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고] <221> 일본 교수 정년퇴임 기념행사 참관기
지난3월 8~11일 일본 교토(京都)대학 약제학 전공의 하시다(橋田 充)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국제심포지엄 및 퇴임 기념 축하회에 참석하였다. 내게주어진 역할은 심포지엄 advisor 및 좌장이었다. 감사하게도여비와 숙식비를 제공받았다. 오늘은 그 행사 참관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8일(수) 저녁에는 교토역에 붙어 있는 그란비아 호텔에서 심포지엄의 좌장 및 연자 들의 저녁 식사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는 미국 UCSF의 베네트(Leslie Z. Benet), 캔사스 대학의 보차드(Ronald T.Borchardt), 그리고 전 FDA의 샤(VinoidP. Shah) 박사 등 4명이, 홍콩대학의빈센트 리(Vincent H.L. Lee) 교수, 그리고 내가 초청을 받았다.
둘째 날인 9일(목)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포지엄이 열렸다. 장소는 Kyoto Research Park 내 4호관이었다. 첫 세션에서는 ‘약물송달과 약과학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빈센트 리, 하시다, 샤 박사 등이 강연하였다. 점심 시간에는 2개의 별도 방에서 유료 런천(luncheon) 세미나가 열렸다. 나를 포함한 연자와 좌장들은 2층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 식사 후 열린 두 번째 세션에서는 ‘생물약제학과 약물동태학’을 주제로 ‘세포배양과 약과학(보차드)’ 등 세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어 20분간의 커피 브레이크 후 세 번째 세션이 열렸는데, 여기에서는폴리머릭 미셀, 엑소좀, 나노메디슨 등 ‘약물송달과 물질과학’에 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뒤 5시부터 1시간동안 우리나라의 3편을 포함한 총 37편의 연구 결과가 2층 로비에서 포스터로 발표되었다.
6시 30분부터는 옆 건물에서 2시간 동안 참석자들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리셉션은 영어로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초밥 등을 서서 먹으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자리에서 나는 “옛날에는 나이 먹은 노교수들이 정년 퇴임하더니, 요즘에는 하시다 교수처럼 젊은 교수들이 정년퇴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나는 1991년 한국의 약학회에서 하시다 교수를 처음 만난 이후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라고 덕담을 하였다. 나 이외에 보차드, 빈센트 리, 리켄(理硏)의 스기야마 교수 등도 축사를 하였다.
셋째 날인 10일(금)에는 아침 9시부터 열린 네 번째 세션에서는 ‘약물송달기술을 이용한 재생 치료(타바타)’, ‘세포시트(cell sheet) 조직공학 및 임상적용(오카노)’, ‘스마트 마이크로 머신의 생물의료에의 응용(고니시)’ 등이 큰 관심을 끌었다.
20분간의 커피 브레이크 뒤에 열린 마지막 세션에서는 ‘약과학의 최전선(베네트)’, ‘약물대사와수송체 관련 과학(스기야마)’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나는 일본 교수와 함께 이 세션의 좌장을 맡았다. 이날 낮 12시 10분, 230여명이 등록한 이 심포지엄의 막이 내렸다.
그날 저녁 6시, 정년퇴직기념축하회가 그란비아 호텔에서 열렸다. 하시다 교수 부부(부인은기모노 복장)가 금색 병풍이 펼쳐져 있는 단상 우측에 나란히 앉았다. 첫 순서는 은사인 무라니시 명예교수의 축사이었다.
그가 단상으로 올라오자, 하시다 부부는 일어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무라니시 교수는하시다 교수의 옛날 대학원 생활 등을 회고 하였다. 이어 베네트 교수와 다나베미쯔비시 제약회사 회장이 비슷한 성격의 축사를 하였다. 뒤이어 야지마 명예교수의 건배사가 있은 다음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참석자들은 식사가 시작되자 이리저리로 옮겨 다니며 서로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참석자 자리에는 하시다 교수의 정년퇴직 기념지(記念誌)가 놓여 있었다. 그 책에는 하시다 교수의 연구 업적 외에 나를 비롯한 12명(일본인 1명)의 축하 편지와 추억의 사진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다시 4명의 축사와 연구실 대표의기념품 및 꽃다발 증정, 그리고 하시다 교수의 짧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3일 간에 걸친 퇴임 기념 행사가 모두 끝났다.
2017-04-05 09:38 |
![]() |
[기고] <220> 입학식 특강
지난 3월 2일 서울대학교 입학식 날 오후, 나는 약학대학 신입생들에게 ‘어떤 자세로 대학 생활을 시작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올해로 3년째 하는 특강인데, 지난 두 해에는 ‘21세기는 맞춤약학 시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었다.
참고로 올해 약대 신입생 68명 중 38명이 남학생으로, 이와 같은 남초(男超) 현상은 여초(女超) 현상이 일어난 1979년 이래 38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특강의 내용은 그 동안 ‘약창춘추’를 통해 밝혀 온 나의 주장을 정리한 것이었다. 예컨대 ‘나의 오늘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고 정직하며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인생은 미스터리이다, 복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의 처분에 달렸다’, ‘참된 의미의 성공을 추구하며 살자’,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1등이 가장 나쁜 것이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사다리를 착실히 오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인생을 좀 길게 보라’, ‘친구를 잘 사귀어라’, ‘남의 의견을 경청하라’, ‘솔직한 지적은 관계를 해친다’, ‘인생의 가치는 사랑에 있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근사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였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노교수의 잔소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랑과 정성을 다 해 강의하였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음날(3월 3일)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서울대 단어 지워라, 성낙인 총장의 쓴 소리, 입학식서 ‘특권의식 비판’ 축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성 총장님은 3월 2일의 입학식에서 ‘오늘 이후 서울대학교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입학식이 여러분 인생의 최고의 날로 그치고 그 이후는 오늘보다 못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울대 졸업생들이 그간 우리나라 최고의 파워 엘리트로 각계각층에서 활약해 왔지만 최근 그들의 모습은 부끄러운 측면이 많다. 서울대란 이름에 도취되면 오만하고 특권의식에 빠져 출세를 위해 편법을 동원하고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다고 한다.
나는 총장님의 축사 내용이 내가 그날 오후 약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 내용과 상당 부분 같은데 놀랐다. 예컨대 나는 ‘남을 딛고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고 완벽한 실패이다. 갑(甲)질은 실패한 사람의 행패에 다름 아니다. 일생을 통하여 연약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일으켜 세웠는가가 참된 성공의 한 지표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부분이 총장님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총장님처럼 최근 매스컴에 자주 회자되는 서울대 동문들의 추태(?)를 떠 올리며 이 말을 했었다.
나는 그날 서울대 학생이라면 시험칠 때 커닝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직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서울대는 정직, 겸손, 성실, 환경, 교통, 질서, 예의 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모범이 되어야 마땅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 갈 바 이상향(유토피아)을 미리 보여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민들은 서울대 학생이나 졸업생들이 서울대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세금의 지원을 받고 공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서 남을 딛고 일어서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서울대 출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런 서울대인들의 자랑질(?)을 용납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서울대 출신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한다.
서울대를 예로 들었지만 세상의 모든 ‘잘 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잘 나감이 주변의 수많은 ‘을(乙)’들의 자의반 타의반 협조(?)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을(乙)들과 더불어 더욱 겸손, 성실, 정직하게 살기로 다짐하여야 한다.
지금 나라는 촛불과 태극기로 혼돈의 와중이다. 이런 때일수록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부터 회개하여야 한다. “돌이키면(회개) 살아나리라”란 우리 교회의 금년도 구호는 “돌이키지 않으면 죽으리라”라는 절박함을 경고하고 있다.
2017-03-22 09:26 |
![]() |
[기고] <219> ‘한국제약기술교육원’ 및 ‘팜텍’의 10주년을 축하드리며
지난 2월 15일 안양에서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이하 교육원)의 창립 10주년 기념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전문가 20여명이 모여 지난 10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자축하며 식사를 나누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이 기념식은 우리나라 제약기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벤트이기에 그 때 드린 말씀을 이하에 옮겨보기로 한다. (이하 축사 전재)
제약기술•GMP 전문교육기관인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이 2007년 창립된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아울러 교육원의 창립과 동시에 창간된 GMP•제약기술 전문지인 ‘팜텍’이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것도 축하 드립니다.
이 교육원은 창립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전문가들의 강의를 통한 강의(講義) 교육과 실습(實習) 교육, 그리고 팜텍과 같은 정기 간행물 및 서적 발간을 통한 지상(紙上) 교육을 실시하여 왔습니다.
교육원은 지난 10년 동안 212회 426일에 걸쳐 6,731명에게 제약산업 전 기술분야(297 과목)에 대한 강의(실습 27회 포함)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초빙된 전문가 강사만도 205인에 이릅니다. 이 강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제약기술인들의 큰 호응을 받아 지난해에는 역대 최대의 인원(940명)이 수강을 하였습니다.
또한 교육원은 한국PDA와 공동으로 GMP 자료집인 「ICH Q7 Q&A - 원료의약품 GMP 해설서」(2012) 및 「Global GMP Q&A - 국제기구•주요국 GMP 해설서」(2015)를 발간하였으며, 한편으로 10년간 연 4회에 걸쳐 총 36권(Vol. 10, No.1)의 「팜텍」을 발간해 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에서는 30여 년 전부터 ‘팜테크재팬’이라는 GMP•제약기술 전문지가 월간으로 발간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팜테크재팬의 높은 수준에 감탄하며 부러워만 하고 있을 때에, 백우현 박사님(한국제약기술교육원 원장•한국PDA 회장)은 과감하게 팜텍을 창간하셨습니다. 제약기술서 불모의 이 땅에 개척자의 사명감으로 밀알 하나를 심은 것입니다.
그 동안 팜텍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내 전문가를 필진(筆陣)으로 적극 발굴하여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향상에 필요한 글들을 집필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팜텍은 이제 외국 잡지의 논문을 번역해 싣는 모방잡지의 수준을 뛰어 넘어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독창성 있는 논문을 싣는 품격 있는 잡지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제약기술의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팜텍이라는 우리 나름의 제약기술•GMP 잡지를 갖게 된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백우현 박사님을 비롯한 편집위원님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일입니다.
백우현 박사님은 2011년에는 ‘의약용어사전(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그 때 저는 축사를 통하여 “이 사전이 발간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나라의 체면(體面)이 서게 되었다”라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백우현 박사님은 팜텍의 발간을 통하여 우리나라 제약기술계의 체면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나라 식약처는 2014년 PIC/S 가입에 이어 작년에 ICH 회원국이 되는 쾌거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러한 쾌거를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우리나라 제약기술 및 의약품 안전관리 기술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제약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오신 제약기술자 여러분들과 팜텍 및 교육원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약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앞으로 교육원과 팜텍이 더욱 더 질과 양의 면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지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의약품 안전관리 선진국이 되어야 할 우리나라의 제약기술계가 마땅히 품어야 할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교육원 및 팜텍의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2017-03-08 09:11 |
![]() |
[기고] <218> 심양약과대학을 보기 전에는 약학대학의 규모를 논하지 말라
작년 12월 (18-21) 중국 요녕성 본계시(本溪市, Benxi city)에 있는 심양약과대학(瀋陽藥科大學, Shenynag Pharmaceutical University)을 방문하였다. 이 대학은 원래 심양시에 있었는데, 본계시가 야심차게 ‘약의 수도(藥都, China Medicine Capital)’를 시(市)의 비전으로 선포하면서 최근 20km 떨어진 현재의 연구단지 안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 대학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 1931년 강서성 루이진(서금, 瑞金)에 설립된 중국공농홍군 위생학교(中國工農紅軍 衛生學校)가 그 기원이라고 한다.
이 대학을 보면 누구나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된다. 이 대학은 3개의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계 캠퍼스만 해도 부지가 120.35만㎡, 건축면적이 51.2만㎡나 된다. 여기에 본부 캠퍼스와 철서(鐵西) 캠퍼스까지 합치면 총 부지면적은 143.5만㎡, 건축면적은 70.8만㎡에 이른다. 약대가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411만㎡)의 1/3 이상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조직도 놀랍다. 이 대학은 약학과 관련된 모든 학문을 교육하는 종합대학(university)으로 약학대학(藥學院), 제약공정대학(製藥工程學院), 중약대학(中藥學院), 생명과학 및 생물제약대학(生命科學 及 生物製藥學院), 공상관리대학(工商管理學院), 의료기기대학(醫療器械學院), 기능성식품 및 와인대학(機能食品 及 葡萄酒學院), 무애대학(無涯學院, 석박사 통합과정, 8년. 무애란 학문에 끝이 없다는 뜻), 사회과학 및 문체대학(社會 及 文體學院, 문체란 문화와 체육을 뜻함), 평생교육대학(繼續敎育學院), 역홍상대학(亦弘商學院, business school, MBA 과정 포함) 등 무려 11개 대학(college, 學院)이 설치되어 있다.
이 11개 대학 모두가 다 우리의 약학대학에 해당되는데, 이 11개의 대학에 총 20개의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20개 학부는 학부 별로 신입생을 모집하지만 졸업생은 학부에 관계없이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면 약사면허를 받을 수 있다.
약학대학에는 5개의 학부, 즉 약제학부, 약학부, 약물분석학부 외에 영어 약학부와 일어 약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다른 10개 대학(college)에는 천연약물학, 약물화학, 약학개론, 분석화학, 화학제약공정학, 생물기술제약 학부 등의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세번째로 놀라운 것은 학생 및 교직원의 수이다. 이 대학의 작년도 신입생 수는 무려 1,853명이었으며, 재학생 수는 학부생 8,345명, 대학원생 2,485명(박사과정 465, 석사과정 2,020), 평생교육과정 5,024명이었다.
약학대학에는 작년에 약제학부에 245명(37.1%), 약학부(약리학 및 약물독성학)에 229명(34.7%), 약물분석학부에 31명(4.7%), 영어약학부에 92명(14%), 일어약학부에 63명(9.5%) 등 총 660명이 입학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약학대학에 한하여 5년제의 영어약학 및 일어약학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학부는 영어 또는 일본어로만 약학 수업을 한다. 이 대학 최고 엘리트 교육 과정인 무애대학의 수업연한은 8년이다. 나머지 학부의 수업연한은 모두 4년이다.
교직원의 수는 무려 1,162명에 이른다. 그 중 연구교육직만 671(교수 114, 부교수 22 포함)명이다. 이 대학의 학생과 교직원수만 해도 우리나라 약대 전체보다 더 많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 남경(南京)에 있는 중국약과대학(작년 신입생 2,450명)과 광주(廣州)에 있는 광동약과대학(한 학년 5,000명)의 규모가 심양약과대학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약학 관련자, 보건복지부 및 교육부 공무원들이 중국 약대들을 살펴 본다면 우리나라 약학대학의 바람직한 규모에 대한 그들의 기존의 생각이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연세대학교 약학대학에 재직 중인 심유란 연구교수(심양약과대학 출신)의 도움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혀둔다.
2017-02-22 09:38 |
![]() |
[기고] <217> 일등들의 돌이키기
요즘 한 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국회, 검찰, 특검이나 헌재에 불려 나가는 모습이 티브이에서 끊이지 않는다. 이들을 보면서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하신 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분은 ‘잘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위험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깨달아라’ 하셨다. 그러면서 “인생에서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강조하였다.
사람들은 일등을 좋아한다. 특히 부모는 자식들이 모든 면에서 일등(一等)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등만 좋아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아프리카 밀림에 간 두 사람(A, B)이 갑자기 사자를 만났단다.
A는 체념을 하고 가만히 서 있었으나, B는 A보다만 빨리 도망 가면 잡아 먹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잽싸게 내달렸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놀랍게도 사자는 이왕이면 싱싱한 먹이가 좋겠다고 생각하여 발이 빠른 B를 잡아 먹었단다. 일등을 하는 것이 죽을 수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약창춘추 32. ‘일등의 운명’ 참조).
우리는 우리의 인생 항로의 끝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사자의 입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지 못한다. 사자의 입이 기다리고 있다면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그저 무조건 빨리 달리라고만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강요하는 그 일등의 길이 어쩌면 아이를 ‘죽음에 내 모는 길’일지도 모르는 체 말이다. 요즘 법정에 불려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한 때 엄청 잘 나가던, 말하자면 ‘일등’을 하던 사람들임을 생각해 보면, 무조건 일등을 추구하는 ‘일등 철학’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 되는지 실감하게 된다.
오래 전 일본 정계에서 부패 스캔들이 터졌을 때 “스캔들의 주역들이 대개 동경대학 출신이니 특히 동경대 교수들은 입을 다물라. 제자들을 잘못 가르쳐 놓고 이제와 무슨 염치로 정의를 떠드는가?”라는 취지의 글을 일본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인 사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울대 교수나 출신들은 앞장 서 회개하라, 국민들에게 사과해라!”
잘 나가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뛰어난 능력을 세상에 모범을 보이며 사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린 명예와 권력과 부는 모두가 다 세상에서 받은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 감사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만약에 그들이 그 좋은 머리와 능력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선점(先占), 독점(獨占)하고 사람들 머리 위에 군림(君臨)하려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받은 축복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뿐더러 세상의 대접에 대한 배신(背信)이다. 잘못된 길의 끝에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올해의 표어는 “돌이키면 살아나리라”이다. 이는 우리 교회부터 회개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밀알이 되자는 취지일 것이다. 이 표어를 뒤집어 보면 ‘돌이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말이 된다.
사람이 독약을 잘못 먹었을 때 우선 그 독을 돌이키지(吐하는) 않으면 죽는 것처럼, 교회나 세상도 잘못 들어선 길을 돌이켜 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머지않아 다 죽을지도 모른다. 돌이키지 않고 잘못된 길로 열심히, 빨리 달리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복을 받으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바른 길로 들어서라고’.
그러면 어떤 길이 바른 길일까? 나의 능력 밖의 일이지만, 감히 생각하자면 일단은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정직 성실한 태도로 세상을 삶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올해는 우리 교회와 서울대 등 소위 세상의 많은 일등 들의 돌이키기 운동이 세상을 덮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모범을 따르게 되고 마침내 나라와 세상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달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요즘에 바라는 나의 기원이다.
2017-02-08 09:10 |
![]() |
[기고] <216> ‘서울대약대100년사’ 발간 소감
서울대 약대 이봉진 학장은 조선약학강습소 설립 100주년인 2015년 6월 12일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한 데 이어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이하 ‘100년사’)’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그 편찬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이상섭, 김낙두, 김종국, 김병각, 이은방 명예 교수님 등의 자문과 김진웅, 박정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2016년말 원고를 탈고하고 마침내 2017년 1월 20일 100년사 발간기념회를 열게 되었다.
이 책의 발간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에 대한 근거 자료를 발굴해 준 장윤이 학예사의 탁월한 수고에 특별히 감사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100년사는 야담(野談)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고 수정 및 보완 과정을 잘 참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고의 미세한 오류까지 찾아내고 개선안을 제시함으로써 책의 완성도를 대폭 높여 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의 수고에도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단언컨대 다른 출판사라면 이 과정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약학사 연구발전기금 또는 발간비 후원을 통해 이 책의 발간을 격려하고 후원해 주신 동문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처음에 이 책을 구상할 때에는 100년의 역사 중 초반부에 중점을 둘 생각이었다. 초반부의 역사는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회이니 관악산 캠퍼스 시절도 함께 다뤄달라는 주변의 부탁이 있어 결국 최근의 역사까지도 기술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악 캠퍼스 시절은 42년이나 될 뿐만 아니라 교수와 학생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뤄야 할 내용이 방대하였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현직 교수들의 협조를 받기는 하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원래 2016년 9월말까지만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나 편찬 과정이 지연되면서 2016년 연말까지 일어난 사항을 일부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 100년간의 발자취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컨대 약학대학의 을지로 캠퍼스나 연건동 캠퍼스에 대한 전경 사진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이었다.
한편 이 책을 편찬하면서 몇 가지 특별한 소득을 얻었다. 우선 전에는 은사님들의 강의가 부실하였다는 등 학교에 대한 불만을 많았었는데, 이번에 100년간의 역사 전체를 개관하다 보니 은사님들은 그 때 그 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부산 피난 시절에도 휴강도 없이 강의와 실습을 성실하게 진행하신 은사님들의 열정에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오늘날 서울대 약대의 연구력이 세계 일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바탕에는 은사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소득은 다수의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일제 하 1919년의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바람에 약학대학 동창회 명부에 그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속히 학적을 복원하여 그 분들의 명예를 높여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소득은 선배님들이 1960년의 4.19 혁명에 참여한 일을 밝힌 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생들’ 이라는 설명과 함께 흰 가운을 입고 데모하는 사진이 실렸었는데, 실은 이는 약대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었다.
편찬위는 17회 김병년 선배 등의 도움을 받아 사진 중 인물 하나 하나에 실명을 붙임으로써 사진 중 학생들이 약대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추후 동아일보에서 정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책이 발간 단계에 이를수록 편찬 초기에 충만했던 자신감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편찬인의 능력 부족으로 일부 사실이 누락되거나 부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학교 중심으로 기술하다 보니 동문들의 활약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디 동문을 비롯한 독자 제현의 관용을 부탁 드린다. 근하신년!
2017-01-25 09:25 |
![]() |
[기고] <215> 믿음 이야기
1. 교회에 다니는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들의 부인은 ‘자기 남편의 믿음이 예전보다는 좋아졌지만 궤도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남편들이 아내의 훈육(訓育) 대상인 것은 교회에서도 처지가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개미끼리 모이면 큰 개미도 있고 작은 개미도 있을 것이다. 큰 개미가 작은 개미 앞에서 덩치 자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엔 개미란 그저 다 땅바닥에 붙어 있는 작은 생물일 뿐이다. 개미가 덩치가 커 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마찬가지로 교인들 간에 믿음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교인의 믿음의 크기가 다 비슷비슷하다는 뜻은 아니다. 강렬하게 예수님 향기를 풍기고 순교하신 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엄청난 믿음의 본을 보이신 훌륭한 교인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 같은 보통 교인들은 믿음의 크기를 비교하기에 앞서 부족함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말이다.
2.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여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職分)이나 사역(使役)을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마음에서 그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해진 다음에야 어떤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꼭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제 내 믿음이 굳건해 졌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믿음 가운데에서나마 직분을 맡거나 사역을 감당하면 그 때부터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위장된 교만이거나 반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나는 처음 장로가 되었을 때 정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두렵고 떨리고 거북한 심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회중(會衆) 앞에 서서 대표 기도를 할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기도를 올려도 되는지’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가 지나고 대표 기도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정말 뻔뻔하고 두려운 일이다.
4. 나는 늘 문 아무개 목사님의 간증(干證)을 기억한다. 그 분은 옛날에 직업상 술을 마시고도 주일이면 습관처럼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예배에 참석한 그가 입을 열어 찬송가를 부르자 옆에 앉은 부인이 ‘술 냄새 나니 입을 다물라’고 했단다. 그 순간 그는 ‘나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에 생각이 미치면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많은 기성 교인들의 행태가 기독교의 전도를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더 나빠요' 소리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비교인들의 도덕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인들이 남을 구원하겠다고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모습이겠는가? 그러므로 교인들은 전도에 앞서 우선 비교인의 모범이 되는 생활부터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주제 넘지만 내가 생각하는 믿음의 큰 바탕 중 하나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 은혜로 주어진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물론 이웃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 및 이웃에 겸손하게 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되며, 나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믿음 생활은 성경 구절 많이 암송하는 수준을 벗어나,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칫 이단(異端)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이쯤에서 내 사설 학설을 덮기로 한다.
2017-01-04 09:38 |
![]() |
[기고] <214> 유머의 유익성
C 교수님은 유머에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계신 것 같았다. 한번은 ‘어떻게 그렇게 유머를 잘 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자기도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분의 유머는 연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나를 만나자 마자, “심박사, 나 이 구두 새로 샀는데, 왼쪽 한 짝에 20만원 주었어”하는 것이었다. 당시 구두 한 켤레는 비싸 봤자 20만원 하던 때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 구두가 그렇게 비쌉니까?” 물었다. 그랬더니 그 분은 “근데 왼쪽 하나만 사면 오른쪽은 무료로 주더군”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완전히 C 교수님의 유머를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사는 데 유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아직도 유머를 즐기는 사람을 조금 가볍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나는 C 교수님과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면서 그 분의 유머가 어떤 면에서 유익한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유머는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C 교수님과 함께 있어 보면 유머의 힘이 그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유머를 주고 받다 보면 근엄한 표정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의 심각한 이야기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면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경우가 많다. 반면에 유머는 그 자리를 즐겁게 만들 뿐만 아니라 헤어지고 나서도 뒷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C 교수님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그 분의 유머에 입이 아플 정도로 계속 웃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C 교수님이 하면 같은 이야기라도 감칠 맛이 살아난다. 과연 C 교수님은 유머의 달인이시다. 한편 C 교수님한테 들은 유머를 곧장 행정실 직원들에게 전했다가 냉소(?)를 산 교수님도 있었다고 한다. 유머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세상을 살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을 헐뜯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사람 도리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심지어 교회에서도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정의’의 이름으로 남을 정죄(定罪)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사람과 세상을 파괴시킬 뿐이다. 반면에 유머는 최소한 대화를 험담으로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내가 C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교훈이자 지혜이다. 그러므로 유머는 ‘사랑이 없는 정의’보다는 훨씬 세상에 유익해 보인다.
나는 유머 면에서 C 교수님의 수제자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 분처럼 되도록 대화의 상대방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다. 엄숙주의는 천성적으로 나한테 맞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도 밖에서 친구분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에는 의외로 유머가 많으셨다. 물론 집에서는 근엄한 척 하셨다. 그러고 보면 유머를 좋아하는 나의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모양이다.
아버지와 나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체격이 왜소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유머가 왜소한 사람들 공통의 생존 전략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덩치 큰 사람이 무서우니까 그 사람이 화나지 않도록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으로 유머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문득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의 평균 체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왜소하다는 통계가 있는지 알아 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머를 좋아하는 내가 조금은 비굴해 보이기도 한다. 부디 내 추론이 맞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C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유머 하나를 추가한다. 순경이 도망가는 도둑놈을 향해 “게 서거라” 외치며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도망가던 도둑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 서더니 “야, 너 같으면 서겠냐?” 이렇게 말하곤 다시 도망 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였으면 그 바쁜 도둑놈이 이런 대꾸를 하였겠는가?
말 되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6-12-21 09:38 |
![]() |
[기고] <213> 관악 약대의 아버지 김영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현재 세계의 약대 중에서 교수 1인당 발표 논문수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공인 받고 있다. 1915년에 첫걸음을 뗀 조선약학강습소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하였던 우리나라의 약학이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1975년 8월 서울대 약대를 연건 캠퍼스에서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1968년에 마련된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학교는 서울, 경기 등지에 분산되어 있던 각 단과대학들을 세 개의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즉 농대(수원 캠퍼스), 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생약연구소 등(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제외한 단과대학은 모두 관악산에 마련하는 신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약대 교수들은 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떠나 관악 캠퍼스로 합류하고 싶었다. 그것은 장소가 비좁아 장래 발전 가능성이 낮은 연건 캠퍼스를 벗어나 광활한 관악 캠퍼스에서 많은 타 학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발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연건 캠퍼스에 남았다가는 의대의 등살(?)에서 벗어 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 약대의 김영은(金泳垠) 학장(재임기간 1969.4-1972.9)은 틈만 나면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총장실을 찾아가 ‘총장님, 약대도 관악으로 보내주지 않으려거든 내 학장직을 잘라 주시오’ 하며 강경하게 관악 이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메디컬 캠퍼스의 명분이 워낙 그럴듯하였고, 더구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의대 출신인 한심석(韓沁錫) 박사이었기 때문에, 약대가 메디컬 캠퍼스를 벗어나 관악으로 이전하겠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때로는 벽창호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이었던 김영은 학장의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총장실을 방문하여 총장에게 약대의 이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장실 앞 복도가 시끄러워져 문을 열고 내다 보니 상과대학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려고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상과대학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제학과는 사회대학으로, 경영학과는 경영대학으로 나뉘게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결사 반대하는 상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총장실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수위 등도 당황한 나머지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문을 열고 나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대성 일갈하였다. “도대체 자네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난리를 치나? 당장 물러가지 못하나?” 갑작스런 김학장의 위세에 눌린 학생들은 주춤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수위 등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난입을 막아낸 것이다. 총장은 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김 학장이 다시 총장을 찾았더니, 총장이 먼저 김 학장에게 “약대가 꼭 관악으로 가야겠습니까?” 물었다. 김 학장이 ‘물론입니다’ 대답했더니 총장은 "그럼 건설 본부장을 한번 만나 보세요” 하더란다. 총장은 총장실 점거 사태를 막아 준 김 학장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당시 건설 본부장은 서울대의 관악 이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임명한 월남전 참전 예비역 장군이었는데, 김 학장이 사전에 설득해 놓았기 때문에 약대의 관악 이전에 순순히 찬성하였다.
마침내 1971년 4월에 시작된 1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약대가, 2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어 1974년 4월에 공사에 착수, 1975년 8월 관악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은 학장이 상대 학생들의 총장실 난입을 막아내는 해프닝이 없었다면 서울약대가 연건동을 벗어나 관악으로 이사 올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 김영은 학장을 ‘관악 서울 약대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
이상은 며칠 전 당시 학생담당 학생과장이었던 김병각 교수가 김영은 학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내게 전해 준 내용이다. 역사의 뒤안길은 돌아볼수록 흥미진진하다.
2016-12-07 09:38 |
![]() |
[기고] <212> 대단함과 훌륭함
지난 일요일 점심 식사 모임에 갔더니 내일 모레가 칠순인 한 친구가 아침에 10km 마라톤을 뛰고 왔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은 “정말이냐? 며칠 전도 아니고 바로 오늘 아침에 그 정도 뛰었다면 앓아 들어 눕는 게 마땅하지,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스레 나와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넌 사람도 아니다” 라며 그 친구를 힐난(?)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그 친구 건강의 ‘대단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이 친구가 진짜 ‘대단하다’고 감탄한 대목은 그가 몇 년 째 매일 저녁 10km 이상을 꾸준히 달려왔다는 사실이다.
끊임없는 꾸준함, 뛰기 싫은 날에도 뛰는 정신력, 달릴 때의 인내력, 이 모든 점에서 그 친구는 남들과 다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티브이 프로그램에 “생활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재주를 갖고 있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달인들을 소개한다.
예컨대 쌀 한 톨에 여러 글자를 새기는 사람, 종이를 접어 온갖 모형을 만드는 사람, 만두를 빚어 등 너머로 던져 접시에 들어 가게 하는 사람 등 끊임없이 출연시키고 있다. 볼 때마다 “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세상에 이런 ‘대단한’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방면에 타고난 재주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그런 경지에 오를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반복 동작을 하거나 반복 훈련을 해 낼만한 은근과 끈기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을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훌륭하다’고 부르기까지는 않는 것 같다. ‘대단하다’와 ‘훌륭하다’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함’과 ‘훌륭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대단함’은 ‘보통’과 ‘훌륭함’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개념 아닐까 한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보통’이 ‘대단함’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아마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타고난 재주에 더하여 은근과 끈기, 정신력, 노력, 인내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단함’이 ‘훌륭함’으로 승화(昇華)되기 위해서는 무슨 덕목이 추가로 필요할까?
지난 9월 교회 식구들과 함께 여수에 있는 고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다녀 왔다. 손양원 목사는 1939년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였는데, 1948년 공산주의 반란군에 의해 사범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총살로 잃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국군에 의해 살해범이 체포 되어 총살 당할 상황이 되자 손 목사는 계엄사령관에게 간청하여 그를 살려냈다. 그리고 손 목사는 그를 바로 양자로 삼았다. 막내 딸은 ‘오빠를 죽인 살해범을 살려주는 것 까지는 몰라도 그를 양자로까지 삼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울며 항변하였단다.
손 목사는 그 딸에게 “네가 성경을 잘못 읽었구나.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용서까지만 하라고 했더냐?” 하며 끝내 살인범을 양자로 삼았다. 손 목사는 1950년 6.25 동란 때 주변의 강권을 물리치고 혼자 남아 한센인들을 지키다가 끝내 48세 나이에 총살을 당해 순교하였다.
내가 보기에 손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나타나신 예수님이었다. 손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행적을 보이며 살다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단순한 ‘대단함’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피조물인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훌륭’해 질 수 있는지 그 극대치를 보여 주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거룩한 ‘훌륭함’이었다고 불러도 모자랄 것이다.
그의 ‘거룩한 훌륭함’은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한 것일까? 얼핏 믿음, 감사, 겸손, 정직, 사랑, 희생 같은 단어들이 입술에 맴돌지만 이 모든 단어를 조합해서도 손 목사님의 그 거룩한 ‘훌륭함’은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음을 느낀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 나아가 ‘거룩한’ 사람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작금의 정국이다.
2016-11-23 09:38 |
![]() |
[기고] <211> 뭘 알아야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하지
1. 1989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퍼듀 대학에 가 있을 때 가족과 함께 LA공항에 내린 적이 있다. 귀국 전 미국 서부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가는 길이었다. 그 때 그 근처에 사는 대학 동기 A가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달려가던 그가 내게 “야, 이 차 느낌이 좀 특별하지 않냐?”고 물었다. 무식한 나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차가 속도를 낼수록 착 가라 앉는 느낌이 들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길래 다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 차가 그 유명한 독일제 BMW라는 차인데 가격이 매우 비싸지만 승차감이 최고’라는 사실 등을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BMW라는 이름도 못 들어 보았으며 승용차의 승차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촌 놈이었다. 그래서 그 차나 승차감에 대해서 감탄의 말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BMW를 제대로 알아 보았다면, “야, 너 출세했구나, 이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니다니 얼마나 좋니, 정말 부럽다” 이렇게 반응했을 텐데…. 그 때 무식해서 친구를 부러워해 주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미국에 처음 간 1988년 뉴욕에 사는 친구 B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미국식 2층 단독주택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자기 집 소개를 마친 그는 우리 가족의 무덤덤한 반응에 다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들로부터 “와, 집이 정말 크고 좋다. 이 집 비싸지? 야 너 미국 와서 진짜 출세했구나”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간 1970년대의 우리나라의 집들은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처럼 멋진 2층집을 장만한 것은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는 이미 우리나라 집들도 제법 좋아져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집은 다 크고 멋있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그의 집에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가용 차를 갖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응, 우리도 차가 하나 있어”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데 왠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조국 대한민국의 갑작스런 발전은 오직 반가워만 하기에는 무언가 다소 심사가 복잡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B가 자기 집을 보여 주었을 때 조금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3. 1989년 약 1년간의 방문교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 늘 고마웠던 국내의 대학동기 C에게 골프 클럽 한 세트를 사다 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미제 한 세트를 미국 가격으로 사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C는 어느 날 내게 ‘머리를 얹어 준다’며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국의 연습장에서 몇 번 연습을 해 본 이래 처음으로 내가 한국의 골프장에 나간 날이었다. 둘이서 호젓이 골프를 치는데, 어느 순간 C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가 ‘이글’을 쳤다며 떠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골프를 치다 보면 규정타 보다 한두 개 적게 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나 생각하였다. ‘이글’이라는 용어도 나는 그 때 처음 들었다.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골퍼 들은 이글을 치면 ‘기념패’를 만들거나 기념식수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이글”을 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C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글을 쳤는데도 내가 알아 주지 않더라’고 투덜대곤 하였다.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된 C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마음껏 축하해 주고 널리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주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지나고 보니 뭘 몰라서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해주지 못해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회상된다.
2016-11-09 09:38 |
![]() |
[기고] <210> 여수 밤바다
지난 9월 마지막 주말에 단체로 여수 관광을 다녀 왔다. 개인적으로 여수를 방문한 적은 두 번 있었지만 단체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절 버스에서 맨 처음 내린 곳은 여수시 만흥동에 있는 ‘여수레일바이크’였다.
레일바이크는 철로 위에 놓인 수레를 4~6명이 함께 페달을 밟아 달리는 기구이다. 처음 타보는 것이었지만 바닷가에 놓인 약 2km의 철길을 왕복하는데 의외로 힘도 들지 않고 무척 재미있었다. 마침 바람도 선선하였다.
요금은 승차인원수에 따라 1인당 2~3만원 정도 하였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조금 가는데 어디선가 “이쪽을 보세요” 하는 스피커 들리길래 흠칫 쳐다 보았더니 그 순간 저 만치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 카메라가 “찰각” 소리를 내며 우리들을 찍었다.
그 카메라는 레일바이크 마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해진 코스를 왕복한 다음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바이크에서 내려보니 아까 자동 카메라가 찍은 사진들이 컴퓨터 화면 위에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좋은 지점에서 찍어서 그런지 모든 사진이 제법 잘 나왔다. 가격을 물었더니 프린트 한 사진 1장에 5천원이고 액자에 넣으면 1만원이란다. 모처럼의 여행인데 돈 좀 쓰자 마음먹고 액자에 넣은 우리 팀의 사진 3장을 사서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돈은 냈지만 레일바이크 사진도 모든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부두에 가서 크루즈 여객선을 타고 돌산대교 밑 여수 앞바다를 1시간반에 걸쳐 왕복하였다. 바다는 잔잔하고 여객선은 제법 커서 뱃멀미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갑판에 올라 탑승객들과 테이블에 섞여 앉으니 마침 바람도 시원하고 두루 보이는 야경도 최고이었다.
문득 ‘여수 밤바다’ 라는 노래가 있었던 것 같아 휴대폰으로 찾아 보았다. 버스커버스커라는 신기한(?) 이름의 가수가 부르는 이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중략),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후략)”. 갑판 위에서 여수 밤바다를 구경하는 데 딱 맞는 분위기의 노래였다.
이 여객선의 탑승료는 어른 1인당 3만4천원이었다. 결코 싸지 않은 요금이었지만 사람들은 ‘돈 낼만 하네’ 하는 표정으로 여수 밤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유람선에서 내린 다음에는 여수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이 케이블카는 여수 돌산과 육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운임은 편도 1만원, 왕복 1만3천원이었다. 불과 10분 거리도 안 되는 거리에 대한 요금치고는 매우 비싼 금액이었다.
역시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조명이 없는 곳의 경치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이 케이블카는 보통 주말에는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이용객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은 곧 잊어버리기로 작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돌산에 있는 여관 규모의 한 호텔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 가기 전에 저녁부터 시켜 먹었는데, 한정식 비슷하게 나온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역시 소문대로 ‘음식은 전라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방이 깨끗하였다.
누군가 이 호텔은 1박에 십만원 정도 하는데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오만원 이하에도 잘 수 있단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모두 만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여수시는 단체 관광객에 대해서는 경비의 일부분을 보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단체로 구경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 다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온 관광객도 엄청 많은 걸 보면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준비만 잘 해 놓으면 관광객은 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예컨대 레일바이크 타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은 정말 잘 준비해 놓은 아이디어 같았다. ‘여수에 와서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더니, 과연 여수시는 돈 버는 방법을 잘 아는 도시 같았다.
아무튼 이번 여수 관광은 특별히 좋았다.
2016-10-26 09:38 |
![]() |
[기고] <209> 회사 맡기기, 물려주기
사례 1 - 외국 서적의 복사판 제작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작지만 나름대로 건실해진 어느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사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초창기에는 회사가 너무 작아서 소위 인재들을 채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장은 종신고용제 도입을 선언하고 틈틈이 직원들의 직무 교육을 실시하였다. 다른 회사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고생하는 것을 본 직원들은 이 회사를 평생 직장으로 여기며 회사에 충성을 다하게 되었다.
이제 문자 그대로 사장과 직원간에 튼튼한 신뢰 관계가 구축된 것이다. 지금은 사장이 오전 근무해도 회사가 잘 돌아 간다고 한다. 아마 사장이 회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회사는 더 발전할 지도 모른다.
이미 그 회사 직원들은 사장이 자리를 비우면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더 열심히 일하는 회사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출판업계의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이 회사는 살아 남을 것으로 믿는다. 사장이 직원을 믿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어찌 망할 수 있겠는가?
사례 2 -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창업주들은 온갖 역경을 딛고 회사를 이루어 놓은 분들이다. 그분들의 노고는 ‘아무리 존경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제약 환경은 그들이 창업할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버렸다.
그들이 창업할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신약개발’이란 화두를 지금은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가볍게 입에 담는 세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제 창업주들이 고령이 되었다. 이제는 자의반타의반 회사를 2세들에게 넘겨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창업주들의 입장에서 볼 때 2세들의 경영 능력이 영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어 보지 않은 2세들이 험난한 경쟁의 격랑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세에게 회사를 물려 주고도 이런 저런 형태로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창업주들이 많다. 물론 2세들은 창업주의 간섭을 싫어한다. 그들은 새 시대에는 새 감각을 갖고 있는 자신들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창업주와 2세 간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드물지만 일찌감치 2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뗀 창업주도 있다. 대단한 용단이다.
사례 3 - 얼마 전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창업주의 고민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의 아들은 회사 계승에 도통 관심이 없는 반면, 딸은 관심도 있고 능력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회사를 넘겼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건실한 회사 오너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회사를 2세에게 넘겨 줄 때 어느 자식에게 넘겨 줄 것인가 결정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청년들에게 ‘롯데 사태를 봐라, 장치 재벌이 될 생각이 있거든 아들 딸 구별 말고 한 명만 낳아라’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고 다닌다. 회사는 창업도, 물려주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맺음말 – 누구나 번듯한 회사 하나쯤 부모로부터 물려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상에 빠져 본다. 어느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꿈을 말해 보라고 하셨다.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자신의 꿈은 재벌 2세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그것도 좋은 꿈이지”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근데 선생님 문제가 하나 있어요, 아버지가 영 노력을 하시지 않아요” 했단다. 물론 2세 경영의 어려움을 모르는 아이에 대한 우스개 소리이다.
이상에서 직원에게 맡기거나 자식에게 물려 줄 회사도 없는 주제에 창업주의 걱정, 2세의 걱정 등 별 걱정을 다 해 보았다. 문득 어느 부잣집 화재 현장에서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얘야, 너는 평생 집에 불 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냐? 이게 다 평생 재산 한푼 모으지 않은 네 아버지 덕인 줄이나 알아라. 알겠냐?”
새삼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10-12 09:38 |
![]() |
[기고] <208> 눈물
1.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탄광촌을 방문하여 한국인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위로한 일이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던 그들은 대통령을 만나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부부의 딸인 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던 나는 그 학생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정작 그 학생은 너무나 밝고 의연할 뿐 내 관심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 추석 때 티브이를 보니까 김동건씨가 사회를 보는 ‘가요무대’를 방송하고 있었다. 상파울루에 사는 교민들을 위로하는 방송이었다. 브라질 교민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농업이민을 간 분들이다. 초대 가수들은 ‘불효자는 웁니다’, ‘고향무정’ 또는 ‘어머니’ 같은 최루성 가요를 불러대었다.
그런데 교민들 중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객석에 앉은 교민들의 눈물 바다가 연출될 상황이었다. 가수들은 이래도 안 울테냐는 식으로 더욱 슬픈 노래를 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관객들은 그저 즐겁게 표정으로 고국의 노래를 감상할 뿐이었다. 나는 차라리 K-팝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으면 더 좋았겠네 생각하였다.
3. 왕년의 가수 윤항기씨가 티브이에서 회고하는 내용을 보니, 처음 그룹사운드 키보이스를 결성할 당시 연습할 장소가 없어 고생하다가 영등포에 있는 미군 부대 내에 한 장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중락, 차도균 등 당시의 멤버들은 매일 용산역에 모여 영등포 연습장소까지 걸어 갔다고 한다. 버스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걸어 가는 도중에 담배 꽁초를 발견하면 서로 주워 피우며 걸었다.
하루는 여럿이 걸어 가는데 어디서 딸그락 소리가 계속 들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찾아 보니 차중락씨의 구두 앞창이 걸을 때마다 너덜거리며 부딪히는 소리였다고 한다.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저 음악이 좋아 매일같이 연습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4. 리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도 과거와 달리 대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다른 나라 선수들을 격려하며 ‘올림픽 게임을 즐겼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도 이제는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1986년 임춘애 선수가 아시안 게임 육상 중장거리 부문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라고 소감을 말했을 때 전 국민이 울던 때와는 딴판이 된 것이다. 참고로 임춘애는 가난은 했지만 라면은 간식으로만 먹었다고 한다.
5. 파독 광부의 딸, 브라질 교민, 윤항기 씨, 임춘애 씨,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이제는 지독하게 어려웠던 그 시절의 눈물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극복한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의 고난과 슬픔은 이미 의연함으로 승화된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지나온 과거의 눈물 길을 성숙한 시선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 우리들의 모습에 눈물이 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새삼 감동이 밀려 온다. 그렇다. 우리들은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6. 그런데 감사의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나랏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년 세대는 취업난, 결혼난, 육아 및 교육난 등 기성세대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른들은 때때로 “요즘 애들은 얼마나 살기 좋아?” 하지만, 많은 청년들은 심지어 옛날보다 오늘날이 더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 세대에게 눈물을 강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집중하여 결국은 승리했던 기성세대의 그 열정을 찬양하고 싶은 것이다. 독일이나 브라질, 또는 영등포나 운동장에서 불태웠던 그 열정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열정이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다시 한번 불타 오르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보우하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2016-09-28 09:38 |
![]() |
[기고] <207> 말도 참 안 듣네
어떤 사내 아이가 방에서 놀다가 마루에 계신 아빠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하였다. 아빠는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중이라 ‘네가 갖다 마셔라’ 했다. 그런데 아들은 지지 않고 몇 번씩이나 “아빠 제발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부탁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끝내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 화가 난 아빠가 외쳤다. ‘너, 한번 만 더 물을 갖다 달라고 하면 아빠가 달려가서 한대 패준다’. 그러자 그 아들이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아빠 저 때리러 오실 때 물 좀 갖고 오시면 안될까요?” 라고!
이 아이를 보면 ‘말도 참 더럽게(?) 안 듣는 아이구나’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말을 영 안 들어 먹는 사람이 이 아이 말고도 적지 않다. 그런 사례 몇 가지를 이하에 나열해 보고자 한다.
1. 자동차 운전시 자기가 갈 방향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는 사람이 많다. 혹시 방향 지시등을 켜면 배터리가 소모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래서 운전자는 누구나 ‘저 차가 그 쪽으로 갈 줄 알았으면 나는 그냥 진행하면 되는 거였는데…’ 하는 상황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방향 지시등을 켜야 안전하다고 그렇게 강조해도 말을 안 듣는 그들의 고집에 기가 질린다.
2. 건강에 나쁘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기어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다. 나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 담배를 피웠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흡연은 정말로 백해무익한 것 같다. 건강에 해롭지, 돈 들지, 주머니 지저분해지지, 냄새까지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하지….
인권침해에 가까울 정도로 궁색한 환경의 지정장소에 가서 흡연하는 모습을 보면 실례지만 그들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남들은 담배 사 피울 돈으로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나 영양제를 사 먹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3. 흡연가의 흉을 하나만 더 보자. 그들은 대개 운전 중 자기 차 안에 담배 재를 털지 않고 차창을 열고 차밖에 턴다. 흡연자도 담뱃재는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운전 중 피운 담배 꽁초를 길에다 버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차 밖 도로가 온통 재털이나 쓰레기 통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흡연자 여러분, 재나 꽁초는 반드시 자기 차 안에 버립시다. 우리는 담배 꽁초로 더럽혀진 쓰레기 도로를 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4.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도 하나 해 보고 싶다. 이조(李朝)라고 하면 안되고 조선이라고 해야 한다고 수없이 가르쳐도 습관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한일합방(강제병합 또는 병탄)이나 해방(광복), 또는 민비(명성왕후)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도 아직 많다.
그 사람들이 고집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고, 바른 용어를 잘 모르고 있거나 과거의 습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리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잘못된 언어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학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역사 이야기를 하는 김에, 중고등학교의 역사 선생님들이 요즘 TV의 인기 강사인 설민석 님처럼 역사를 ‘재미있게’ 강의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추가하고자 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 암기(暗記)의 대상에 불과했던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고 잘 외워지기 때문이다.
남들을 비난하다 보니 “그럼 너는 말을 잘 듣고 사냐?”라는 반문(反問)이 귓가를 울린다. 물론 나도 여지없이 ‘말을 참 안 듣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 간다. 예컨대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도 나는 운동을 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몸이 아플 때에는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싶어 억지로라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컨디션이 조금만 좋아지면 벌써 방안에서 뒹구는 버릇이 나온다. 건강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한다. 건강이 유전이라는 이야기이다. 동감이다. 마찬가지로 운동하기를 좋아하느냐 여부도 유전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집안인가 보다.
요즘 옆구리가 아픈 탓에 하루 만보(萬步)씩 걷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옆구리가 다 나아도 걷기를 계속할 결심이다.
2016-09-13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