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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6> ‘대한약학회’의 생년은 1946년으로 봐야
금년에 제59권을 발간하고 있는 ‘약학회지’가 창간된 것은 1948년 3월이다. 그러나 정작 약학회지를 발간하고 있는 ‘대한약학회’는 1951년에 창립되었다. 학회지가 학회보다 3년 먼저 발간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전말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일제시대의 ‘조선약학회’ 창립 (1911)
최초의 근대 약학 연구 모임인 조선약학회(朝鮮藥學會)가 창립된 것은 1911년으로 중심이 된 것은 경인 지방의 학자들이었다. 회보인 조선약학회보(朝鮮藥學會報)도 같은 해 창간되었다. 1914년 일본 약학의 태두인 나가이(長井長義)가 방한하자 이를 계기로 전국의 학자들이 모여 조선약학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99명 회원의 대부분은 일본학자이었다. 조선약학회보는 1916년 제6호부터 조선약학잡지(朝鮮藥學雜誌)로 개칭되었다.
당시의 한국인 연구진은 주로 총독부 위생시험소와, 순전히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던 계농생약연구소(桂農生藥硏究所) 및 당시 최대의 제약회사인 금강제약(金剛製藥)에 근무하는 연구자들 이었다. 1920년대에 조선약학잡지에 실린 한국인의 논문은 이호벽, 김충현의 논문 2편뿐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는 도봉섭(1934), 한구동(1935, 1942), 신덕균(1937), 김기우(1938) 등이 매년 1명씩 선정 시상하는 우수 논문상을 받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활약하였다. 1942년에 열린 조선약학회 창립 30주년 기념 학술행사에서는, 총 50편 중 19편의 연구논문이 한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다. 조선약학잡지는 일제 말기인 1943년 이후에는 발간되지 않은 것 같다.
2. 광복 후 ‘조선약학회’의 재건(1946) 및 약학회지의 창간(1948)
1945년에 광복이 되자 일본인 중심의 조선약학회는 자연 해산되었다. 다음해인 1946년 4월 13일, 도봉섭, 한구동 등의 한국인을 중심으로 조선약학회를 재건하는 창립총회가 (사립)서울약학대학에서 열렸다.
[회장: 도봉섭, 부회장: 한구동, 서무간사: 심학진, 회계간사: 이남순 (東京帝國大學 약학박사), 편집간사: 허금]. 그 해 12월 14일에는 서울약학대학에서 제1회 학술대회 (30명 참석, 6개의 논문 발표)가 열렸다. 그리고 두 해 뒤인 1948년 3월, 드디어 약학회지(藥學會誌) 제1권 제1호가 발간되었다. ‘藥學會誌’라는 제호(題號)는 김충현씨가 붓으로 썼다고 한다.
3. 6.25 전쟁시 ‘대한약학회’로 개칭 (1951)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약학회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1951년 12월 16일,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국호(國號)에 따라 ‘조선약학회’를 ‘대한약학회(大韓藥學會)’로 개칭하는 발기총회가 열렸다. 장소는 피난지인 부산시의 시청 회의실이었다.
그러나 학회지명은 ‘藥學會誌’를 그대로 계승하기로 하였다. 대한약학회는 1955년 9.28 수복 후인 10월 12일,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제1회 학술대회 및 총회를 열었다.
일부 학자들은 6.25를 전후하여 월북하거나 또는 납북되어 북한의 약학을 육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들은 1957년 ‘조선약학(朝鮮藥學)’이라는 학술잡지를 발행하였고, 1960년에는 북한 보건성 이름으로 ‘조선약전’을 제정하는데 참여하였다. 남한의 대한약전(大韓藥典)은 1958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4. 요약
우리나라 약학회의 역사는 1) 1911년 일제하의 ‘朝鮮藥學會’ 창립, 2) 1946년 광복 후의 ‘朝鮮藥學會’ 재건, 3) 1951년 ‘大韓藥學會’로 개칭 요약할 수 있고, 학회지의 역사는 1) 1911년 ‘朝鮮藥學會報’의 창간, 2) 1916년 ‘朝鮮藥學雜誌’로 개칭, 그리고 3) 1948년 ‘藥學會誌’의 창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약학회의 출발 연도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해방 후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약학회’가 재건된 1946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때부터 ‘약학회지’가 발간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정확할 때에 비로소 힘이 생기는 법이다.
2015-06-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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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5> 약물의존(藥物依存)의 위험성
지난 4월 15일 ‘약물의존’이라는 일본 책 '니시 가츠히데 박사 원저'가 번역 출판 됐다. 그 책의 일부 내용을 이하에 소개하고자 한다.
1. 약물의 사용 실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떠한 형태로든 위법약물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는 그 약을 조심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는 충동적으로 과량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많은 젊은이들은 마치 어른들이 사교 시에 적당량의 술을 마시는 것처럼 자신들도 사교의 장소에서 그런 약물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약을 사용해도 겉으로는 물론 신체상으로도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수는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대규모 조사를 해 보았더니, 마리화나, LSD, 엑스터시나 각성제 때문에 문제 행동을 일으켜 의료기관이나 경찰 또는 사회복지 관련기관에 신세를 진 적이 있는 사람의 수는 그런 약물을 사용해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의 수보다 훨씬 적었다.
코카인은 스트리트 드러그(street drug, 길거리 약) 중에서도 가장 독성이 강하고 의존성이 높은 약물이다. 이 약은 여러 나라에서 많이 유통되고 있지만 사용자 중에 치료나 구제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약을 사용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따금 사교의 장소에서 코카인에 취했다가, 그 뒤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언제 '약'의 작용이 나타날지 모른다
문제는 과거에 '약'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 습관적으로 다시 약물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문제이다. 사춘기에 알코올이나 위법약물을 경험해 본 사람 가운데 약 10%가 나중에 약물 문제를 일으킨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사람일수록 나중에 약물의존에 빠지기 쉽다. 습관적으로 또는 고용량의 약물을 사용했던 사람일수록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생겨 가족 관계, 사회 생활, 성(性), 교육, 직장 생활 등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
오랫동안 약물을 남용했던 사람이 겪는 증상의 하나가 '플래시 백(flash back, 환각의 자연스러운 재연)' 현상이다. 즉 자기이탈(自己離脫)이나 치료를 통해 약물의존증으로부터 용케 빠져 나와 정신적 신체적으로는 물론 사회 생활 면에서 아무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약물에 대한 갈망과 함께 환각과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왜 이런 플래시 백 현상이 나타날까? 그 기전은, 예컨대 각성제를 장기간 남용하면 도파민(dopamine)이 계속 방출되는데, 이 도파민이 자기산화를 받아 신경독성 물질로 바뀐 다음 신경세포에 변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정상적인 신경 회로에 어떤 결함이 생기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외관상으로는 약물의존증으로부터 회복된 것처럼 보여도, 실은 뇌의 신경회로에 회복될 수 없는 '고장'이나 '탈락'이 일어나 있는 것이다.
크랙 코카인(순도가 높은 코카인. 휘발성이 높아, 특수한 도구를 이용하여 불을 붙여 들이 마심)을 장기간 사용해도 뇌에 신경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 코카인 갈망이 나타난다. 코카인 갈망은 약물을 끊은 지 수 개월 또는 수 년이 지난 후에도, 약간의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 증상은 평생 지속된다.
이러한 현상은 알코올 의존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오랫동안 금주를 하고 있어도 언제 다시 문제성 음주에 빠질지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약물의존증은 재발하기 쉬운 병이다. 물론 장기간 사용할 때의 증상이 약물에 따라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중증의 약물의존증에 빠지면 '평생 낫지 않는 병'을 안고 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약물 사용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기를 기원한다.
2015-06-0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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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4> 카네이션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다. 옛날에는 ‘어머니 날’이라고
했는데, 그럼 아버지 날은 없느냐 하는 불만의 소리가 나오니까,
1970년대에 인심 쓰듯 ‘어버이 날’로 개명하면서
아버지를 끼워 준 것이다.
나는 어버이 날 아침이면 반드시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어버이 날 아침에 아래층에 사는 장남 내외가 카네이션을 안달아 주어 몹시 삐진 일이 있었다. 자식이 버젓이 있는데 어버이 날에 꽃 하나 못 얻어 단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내와 아들 며느리는 우리 아버지가 촌스럽게 카네이션 달기를 바랠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에는 내가 늙어서 ‘카네이션이나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니까.
아들 며느리가 내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주기를 바라게 되면서부터, 나는
96세의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시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요즘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 생화 한 송이를 달아 드리고 껴 안으며, ‘아버지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 드리면 흐뭇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신다. 나도 덩달아 흐뭇해진다.
카네이션 꽃 달기에 관한 나의 원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드시
어버이날 아침 외출 전에 부모님께 달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에 달아드리는 것은 게으름이며 불효이다. 두 번째로는 부모님 먼저 달아드리기 전에는 내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숨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왜
어머니가 생전에 며느리가 밥상 차려 드리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나 이제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아내가 이석증(耳石症)으로3주간이나 어지러워 하는 중에 두 며느리가 교대로 우리 집에 와서 여러 번 밥을 차려 주었는데, 그걸
받아먹는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며느리가 설거지까지 하고 간 날에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한 나이를 먹으면 누가 나한테 인사를 잘 하고, 어디 아픈데 없으시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고 물어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이런
대접을 못 받으면 적잖이 나음이 섭섭해진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이 유치한 것 같지만, 저절로 그리 느껴지니 어찌 하겠는가? 교양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일수록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나이 먹은 사람은 누구나 다 똑 같이 느낄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내 확신이다.
교회에서 잘 아는 어떤 분이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아내 되는
분이 그깟 갑상선 가지고 뭘 걱정이냐고 시늉도 주지 않았단다. 그분은 아내의 이런 반응에 큰 상처를
받고 섭섭해 하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걱정해 주고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마도 늙어서 섭섭하고 삐지는 것은 우울증처럼 피할 수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은 자기 살기 바빠서 부모들의 감정을 살필 여유가 없다. 사실
자식 탓할 것 하나도 없다. 나도 젊었을 때 부모님 감정까지 깊이 신경 쓰고 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의 섭섭함은 내가 다스려야 할 나의 과제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크리스천에게는 교회가 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이런 저런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다. 매 주일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고 치면 일년에 적어도
52번의 위로를 받는 셈이다. 각박한 세상에 이처럼 반복해서
위로를 받을 곳이 달리 없을 것이다.
헨리 모리슨 이라는 선교사가 4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 사역을 마치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 오는 배에, 마침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 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함께 타고 있었다. 뉴욕 항구에 배가 들어서자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교사를 마중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선교사는 적잖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저녁 노을 사이로 이런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한다. “헨리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 온 것이 아니란다”.
크리스천에게 참된 위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땅에서도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2015-05-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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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3> 나노 의약(nano medicine)
과학에도 유행이 있다. 어떤 연구 주제가 인기를 끌기도 하고, 때가 지나면 시들해지기도 한다. 오늘은 나노 의약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항암제의 경우, 약학, 특히 약제학에서는 약물의 항암 활성보다 약물이 암세포에 얼마나 잘 분포하느냐가 더 큰 관심을 끈다. 항암제가 암세포가 아닌 정상 세포에 분포하면, 정상 세포도 죽이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물 분자를 암 조직 등 체내의 특정 부위에만 분포시키는 기술이 필요해 지는데, 이런 기술을 타게팅(targeting)이라고 한다. 따라서 타게팅은 약효를 최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중요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약과학자들은 항암제를 암세포에 타게팅 하기 위하여, 항암제를 리포좀이나 마이크로스피어, 또는 나노 미립자 등의 미소 운반체(carrier)에 봉입(封入)하여 정맥으로 주사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약물의 운반체를 약물송달체(Drug Delivery System; DDS)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는 나노 미립자(nano particles)가 가장 효율적인 타게팅용 DDS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암 조직에 분포되어 있는 혈관벽에 생긴 미세 틈새를 빠져 나와 암 조직 사이에 축적되는 나노 미립자의 특성 때문이다. 나노 미립자의 이러한 특성을 EPR(투과성 항진 및 축적) 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노 미립자가 암 조직에 축적되는 정도는 일반적인 기대 수준 이하이었다. 그래서 약과학자들은 암 조직이나 암 세포 표면을 특별히 잘 인식하는 특정 물질로 나노 미립자 표면을 처리 (修飾)해 보기로 하였다. 즉 암세포 표면의 특정 항원과 결합하는 항체분자(antibody)나, 암세포 표면의 특정 수용체(receptor)와 결합하는 분자(ligand)로 미립자의 표면을 수식해 본 것이다.
독소루비신(DOX)이라는 항암제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DOX는 간암에 널리 사용되는 항암제이지만, 비가역적인 심근증이나 울혈성 심부전 같은 심장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인 약이다. 이 부작용은 DOX가 심장에도 상당량 분포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 연구실은 DOX를 함유한 나노 미립자 표면을 특정 물질로 수식하여 DOX의 심장 분포성을 낮추어 보고자 하였다.
우선 DOX를 함유한 알부민 나노 미립자를 만든 다음, 그 표면을 헤마토포피린(HP) 분자로 수식하였다. HP를 선택한 이유는 HP가 암세포 표면에 발현되어 있는 LDL 수용체와 특별히 잘 결합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 HP로 나노 미립자 표면을 수식하면, 나노 미립자가 암세포 표면의 LDL과 효율적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미립자 안에 봉입되어 있는 DOX가 효율적으로 간암 세포로 분포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시행 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HP로 표면을 수식한, DOX가 함유된 알부민 나노 미립자를 제조할 수 있었다. 이 나노 미립자를 간암에 걸린 흰쥐에 정맥 주사한 뒤 체내 분포를 조사해 보았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즉 DOX의 간암 조직 분포성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DOX의 심장으로의 분포성이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간암에 대한 치료 효과는 높아지고 심장에 대한 부작용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는 고무적인 결과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이와 같은 나노 미립자를 곧바로 간암 환자에게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결론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다. 체내에 투여된 나노 미립자가 체내의 미세 혈관의 혈류를 방해할 우려는 없는지, 또 특정 암을 타겟으로 삼은 나노 미립자의 크기와 경도(hardness) 및 체내 분해성은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안전한지 등에 대한 정보가 아직까지도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가 대유행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변변한 나노 의약이 개발되지 못한 까닭은 바로 안전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유행은 그저 유행일 따름이니, 무조건 따라다닐 일이 아닌 모양이다.
2015-05-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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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2> '리스트'와 법
최근 ‘아무개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정치인만 돈을 받았으리라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 정치에 돈 문제는 그 저변이 넓고 뿌리가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발각된 사람도 ‘나만 받았나?’ 하면서 돈 받은 행위 자체보다 허술하게 받은 부주의를 후회하는 웃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뇌물, 부정 부패 등 범법 행위에 대한 불감증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가히 국가적 위기상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 ‘일반사회’라는 과목을 배울 때부터, 나는 ‘법이란 거미줄 같아야지 매미채 같은 존재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집의 처마 밑에 쳐 있는 거미줄을 향해 나는 날벌레는 예외 없이 거미줄에 걸리게 마련이다. 모든 날벌레에 있어서 거미줄은 공정한 규제이다.
반면에 매미채는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잡으려고 정한 날벌레를 쫓아가 잡는다. 어떤 벌레를 잡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매미채 주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따라서 매미채는 날벌레 입장에서 보면 전혀 공정하지 않은 규제인 것이다.
세상에 범법자는 많지만 극히 일부만 잡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의 법은 거미줄보다는 매미채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이다. 범법자 중 누구를 잡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사 당국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법률이 매미채 같이 운용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붙잡힌 범법자는 범법을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하필 나만 표적 수사 하느냐?’고 불만을 품는다.
그래서 모든 범법자는 반드시 단속되는, 거미줄 같은 법률체계나 단속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미줄이 쳐있는 곳을 지나가는 벌레가 반드시 잡히는 것처럼, ‘법을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걸린다’는 인식이 상식이 되면, 모든 국민은 누가 뭐래지 않아도 법을 지키게 된다. 공정한 법의 권위가 살아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범법자가 너무 많아 현실적으로 모든 범법자를 다 잡아 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범법자의 수를 잡아 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모두가 철저한 준법 생활을 다짐하여야 한다.
지도층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지금까지 세상 돌아 가는 모양을 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연목구어(緣木求魚)인 듯싶다. 차라리 일반 시민들이 먼저 나서는 편이 나을 듯해 보인다. 한심한 상황이다.
범법자 수를 줄이기 위한 두 번째 방편은 법규의 수준을 대다수의 국민이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다.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다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법은 실효성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법 당국은 일부 범법자만 단속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국민들은 ‘모든 사람이 법을 어기는데, 걸린 사람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며 법규를 경시하게 된다. 사법 당국도 부득이 법을 매미채처럼 자의적, 편의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 ‘준법 투쟁’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하철 노조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법을 지키는 것이 투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준법투쟁’이란 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관련 법규를 문자 그대로 지켜서는 지하철이 제대로 운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준법투쟁’, 세상에 이런 코미디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또는 앞뒤가 안 맞는 엉터리 법규는 마땅히 개정되어야 한다. 이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규제개혁’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하여 범법자의 수를 대폭 줄인 다음에는, 그 법규를 위반한 모든 범법자를 예외 없이 잡아내야 한다.
범법자 단속에 사법 당국의 ‘의도’가 개입될 여지를 없애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서 법의 공정성과 권위가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범법자의 수가 더욱 줄어드는 선순환 궤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라가 걱정이다. 하나님 보호하여 주소서.
2015-04-2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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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1> 3.1 운동에 참여한 조선약학교 학생들에 대한 신문 조서
지난 약창춘추 170에 조선약학교 학생 14명이 3.1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신문을 받은 바 있음을 소개하였다. 오늘은 그들 중 한 분인 박희창(朴喜昌)을 임의로 선택하여 당시의 신문 조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는 ‘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 13권 ‘3.1운동 III. 3.1 독립선언 관련자 신문조서’에서 발췌하였다. 검사의 심문조서 피고인 : 박희창. 위 피고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 사건에 관하여 大正 8년 3월 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조선총독부 검사 山澤佐一郞과 총독부 재판소 서기 아무개가 열석한 후, 검사는 피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다. 문)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본적지 및 출생지는 어떠한가?답) 성명•연령은 박희창, 21세. 신분•직업은 약학교 학생. 주소는 京城 蓮池洞 228, 崔守連方. 본적지는 慶尙北道 尙州郡 牟東面 壽峯里 5통 3호. 출생지는 慶尙北道 尙州郡 牟東面 壽峯里 5통 3호. 문) 위기•훈장•종군기장•연금•은급 또는 공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답) 없다. 문) 이제까지 형벌에 처해졌던 일은 없는가?답) 없다. 문) 피고는 금년 3월 1일에 군중과 함께 대한국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는가?답) 3월 1일에 남산공원에 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오포(午砲) 소리를 듣고 종로의 청년회관 앞에 갔더니 그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선언서를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도 군중 속에 들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곳 무교정 거리에서 대한문으로 가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그리고 나서 미국 영사관, 배재학당 앞, 그리고 다시 대한문으로 나와 황금정 1정목에서 종로 네거리로 와 거기서 흥화문 앞으로 해서 조선보병대로 갔고, 프랑스 영사관 앞, 서소문을 거쳐 대한문으로 나와 長谷川町을 지나 조선은행 앞에서 本町 2丁目까지 군중과 같이 각처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걸었다. 그리고 本町 2丁目 경찰관 파출소 앞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문) 그대가 얻었다고 하는 선언서는 이것과 같은 것인가? (검사가 「선언서」라는 제목의 한글을 섞어 쓴 손병희 외 32명 명의의 인쇄물을 보이다.) 답) 그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문) 그것을 읽었는가?답) 조금만 보고 전부 읽지는 못했다. 그 선언서는 각처를 돌아다니는 중에 어디엔가 버렸다. 문) 누구에게서 얻었는가?답) 군중 속의 사람으로,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것을 주울 때는 달려가면서 주었던 것이다. 문) 왜 대한국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답) 나도 조선인이므로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기에 기뻐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문) 총독정치에 대하여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가? 답) 학생이므로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다. 문) 국민대회를 아는가?답) 그것은 모른다. 문) 국민대회에서 발행한 등사판 인쇄물을 본 일이 있는가? 답) 그런 것을 본 일은 없다. 문) 국장을 앞두고 만세를 부르는 것은 근신치 못한 것이 아닌가?답) 아무 생각도 없이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문) 종교는 무엇인가? 답) 나는 종교는 없다. 부친은 유교이며, 고향에서 농업을 하고 있다. 문) 학력은 어떠한가? 답) 고향에서 한문을 배웠고 경성의 중동학교 및 경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지금의 학교에 다니고 있다. 문) 파고다 공원에서 국민대회가 있다는 것을 들었는가? 답)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 (이상 조서 끝).
약창춘추 170에서 언급한 것처럼, 1918년에 설립된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 60명 중 무려 약 50명이 3.1운동과 관련되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3.1운동 중 살아남아 판결을 받아 신상 카드에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 등 약 20명 정도는 이름을 알 수 있으나, 나머지 30명 정도는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알 수 없다. 남의 나라의 압제 하에서 독립을 주창하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 감옥에 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 새삼 분노를 느낀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졸업을 하지 못한 선배님들께 지금이라도 졸업장을 드리는 것이 후배로서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2015-04-0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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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0> 조선약학교 학생들의 3.1운동
1. 친일파 강습소장/조선약학교장 우리나라 약학 교육기관의 뿌리인 조선약학강습소(1915년 6월 12일 개소)와 조선약학교 (1918년 6월 21일 개교)는 조선시대 약재상들의 계(契)인 장진계(長進契)를 모체로 한 조선약업총합소[소장, 이석모 (李石模)] 소속 약업인들의 노력에 의해 세워졌지만, 1910년에 일본에 병합된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친일파 조중응(趙重應, 1860∼1919, 외무 대신 및 농상공부 대신 역임)을 초대 강습소장 및 약학교장으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조중응은 정미칠적 (丁未七賊, 7인) 및 경술국적(庚戌國賊, 8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한일 병합에 공을 세운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이었다. 약계의 인사들이 그를 학교의 대표로 내세운 것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약학 발전을 위하여 그 외에 큰 기여를 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약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지 1년이 채 못된 1919년 현직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후로는 쭉 일본인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중응이 초대 소장 및 교장이었다는 사실은 약학계의 후학들에게는 적잖이 아쉬운 일이다. 훌륭한 애국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친일파 인사가 아니었더라면 한결 당당하게 그 분을 교장이라고 내세우고 칭송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조무래기 친일파가 아니라 이완용 급의 거물 친일파인 조중응이 약학교의 초대 교장이다’라고 자학적인 자랑을 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2. 조선약학교생들의 3.1운동 참가이러던 차에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1919년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조선독립선언서 및 청원서’에 관련되어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을 받은 사람 362명 [손병희 (孫秉熙) 선생 포함] 중에 김유승(26), 김광진(21), 박준영(23), 박병원(23), 박흥원(23), 박희창(21), 오충달(24), 전동환(34), 김정오(22), 강일영(19), 김용희(19), 이인영(19), 정태화(24), 이용재(25) 등 조선약학교 학생이 14명이나 들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중 김용희, 이용재, 이인영, 전동환 등 4명에 대해서는 신문 카드(사진)도 입수할 수 있었다. 솔직히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1818년에 개교한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은 조선인이 60명, 일본인이 30명 정도이었는데 2년 후인 1920년에 제1회로 졸업한 조선인은 이호벽 등 1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신문을 받은 14명 중 3명은 한해 뒤인 1921년에 제2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다.
나머지 47명은 졸업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3.1 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의 단속을 받은 영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47명 중 약 20명은 졸업생 명부와 상기 신문조서를 통해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분들에 대해서는 당시 학적부를 입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재 그 이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장한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끓어 오르게 한다. 비록 조선약학교가 친일파의 이름을 빌려 개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선배님들의 속 마음은 결코 민족 정기(精氣)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삼가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사진. 3.1 운동에 참여한 조선약학교 학생들에 대한 일제(日帝)의 감시카드 (이인영의 예)
2015-03-1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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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9> 111년 전의 미국 약대 유학생 이관영과 선한약물학
1. 이관영(李觀永)
‘며칠 전 이관영씨가 미국에서 귀국하였다. 이관영 씨는 몇 달 전 북미합중국에서 귀국한 의학사(醫學士) 이희경(李喜儆)씨의 종질(從姪, 사촌의 아들)이다. 두 사람 다 평안남도 순천군 출신이다.두 사람은 14년전(1904년, 필자 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관영 씨는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하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스 주립대학에서 무기화학, 유기화학, 유기화학, 정질분석화학, 응용화학, 생리화학, 생리학, 신체해부학, 약학 [약성(藥性), 약종(藥種), 약종재배법, 진가(眞假)분석법, 조제법, 복용법], 위생학, 미균학(미생물학, 필자 주), 현미기(응용법, 검사법), 제약화학을 위한 수학 등을 공부하여 졸업하고, 하와이 제당연합회 연구부 화학과에서 분석에 종사하였는데, 그 성적이 양호한 결과 이번에 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현재 총독부에서 시행하는 면허 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청원(시험원서, 필자 주)을 제출하였다고 한다. 이런 학문을 공부한 사람은 이관영 씨가 효시(嚆矢, 최초)라 하더라’ (이상 매일신보 1918년 2월 11일자 기사).상세한 기록은 추후 더 찾아 봐야겠지만, 이처럼 이른 시기(1904년)에 미국 약대(학부)에 유학을 간 선각자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이관영 선생은 귀국한 1918년 10월 18일 치른 약제사 시험에 이응길 이란분과 함께 합격하여 이 두 분이 국내에서 최초의 한국인 약제사가 되었다. 한편 유세환(劉世煥)이란 분은 189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약학교와 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약제사가 된 후 1902년에 귀국, 1909년부터 지금의 서울대 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의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흔히 1920년 5월 면허를 취득한 이호벽 선생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약제사인줄로 잘못 아는 분들이 있는데, 이호벽 선생 등은 국내에서 수학(조선약학교 제 1회 졸업)한 후 국내에서 시행된 시험에 합격한, 말하자면 토종 약제사 중 최초라고 하는 것이 맞다.
2. 선한약물학(鮮漢藥物學)이관영 선생은 뒤에 경성 세브란스(世富蘭偲)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세브란스 병원 약국장으로 근무하였는데, 이 때 ‘선한약물학’이라는 책을 감수하였다. ‘선한약물학’ 이란 조선의 한약학이라는 의미 같은데, 생약의 성분까지도 표시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생약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이 책의 저자는 세브란스 병원약국 주임인 한도준(韓道濬, 조선약학교 본과 6회 졸업)과 전 경성약학전문학교 조수 약제사 김수만(金壽萬, 조선약학교 7회 졸업)의 두 분이다. 이 책은 1931년에 행림서원에서 발행한 이후 1937년까지 6판을 찍었다고 한다. 운 좋게도 서울약대는 최근 이 책의 초판을 입수할 수 있었다.흥미로운 것은 김수만 선생은 1933년 12월 11일 서울시내 도렴동(都染洞)에서 경성약학강습소를 연 분이다. 이 강습소의 목적은 약종상을 양성하기 위한 수험 준비였다고 한다. 수업은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10개월간이었으며, 입학 자격은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남녀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상 동아일보 1933년 11월 28일자 기사).유의해야 할 것은 이 강습소는 1915년 6월 12일 개교하였다가 1918년 6월 21일 조선약학교가 개교하면서 문을 닫은 ‘조선약학 강습소’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 경성약학강습소가 얼마나 계속되었는지는 불명이다.이 책의 머리말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사인 일본인 이시도야(石戶谷勉)와 경성의학연구회장인 김명여(金明汝) 선생이 썼다. 이시도야는 현재 서울대 약대에 소장되어 있는 ‘이시도야 컬렉션’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한편 이 책의 제자(題字)는 전 조선총독이었던 사이또(齊藤實)가 썼다.대 선각자의 발자취를 하나 하나 찾을 때마다 신명이 나는 요즈음이다.
2015-02-2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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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8> 모창(模唱)대회와 ‘선택과 집중
그 동안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선진국을 모방(模倣)함으로써 발전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선진국 따라 하기’는 일종의 미덕(美德)이었다. 그 ‘따라 하기’를 잘한 덕분에 이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 동안 모방할만한 것은 거의 다 모방한 느낌이다. 돌아봐도 더 이상 모방할 대상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모방에만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당황스런 상황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세가 둔화된 까닭은 이런 상황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도 이 상황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아 보인다. 국내 제약산업을 보더라도 그 동안은 선진국이 개발한 오리지널 약을 복제하는 것이 발전의 동력이었다. 외국약을 복제하기 쉽도록 제도를 고쳐야 된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복제약만 만들어서는 살 수가 없다. 이제 신약개발(新藥開發)이 아니면 우리나라 제약업에 활로가 없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우성이다.복제약 만들기는 일종의 모방 행위이다. 오리지널 약과 똑같이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약개발은 창조(創造) 행위이다. 보고 모방할 대상이 없는 것이 신약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은 모방이 아닌 창조에 답이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창조가 답인 것은 제약 분야만이 아닐 것이다. 과학, 기술,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가 모방에서 창조로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성장은 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모방에서 창조로 발상을 전환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모방은 노래 부르기로 치면 ‘모창(模唱)’이다. 노래를 배우는 첫 걸음은 기성 가수의 노래를 흉내 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모방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결코 훌륭한 가수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자기 나름대로의 창조적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가수는 ‘짝퉁 가수’에 불과한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일에 모방이 아닌 창조가 필요함을 느낀다. 문제는 창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창조에는 모방보다 더 많은 시간과 인력, 자본 등이 소요된다. 그래서 창조는 가난한 나라나 회사가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그 동안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정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선택과 집중’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선진국을 모방하는 전략의 하나이었다. 문제는 패러다임이 모방에서 창조로 바뀐 현 상황에서도 ‘선택과 집중’이 가장 현명한 방법론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약회사나 나라에서 대형 과제 몇 개만을 선택하여 총력을 집중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모방의 시대에나 적합한 매우 리스크한 정책 같아 보인다.
창조를 위해서는 몇 개가 아닌 수많은 다양한 연구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구석에서 말없이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아이디어가 존중 받아야 한다. 그들이 자유 분방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국가는 최소한도의 연구비를 지원하여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지양하고 다양한 소규모 연구가 도처에서 수행될 수 있도록 씨를 뿌리고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개중에는 싹이 나지 않아 돈과 시간이 낭비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몇몇 대형과제를 국책 과제로 선택하여 집중 투자하였다가 실패하였을 때에 비해 훨씬 덜 심각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연구 결과가 꼭 연구비 규모에 비례하지 않으며, 또 여럿이 모여서 집단으로 연구를 해야 연구 효율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렇다고 당장 모든 ‘선택과 집중’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모방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창조가 앞으로의 살 길임이 확실하다면, 보다 창조적인 다양한 소규모 연구들이 활기를 띨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의 비중을 줄여야 할 것이다. 능력 있는 신인 가수는 대규모 모창 대회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2015-02-11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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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7> 영화 두 편
화제의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다. 영화는 소문 그대로였다. 재미도 있었고 눈물 나도록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가혹하였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피난, 몸을 파고드는 추위와 두려움, 그리고 배고픔을 어찌 화면으로 다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 그리고 KBS의 이산가족 찾기 등은 내가 보고 들어 잘 아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60세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아프지만 그래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진 앨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이 영화가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궁금해진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본다 해도 경험하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처럼 인식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안타깝기도 하다.
얼마 전, 교회에서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이라는, 고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영화를 보았다.
손목사는 1948년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살인범을 양자로 삼고자 하자 손 목사의 딸은 “아버지, 그를 양자로 받으면 제가 그를 오빠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인범을
용서하는 것까지는 받아 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양자로 삼는 것만은 절대 안됩니다”라고 절규하며 아버지에게 항변하였다.
그러자 손 목사는 “네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구나.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용서만 하라고 하셨더냐?”고 하며, 결국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손 목사 자신도 1950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나병환자 수용소(애양원)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영화는 사람이 어디까지 훌륭해질 수 있는가를 엄숙하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감동’이었다. 손 목사는 작은 예수님이었음을 알았다.
이 두 영화의 시대 배경에는 공통으로 6.25 전쟁이 있다. ‘국제 시장’의 시작도 전쟁을 피해 월남하고자 흥남 부두에서 군함을
타는 장면이었고, ‘그 세상’의 모티브도 6.25 전쟁 당시 좌우 이념 대결이 남긴 살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억척스럽게든 또는 숭고하게든, 참으로 용케도 온갖
역경을 헤치고 나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들은 우리에게 스스로 감동해도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제 시장’의
주인공의 마지막 말처럼, “아버지,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 그런데, 저 정말 고생 엄청 많이 했어요”라는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한다.
그리고 때로는 젊은이들에게 “요즘 애들은 얼마나 좋으냐? 우린 세대는 정말 고생 엄청 하며 오늘날을
만들었다”며 자랑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득 우리나라의 발전이 과연 다 우리가 노력한 덕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6.25 전쟁 때에는 유엔의 깃발 아래 16개국이 참전하여 생명을
바쳤다.
물자를 지원해 준 나라까지 합치면 총 63개국(2011년 국방부 발표)이 우리를 도왔다. 왜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었을까? 만약 그들이 그 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또 서독이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받아 주지 않았으면, 또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태도에 분개한다. 잘못을
사과하는 않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신세 진 나라와 사람들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 또한 매우 잘못된 일이다. 문득 우리나라는 여러 형태로 우리를 도와 준 나라와 사람들에게 충분히
감사의 표시를 하였는지 걱정이 된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룬 기적을 생각하면, 우리의 감사는 아무리 정중해도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조금씩이나마 여러 외국을 돕고 있다.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행여 은혜를 베푸는 태도로 그들을 도와서는 절대로 안될 일이다.
오히려 ‘예전에 진 빚을 일부나마 갚게 해 주십시오’하는 감사의 자세로 해야 한다. 그것이 빚진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우리나라에 머물게 하기 위한 최소 한도의 도리일 것이다.
2015-01-2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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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6>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 부부에게는 큰 아들로부터 얻은 손녀가 셋, 작은 아들로부터 얻은 손자가 한 명 있다. 우리 손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서로 저부터 우리 품에 안기려고 경쟁적으로 달려든다.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달라고 짹짹거리는 제비 새끼들의 모습이다. 우리 부부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순간 누구를 먼저 안아 주어야 좋을지 몰라 잠시 행복한, 그러나 심각한 (?) 고민에 빠진다. 일등으로 안긴 아이는 좋아하지만 그러지 못한 못한 아이는 토라지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나는 “아! 아이들은 누가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구나!” 깨닫는다.
그런데 돌아보니 저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린 손주들뿐이 아니었다. 아들 며느리도, 부모님도,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사실은 어린 손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나도 손주들이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살짝 서운해진다. 아내도 똑 같은 심정이란다. 그래서 또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사랑 받기를 갈구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화초와 같은 식물들도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가 보다.
그렇다면 사랑은 생명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예수님도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셨다 (막 12:31).
문득 하나님도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고 하셨고,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 (수 24:19)’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다시 한번 사랑은 미물(微物)에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무릇 모든 생명의 전제 조건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문제는 우리가 그 중요한 사랑을 받기만 원하지, 남에게 잘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솔직하다’라는 미명(美名) 하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솔직함은 종종 위험한 것이다. 솔직함보다는 오히려 아부가 더 유익할 때가 적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신혼부부에게 부부간의 솔직한 대화가 제일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직장인들에게는 상사에게 솔직히 말하지 말라고까지 조언한다.
상처를 줄 우려가 큰 솔직한 말 대신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관계 개선의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고 사는 어느 며느리에게 누군가가 귀뜸을 했단다. ‘석 달만 밥상에 계란찜을 올리며 “어머니 맛있게 잡수세요” 하며 웃으면 틀림없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고. 희망에 찬 며느리는 정성껏 그리 하였다.
석 달 후 어떻게 되었을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예뻐하게 되었고, 이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정말로 돌아가실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며느리의 가짜 사랑(아부)이 고부(姑婦) 간의 갈등을 참 사랑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가짜 사랑이 이 정도일진대 참 사랑은 위력은 얼마나 막강하겠는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나는 우리 교회의 많은 분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기’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감동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찔리고 부끄러워진다. 그 때마다 나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제 입술을 주장하사 상대방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나이가 들수록 웬만한 사람은 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 글은 2014년 11월 2일 온누리 교회 신문의 장로순환 칼럼에 같은 제목으로 실은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015-01-1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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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5> 한국약학 100년- 5) 약학강습회 이후의 흐름 개관
1914년 7월 17일 사립장훈학교(현 중구 장교동 장교빌딩 자리)에서 최초의 약학강습회가 열린 다음해인 1915년 6월 12일 (약춘161의 6월 13일은 오류), 같은장훈학교에서 1년제 야간조선약학강습소가 개교되었다. 강습소는 3년 뒤인 1918년에 폐지되고,같은 해 6월 21일 2년제조선약학교 (신입생 99명)가 개교되었다.
조선약학교는약춘 164에 정리한대로 잠시 옛 동대문 분서 (分署) 자리와, 남미창정 284번지 (남대문시장 남쪽)를 거쳐 1919년 5월 23일 옛 훈련원 부지 (현 중구구민회관 부지)에 목조 기와집을 낙성하여 자리 잡은 후 1920년부터 매년 2년제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4년부터는 매년 2년제 졸업생과 3년제 (본과라 부름)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즉 1924년 3월 22일에는 제5회 2년제 졸업생 (43명, 이중 한국인 14명)과 더불어 3년제 1회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다.그러므로 우리나라 근대약학교육에서 3년제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21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약학교는1926년11월 29일에는 연구실을, 1928년 5월 17일에는 강당을 신축 낙성하고, 1930년 4월 1일에는 3년제의 경성약학전문학교 (약전)로 승격 개교하게 되었다. 당시조선약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약전으로 편입시킨 후 다음 해인 1931년 3월 28일 제1회 약전 졸업생으로 졸업시켰다. 약전으로 편입하지 않은 학생들은 1931년 같은 날 제8회 (마지막회) 조선약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1933년에는 신축교사 낙성식 겸 문부성 지정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약학교가완전히 폐지된 것은 1932년 5월 1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자, 일본인 교장 등은 학교를 미군정에 넘기려고 하였다. 이에 반대한 학생들 및 도봉섭 (교장)과 이동선 (이사장) 등의 공으로 그 해 9월 학교를 인수받았다. 1946년 미군정이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기로 하자 약전도 그 이름을 (사립)서울약학대학 (3년제)으로고치게 되었다. 약전은 1947년 2월 5일 제17회로 마지막 졸업식을 가졌다.그리하여 1948년부터는서울약학대학의 이름으로 졸업생을 배출 (동년 6월 17일 제1회 3년제 졸업생 92명)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8.15) 후인 1949년, 제2회 (97명)와 제3회 졸업생 (94명)을 5개월 간격으로 배출하였다.
한편 1948년부터 서울약학대학은 전문부 (3년제)와 학부 (4년제)로 개편되어 희망자는 1년을 더 수학하여 총 4년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1950년 3월 11일 및 5월 11일에 각각 제1회 및 제2회 4년제 학부 졸업식 (각 11명)을, 5월 11일에는 제4회 3년제 서울약학대학 졸업식 (110명)을 거행하였다. 이미 1946년에약전에 입학한 학생 중 일부 희망자가 4년 후인 1950년 3월에 첫 4년제 졸업생이 된 것이다.
한편 이화대학 행림원(의약대학의 명칭)은 1945년에 3년제 약학교육을 시작한 후,1947년에는 편입시험을 통해 희망자에게 4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1949년 7월, 한국 최초의 4년제 약학사 55명을 배출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4년제약학사의 배출에 있어서 이화여대가 서울약학대학보다 8개월 앞서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과 9.28 수복을 거친 뒤인 9월 30일 한구동 등의 노력으로서울약학대학은 국립서울대학교 (초대학장 한구동)에 편입되었다. 한편 전시, 즉 부산 피난 시절에는 성균관대, 부산대, 중앙대, 숙명여대 등의 약학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 동안 을지로 6가에 있던 약학대학 교사는 서울대 음악대학 자리로 교사를 옮겼다가, 1959년 8월 17일 종로구 연건동 28번지로 다시 옮겨교사를 신축하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6년 후인 1975년 8월 25일에는 다른 단과대학들보다 뒤늦게서울대 관악캠퍼스로 이전 합류하여 오늘의 관악 시대를 열게 되었다.
2014-12-17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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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4> 한국약학 100년- 4) 조선약학교
1. "시대가 요구하는 藥劑師, 이번에 새로 생기는 조선약학교"1918년 4월 28일자매일신보에위 제목 하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경성에 약학교가 생긴다 함은 이미 보도한바 있다. 이에 대하여 창립 고문인 총독부의원 약제관 요시끼 (吉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설립을 계획한 조선약학교는정말로 약에 대한 학문을 알아 상당한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다.종래 경성에는 사립 조선약학강습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16년4월에 조선약제사 시험규칙이 발포된 뒤에 조중응자작 이외 유력한 약업자의 주선으로 설립된 것이나 아직 완전한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학교로는 이번의 약학교가 처음이다.
그런데 강습소는 속성을 위주로 하여 극히 단기에 대강의 약학의 이론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못하여 여기를 졸업하더라도 약제사의 전기 (前期) 시험을 받을 자격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용의 문제로 후기 (後期)의 교육을 베풀 설비가 없었던 까닭이다. (중략)옛날부터조선에는한약이 비상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명한 의술이들어오면서 양약을 사용하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시대의 진운 (進運)을 따라약업이 발달하는 것은 크게 치하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종종 위험을 일으키는 자가 적지 않으니 이는 바로 약제사의 소양이 빈약하고 자격이 충분치 못한 결과로 매우 한심한 일이다.
(중략) 일본에서는 제약 산업이 발전하여 매우 훌륭한 약이 얼마든지 제조되고 있지만 조선에는제약산업이라고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략) 요컨대 지금 조선은 진실한 학문이 있고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 생기는 약학교는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약제사를 양성코자 함이다”.
2. 조선약학교의 교사 (校舍)의 역사1914년 하기약학강습회 및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는 장교통에 있는 장훈학교 교사를 빌려 써야 했기 때문에 강습회는 여름방학에, 강습소는 야간에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 조선약학교가 설립되면서 자체교사를 갖게 되었는데, 1989년 발간된 <일본식민지교육정책사료집성 vol. 50> 내에 있는 ‘경성약학전문학교 일람’으로부터조선약학교의 교사와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18년 6월 1일조선약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장소는 종로 5정목에 있는 [구 동대문 분서 (分署) 자리]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린 가건물이었다. 동년 6월 21일 99명의 신입생으로 개교식을 거행하고 수업을 개시하였다.(2) 1918년 8월 1일에는 학교 위치를 남대문 시장 남쪽의南米倉町 284번지로 변경하는 인가를 받았다. 동년 10월 9일에는 총독부에서 무상으로 빌린 구 훈련원 부지 2000여 평 (황금정 6정목 18 번지, 현재 을지로 6가 중구구민회관 부지)에서 교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 (地鎭祭)를 거행하였다. (3) 1919년 5월 23일, 상기 황금정 6정목에 목조 기와집 (사진 1, 출처: 홍현오 저, 한국약업사, 약업신문사, 1972)을 낙성하여 학교를 이전하고, 동년 6월 2일 신교사에서 시업식을 거행하였다. 서울대 약대 동창회는 1991년 이 자리에 서울대 약대 교적비 (사진 2)를 세웠다.
2014-12-01 1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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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3> 한국약학 100년- 3) 조선약학교의 설립
1. 부산일보 기사
1918년 4월 20일자 일본어로 쓰여진 부산일보를 보면 경성의 유지들 사이에서 ‘조선약학교’가 설립된다는 기사 (사진 1)가 나온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학교의 전신 (前身)은?2년전 (즉 1915, 필자 주)부터 경성 장교통 (長橋通)에 경성약학강습소 (조선약학강습소를 칭하는 것일 듯; 필자 주)가 생겼는데 졸업연한은 1개년으로 4월에 입학하여 다음해 3월에 졸업하였다. 매년 조선인 50명과 일본인 30-40명이 졸업하였다. 이 강습소 졸업생은 약종상 (藥種商)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을 뿐이었다.
규칙의 발전그런데 우리 조선에 작년 (1917년, 필자 주)부터 ‘조선약제사시험제도’가 생김으로써 조선인에게 약제 (藥劑)에 관한 지식을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지인 (內地人, 즉 일본인, 필자 주)과 마찬가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시험의) 정도는 내지의 약제사 시험보다 약간 낮을지 모르지만 조선에서는 훌륭한 약제사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제사 양성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약제사를 양성하는 학교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 동안 경성의 유지들이 여러모로 걱정을 해 왔는데, 이번에 아라이 (新井虎太郞)와 야마기시 (山岸雄太朝)라는 두 사람이 발기인이 되어 조선약학교 설립 인가 신청을 해당 부서에 제출하게 되었다. 총독부도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인정하여, 아직 정식 인가가 나지는 않았지만, 연간 3000원의 보조금을 내려 보내기로 내정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내용은?교사 (校舍)는 토지조사국의 옛 관사 (官舍)를 물려 받아 금년 6월경에 개교 (1918년 6월 21일 조중응을 교장으로 하여 창설하고 조선약학강습소는 해체함; 필자 주)하도록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학교의 졸업기한은 2개년으로 교수과목은 제1학년에는 수학, 어학, 물리학, 화학, 식물학, 생약학, 제약화학을 가르치고, 제2학년에는 제약화학, 분석학, 약국방 (약전학, 필자 주), 약품감정, 위생화학, 조제학 및 이들에 대한 실습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자격과 교원입학자의 자격은 내지인 (일본인)의 경우 고등소학교 (심상소학교; 필자 주), 조선인의 경우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로 한다. 제1회 입학생 수는 일본인과 조선인 합쳐서 약 50명으로 할 예정이다. 이 학교의 교장으로는 창립위원장인 조중응 자작이 취임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기타 고문 겸 이 학교의 교원으로는 약학사 (藥學士)인 고지마 (兒島高果), 요시끼 (吉木彌三)씨가 맡는다고 한다.
야간도 개교이 학교는 주간뿐만 아니라, 주간에는 바빠서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에 있는 사람들 (예컨대 약업계의 종업원이나 책임자)을 위해 야간에도 가르치기로 하였다.
2. 매일신보 기사한편 1918년 4월 19일 매일신보 (사진 2)를 보면, “조선약학강습소는 1915년 6월 설립 이래로 졸업생 50인을 배출하였는데, 이번에 경성에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 약종상 유지들이 사립약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자작 조중응씨를 설립위원장으로, 약학사 고지마 (兒島高果), 요시끼 (吉木彌三)를 설립 고문으로, 아라이 (新井虎太郞), 야마기시 (山岸雄太朝), 방규환 (方奎煥), 이응선 (李應善) 등 32인을 설립위원으로 하여 설립을 연구 중인데, 설립비 3만여원은 일본인 및 조선인 유지 등이 모은 기부금으로 충당하기로 하는 등 대강의 방침이 세워졌으므로, 이번에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 50명을 모집하고 오는 6월부터 수업을 개시할 예정이다. 당국에서도 매년 경비조로 보조금을 주기로 하였다. 또 모든 졸업생에게는 약제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2014-11-19 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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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2> 한국약학 100년- 2) 근대한국약학교육의 발상지 장훈학교(長薰學校)
1. 유래
1914년 여름 국내 최초로 약학강습회가 개최된 장소는 장훈학교 (사진 1)이었다. 또 1915년 6월 13일 국내 최초로 개교된 조선약학강습소의 장소 역시 장훈학교이었다. 그러므로 장훈학교는 우리나라 근대약학교육의 발상지인 것이다. 이 장훈학교는 이회영 등의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로, 약학강습소 이외에도 다양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강습소들에게 교사(校舍)를 빌려주어 야학(夜學)의 형태로 수업을 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장훈학교는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있다. 현재 영등포에 있는 장훈고등학교의 홈페이지 (http://www.janghoon.hs.kr/?_page=11)를 보면 이 학교는 1907년 11월에 ‘사립 경성장훈학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장훈(長薰)’이란 교명(校名)은 학교 설립을 기획한 박헌정(朴憲正(憲榮))의 아버지인 충남의 유학자 박준근(朴駿根)이 당시 학교의 소재지였던 한성부 중부의 장통방(長通坊)과 남부의 훈도방(薰陶坊)의 첫 글자 ‘장(長)’과 ‘훈(熏)’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 이름에는 「새 시대에 적응할 새 교육을 실시하여 한민족의 도의적 향훈(香薰)을 장구하게 유지 발전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교사는 1950년 6•25전쟁시 파괴되었는데 수복(修復) 후 우여곡절을 거쳐 영등포구 신길동 2번지 (구 해군본부 내)에 새 교사를 건축하고 1955년 1월 정식으로 장훈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고, 1962년 현재의 주소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로 64길 26번지)로 이전하였다. 1964년 1월에는 장훈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고, 1971년 11월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었다.
2. 위치그러면 장훈학교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 학교는 당시 경성부 황금정 2정목 장교통 (京城府黃金町2丁目長橋通)에 있었다. 경성부란 지금의 서울특별시를, 황금정 2정목은 지금의 을지로 2가 (을지로 입구~을지로 3가 사이)를, 장교통(長橋通)은 중구 장교동과 종로구 관철동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다리인 장교(長橋,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長通橋라고 부름) 부근의 거리를 말한다.1914년에 발행된 <경성부시가강계도(京城府市街疆界図, 사진 2)>를 보면 이 장훈학교가 나와 있다. 장교통은 해방 후 장교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1년도 <부동산소유권이전등기청구사건 (서울고법 1961.11.30, 4292민222∼225)>의 판례를 보면 경성사립장훈학교의 당시 주소는 서울시 중구 장교동 39번지이었다. 1946년도에 제작된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해가며 추적해 본 결과, 이 주소는 현재의 장교빌딩 혹은 서울고용노동청이 있는 곳에 해당되는 것 같다. 조만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기) 1918년 조선약학교가 설립되어 독립적인 교사를 갖기 전까지 우리나라 약학교육의 장도 (壯途)를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당시의 장훈학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장훈학교의 홈페이지는 서울대 김진웅 교수의 수고로, 1914년의 지도와 장훈학교 사진은 금년 9월 1일부터 서울대 약학역사관 연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장윤이 선생의 도움으로 찾은 것임을 밝혀둔다.
(정정) 약춘 161에서 조선 최초의 약제사 시험이 1916년 8월에 시행되었다고 썼으나 동년 10월이 맞는 것 같다. 추후 확인하여 바로잡을 생각이다.
2014-11-05 10: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