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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6> 세월이 약이겠지요
가수 송대관 씨가 부른 ‘세월이 약(藥)이겠지요’라는 노래가 있다. 몸과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지나야 회복되는데, 세월은 유수(流水)처럼 또는 화살처럼 빨리 흐르니 좀 참고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세월의 속도는 연령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젊어서는 느리게 지나갔던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은 20대에는 시속 20킬로로 지나가고 60대에는 시속 60킬로로 지나간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나이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소풍이나 방학 날을 기다리기가 몹시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그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릴 때는 방학도 무척 길었던 것 같다. 내가 일생 중 정말 시간이 안 가서 지루해 미칠 뻔 했던 것은 1971년 군대에 갓 들어 갔을 때이었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기성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제대 말년(末年) 고참병(古參兵)들이 내게 말하였다. “야, 너 제대하려면 얼마 남았냐? 군대 생활 무지 고되거든. 그래서 말인데 웬만하면 탈영해라” 고. 사실 그들도 지루함을 잊기 위해 나 같은 후임 병(後任 兵)들을 놀리는 것이었다.
고참들의 놀림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간은 지루함 그 자체이었다. 그 때 내무반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 달력에는 내가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가 되어 다시 걸린 새 달력 12장과, 그리고 또 그 다음해의 달력 12장도, 달랑 내 휴가일 외에는, 역시 내게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아, 그 지독한 무료 (無聊)함이란! 세월이 약이라면 그 때의 세월은 매우 오랫동안 먹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약이었던 셈이다.
그 다음해인 1974년, 그 해 달력에는 드디어 내가 제대하는 날이 들어 있었다. 마침내 달력이 비로소 나와 상관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는 달력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제대할 날을 크게 동그라미를 쳐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며칠 남았나’를 세어 보곤 하였다.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는 ‘우리 제대까지 라면 몇 그릇 남았지?’ 하면서 희망을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군대의 매주 일요일 점심 메뉴는 라면이었다. 그래서 ‘제대까지 라면 열 그릇 남았다’고 하면, 이제 10주가 지나면 제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70일보다 열 그릇이 덜 길게 느껴지기 때문에 ‘라면 그릇 수’로 제대 날을 손꼽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훗날 내가 교수가 되어 보니 어느새 세월이 많이 빨라져 있었다. 어렸을 때와 달리 눈 깜작 할 사이에 방학이 지나버리는 것이었다. 요즘은 세월이 더 빨라진 느낌이다. 올해도 어느새 3월이란다. 나는 때때로 내가 어렸을 적 세월보다 요즘의 세월이 실제로 더 빨리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혹시 예전보다 지구의 자전(自轉) 속도가 빨라진 것은 아닐까?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외에 누가 절대시간을 완벽하게 알 것인가?
얼마 전 티브이에서 김종필 전 총리가 ‘내가 이제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 과정 중 병(病)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를 보니 세월이란 ‘생로병사’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연세가 고령이신 분들도 과연 ‘세월을 약’이라고 생각하실지 문득 궁금해진다.
기독교에서는 믿는 사람이 죽으면 본향(本鄕)인 천국으로 돌아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발인(發靷) 의식을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歸去)’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죽으면 어디로 돌아 간다는 말일까?
어쨌거나 세월의 끝에 ‘본향으로의 돌아감, 즉 귀향(歸鄕)’이 기다리고 있다면, 세월이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완벽한 약’이 아닐까 한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2014-03-12 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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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5> 버킷 리스트
몇 년 전 교회에서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란 영화를 보았다. 우연히 같은 병실을 쓰게 된 늙은 두 남자는 죽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동안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일’, 즉 자신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 있는 일들을 해 보기 위해 병원을 뛰쳐나가 여행길에 오른다.
멋진 사냥하기, 문신해 보기, 카레이싱,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 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을 해 보면서 리스트를 지워나가기도 하고 추가해 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두 사람은 인생의 기쁨과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대사 중에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는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후행로(死後行路, 천국 또는 지옥)가 결정된다는 이집트 속담이 소개되기도 한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두 사람이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아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사랑만큼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 아니었나 한다.
최근 미국 포틀랜드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K 목사님의 설교를 서울에서 들으며, 문득 내 버킷 리스트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생각해 보았다. 며칠 전 나는 온열(溫熱) 매트 한 개와 카메라 한대를 샀는데, 이것들을 사기로 마음 먹고 기다린 일주일이 매우 행복하였다. 그것은 결코 물건 자체에 대한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매트는 허리 아픈 데에, 카메라는 인증 샷 찍는데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보다는 오래간만에 ‘무언가 사고 싶은 게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이다. 사실 나는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새로운 버전의 휴대폰이나 카메라, 등이 발매되어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랬는데 최근 누군가의 유혹으로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긴 것이다.
내 버킷 리스트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니 우선 일본의 좋은 온천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 외에는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 일들이 꼬물꼬물 떠오른다.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지만 명예욕과 재물욕도 리스트에서 발견된다. 자식들로부터 효도도 받고 싶다.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도 듣고 싶다. 무엇이 가장 큰 글씨로 리스트에 쓰여 있나 자세히 살펴 보니, ‘육신의 건강과 평강 나아가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버킷 리스트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리스트를 둘러보니 모두 ‘노력은 하지 않고 편안하게 누리고 싶은 것뿐’ 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약간의 허무주의 내지는 우울증에 빠진다. 그래서일까? 서운한 일도, 삐칠 일도 많아진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는 않는지 예민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이 사람들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도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첫 성령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전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너는 내가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류를 위해 십자가마저 감당하실 수 있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것은 삶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지식이나 이성은, 사랑에 비하면, 쓰레기처럼 초라해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사랑은 종종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그 힘이 위대하다.
세상에서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랑 결핍증 환자들’에게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 확신할 수 있다면, 마치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버킷 리스트는 과연 무엇일까? K 목사님 설교가 계속 귀에 맴돈다.
2014-02-26 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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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4> 연구는 리-써치 (research)?
작년 8월 21일자 조선일보에 크게 게재된 바 있지만 서울약대는 전 세계 약대 중 교수 1인당 논문 발표 건수가 가장 많은 대학이다. 사실 서울약대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쭉 일등을 해 오고 있었다. 세계 1등이라!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내가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던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약학 논문이 국제 학술지에 실리는 일 자체가 꿈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 약학 연구 수준은 그 정도로 형편 없었던 것이다.
1979년 동경대학 박사 과정에 유학을 가보니 동경대학에서는 이미 국제 잡지에 약학 논문을 많이 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당시에는 국제논문 게재가 매우 기쁜 일이었다. ‘제제학 교실’에서는 연말이 되면 대학원생 1명이 사용한 연구비와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수를 표로 만들어 공개를 할 정도이었다.
그 때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연구 논문을 ‘impact factor (IF)’를 가지고 평가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제법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한 학술지 평가 회사가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의 영향력을 비교하기 위하여 IF란 지표(指標)를 개발한 이후 상황이 급변하였다. IF는 학술지에 발표된 어떤 논문이 얼마나 많은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인용되었는가를 세어 봄으로써 그 학술지의 영향력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다. 학술지에 따라 IF의 값은 1 이하에서부터 20 이상에 이르기 까지 큰 편차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까지는 그저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수를 가지고 연구자의 연구 역량을 평가하였다. 소위 양적(量的) 평가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IF를 가지고 논문을 평가하게 되었다. 소위 질적(質的) 평가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예컨대 IF 2인 학술지에 논문을 5편 게재한 것 보다 IF 10인 학술지에 논문 1편을 게재한 것을 더 알아주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물론 IF로 논문의 질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 되었다. 연구자 집단이 작은 분야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이를 인용하는 연구자 수가 적기 때문에 자연 그런 학술지의 IF는 아무리 논문의 질이 높더라도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IF의 단점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도 끊임없이 개발 제안되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논문의 양보다 질로 연구자를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고, 더구나 논문의 질도 숫자로 정량화(定量化) 하는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IF가 높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논문을 쓰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 ‘연구의 속성(屬性)’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연구를 영어로는 “리-써치 (re-search)”라고 하는데 이는 누군가가 한번 이상 뒤졌던 (search) 주제를 ‘다시 뒤지는 일 (re-search)’이 연구란 뜻이다. 그렇다면 연구자란 ‘넝마주이’처럼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뒤지는 일’이 ‘연구’라면 연구를 통해 정말 새롭고 쓸만한 발견을 하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왜 남들이 이미 뒤졌던 주제를 리-써치 (다시 뒤지기) 하는가? 그것은 논문을 빨리 쓰라고 강요하는 주변의 끊임없는 압력의 때문이다. 그 압력은 때로는 승진(昇進)으로, 때로는 연구비로 나타난다. 심지어 연구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신설 약대마저 교수보고 논문을 내라고 들볶는다. 이제 논문을 쓰지 않는 과학자는 사라지게 되는 (Publish or Perish)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다못해 찌그러진 깡통 하나라도 찾아낼 가능성이 있는 쓰레기더미를 리-써치 할 수 밖에.
나는 우리나라의 약학 논문이 조만간 그 질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먼저 지나치게 논문 쓰기를 채근하는 연구분위기부터 바뀌어야 한다. 입춘(立春)이 지났으니 날씨도 곧 따듯해지지 않겠는가?
2014-02-12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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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3> 시큰둥하게 맞이했다간 큰일
최근 어떤 노총각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 친구 (여친)와 부모 허락 하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 온 후 여친 집에 정식으로 인사를 갔더니, 돌연 여친의 부모가 이것 저것 심문하듯 캐 묻더란다. 그리고 며칠 후, 결국 여친으로부터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 세대로서는 아연실색 (啞然失色)할 이야기이다.
문득 아내를 처음 우리 부모님께 인사 드렸을 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속으로는 며느리 감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결혼은 중대사이니 신중하게 생각해라” 라고 조금은 유보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아마 우선은 시아버지의 체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며느리 감이 마음에 들어도 시아버지가 대놓고 ‘좋다’고 하기는 좀 ‘거시기’ 한 것이 우리네 체면 아닌가? 게다가 좀 더 잘난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당시의 아버지로서는 적당한 반응을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모는 결코 그런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 (持論)이다. 오늘날의 부모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우선 부모들은 그 자리가 며느리 (사위)감을 보고 자기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갑 (甲)의 자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건 아주 옛날 고리짝 이야기이다.
애들이 인사를 왔다면 이미 그들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이다. 요즘같이 결혼하기 어려운 시대에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런데 거기다 대고 감히 며느리 감이 어떠니 저떠니 함부로 (?) 부모 의견을 말해?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후의 일을 한번 미리 예상해 보자.
(경우 1) 부모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성사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천만 다행이긴 하지만, 부모는 자기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60대 할머니를 만났더니, 옛날에 자기가 첫 인사를 드렸을 때 시어머니 자리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는데, 그 생각만 하면 다 늙은 지금에 와서도 팔순 시어머니한테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식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어짜피 결혼을 시킬 요량이면 공연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후환 (며느리의 박대)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경우 2)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 때에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요즘같이 결혼하기 어려운 시대에 언제 새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까닥하면 내 자식이 끝내 결혼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못난 자식은 부모에 대한 반발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으려 들기도 한다. 이 경우 부모는 자식이 결혼하지 못한 (또는 안 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된다.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혹시 운 좋게 새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경우에도, 처음 데리고 왔던 사람보다 부모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확률은 별로 높지 않다. 심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듯 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수도 있다.
(결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결혼의 성사 여부에 관계없이 부모가 첫 인사 온 며느리 (사위)감에게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아주 간단 명료하다. 보자마자 “아이구 이처럼 훌륭한 배우자 감을 데리고 나타나다니 내가 정말 복이 많구나.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열렬히 환영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선 보는 자리는 어찌 보면 부모가 사위 (며느리) 감에게 인사를 드리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부모는 을 (乙)이다. 부모는 내 자식이 누구를 데리고 나타나더라도 오직 ‘열렬히’ 환영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따야 한다. 그래야 여생 (餘生)이 순탄하다. 1인자에게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가 큰 화를 당한 북한의 누구처럼 되지 않으려면,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을인 부모는 갑인 아들 딸을 오직 “열렬히 환영” 하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 어쩌다 세상이 이리 되었나’ 하는 개탄은 자식들을 다 결혼 시킨 후 천천히 해도 결코 늦지 않다.
2014-01-29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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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2> 근하신년
지난 한해도 그야말로 다사다난, 즉 기쁜 일과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다시 이렇게 무사하게 새해를 맞게 되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믿는다.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 더 많았다. 우선 지난해 여름 학교를 정년퇴직하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5월 16일에 직장암 3기로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정년퇴직’이라는 것은 꿈만 같은 신기루였는데, 그 꿈이 작년 8월말에 실현된 것이다. 그야말로 “dreams come true”였다. 게다가 나는 제자들이 마련해 준 거창한 정년 기념연을 받기까지 했다. 기념연에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정년을 맞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고 인사말을 했는데, 솔직한 내 마음의 표현이었다.
정년 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전혀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내 인생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앞으로의 인생에도 은혜가 함께 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작년 9월부터 모 회사에 고문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능력이 부족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최선을 다 해 조금이라도 회사에 도움이 되도록 기도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 교회의 금년도 표어는 “은혜 (恩惠)와 진리 (眞理)”이다.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그 균형은 은혜와 진리가 50%씩을 차지하는 균형이 아니라, 각각이 100% 이면서 이루는 균형이라야 한단다. 은혜란 무엇일까? 아마도 죄인 또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진리란 무엇일까? 목사님은 옳은 것을 추구하는 의(義)라고 설명하였다.
은혜는 사랑이니까 참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의 모든 죄를 무조건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하나님께서 대신 감당해 주시는 것이라 한다. 자라는 아이의 잘못을 무조건 눈감고 용서하면 아이는 삐뚜로 자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고 은혜도 아니다. 아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무엇이 옳은 일인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는 진리보다 오피니언 (opinion)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고 한다. 과학자라면 과학적 진리에 그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기 쉽지 않고, 어렵사리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 진리를 남에게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피니언이라는 미명 (美名)하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주장이 진리를 대신하게 방치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은 종종 여론을 오도 (誤導)하고 있지 않은가?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오피니언은 많은 경우 우리를 불편하게 구속한다.
2014-01-15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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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1> 走馬看藥- 달리는 말 위에서 약을 보다
지난 11월에는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KASBP(재미한인약학자협회, 15-16일)에 이어,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스기야마 특별연구실 (29일)에 다녀 왔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 두 가지를 소개한다.1. 신약개발 비용이 9년마다 2배로 늘어났다. KASBP에서의 한 발표에 의하면 1950~2010년까지 신약개발에 소요되는 비용(물가 보정 후)이 매 9년마다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동안 조합화학 발전에 의해 케미칼 라이브러리가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DNA시퀀싱에 의해 새로운 타겟이 발견되었으며, X-레이 크리스탈로그래피 발전으로 인해 타겟의 구조 결정 능력이 50년 전보다 1,000배나 빨라졌고,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가 25년 전에 비해 300배 늘어 났으며, HTS에 의해 타겟 테스트 비용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컴퓨터를 이용한 약물 설계, 검색 기술 및 유전변형 마우스 기술)이 발명되고 질병에 관한 지식(질병 기전, 새로운 약물 타겟, 바이오마커 등에 대한)이 진보한 사실을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마 이는 1960년대의 탈리도마이드 비극 이후,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 수준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일 것이다. 1987~2011년까지의 25년간 FDA가 승인한 신물질 신약(NME, new molecular entity)은 first-in-class, advance-in-class 및 addition-to-class를 모두 합쳐 645개이다. 흥미로운 것은 매년 승인되는 신약의 개수는 줄고 있지만 first-in-class 신약 갯수는 매년 8개로 일정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전체 신약 중 first-in-class 신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1987~2001년까지의 15년간에는 27%를 차지했으나 2002~2011년까지 10년간에는 39%를 차지하였다. 신물질 신약의 55%는 미국의 25개 큰 제약회사가 개발한 것이지만, 나머지45%는 작은 회사들이 개발한 것이다. 작은 회사들이 개발한 신물질 신약은 first-in-class 신약의 53%나 차지하였다. 작은 회사 파이팅! 글로벌화를 시도하는 우리나라 제약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였다.
2. 모델링과 시뮬레이션이 중요하다일본약학회의 의약화학부회가 발간하는 Medichem News(23, May 2013)의 표지에는 나의 35년 지기(知己)인 스기야마 박사의 연구 주제가 소개되어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요즘 미국 FDA를 중심으로, 생리학적약물속도론 모델(PBPK모델)을 사용하여 약물동태를 예측하고, 이로부터 임상시험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거나, 투여량을 설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 모델은 약물간 상호작용, 노인, 어린이, 신장해시 또는 간장해시의 약물동태 및 약효를 예측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 사실 신약개발 시 다양한 환자 측의 인자 모두를 반영한 임상시험을 하라고 하면, 신약개발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기법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PBPK 모델은 이미 50년 전에 미국의 연구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로, 인체에 투여된 의약품이 약효와 부작용을 나타내는 조직에 이행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생리해부학적 파라미터(조직부피, 혈류 등)와 생화학적 파라미터(혈중 및 조직 중의 단백과의 결합성, 생체막 투과성, 약물transporter 및 대사효소와 약물간의 상호작용 등)를 사용하여, 연립미분방정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식에 “약의 투여량, 투여빈도, 투여경로”와 “환자의 병태, 생리적 상태(나이, 성, 간과 신장의 기능)” 정보를 입력하면, “약물의 혈중농도 및 조직중농도 추이”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모델은 장차 약물상호작용을 피할 수 있는 의약품, 개체차 및 병태에 의한 영향을 덜 받는 의약품, 치료역이 넓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언제나처럼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주었다.
2013-12-24 1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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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0> “약학사 분과학회’ 신설을 꿈꾸며
우선 2013년 11월 30일부로 약교협에 제출할 ‘한국약학사’의 머리말로 내가 쓴 글의 일부분을 이하에 옮긴다.
“2012년 11월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이하, 약교협)로부터 ‘한국약학사’의 발간을 위한 집필 작업을 주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에 만용(蠻勇)이지만 맡기로 결심하였다. 감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고 김신근 교수님이 저술하신 ‘한국의약사(韓國醫藥史)’(2001, 서울대학교 출판부), 본인이 발표한 ‘한국약학사(약학회지, Vol. 51, No 6, 2007)’란 논문, 그리고 대한민국학술원이 발간한 ‘한국의 학술연구-약학편’(2008) 등과 같은 몇 가지 선행연구(先行硏究) 결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들어 가 보니 우선 ‘약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과 만나게 되었다. 결국, 약학을 좁은 의미(狹義), 즉 약학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연구만으로 정의하는 것 보다는, 제약기업에서의 신약개발 연구는 물론, 약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기술 및 연구를 전부 포함하는 넓은 의미(廣義)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약학의 범위를 이처럼 넓게 잡고 보니, 기존의 선행연구 결과물에만 의지해서는 도저히 책을 만들 수 없었다. 대부분의 선행연구는 신약개발이나 제약산업을 부실하게 다루는 등 그 관심 범위가 이 책의 범위보다 좁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책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제약산업과 신약개발 관련 역사를 집필해 줄 수 있는 탁월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광의(廣義)의 우리나라 약학사를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책의 내용을 크게, 단군신화에서 현대 약학까지의 의약제도 (제1장),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 (제2장), 한국약업 100년 (제3장), 신약개발 연구 동향 및 전망 (제4장)의 4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3장과 4장에는 각각 ‘한국제약기술발달사’와 ‘신약개발사’를 첨부하였다. (중략)
아무쪼록 이 책이 앞으로 우리나라 약학사 연구에 귀중한 받침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으로 ‘한국약학사’의 발간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업을 후원해 주신 약교협(당시 이사장, 김대경 중앙대 교수)의 결단에 감사드린다.”
이상이다. 이 책은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지만, 우리나라 약학사 전반을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점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고 자부해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약학의 역사를 어찌 달랑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앞으로 더욱 내용이 충실해진 약학사 책이 속속 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아무래도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한국약학사 학회’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1972년에 고 홍문화 교수님이 ‘약사학(藥史學)연구회’(약춘 44 참조)의 발족을 시도하였으나 이 연구회는 사실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났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분야를 방치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 끝에 ‘한국약학사학회’를 만드는 대신, 대한약학회 안에 ‘약학사분과학회(藥學史 分科學會)’를 신설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도로 학회를 창립하는 것보다 비용이나 행정 업무 면에서 훨씬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분과학회의 신설을 추진하려고 한다. 뜻있는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 드린다.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약대 내에 ‘약학사’를 전공하는 연구실과 교수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전공 교수들의 평생을 통한 연구가 있을 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약학사 정리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아마추어 역사가들에게 약학사의 겉핥기를 시키고 있을 것인가?
약학사 뿐만이 아니다. 약대 내에 약사법규나 사회약학 같은 다양한 드라이랩들(약춘 110)이 설치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약학은 사회와 정상적인 소통(疏通)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한다.
2013-12-04 1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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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9> ‘창약과학의 매력’의 번역판을 내면서
나는 2012년 3월에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을 통하여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신약개발의 전모(全貌)를 고등학생이나 일반인 눈높이에서 설명하고자 저술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약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신약개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책이었다. 이 방면에 관한 전문 서적이 워낙 없었던 탓인지 이 번역판은 연달아 3쇄를 찍을 정도로 독자들의 호평(好評)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신약개발에 관한 입문서(入門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신약개발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 하였다. 그러던 차에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창약과학(創藥科學)의 매력’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먼저 책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채워 주기에 충분한 수준의 책이었다. 즉시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한 20여명의 국내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아마 내년 1월 초이면 이 책의 번역판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 쓴 머리말을 이하에 소개하기로 한다.“우리나라 제약회사는 그 동안 약 20개의 신약개발에 성공한 경험을 갖고 있다. 아직 소위 블록버스터 급 신약개발에 성공한 경험이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제 신약개발은 많은 국내 제약회사가 도전하고 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과제(課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약개발 러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러한 시점(時点)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떤 연구를, 언제, 어떤 순서로, 또 어느 수준으로 수행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신약개발 지도자 (Decision Maker)가 아닐까 한다. 유능한 지도자 없이는 리스크가 큰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개발 지도자가 되려면 우선 신약개발의 전모(全貌)를 균형 있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약개발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을 배울 길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그 동안 우리의 아쉬움이었다. 물론 약학대학 등에 신약개발지도자 과정 같은 교육과정이 개설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그 내용은 체계가 잘 잡혀있지 못 하거나 때로는 개론(槪論) 정도의 수준에 머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하여 효율적인 의사 결정 능력을 갖춘 신약개발 지도자의 양성은, 뜨거운 국내의 신약개발 열기에 비추어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다.그런데 마침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신약개발의 전모를 높은 수준에서 설명해 주는 책이 발간되었다. 원저의 편집자인 스기야마(杉山) 교수로부터 이 책을 소개 받은 번역진은 바로 이 책이 유능한 신약개발 연구자들을 양성하는 좋은 교재(敎材)가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에 즉시 동경대약우회(동경대학 대학원에서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모임, 회장: 이은방)를 주축으로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 책의 번역에 착수 하였다. 모든 번역자들은 완벽한 번역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 특히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은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1차 번역된 원고를 수차에 걸쳐 교정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마치고 보니 용어나 체제가 제대로 통일되지 않았고, 색인도 없는 등 미비한 점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사실 이와 같은 미비점은 원저(原著)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점이었다. 그래서 편집위원들은 ‘원 저자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싸이언스 자체만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 번역을 마무리하였지만, 아무튼 독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부탁드린다.아무쪼록 이 책이 우리나라 신약개발 연구자들, 약학대학을 비롯한 많은 대학의 교수 및 대학원생들, 그리고 신약개발 정책을 담당하는 전문가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3-11-20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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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8> 뭘 나까지 찍어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진하면 당연히 흑백 사진이었다. 1970년 봄, 제주도로 단체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한 장이 평생 처음으로 찍어본 유일한 칼라사진(당시는 총천연색 사진이라고 부름)이었다. 칼라사진은 필름이나 인화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기념으로 한 장 밖에 찍을 수 없었다. 사실 당시는 흑백사진도 아무나 찍을 수 없었다.
카메라(당시는 사진기라고 부름)는 일반 서민들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싼 사치품이었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는 밥술이나 먹는 집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카메라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부자로 사시는 이모부 댁에 카메라를 빌리러 갔다. 이모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카메라(아마 ‘캐논’)를 내 주셨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귀중한 물건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그러나 그 때는 그런 무례가 예사(例事)로 있던 시절이었다. 이모는 내가 그걸 고장을 내거나 잃어버릴까 봐 내심 불안하셨을 것이다.
내가 결혼한 1975년 전후(前後)에는 신혼 부부 집에 놀러 가면 사진 앨범부터 내놓는 것이 관례이었다. 신혼 부부가 열심히 사진 설명을 하면, 방문한 사람은 흥미가 없더라도 예의상 “멋지다, 예쁘게 나왔다” 같은 호의적 감탄사를 적당히 섞어가며 앨범을 ‘봐 주어야만’ 하였다. 1979년 동경 유학 시절, 일본인 부부 집을 방문하였다가 혼이 난 생각이 난다. 일본인 부부는 자기들이 유럽여행 중에 찍은 8미리 영화를 보여주었다. 방의 불까지 끄고 1시간 가량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동영상을 보느라 좀이 쑤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당시는 비디오 카메라나 8미리 촬영기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로망이었다.
세월이 흘러 필름이 필요 없는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자 사진을 무한대로 찍어도 돈이 들지 않게 되었다. 또 흑백사진이냐 칼라사진이냐 하는 말이 사라질 정도로 사진하면 당연히 칼라사진을 의미하게 되었다. 누르기만 하면 찍히는 자동카메라가 등장하고부터는 사진을 찍는데 아무런 기술이 필요 없게 되었다.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도 예전에 비해 엄청 줄어들었고, 덩달아 카메라 가격도 엄청 싸졌다. 막말로 이제는 개나 소나 마구 사진을 찍어댈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래저래 칼라사진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고 보니, 그에 따라 사진의 존귀함도 덩달아 땅에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번거롭게 사진을 인화해서 보지도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수많은 사진(영상)을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감상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사진이 지천(至賤)으로 넘쳐나다 보니 이제는 신혼 부부 집에 놀러 가도 사진 앨범을 내놓지 않는다. 해외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도, 또 보려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아들 며느리조차 부모님의 해외 여행 사진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가끔은 “좋은 구경 많이 하셨어요?” 하면서 사진 몇 장이라도 보는 척 해 주면 좋을 텐데. 사진이 흔해진 만큼 우리는 더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이 흔해져서 인지 무조건 사진 찍히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특히 늙어가는 사람에 많다. 그 바람에 사진 찍는 시간만 길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에게 말한다. “얼른 찍히고 빨리 가자, 어차피 찍혀도 사진 안 줄 텐데 뭘 걱정해”. 그리고는 덧붙인다. “지금이 가장 젊을 때야, 나중에는 지금보다 더 늙을 테니까 차라리 지금 한 장 찍혀 주고 얼른 가자”
과거 결혼식장에 가면 예식이 끝나고 가족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가 앞에서 외치곤 하였다. “이모, 고모 사진 찍게 빨리 나오세요” 그러면 객석에 앉아 계시던 이모 고모 할머니는 “뭘 나까지 찍어”하며 사양하며 느릿느릿 나온다. 속으로는 불러주는 것을 고마워 하면서 말이다.
사진 찍히는 호강을 사양하며 좋아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사진 경시 풍조(?)는 살짝 씁쓸한 느낌이다. 아 옛날이여!
2013-11-06 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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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7> 착각 4제
1. 너나 잘 해라 - 자신을 생쥐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드디어 어느 날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병원 입구에서 병원 입구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의사가 이상해서 이유를 묻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 고양이가 있어서요.” 의사가 말했다. “당신은 이제 자신이 생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남자가 대답했다. “물론 나는 알죠. 하지만 고양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서요.” 이 이야기는 탈무드 동화책에서 본 내용이다. 우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지나치게 걱정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볼링을 처음 배울 때, 남들이 내 폼을 보고 웃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이내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롭게 되었다. 그냥 나만 잘 하면 되는 것이었다. 2. 잘못된 정보가 사람을 잡는다 – 한 남자가 검진 결과를 들으러 진찰실에 들어가보니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잠시 책상 위에 놓인 파일을 넘겨다 보니 ‘소근암’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소근암이라니…!” 그는 의사가 돌아오자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하였다. “선생님, 제가 소근암이지요?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의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근암은 제 이름인데요!” 이 이야기는 ‘엔도르핀 팡팡 유머집’이란 책에서 옮긴 내용이다. 내가 몇 년 전 병원에 가서 암이 재발하지 않았나 초음파 검사를 받았을 때, 결과를 영어로 녹음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내용은 어느 부위엔가 암 비슷한 것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담당 의사를 만나 검사 결과를 들어 보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앞의 환자에 대한 검사 결과를 들었던 모양이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엄청 고민했던 추억이 떠 오른다. 정보는 정확해야 한다!3. 조작된 여론은 여론이 아니다 – 한 동물원에서 사육사가 고깃덩이를 주기 위해 호랑이 우리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호랑이의 습격을 받았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때 한 사나이가 몽둥이를 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사나이는 용감하게 몽둥이를 휘둘러 호랑이를 물리치고는 재빨리 사육사를 어깨에 메고 나왔다. 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와 그 사람을 헹가래질하였다. 그 때 어디선가 신문기자가 달려와서 사나이의 신분을 물었다. 사나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나는 유대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조간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난폭한 유대인 깡패가 아무런 방어 도구도 없는 호랑이를 습격했다.”라고.매스컴과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은 가끔 국민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국민들이 자신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도록 계몽하려 든다. 마치 자신만이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착각이고 교만이다. 4. 오해하지마 – 한 남자가 새로 산 최신형 스포츠카를 타고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닭 한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이 차를 추월하여 달리는 것이었다. “아니! 감히 내 차를 앞서 달려?” 남자는 최대한 차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닭은 이 차를 따돌리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이런 닭이 있을 수 있나?’ 남자는 동네를 수소문해 이 닭의 주인을 찾아가 말 했다. “그 닭을 100만원에 파시오!”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1,000만원에 파시오!” 주인은 역시 안 된다고 하였다. 열 받은 남자는 “그럼 3,000만원에 내 차까지 줄 테니까 파시오!” 그래도 닭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남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물었다. “도대체 안 파는 이유가 뭐요?”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잡혀야 팔지요” 역시 같은 유머 책에서 본 내용인데, 사람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꼭 욕심이나 고집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힘있는 사람들은 여론에 밀리는 사람의 의견에도 세심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13-10-23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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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6> 아 옛날이여!
1974년 5월부터 다니기 시작한 Y약품에서의 약 3년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사장님에게 잘 보인 나는 평사원 시절에도 공장 간부들과 사장님이 만나는 간부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사장님이 특별히 나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기고만장 (氣高萬丈)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나는 시험과에서 P라고 하는 어린이용 앰피실린 드라이 시럽 (복용 시 물을 가해 흔들어 먹이는 분말형 시럽제) 중 앰피실린의 함량을 정량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한번은 분석하려고 물을 가해 실험대에 놓아 보니 기존 제품들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P시럽 고유의 핑크 빛이 엷어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라 즉시 상사에게 보고하였더니 회사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는 내게 얼른 변색(變色)의 원인을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 드라이 시럽제에는 약 20가지의 첨가제가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첨가제가 잘못 들어갔을까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색갈이 변색(탈색, 脫色)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환원제가 잘못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럽제의 원료를 칭량(秤量)하는 원료실을 방문해 보니, 첨가제 중의 하나인 쏘디움 설페이트(S) 통 옆에 환원제인 쏘디움 치오설페이트(TS) 통이 있는 것이었다. 정상적으로 P 시럽제에 가하는 첨가제는 S이었다. 순간 담당자의 착각으로 S 대신 TS를 가해 시럽제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실험실로 돌아와 S 대신에 TS 를 넣어 P 시럽을 조제한 다음 물을 가해 보았더니, 며칠 전에 발견했던 것과 똑 같은 탈색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원료실로 달려가 각 원료의 칭량 기록을 살펴 보았다. 예상대로 S 는 처방 보다 많이, 그리고 TS 는 처방보다 모자라게 남아 있었다. 이로써 탈색의 원인이 첨가제를 잘못 넣은 것임을 완벽하게 밝힐 수 있었다. 원료실 책임자는 나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무얼 어떻게 살려 줄 길이 없는 사고이었다. 다행히 P시럽을 조기(早期)에 회수하여 인명(人命) 사고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그 책임자를 살려 준 것일지도 모르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나는 GMP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그 후로 Y약품에서 유사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공 (功)으로 다음 해 연초에 ‘창의상(創意賞)’과 부상 10만원을 받았는데 10만원은 한 달치 봉급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다음 해에도 연거푸 이 상을 받았다. 두 해 모두 나 홀로 이 상을 받았으니 내가 얼마나 으쓱했겠는가? 그런데 회사 내의 시험과를 거쳐 연구과 주임으로 승진하면서 이런 저런 연구를 해 보니 어떻게 연구하는 것이 제대로 연구하는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예컨대 일본에서 수입하는 남천 (南天)을 가지고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어린이 감기약 시럽인 ‘남천 시럽’을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어떻게 주물럭거리다 보니 외관상으로는 제법 그럴듯한 시럽 모양을 만들 수 있었고, 당시 보건원으로부터 제품허가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선진국에서도 이렇게 주물럭거려서 제제(製劑)를 만드는지 매우 궁금하였다. 더구나 어린이가 먹을 시럽을 이렇게 대충 만들어도 되는지도 매우 걱정이 되었다. 회사 내에는 이런 의문에 대답을 해 줄만한 마땅한 선배가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 제제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원칙인가를 제대로 배우자. 그러려면 유학을 가서 이 방면의 박사 학위를 받자’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7년 회사를 떠나, 1979년 일본 유학 길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 나라 제약회사의 경영자는 지금도 소속 직원들의 잦은 이직(離職)을 막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잦은 이직은 자연 업무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혹시 이직률은 회사 내에 모방하고 싶은 롤 모델이 없을 때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 때는 젊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 옛날이여!
2013-10-10 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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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5> “사랑해” 밖에 난 몰라
소나 말, 개, 돼지 같은 짐승들의 새끼들은 대개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며 어미 젖을 먹다가 이내 엄마 품을 떠나 자립한다. 그러나 사람의 아기는 태어난 뒤 상당한 세월이 흘러도 자립하지 못한다. 성장해서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부모가 밥해 주고 빨래 해 주고 돈 대주지 않으면 자립하지 못한다. 심지어 결혼한 뒤에도 손주들을 돌봐 주지 않으면 못 살겠다고 부모들을 들볶는다. 오죽하면 “자식 AS는 영원하다”는 체념적인 ‘속담’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식을 돌볼 수 있을까? 혹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속담처럼 짐승들도 어느 정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구한 세월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정성으로 아기를 키우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런데 사실 사랑은 아기를 키울 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장하고 결혼해서 가족으로 늙어가면서도 부부를 포함한 가족 간에 사랑이 없으면, 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요컨대 사랑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 되게 결정 짓는 결정적 요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일생을 통하여 사람을 사랑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연인들에게 있어서 사랑하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했던 연인들도 부부로 살다 보면 서로 종종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부부는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결혼이고, 이를 선포하는 의식이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90%는 말이요, 행위는 10%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인생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느낌이다. 사랑도 90%는 말이 아닌가 한다. 즉 사랑을 잘 하려면 말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오늘은 사랑을 잘하기 위해 말을 잘하는 비결 (계명)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혹시 독자 중에 아직도 “부부간에 꼭 남사스럽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사랑해”라는 말을 직접 듣지 않으면 절대로 사랑하는 줄 모른다고 확신한다. 나는 여섯 살과 네 살 난 두 손녀딸에게 틈만 나면 “할아버지 사랑해”라고 말하도록 주입 교육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해” 소리를 들으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애들이 더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부부 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해” 소리를 주고 받아야 더 사랑스러운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혼부부만 보면 “여보, 사랑해” 소리를 입에 달고 살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평생 사랑하는 부부로 해로(偕老)하기 위한 첫 번째 계명이다.그러나 열 번 ‘사랑해’ 소리를 하다가 어쩌다 한번 상대방의 단점이나 결점을 솔직히 지적하는 ‘실수’를 하면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 간다는 무서운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대개 경험해 봐서 잘 알겠지만, 부부 간에 가장 나쁜 것이 ‘솔직한 지적질’이다. 상대방의 지적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을 고칠 수 있는 인격자는 고금(古今)을 통해 지구상에 없었다. ‘우측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하면 오히려 왼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보이다. 그러므로 ‘솔직한 지적’을 하고 싶어지더라도 이를 꽉 물고 “여보, 사랑해”나 “당신 최고야” 따위의 아부성 멘트를 날려라. 이것이 두 번째 계명이다. 참고로 이상의 계명은 나의 임상시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검증된 것임을 밝혀둔다.
2013-09-25 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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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4> 프로레슬러와 매미
1974년 5월 육군 사병을 34개월 만기로 제대하고 약 3년간 영진약품 시험과 및 연구과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세관 업무를 담당하는 본사의 천OO과장님한테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하면서도 멋있게 생긴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프로레슬러였다. 인품마저 점잖아 사내 평판도 좋았다. 그에게 무얼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어 보니, 당시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솔코세릴이라는 연고제의 원료를 수입해서 세관에서 통관시키려고 하는데 문제가 좀 생겼다는 것이다. 세관 측 담당자는 이 원료가 그 약 제조에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하라고 했단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내용은 잘 모르니 나보고 같이 가서 설명을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회사 일이기도 하고, 또 설명 못할 일도 아니기에 그러기로 하였다. 막상 그와 함께 길을 나서 보니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프로레슬러와 왜소하기 짝이 없는 내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란! 정확히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서부 서울역에 위치한 세관에 들어서자 그는 나에게 “약사님,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이 담당자입니다. 그 사람한테 설명 한번 해 주세요” 해 놓고는 자기는 저만치 떨어진 구석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내 설명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여 세관 직원에게 설명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천 과장이 내게로 오더니 “약사님, 설명 다 하셨나요?’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나보고 좀 비키라는 눈짓을 하더니 곧 세관 직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설명을 하였으니 통관시켜 주시죠”.
세관 직원은 무언가 이해가 덜 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중얼중얼거렸다. 금방 통관시켜 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자 천 과장은 두 손으로 직원의 책상을 짚으며 그 우람한 상체를 세관직원에게 쑥 디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따지는 것이었다. “이 원료가 무엇에 쓰이는지 약사님 불러다 설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약사님 모시고 와서 설명 했습니다. 그런데 왜 통관을 안 시켜 줍니까?” 천 과장에게 있어서 내 설명으로 세관 직원이 이해가 되었는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추궁하는 것은 ‘담당자 불러다 설명하라고 해서 설명했는데 왜 딴 소리냐?’는 단순한 것이었다. 우람한 체격의 천 과장의 위세에 움칠한 세관 직원은 금방, “아, 물론 통관 시켜 드려야죠” 하며 쩔쩔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알량한 지식으로 세관 직원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더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천 과장은 결코 무례하게 말하거나 고함을 치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상체를 디밀었을 뿐인데, 그 즉시 세관직원이 설득(?)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체격 큰 사람이 한없이 부러웠을 뿐만 아니라, 왜 천 과장이 회사에서 점잖게 처신할 수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당대 최고의 프로레슬러임을 모르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가 점잖게 처신해도 상대방들이 다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그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상대방은 그가 비록 점잖게 말 하더라도, 여차하면 자기를 하늘 높이 들어 던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내 체격이 왜소해서 늘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생각해 보니, 내 체격이 작아 다행이었던 점도 없지 않아 보인다. 우선 나는 남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한다. 잘못 화냈다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뭐, 그런 오해가 꼭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또 만약에 내가 덩치가 컸으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다가 상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태어난 대로 감사하며 사는 외에 무슨 방도가 달리 있겠는가?
2013-09-11 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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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3> K군의 기(氣) 추억
1991년, 대학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대학 동기 수십 명이 부부 동반으로 설악산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모두 관광 버스를 타고 갔는데, 버스 안에서 K라는 남자 동기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자기가 마스터한 기(氣)를 한번 넣으면 아무리 골초라도 담배를 끊게 되고, 소주는 특유의 쓴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의 유창하고 장황한 언변(言辯)은 동반한 일부 부인의 귀에는 솔깃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허리 통증을 앓고 있던 I 부인은 K군에게 자기 허리도 기(氣)로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K군은 당연히 고칠 수 있으니, 100만원을 내겠다는 계약을 하자고 재촉하였다.
I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K군과 계약을 하자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애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돈 있으면 차라리 떡을 사먹겠다”고 내뱉었다. 아 뿔싸! 이에 I 부인은 “내가 100만원의 가치도 안 되느냐?”며 비분강개하였고, 그 바람에 공연히 나머지 참가자들마저 긴장된 분위기 속에 여행을 하게 되었다. 동기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K군의 기(氣) 장사는 버스가 동해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모두에게 낯선 한 여자가 K군의 새 아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K군의 기(氣) 장사에 추임새를 넣는 모습이었다.
버스 안에는 골초인 L군도 타고 있었다. K군은 L군을 자기 사업의 선전도구로 삼을 생각이었는지, 자기가 기를 한번 넣어 주면 아무리 골초라도 담배를 끊게 된다고 L군을 구슬렸다. 마음 약한 L군은 어쩔 수 없이 기를 받게 되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 기는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L군에게 기를 넣은 K군은 ‘이제 L군은 자기의 기를 받았으니 담배가 써져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이라고 버스 안의 친구들에게 선언하였다.
기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L군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과연 골초였던 L군이 담배를 끊게 된 것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한 친구가 조용히 L군에게 물었다. “야, 담배 맛이 써졌냐? 그래서 너 정말 담배 끊었냐?”
L군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 쟤가 저렇게 침을 튀기며 기(氣) 장사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담배를 계속해서 피울 수 있겠냐? 할 수 없이 더럽지만 화장실 가서만 피우고 있다. 에이!” 나는 L군의 뜨거운 우정(?) 에 감탄하였다.
설악산 콘도에 짐을 푼 후 동기들이 속초 바닷가에서 회 한 접시에 둘러 앉아 소주를 마실 때이었다. 갑자기 K군이 한 소주 병에 기를 불어 넣은 후 이렇게 말하였다. “야, 너희들 이 소주와 저 소주의 맛을 한번 비교해 봐라, 기를 넣은 소주는 더 이상 쓴 맛이 나지 않을 거다, 어떠냐? 마셔 봐, 그렇지?” 그러나 두 소주 간에 맛의 차이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끄~응, 그러고 보니 이쪽 소주가 좀 덜 쓴 것도 같다” 라고 얼버무릴 수 밖에. 그러나 속으로는 “너의 기는 사기(詐欺)야”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K군 자신도 자신의 사기에 속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氣)와 관련된 K군의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유창한 언변은 그의 기(氣) 장사의 자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듣다 보면 어느 새 현혹되기 십상(十常)일 정도로 그는 정말 말을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내 연구실에 와서 “너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늘 남산의 소나무를 생각해라” 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너, 백반(白礬)을 혀에 댔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럼 침이 나오지? 그게 바로 생각이 우리 몸의 생리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야. 마찬가지야, 네가 소나무를 생각하고 있으면 너도 모르게 네 건강에 유익한 생체 성분이 분비되거든. 그래서 소나무를 생각하며 살라는 거야”.
어떻게 내가 이 친구를 당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문득 옛날의 추억들이 꼬리를 문다.
2013-08-28 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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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2> 5가지 부탁
퇴임을 앞두니 종종 “약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다.우선, 약대 내에 몇 가지 드라이 랩(dry lab)을 설치해 주기를 부탁 드린다. 드라이 랩이란 약사법, 약학교육학, 약물경제학, 약학사나 윤리약학처럼 실험을 하지 않고 연구하는 전공을 일컫는 조어(造語)이다. 이에 반해 약물학, 약제학, 유기제약처럼 실험을 해야 하는 기존의 전공을 웻 랩(wet lab)이라고 부른다. 세포(cell)에 비유하자면 웻 랩들은 핵(nucleus)에 해당하는, 약학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핵심전공들이다. 그러나 세포는 핵만 가지고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일견 핵보다는 덜 중요해 보이는 세포질이나 세포막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세포의 요소들이다. 드라이 랩도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약학의 한 요소인 것이다. 약사의 직능은 법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예컨대 ‘조제는 아무나 할 수 있다’로 그 법이 바뀐다면, 약학에서 핵심전공(웻랩)을 열심히 공부하는 의미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약사법을 전공하는 교수가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약학교육학이나 약물경제학 등을 전공하는 교수도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히 필요해 지고 있다. 이제까지는 핵심전공 교수를 확보하기에도 TO가 빠듯했기 때문에 드라이 랩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천연물과학 연구소와 합병을 하면서 교수 수가 45명으로 늘었다. 드디어 몇 개의 드라이 랩을 설치할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조만간 각 약대에 다양한 드라이 랩이 설치되는 꿈을 꾸어 본다.다음으로는 6년제를 일본처럼 4+2년제로 바꾸는 노력을 해 주기 바란다. 사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4+2년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약학사(藥學士)는 4년, 약사(팜디)는 6년 교육하는 제도로, 실질적으로는 4년제와 6년제를 병행 운영하는 제도이다. 4+2년제를 당장 도입하기 어렵다면, 정진호 서울약대 전 학장의 의견처럼 최소한 약사면허 시험을 2단계로 나누는 것도 합리적일 것이다. 1단계에서는 과거 4년제 하에서의 약사국시처럼 합격자에게 약학사 학위를 주고 졸업을 시킨다. 그리고 이들 중 약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에게는 추가로 2년간 임상약학을 공부시킨 후 시험 합격자에게 면허를 주자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약대 교수를 뽑을 때 기존 교수와 전공이 다른 사람을 뽑았으면 한다. 지금 학문은 나날이 진화 분화하여 유전자치료제학, 세포치료제학, 생물약학, 의공학약학 등 과거에는 들어 보지도 못한 학문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를 외면하고 과거의 학문 분류에 집착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약학은 옛날 학문들의 박물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새 시대를 리드할 수 있는 새로운 전공들을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 네 번째로는 ‘맞춤약학(individualized pharmacy)’을 임상약학 교육의 최종 목표로 삼기를 제안한다. 미국에서 매년 입원 환자 중 10만 명이 의약품의 부작용 (ADR)으로 사망한다. 이는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 차이(대사효소, 막수송체 및 수용체 면에서)를 고려하지 않는 기존의 약물요법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따라서 ADR은 머지않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擡頭) 될 것이다. 해결책은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한 약물요법, 즉 ‘맞춤약학’뿐이다. 이 시대적 요구에 선도적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머지 않아 약사 직능의 심각한 도태가 우려된다. 끝으로 생물의약품학(biologics) 교육을 강화해 주기 바란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백신, 유전자 치료제, 세포치료제 같은 생물의약품의 출현은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빠르지 않다. 이는 이들에 대한 ‘물질’로서의 이해가 부족한 과학 수준 때문이다. 약은 구체적으로는 결국 물질이다. 따라서 약학에서는 생물의약품에 대해 ‘물질’로서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보증할 수 있는 규격을 설정하는 연구와 교육에 치중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실질적으로 ‘생물의약품 시대’를 여는 공로가 약학에게 주어질 것이다. 약학만만세!
2013-08-14 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