면서 약사법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분쟁이 발생하고 말썽이 돼왔다.
시 도지사는 약사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한약업사 결원이 생겨 청원이 있으면 한약업사시험을 실시하여 한약업사허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약업사를 허가하기 위하여 한약업사시험실시 공고를 할 때마다 이해단체인 한의사협회와 약사회는 시험실시를 반대하면서 한약업사제도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였고 보사부는 한약업사시험 실시방안을 정하여 지침을 통보할 때까지 시험실시를 보류하도록 도에 지시해왔다. 이렇게 수년 동안 이제도를 폐지하지도 아니한 채 시험실시를 연기해올 동안 시험을 준비해온 사람들의 진정이 빗발쳤고 이들이 구성한 모임의 대표와 한약업사단체인 한약협회는 법에 따라 한약업사시험을 조속히 실시해달라는 청원을 계속하였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보면 법을 믿고 생업을 얻기 위해 수년간 준비해온 이들에게는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한편 한의사협회와 약사회 입장에서 보면 한약업사는 약사법에서 기성한약서나 한의사의 처방에 따라 한약을 혼합판매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조제할 자격이 없는 한약업사에게 조제라는 용어를 쓸 수가 없어 혼합판매라고 표현했을 뿐 사실상 한약조제 행위를 하여 한의사와 약사의 조제영역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도 두 단체가 한약업사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었다.
분쟁해소 방안
공직자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국민에게 약속했으면 지켜야한다. 계속 미룰 일도 아니다. 한의사협회와 약사회에 이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으면 다시 법을 개정하여 폐지해야하고 한약업사시험을 준비해온 사람들에게도 약속을 지켜야한다. 시험실시 공고를 하였다가 보류하였던 도에도 약속을 이행하여 정부공신력을 지켜야한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책무라 생각하였다. 이를 조속히 이행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한약업사제도를 폐지하기 위하여 약사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심의를 거쳐야하고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약사법을 개정할 때까지 법에서 위임한 하위법령을 고쳐 허가지역을 없애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모법을 개정하기 전에 한약업사제도를 사실상 폐지하기 위해서이다. 한약업사시험을 실시하기 전에 우선 약사법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한약업사의 허가지역을 병의원, 한의원, 약국, 한약업사, 보건지소가 없는 면으로 규정하여 보건지소가 없는 면은 없으므로 한약업사의 배치근거를 삭제한 것이다.
다음은 한약업사시험을 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했다. 오랫동안 시험을 실시하지 않아 결원이 많이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50년대 초에 제정한 법령이어서 이 규정대로 많은 수의 한약업사를 허가할 수는 없으므로 이 제도의 입법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동과 읍 지역은 제외하고 면에도 2명의 한약업사를 허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한약업사가 없는 면에 한하여 1명의 한약업사를 허가할 수 있도록 허가지역과 인원을 최소화하여 시험을 실시하도록 하고, 시험문제를 출제할 시험위원을 보사부가 직접 위촉하여 시험문제를 출제하여 같은 날 동시에 전국 일제히 시험을 실시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종전의 법령규정에 따라 전국 읍 면의 한약업사 결원지역을 조사한 결과 전국적으로 2531명이었고, 한약업사가 없는 면은 590개이었다. 이 한약업사시험방침에 대하여 대한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한약협회와도 협의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한약업사제도를 페지하면서 한약업사시험을 전국 일제히 실시할 계획을 세워 1983년 11월 27일 한약업사시험을 실시하도록 전국 각도에 지침을 보냈고 각 도에서 한 달 전에 시험실시일, 장소, 방법 등을 공고하고 이날 전국 일제히 시험이 실시되어 무사히 끝났다. 한약업사가 없는 590개 면에 총 2212명이 응시하여 1차 시험에서 1395명이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에서 502명이 합격하여 각 도지사가 해당 면에 허가함으로써 오랜 기간 갈등을 겪던 한약업사문제는 대립하던 양쪽의 입장을 모두 반영하면서 풀어갈 수 있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협조해주셨던 대한한의사협회 차봉 오 회장, 대한약사회 길병전 회장, 대한한약협회 김재덕 회장님께 감사드리고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의 약사 출신 국회의원 김완태 의원, 김정수 의원, 김장숙 의원의 자문과 성원에 대하여도 감사를 드린다.
<필자소개> 이창기 박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후 원광대학교에서 약학박사학위와 미국지구환경대학원(EEU)에서 명예환경과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사회부 국립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후 내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공기사, 연구관. 국립보건원 마약시험과장, 분석4과장. 보건사회부 약정국 마약과장, 약무과장, 약품수급담당관, 국립의료원 약제과장, 약정국장, 약무식품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립보건원 안전성 연구부장, 국립보건안전연구원장(초대), 국립환경연구원장(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을 거쳐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중앙약사심의위원,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충북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환경한림원 회원으로 있다.
2018-04-13 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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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 원료의약품의 보호지정 성과와 뒷이야기
메벤다졸 에탐부톨의 보호대상의약품지정과 수용업체
의약품은 정부가 수입을 개방한 80년대까지 국내에서 생산되는 품목에 대하여 수입을 금지하여 보호해주고 있었다. 수입이 금지된 국산의약품은 대부분 완제의약품이었고 이 완제의약품은 제약선진국에서 개발한 원료의약품을 비싼 값으로 수입하여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었으나 원료의약품은 기술과 자본이 부족하여 개발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료의약품의 국산화가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선결과제였다.
내가 1974년 약무과장 자리에 있을 때 우리나라 제약산업수준은 외국에서 원료의약품을 들여다 제제화하는 과정에 불과하였다. 90%이상의 원료의약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서 조속히 원료의약품을 국산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외화도 절감하고 제약산업을 발전시키는 길이라 생각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제약실정은 원료의약품을 개발생산하기 위한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시설투자를 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원료의약품의 국산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위험부담을 보상해주는 시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국내에서 최초로 원료의약품을 생산공급하는 업소에 대한 보호제도를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 보호시책은 수입을 금지하고 국내 타 업소의 제조허가를 일정기간 제한하는 것이다. 앞에서와 같이 국산의약품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는 이미 시행해오고 있었으나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인한 위험부담에 대한 보호조치가 동시에 이루어저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약사법 특례조항에 국내에서 최초로 제조공급되는 원료의약품에 대하여 일정기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으나 이때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 규정에 따라 국내 최초로 제조공급되는 원료의약품에 대하여 보호제도를 시행하였고, 1975년 최초로 보호대상의약품으로 동명산업의 항생제 카나마이신과 신풍제약의 구충제 메벤다졸을 보호대상 의약품으로 지정하였다. 이 메벤다졸은 신풍제약이 카이스트 이충섭 박사팀과 연구용역을 체결하여 개발하였고 오리지널 제약회사인 얀센보다 2년 뒤에 개발하여 제조방법특허를 취득하였으며 기초물질로부터 합성하여 기술, 품질, 개발성과, 파급효과 등 보호대상의약품의 지정요건을 모두 갖춘 품목이었다. 보호대상 원료의약품으로 지정받은 메벤다졸 원료의약품의 공급자인 신풍제약에 대한 얘기는 1997년 약업신문에 기고하여 이미 소개한 바 있으므로 간략하게 기술하고 공급을 받는 입장인 유한양행의 수용과정에서 보고 느낀 바가 많아서 이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신풍제약은 기생충감염이 만연하여 전국민이 매년 1~2회씩 구충제를 복용하던 시기에 구충효과가 탁월한 메벤다졸을 국산화하여 저렴한 값으로 공급함으로써 기생충박멸사업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원료의약품의 수입으로 인한 외화를 절감하는 한편 국내원료국산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풍제약은 크게 신장하면서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여 후일 말라리아 해열제 신약인 피라맥스의 개발에 성공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나는 평소 이와 같은 과정이 제약업체가 신약개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 왔다.
신풍제약이 메벤다졸을 국산화하기 전까지는 유한양행에서 메벤다졸의 오리지널회사인 얀센에서 원료의약품을 수입하여 버막스라는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유한양행은 정부가 기생충박멸사업을 벌이고 있을 때 군부대와 학교 등에 집단투약할 구충제를 납품하는 등 전국민에게 투약할 의약품을 제조공급하여 구충제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메벤다졸 원료의약품의 보호조치로 수입이 금지됨에 따라 신풍제약에서 메벤다졸 원료의약품을 공급받아 완제의약품을 제조하여 판매하게 되었다. 이 원료의약품은 보호지정하면서 품질이 우수하고 국제시세 이하의 가격으로 공급하도록 부관부 보호지정을 하여 공급업소가 이를 이행하였지만 원료의약품을 공급받는 유한양행에서는 이 보호제도에 대한 정부시책에 적극 순응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수입금지품목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내가 약무과장에서 약품수급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독약품이 카이스트 채영복 박사팀과 연구개발용역을 체결하여 에탐부톨의 원료의약품을 개발생산하게 되었고 이어 수입금지 요청을 함에 따라 이 품목을 금수조치하게 되었다. 마침 유한양행이 이 에탐부톨제제도 원료의약품을 외국에서 수입하여 생산공급하고 있었다. 당시 결핵환자가 많아 정부가 결핵퇴치사업을 벌이고 있을 때 유한양행은 결핵치료제 전문제조업체로 초기부터 파스칼슘을 생산공급하기 시작하여 모든 결핵약을 제조공급하고 있었고 2차 항결핵제인 에탐부톨이 개발된 이후 이 의약품을 제조공급하던 시기이었다.
유한양행은 에탐부톨 원료의약품이 수입금지됨에 따라 한독약품이 제조공급하는 원료의약품을 공급받아 이 제품을 제조판매하게 되었는데 몇 차례 원료의약품을 공급받은 후 한독약품의 원료의약품 제조시설에 문제가 생겨 생산이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때 유한양행에서 이 업무를 담당하던 연만희 차장(후일 사장, 회장, 유한재단이사장 등 역임 현 유한양행 고문)이 찾아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이 의약품의 제조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원료의약품을 수입하여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에탐부톨은 수입금지할 때 생산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 수입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기 때문에 한독약품에 확인을 한 후 즉시 필요한 양을 수입하도록 조치하였다.
유한양행은 앞에서 얘기한 구충제 메벤다졸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고 항결핵제 에탐부톨시장은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는데도 메벤다졸과 에탐부톨의 금수조치에 대하여 일체의 요구사항이 없었다. 국산품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시책에 적극 순응하고 협조한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수입되는 의약품 가격은 수입국에서 그 품목이 생산될 경우 의례히 가격을 내리게 되어있어 이에 대한 상담이 오갔을 법 한데도 공급가격에 대하여 건의한 바도 없었다. 듣던 대로 모범을 보이는 기업이었다. 애국자인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유지를 계승하여 나라를 위하고 국민보건을 위한 일이면 정부시책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기업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돈이 논을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보호대상원료의약품 지정을 두고 시샘하고 질투하는 회사도 있었을 텐데 회사 이익보다 국익을 위하는 유한양행과 같은 회사들이 있었기에 이 원료의약품의 보호조치도 큰 성과를 거두어 이 제도시행 이후인 70년대 후반부터 원료의약품의 국산화율이 크게 신장되었다고 판단되어 나 스스로도 나라 위해 일한 보람을 느꼈다.
리팜피신의 보호대상의약품지정과 외국경쟁사의 탄원
종근당은 국내 제약산업이 외국의 원료의약품에 의존하여 완제의약품을 제조하던 60년대에 국내최대의 원료의약품 합성공장을 설립하여 1965년에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을 생산하였고 1968년에 국내 최초로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아 미국, 일본에 수출하여 한국 의약품수출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뒤이어 1974년에 국내 최대의 발효공장을 준공하고 1980년에 세계 4번째로 리팜피신을 개발하여 보사부의 품목(리팜피신캅셀 300mg) 제조허가를 받았고 리팜피신의 원료의약품과 완제의약품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후 1982년에 리팜피신캅셀(450mg, 600mg)의 제조허가를 신청하면서 보호대상원료의약품지정신청을 하였고, 심사결과 개발성과, 기술성, 파급효과 등이 보호대상의약품지정요건에 적합하여 리팜피신 원료의약품을 보호대상의약품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종근당은 결핵, 임질 등의 감염률이 높았던 시기에 리팜피신을 개발생산하여 저렴한 값으로 공급함으로써 결핵퇴치와 성병퇴치에도 크게 기여했다, 당시 원료의약품 수입량이 1위이었던 리팜피신 원료의약품을 국산화함으로써 외화절감에도 기여하였으며 1980년 테트라사이클린, 옥시테트라사이클린에 이어 1985년 미국 FDA 승인을 받아 미국, 동남아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종근당은 이와 같이 60년대부터 국내 수요가 가장 큰 항생제 원료의약품을 개발하여 국내 원료의약품국산화를 선도하였다.
그런데 1982년경에 예상치 않았던 탄원서가 접수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알려진 사실이므로 탄원서를 제출한 기업체 이름을 밝히고자 한다. 미국의 다우케미칼사가 제출한 탄원서의 내용은 종근당의 리팜피신 제조방법이 그 회사의 제조방법특허를 침해한 것으로 제조허가와 보호를 받을 수 없음에도 보사부장관과 약정국장이 직권을 남용하여 제조허가와 보호조치를 하였으므로 이를 취소하라는 요지이었다. 이 탄원서는 청와대에 접수된 서류로 외자도입과 관련하여 외자철수 문제까지 제기한 것이어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부터 보사부장관의 의견을 타진하였다고 한다. 마침 이 무렵 정부의 수입개방방침에 따라 의약품의 수입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고 경제부서에서는 시장규모가 작은 의약품 시장부터 개방하라고 주문하고 있을 때이었다. 이 탄원사항에 대하여 보사부로서는 제조허가와 보호지정에 법적하자가 없으므로 따로 조치할 일이 없었고 특허침해사항에 대하여는 보사부가 처리할 사안이 아니었다.
이 특허침해 사안에 대하여는 다우케미칼사가 종근당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하였고 그 결과는 다우케미칼사가 패소하였다. 재판부는 다우케미칼사의 고유한 비밀기술(know-how)이 유출돼 이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특허등록되지 않았을 경우 보호받을 수 없고 산업정보 입수행위도 부정하게 빼내지 않았다면 위법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1983년 4월 22일 중앙일보 기사, 종근당자료제공) 이 탄원에 대하여 천명기 보사부장관은 정치인 출신인데도 행정부 장관답게 이 건에 대하여 보사부가 법상 책임질 일은 없다고 잘라 말씀하였다. 참모들은 이런 장관을 모실 때 마음이 편하고 소신껏 일할 의욕이 생기는 것이다.
이 밖에도 B형간염예방백신원액 등을 보호대상원료의약품으로 지정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1997.6.9일자 약업신문에 게재하였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정부가 80년대까지 국산품을 보호하기 위하여 외국산 의약품 등의 수입을 금지해온 것은 시장을 개방할 때까지 국산의약품의 국제경제력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조치이었다. 원료의약품 보호시책도 마찬가지로 시장경쟁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 시기엔 원료의약품의 국산화를 촉진시켜 국산화율을 높임으로써 국산의약품의 국제경쟁력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절실한 조치이었고 이 제도시행으로 파급효과가 커서 80년대 후반에는 시장점유율이 큰 품목의 원료의약품은 대부분 국산화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 의약품 등의 단계적 수입개방예시제(1997년 약업신문 게재) 실시로 의약품의 수입개방을 80년대 후반까지 늦추게 하여 제약업계가 수입개방에 대처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보람을 느낀다.
<필자소개>
이창기 박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후 원광대학교에서 약학박사학위와 미국지구환경대학원(EEU)에서 명예환경과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사회부 국립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후 내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공기사, 연구관. 국립보건원 마약시험과장, 분석4과장. 보건사회부 약정국 마약과장, 약무과장, 약품수급담당관, 국립의료원 약제과장, 약정국장, 약무식품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립보건원 안전성 연구부장, 국립보건안전연구원장(초대), 국립환경연구원장(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을 거쳐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중앙약사심의위원,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충북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환경한림원 회원으로 있다.
2018-04-05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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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 생물학적동등성시험제도 도입으로 국산의약품 신뢰제고
<연재를 재개하며>
필자는 1994년 공직을 마감하고 1997년 4월 21일부터 같은 해 8월 11일까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공직생활 35년’이란 제하에 공직에서 수행하였던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총 22회에 걸쳐 본지에 연재한 바 있었습니다.
△망국적 마약인 메사돈의 추적 △한국산 대마의 성분연구와 규제 △원료의약품의 국산화 저해규정폐지 및 보호제도 시행 △약효재평가 실시 △의약품등의 단계적 수입개방예시제 실시 △KGMP제도 정착기반 조성 △표준소매가제 실시 △목포시 시범 의약품분업의 경험 △국가독성연구기관 창설.
이 글을 읽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초대 소장이신 재미 우상덕 박사님, 공직 선배이신 허 용 삼일제약 회장님, 김병각 교수 등 약대 교수, 식약청 박종세 초대 청장 등 공직동료와 후배, 대학동문, 제약회사 회장 등 임직원, 개국약사 등으로부터 격려의 서신과 전화를 받았고 1997년 8월 11일 이 글을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감사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기회 있으면 이번에 못다한 이야기를 더 이어 보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미루다가 20년이 또 지났습니다. 그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중에서 5가지만 더 이을까 합니다. 지금 쓰고자 하는 글이 30년이 지난 이야기들이지만 그 시기엔 나라를 위하고 국민보건을 위해서 꼭 풀어야 할 과제이었고 또한 필수적인 국가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시책을 그때 실시하였기에 오늘이 있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이에 대한 독자여러분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글 싣는 차례>
1. 생물학적동등성시험제도 도입으로 국산의약품 신뢰제고
2. 원료의약품의 보호지정성과와 뒷이야기
3. 한약업사제도폐지와 관련된 해묵은 민원해결
4. 88올림픽대비 식품접객업소시설을 선진국수준으로 개선
5. 의약품 등의 품질관리에 대한 이야기
6. 의약품의 오남용에 대한 단상
<필자소개>
이창기 박사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후 원광대학교에서 약학박사학위와 미국지구환경대학원(EEU)에서 명예환경과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사회부 국립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후 내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공기사, 연구관. 국립보건원 마약시험과장, 분석4과장. 보건사회부 약정국 마약과장, 약무과장, 약품수급담당관, 국립의료원 약제과장, 약정국장, 약무식품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국립보건원 안전성 연구부장, 국립보건안전연구원장(초대), 국립환경연구원장(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을 거쳐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중앙약사심의위원,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충북대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환경한림원 회원이다.
국내 최초로 수행한 의약품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연구
1986년 나는 보건사회부 약정국장직에서 국립보건원 안전성연구센터장(부장)으로 발령이 나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전문지에서는 나의 인사를 두고 최장수 약정국장이었다고 보도하였다. 나의 전임자들이 보사부 산하 연구기관장으로 승진해간 전력이 있어서였는지 그동안 나에게도 한두 차례 인사제의가 있었다. 국장인사는 장관이 하는 것이므로 인사발령이 나면 명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사전에 나의 의중을 타진하기에 사양한 적이 있었다. 내가 승진해갈 자리에 있는 분이 영전해간다면 오가는 사람이 함께 영전하게 되어 경사스러운 일이겠지만 내가 그 자리에 가게 되면 그 직에 계시던 분이 옷을 벗게 되는 것 같아서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국장자리는 꽃이라고들 하는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소신껏 할 수 있는 자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1981년 약정국장으로 부임한 후 정부조직의 통폐합으로 약정국과 위생국(식품국)이 통합된 약무식품국장의 보직을 맡아 3년 반 동안 식품행정업무까지 맡게 되었고 그 후 내 손으로 약정국과 식품국으로 다시 분리하는 직제개정안을 제출하여 두국으로 분리된 후 다시 약정국장직을 맡게되어 5년 동안 그 직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왔다. 옮겨가게된 자리에도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약정국장직에 있을 때 추진해오던 국가독성연구기관을 설립하는 일과 제약선진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생물학적동등성시험제도를 도입하여 실시하는 일이다.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은 국내에서 시험하는 기관이 없어 실시하지 못하였고 실시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미루어온 과제이었다. 나는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은 국가기관이 먼저 수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생물학적동등성시험지침을 제정하여 민간연구기관이 그 기준에 따라 수행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마침 내가 옮겨가는 자리가 이 일들을 할 수 있는 직이여서 그 자리에 가면 이 일부터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1970년경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Phenytoin제제의 중독사건, 영국에서 발생한 Digoxin제제의 중독사건에서 보인 것처럼 같은 약물의 제제를 같은 양 같은 환자에게 투여하더라도, 제품명이나 제조번호가 다르면 임상효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화학적으로 같은 약물을 같은 양 함유한 제제라도 제제간에 생체이용률(Bioavailability)이 다를 경우 임상 효과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제제의 화학적동등성 뿐만 아니라 체내에서 생체이용률의 양과 속도를 비교검토하여 생물학적동등성(Bioequivalence)의 개념으로서 제제의 약효를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77년 미국 FDA는 연방규칙에 생물학적등등성시험 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규정을 두어 이미 허가된 의약품제제와 동일한 유효성분제제의 제조허가시 생물학적동등성시험 자료를 요구하고 있으며 뒤이어 일본에서도 미국과 같이 생물학적동등성시험 자료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치료제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네릭제제(복사제품)의 제조허가시 기준 및 시험방법을 제출하게하여 화학적동등성시험으로 품질관리를 하고 있는 실정인 바 이미 제약 선진국에서 화학적으로 동등하다고 하더라도 제제간 생물학적동등성시험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서둘러 이 제도를 도입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제도를 시행하려면 먼저 국내에서도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연구를 실시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적합한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표준작업지침의 확립과 그 기준설정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사료되었고 그 일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되어 이 연구사업부터 착수하려던 때에 마침 과학기술처에서 특정연구과제를 신청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나는 이 공문을 받은 그날부터 의약품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연구과제를 과기처 특정연구과제로 제출하기 위하여 연구사업계획서를 작성하였고 내가 직접 과학기술처에서 연구사업계획을 보고하고 심사를 받았다. 그 며칠 후에 이 과제가 과기처 특정연구과제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과기처의 특정연구과제는 국가기관이 일반예산으로 수행하는 연구과제와 달리 과기처가 직접 수행하는 특정연구사업으로 수년간 계속 연구할 수 있는 대형과제로 연구비가 충분하여 대학 등 다른 연구기관과 공동연구도 가능하여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연구사업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연구사업이었다.
이 연구사업을 수행할 연구자는 내가 맡은 총괄연구책임자 외에 공동연구를 수행할 외부의 연구책임자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심창구 교수, 원광대학교 김재백 교수, 국립의료원 이학중 내과과장을 포함하여 우리연구원 연구진으로 구성 연구실시계획서를 작성하여 과기처에 제출한 후 연구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차 연도 연구사업은 테오필린과 라니티딘제제를 대상으로 하였다. 시험약은 보건사회부에서 허가 받아 시판되고 있는 제제를 임의 선정하였고 오리지널 제품을 대조약으로 하였으며 건강한 사람을 피험자로 선정하여 실시하였다. 시험연구는 이 연구사업에 직접 참여한 심창구 교수의 지도하에 우리연구원 연구진이 수행하였다. 연구결과는 시험약과 대조약이 생물학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연구사업결과에 대한 1차 연도 연구보고서는 1988년 6월에 과학기술처에 제출되었다. 이 연구보고서는 국내에서 최초로 수행된 의약품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연구논문이다. 이 연구논문은 이듬해 과학기술처 장관이 수여하는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추진해오던 국가독성연구기관이 설립되고 내가 신설된 국립보건안전연구원 초대원장으로 부임한지 6개월만에 의약품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연구사업도 순조롭게 추진되어 의약품 제조허가를 할 때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을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9년 2차 연도에는 프로프라놀롤, 노르플록사신, 세프라딘, 프라지콴텔제제에 대하여 1차 연도와 동일하게 시험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결과는 시험대상제제 모두 대조약과 생물학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1990년 3차 연도에는 이브프로펜. 후로세마이드, 피리미돈, 리팝피신, 노르트립틸린제제에 대하여 1차 연도와 동일하게 시험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결과는 시험약과 대조약이 모두 생물학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생물학적동등성시험기준 제정 및 제조허가지침에 적용
1988년 1차 연도 의약품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에 관한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의약품의 생물학적동등성시험기준을 제정하였다. 시험방법, 피험자의 선택과 관리, 피험자에 대한준수요령과 보상방법, 시험연구기관의 시험절차 등 표준작업지침을 정한 것이다. 이 시험기준은 1988년 10월 28일 국립보건안전연구원 고시 제1호로 공고되어 1989년 1월1일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생물학적동등성시험기준은 1989년 1월1일부터 제조허가되는 제네릭제제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국민의료보험에도 적용되는 바 이 지침실시를 위한 준비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이후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을 실시할 민간연구소도 수개소 새로 탄생하였고 4~5개 약학대학 연구실에서도 이 시험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면서 제약업체가 시험의뢰한 수탁시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초기 정착과정에서 일부 시험결과가 조작되는 등 불상사도 발생하였으나 그 이후 식약청의 지도감독하에 현재는 안정적인 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생물학적동등성시험제도 도입실시결과에 대한 평가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은 새로 개발된 신약의 특허시효가 지난 복제제품인 제네릭제제에 적용되는 시험으로 이 시험에서 오리지널제품과 제네릭제제의 약효동등성을 입증하는 시험이므로 이 생물학적동등성시험자료가 첨부되어야 제네릭제제의 제조허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네릭제제가 시판되기 전까지는 의료인이 오리지널제품의 특허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오랫동안 오리지널제품을 투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인은 오랫동안 오리지널제품에 대한 약효의 신뢰성을 임상적으로 경험하게 되어 오리지널제품을 믿고 쓰게 된 것이다.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같은 원료의약품으로 제조한 제네릭제제가 오리지널제품과 약효가 동일하면서 약값이 더 저렴한데도 오래 믿고 써오던 오리지널제제를 새로 나온 복사제품인 제네릭제제로 처방을 바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지난날 국내에서 신약개발은 엄두도 못내던 제약 후진국이어서 외제 선호에 대한 고정관념도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을 실시하게된 이후에는 의사나 약사가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의 의미를 알게되고 이 시험에서 오리지널제제와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제네릭제제는 오리지널제품과 약효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후발 제약회사에서 제조한 제네릭제제를 믿게되고 투약받은 환자(국민)도 제네릭제제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약효가 동일하면서 약값이 훨씬 저렴한 국산의약품을 투약함으로써 국민보험재정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신약을 많이 개발한 제약선진국에서도 환자의 진료에 제네릭제제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제약선진국에서 개발한 의약품을 많이 써오던 우리나라에선 오리지널제품의 약효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었는데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의 도입실시로 국산의약품을 신뢰하고 쓸 수 있게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국내에서 사용되는 치료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산 제네릭제제가 국민건강증진에도 기여한 것으로 사료되어 이 제도가 하루빨리 시행되도록 추진한 담당자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2018-03-30 09: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