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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41> 얼굴 한 번 봅시다
누구나 거울을 보거나 상대방을 볼 때에 얼굴부터 본다.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두 얼굴의 생김새,즉 용모(容貌)에 신경을 쓴다. 옛날에 ‘얼굴 뜯어먹고 사냐?’는 말이 있었지만, 얼굴의 아름다움, 즉 미모(美貌)에 대한 관심은 세월이 갈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신사동에 즐비한 성형외과들이 웅변(雄辯)으로 이를 증명한다.
얼굴을 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 사람의 감정이 얼굴에 나타난다. 웃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고, 찡그리고 있으면 슬픈 것이며, 붉으락푸르락하면 화가 난 것이며, 안면(顔面)에 홍조(紅潮)를 띠고 있으면 부끄러운 것이다. 예부터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안색(顔色)부터 살펴야 했다. 어딘가 안색이 애매하면 언행(言行)을 삼가는 것이 안전하다. 다음으로 안색으로부터 그 사람의 건강 상태도 짐작할 수 있다. 안면(顔面)이 불그레하면 건강한 것이고, 창백(蒼白)하면 아프거나 피곤한 것이고, 이상하게 검으면 병을 앓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처럼 얼굴에 사람의 감정과 건강상태, 즉 ‘얼(魂)’이 나타난다고 해서 ‘얼’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귀어 아는 사람이 많을 때, ‘얼굴이 넓다’거나 ‘안면이 넓다’고 한다. ‘발이 넓다’와 비슷한 의미이다. 다른 사람과 사귀려면 우선 안면(顔面)부터 터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알수록 유리한 사업을 안면(顔面)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저런 의미로 안면이 넓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얼굴이 큰 것은 ‘얼큰이’라고해서 다들 싫어한다. 그래서 얼굴이 작아 보이도록 화장하는 것이 유행이고, 심지어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을 작게 만드는 수술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어느 정도 얼굴이 넙데데해야 잘생긴 걸로 쳐줬었다.얼굴이 조막만 하면 ‘오종종하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예쁜 얼굴의 기준이 세월에 따라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언젠가는 얼굴값 한다’고 지레 비난하는 말이 있다. 대개는 시샘에서 나온 말이다. 반면에 미모가 좀 떨어지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꼴값한다’고 비아냥댔다. 비열한 말버릇이다. 옛날 다방(茶房)에서는 되도록 예쁜 여자를 ‘얼굴마담’으로 고용했었다. 일본어로 얼굴이란 뜻인 ‘가오’를 써서 ‘가오마담’이라고도 했다. 이는 ‘당시의 주 고객인 남자 손님들을 유인하여 매상(賣上)을 올리려 한 일종의 미인계(美人計)였다. 마담의 용모가 다방의 브랜드 역할을 하기도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참, 다방이란 오늘날 커피숍의 고어(古語)이다.
그 시절에 ‘가오(얼굴)잡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었다. 잘났다고 으쓱대며 다니는 모습을 빗대는 말이었다. 비슷한 말로 ‘목에 힘주고 다닌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는 체력이나 권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얼굴이 잘생기면 대체로 범사(凡事)에 유리하지만, 너무 잘 생겨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사장님보다 더 사장님같이 잘 생겨서, 사람들로부터 사장에 앞서 인사를 받는 바람에 사장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하도 있다. 그런 부하는 대개 오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크게 성공한 사람은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闊步)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죽마고우(竹馬故友)를 외면(外面)하면 안면을 바꾼 사람 또는 안면몰수(顔面沒收)한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반면에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이 부끄럼도 모르고 활개치고 다니면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얼굴이 두껍네’, ‘얼굴에 철판 깔았나?’ 또는 철면피(鐵面皮)라는 욕을 먹는다. 그러고 보면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 품위가 있는 얼굴을 들고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3년째 사람들과 대면(對面, face-to-face)하기가 어려워졌다. 전에는 ‘언제 밥 한 번 먹읍시다’가 인사였는데 이제는 ‘언제 얼굴 한 번 봅시다’가 전화 인사가 된 지 오래다. 얼굴을 보는 것이 만남의 첫 단계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요즘처럼 얼굴 보기가 소중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여러분, 건강하시고 언제 얼굴 한 번 꼭 보십시다.
2022-02-09 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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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40> 홍문화 교수님과 손동헌 교수님
작년 (2021년) 6월 15일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손동헌(孫東憲) 교수님(1953년 중앙대 약대 입학, 1957년 제1회 졸업)께서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향년 91세. 손 교수님을 추모하며 내가 쓴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라는 책(2020년)으로부터 홍문화 교수님과 손 교수님 간의 인연을 발췌(拔萃)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중앙대학교는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홍문화(경성약전 7회), 우린근(동 7회), 양형호(동 10회)의 3명에게 중앙대 약대를 신설하는 책임을 맡겼다. 당시는 전시(戰時)라 마땅한 교사(校舍)가 없어 학생들은 부산 송도에 있는 ‘승리장(勝利莊)’이라는 요릿집의 6조 넓이의 다다미 방에서 의자도 없이 수업을 받았다. 1953년 4월에 입학한 첫 신입생 40명이 강의를 받았다. 손동헌이 그 40명 중에 있었다.
홍 교수님은 1학년에게는 무기화학, 2학년에게는 무기제약을, 우린근은 정성분석화학을, 양형호는 유기화학을 강의하였다. 홍 교수님은 서울대 약대 조교수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손동헌은 홍 교수님의 실험 심부름을 해 드리는 등 홍 교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제자였다. 손동헌은 1학년부터 3년간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을 맡은 학생들의 리더였다.
1953년 4월부터 시작된 1학기 강의를 마치고 그해 9월 1일 중앙대학교도 서울로 환도(還都)하였다. 흑석동에 있던 미군 부대가 철수하면서 그 자리에 중앙대 캠퍼스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임영신 총장의 개인 저택도 강의실로 사용해야 할 만큼 강의실 사정이 열악하였다. 시내에 별도의 자택이 있던 임 총장은 관악구 흑석동 산 10의 11에 있는 자신의 이층집 적산가옥(敵産家屋)을 홍 교수님에게 내어 주며 거기에서 강의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홍 교수님의 흑석동 거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앙대는 임영신 총장의 노력으로 1954년경 미국 파이퍼(Pfeiffer) 재단으로부터 10만 달러를 기부 받아 1956년에 1,400평 면적의 4층 건물(파이퍼 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약대 교수 두 명을 1년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 당시 중앙대 약대 학장이던 고주석 박사와 홍 교수님이 선발되었다. 홍 교수님은 퍼듀대학교 약대에서 1년간 물리약학의 창시자이자 대가(大家)인 마틴(Alfred N. Martin) 교수의 지도로 ‘입자학(粒子學)’을 연구하여 논문을 완성하고 1956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손동헌은 유학 중인 홍교수님에게 편지도 자주 보냈다고 한다.
1년 후 홍 교수님은 화물선을 타고 약 두 달에 걸친 항해 끝에 1956년 11월 16일 부산항에 내려 경부선 기차를 타고 그날 저녁에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에는 서울대 약대의 나운용, 김신근, 이상섭 등 조교들, 허백, 지형준, 조항연, 백덕우 등 학도호국단 간부들, 그리고 김조형, 이은방을 비롯한 학생 대표 등 총 40~50명의 학생이 플랫폼에까지 들어가 홍 교수님을 영접하였다.
손동헌을 비롯한 중앙대 약대 학도호국단 간부들도 환영을 나갔다. 그런데 기차가 도착했을 때 누가 먼저 꽃다발을 드리느냐 하는 문제로 서울대와 중앙대 학생들 간에 가벼운 승강이가 있었다. 이는 당시 홍 교수님이 서울대와 중앙대 두 대학의 교수를 정식으로 겸하고 있어서, 두 학교 학생들이 서로 홍 교수님을 자기 학교 교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꽃다발은 서울대 학생 대표가 먼저 드렸다고 한다.
홍 교수님은 귀국 후 고심 끝에 중앙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서울대 교수직을 선택하셨다. 그때 한 사람이 두 대학의 교수를 겸할 수 없도록 문교부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홍 교수님이 귀국하였을 때, 중앙대 약대 학생들이 명동의 신세계 백화점 5층에 있는 강당에서 귀국 환영회를 열었다. 그때 홍 교수님이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부터 그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유행되었다고 한다.
홍문화와 손동헌, 두 선생님을 회상할수록 존경과 추모의 정이 깊어만 간다.
2022-01-26 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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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9>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1. 사람은 등 따숩고 배부르면 뭐 죄지을 것 없나 궁리한다 - 이게 사람의 속성이란다. 나도 몸이 더 건강해지면 마음껏 믿음생활을 해야지 하지만, 몸이 좋아지면 어디 놀러 갈 데 없나부터 생각하곤 한다.
2. 술집 가서 술 안 마실 생각하지 말고 아예 술집에 가지 마세요 - 옛날의 좀 못된 선배들은,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이것저것 다 놀아봐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인들은 누가 술집에 가자고 유혹하면 갈등을 느낀다. 때로는 ‘술집에 가서 술만 마시지 않으면 되지 뭐’하며 마지 못한 척 꼬임에 넘어간다. 그러나 그분은 아예 유혹이 있는 술집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마틴 루터도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했단다. 시험에 들지 않으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 같다.
3. 불평하지 마세요. 불평은 사람에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 하는 거예요 - 사람에 대한 비난,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많다. 심하면 조롱과 저주까지 한다. 놀라운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배운 교인들마저 종종 그런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특히 조롱과 저주는 교인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심성(心性)이다. 물론 점잖음을 자처하는 사람과도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4. 눈과 귀에 탱큐 하지 않고 살았더라구요 - 평생 몸이 아파서 칠십도 되기 훨씬 전에 소천하신 그분이, 말년에 하신 말씀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당연히 사물이 보이는 줄 알았고, 물을 마시면 소변이 저절로 나오는 줄 알았는데 눈이 나빠지고 신장이 나빠지고 보니 그런 생리 현상이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당연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인데 우리는 평소에 이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고 있다. 문득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5. 무언가 얻어먹을 것이 있는 듯 사람들이 다가오는 따듯한 사람이 되세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 사람들은 똑똑하거나 잘나가는 사람을 부러워는 하지만 반드시 존경하거나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보다는 마음씨 따듯한 사람을 좋아한다. 형제자매 간이나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따듯한 사랑을 주고받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보람이 아닌가 한다.
6. 세미나 하지마세요 - “공동 시설 현관에 누가 몰래 대변을 봐 놓은 것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하시나요? 혹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운다고 세미나 하지는 않으시나요? 세미나 하지 마세요. 그냥 처음 본 사람이 조용히 치우세요.” 누군가가 보여주는 모범적인 행동이 입으로 떠드는 세미나보다 훨씬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7. 누가 말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세상에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은 많다. 누구라도 평생에 훌륭한 말 몇 마디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둑질을 하면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면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훌륭하게 산 사람의 말씀만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8.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 “요즘 잘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세요? 그럼 지금이 위험한 때입니다.” 자전거와 자동차는 빨리 달릴 때 사고 내기 쉽다. 출세가 빠르고 돈이 잘 벌리고 논문이 잘 써질 때, 겸손하지 않으면 큰 사고를 낼 수 있다는 말씀이다. 교만은 멸망에 이르게 하는 급행열차이다. 가수 조영남님의 노랫말처럼 “겸손은 어려워”이다. 사실 겸손(謙遜)이라는 말 자체가 교만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머리 좋은 것, 말 잘하는 것, 잘 생긴 것, 성격 좋은 것은 물론 큰 단체나 조직을 경영하는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것 아닌가?
이상은 2011년에 소천하신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생전 말씀들이다. 삶으로 보여준 그의 말씀인지라 세월이 갈수록 울림이 오히려 커진다. 근하신년(謹賀新年)!모든 분의 건강과 평안과 행복을 기원한다.
2022-01-12 1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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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8> 아나무인
젊은 사람들이 한자(漢字)를 몰라 큰일이라고 개탄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자를 몰라 틀리게 사용한 사례를 보며 재미있어하기도 한다.
글의 제목으로 섬은 아나무인은 물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잘못이다.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뜻이다.아나무인은 무슨 뜻으로 사용했을까?
황당무계(荒唐無稽: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다)를 황당무게나황당무괴로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황당무계란 한자가 워낙 어려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조금 심각해 보이는 사례도 있다. 얼마 전 TV 방송에 ‘실제하는 이야기’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의미라면 ‘실재(實在)하는 이야기’로 썼어야 한다. 또 서울대학교에서 발행한 2021년 11월 15일 자 ‘대학신문’의 만평(漫評)중에 ‘업무과부화’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업무가 지나치게 많다는 의미라면 업무과부하(業務過負荷)라고 썼어야 한다. 서울대학교 신문에서까지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제법 심각한 문제 같아 보인다.
이역만리(異域萬里)를 이억만리라고 쓰는 사람이 있다는데, 이억만리(二億萬里)가 이역만리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느껴지기는 한다. 환골탈태(換骨奪胎: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쓰다, 또는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 사람처럼 되다)를 환골탈퇴로 쓴 사람은 무슨 의미로 이 말을 썼을까 궁금하다. 명예훼손(名譽毁損)을 명예회손으로 쓴 사람도 있다. 야반도주(夜半逃走)를 야밤도주로 쓴 사람은 의미는 정확히 알고 쓴 것 같다.
사면초가(四面楚歌: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 孤立無援의 상태)를 사면초과로 쓴 사람은 무엇을 상상했을까? 사면에 적의 수가 감당할 수 있는 수를 초과(超過)한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나름 일맥이 상통하는 표현 같기는 하다.
인감증명서(印鑑證明書)를 ‘인간증명서’로 쓴 사람은 매우 철학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무슨 계약을 할 때 쌍방이 ‘제대로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제출하도록 법이 바뀐다면 세상의 온갖 거짓과 부정이 다 사라질 것이다. 다만 어디서 발급받을 수 있겠느냐는 문제이다.
발암물질(發癌物質)을 바람물질이라고쓴 사람은 무식하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혹시 바람 중에 섞여 있는 미세먼지를 생각하며 썼다면 모를까? 공황장애(恐慌障碍:불안장애의 일종)를 공항장애로쓰는 사람도 있다. 이 참에 공항(空港)에만 가면 숨이 막히는 장애를 공항장애(空港障碍)로 쓰기로 하면 어떨까 싶다. 이런 정도의 잘못은 애교로 봐줘도 되겠지만, 역할(役割)을 역활로 잘못 쓰는 것은 애교로 봐주기 어렵다. 그냥 무식의 소치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후유증(後遺症:어떤 일을 치르고 난 뒤에 생긴 부작용)을 휴우증으로 잘못 쓰는 사례이다. 큰 일을 치르고 나서 휴우~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상태를 후유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젊은이들의 순진한(?) 발상이 귀엽지 아니한가! 진짜 어이가 없는 사람은 어이가 없다고 써야 할 때 ‘어의가 없다’고 쓰는 사람이다. 어이를 어의(語意)로 잘못 생각한 것일까?섣부른 유식이 빚는 무식의 발로(發露)이다.
믿기 어렵지만 일취월장(日就月將:나날이 다달이 자라거나 발전함)을 일치얼짱으로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설마 장난으로 그러겠지 생각하며 웃어 넘길까 한다. 꽃샘 추위를 곱셈추위라고쓴 걸 보니 곱으로 춥게 느껴진다. OMR 카드(광학적인 방법으로 특정한 자료를 읽는 카드)를 5회말 카드로 쓴 사람이 있다는데, OMR을 모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제일 웃기는 것은 시어머니가 외국인 며느리에게 여러 일을 시켜 놓고 친척이 왔다고 절까지 시키자 “저한테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다. 외국인이 아니라도 며느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면 안 되는 시대이다.
그래도 국어의 앞날을 너무 막막(寞寞)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나치면 ‘앞날이 망막(網膜?)하다’ 말하는 실수를 범할지도 모른다.
2021-12-22 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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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7> 웬수 사랑하기
얼마 전 TV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시던 신부님이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이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먼데 사는 원수가 아니라 가까운 데 사는 ‘웬수’를 사랑하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불현듯 10년도 더 된 옛날에 본 TV 오락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시골 동네 노인들이 부부 대항 퀴즈 풀이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예컨대 영감님이 “배고픈데 먹는 게 뭐지?” 하고 물으면 마나님이 “밥이지 뭐”라고 대답하면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퀴즈가 시작되자 영감님이 물었다. “당신과 나 사이의 인연을 뭐라고 하지?” 방송국에서 생각해 놓은 정답은 ‘천생연분(天生緣分)’이었다. 이 질문을 들은 마나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웬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영감님은 “아니 그게 아니고 네 글자!”라고 힌트를 주었다. 그러자 마나님은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평생 웬수!!”라고 외쳤다. 이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정답이네 뭐”하면서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하였다.
이 장면을 떠올리자 신부님 말씀에 공감이 갔다. 그분 말씀은, 가족이나 친구처럼 마땅히 사랑하며 지내야 할 사람들을 ‘웬수’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면, 원수에 앞서 우선 그 ‘웬수’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고 보니 ‘웬수’와 ‘원수’는 전혀 어감이 다른 말이었다.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마나님은 영감님을 진짜로 ‘평생 원수’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같이 방송에 출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두 분의 표정과 말투만 봐도 두 분이 소위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잘살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을 ‘웬수’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마나님 나름의 애교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 앞에 ‘평생’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것을 보면 마나님은 영감님과 평생을 함께 살기로 작정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서로를 웬수를 넘어 원수라고 생각하며 사는 부부도 적지 않아 보인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을 때는 상대방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는데,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기대와 신뢰가 깨지자 사랑이 증오로 바뀌면서 웬수가 되었다가, 심하면 원수로까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웬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신부님 말씀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다. 그래! 멀리 있는 원수는 차치(且置)하고 우선 내 옆에 있는 웬수들, 즉 우리 가족, 우리 이웃, 우리 친구들부터 더욱 사랑해야겠다. 부부간의 연분이 웬수나 원수가 되지 않도록, 아니 애초에 웬수로 보이기 시작하지 않도록 결혼 초에 있던 사랑의 불씨를 살려내야겠다. 사랑은 증오심을 예방 치료하여 연분을 지켜내는 유일한 백신이자 치료제임이 틀림없다.
노파심에서 말하건대,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원뜻은 당연히 웬수를 넘어 진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닫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 깨달음, 그 믿음이 곧 사랑의 근원인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 부족한 탓에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잘 샘솟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자식은 저절로 사랑스럽고 손주는 더더욱 사랑스럽다. 이런 ‘내리사랑’은 하나님이 DNA로 심어 주신 특성이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사실 별로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반면에 배우자와 부모님 등 평생 웬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지금의 내 행복이 걸려 있는 중차대(重且大)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수 사랑은 차차 하더라도, 어떻게 당장 웬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상대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는 것이 어떨까 싶다. 사랑은 따듯한 말은 통해 전달된다. 또 따듯한 말 자체가 일말(一抹)의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 웬수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 보자. 그리하여 평생 웬수를 천생연분으로 되돌려 놓자. 우리 나이가, 이 시대가, 특히 이 계절이 따듯한 말 한마디를 갈구(渴求)하고 있지 않은가!
2021-12-08 1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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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6> 온라인 동창의 날 행사를 마치고
지난 2021년 10월 18일(일) 오후 3~5시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의 ‘제38회 동창의 날’ 행사가 온라인(Zoom)으로 열렸다. 당일 진행 본부는 신축된 20동의 주중광 홀이었다. 동 행사는 작년에는 COVID-19로 인하여 개최할 수 없었다. 나는 동창회장으로서 올해에는 온라인으로라도 행사를 열기로 하였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17명의 동문 등으로 준비위를 구성하여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였다.
행사는 회장의 개회사, 오유경 약대학장의 축사, 이희범 서울대 총동창회장의 축사로 시작되었다. 그날 행사에 참여한 약대 동문은 총 320여 명이었다. 신원이 파악된 300명 중 서울 거주 동문이 약 200명 (67%), 경기. 인천 거주 동문이 약 55명 (18%), 지방 거주 동문이 약 40명 (13%), 해외 거주 동문이 5명 (1.7%)이었다. 졸업 횟수로는 11(1957년 졸업)~20회(1966년)가 35명, 21(1967년)~40회(1986년)가 108명, 41(1987년)~60회(2006년)가 116명, 61(2007년)~75회(2021년)가 41명이었다. 가장 원로인 11회(1957년)도 3명 참여하였고, 가장 젊은 75회(2021년)는 13명이 참여하였다. 가장 다수가 참여한 동기회는 17명이 참여한 40회(1986년)였다.
과거 오프라인 동창의 날 행사에 참여한 인원이 많아야 200명 정도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번의 320명은 나름대로 대단한 성과였다. 그동안 만남에 대한 동문들의 갈증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참여자 전원에게 커피 쿠폰을 발송해 드리겠다고 사전에 문자, 이메일, 카톡방을 이용하여 열심히 홍보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75회 신입 동문들이 많이 참여한 데에는 모교 재학생 준비위원들 (모교 ‘약원’ 편집 동아리 회장 등)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지방 및 해외 동문의 참여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손현아(46회) 및 오용호(48회) 동문의 탁월한 진행과 사회가 돋보였다. 이들은 행사 전반에 걸쳐 프로그램을 사전에 정밀하게 검토한 다음, (1) 모교 소식(약대 홍보, 약초원, 제약실습공장, 약학역사관), (2) 이희범 총동창회장님 및 이금기 명예회장님의 축사, (3) 졸업 60주년 동기회장(15회) 인사, 졸업 50주년 동기회장(25회) 인사, (4) 재학생 동아리(밴드동아리 프로작, 댄스동아리 SSLD)의 공연, (5) 행사 찬조 및 후원 동문들 (35회 천병년 우정바이오 사장, 38회 이삼수 보령제약 사장)의 인사, (6) 교가 제창과 같은 다양한 동영상들을 적절한 시점에 배치하였다.
이들 동영상 사이 사이에 다양한 퀴즈 풀이 순서가 배치되었다. 다만 제한된 기술력으로 인해 간간이 잡음이 들리고, 대면 모임보다 회원 상호 간의 소통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많은 동문들이 호응하여 주었다. 행사의 후반부에서는 3회에 걸친 행운상 추첨이 있었다. 대상은 마침 현장에 참여한 동문에게 돌아갔다.
행사가 끝난 후, 준비위원들은 며칠 후 다시 Zoom으로 모여 행사에 대한 사후 평가회를 열었다. 사회, 학생의 현장 인터뷰, 동영상, 퀴즈 진행, 그리고 기술적인 면이 다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사상 최초의 온라인 동창회에 320명이나 참여했다는 사실에 모두 안도하였다. 그리고 장원준 명예회원을 비롯한 여러 동문님의 물심양면에 걸친 후원에 감사하였다. 이에 따라 약속대로 참여자 전원에게 커피 쿠폰을, 그리고 퀴즈 정답자 및 행운상 당첨자에게 해당 상품 보내기로 하였다.
온라인 동창의 날 행사에 참여해 주신 모든 동문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이번 행사 전체의 동영상 및 섹션별 클립 영상은 유튜브(서울대약대동창회 채널)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끝으로 행사 전반의 기술적인 면을 책임져 준 모교 행정실의 이해문 선생의 수고에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는 또 한 페이지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2021-11-24 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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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5> 가을엔 똑똑함보다 따듯함을
지하철 3호선 잠원역의 탑승장 유리 벽면에 ‘쌍디귿’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그 중 ‘얼음장같이/ 냉 서린 똑똑함보다/ 세상을 둥글게 감싸는 따듯함’이라는 글귀에 특히 공감한다. 똑똑한 사람은 그 똑똑함만으로는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똑똑함이 냉철함과 안팎을 이루면 자칫 쌀쌀맞음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냉철한 이성이라는 말이 멋있게 들렸다. 이어령 선생님 같은 분들의 이성이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똑똑함보다는 따듯함이, 냉철함보다는 온화함이, 쌀쌀맞음보다는 푸근함이 좋아진다. 사람도 온화하고 푸근한 사람이 좋다.
하용조 목사님은 생전에 “찬바람이 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가가면 뭔가 얻어먹을 것이 있을 것 같은 푸근함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그 분 설교의 명성도 그분 설교의 따듯함에 기인한 바 컸다. 요즘, 만년에 하 목사님을 통해 세례를 받은 이어령 선생님의 글로부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진한 따듯함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 사랑과 참회와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 살고 있다…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 즉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는데, 젊으셨을 때보다 훨씬 멋져 보인다. 그래 맞다. 예수님이 예수님이신 것은 냉철함이나 예리함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따듯하고 푸근하다. 냉철함에는 눈물이 없다. 눈물은 곧 사랑이다.
이미 몇 번 자랑질(?) 한 대로 우리 손주들은 다 똑똑하다. 애들이 이렇게 많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는 것이 많다. 학교, 학원 및 독서를 통해 정말로 많이 배우기 때문이다. 애들이 똑똑해서 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나는 틈만 나면 손주들에게 가르친다. 똑똑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듯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이렇게 더 가르칠 생각이다.
또한 손주들에게 남에게 지나친 자랑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세상에 남의 자랑질을 순수하게 기뻐해 줄 정도로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별로 없음도 가르친다. 사람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시샘을 많이 한다. 그래서 형제 자매간 시샘이 제일 심각하다.
그러므로 내 자랑을 기쁘게 들어줄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있는 사람은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다. 다만 그런 친구에게 자랑할 때라도 한 번 더 눈치를 살피는 것이 좋다. 어느 대목에서 시샘하거나 기분 나빠할지 예측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주된 관심 분야에서 지는 것에 예민하다. 특히 친한 사람에게 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에서 친구에게 질 때 시샘을 느낀다. 나도 돈을 잘 버는 친구를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연구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질투감을 느낀다.
그러나 부모(조부모 포함) 앞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부모 앞에서는 눈치 안 살피고 자랑해도 된다. 부모에게 자식의 자랑은 언제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눈치를 보거나 체면을 차려가며 자랑을 하는 자식이 오히려 안쓰럽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그냥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는 무조건 자식을 사랑하는 본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고 하지 않는가!
가을이 완연하다. 날씨가 선선하다 못해 심지어 어제오늘은 춥기까지 하다. 날씨 탓일까? 유난히 쓸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가을에 많다.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따듯함을 그리워하는 계절이다. 나는 가끔 방에 보일러를 켜고, 햇빛을 향해 문을 연다. 햇빛은 햇볕이라 따듯하기 때문이다.
패티김이 부른 ‘이별’이라는 대중가요에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냉정한 사람은 어쩌다 한 번 생각이 날까 말까 하다’는 말이 아닐까? 가을은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따듯한 사람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사람 때문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가을을 기대해 본다.
2021-11-10 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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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4> 방학과 휴가는 봄 가을에
9월이 되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四季)는 순서대로 오고 가며, 봄의 따듯함, 여름의 더움, 가을의 선선함과 겨울의 추움도 여전하다. 지구와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규칙적으로 자전(自轉)과 공전(空轉)을 계속하고 있는 덕분일 것이다. 이런 규칙 일체를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문득 이 지점에서 자연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자연(自然, nature)이란 저절로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정말 자연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일지 의문이다. 혹 어떤 거대한 힘이 자연을 존재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연의 규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우주의 미물(微物)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의문이다. 다만 나는 우주가 엄청나게 큰 현탁제(懸濁劑, suspension)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현탁제란 약물 입자들이 분산(分散)되어 있는 액제를 가리키는데, 우주에 수많은 혹성이 떠 있는 모습이 마치 현탁제 같다는 생각이다. 소견이 좁은 약제학자의 우주관이다.
약물 입자를 액체 중에 분산, 즉 현탁시키기 위해서는 입자의 크기, 모양, 표면 전하(電荷)와 같은 분산질(分散質)의 특성뿐만 아니라 분산매(分散媒)인 액체의 점성이나 조성 등도 최적 상태로 설계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최적화를 잘해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약물 입자가 분리(分離), 즉 가라앉거나 떠 오르는 현상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그만 현탁제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이런 분리 현상이 우주라는 무변광대(無邊廣大)한 현탁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창세(創世) 이래 지금까지 지구 주변의 혹성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회합(會合)하거나,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대한 현탁제인 우주의 이 놀라운 안정성을 그냥 ‘저절로’ 그리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혹자는 ‘무한히 큰 어떤 힘’이 이 안정성의 비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주 안정화의 비밀이 어디에 있든, 또 무엇이든 간에, 이 안정성에 따른 자연법칙의 항상성(恒常性) 덕분에 나는 일생에 걸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규칙적인 반복을 즐겁게 경험하고 있다.
한편 자연의 법칙 면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하여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가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가끔 실제로 옛날에 비해 요즘의 시간이 빨리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무식의 소치(所致)겠지만, 옛날의 1시간과 요즘의 1시간의 길이가 똑같다는 것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증명된 사실일까?
각설(却說)하고 우주의 규칙적인 운행 덕분에 다시 가을이 왔다. 때로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푸르르고 공기가 선선하다. 단풍이 산을 뒤덮을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여 바야흐로 놀러 다니기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계절이 좋구나 느낌이 오면 시험 때가 다가왔구나 생각해서 틀림이 없다. 꽃이 피면 1학기 중간고사, 단풍이 들면 2학기 중간고사가 목전에 온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잔인한(?) 일이다.
전통적으로 각급 학교는 여름과 겨울에 덥거나 추워서 방학을 한다. 그러나 요즘의 학교는 교실마다 냉난방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여름과 겨울에도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제안해 본다. 이제 공부는 여름과 겨울에 하고, 계절이 좋은 봄과 가을에는 마음껏 놀러 다닐 수 있도록 방학을 하면 어떨까?
최근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농담삼아 이 제안을 말했더니, ‘이걸 공약으로 걸고 대선(大選)에 나가시면 표 좀 나오겠어요’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직장의 휴가도 봄가을에 가도록 하겠다고 하면 더 많은 표가 나올 것이라고 거드는 사람도 있다. 대선? 아무래도 조만간 불출마 선언해야 할까 보다.
수확물이 풍성하고, 날씨가 좋아 짧게 느껴지는 계절, 특히 저녁달이 아름다운 가을(秋夕)을 맞아 모든 분이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고 행복하시길 충심(衷心)으로 기원한다.
2021-10-27 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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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3> 기독교는 예수교
기독교(基督敎)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기독(基督)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 (Christ)’의 한자(漢字) 음역(音譯)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본시(本是)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몸소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일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상숭배, 즉 타락의 길을 걸었다. 직접 보고 들어야 믿기 쉬운데, 하나님을 볼 수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던 탓이 컸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인성(人性)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들으면 유일신(神)인 하나님을 잘 믿겠기 기대하셨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기 쉽게 해 주실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쓰신 마지막 카드라고 하는 말도 있다. 신이자 사람인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이다.
그럼 예수님을 보고 들은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믿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우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득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보이시기 위해 적지 않은 기적을 보이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보이셨다.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열두 제자마저 기적을 볼 때만 놀랄 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잘 믿지 못하였다. 오죽하면 수제자 격인 베드로가 “주(主)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칭찬하셨겠는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나 제자 도마는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며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의 의심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고 하셨다. 그 순간 도마는 즉각 무릎을 꿇으며 “예수님은 내 주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던지 그 후 도마는 멀고 먼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의 기독교 신자의 수는 현재 3900만명에 이르는데, 그 씨를 도마가 뿌린 것이라고 한다. 인도 남서부 최대의 도시인 첸나이(인구 672만)에 가면 그의 무덤과 그를 기리는 성도마 성당이 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는, 베드로나 도마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과 성품을 갖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인은 그분의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기독교 교인들의 입에서 교만, 비난, 저주, 멸시, 조롱이 사라지고, 대신 겸손, 위로, 격려, 포용, 용서 등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말이 넘쳐흐르길 소망한다. 빛이 세상을 밝고 따듯하게 만들 듯, 또 소금이 음식을 맛있게 조미(調味)하듯, 사랑만이 세상을 밝고 따듯하며 살 맛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교회에 사랑이 넘칠 때 그때 비로소 세상의 사랑과 신뢰를 받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염원한다.
이상, 잘 알지도 못하며 감히 내 생각을 적어 보았다. 독자 제현의 관용을 부탁드린다.
2021-10-13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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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2> 부정부패의 추억
과거에는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했었다. 내가 아는 사례만 하더라도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몇 가지만을 소개해 본다.
88올림픽 전에 ‘이경규의 양심 냉장고’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옥상에서 도로를 관찰하다가 빨강 신호등에서 정지선을 지키는 차를 발견하면 뛰어나가 칭찬을 하며 냉장고를 선물로 주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상당 시간을 관찰해도 아무도 냉장고를 타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며칠 전 TV에 나온 터키 여성이, 터키에서는 노란 신호가 들어오면 차들이 더 빨리 달리는데, 한국에서는 다 멈추더라며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는 운전자가 많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나라가 되었다. 또 예전에는 운전면허증 뒤에 5,000원짜리 지폐를 끼워 놓고 다니는 운전자가 많았다. 교통경찰이 차를 세웠을 때 면허증을 제시하면, 그 돈을 빼 가고 교통위반을 눈감아 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관행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에는 시험 중 커닝하는 학생이 많았다. 앞이나 옆 사람의 답안지 보기는 초보적인 커닝이었다. 쪽지에 깨알 같이 메모를 해 와서 답을 적는 사람, 옆 사람과 답안지를 바꿔 답을 쓰는 사람, 심지어 대리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있었다. 교수들의 학점 관리도 엉망이었다. 자기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고 A 학점을 준 교수도 있었다. 학점이 불량해서 졸업을 못 하게 된 학생이 읍소(泣訴)하여 거의 모든 교수로부터 A 학점을 받아낸 일도 있었다. 제자 사랑(?)이 지나쳐 제자들에게 약사고시 예상 문제를 누설했다가 서울대 학생들로부터 약사고시 보이콧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대학마저 도덕적 불감증을 앓던 시절이었다.
동사무소 같은 관공서에 가면 민원인이 너무 많아 자기 차례가 오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소위 급행료를 담당자에게 몰래 주면 내 일을 남보다 먼저 처리해 주곤 하였다. 1979년 일본 유학을 하러 가려고 여권 발급을 신청하였더니 신원조회를 담당하는 경찰이 찾아와 급행료를 받아 간 일도 있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대기 번호를 받아 순서대로 일을 볼 수 있게 되어, 급행료를 주는 관행은 완벽하게 없어졌다. 관공서의 업무가 자동화되어 민원인이 오랫동안 기다리는 일이 없어진 덕분도 있을 것이지만, 아무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군대의 부패가 심했다. 은사 고 김신근 교수님이 6.25 전쟁 직후 약제 장교로 근무할 때, 하루는 옷에 생기는 이를 방제(防除)하는 DDT라는 약이 한 드럼 왔으니 인수증에 서명하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부대까지 내려오는 도중에 이리저리 다 없어지고 하나도 안 남았다고 하더란다.
내가 50년 전에 경험한 군대도 크고 작은 부정과 부패가 만연(蔓延)했었다. 무언가 부정한 수를 써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군대에 가서도 요령을 피워 고된 훈련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장하라고 나온 무를 주고 막걸리를 받아먹는 사례나, 뇌물을 주고 휴가를 가는 정도는 애교에 가까웠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국격(國格)의 손상 우려가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참외 서리, 수박 서리, 나무 서리는 무용담의 소재가 되거나 심지어 아름다운 풍습으로 추억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명백한 도둑질로 인식되게 되었다.
부정과 부패는,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나라를 붕괴시킨다. 나라가 붕괴될 상황에 이르면 부정과 부패는 더욱 기승(氣勝)을 부린다. 부정부패와 붕괴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가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지금, 과거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부정부패가 사라지고 법을 잘 지키는 나라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기적이고,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이제 과거의 도덕적 기준으로 살 생각을 하다가는 언제 법의 신세를 지거나 패가망신을 당할지 모른다. 뉴스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2021-09-23 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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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1> 싹싹한 사람
며칠 전 대학 동기 셋이서 점심을 먹는데 한 친구가 나보고 “바쁘세요?’라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왜 자기 술잔에 술을 따라주지 않느냐, 안 바쁘면 술 좀 따르라는 농담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상대방이 같이 마시거나 최소한 술잔을 채워 주기 바란다. 그러나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마시고 싶으면 혼자 마시면 되지 왜 꼭 상대방을 끌어들이려 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안 비었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술 마시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은 남에 대한 배려(配慮)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며칠 전, 큰아들네가 세 손녀를 데리고 우리집에 왔을 때, 아들이 고기를 굽던 나를 돕다가 살짝 손을 데었다. 그 순간 둘째 손녀가 번개같이 냉장고로 달려가 아이스 팩을 꺼내 아빠 팔에 대주었다. 그 민첩함에 놀란 내가 ”냉장고에 아이스 팩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하고 물었더니, ‘냉장고에 뭐라도 찬 물건이 있을 것 같아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마침 이게 있길래 가져온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나와 아내는 손녀의 배려심과 기민함에 감동하였다.
유난히 아내에게 잘하는 사람이 있다. 모 대학의 C 교수와 부부 동반 식사를 할 때마다 아내는 그 교수의 배려에 감탄한다. 그는 맛있는 반찬을 우리 앞으로 밀어 놓는다. 혹시 술을 마시게 되면 급히 약국에 가서 간장약을 사다 먹인다.
둘째 손녀와 C 교수처럼 배려심 깊은 성품을 우리말로 ‘싹싹하다’라고 한다. 그 싹싹함은 타고나는 것 같다. 손녀가 셋이 있어도 둘째가 제일 싹싹한 걸 봐도 그렇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성품을 타고나지 못했다. 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 데 정신이 팔려 맛있는 반찬을 상대방 앞으로 밀어준 적이 없는 것 같다. 둘러보니 자랄 때 우리 식구들이 다 그다지 싹싹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싹싹한 남자들 하고 오래 사귀면 가끔 부작용이 생긴다. 특히 부부 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더욱 그렇다. 결국 아내로부터 당신도 저 사람한테 좀 배우라는 잔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지나치게 싹싹한 사람하고 여행을 갈 때는 아내와 동행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나 같은 사람하고 여행을 하는 남자는 부인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된다. 나보다는 자기 남편이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친구에게 득(得)이 되는 사람이다.
나는 성장하면서도 싹싹함을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길래 평생 아내가, 자기에게 내가 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내가 하도 그러길래 한번은 내가 “결혼해서 사는 동안 내가 우연히, 또는 실수로라도 당신한테 잘한 적이 없었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아내는 단칼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처럼 초지일관(初志一貫), 완벽하게 잘못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요즘 아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큰 손녀로부터 “할아버지, 나한테 하는 절반만 할머니한테 해봐, 그럼 훌륭한 사람이라고 텔레비전에 나오게 될 거야”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아내를 포함한 타인에게 좀 더 싹싹하고 배려심 있는 언행(言行)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나도 상대방이 그리해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안 그러면 서운해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들 며느리가 ‘어떻게 지내세요’ 안부 전화해주면 기쁘고, 어쩌다 빵이라도 사다 주면 흐뭇해진다. 며칠 전 옥상에서 내려올 때 큰 손녀로부터 ”할아버지, 계단 조심해“소리를 들었을 때도 기분이 좋았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이런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렇다. 나도 이제 아내로부터 싹싹한 사람이라는 평을 한번 들어 봐야겠다. 친구들로부터 ‘너만 혼자 점수를 따면 우린 어떻하냐’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 친구보다는 아내이니, 앞으로 더 자주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해야겠다.
어차피 달리 살 방도(方途)도 없지 않은가?
2021-09-08 1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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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30> 지금은 오디션 시대
요즘 티브이에서 트로트 가수 오디션(audition)이 한창이다. 수많은 가수 지망생과 무명 가수들이 출전하는데, 그중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많다. 나는 그 중 김태연이라는 9살 먹은 소녀 가수에 흠뻑 빠져 있다. 솔직히 이들이, 이들을 심사하러 나와 있는 원로 가수들보다도 훨씬 노래를 잘 부르는 경우도 많다. 어떤 심사위원은 출전자가 자기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가수로 선발되는 사람은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문득 내가 현직 교수일 때가 생각난다. 조교수직 공채에 응모한 젊은 학자들의 공개 발표를 심사할 때마다, 과연 내가 저 사람들을 심사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옛날이니까 내가 교수가 되었지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겠구나 생각할 때도 많았다. 그런 오디션 같은 경쟁을 통과해야 교수로 채용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뽑힌 교수들의 실력이 예전과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동네에 있는 작은 음식점들이 코로나 때문에 연쇄적으로 문을 닫고 있어 걱정이다. 그런데 앞 동네에 있는 막국수 집은 코로나 이전보다 더 장사가 잘된다.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이다. 점심때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좀 늦게 가면 재료가 떨어졌다고 손님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여 맛이 없는 집과 맛집의 운명이 극명(克明)하게 갈리고 있다. 이제 음식점도 맛의 오디션을 통과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가(可)히 오디션 시대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무한경쟁이고, 그 결과로 실력자만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제 아마추어의 시대는 지나갔다. 프로페셔널, 즉 전문가만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력 배양에 목숨을 건다. 세대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요즘 젊은이와 어린이들을 보면, 어떻게 그런 높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지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는 우리 국민 특유의 경쟁적인 학구열 덕분일 것이다. 그 결과로 이제 젊은 학자, 신인 가수, 새로 연 식당 등이 소위 원로들을 밀어내고 있다. 자연스러운 귀결(歸結)이다. 오직 실력만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원로나 고참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당사자들은 힘들어졌지만, 젊은 학자들의 실력이 향상되고, 어린 신인 가수들이 노래를 잘 부르고, 새로운 맛집이 생기는 것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젊은 전문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 나라의 미래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지극히 희망적이다. 물론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전망(展望)이다.
이쯤에서 우리 같은 소위 ‘어르신’ 세대의 역할을 한번 생각해 본다. 어르신들은 자고(自古)로 젊은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못 미더워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공자님도 당신의 시대를 말세(末世)라고 했단다. 어르신의 또 다른 특징은 나라 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자기 경험에서 우러난 걱정이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를 노파심(老婆心)이라고 폄하(貶下)한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이다.
2세 경영자들은 대체로 창업주의 간섭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제발 자기를 믿고 맡겨 달라고 호소한다. 실제로 창업주의 전적인 신뢰와 위임 덕분에 회사를 크게 발전시킨 2세도 적지 않다. 창업주가 골프에 전념해야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마치 대장간의 쇠처럼, 오디션이라는 담금질을 통해 단련되었다. 그들의 전문 지식과 능력이 어르신 못지않은 분야가 많다. 그러니 이제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조국의 앞날을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세월이 흐르니 안 맡길 도리도 없다.
이 지점에서 젊은 세대에게 하나 부탁한다. 주연(主演) 자리를 넘겨받았으니, 범사(凡事)에 어르신의 조언(助言)을 구하라는 것이다. 어르신들은 그걸 좋아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하지 않던가!
2021-08-25 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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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9> 약학사회지 4호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가 발행하는 ‘약학사회지’ 제4호가 지난 7월 12일 발간되었다. 생일인 3월 2일보다 4개월 정도 늦은 탄생이었다. 그래도 1~3호보다는 많이 빠르게 출간된 셈이다. 3호가 나오자마자 서두른 덕분이다. 이번 4호는 논문(3편), 녹취록(3편),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 국내외 다른 학회지 게재 약학사 논문 소개, 회무 및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논문으로는 ’전문약사제도 법제화 의의와 발전 방향 및 병원 임상약학의 발전과정’ (이영희 아주대 병원약제부장), ‘서울대학교병원 약제부 업무와 교육의 역사: 1980년대 이후 변화사항 중심으로’ (조윤숙 서울대 병원약제부장 외 4인),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 약업자의 판매활동’ (손일선 도쿄대학 대학원 특별연구원)의 3편이 실렸다. 바쁜 가운데도 귀중한 논문을 써 주신 저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녹취록으로는 ‘효성여자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의 역사” (우미희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외 2인), ‘손동헌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1회 졸업생 및 명예교수의 월남과 약학 일생’ (약학사회지 편집팀), ‘한국전쟁으로 잃어버린 꿈: 송도약학대학 입학예정자 3인(윤영자, 김옥균, 손정자)의 구술채록’ (이영남, 주승재, 박주영 녹취)이 실렸다.
첫 번째 녹취록은 1953년에 효성여자대학교 약학과로 개교한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특히 녹취록을 싣는 기념으로 개교 당시 대명동 캠퍼스에서 교복을 입고 있는 약학과 1회 졸업생 5명의 사진을 이번호의 표지에 실었다.
두 번째 녹취록은 지난 6월 15일 갑자기 소천하신 손동헌 교수님의 월남과 약학인생에 관한 것이다. 이 녹취는 약학사분과학회의 주력사업 중 하나인 ‘약계 원로 구술사 정리’의 첫 순서로, 2020년 7월 28일 1차 녹취 뒤 2021년 1월 22일 및 2월 18일에 다시 손교수님과 만나 2회에 걸친 보완 작업을 하였다.
손 교수님은 이 녹취 과정에 매우 정열적으로 협조해 주셨다. 약학사회지 편집위원회는 녹취록 끝에 QR코드를 실음으로써 누구든지 휴대전화를 갖다 대면 인터뷰 당시의 손교수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송구스럽게도 손 교수님은 녹취가 끝났을 때 거금(200만원)을 약학사분과학회에 희사해 주셨다.
녹취에는 정기화, 손의동, 주승재 교수님과 필자가 함께 하였다. 손 교수님은 몇 시간에 걸친 녹취에도 불구하고 전혀 피로의 기색 없이 건강이 넘치셨다. 최근 손 교수님을 황망히 보내 드리고 나니, 그때 녹취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 작은 위로를 느낀다. 아울러 약계 원로들에 대한 녹취를 서둘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녹취를 할 때 호암교수회관에서 객실 사용, 식사 및 음료 다과 제공 등의 제반 편의를 제공해 주신 서울대 약대 오유경 교수 (당시 호암교수회관 관장)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린다.
세 번째 녹취록은 1950년 개성에 신설된 송도(松都)약학대학에 합격하였으나 개교일인 6월 26일을 하루 앞두고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 입학이 무산된 ‘입학예정자 3인’에 관한 것이다. 녹취는 이영남, 주승재 교수님이 2020년 7월과 11월에 세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다. 하마터면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기쁘다.
송도약학대학 이야기는 필자가 ‘서울대약대100년사’에 정리해 놓은 바가 있는데, 그 후 2019년 10월 29일 인천에 있는 송도 중고등학교를 방문하여 그 학교가 바로 송도약학대학을 신설했던 학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약창춘추 289 참조).
‘약학사 관련 도서 소개’에서는 ‘약국에는 없는 의약품 이야기’, ‘우아한 방어, ‘약의 역사’, ‘감염의 전장에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제학연구실 70년사’와 ‘24시간 국민 곁을 지켰던 약사들의 137일간의 기록’을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약학사 관련 논문 소개도 매우 흥미롭고 유익하다.
독자 제현의 약학사회지 일독을 권고드린다.
2021-08-11 1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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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8> 느림의 미학: 나잇값
어머니세요?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는 ‘마리아 상사’라는 분이 있었다. “이누무 OO들 말이야, 말을 들어 먹지 않고 말이야” 식으로 말끝마다 ‘말이야’를 붙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마리아’라는 별명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사병들에게 엄청 무서운 상사였다. 휴가를 마친 사병들이 귀대할 땐 대개 그의 집에 들러 조그만 선물(뇌물)을 바치고 들어와야 마음이 편해질 정도였다. 그의 집은 선물 받기에 편리하게 부대 철조망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1973년인가 나도 정기 휴가를 다녀오면서 조그만 떡 보따리를 하나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저녁나절이었다. 마리아 상사가 들어오라고 해서 어둑어둑한 방으로 들어갔는데, 조금 앉아 있자니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그만 밥상을 들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머님 되십니까?” 인사를 하였다. 그건 대단히 예절 바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마리아 상사가 “아냐, 우리 마누라야”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난 이제 죽었구나’ 하는 낭패감이 엄습하였다. 부인을 어머니냐고 묻다니!!!! 내가 싸~한 분위기의 그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지금껏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 나는 ‘한 박자 천천히 반응하자’를 생활의 모토로 삼게 되었다.
결혼해야지?
오래간만에 제자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각별한 친근감을 표시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한번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그런 마음으로 “너 결혼 해야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자 왈 “지난번에 딸 낳았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괜히 친근감을 보이려다 망했구나 하는 민망함을 느꼈다. 또 한번은 우연히 만난 제자가 “교수님, 저 어디 다니는지 또 모르시죠?” 하는 것이 아닌가. 약대 교수들은 제자를 만나면 “너 요새 어디 다니냐?”고 묻는 습관이 있다. 약대 졸업생들이 특히 회사를 잘 옮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따로 물어볼 말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공격성 질문을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마 내가 과거에도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사실 교수들은 제자가 어디 다니고 있다고 대답을 해도 건성으로 듣기 때문에 그 대답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수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이후 나는 제자들에게 ‘어디 다니냐’고 묻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공연히 물었다가 다음번 만났을 때 공연히 제자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까 두렵기 때문이다. 기억 못 할 일은 아예 묻지도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친구가 병아리 개업 약사 시절에 경험한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이다. 하루는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약국에 들어섰다. 아이가 매우 아파서 약을 지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아니 아이가 이렇게 아플 때까지 왜 가만 계셨어요?’ 하며 아주머니를 나무랐다. 그랬더니 아주머니 왈 “얘는 하나도 안 아픈 애예요, 아픈 애는 집에 있는데요.”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친구는 ‘망했구나’ 싶었다고 한다. 민망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상대방이 다 말해 주게 되어 있다. 괜히 성급하게 먼저 아는 척하다가 망신을 당하지 말자.’
그 교훈 덕분이었을까? 그 친구는 약국으로 성공해서 노년을 잘 지내고 있다.
에필로그
나이가 들수록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 장모님은 이는 나이가 들수록 덜 보고 덜 들으라는 창조주의 섭리라고 하셨다. 나이가 들면 몸의 동작도 느려진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차에서 너무 느리게 내리셔서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내 동작이 그렇게 되었다. 느려지는 것도 장모님 말씀대로 창조주의 섭리라고 생각해 본다.
점잖은 사람, 즉 결코 젊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이 보고 듣고, 너무 빨리 반응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내가 바로 그렇다. 그래서 틈틈이 다짐해 본다. ‘덜 보고 덜 듣고,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자’. 혹시 이게 나잇값 하며 사는 방법은 아닐까?
2021-07-28 1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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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27> 진정한 소통의 기술, 감동
초등학교 때 친했던 영수와 철수가 오랜만에 만났다. 그동안 영수는 서울의 일류 대학을 졸업했지만 철수는 중학교에도 가보지 못하였다. 둘은 반가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문득 철수가 물었다. “영수야, 뉴스에서 시크릿이라고 나오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영어를 배웠을 테니까 좀 가르쳐 주라”, 그러자 영수가 대답하였다. “철수야, 그건 비밀이야, 비밀”. 그러자 철수는 약간 기분이 나빠져 이렇게 말했다. “얌마, 그게 무슨 비밀이냐?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줘!”. 그랬는데도 영수는 다시 “야, 정말 비밀이라니까 그러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철수는 “너 정말 이렇게 나올래? 내가 중학교도 못 다녔다고 무시하는 거냐?”. 결국 영수와 철수는 시크릿(secret) 때문에 대판 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시크릿이다.
미국의 부잣집 청년이 최고급 스포츠카를 뽑은 기념으로 시골길을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옆을 보니 수탉 하나가 감히 자기 차를 추월해 달리는 것이 아닌가? 살짝 기분이 상한 청년은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랬더니 수탉도 속도를 내서 더 멀리 앞서 달리는 바람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엑셀러레이터를 최고로 세게 밟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시골 수탉에게 모욕을 당한 청년은 마을로 들어 가 그 닭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대뜸 그 닭을 자신에게 팔라고 하였다. 값을 비싸게 처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닭 주인은 다른 닭은 몰라도 그 닭만큼은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100만원을 줄 테니 닭을 내 놓으라’고 했다. 그래도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청년은 닭 주인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별 수 없이 ‘그럼 달라는 대로 줄 테니 팔라’고까지 했다. 그래도 주인은 요지부동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청년은 ‘도대체 왜 안 파는 거냐?’고 씩씩거리며 따졌다. 그러자 닭주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에휴, 나도 팔고야 싶지요, 근데 도대체 잡을 수가 있어야 팔든지 말든지 하지요” 하는 것이었다. 아하, 그랬구나! 청년은 지금도 그 닭을 사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을 때 신랑의 어머니가 시동생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 아이의 취직 등 여러가지로 돌봐 주셔서 정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시동생에게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옆자리에 앉은 손아래 동서에게도 같은 인사를 하였다. 그 테이블에 있던 주례와 하객 두 세명이 보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위의 세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철수와 영수는 사실 둘 다 아무 잘못이 없지만 말 하는 기술이 모자라 오해를 하게 되었다. 잘못이 없어도 싸움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청년은 수탉 주인이 닭을 비싸게 팔 욕심으로 ‘안 판다’고 고집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닭 주인의 한숨 섞인 대답을 듣고는 금방 상황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성급하게 화부터 낸 것에 민망함을 느꼈다. 가짜 뉴스에 성급히 분개하거나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성급한 반응, 특히 젊지 않은 사람의 성급한 반응은 좀 추해 보인다. 한발짝 느린 반응이 점잖아 보이는 요즘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와 차원이 다른 실화(實話)이다. 이 해프닝을 통하여 우선 시동생이 조카를 정말 잘 보살펴 주었구나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시동생의 선행이 감동적이다. 다음으로 남들 앞에서 손아래 사람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형수님도 감동이다. 아무리 시동생 내외가 잘 보살펴 주었더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기란 용기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이 인사로 형수와 시동생 집안 간에 아름다운 소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감동은 말하는 기술이나 성격의 완급과는 차원이 다른 탁월한 소통 수단이 된다. 문득 감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2021-07-14 14: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