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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에필로그
노류장화(路柳墻花)라 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들이 기생(妓生)들에게 붙인 별칭이었다.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란 의미다. 하지만 ‘美人탐방 제2부’에 등장하는 시기(詩妓)와 의기(義妓)는 노류장화와는 의미가 다른 미녀들이다.
사대부들이 독차지 하고 싶어 경쟁적으로 다가가나 되레 그녀들이 물러서며 파트너를 골라서 선택하는 절세미녀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나니 /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樹州) 변영노(卞榮魯·1898~1961)의 《논개》다.
임진왜란(1592)때 일본의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진주성 촉성루에서 살해 한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시(詩)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 위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 대동강에 낚시질 하는 사람들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 모란봉에 밤놀이 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고 /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 사람은 반드시 다 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 그대의 붉은 한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 그대는 푸른 근심을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전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계월향》(桂月香)이다.
북(北) 계월향, 남(南) 논개라 하여 회자(膾炙)되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없어서는 안 되었던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의기(義妓)였다. 두 의기는 살려면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조국과 사랑하는 사나이를 위해 깨끗이 순절(殉節)하였다.
조강지처도 아닌 노류장화 정도로 혹자들은 대수롭지 않은 천민으로 폄훼하지만 그녀들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렸다. 그래서 두 의기는 정사에 영원히 역사적 진리로 꽃피워질 것이다.
“창가에는 복희(伏羲)씨 적 달이 밝구나!” 하자 “마루에는 태고 적 바람이 맑도다” 백호임제(白湖林悌)의 수창(酬唱)이다. “비단 이불을 누구와 함께 덮을꼬.”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그네의 베갯머리 한편이 비어 있네...” 맞춤같이 수창이 척척 이어졌다. 천재 시기(詩妓) 일지매(一枝梅)와 천하의 풍류객 백호임재의 마치 연리지 같은 절묘함의 수창이었다.
그랬다. 앞의 두 의기와 한명의 시기도 한국 여류문학에 없어서는 안 되는 미녀다. ‘美人탐방 제2부’는 한국의 미녀들 얘기다. ‘美人탐방 제1부’는 양귀비를 비롯한 중국의 4대미녀(서시·초선·왕소군) 들의 내밀한 얘기와 클레오파트라와 조세핀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구의 달콤한 스토리였다. 또한 가깝고도 정서적으로 먼 일본의 오노노 코마치(小野小町·809~901)와 호조마사코(北條政子·1156~1225)의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농밀한 얘기들이었다.
하지만 ‘美人탐방 제2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국 여류문학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도 있는 황진이(黃眞伊·1511~1551)를 비롯한 이매창(李梅窓·1513~1550)·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등 10여 미녀들을 주인공으로 얘기를 진행시켰다.
매회 두 편의 시(詩)를 삽입하여 시대상황과 주인공의 사회적 관계, 또는 드나드는 남자들의 사회적 위치도 살폈다. 만족하진 않으나 한국풍류여류문학의 시원과 흐름을 대략적이나마 시기(詩妓)들의 역할을 추적하였다. 또한 연대별로 게재 못했음이 생각의 미흡함의 소치가 아닌가 싶다.
본격적인 문학 산책이 아니므로 주간신문 연재물의 재미도 간과할 수 없어 팩션(Faction. 팩트+픽션)의 주인공도 등장시켜 발생할지도 모를 문제의 소지도 염두에 두었었다.
2007년도 9월 12일 시작, 2019년 7월 13일로 장장 13년에 제1부에 83명, 제2부에 10명에 3명의 다이제스트 된 미녀까지 총 97명의 동서고금의 미녀들 얘기였다. 역사를 바꾼 여걸에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목숨까지 던진 정사(情事) 등 글로는 다 표현이 불가능했던 아름답고 위대하기까지 한 히스토리를 미녀들이 만들어 냈다는 역사적 진리의 현장을 보았다.
세기적인 역사의 현장에 미녀가 빠지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동서고금의 역사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보았던 역사적 진리다. ‘그대 보았는가 /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 바다로 쏟아져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음을 // 그대는 모르는가 / 고대광실 환한 거울 앞에서 흰머리 슬퍼함을 / 아침에 푸른실 같더니 저녁엔 흰눈처럼 세었다고 / 모름지기 인생은 마음껏 즐길지니 / 중략... 당장 술 받아다 그대 함께 마셔야지 / 오화마(五花馬) / 갑진 갑옷 / 아이 불러 내어다가 살진 술과 바꾸어서 / 그대 함께 만고의 시름 녹여나 보세’ 이백(李白·701~732)의 《장진주》(將進酒)다.
그랬다. 시기와 의기들이 목을 메며 경쟁적으로 구애를 받았던 사대부들은 그렇게 호방하게 세상의 시름은 아랑곳 않고 세월을 낚았다. 지면을 아낌없이 내 준 함용헌 회장님과 흡족하지 않은 글에 맛깔스러운 그림을 그려 준 유기송 화백, 꼼꼼히 워드를 쳐준 송(宋)실장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9-07-10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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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9> 홍랑(洪娘) <제14話>
시묘(侍墓)살이 9년의 혹독한 사랑의 영혼은 제1회 파주 홍랑 문화예술제(회장 사영기)로 되살아났다. 무려 435년(2018년 4월 18일)만이다. 사랑이 문화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운 행사다.
홍랑과 고죽이 주인공이다. 사내는 조선팔도를 대표하는 풍류객이며 홍랑은 시와 노래, 그리고 가야금과 거문고까지 능수능란한 기생(前) 신분이다.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첫눈에 반해 부부가 되었다. 영원히 헤어져서는 못사는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뜨거운 사랑을 시샘 했음인지 짧은 만남에 긴 기다림에 시달리는 처지로 만들었다. 홍랑이 그렇게 되었다. 홍원에서 극적으로 부부가 되어 헤어지고 만나길 되풀이 하다 다시 헤어졌다.
고죽이 한양으로 영전 되었으니 기쁘긴 하나 여자의 마음은 서글프고 안타깝다. 더욱이 소실(小室)의 신분이여서다. 조강지처였으면 떳떳이 따라나설 수 있으나 기생 첩은 그리 할 수 없었다. 같은 여자이면서 태어난 신분에 따라 사회의 등급이 매겨지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그러하였다.
재능으로만 따지면 홍랑이 조선에서 단연 손꼽히는 여자였을 터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어렵고 세상살이가 순탄치 않아도 홍랑은 고죽의 사랑이면 웃음과 기쁨과 꿈을 잃지 않는다. 고죽이 한양으로 올라갈 때 홍랑은 덕풍역(德豊驛)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갈 수가 없었다. 당장 홍랑이 가서 거처할 곳이 없어서다. 고죽은 사랑하는 홍랑을 조강지처 못지않은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으나 마음과 같이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홍랑은 오막살이나 다름없는 덕풍역(현 하남시 덕풍동) 인근에 집을 얻어 고죽의 소식만을 학수고대 하였다. 그들은 태풍이 불면 훌러덩 날아갈 듯 한 초가집에서 홍원의 화촉동방 이후 가장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헤어졌다.
홍랑은 고죽이 그리울 때면 그의 시를 거문고에 실었다. ‘올바른 길은 세상에서 용납되기 어렵다네 / 하찮은 벼슬이야 가난 때문에 하는 거지 / 온 집안이 외진 시골로 떠난다기에 / 봄날 강가에서 외로운 배와 헤어지네 / 섬돌 아래에는 단약을 달이던 아궁이 / 창가에는 홀을 잡은 사람 / 황교도 오리를 타고 다녔으니 / 얼마인가 기린각을 배알 하겠지’ 고죽의 《괴산으로 부임하는 조원을 보내며》다.
그랬다. 홍랑은 고죽의 사랑이 목마르다. 기생이었을 때는 본인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사내들이 제 욕정만 채우고 꿀만 빨아먹고 꽃을 떠나는 벌 나비 같았다. 그러나 고죽과의 사랑은 자신보다 상대를 더 배려하는 꿈같은 잠자리다.
홍랑은 덕풍역에서 고죽과 헤어진 후 흉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고죽의 절명이다. 덕풍역에서 헤어진 지 한 달여여 후다.
사색당파(동인:남인·북인, 서인:노론·소론)의 희생양이 되었다. 고죽이 중도파여서다. 정국이 평온하고 국태민안 이였을 때는 사색당파에 속하지 않은 중도파가 유리하나 세태가 불안하면 가장 위험한 위치다.
사색당파에서 서로 상대파로 몰아 위해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고죽은 중립파로 분류되어 있는 영의정 노수신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어 사색당파 모두의 경계대상 이였을 터다. 자기네 편이 아니면 모두 경계대상으로 분류하여 적이 되었다. 고죽도 그렇게 학자관료 집단인 사색당파의 밥그릇 싸움에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홍랑은 고죽이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발탁되었으니 자신도 곧 북촌이나 육조 이웃 어느 곳에서 살 수 있으려니 하고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절명 소식이 날아들었다. 홍랑은 서슴없이 고죽의 무덤 앞으로 갔다. 여자 시묘살이가 시작되었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홍랑의 시다.
고죽도 즉각 수창하였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그랬다.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아끼고 더 사랑하였다. 지독한 사랑이다. 그들에겐 사랑이 곧 신앙이었을 터다.
시묘살이는 부모 묘소 앞에서 아들이 하는 것이 상례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홍랑은 여자의 몸으로 지아비 고죽의 묘에서 3년이 아닌 9년을 하였다. 절색(絶色)으로 조선팔도에 소문이 나 있는 여인이 시묘살이를 하니 사내들이 그녀를 그냥 놔 둘리가 없다.
홍랑은 꽃보다 아름다운 얼굴에 검댕이를 바르고 그것도 부족하여 스스로 위해를 하여 추녀가 되었다. 절기(絶妓)의 단호한 태도다. 고죽과 홍랑이 실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눈 세월은 6개월에 불과하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는데 홍랑과 고죽에겐 6개월이란 세월이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산 삶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새로워 화촉동방으로 영혼의 기(氣)를 높였다.
관기(官妓)를 사랑하여 사대부로 풍기문란 등으로 좋은 벼슬자리에선 벗어났다. 풍류객의 적나라한 삶이다. 조선은 철저한 성리학의 나라로 겉으론 도덕군자이여야 벼슬을 할 수 있었다. 학문이 높았으나 고죽은 학문에 걸맞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풍류객답게 사랑을 택했을 것이다.
34살의 고죽과 16살의 홍랑이 처음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들은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고죽이 절명하자 홍랑은 역시 시묘살이로 지아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장 9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자청했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삶을 제물로 하여 예술로 재탄생 시키는가 보다. 홍랑은 파주 홍랑 문화예술로 부활하여 여류문학사에 영원한 역사가 되었다.
한편 해주 최씨 집안에선 그녀를 집안사람으로 인정하여 고죽 앞에 안장시켰다. 지금은 홍랑과 고죽은 신분 없는 세상에서 남의 눈치 안보고 영겁의 세월 속에서 화촉동방 같은 사랑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홍랑과 고죽의 세기적 로맨스는 그렇게 만인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을 피워 놓았다.
2019-07-03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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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8> 홍랑(洪娘) <제13話>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 했던가? 고죽은 탄 말에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채찍을 날렸다. 한시라도 빨리 홍원에 가려는 속내다. 종성(鐘城)의 부사 겸 병마절도사를 겸한 발령을 받고부터 홍랑이 눈앞에 나타나 잠도 설쳤다.
종성군은 함경도 최북단으로 여진족 오랑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뛰어 조선은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다. 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7~8년 전이다. 선조(宣祖·1552~1608) 시대다. 고죽은 종성부사와 병마절도사를 겸한 부임길에 올랐다. 입법·사법·행정을 한손에 쥐고 종성으로 달린다.
가늘 길에 홍원에 들려 홍랑도 데리고 가려는 속내다. 경성 북평사로 갈 때와는 격이 다르다. 구종(驅從·하인)까지 거느리고 당당한 모양새다. 고죽도 기분이 좋아 한시라도 빨리 홍원에 가 홍랑에게 자랑하고 싶으며 아이도 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아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까지 하고 있다.
고죽은 말 위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희죽이 웃음까지 보인다. 자기를 빼어 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 홍랑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 제일의 풍류객과 조선 제일의 천재 절기(絶妓) 홍랑 사이의 아이를 떠올리는 고죽은 신바람이 나고 하늘을 찌르는 기쁨이 용솟음 치고 있다.
사흘 밤을 말 위에서 자다시피 하여 홍원에 닿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홍랑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방긋방긋 웃을 아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게 사내인가 보다.
홍랑의 집 울타리엔 해마다 여름 꽃인 장미와 해바라기가 만발한다. 올해도 계절은 변하지 않았다. 노란 해바라기 사이사이로 빨간 장미가 활짝 피어 이 세상이 아닌 선경(仙境)같아 보였다. “홍랑아 내가 왔느니라!” 고죽은 “여봐라 안에 누구 없느냐?”란 사대부 모습은 생략하고 사립문을 한걸음에 지나 내실까지 들어갔다. “에구머니! 누구시기에 남의 집 내실을 이토록 무례하실까? 당장 나가세요!”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다.
생소한 여인의 목소리다. “이 집이 홍랑의 집이 아닌가요? 제가 고죽 최경창이올시다.” “아 예...” 그때서야 여인의 음성이 낮아지면서 “홍랑은 재 넘어 밤나무골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였다. 여인은 힐긋 곁눈질로 고죽을 훔쳐보며 ‘네가 그 알량한 고죽이냐’하는 눈치다.
그랬다. 홍랑은 생활이 어려워 살던 집을 팔고 밤나무골 움막 같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름다운 계절은 쉬이 지나가니 / 젊은 시절이 그 얼마나 되랴 ’ 노란국화를 보면 또 지고 있고 / 흰 머리는 뽑아도 또 많아지네 / 외진 시골집을 누가 찾아오랴 / 사립문에 해가 저절로 기우네 / 어린것들이 차츰 말을 배우니 / 그것만이 내 어긋난 삶을 위로해주네‘ 고죽의 《중양절》이다.
사실 홍랑은 고죽의 여자가 된 후 기쁨은 잠시 뿐 안타깝고 고달픈 생활이 더 많았을 터다. 격정적 동거는 찰나에 불과하고 헤어져 있음이 숙명적이어서다.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어렵게 마련해 평생을 사노라 했었던 집도 팔고 움막 같은 집으로 이사하여 몸과 마음이 지옥이다. 홍랑은 사실 죽지 못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행여 신앙 같은 고죽이 찾아올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다. 막상 찾아오면 걱정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어미여서다. 그런데 지금 고죽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다. 비몽사몽일까? "홍랑아! 내가 왔다.“ 비몽사몽은 아니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할 때다. ”홍랑아 내가 왔느니라!“ 고죽의 음성이 분명하다. 목말라 하는 목소리다.
홍랑은 벼락같이 뛰어나가 불같은 고죽의 품에 안기고 싶으나 떠나간 아이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광릉성 강가에는 / 술집도 많아 / 붉은 주렴 푸른 휘장이 / 강줄기에 비쳤지 / 달 밝은 밤엔 노래와 춤 / 그 가운데서 잠을 잤건만 / 빗줄기 흩어지고 구름도 흩날려 / 그 옛날 놀이가 간데없어라’ 고죽의 《강가의 다락에서》다. (시옮김 허경진)
홍랑은 고죽의 여자가 돼서 얻은 것은 영혼의 행복이고 잃은 것은 육체의 기쁨일 게다. 짧은 육체의 희열은 긴 영혼의 고독으로 찾았을 터다. 지금이 절정기인데 영혼의 행복까지 무너지려 한다.
그런데 지금 고죽이 홍랑을 목마른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 여자는 사내의 부름에 바늘에 실 가듯 문을 열고 나간다. “네가 홍랑이냐?” 고죽은 앙상한 여인의 모습에 눈을 의심한다. 꽃보다 아름다웠던 모습이 아니 여서다.
일년 사이에 여자는 그렇게 변해 버렸다. 종교같이 생각했었던 고죽이 홍랑을 돌봐주지 않아 여자는 방치된 꽃과도 같아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디 갔느냐?” 고죽은 홍랑을 뜨겁게 품을 생각은 않고 아이부터 찾았다. “나으리 황공하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홍랑은 엎드려 통곡하며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고죽은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알았다. 알았느니라. 일어나거라...” 고죽은 홍랑을 일으켜 억세게 품었다. 홍랑이 숨이 막힐 것 같다. 하지만 가슴이 뛰고 기쁨이 충만하다. 일 년 가까이 소식이 궁금하여 애태웠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내 품에 안기는 행복감이다. 지금 홍랑이 찰나지만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여자의 행복한 시간일 게다. “홍랑아 내가 종성부사로 가는 길이다. 너도 얼른 준비를 해서 떠나야 하느니라!” 홍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고죽의 품이 너무 따뜻하고 포근하여 영원히 잠들고 싶은 순간이다.
하지만 고죽은 함경도에서도 최북단 종성의 여진족 오랑캐들이 날뛰는 상황이 눈에 선해 마음이 바쁘다. “홍랑아, 이제 우리 종성으로 떠나야 하느니라!” 라는 말과 함께 참았던 육체의 허기를 채우려 서두른다. 그들은 낮을 밤으로 생각하고 화촉동방 같은 기쁨을 즐기고 서둘러 종성길에 올랐다.
2019-06-26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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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7> 홍랑(洪娘) <제12話>
고향으로 돌아온 홍랑은 하루하루가 새롭다. 고죽을 한양으로 떠나보냈어도 뱃속엔 제2의 고죽이 쑥쑥 자라나고 있어서다. 울타리의 개나리와 산수유가 어느 해보다도 화려하고 예쁘게 피었다. 세상만사가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배가 불러올수록 홍랑은 점점 더 행복하고 ‘내가 고죽의 여자다.’라고 저잣거리에서 목이 쉬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소리치고 싶은 속내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가 않다. 고죽이 한양으로 떠난 날부터 소식이 기다려졌다. 하루가 여삼추 같이 길고 길다. 밤마다 꿈에도 잘도 나타나드니 한양으로 떠난 날 부터는 꿈에도 보이지 않는다. 꿈에라도 보면 마음이 좀 놓일 터인데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 정화수 기도를 하기도 하고 틈이 나면 국수당 고개에 올라가 손을 흔들며 떠나갔던 고죽을 떠올리곤 하였다. 홍랑은 후원에 칠성단을 만들고 밤이면 고죽의 무사를 빌고 낮엔 경서(經書)를 읽으며 태교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죽이 한양으로 떠난 지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이다. 그날도 홍랑은 밤새 기도를 하고 잠시 낮잠이 들었을 때다. “이 댁이 홍랑마님 댁인가요?” 라며 한 사내가 사립문을 지나 성큼성큼 들어왔다. 날랜 발걸음이다. “댁은 누구시죠?” 홍랑이 경계의 시선을 보이며 물었다. “예 저는 고죽 나으리 심부름을 왔습니다.” 고죽이란 말에 홍랑은 맨발로 뛰어나갔다.
전후사정을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죽이란 말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우리 나으리가 어떠신지요?” 홍랑의 음성이 턱에 받쳤다. “예 최경창 나으리가 지금 저의 집에 계십니다. 말에서 낙마하셔서 저의 집에서 치료를 하고 계십니다...“ 홍랑은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찰나적이지만 상념에 잠겼다가 홍랑은 정신을 가다듬어 “지금 뭐라 했어요? 최경창 나으리께서 어떻다고요?”라고 되물었다. “여기 서찰이 있습니다. 읽어보시지요...” 사내는 홍랑에게 고죽의 서찰을 내어 밀었다. ‘홍랑은 이 서찰을 받는 즉시 덕원으로 오너라!’ 고죽의 서찰은 간단하다.
홍랑은 그렇지 않아도 홍원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되어 오는데 소식이 없어 궁금해 하던 차였다. 고죽이 보낸 부담마를 타고 홍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덕원으로 향하였다. 보고 또 봐도 싫지 않은 고죽에게로 사흘이 걸려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번 헤어진 지 삼십년 만에 / 여기서 다시 만나니 도리어 서글퍼라 / 예전의 스님 모습은 지금 어디 있나 / 그 옛날 어린애가 흰머리가 되었으니...’ 고죽의 《삼십년 만에 보운스님을 만나》다. 그들은 비록 남과 녀로 태어났으나 목숨처럼 그리워하는 관계였다.
그랬다. 홍랑은 홍원에서 그렇게 고죽이 태산도 한 손에 떠받칠 듯이 보무도 당당하게 떠났던 모습은 간데없고 어깨와 다리에 상처를 보고 울음이 복받치고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후회까지 되었다.
헤어지기 전에 사랑이 너무 깊었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라서다. 그들은 동창이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떨어져 잠시 눈을 붙이고 고죽이 한양 길에 올랐던 것이다. 천하의 고죽이라해도 뼈가 녹을 듯 한 사랑엔 묘수가 없었을 터다.
홍랑의 하늘같은 사랑이 후회의 눈물이 되었다. “왜 진작 연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홍랑이 풀죽어 누워있는 고죽을 빤히 내려다 보며 호령하듯 따졌다. “허허, 나도 낙마한 즉시 서찰을 보내려는 마음이 왜 없었겠느냐! 그런데 명색이 장수인데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이 말이 되겠느냐? 생각 끝에 이제 부상도 다 나아가서 너를 한 번 더 보고 떠날 생각으로 서찰을 보냈느니라! 너무 섭섭해 하지 말거라...” 고죽의 뜨거운 손이 다가와 홍랑을 끌어 품었다. 홍랑은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또 오뉴월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뱃속의 아이도 더 충동적으로 뛰었다. 한 번 더 보고 떠나려했다는 말에 홍랑은 빨리 불러주지 않아 야속했던 설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날은 서로의 몸을 손과 마음으로만 즐겼다. 고죽의 손은 밤새 홍랑의 불록 나온 배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배위의 손은 간혹 사타구니로 가다가도 멈칫하며 되돌아가길 수십 차례를 반복하였다.
홍랑도 고죽의 뜨거운 손을 잡아끌려다 입술을 깨물고 참기를 동창이 밝아올 때까지를 반복하였다. 아무튼 홍랑은 고죽의 낙마는 자기의 지나친 사랑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홍랑이 손을 내밀면 고죽은 못이기는 척 다시 꺼지지 않는 불꽃이 튈 것이 자명하여 여자는 석녀(石女)가 되기로 하였다. 자칫 사내를 너무 밝힌다는 소리를 고죽에게 들을까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고죽이 한양에 도착한 것은 병조판서가 빨리 상경하라는 서찰로부터 20여일이나 지나서였다. 그 사이에 정세가 많이 바뀌었다. 서인(西人)의 정권이 무너지고 동인(東人)쪽으로 넘어갔으며 영의정도 중도성향의 노수신(盧守愼·1515~1590)으로 바뀌었다.
정권이 바뀌자 고죽의 군령 어긴 것은 사라지고 전공 세운 것이 화제가 되었다. 세상인심이다. ‘덜그럭 덜그럭 수레 구르는 소리 / 하루에도 천만 바퀴 돌아간다네 / 마음은 같건만 / 수레는 같이 못타니 / 우리들의 헤어짐 몇 차례일세 / 수레바퀴 자국은 아직도 남았건만 / 아무리 님 생각해도 보이지 않네...’ 고죽의 《헤어지며》다. (시옮김 허경진)
낙마가 되레 행운을 가져왔다. 낙마하지 않고 곧장 상경했다면 서인 병조판서에게 군령 어김에 처벌을 면치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임 노수신 영의정은 중립인사다. 또한 노 영의정은 고죽의 경성에서 전공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한편 홍랑은 홍원으로 오다 그만 유산을 했다. 고죽과 헤어지고 마음이 산란해 부담마 위에서 상념에 젖어 있는데 산짐승 울음소리에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낙마했던 것이다. 홍랑은 하늘이 무너지는 상처다.
고죽이 그토록 바라던 자식을 실패했으니 다음에 어떻게 뵐까를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떨려 걸을 수가 없다.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오늘로 열흘째다. 정원의 오동나무 잎은 어느새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목이 되었다.
2019-06-19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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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6> 홍랑(洪娘) <제11話>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고죽이 등청을 하지 않고 있다. 어젯밤에 뼈가 녹도록 쌓였던 회포를 풀어 그러려니 하고 홍랑은 부엌에서 아침 준비에 부산하다. 홍랑의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경성에 와서 처음 신방 같은 잠자리였다. 홍원에서 화촉동방을 치른 후 처음이다. 홍랑의 콧노래가 문지방을 넘어 고죽의 귀에까지 들렸다.
그때였다 ‘억억억...’ 하고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디가 아프냐?” 고죽의 화들짝 놀라는 표정에 홍랑은 잔잔한 무지갯빛 미소를 머금으며 “아니에요. 선생님! 별일 아니에요... 여자의 본분이 생겼을 뿐이에요.”라며 아침 준비의 손길을 더욱 빠르게 움직일 뿐이다.
참으로 예쁜 모습이다. 밤마다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운우지정을 즐겨도 싫증이 나지 않을 계집이 눈앞에서 팔딱이니 고죽의 물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내는 두 팔을 벌려 홍랑의 등 뒤에서 감싸 안는다. 봉긋한 두 유방이 손안에 들어오자 물건은 뒤에서 실팍한 엉덩이를 압박한다. “선생님 여기서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홍랑의 음성은 싫지 않은 목소리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요! 곧 상을 들고 갈께요...” 고죽의 뜨거운 품에서 빠져 나간 홍랑은 냉이국을 퍼서 상에 놓아 방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밥상을 사이로 마주 앉았다. 홍랑의 얼굴이 전에 없이 상기 되었다. 고죽은 어젯밤 과음에 속이 타는지 냉이국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 그릇 더 달라는 표정이다. 눈치 빠른 홍랑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부엌으로 나가 냉이국을 사발에 하나 가득 담아다 고죽 앞에 놓았다.
생애 최고의 행복해 보이는 고죽의 표정이다. 이때다. 홍랑이 고죽에게 큰절을 하며 부엌에서 보였던 잔잔한 무지갯빛 미소를 보이며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제 홍랑은 진정한 선생님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라고 소리 없는 기쁨의 눈물을 보였다.
고죽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어젯밤의 첫날밤 같은 운우지정에 감격해 하는가 하는 눈치다. ‘남북으로 날리다가 금새 동서로 / 온종일 흩날리다가 진흙탕에 떨어지네 / 나 또한 넘어지고 미친 듯한게 너와 같거니 / 진나라 갔다가 초나라 갔다가 또 제나라로 가네’ 고죽의 《버들개지》다. (시옮김 허경진)
이제 홍랑은 진정한 한 사내 고죽의 여자가 되려한다. 두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을 두 손으로 닦고 역시 행복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죽선생님, 이 홍랑이 이제 진정한 고죽선생님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홍랑이 속곡까지 벗으며 봉긋하게 솟은 배를 보여주었다.
고죽은 예상이라도 한 듯 말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부엌에서 헛구역질을 할 때 고죽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언제부터냐?” “예, 선생님! 홍원에서 화촉동방을 치른 후였습니다. 그때가 소첩 배란기였었거든요..” “그때 그것을 내게 알리고 잠자리를 거절할 수도 있었지 않았느냐?” “소첩은 그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어요! 행여 임신이 안 될까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요. 선생님의 자식이 제게 들어있지 않았으면 이곳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홍랑의 두 눈에서 또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왔다.
고죽은 밥상을 옆으로 밀쳐내고 홍랑을 힘껏 품었다. “이제 아무 걱정 말거라! 내가 진정 네 사내인거라....” 둘은 말없이 한동안 한덩어리가 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고죽은 홍랑을 품고 있으면서 지금이 한양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고죽이 두 팔에 힘을 더 넣었다. 그때다. 홍랑이 고죽을 빤히 쳐다보며 “아이가 숨이 차데요.”라고 홍당무가 된 얼굴에 또 한 번 행복이 물결치는 표정을 보였다.
고죽은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저토록 행복해 하는 분위기에 병조판서 얘기를 했다가 실망하는 표정을 볼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을 넘길 수는 없다. 한시라도 빨리 상경하라는 병조판서의 영(令)을 어길 수는 없다. 군령을 어기고 병조판서의 영까지 어겼다가는 조선팔도 어디에서도 발을 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날 한양으로 떠나지 못했다. 경성에서 마지막 밤이다. 역시 홍랑의 거문고 음률에 주안상이 차려졌다. 고죽의 풍류다. “그래 홍랑아! 너의 태몽은 어떠하였느냐?”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고죽의 여유 있는 물음이다. “나으리, 이제 와 태몽이 왜 궁금하세요?” “아니다. 네가 무슨 태몽을 꾸고 임신을 했나 궁금하구나... 그리고 언제 꾸었는지도 궁금하구나...” “나으리를 뵙기 며칠 전에 꾸었는데 소첩은 너무 황당해 웃으면서 잊어 버렸는데 나으리를 뵙게 되었어요...” “허허... 태몽 내용을 얘기하라니까!” 고죽의 퉁명스런 말투다.
그때서야 풍류분위기를 깨지나 않을까 조마조마 한 표정으로 홍랑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사실 소첩은 꿈이 없는 편인데 그날따라 백발노인한테서 예쁜 새 한 마리를 선사받았사옵니다. 그 노인의 말에 의하면 새의 이름은 한고조(寒苦鳥·히말라야에 사는 상상의 새)라 했사옵니다.” “한고조라? 처음 들어보는 새인데 어떤 새라더냐?” “예 나으리,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라 하옵니다.” 고죽은 꿈 얘기에 신경을 쓰기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홍랑의 배를 쓰다듬으며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의 《춘몽》(春夢)을 낭송하였다. ‘어젯밤 동방에 봄바람이 일어나 / 멀리 소양강의 미인을 그렸더니 / 베갯머리 잠시간의 봄 꿈속에서 / 강남까지 수천리를 달려갔도다.’라고 끝나기가 무섭게 ‘주섬주섬 이꽃저꽃 심을 것 없다 / 백화현(百花軒)에 백가지 꽃 차야 맛인가 / 매화꽃 국화꽃 맑고 좋은데 / 울긋불긋 다른 꽃 부질없구나...“ 홍랑이 무거운 몸으로 고려 충혜왕때 예문관 대제학 벼슬을 한 오조년(李兆年) 《백화헌》을 수창하였다. 고죽은 다시 한 번 홍랑의 시에 대한 높고 깊은 조예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고들은 그렇게 서로서로 사랑을 넘어 종교가 되었다.
2019-06-1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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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5> 홍랑(洪娘) <제10話>
오랑캐들은 결국 경성에 쳐 들오지 못하였다. 몇 번이고 침공을 시도했다 고죽에게 대패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고죽의 명성에 눌려 스스로 살길을 찾은 것이다. 몇 번의 침공을 해 봤으나 철벽수비로 수백 명의 사상자만 냈을 뿐 한 능선도 탈취하지 못해 스스로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홍랑은 홍랑대로 밤낮으로 안달이다. 고죽 곁으로 오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줄 알았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정반대다. 멀리멀리 떨어져 있을 땐 궁금하여 상상만으로 안타까웠는데 막상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속만 태우고 있으니 안 보느니만 못한 현실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
홍랑은 밤마다 용광로 같은 사랑을 꿈꾼다. 화적(火賊)같은 사내에게 겁탈직전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벗어나 경성에 왔으나 보고 또 봐도 싫지 않은 님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서러웠다. 기생 출신이란 자괴감도 들었다. 차라리 홍원에 있으면서 꿈속에서 반갑게 만나는 것이 더 행복했었다는 데에 까지 생각에 이르자 홍원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도 문득문득 들었다.
홍랑은 마음에 갈등이 심해지면 애걸복걸 목메다시피 하여 고죽의 여자가 된 것에 대해 후회도 하곤 한다. 특히 경성까지 왔는데도 석녀(石女) 보듯 하는 고죽이 원망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어쩌다 뜨거운 살을 섞을 때가 있을 때도 쫓기는 토끼모양 서두르는 것에 불만이 크다. 밤새껏 뼈가 녹을 듯이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이 홍랑의 속내다.
그렇지만 홍랑은 고죽이 마음 놓고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요조숙녀로 기다리기로 입술을 깨물며 속내를 숨겼다. ‘금수산 아지랑이 속 경치는 옛 그대로이고 / 능라도 풀꽃들도 이젠 봄빛 완연해라 / 그대 떠난 뒤로 소식 하나 없기에 / 《관서별곡》 한가락 들으며 수건에 눈물 가득해라’ 고죽과 삼당시인(三唐·백광훈·이달)으로 활동하였던 백광훈의 형 백광홍의 《평양에서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들으며》다.
관서별곡은 기방에서 기녀들이 애송하는 노래가 되었다.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 제 / 행장을 다스리니 칼 하나뿐이로다 / 연 조문 내 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라’ 백광홍(白光弘·1522~1556)의 《관서별곡》이다. (시옮김 허경진)
문화예술엔 의례 약방에 감초모양 여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기봉(岐峯·백광홍 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몽강남(夢江南)이다. 그녀는 안주의 기생이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자유연애를 할 수 있는 여인은 기생들의 특권으로 누렸다.
고죽에게 홍랑이 그러했으며 기봉에게 몽강남이 그런 역할을 했으리라... 문화예술에 여인은 필수를 넘어 충분조건일 게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문화예술사가 말해주는 실증이다. 홍랑의 뛰어난 시(詩)에 대한 높은 식견도 고죽이란 정인(情人)이 있으므로 사랑이 배태(胚胎)시킨 아름다운 결실이라 하겠다.
또한 고죽은 고죽대로 바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홍랑이 제 발로 찾아와 객관에 있으니 마음이 태평하다. 홍원에 두고 왔을 땐 변심은 하지 않을까 또는 어느 사내놈이 업어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이젠 지척에 와 있으니 걱정을 놓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한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밤마다 거문고와 가야금 가락에 맞추어 소곡주(素穀酒)를 마시며 질탕한 사랑에 빠지고 싶으나 현실은 그런 호강을 누릴만큼 여유롭지 않다. 군령을 어겨가며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병마절도사 김선삼과 갈등 때문이다.
김선삼은 고죽이 눈엣 가시다. 단숨에 확 빼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돼서다. 게다가 김선삼은 병석에 있는 몸으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몸이 자유롭지 않으면 마음은 더욱 복잡하고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다. 지금 김선삼이 딱 그러하다. 어떻게든 고죽을 경성에서 쫓아내야 자신이 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결국 용단을 내렸다. 자파 병조판서 박명수(朴明秀·가명)에게 고죽을 한양으로 전보토록 밀서를 보냈다. 병조판서도 고죽을 좋게 보고 있지 않은 즈음에 군령을 어겼다는 핑계로 즉각 전보 통지를 하달하였다. 군령을 어겼으나 전공이 크고 훌륭한 인재로 처벌은 간신히 면한 상태다.
더욱이 고죽이 북경사로 부임해 온 이후 경성은 눈에 띄게 평온을 찾았다. 오랑캐들의 호시탐탐 침공해 올 기미만 있어도 백성들은 우왕좌왕 혼란해졌었다. 그러나 고죽이 부임해 온 후론 어버이를 믿듯 믿어 생업에 열중하여 올해는 어느 해보다도 추수가 풍성해졌다.
이 같은 경성의 소문은 대궐에까지 전해져 고죽을 처벌할 빌미가 사라졌다. 오히려 차일피일 군령을 내리지 않은 병마절도사에게 인심이 돌아서 서둘러 한양으로 부임해 가도록 자파 병조판서에게 장계(狀啓)를 올렸을 것이다. 사실 고죽은 군령을 어긴 것에 장공속죄(裝功贖罪·공을 세워 속죄함)하는 심정이었을 게다.
아무튼 고죽과 홍랑은 전황이 사라진 경성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살을 마음껏 섞고 있다. 밤이 짧다. 홍원에서 처음만나 화촉동방을 치른 후 반년만이다. 서로 목이 말라 있었다. 밤은 짧고 낮은 한없이 길다.
고죽도 홍랑을 놓지 않고 홍랑 역시 고죽을 풀어주지 않는다. 고죽은 병조판서의 장계를 읽고 홍랑에게 알리지 않았다. 한양으로 올라갈 때 말하려는 속내다. 그들은 밤마다 산사의 새벽종소리를 듣고서야 뜨거운 살을 제 위치에 갖다놓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두 손을 서로 잡고 두 다리로 서로의 허리 밑을 감았다. 잠이든 사이 행여 누가 먼저 상대방의 몸을 풀까 경계하는 태도다.
2019-06-05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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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4> 홍랑(洪娘) <제9話>
비좁고 열악한 주거환경이지만 사랑하는 남녀는 행복하다. 지금 홍랑과 고죽이 그러하다. 언제 오랑캐들이 물밀 듯 쳐들어올지 몰라도 잠시 홍랑을 볼 수 있어 풍류객 고죽은 감격할 기쁨이다.
홍랑도 고죽의 마음과 같다. 종교 같은 사랑을 위해 불원천리 달려와 이제 잠시라도 고죽을 볼 수 있는 행복을 만든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한 것이다. 홍원에서 이제나저제나 서찰이 오길 기다릴 때보다 마음이 한결 편하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홍원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아 아름다운 상상만을 했었는데 경성에 와 현실을 보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전황이었다. 홍랑은 고죽을 잠시 볼 때 비로소 뜨거운 한숨을 길게 토해 내며 안도의 표정을 보일 수 있었다.
고죽도 같은 마음이다. 한 몸 같은 뜨거운 남녀의 사랑이 불원천리 달려와 한 곳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전황(戰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살아있는 신으로까지 생각하는 홍랑이 고죽은 문득문득 겁까지 났다.
전장에서 행여 자신이 잘못되는 일이 생기면 홍랑이 어떻게 될까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기필코 혁혁한 공을 세워 한양으로 올라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홍랑은 경성으로 온지 일주일이 지나자 홍원에 있을 때의 평온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정을 어렵사리 찾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들은 홍랑이 경성에 온지 열흘이 지난 뒤에도 제2의 화촉동방을 머뭇거리고 있다. 고죽이 병사들은 사랑하는 처자식을 고향산천에 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와 있는데 장수라고 여자를 데려다 잠자리를 하면 사기가 떨어질까 관사에 들지 않고 군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장수와 병사의 동고동락이다. 홍랑은 고죽이 잠자리에 들어오지 않자 불안하다. 아녀자가 전장에 나타난 것이 불길하여 잠자리에 안 드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요즈음 우리 님은 어찌 지내시나 / 하룻밤만 그리워해도 센 머리가 늘어나네 / 난간에 홀로 기대 잠 못 이루는데 / 주렴 넘어 대숲엔 빗소리만 시끄러워라...’ 김씨(金堉·1580~1658)의 《빗소리》다.
홍랑이 지금 딱 이 시의 심정일 게다. 고죽이 있는 곳에 가면 홍원에 있을 때처럼 살가운 부부관계가 재현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경성에 와 보니 현실은 생각했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더욱이 자기 남자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목석 보듯 하는 것이 분하기까지 하다. 공연히 20여일이나 걸려 산 넘고 물 건너 남장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동상이몽이다. 고죽은 고죽대로 마음이 편치 않다. 홍랑이 홍원에 있을 때는 불원천리 달려가 뜨거운 가슴 깊이 품고 싶었으나 막상 본인 스스로 달려와 객관에 있으니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싸움터에 계집과 운우지정을 즐기는 장수로 소문이 날까 걱정이다. 병마절도사의 군령을 어겨가며 오랑캐와 일전을 벼르고 있는 일향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한편 경성에 도착 이후 홍랑은 해가 어스름하게 서산에 걸리면 목욕재개하고 뒷물을 하였다. 밤마다 자리끼 까지 떠다 놓았다. 고죽이 언제 불시에 들이닥쳐도 주인을 뜨겁게 맞을 수 있는 태도다.
사실 고죽은 홍랑을 데려오려고 홍원에 극비리에 사람을 보냈었다. 하지만 홍랑은 홍원에 없었다. 정황상으로만 보면 홍랑은 어디론가 가고 홍원에 없는 것이다. 고죽은 처음엔 소식조차 없는 자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어느 사내의 여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었다.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홍랑이 바람처럼 남장을 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고죽의 오해였다. 고죽은 홍랑이 오기 전엔 퇴근 후엔 아무리 바빠도 이웃 산사(山寺)에 잠시 들렸다. 그곳에 가면 왠지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부처는 있어도 분향이 끊겼고 / 중이 없는데 세월은 절로 오가네 / 낡은 울타리에 누더기 걸려있고 / 물 마른 우물가에 버려진 표주박 / 들길에는 올가을의 낙엽이 수북 / 부엌에는 해묵은 나무가 몇 묶음 / 할 일 없는 길손이 한차례 다녀가면 / 버려진 절간은 더 한층 쓸쓸하이...’ 고죽의 《폐사》(弊社)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오늘밤이라도 제2의 화촉동방을 치루고 싶다. 하지만 욕정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몇몇 장수들 말만 듣고 운우지정을 즐기면 그들의 실망이 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북평사도 별수 없네.’라고 돌아서서 수군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여서다.
그렇다고 홍원에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언제 오랑캐들의 침공이 물밀 듯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마냥 독수공방으로 있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고죽은 안팎 꼽사가 되었다. 여자와 전장이다. 전장엔 여인이 필수라지만 지금은 아니다. 장수들과 병사들의 사기에 문제가 생긴다.
자신들은 사랑하는 처자식을 이역만리에 떼어놓고 싸움판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결전을 앞두고 있을 때 북평사는 밤마다 운우지정을 즐긴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 스스로 지는 전장이 되기 때문이다.
고죽은 모든 상황을 읽고 있다. 승전했을 때와 패전 했을 때의 자신을 놓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절세미녀 홍랑이 와 있는데 후자가 될 수는 없다. 대승하여 임금의 축하주를 받는 꿈을 꾸고 있는 게다.
오랑캐들은 고죽이 경성 북평사로 부임해 온 후론 전황이 달라졌다. 공세가 수세로 바뀌었다. 몇 번 침공을 시도했다 대패한 후론 뚜렷한 수세로 진기를 바꾸었다.
하지만 고죽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전황에서도 홍랑은 땅거미가 지면 목욕재개하고 뒷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던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다. 바람처럼 고죽이 들려 홍랑의 한을 풀어주고 나비처럼 날아갔다. 홍랑이 경성에 온지 꼭 보름이 지난밤이다.
2019-05-29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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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3> 홍랑(洪娘) <제8話>
오매불망 고죽이 있는 경성에 홍랑이 닿았다. 20여일 만이다. 그러나 홍랑은 멀쩡한 모습이 아니다. 행색이 영락없는 거지꼴이다. 객관 앞에 쓰러진 채다. 밤새 달려와 기진맥진 객관 앞에서 기절했던 것이다. 이것을 병졸들이 발견하여 고죽에게 알렸다.
만약 고죽에게 알리지 않고 처치했다면 자칫 그들의 해후는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오랑캐들이 적정(敵情)을 살피려고 세작(細作·간첩)을 보낼 수도 있어 장검으로 난도질하여 땅에 묻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들을 도왔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어쩌자고 험하고 위험한 곳을 혈혈단신으로 왔느냐?” 고죽이 병영을 순찰하는 도중에 남장여인을 발견했다는 급보를 듣고 달려왔다.
어젯밤 꿈이 이상하여 행여 홍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홍랑이 현몽(現夢)했던 것이다. 현몽은 적중하였다. “고죽 나으리!” 홍랑이 혼절에서 깨어났다. 고죽을 보자 다시 감격에 젖어 혼절하였다. 고죽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홍랑의 얼굴을 닦아주며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홍랑아! 이젠 괜찮다. 마음 놓고 어서 정신차려라...” 그랬다. 고죽은 남장여인이 되어 홍랑이 자신을 보러 산 넘고 재 넘어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경성에까지 오는데 얼마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미고 먹먹해 왔다.
사실 홍랑은 지금 거짓 혼절을 하였다. 객관 앞에서 첫 번째 혼절은 사실이고 이번 혼절은 거짓이다. 고죽의 행동이 어떻게 나오나 시험을 해보자는 여자의 깜찍한 속내다. 그런데 홍랑이 생각했었던 것보다 더 극진히 자신을 돌봐 줘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지금 홍랑은 실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고죽의 행동을 살피고 있다. 홍랑이 혼절한 상태에서 움직임이 보일 듯 말 듯한 행동으로 고죽의 사타구니로 향하였다. 고죽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은 것이다. ‘버들가지를 꺾어서 / 천리 머나먼 님에게 부치오니 / 뜰앞에 다 심어 두고서 / 날인가 여기소서 / 하룻밤 지나면 / 새잎 모름지기 돋아나리니 / 초췌한 얼굴 시름 쌓인 눈썹은 / 이내 몸인가 알아주소서...’ 고죽의 《버들가지를 꺾어서》다.
그랬다. 홍랑이 그러했으리라... 이 시를 가슴속으로 낭송하며 보일락 말락 한 행동으로 고죽에게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다. 홍랑은 고죽의 바지 속에서 물건이 슬며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실눈으로 확인하였다. 눈도 없는 물건이 여자를 먼저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보다 몸뚱이가 먼저 주인을 알고 꿈틀대었다. 고죽의 물건뿐이 아니다. 홍랑의 요(凹)도 꿈틀대는 철(凸)을 보고는 화답을 하듯 문을 조금씩 열고 꿀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홍랑이 고민에 빠졌다. 거짓 혼절상태에서 발딱 일어나고 싶으나 고죽의 사타구니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시크무레한 냄새가 야릇하게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빨래를 제때하지 않아 땀과 사내 특유의 체취가 왠지 싫지 않아서다. 첩첩산중을 넘고 넘어 불원천리 찾아온 홍랑은 사내 냄새에 취해 눈을 뜨지 않는다. 눈을 뜨면 거짓 혼절이 탄로 날까 겁이 나기도 하지만 고죽의 사타구니에서 아침안개가 피어나듯 풍겨 나오는 체취가 점점 더 마음속을 파고들어서다.
반년 가까운 독수공방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기생생활 때 사내들은 마지못해 살을 섞어 흘려보냈으나 고죽에겐 몸과 마음을 몽땅 받쳐 한 남자의 여자가 된 후 독수공방은 죽음보다 싫었다. 지금 이대로 성심성의껏 한 사내의 보살핌을 영원히 받고 싶은 것이다.
고죽은 경성이 오랑캐들로부터 침공을 받을 것이란 위기의 순간을 지금 잠시 잊고 홍랑 보살핌에 정신이 없다. ‘달빛 아래 오동잎은 다 떨어지고 / 서리 속에 들국화는 시들었네 / 다락은 높아 하늘에 솟았는데 / 사람은 석잔 술에 그만 취했구나 / 흐르는 물은 가야금 소리에 어울려 차갑고 / 매화는 피리소리에 스며들어 향기로워라 / 날이 밝으면 서로 헤어져 길 떠날 테지만 / 그리운 정은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겠지...’ 황진이의 《소세양 蘇世讓 판서와 헤어지며》다. (시옮김 허경진)
황진이가 소세양 판서와 헤어질 때 지은 시다. 소세양은 철두철미 남성 우월 사회의 사대부다. 여색에 빠지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여 황진이와 30일간 사랑을 하고 단 하루라도 더 있으면 사내가 아니라고 호언장담 하였다. 그러나 소세양은 30일이 자나도 황진이 집을 떠나지 못했다. 아니 떠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일 게다.
하지만 지금 홍랑의 상황은 다르다. 헤어져야 할 절박한 상황이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들어오는 오랑캐들로 살얼음판 같은 경성에 여자로 인해 촌각이라도 정신을 흩트려서는 안 되는 분위기다. 고죽이 수건을 빨러 나간 사이에 홍랑이 발딱 일어났다. 침으로 부스스한 두 눈을 닦고 언제 혼절을 했느냔 표정의 홍랑이 되었다. “왜 일어나느냐? 더 누워 있어라. 싸움은 내가 없어도 잘들 하느니라...” 고죽은 홍랑이 이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에 쫓기듯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홍랑은 말 대신 고죽의 품으로 젖먹이가 어미 품을 찾듯 파고들었다. 그들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밤은 깊어 어느새 산사(山寺)의 종소리가 동창이 밝아오는 것을 알렸다. 밤새 그들은 제2의 화촉동방을 즐겼다.
고죽은 고죽대로 반년 가까이 참았던 정염을 남김없이 쏟았고 홍랑도 신앙 같은 사내 품에서 여자역할을 후회 없이 해냈다. 그들은 홍원에서 첫 밤 보다 더 뜨겁고 더 황홀하게 밤을 샜다. 뜨거운 두 몸이 엉켜 동시에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밤은 새벽이 되었던 것이다. 산사의 새벽 종소리에 고죽은 놀란 사슴모양 발딱 일어나 “내 다녀오리다!”란 말 한마디 남기고 바람처럼 빠져 나갔다.
2019-05-2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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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2> 홍랑(洪娘) <제7話>
거짓 군령(軍令)을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고죽의 단호한 충성심이다. 오랑캐(여진)들은 시시각각으로 경성을 향해 조여오고 있다는 첩보다. 병마절도사 김선삼을 며칠 동안 설득했어도 요지부동이다. 자신이 병석에 있는 동안 고죽의 잘되는 꼴이 배가 아파서 더욱 이 핑계 저 핑계로 군령을 내리지 않는다.
고죽은 결국 거짓 군령을 내려 경성을 지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 보다 당당한 사내가 되자는 결단이다. 고죽은 한밤중에 내당으로 나와 천단(天壇)을 만들어 요배(遙拜)를 올리며 임금에게 헌시를 읊었다. ‘한밤중에 단을 쌓고 구름을 쓴 뒤 / 분양하고 멀리서 님에게 절하오 / 달빛속의 내 모습 보는 사람 없어도 / 대궐에 계신 님은 내 마음 아시리...’ 그랬다. 고죽은 그렇게 군령을 어겨가며 임금에 대한 충성과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는 단호한 사대부다움이다.
사실 고죽은 문과 출신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진사에 합격한지 6년 뒤다. 이때 고죽은 백광훈·이산해·윤탁연·최립 등의 시인들과 무이동(無異同)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즐겨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다.
그때 고죽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고죽은 1539년(중종34) 전라도 영암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수인(守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또한 송강정철·만죽서익 등의 명사들과 삼청동에서 풍류를 즐겨 세인들은 이들을 이십팔수(二十八宿)라 불렀다.
이렇듯 고죽은 조선팔도에서 알아주는 사대부 풍류객이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풍류문학을 개척한 아름다운 프로티어라 하겠다. 이 같이 풍류문학을 창조적이고 아름답게 격조 있는 예술로 승화시키도록 촉매역할은 홍랑이 했을 것이다.
사실 사랑에 여인이 빠질 수는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문화예술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물론 동성애 등이 있어 사랑이란 단어가 단순히 남과 여의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하면 남자와 여자가 떠오르는 것이 통례라 하겠다.
홍랑은 고죽에 대한 마음이 사랑을 넘어 종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고죽이 이승을 떠나자 홍랑은 시묘(侍墓)살이를 자청하였다. 시묘살이는 자식이 부모 묘에서 하는 것이 통례인데 여자가 그것도 기생출신 부실이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홍랑은 종교 같은 고죽을 위해 즐겁게 했으리라...
고죽은 풍류에만 열정적인 게 아니었다. 충성심 또한 남다르다. 국태민안을 위해 고죽은 병마절도사의 군령을 어기기로 결심을 하고 잠시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다 비몽사몽 상태에 홍랑이 나타났다. 그때 고죽은 “안 된다. 이리 빨리 뛰어오너라!”라고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홍랑이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도끼를 든 험상궂은 사내에게 쫓기는 장면이었다. ‘남쪽 연꽃 북쪽 연못에 연꽃 깊이 피었는데 / 연꽃의 마음 괴로운 게 사람마음 같아라 / 아직 연꽃 지기도 전에 가을비가 일고 / 비와 이슬 몇 번이던가 서리와 우박이 침범하네 / 그리워도 보지 못해 사람 늙게 하더니 / 거울 속 머리털은 벌써 세어버렸네 / 차라리 연못의 연잎이나 따다가 / 고운님 입으실 옷이나 지을 것을...’ 고죽의 《연꽃의 마음이 사람마음 같아》서다. (시옮김 허경진)
그랬을 것이다. 오랑캐들과 일전을 치룰 전투를 앞두고 천단에 제(祭)를 올리고 휘영청 밝은 달을 문득 쳐다보다 비몽사몽 상태였으나 오매불망 하던 홍랑을 보았다. 그것도 발가벗은 몸뚱이로 험상궂은 사내에게 쫓기는 장면이다. 고죽은 마음 같아서는 만사 팽개치고 홍랑이 있는 홍원으로 말달려 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는 임금의 명을 받은 북평사가 아니던가! 언제 어떻게 경성을 향해 오랑캐들이 물밀 듯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전운이 감도는 상태다. 고죽은 무력함을 느낀다. 홍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밤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시를 읊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하고 있을 홍랑을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원망하고 있다.
이처럼 경성의 안위가 백척간두에 있는데도 병마절도사 김선삼은 태평하기만 하다. 전투에서 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류다. 전투에서 패전하여 고죽이 죽을상이 되는 모습을 자신이 출세하는 것보다 즐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들은 학파가 달랐다. 고죽이 율곡이이와 가까웠으니 서인(西人)편으로 볼 것이다. 서인의 반대파는 동인(東人)이었으니 김선삼이 서인편인 고죽의 출세를 달가워 할 리가 없다. 경성 백성의 안위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그랬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리며 끌어주고 밀어주어 자기파들끼리 벼슬을 독차지 했었다. 일제는 이 같은 정파들의 행태를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폄훼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과 같이 새로운 인재가 발탁되어 혼탁한 정계를 쇄신하는 효과도 있었다.
동인과 서인의 물고물리는 빈번한 사화(士禍)로 인적쇄신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어 조선조 500년이란 역사가 탄생됐다는 평가도 있다. 당쟁의 나라 조선의 아이러니다. 병마절도사 김선삼은 국태민안보다는 상대 파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위인이다.
고죽은 자신의 안위보다 국태민안을 더 걱정하였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경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병마절도사 김선삼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대부로서 비굴한 자세다. 천하의 풍류객 고죽은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죽은 자신의 안위보다 언제나 국태민안과 임금에게 충성이며 그 깊이는 같았다. 가슴이 시리도록 사랑하는 홍랑도 나라가 있어서다. 고죽은 진정한 조선을 사랑했던 풍류객 사대부다.
2019-05-15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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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1> 홍랑(洪娘) <제6話>
경성의 소식은 오지 않았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전해지지 않는 것이 지역적 거리다. 지금 경성에 있는 고죽과 홍원에 있는 홍랑이 딱 그러하다. 기다리다 지친 홍랑이 경성으로 고죽을 만나러 가려는 채비다.
어명(御命)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고죽보다 홍랑이 찾아가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홍랑은 기적에서도 빠져나와 이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고죽의 여자로만 살아가면 되는 여인이다. 하지만 고죽의 여인의 세상살이가 생각처럼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고달픈 것은 없다. 더욱이 기생의 신분에서 빠져나와 사대부의 부실(副室)이 된 홍랑의 사랑의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가시밭길이다.
상대는 고죽 최경창이여서다. 홍랑의 고죽에 대한 사랑은 신앙이다. 홍원에서 하룻밤의 화촉동방으로 만리장성을 쌓은 홍랑은 그 밤으로 고죽이 신앙이 되었다. 시만으로 존경을 넘어 사랑했으나 이젠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어 “고죽은 내 남자다.”라고 소리치고 다닐 수 있어서다.
한양에선 그렇게 소리칠 수 없어도 적어도 홍원에선 가능하다. 이 사또도 허락한 관계라 기적에서 빠져나와 한 사내 여자로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험하고 첩첩산중 지세다.
지금 홍랑이 그 길을 떠나려고 분주한 채비다. ‘함경도 길 북쪽으로 올라가자니 말은 자꾸 거꾸러지는데 / 눈 덮인 고개 서쪽을 보니 바다가 하늘과 닿았네 / 나그네길 어디서 중양절(重陽節·9월9일)을 맞을는지 / 노란 국화는 옛 성가에서 떨어지겠지’ 고죽의 《사명을 받고 함경도로 가는 정철에게》다.
홍랑도 머리가 복잡하고 답답하다. 남장을 하고 홍원에서 경성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홍원에서 경성까지는 태산준령의 1천3백여 리나 되는 거리다. 하지만 홍랑은 남장을 하고 가슴에 비수와 비상(砒霜)을 품고 길을 떠났다.
망설임이 없다. 고죽을 향한 뜨거운 마음에 거칠 것이 없다. 남장을 했어도 예쁜 몸매다. 가야금과 거문고 가락이 흘러나올 때마다 몸과 마음도 함께 단련되어 꽃보다 더 예쁜 모습이다. 지금 그 예쁜 남장여인이 고죽이 그리워 제비같이 날아갈 듯이 간다. 요즘으로 치면 뛰는 듯이 걸아 가는 경보(競步)로 홍랑이 북청(北靑)을 향해 걷는 듯이 달려가고 있다.
홍원을 떠난 지 20여일 만에 북청·이원(利源)·단천(端川)·성진(城津)·길주(吉州)를 무사히 거쳐 명천(明川)에 닿았다. 이제 경성에 거의 다 온것 같아 마음이 더욱 뜨거워졌다. 수없이 산 넘고 재를 넘기는 20여일에 지치고 지친 상태다. 하지만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 할 상황이 아니다. 언제어디서 산적이 튀어나와 몹쓸 짓을 할지도 모를 험한 산길이다.
그래서 홍랑은 가슴에 비수와 비상을 품고 길을 떠났다. 불의에 불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요긴하게 쓰려는 비상수단이다. 비록 기녀로 있다 고죽의 여자가 됐으나 더 이상 몸을 더럽힐 수는 없다는 단호한 자세다. 일구월심(日久月深) 고죽을 향한 마음뿐이다.
오늘도 무거운 발길에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디쯤 가야 마을이 있을지 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그때다. 험상궂게 생기 나무꾼이 불쑥 나타났다. “앗! 너는 누구냐?” “너야말로 누구냐? 이 산골에 겁도 없이 혼자 이 산세를 헤쳐 갈 생각을 했느냐? 오늘은 더 가기 힘들 것이다. 우리집에 가서 쉬고 내일 떠나가거라...” 사내는 첫눈에 홍랑이 남장을 했어도 금방 여자로 알아봤던 게다. 집으로 유인하여 자기 여자로 만들려는 속내다.
홍랑도 그 눈치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딴 어떤 방법도 없다. 유사시에 홍랑은 비수와 비상을 쓰려는 속내다. 홍랑에겐 남자란 오직 고죽뿐인 것이다. 사내는 지게에 나무를 가득 얹고도 성큼성큼 집으로 향하였다. 기분이 좋은 걸음걸이다.
홍랑도 뒤따라갔다. 산속의 해는 누가 잡아끄는지 순식간에 어둠이 깔렸다. “혼자 사는 집이라 허술하오! 노모가 있으나 병석이라 대접이 소홀하오...” 감자가 섞인 옥수수밥이다. 홍랑도 기진맥진한 육신에다 배까지 고팠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밥까지 주시고 잠까지 자게 해주시어 고맙기 이를 때 없습니다...” 사내 말은 따뜻한 척 해 보이나 눈 속엔 정욕이 이글거렸다.
홍랑을 첫눈에 여자로 알아보고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노모가 병석으로 신음소리가 유난하여 시끄러울 것이오. 나그네는 아랫방에서 유숙하시고 나는 나뭇광에서 자리다...” “날씨가 차가운데 내가 나가 자리다...” 홍랑은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여자 음성을 아무리 변성을 해도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장을 했어도 예쁘장한 몸매는 숨길 수 없어 잠시만 유심히 살피면 금방 남장여인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홍랑이 지금 바로 그 몸매다. ‘산속이라 날씨가 차가워 / 서리와 우박이 날마다 쌓이네 / 해 그림자까지 점점 촉박해져 / 아침이 오자마자 벌써 저녁이 되네 / 숲도 텅 비어 볼만한 경치 없고 / 어두워진 뒤에야 새들이 돌아오네 / 적막한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랴 / 걱정이 찾아와도 풀 수 없어라’ 고죽의 《산속》에서다. (시옮김 허경진)
홍랑은 지금 고죽을 생각하며 이 시를 마음속으로 낭송하고 있을 것이다. 감자가 섞인 옥수수밥으로 허기를 때웠으나 잠은 오지 않는다. 잠이 들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몰라서다. 뜬눈으로 산사(山寺)의 새벽종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때다.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검은 그림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홍랑도 비호처럼 일어나 비수를 빼어들고 벽으로 붙었다. 사내는 이불을 덮쳤다.
2019-05-08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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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50> 홍랑(洪娘) <제5話>
정원 연못가에 홀로서 있는 오동나무는 어느새 잎을 하나둘 떨어뜨리고 앙상하기 그지없다. 기적(妓籍)에서 빠져나온 홍랑(洪娘)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살림살이도 어려워졌으며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홍랑은 고죽이 있는 경성으로 가려한다.
보통결단이 아니다. 함경도 국경지대는 전장에서 뼈가 굳은 장수들도 꺼리는 지경이다. 윤관장군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조차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명재상 이색(李穡)이 떠나가는 어느 장수에게 간곡한 격려를 하였다. “장백산(백두산)은 높고 험준하여 철령관은 우뚝 솟은 산맥은 수천 리나 뻗어있어 험난한 군사요충지이니 북방오랑캐들을 물리치고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해 주게! 그리고 꼭 몸성히 돌아와야 되네...” 그랬다.
그런 곳에 지금 고죽이 가 있는 것이다. 여자 홍랑은 망설임이 없다. 남장을 하고 떠나려는 태도다. 고죽을 위해선 어떠한 것이든지 할 수 있는 비장한 표정이다.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장수 태도다.
한편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병영을 둘러 본 고죽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병졸들도 숫자만 있을 뿐 실제 병사는 태반이 허수다.
여진족들의 등살은 하루가 다르게 극성이 더해갔다. 더욱이 병마절도사 김선삼(金善三)이 와병중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여진족들은 제집 드나들 듯 오가며 행패를 부리고 있다.
고죽의 명성은 이곳 병졸들에게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가 이곳 북평사로 부임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병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오합지졸에서 기압이 바짝 들어갔다. 하지만 고죽은 병사들을 자식처럼 대하며 가족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일심동체를 만들려는 속내다. 고죽이 병사들을 자식같이 대하자 그들도 어버이나 맏형처럼 맞아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병영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고죽은 홍랑을 떠올렸다.
품고 품어도 실증이 안날 홍랑을 홍원에 두고 온지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이곳은 오랑캐들이 들끓어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는데 날씨까지 삭풍이 몰아쳐 마음 둘 곳이 없다. 그렇다고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백성들에게 등 따습고 배불려 주라고 보낸 북평사가 계집이나 생각하고 주색에 빠진다는 것은 고죽으론 상상도 못할 행동이다. 하지만 풍류객 고죽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병마절도사 김선삼이 병석에 있어 고죽은 그의 대리인으로 동분서주 하다보면 하루해가 촌음(寸陰)처럼 지나갔다.
오늘도 그런 하루였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병영을 둘러보고 백성들의 안녕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게다가 병마절도사가 병중에 있어 그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몸이 부서져라 뛰어다녀도 만족할 하루가 아니다.
오늘은 육신이 더욱 고달프다. 이럴 땐 더욱 홍랑이 눈앞에 어른거려 안절부절 상태다. ‘은근히 굴러가는 수레의 두 바퀴는 / 하루에도 수없이 같이 구르건만 / 마음은 같아도 수레와 같지 않아 / 헤어져 있으려니 마음이 갈팡질팡 / 수레바퀴는 자취나마 있으련만 / 눈으로 볼 수 없는 네가 마냥 그립다’ 《무제》(無題)다.
그랬을 터다. 고죽의 나이 그때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삼십대 후반이다. 풍류객에게 여인은 빛과 그림자다.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백성들에게 등 따습고 배 불리게 해주는 목민관으로 왔으나 문득문득 홍랑이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단둘이 혼례를 치루고 화촉동방을 꾸몄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밤마다 잠 못 이르게 했을 터다.
명장 휘하에 약졸 없다고 고죽이 부임한 이후엔 병사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그들은 고죽이 외로워하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고죽에게 사랑하는 여인 홍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데려오자는 거사를 꾸몄다. 고죽의 편지도 동행시켰다.
하지만 홍랑을 데려오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이 길주(吉州) 산속에서 도둑에게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호사다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고죽과 홍랑의 사랑은 더욱 뜨겁게 내면으로 불타올랐다. ‘어렸을 때 집을 떠나 / 편지도 드물어라 / 가을이 왔건만 아직도 / 싸움하던 옷 그대로 입고 있네 / 성머리에서 불어대는 나팔소리가 / 찬서리 내리길 재촉하자 / 누렇게 물든 느릅나뭇잎 / 하룻밤 새에 다 떨어졌네’ 고죽의 《변방 싸움터에서》다. (시옮김 허경진)
마음은 홍원 홍랑에게 맡기고 몸만 경성으로 간 고죽의 심경일 게다. 고죽과 홍랑은 밤마다 꿈에서 만나 뜨겁고 알뜰한 사랑을 불태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고죽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 홍랑을 벌건 대낮에 벼락을 맞은 듯 생각을 할 뿐 호사스런 마음일망정 사랑놀이를 할만치 여유가 없다.
오랑캐들이 경성을 향해 돌진해 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어서다. 고죽은 잠이 오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까진 자신의 명성으로 백성을 다스렸고 오랑캐들도 감히 경성까지는 넘보지 못했었는데 직접 침공을 해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어서다.
병권(兵權)이 병마절도사 김선삼에게 있기 때문이다. 김선삼은 애초부터 고죽이 경성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파(政派)가 달라 사사건건 이견으로 부딪치고 자기보다 앞서가는 꼴을 못 보는 인사다. 더욱이 자신이 병석에 있는데 고죽이 전공을 세우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와도 병권을 고죽에게 넘겨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코앞까지 오랑캐들이 침공해 왔다는 첩보가 날아들었으나 병마절도사는 병권을 고죽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2019-05-02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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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9> 홍랑(洪娘) <제4話>
하룻밤 사이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만리장성을 그들은 쌓았다. 홍랑이 더 적극적 자세다. 고죽은 북평사(北評事) 임무를 맡고 가야 할 몸인데 풍류객 본색이 발동하여 잠시 직분을 잊었을 뿐 교지를 보인 후엔 머리가 곤두서고 마음이 바빠졌다.
홍원서 경성은 먼 길이다. 북청→단천→길주→명천 등을 거치는 머나먼 천리길... 홍랑은 고죽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변방은 오랑캐들이 들끓어 행여 잘못될 수도 있어 이번에 헤어지면 영영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까지 들어서다. 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적 만남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애틋한 관계의 남과 녀다.
홍랑은 정신적으로 오매불망 사모했었던 고죽을 실제로 자기 사내로 만들었으니 오죽이나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을까! 고죽도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시를 통한 연모로 자신을 마치 신격화 했던 천하의 절기(絶技)인 홍랑을 쉽게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영(令)을 수행 할 몸이다. 한시가 급하다. ‘천리밖에 님 보내고 세월은 깊어 / 님 계신 곳 생각에 마음이 설다 / 애타는 그리움을 그 누가 알랴 / 꽃피는 달밤에는 홀로 우노라’ 《무제》(無題)다.
고죽을 경성으로 떠나보내고 20여 일도 안 된 어느 날 홍랑이 심정을 토로한 절창(絶唱)이다. 함경도 국경지대는 고려시대에는 오랫동안 여진족들이 들끓은 지역이었었다. 그러다가 예종(睿宗) 2년(1107년)에 그 유명한 윤관(尹瓘)장군이 그들을 몰아내고 국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국력이 쇠약해지자 이번엔 원(元 )나라가 선린을 내세워 자기네 땅처럼 주인행세를 하였다. 그 후 개혁을 부르짖던 공민왕대에 와서야 두만강 이남을 되찾아 진정한 국토가 되었다. 이렇듯 이곳 국경지대는 하루도 바람잘 날이 없는 폭풍직전의 험난한 지대다.
홍랑이 이곳으로 간 고죽을 생각하는 것이다. 차라리 같이 가서 현장을 목격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면 낫겠다는 생각까지도 하는 홍랑이다.
홍랑은 고죽을 경성으로 떠나보내고 곧장 이 사또에게로 가서 기적에서 빼줄 것을 간청하였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당당한 여인이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기방정사를 했으면 홍랑은 기녀고 그냥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죽은 홍랑의 뜻대로 단둘이 방에서 혼례를 치르고 화촉동방을 치르게 하여 과감히 기적에서 나오도록 도왔다.
조강지처는 될수 없어서 첩이든 부실이든 떳떳이 고죽의 여자로 평생을 살겠다는 굳은 결심을 내렸다. “그래 네가 고죽의 부실이 되겠다는 것이냐? 그러하면 내가 너를 붙들 수가 없지! 생각을 잘 했느니라... 고죽이 경성 임무를 끝내고 한양으로 갈 때 너도 같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고죽은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훌륭한 사대부이니라...” 홍랑은 이 사또의 얘기가 귀에 아직도 여전히 생생하다.
홍랑은 마음이 답답하여 몸 둘 바를 모를 땐 집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습관이 고죽을 경성으로 보낸 후에 생겼다. 고죽이 떠나간 며칠 후부터 하루도 거른 일이 없다. 오늘도 버릇처럼 집 주위를 돌고 있다. 달도 휘영청 밝다. 홍랑은 불현 듯 고려시인 설손(楔遜)의 《무부도의사》(戊婦搗衣詞)를 떠올렸다. ‘하늘에는 달빛이 휘영청 밝아 / 외로운 가을밤이 길기도 하다 / 애달픈 바람 서북에서 불어오고 / 귀뚜라미조차 베갯머리에 우네 // 정든 임은 멀리 싸움터에 가시고 / 나만 홀로 빈방을 지키노라 / 빈방을 지키기는 한이 없어서 / 임 그리움에 이 몸은 얼어만 온다’ 그랬다. 홍랑은 시로만 고죽을 사모하고 존경할 때는 감히 자기 남자가 되리란 생각조차 못했었다.
하지만 막상 자기 남자가 된 후론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복에 겨운 생각일지 모르나 지금 홍랑의 욕심은 욕심을 낳았다. 여자의 본색일 터다. 그러나 고죽은 홍원을 떠나간 지 반년이 속절없이 흘렀으나 서찰 한통 없는 상태다.
아무리 국경수비가 험악하고 밤낮이 없는 싸움터지만 여자인 홍랑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죽의 여자가 된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사내란 다 그런 동물이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갑자기 속았다는 마음이 되자 기적에서 공연히 서둘러 빠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금방 ‘고죽은 그런 사내가 아니야’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반년이 지났어도 한 번의 서찰도 없어 궁금증은 눈덩이 같이 커져갔다. 혹 잘못 되었으면 한양의 조강지처엔 소식이 갔지만 기생출신 부실한테까지 소식을 전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집에서 소식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경성으로 가려는 속내다. 마음이 급하면 행동도 뒤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홍랑은 행동할 생각은 없다. 홍원에서 경성으로 가는 길은 험지 중 험지다. 사내도 아닌 여자 몸으로 행동에 나설 홍랑이 아니다. 자칫 행동했다 고죽에게 누가될까 걱정이 앞섰다.
홍랑이 고죽의 여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처럼 삽시간에 저잣거리 화제가 되었다. “홍랑이 그 예쁜 미모로 기둥서방을 만들었데...” 기생들의 질투다. 홍랑은 홍원의 기계(妓界)에 봉황이다. 그녀가 떠난 기계엔 고만고만한 기녀들이 홍랑 자리에 오르려고 악다구니다.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고 가관이다. 홍랑도 고죽 소식이 깜깜 하자 몸이 근질근질하다. 고죽과 부부관계를 맺은 것을 모르고 찾아온 사내도 더러 있었다. 그들과 기꺼이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옛 사내들이 찾아오면 홍랑은 떳떳이 고죽의 여자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술친구가 되어 기쁘게 발길을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했다. 고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잠시 멈추면 옛 사내들 얼굴이 가을하늘의 기러기떼 같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전작 기녀의 본색(本色)일까... 홍랑은 자신의 마음에 자신도 깜짝 놀라는 눈치다.
2019-04-24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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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8> 홍랑(洪娘) <제3話>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더니 홍랑과 김별장이(고죽 최경창) 그러하였다. 하룻밤을 지냈어도 그들은 천생연분 연리지(連理枝)는 되지 못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홍랑과 김별장 그대로다. “아직 취침중인가 김별장?” 다그치는 이 사또의 목소리다. “어 이 사또 들어오게나. 홍랑과 정지상의 《대동강》 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네...” 이 사또는 주저주저하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여전히 남녀관계를 하지 않은 분위기다. 옷매무새가 가지런하고 표정이 정색 그대로다. “김별장 오늘은 경성 임지로 떠나야 하네! 자칫 늦어지면 문제가 생기네... 지금 변방이 얼마나 어려움에 있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걸세. 어서어서 출발준비를 하세...” 이 사또의 김별장에게 거듭된 다급한 재촉이다.
하지만 김별장은 요지부동 돌부처다. 홍랑을 뜨겁게 품지 않고는 떠날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다. 임지로 갈 당사자 최경창 보다 이 사또가 더 몸 달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홍랑아! 김별장이 네가 좋아 이곳을 못 떠나하니 네가 임지로 같이 가면 어떠하겠느냐?” “어머머 소녀가 어떻게 생면부지의 사내를 따라 임지로 가겠어요? 당치도 않은 말씀은 거두어 주세요...” 살엄음장 같은 태도다.
이 사또는 짐짓 태도를 바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면 이 분이 네가 그토록 오매불망 사모하고 존경했던 고죽 최경창이라면 경성으로 따라가겠느냐?” 이 사또의 최경창이란 말에 홍랑은 갑자기 얼굴에 홍안(紅顔)의 기쁨을 띄우며 반기는 표정을 보였다. “이 분이 바로 네가 그토록 존경했었던 고죽 최경창 어른이시니라...” 이 사또가 김별장을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홍랑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덤덤한 표정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다.
하지만 의심하는 표정이다. 자기를 놀리려는 것으로 믿는 태도다. 이 사또는 김별장에게 눈짓을 하였다. 임명장을 보이라는 눈짓이다. “홍랑아! 내가 최경창이란 것을 보여주어야겠구나. 그래야 네가 나를 믿겠구나.” 김별장은 짐에서 임명장(敎旨)이 있는 보자기를 꺼냈다. “자 이제 네 손으로 이 보자기를 펴서 임명장을 보려무나.” 김별장은 홍랑 앞에 교지가 싸인 보자기를 놓았다. 홍랑은 별로 믿으려는 눈치가 아닌 표정으로 붉은 비단 보자기를 성의도 없게 풀었다.
그리고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면서 동시에 두 무릎을 꿇었다. 차마 입은 열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고죽의 표정을 살폈다. 무엇인가 비교하는 듯 한 눈치다. “홍랑아 아직도 나를 못 믿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쳐다만 보는 것은 무슨 짓이냐?” 옆에 있던 이 사또가 홍랑을 힐책 하듯 말하였다.
그때서야 홍랑이 입을 열었다. “사또어른, 사실은 어젯밤 꿈에 고죽을 뵈었는데 그분과 맞나 상상을 해 보는 중이옵니다.” “그랬구나. 그래 꿈에 본 분과 지금 앞에 있는 분과 얼굴이 맞느냐?” “무례한 소녀를 죽여주시옵소서! 나으리를 못 믿은 소녀를...” 홍랑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죽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 사또는 만족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고죽은 서둘렀다. 품에 들어온 홍랑을 두 팔에 힘을 넣어 욕심을 채우려 하였다. 그때다. “아니 되옵니다.여기선 소녀가 나으리를 못 모십니다. 하루만 더 머물다 가시옵소서...” 말을 마친 홍랑은 고죽의 품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방을 빠져 나갔다. 닭 쫓던 개모양이 된 고죽은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얼마 후다. 홍랑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나으리 이곳에서 나으리를 모시면 기방정사(妓房情事)에 불과하지요. 소녀 정식으로 나으리를 모시려 하옵니다. 오늘밤에 소녀의 집으로 오시옵소서...” 말을 남기고 역시 홍랑이 특유의 향기를 풍기며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여삼추(如三秋)보다 더 긴 기다림 끝에 밤이 왔다. 어느새 어떻게 구했는지 전통혼례복식을 오롯이 준비하여 놨다. 주례는 없지만 신랑신부가 정식으로 교례(交禮)를 통해 부부가 되었다. 뜨거웠다. 날이 밝으면 헤어질 남녀는 떨어질 줄 모른다. 요철(凹凸)이 뜨거워 불이 날 듯 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샜다. ‘두 줄기 눈물 흘리며 서울을 나서네 / 새벽 꾀꼬리가 헤어지는 걸 알고서 수없이 울어주네 / 비단옷에 천리마로 강 건너고 산 넘는 길 / 아득한 풀빛만이 혼자 배웅해 주네 // 서로가 뛰는 마음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를 건네 주리 / 이제 하늘 끝으로 가버리면 언제나 언제나 돌아올까 / 함관의 노래는 옛 곡조이니 부디 부르지마오 / 지금은 운우의 정이 푸른 산을 뒤덮었네’ 고죽의 《헤어지면서》다. (시옮김 허경진)
평소엔 아름다운 시(詩)로만 그리워하였다. 홍랑은 실제로 고죽을 만나자 현실은 잊었다. 동창이 밝자 고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에 선조(宣祖)가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교지를 거두어 갔다.
홍랑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홍랑이 자신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동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홍랑의 나신에 머문다.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옥황상제가 보낸 선녀 같다. 아니 달나라로 도망간 항아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고죽은 떠나야만 한다.
어떻게든 홍랑과 뜨거운 사랑을 잊고 임지 경성으로 말달려 가야할 북평사다. 그런데 벌거숭이 홍랑이 “안돼요. 안돼요! 가시면...”라고 두 팔을 벌리고 다시 고죽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것도 뜨겁고 뜨겁게 쌓았다.
2019-04-1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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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7> 홍랑(洪娘) <제2話>
그들은 밤새 보낸 시간이 안타까운 듯이 뜨거운 살을 더욱 뜨겁게 부볐다. 하지만 홍랑은 마음은 주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사내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선 듯 열리지 않아서다.
옥골선풍의 모습이나 품행으로 봐 자신이 신격화(神格化)하고 있는 고죽 최경창과 너무 닮아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열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홍랑과 김별장은 등만 비벼댔을 뿐 얼굴은 마주 보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보면 심장이 멎고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다. 홍랑은 이미 김별장이 최경창이란 것을 확신하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내어 놓으라면 흔쾌히 줄 마음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은 이미 김별장에게 가 있었다. 김별장의 시선 하나하나에 홍랑의 마음은 바람 앞의 갈대모양 흔들렸다. 사내 시선이 와 닿는 곳의 감각이 꿈틀댔다. 가슴에 와 닿으면 가슴이 뛰고 사타구니에 와서 머물면 애액이 솟구쳐 몸이 저절로 뒤틀렸다.
지금 홍랑이 딱 그러하다. 전에 없었던 몸의 변화다. 하지만 어느새 동창이 밝아오고 있다. 김별장은 이 사또의 말이 떠올랐다. “홍랑은 고죽 최경창을 잘 알고 있어! 자네가 최경창이란 것을 알게 되면 입안의 혀처럼 놀거야. 아니 수청을 거부할지도 몰라! 신격화 할 꿈이 깨어지는 것을 싫어해 수청을 거부하고 도망칠 수도 있어 상황판단을 잘해야 되네..." 김별장은 태풍 앞의 강물처럼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제 오랑캐들이 들끓는 국경지대로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사랑하고 싶은 여인에게 정을 주고 갈 수도 또한 선녀(仙女)보듯 지나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홍랑의 시의 세계는 더 알고 싶었다. “홍랑아! 너는 고죽 최경창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예 별장나리, 아버님께서 한미한 집안의 향반(鄕班)으로 글을 좋아하셔 소녀도 어깨너머로 시를 읽었을 뿐입니다.” “허 그랬구나. 초한가 말고 또 네가 좋아하는 시가 있느냐?” “예 소녀 평소에 존경하는 고죽 최경창님의 시를 아무데서나 낭송 할 수는 없지요! 김별장께서 꼭 원하시면 신라의 최치원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을 낭송하겠나이다.” ‘가을바람 쓸쓸하게 불어오는데 / 세상에 알아 줄 이 아무도 없네 / 깊은 밤 창 밖에는 비가 내려서 / 등잔 앞에 외로운 맘 산란하여라...’ 김별장은 홍랑의 시 낭송이 끝나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과연 너는 홍원의 보배가 아니라 조선의 보내로다!”라고 말하고는 홍랑을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별장나리, 그렇게 쳐다보시면 소녀 몸둘바를 모릅니다.” “허허 내 너를 이렇게 좋아하다 임지로 가지 못할 것 같구나. 나도 최치원의 《추야우중》 시를 좋아하고 있느니라... 네 시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최경창의 시는 어느 시가 그렇게 좋더냐? ”소녀 감히 최경창의 시를 말 할 자격이 아니기에 대신 정지상(鄭知常)의 《대동강》(大同江)을 낭송해 올릴까 합니다.“ ”좋고말고, 고려를 대표하는 천재시인 정지상을 말하는 것이냐? 나도 그 분을 퍽이나 좋아하느니라...“‘비 갠 둑에는 풀빛이 푸르고 / 고운님 보내자니 노래가 구슬프다 / 대동강 강물은 언제나 마를 건가 / 이별의 눈물로 물결만 더해가네...’ ”허허허, 이 사또의 말씀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나 보고 너를 보면 임지인 경성(鏡城) 가는 것도 잊을 것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구나...“ ”아니옵니다. 소녀 아직 시문(時文)에 일천하여 이 사또께서 소녀를 어여삐 봐 주셔서 그러하였습니다.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김별장 아니 최경창은 홍랑에게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늦어도 오늘은 떠나야 임지에 닿을 날짜인데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홍랑아, 너는 고려의 대시인 정지상을 알고 있으니 대단하구나! 그런데 고죽 최경창은 어떤 분인데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중하느냐? 그분의 시를 한번 읊어 봄이 어떠하겠느냐?” “예 김별장나리께서 그토록 원하시면 미흡한 소녀가 고죽 최경창님이 《차대동강운》(次大同江韻)이라는 시를 좋아하셨는데 그 시를 낭송해 올리겠습니다.” ‘강 언덕엔 한가로이 버들만 드리웠는데 / 조각배에선 연밥 따는 노래를 다투어 부르네 / 붉은 연꽃 다 떨어지고 하늬바람도 차가워지니 / 날 저문 모래 벌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과연 한 획도 착오가 없는 자신의 시였다.
김별장은 벌떡 일어나 홍랑을 부둥켜안고 뒹굴고 싶으나 지금까지 참고 견딘 것이 아쉬워 혀를 깨물고 시치미를 떼고 “그랬구나! 아주 훌륭한 차운(次韻)이로다...”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꾸하여 주었다.
그런데 김별장의 대꾸에 홍랑의 반응이 차갑고 싸늘하다. “김별장께선 시문에 뛰어나다고 이 사또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사옵니다? 이 고죽의 시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실망이 크옵니다.” 뾰로통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아니다. 나도 그 분의 시를 평소에 대단히 좋아했느니라. 자자 이제 그만 앉아라. 내 술 한잔 따라 주겠느니라...” 이때다. “김별장 이제 경성으로 떠날 채비를 해야지...” 이 사또의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라는 재촉이다.
홍랑은 이 사또의 김별장에게 임지로 떠날 채비를 하라는 말에 저의기 놀라는 표정이다. 김별장이 고죽 최경창이 분명한데 신분이 밝혀지기 전에 헤어지면 아쉬움이 커질까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서다.
사내가 원하기 전에 몸을 열어 줄 것을 후회가 강물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두 남녀는 서로 표정을 살필 뿐 말이 없다. 입을 열면 할 말을 다 못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슬픈 표정이다.
2019-04-10 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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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46> 홍랑(洪娘) <제1話>
세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 분위기는 밤이 깊어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늘엔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떴다. 홍랑(洪娘)의 가야금 병창소리에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도 날갯짓을 멈춘 듯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사또(李生麗)는 밤 분위기가 익어가자 자리를 피해주고 싶은 상황이다. 이생려와 최경창(崔慶昌:1539~1583)은 동문수학 죽마고우다. “허허, 나는 이제 그만 피곤해서 가서 자야겠네! 내일도 정무가 산적해 있어 두 사람은 술로 밤을 샐 듯하네!” 이 사또는 들었던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상위에 탕 소리가 나게 놓고 김별장(金別將:최경창)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홍랑과 객고를 풀라는 눈치다. 이때 홍랑은 가야금과 거문고를 번갈아치며 분위기를 한껏 높여갔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솜씨다. 홍랑도 김별장과 주고받은 술기운에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이다. 몸과 마음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야금 병창에 이어 거문고를 키면서도 마음은 온통 김별장에게로 가 있다. 사내가 손을 내밀면 지체 없이 빨려 들어갈 태세다.
하지만 사내는 요지부동이다. “허허, 홍랑의 가야금 병창이 놀랍구먼! 너는 이 벽촌에서 어느 누구한테 배웠기에 가야금과 거문고를 신기에 가깝게 자유자재로 키느냐?” 김별장도 선녀같이 너울너울 춤까지 추는 홍랑을 덥석 안아 잠자리로 들어가고 싶으나 혀를 깨물며 참고 있다. 섣불리 행동을 했다가 다 잡은 기회가 공염불이 될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서로 누가 먼저 행동을 하나 눈치를 살피는 상태다. 홍랑의 춤과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홍랑아, 이제 너도 쉬어라. 춤도 그만추고 술이나 마시자...” 홍랑은 귀를 의심했다. ”이제 밤도 깊었으니 그만 자자 소리가 들려오길 가슴 졸이며 기다렸는데 술이나 마시자는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술이야 나중에 마셔도 될듯하여 김별장께선 날이 밝으면 북방변경으로 부임하셔야 되는데 소녀 《초한가》(楚漢歌)를 불러 드릴까 합니다.” 홍랑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도 연신 곁눈질로 김별장의 동태를 살폈다.
어젯밤 꿈에 홍랑이 오매불망 사모했던 고죽 최경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에 보았던 고죽과 똑같은 사내 김별장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홍랑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입안의 혀를 깨물며 현실을 확인중이다.
하지만 홍랑은 기녀 신분임을 망각하지 않았다. ‘만고영웅 호걸들아 초한 승부 들어보소 / 절인지용 부질없고 순민심이 으뜸이라 / 한패공의 백만대병 구리산하 / 십면매복 대진을 둘러치고 / 초패왕을 잡으랄 제 / 천하병마 도원수는 표모걸식 한신이라 / 장대에 높이 앉아 천병만마 호령하니 / 오강은 일천리요 팽성은 오백리라 / 거리거리 복병이요 두루두루 매복이라 // 간계 많은 이좌거는 패왕을 유인하고 / 산 잘 놓는 장자방은 계명산 추야월에 / 옥퉁소를 슬피 불어 팔천제자를 해산할 제 / 때는 마침 어느 때요 구추삼경 깊은 밤에...중략’ 홍랑의 노래에 김별장은 몸과 마음이 구름위에 떠 있는 기분이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홍랑을 품고 뒹굴고 싶다. 하지만 왠지 홍랑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여인같이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 여인으로 끝내고 싶지 않고 영원히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하룻밤 객고를 푸는 대상에는 아까운 여인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제 그만 앉아라... 너무 힘이 들것 같으니 쉬엄쉬엄 놀자구나.” 하지만 홍랑은 홍랑대로 생각이 다르다. 그녀도 어젯밤에 꾼 꿈이 예사롭지 않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떻게든 김별장의 정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번엔 홍랑이 장자방(張子房·張子의 자)의 《설화》(說話)를 이어 노래한다. ‘초진중에 장졸들아 고향소식 들었소 / 남곡녹초 몇 번이며 고당명경에 부모님은 / 의문하여 바라보며 독수공방 처자들은 / 한산낙목 찬바람에 새 옷 지어 넣어두고 / 날마다 기다릴 제 허구한 긴긴날에 / 이마 우에다 손을 얹고 뫼에 올라 / 바라다가 망부석이 되겠구나 / 집이라고 들어가니 어린자식 철없이 / 젖 달라 짖어 울고 자란자식 애비 불러 / 밤낮없이 슬피 우니 어미간장이 다 썪는다’ 홍랑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간장을 녹이는 노래에 김별장은 넋이 나간 듯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기녀들이 모인 장악원에도 들려봤으나 홍랑만한 여인은 보지 못하였다.
지금 김별장은 홍랑에게 혼백을 빼앗겼다. 《초한가》를 부를 때 불쑥 치고 일어났던 하초(下焦·생식기)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처음엔 얼른 잠자리로 들어가 객고를 풀고 아침 일찍 임지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밤새 곱디고운 모습을 보려면 객고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뜨거운 살을 섞으면 깨끗한 영혼에 흠집이 날까 염려가 앞서서다. 동문수학한 이 사또가 말한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하여 진짜 옥은 곤륜산(崑崙山)같이 깊은 산속에서 나온다고 한 말이 김별장은 새삼 떠올랐다.
밤은 깊어가도 두 남녀는 서로 자존심을 꺾고 무릎을 꿇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어느덧 먼 산사에서 울려오는 새벽 종소리에 상황이 바뀌었다. 노래를 하던 홍랑이 갑자기 김별장 가슴을 파고들었다.
김별장은 의외의 상황에 몸과 마음이 얼어붙었다. 품에 들어온 여인을 떠밀어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허겁지겁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구실을 할 수는 더더욱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홍랑은 가슴을 팔딱거리며 김별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래도 사내구실을 하지 않을 거냔 뜨거운 표정이다. 사내도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홍랑을 품고 싶으나 혀를 깨물며 초심을 잃지 않았다.
2019-04-03 09: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