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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8> 일곱번째 이야기_약사로 일을 시작하다 ② <完>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또 시즌 막바지에 뒤늦게 추가한 pneumonia shot도 나름대로 인기를 끌어 26명이나 되는 환자들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두 가지 예방주사 모두 연방정부에서 운영하는 Medicare가 cover하므로 flu shot만 생각하고 왔다가 우리가 권유하는 바람에 pneumonia까지 함께 맞는 경우도 많았지만, 35달러를 내고서도 맞겠다는 고객들도 종종 있었다.
또 인근의 클리닉에도 소문이 났는지 처방전을 들고 와서 pneumo shot을 맞고 가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Medicare part B와 D에서 Zostavax(대상포진-shingles vaccine)를 cover하기 시작하였고, 이제 3년차 immunizing pharmacist로서, 나의 첫 Zostavax 환자와 만나기로 한 날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 약속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이 vaccine이 flu나 pneumo와는 달리IM이 아닌 SC를 요하는 제품이어서 처음으로 SC를 하게 되는 셈이고, 또 Medicare part D에서 곧바로 cover해주지 않아서 prior authorization을 따내느라 그 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장이 아닌 냉동보관을 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이어서 혹시나 배달과정에서 실수가 있을까 봐, 그 환자를 만나기로 한 스토어와 제조사인 Merck, 그리고 배달업체인 UPS에다가 약이 도착하는 날까지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delivery status를 확인하고, 심지어 배달 당일에는 새벽 6시 반에 눈을 비벼가며 전화를 하기도 한 끝에 그쪽 스토어에 무사히 도착시켜놓은 약이라, 내가 다음 번 그곳 스토어로 일하러 가게 될 날이 손꼽아 기다려 질 수밖에 없다.
혹시나 환자에게 내가 일하는 곳으로 올 수 없는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Sequoia 국립공원내의 canyon을 지나는 낭떠러지 길을 포함, 총 1시간 거리를 운전해오는 건 80대 노인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나보다는 그 환자가 그날을 더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06년 3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PhA meeting에 참석하여 Diabetic Patient Care에 대한 certificate 프로그램을 수료했는데, 실제 업무에서 환자를 상담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다 보니 certificate을 기반으로 상담시간을 쌓아서 diabetic specialist 단계로 발전시켜보겠다던 애초의 목표는 사라지고 배운 것조차 많이 잊어버리는 상황이 되고 있다.
아마도 오는 겨울부터 시작할 예정인 Pharm.D 과정을 마친 후에야 이 목표에 다시 도전하게 될 것 같다.
미국 땅에서 약사로 살아남기, 현재진행형>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일단 약사로 일을 시작하고 나면 갖가지 자료와 잡지들이 마구 밀려든다.
US Pharmacist 같은 잡지도 약국으로 그냥 배달되어 오고, 정말 실전에서 필요한 정보들만 쏙쏙 골라 담아 보내주는 Pharmacist’s Letter도 회사에서 단체구독을 신청해놓은 덕분에 그냥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에 쫓기다 보니 좋은 자료들이 옆에 굴러다녀도 안보게 되고 Letter 정도나 간신히 읽으면서 버텨왔는데, 이러다간 정말 ‘살아남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더랬다.
업무상의 스트레스에만 얽매어 있을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에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남편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커리큘럼을 뒤적이다가, health care professional들을 위한 보건 행정학 석사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입학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open university를 통해 그 중의 한 과목인 Managed Health Care를 신청해서 한 쿼터 들었는데, 강의에 참여하다 보니 외국출신으로서 이 과정을 마쳐서 미국의 주류 보건행정 체제에 진입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어 그냥 Pharm.D 과정이나 시작하기로 마음을 바꾸긴 했지만, 이 한 과목을 통해 나는 짧은 기간 동안 참 많은 것을 배웠다.
1월 초에 강의가 시작된 직후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Universal Health Care 건을 터뜨렸고, 곧이어 부시가 연두교서를 통해 의료보험체계 개혁안을 내놓은 데다가, 또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각 예비주자 진영에서도 각자의 안들을 들고 나오는 등, 의료비용 문제가 이번 대선의 큰 쟁점 중의 하나가 될 것이어서, 우리는 교과서보다도 언론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기울이며 매주 수업 때마다 향후 미국의 의료보험체계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혹은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실은 이 학교에서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지 않기로 결심한 또 다른 이유가, 전 과정을 계속 지도할 이 교수의 견해가 나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이런 토론의 시간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Medicare part D를 포함, 미국 의료보험체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잠깐 언급하고도 싶었지만 주제에서 옆길로 새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거의 다 써놓은 글이 그만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냥 이 정도로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개인적으로 아쉽지만,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새로운 과제들을 감당해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면 가끔씩은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 뒤를 돌아보고 있기에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
이렇게, 나의 “미국 땅에서 약사로 살아남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7-12-18 1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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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7> 여섯번째 이야기_약사로 일을 시작하다 ①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열흘 남짓 한국에 머무는 동안 토요반에 들러 그간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가르침을 입었던 선생님들께 인사도 드리고, 또 오랜만에 카피라이터 모임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짧은 시간도 간신히 가진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보니 새로운 PDM이 와 있었다.
리크루터로 일하던 여자라,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3일 정도의 training을 거친 후 6개월이나 고정약사가 없이 비어 있던 문제 많은 스토어에서 floating을 시작했는데, 얼마 후 PDM이, 나보다 2주 정도 늦게 약사면허를 받은 A라는 친구를 이 스토어에 pharmacy manager로 배정하면서 나에게 staff으로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집에서 10마일 넘게 떨어진 곳이라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A와는 Rite Aid에서 인턴들에게 제공하는 보드시험강의에도 함께 다녀오는 등 안면이 있기도 했고, 또 영주권을 진행하려면 고정스토어를 정해야 한다는 반강제적 권유에 밀려 그냥 3년짜리 노예문서-흔히 계약서라고 부른다-에 싸인을 했다. (벗겨진 머리 때문에 40대 아저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20대 후반인 A는, 중동지역에서 약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동부지역에서 MBA를 한 학기쯤 공부하던 중 이곳에서 인턴을 시작하였고, 약사면허를 받고서 pharmacy manager로 경력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PDM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일종의 커넥션?-매니저로 나와 함께 일하면서는 항상 자신이 일하는 날에 더 많은 테크니션이 일하도록 스케줄을 잡아서 나를 힘들게 하더니, PDM이 된 지금도 끊임없이 뭔가 트집잡을 이유를 찾으려 애쓰는, 참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이다.)
약사로 일을 시작하고 겪은 첫 번째 위기는 라벨링 실수였다. 어린이용 감기약 처방을 QA하면서 겉포장 박스에다가 라벨을 붙여서 내보낸 것을 다음날 애기 엄마랑 할머니가 들고 와서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
박스 안의 약병에 다른 사람 라벨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확인해보니 두 달 전에 다른 환자를 위해 fill했다가 2주가 지나도 안 찾아가서 누군가가 다시 shelf에 돌려놓으면서 라벨을 제거하지 않았던 약을 내가 사용한 것이었다.
잘못된 약을 준 것도 아니고, 환자가 약을 먹은 것도 아니고, 라벨에 표기사항이 틀린 것도 아니고, 다만 다른 환자의 정보를 누설했다는 점에서 HIPAA를 위반한 정도가 되었겠으나, 처음 당하는 일이라 심장이 막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약병을 손에 꼭 쥐고서 나한테 안 뺏길려고 부들부들 떠는 걸 보니 소송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일단 매니저한테 얘기하고 온라인으로 misfill 보고서도 작성한 후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약사보험에 가입했다. 만일의 경우에 큰 사고가 발생할 경우 회사에서 단체로 가입해 놓은 보험은 궁극적으로 회사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지 약사 개인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별 일은 없지만 보험은 계속 갱신하고 있다.)
8월이 되자 immunization program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하라는 공지가 떴다.
예전에 토요반의 홍 선생님에게서 미국약사들은 일정 교육을 받은 후 예방접종을 실시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해봐야지 했던 것이어서 공지를 보자마자 얼른 신청했다. Rite Aid에서 APhA와 연계하여 실시하는 이틀간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첫날에는 각각의 vaccine에 대한 디테일을 공부한 후 CDC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의 ‘Pink Book’ 전문도 한 권씩 받았-지만, 하나도 읽어보지는 않았-고, 둘째날에는 exposure control manual 설명과 injection 실습, 그리고 CPR 교육이 있었다. 만일의 경우 환자가 anaphylaxis 반응을 일으키게 되면 곧바로 응급처치와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CPR license가 없이는 immunizing pharmacist certificate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Exposure control manual은 심한 출혈이 있거나 누군가가 바늘에 찔리는 등의 ‘exposure’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단계별로 적어놓은 것으로, 당연한 상식 같은 얘기들 뿐이지만 막상 실제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하여 아무 생각이 안 나게 되는 경우를 위한 행동 지침이라고 했다.
또 두 사람씩 짝을 지어 IM과 SC를 서로서로 놓아보는 실습도 했는데, 이틀간의 교육 중에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해 겨울, 2005-2006 flu season이 되어 첫 환자로 점잖은 노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겨우 두어 대를, 그것도 3개월 전에 실습해본 것이 전부였지만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서 최초의 한 방을 찔렀는데 뜻밖에도 하나도 안 아프다며 너무 고맙다고 하는 것이었다.
첫 환자를 성공하고 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겨 나머지 환자들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2006년 여름에 certificate 갱신을 위한 교육을 하루 받았는데, A가 PDM이 되어 약국을 떠난 후 새로 온 약국 매니저는 immunization에 참여하지 않는 약사였으므로 2006-2007년 시즌에는 내가 exposure control manager로 각종 기록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지난 시즌과는 달리 flu clinic 날짜를 특별히 정하지 않고 walk-in basis로, 마치 일반 처방전을 접수하고 조제하듯 환자를 받았다.
그런데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고 환자들이 꾸준히 찾아와, 거의 200명에 가까운 환자들이 flu shot을 맞았다.
함께 교육받은 다른 사람들은 인근 타 도시에 소재한 약국에서 일하는 약사들이어서 이 지역을 담당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므로, 도시의 북쪽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남쪽에서부터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7-12-04 1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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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6> 다섯번째 이야기_어려웠던 시험치루다 ②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케이블 영화채널을 신청하느니 사다가 집에서 보는 것이 훨씬 싸다고 좋아하며 사들이기 시작한 DVD들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시점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인터넷으로 NAPLEX와 CPJE 각각의 시험장소를 결정해서 3일 간격을 두고 예약하고, 또 시험 전날 머물 호텔도 잡고 나니 이젠 정말 카운트다운이었다.
그 동안 어느새 노는 체질로 변해버렸는지 다시 공부하는 페이스를 잡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 절박한 시점에도 여전히 집에서는 공부가 안되어서 화요일 낮에는 동네도서관에 가고, 일하는 날 저녁에는 11시까지 영업하는 반스앤노블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사놓고 앉아 문닫기 직전까지 공부했다. (심장이 약해서 커피를 거의 못 마시던 내가 그 진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도 어떻게 멀쩡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NAPLEX 시험 일주일 전부터 off를 받아 마지막 정리를 한다고 앉았는데, 세 번을 보라고 하던 소위 ‘노란책’은 절반 남짓, 실전문제가 가득한 ‘빨간책’은 앞부분 조금밖에 못 본 상태였고, 그 와중에 APhA에서 나온 ‘파란책’까지 새로이 도착하는 바람에 그것도 또 뒤적거리느라 결국 어느 것도 끝까지 한번을 다 보지 못한 채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래도 낯익은 문제들이 약간은 눈에 띄었던 덕분에 어느 정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평소 3시간이 채 안 걸리는 길이 주말 나들이 차량들 때문에 5시간을 넘기며 끝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하루 종일 시험장에 앉았다가 그대로 운전대를 잡은 터라, 이제 허기를 지나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고 있을 즈음, 드디어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욕심에 제한속도 70마일 구역을 80마일로 잠깐 달렸는데, 평소 같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을, 그날따라 고속도로 경찰이 쫓아왔다. 사정해 볼 기운조차 없어 그대로 딱지를 떼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문인지 어쩐지 3일 뒤로 닥친 CPJE를 준비하며 약사법규 교과서를 이틀이나 붙들고 있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CPJE는 말로만 캘리포니아 약사법규 시험이지 법규관련문제는 거의 안 나오고 까다로운 임상문제만 줄줄이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바지 귀중한 시간을 엉뚱한 데 허비하고 말았던 것이다.
시험 전날이 되어 우 약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임상문제들을 보기 시작했지만 시간은 태부족이었다.
원래 공부 못하는 애들이 시험 전날 밤새서 공부한다는데, 내가 꼭 그랬다. 대학입시 때부터 이어져온 벼락치기 공부의 전통(?)은 이번에도 깨어지지 않고 또 반복되었다. 시험 전날 겨우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 길까지 헤매다가 가까스로 정시에 시험장에 도착해서 지정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처음부터 끝까지, 답을 정확히 안다고 생각되는 문제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CPJE가 객관식으로 바뀐 이후 합격률이 치솟자 캘리포니아주 보드에서 문제의 난이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는 듣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마치 학력고사 수학 II를 볼 때처럼, 그냥 열심히 찍었다. 조금 지나고 나니 졸음까지 몰려왔다.
비몽사몽간에 시험을, 아니 찍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곧바로 재시험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다.
시험에 4번 떨어지고 나면 여기 친구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더하면 시험을 또 볼 수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걱정스러웠지만, 그보다도 한번 떨어지면 3개월 후에나 재시험을 볼 수 있다는 규정이 눈앞에 닥친 큰일이었다.
이미 아이를 못 본 지 7개월째였고, 눈물샘이 바닥 난 시기를 지나 이제는 우울증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출근하기 시작한 후 열흘쯤 지나 NAPLEX 합격 소식이 도착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다 합격하는 시험이라고 해도 시험은 시험인데, 합격통지를 받아 들고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로부터 2주일쯤 지난 어느 토요일에 머릿속을 스쳐갔다.
시험에 붙든 떨어지든 일단은 한국으로 돌아가 아이 얼굴을 한번 보고 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무작정 다음 주말에 떠나는 비행기편을 예약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우편함을 열었는데, 캘리포니아 보드에서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토요일에 배달된 편지들을 미처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는데, 내 점수는 보이지 않고 합격 커트라인 점수만 가운데에 적혀 있었다.
다시 보았지만 여전히 숫자라고 적힌 건 그것밖에 없고, 대신 ‘Congratulations’라는 한 마디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
제서야 그게 바로 내 점수라는 걸 깨달았다. 딱 커트라인 점수로 합격이었던 것이다. 턱걸이로 합격한 것이 창피하고 말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당장에 집으로 뛰어들어가 인터넷을 열고서 일주일 뒤로 예약했던 항공편을 이틀 뒤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월요일에 출근해서 Frank에게 합격소식을 전하고 2주간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원래는 지역매니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먼저 PDM은 다른 지역으로 가고 새로 오기로 한 PDM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공백기간이라, 그냥 Frank 선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처음 미국에 올 때 이민가방 세 개와 기내가방 두 개에 바리바리(?) 짐을 싸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달랑 기내가방 하나만을 들고서 다음날 바로 부산행 항공편에 올랐다.
다행히도 아기는 엄마를 잊지 않고 반겨주었고, 내가 잠깐 화장실에만 가도 어느새 찾으러 달려오는 등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유난히 엄마를 챙겨주고 내가 집에 있을 때면 나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반복된 만남과 이별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 하고 가끔 생각한다.
2007-11-20 1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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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5> 네번째 이야기_행복했던 인턴시절 ②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처음에는 상품명에 익숙하지 않아서 약 이름 스펠링이나 환자 이름, 의사 이름을 재차 물어야 했는데,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약간 짜증스러운 어투로 변하거나 심지어는 “Are you a pharmacist?”하는 반응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오금이 저리면서도 약사에게 넘기지 않고 “Sorry, I’m an intern. Could you give me the spelling again?”이라고 말하며 꿋꿋이 버티기를 두 달쯤 하고 나자, 어느 날부터인가 전화처방 받기가 갑자기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듀라제식 패취를 두러지~직이라고 하는 등 발음이 낯설어서 멀쩡히 아는 약이 모르는 약으로 둔갑하던 경우도 점차 사라졌다.
캐쉬어로 pick-up window에서 일하면서 환자들 이름을 못 알아들어 메모지에 스펠링을 받아 적곤 하던 일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매달 찾아오는 고정 고객들과 안면을 익히게 되면서부터는 안부를 묻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자신 있는 약들에 대해서는 질문 있냐고 counseling을 제공하기도 했다. (모르는 약에 대해 질문 있냐고 했다가 정말 질문이 있으면 큰 일이니까…흠) 또 과테말라 여행 중에 두어 달 배웠던 스페인어가 조금은 남아 있어, 영어를 전혀 못하는 히스패닉계 환자를 상대로 처방전 접수나 간단한 복약지도를 하는 정도는 스페인어 할 줄 아는 직원이 오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서 바쁜 시간에는 도움이 되었다.
다만 지금도 가끔씩 마음에 걸리는 것은 ‘one half 사건(?)’이다. 전화로 어린이 시럽제 처방을 내며 dosage를 ‘one half teaspoonful t.i.d’라고 하는데, 나는 그걸 ‘1&1/2 tsp t.i.d’로 적었고, 그대로 조제가 되어 나갔다.
한달 쯤 지나 다른 처방을 받던 중에 문득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 하는 깨달음이 스쳐갔다.
그래서 곧바로 옆에 있던 Frank-할아버지 약사-에게, 내가 예전에 one half라고 하는 것을 one and half로 생각하는 바람에 1/2 tsp 대신 1&1/2 tsp라고 받아 적은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워낙 어떤 문제든 아무 문제가 아닌 것이 되는 사람이라 괜찮다고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만일 그게 Phenergan이었고 환자가 2세 미만의 영아였다면, 그리고 실제로 CNS suppression event가 일어났다면 스스로가 아니라 강제로 실수를 깨닫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하고 두 주 후에 친정부모님께서 아기를 데리고 건너 오셨는데, 아직은 본격적으로 시험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던 데다 약국에서도 모르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약사에게 떠넘길 수 있는 편리한 입장이었고, 또 하루 8시간만 일하고 돌아오면 엄마엄마 반기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아기와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비록 생활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늘 행복으로 가득했고, 이 행복이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순간은 금세 다가왔다. 캘리포니아주 약사가 되려면 인턴 1,500시간을 채워야 하는데 당시에는 1,000시간을 일하고 나면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나머지 500시간을 채우면 되었으므로 12월에 시험을 볼 계획을 세웠고 부모님께서는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10월 말에 한국으로 아기를 데리고 들어가시겠다고 했다.
관광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6개월을 다 채우지 못한 채 4개월 만에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12월에 시험을 치르고 나면 곧 다시 불러올 것이니 2개월 정도의 이별일 뿐이라 생각하며 떠나 보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출국장 안으로 들어갈 때 밖에 서있는 엄마를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돌아보면서도 멋모르고 바이바이 손 흔들던 아이가, 비행기가 날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또 끝없이 날기만 하는데 엄마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드디어 눈치를 챘는지 깨어있을 때가 아니라 등에 업혀 잠든 중에만 흑흑 흐느끼더라는 이야기는, 그 후로도 일년이 넘게 지나 전해 들었다.
어려워진 시험을 치르다
그런데 11월에 응시서류를 준비하던 중 보드에서 갑자기, 외국출신 인턴들은 1,500시간을 채우고 나야 시험을 볼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어 버리는 바람에 12월에 시험을 보려던 나의 계획은 3월로 밀리게 되었다.
아이를 떠나 보낸 후유증을 심하게 앓으면서도 시험이 한 달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것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나는 이제 매주 인터넷 채팅방에서 만나는 스터디 모임에 참석하고 모리스코디 클래스에 가는 것 외에는 그 동안 못 보던 영화를 보는 것으로 모든 여유시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케이블 영화채널을 신청하느니 사다가 집에서 보는 것이 훨씬 싸다고 좋아하며 사들이기 시작한 DVD들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시점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2007-11-06 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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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4> 세번째 이야기_행복했던 인턴시절 ①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극심히 바쁘지도, 너무 한가하지도 않은 평균적인 규모의 Rite Aid로, 60대 초반의 마음씨 좋은 흑인 할아버지 약사가 졸업한 지 이삼 년 정도 된 베트남계 여자 약사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풀타임 테크니션 두 명에 풀타임 캐쉬어가 한 명 있었는데, 이 캐쉬어 친구는 토요일이면 텍으로 일하기도 하고, 출산휴가 갔던 또 다른 텍이 돌아오고 나면 약국 바깥에서 프론트 캐쉬어로도 일해야 주당 40시간을 채울 수 있다는 그런 스케줄이었다.
텍들도 다 좋고, 특히 이 할아버지 약사가 이 지역 전체에서도 농담 잘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함께 일하는 시간이 항상 즐거웠지만, 그 여자 약사는 몇몇 지점을 전전하다 간신히 이곳에 발붙이게 된, 성깔 있기로 소문난 친구로, 남자친구와 싸우고 오는 날이면 꼭 텍들과 나에게 짜증을 부리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마구 닥달을 하는 통에 그 친구와 일하는 날이면 다들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또 뉴욕에서 약대를 나오는 등 긴 미국생활을 거쳤다는데도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일부는 알아듣고 나머지는 대충 알아서 듣느라 고생이 막심했다 (첨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그러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겪은 10년의 사회생활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는지 대개의 경우는 그러려니 받아주며 넘어갔는데, 한번은 다른 지점의 약사와 통화를 하면서 대놓고 나를 우습게 만드는 막말을 하는 바람에 그 동안 쌓였던 것이 함께 터지면서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등 뒤에서는 험담을 하더라도 얼굴을 맞대고 있는 동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이곳 사람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 했지만, 아무튼 그러고 난 이후 그 친구도 조심하는 태도로 변했고, 다른 사람들은 너도 말대꾸할 줄 알았었냐고 재미있어하는 분위기여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인턴 급여는 한국에서 약사로 받던 것과 비슷한 정도였는데, 그걸로 아파트 렌탈비와 각종 요금, 식비를 쓰고 나면 항상 빠듯해서 Checking account에 마이너스를 내지 않으려면 늘 긴장하고 살아야 했다.
한국의 마이너스 통장과 달리 이곳 은행들은 실적에 따라 설정해 놓은 마이너스 한도 내에서 은행이 대신 지불해 준 다음 매번 발생하는 거래마다 수수료를 매기기 때문에, 한번은 개인수표를 써줬던 것이 결제되면서 마이너스가 나기 시작한 것을 모르고 직불 카드로 10달러 미만의 간단한 쇼핑을 두 건 더 했다가 수수료로 60달러가 나온 적이 있었다.
거래 순서를 생각하기에 따라 두 번이 될 수도 있는 경우여서 이메일로 사정했더니 20달러를 깎아줘서 40달러로 끝나긴 했지만 정말 뼈아픈 경험이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2004년 6월 당시에는 컴퓨터 시스템이 유닉스로, 한국의 인터넷 초창기 도스 시절을 연상시키는 새까만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는데, 어차피 처음에야 처방전 입력보다는 캐쉬어 일이나 전화 받기를 더 많이 하고 있었으므로 컴퓨터로는 검색에 필요한 간단한 명령어들이나 아는 수준이었다가, 화요일마다 LA에서 진행되는 모리스코디 강의에 가기 위해 화요일 대신 토요일 근무를 시작한 후로 내 손에 컴퓨터가 돌아오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까만 화면과도 웬만큼 친근한 사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텍들에게 물어볼 일은 많았다. 그런데 8월이 되자 시스템이 윈도우즈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이때부터 대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인터넷 강국 한국에서는 넷맹 축에 속하는 나였으나, 마우스라는 걸 잡아본 적도 없고 시스템이 다운되었을 때 ctrl+alt+dlt를 눌러 재부팅하는 것조차 신기해하는 친구들을 상대로는 당연히 가르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교육시간에 배운 것 말고도 혼자서 이것저것 클릭하다 발견한 기능들까지 더해, 이제 시스템 운용에 관한 한 전문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전화처방 받는 업무는, 일 시작한 지 3일째와 4일째 되는 날 받은 한 건씩을 제외하면 한 달쯤 지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약사법 상으로 인턴은, 약사가 약국 내에 있는 한 QA를 제외한 약사의 모든 업무를 다 할 수 있고, 전화처방이 전체 새 처방의 1/3 이상을 차지하므로 인턴이 전화처방을 받기 시작하면 약사는 업무량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물론 약사가 약국을 비우면 테크니션의 역할밖에 할 수 없다.)
2007-10-24 1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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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3> 두번째 이야기_인턴자리를 구하다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아직 학교를 졸업 못한 남편 때문에 미국행을 수년 후로 미룰까 생각하며 시집살이를 하던 중 친정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를 봐 줄 테니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인턴을 시작하라는 말씀이었다.
못마땅한 결혼을 한 딸이지만, 그러고 사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어 큰 결심을 하신 것이었다. 미국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내가 작성한 이력서를 몇 차례 수정한 후 이메일에 첨부하여 Walgreens와 Rite Aid에 보냈는데, Rite Aid 리크루터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특별히 인터뷰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전화로 간단한 몇 가지 질문에 답변을 했고, 시간당 임금이 얼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나에 대한 정보가 회사변호사에게 넘겨져 서류수속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이메일 배달사고로 한 달 이상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 해 취업비자 마감일 하루 전날 간신히 접수가 되었다.
그 이후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Fedex로 I-797이 날아왔고, 그걸 들고 미 대사관에 가서 취업비자 스탬프를 받은 후 짐을 쌌다.
아기는 부산 친정에, 남편은 일산 시댁에 남겨 두고서 LA행 항공편에 올랐는데, 뭔가 다 안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의젓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 얼굴이 떠올라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실연당하고 한국땅을 뜨는 여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셜 번호 없이 취업비자만 달랑 들고 미국으로 온 선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되돌아 갈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도 하고서, 2004년 4월 26일, 미국땅을 밟았다.
Pasadena의 한 친척집에 들러 짐을 내려놓고, 소셜 번호 신청도 하고(걱정했던 것이 우습게도, 너무나 당연히 진행되는 절차였다), 근무하게 될 도시로 가서 PDM을 만나고, 혼자서 온 도시를 3일간 뒤져 값싸고 괜찮은 아파트도 잡아놓고서는 LA로 향했다.
토요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내내, 인턴수속 절차를 하는 내내 크게 도움을 받았던 우 약사의 반강제적인 강권으로 모리스코디 클래스에 등록했는데, 1년에 걸친 강의내용을 한꺼번에 몰아서 강의하는 Intensive Course가 5월 10일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소셜 번호가 나오기를 기다려 보드에 연락한 후 인턴 면허를 받아야 인턴을 시작할 수 있었으므로, 빠듯하나마 시간이 좀 있다고 판단하고 PDM과는 상의도 없이 그냥 결정해버렸다. 원래는 어려운 주관식 문제로 악명이 높던 캘리포니아 보드 시험을 대비하는 강의로 자국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보드 시험이 100% 객관식인 CPJE로 바뀌고 난 후로는 수강생의 대다수가 외국인 약사들이었다.
거기서 우리 말고도 이런 저런 경로를 거쳐 미국약사시험을 준비하고 계신 한국 약사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살을 에는 듯한 강의실에 앉아있다 호텔에서 잠만 자고 또 강의실로 돌아오는 생활이 2주간 계속되었다.
‘따뜻한 LA’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던 터라 바닷가 지역은, 더구나 해가 들지 않는 실내는 겨울처럼 춥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우리는 죄다 반팔 옷에 기껏해야 얇은 윗도리 하나씩을 챙겨온 게 전부였기에, 가진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겉옷은 2주 내내 똑같은 것만 입고 버티는 상황이 되었다.
어떤 강의는 그래도 따라갈 만하였지만, 일부 강의는 그냥 듣고 있기만 해도 정신이 없어서 도저히 필기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속도가 빨랐다.
토요반에서 들었던 강의 덕분에 그나마 소 귀에 경읽기 신세까지는 안되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또 아직 인턴생활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국경을 넘나드는 자료교환을 끝으로 그간 정들었던 사람들과 작별을 고했다. (이 때 알게 된 한 세르비아 출신 친구와는 그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강의가 끝난 후 PDM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간 나와 연락이 두절되어 내가 실종된 줄 알았다고 했다. 언제 일을 시작하느냐고 물으니 그제서야 캘리포니아 ID card를 팩스로 보내라고 하는데, 왜 처음 만났을 때 말해주지 않은 것인지 좀 화가 났다.
그때까지 운전면허도 못 따고, 또 셀폰도 없이 잠적해 있었던 나도 잘못이지만, 이제 와서 운전면허증도 아니고 발급받는데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알 수 없는 ID를 내놓으라니 어이가 없었다.
일단 DMV에 가서 ID를 신청하고, 세 번째로 운전면허 실기시험에 도전했다. 가볍게 생각했던 운전면허 시험이 미국 생활의 시작에 걸림돌이 되다니 이럴 수가 있나, 생각하며 치른 세 번째 시험이 다행히 합격선을 넘어, 종이로 된 임시 면허증을 받자마자 PDM에게 팩스로 보내 이거면 되겠지? 했는데도, 그 PDM 아저씨, 여전히 내 사진이 붙은 ID 사본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요령부득이었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나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른 친구들은 그냥 인턴 면허만 가지고 잘들 시작하던데 위에다 물어보든가 어떻게 좀 해보라고 말했다. 알았다고 하더니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와서는,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DMV에 신청했던 ID는 일 시작한지 두 달이 지나서야 나왔다.)
2007-10-02 1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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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2> 첫번째 이야기_미국행을 결심하다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TSE 당일,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빈자리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그 많은 학생들이, 하나같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창한 답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시작은 했지만, 주변의 그 막힘 없는 답변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느리고 간단하고, 또 짧은 답변들이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답변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10초 이상이나 남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덧붙일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앉아 있기도 했고, 또 마지막의 가장 길고 어려운 질문에는 거의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몇 마디 하다 시간이 끝나 버렸다.
확실히 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디에도 리포팅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나왔는데, 한 달 뒤 50점이라고 찍힌 성적표가 날아왔다(TSE는 60점 만점에 55점, 50점 등 5점 단위로 점수가 매겨지는데, 미국 약사가 되려면 50점 이상이 필요했다).
주변의 소음을 이겨보려고 거의 악을 쓰다시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 통한 것인지?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하고 얼른 NABP와 캘리포니아 주 보드에 별도 비용을 들여 리포팅을 했다.
일단 한 가지를 끝내놓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더 생겼다. 그래서 인터넷에 토요반 모임방도 개설하고, 케이블TV 영화를 벗어나 극장으로 가끔씩 진출하기도 하고, 월드컵 거리응원도 나가 보고, 11월에는 난생처음 TOEFL도 치렀다. 강의가 두 바퀴를 도는 사이 딴 세상 얘기 같기만 하던 약물치료학과도 어느 정도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국여행비자도 손에 쥐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고 미국으로 시험 보러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프로세스가 중지되고 향후 시험일정은 무기한 연기된 것이었다. 시험정보 교환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FBI 수사가 진행되었고, 일부 관련자들에 대해 이미 받은 점수를 취소함은 물론, 재응시조차도 영구히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 중에도 피해를 입은 다수가 있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The show must go on”, 강의는 여전히 진행되었고, 다만 인터넷 공개 모임방은 즉시 폐쇄한 후 현재의 비공개 클럽으로 옮겼다.
시험 재개를 기다리는 동안 소셜 번호나 얻어놓자는 생각에 나는 당시 유행하던 하와이 운전면허 시험 길에 올랐다. 그사이 연애, 결혼을 겪으며 임신 중이었던 몸으로 약간의 불안함 속에서도 무사히 필기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함께 갔던 일행들 중 나와 다른 한 분에게는 어쩐 일인지 소셜 번호가 발급되지 않은 바람에 그냥 하와이 구경이나 하고 온 셈이 되었다.
그러던 중 3월에 드디어 시험공고가 났는데, 원하는 날짜와 장소를 개인적으로 정할 수 있었던 컴퓨터시험에서 다시 예전의 종이시험으로 돌아가 매년 6월과 12월에만 시험을 실시한다며 첫 시험을 6월 22일로 발표했다.
그간 여유를 부리다가 갑자기 시험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수험생이 된 우리는 부랴부랴 공부모임을 만드는 한편 시험 다음날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로 1일 관광을 갈 계획까지 포함한 여행일정도 잡았고, 또 나는 시험날에서 정확히 한 달 후가 출산 예정일이었으므로 고민 끝에 아이를 낳고 올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막상 시험날, 공부했던 내용은 하나도 안보이고 하루 온종일 기본기가 충실한지만을 집요하게 테스트 당하다가 호텔에 돌아온 나는 절망에 빠졌다. 함께 간 다른 동료들도, 큰 사건이 있고 난 후의 첫 시험이라, 의도적으로 어렵게 낸 것이 아니었겠냐는 견해들이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 새로 공부를 해서 12월에 또 시험을 치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졌으므로 한국으로 돌아와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한 학생 남편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살아나갈 일, 또 깨어진 나의 꿈 등을 생각하며 눈 앞이 캄캄했는데, 어느 날 성적표가 날아왔다. 커트라인에서 12점을 간신히 넘긴 합격이었다. 그냥 눈물만 나왔다.
2007-09-18 1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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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 들어가는 이야기
필자인 이선영 약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수입회사를 거쳐 일선약국에서 근무약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약사는 지난 2005년 미국으로 이주, 현재 LA지역 병원 약사로 재직 중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살게 되는 것은, 요즘이야 쿨하다고들 생각하지만, 예전 같으면 억센 팔자라 그런다고 했다. 나도 첨엔 그저 한국을 한번 뜨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한동안은 인턴이다 보드시험이다
바짝 긴장하고 살다가, 약사가 된지도 어느새 2년이 넘은 지금은, 가끔씩 내가 여기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개봉영화는 물론 극장에 걸려보지도 못하는 영화들까지 국제영화제, 각종 상영회 등을 통해 꿰고 지내던 생활에서, 지금은 온종일 일하고 쉬는 날 쇼핑하고 격주로 간신히 교회 가는 게 전부인 생활로 전락했고(그건 한국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까?), 또 프리스쿨에 다니는 3살짜리 딸에게서는 함께 놀아주지 않는 엄마라는 불만이 늘 접수되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이 생활에서 탈출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자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외국인에 대한 법 따위는 밥 먹듯이 바꾸는 통에, 약사가 되고 나서도 신분문제는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또 2003년 1월 이후 졸업자에 대해서는 4년제 학제 출신의 외국인 약사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이 조건이 다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아직은 아닌 듯) 2004년 이후 졸업생들은 배제된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늘 약사가 부족해 동동거리는 스케줄러를 볼 때나, 어디서 데려오는지 아무튼 끊임없이 들여오는 외국출신 인턴들을 볼 때면, 아직도 기회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쓰려는 글은 미국약사 되기 가이드, 뭐 그런 건 아니다. WWW.NABP.NET이나 각 주의 보드 홈페이지에 가면 필요한 요건과 절차들은 다 나와 있다.
물론 혼자 힘으로 애써서 찾아 읽고 해석하고 또 여기저기 물어가며 갖가지 요구사항들을 준비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 수고도 없이 손쉽게 미국약사가 되고 싶어한다면 이후의 미국생활은 참으로 고달플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란 나라가,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이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글이, 막연한 관심을 갖고 계신 한국의 약사님들께는 약간의 생각꺼리로, 다른 분들께는 잠깐의 흥미꺼리로 읽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미국행을 결심하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약대에 진학은 하였지만 워낙 나의 적성과는 거리가 먼 분야였기에 공부보다는 방과후 활동에 더 열을 올리다가, 5학년째에, 결국은 그전 4년간 했던 공부 양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양의 공부를 하고서야 그럭저럭 약사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약국, 병원, 제약회사, 광고회사 등을 전전하며 한 직장에 1년 이상을 진득하니 붙어있지 못한 채 7년 차로 접어들던 무렵, 잠시 일하게 된 약국에서 만난 어느 약사님으로부터 약사회관에서 토요일마다 미국약사준비를 위해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수년 전에도 한번 관심이 있어 알아본 적이 있었지만,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무렵 이 모임의 얘기를 듣고, 또 강의료가 저렴해서 내 예산범위에도 맞는 걸 알게 되자 에라, 하고는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각종 문화생활에 수입의 상당액을 탕진하다 보면, 저축을 할 여유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지금 갖고 있는 음반들과 희귀 비디오들이 다 그때 장만한 것이다.)
워낙 졸업평점이 대단(!)하다 보니 성적표 안 내밀고 발전적인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덜컥 시작은 했지만, 만만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시험을 보려면 일단은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데, 99년 과테말라 여행길에 별 생각 없이 미국관광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재신청을 시도해보려면 일정 기간 이상 적당한 회사를 다녀야 했고, 또 내가 그토록 피해 다니던 약물치료학과 정면 승부를 해야 했는데, 두 강사님의 명 강의가 초기의 나에게는 그저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비자를 위해 들어간 회사란 데가 9시에 출근해 2시에 퇴근하는 의료기기 수입업소라,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파트타임으로 약국 일도 시작했고, 또 새길교회 의료봉사팀을 따라 매달 한번씩 나가고 있던 조선족진료 봉사활동도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시간은 항상 부족했고, 부족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회사에서 약국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틈틈이 책을 보았지만, 기초부터가 부실한 나로서는 강사님의 질문에 대답은커녕 그저 그 총알 같은 강의를 받아 적는 옆자리의 동료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래도 졸지 않기 위해 늘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고, 절대 다시 듣지 않을 녹음도 하고, 누군가가 녹음한 테이프를 구해서 아주 가끔 들어보기도 하면서 몇 달이 흐르고 난 어느 날, 강의가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어려운 Heart Disease 분야가 끝나고 다음 분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음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어쨌든 내게는 갑자기 약간의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그제서야 주변의 동료들 모두가 TSE라는 시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체 TSE가 뭐길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비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FPGEE 시험을 보러 가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던 터라, 나는 일단 TSE 시험부터 보기로 했다.
시험접수를 해놓고 나서 한 달 동안, 당시 토요반 새벽영어공부시간에 쓰던 TSE 교재를 내 손으로 한번 요약정리를 했다. (지금은 Test of Spoken English가 iBT에 포함되었고 교재도 다양하지만, 2001년 초 그때는 그게 내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교재였다.)
그리고 1시간에 5만원씩이나 하던 일대일 영어강좌 4시간을 큰 맘 먹고 끊어서, 일주일에 1시간씩 4번 들으러 갔다.
주 55시간씩 일하고 나면 매주 진행되는 강의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는데도 집에 혼자 있으면 TV를 보면 봤지 절대로 공부를 못하는 내 나쁜 버릇 때문에, 공부는 거의 버스나 지하철, 혹은 약국에서 틈틈이 했다. 쉬는 날에는 대학로집에서 가까운 정독 도서관에 가기도 했지만 그런 호사를 누리는 날은 많지 않았다.
2007-09-05 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