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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디카와 함께 찿아본 바다같은 '바이칼 호수'
살 이 에일 듯한 혹독한 추위가 있는 겨울이 8개월이나 된다는 시베리아를 쉽게 찾는방법은, 여름 한 철에만 몇 편의 특별기를 띄우는 대한항공을 이용, 4시간 가량 걸리는" 이르쿠츠크" 에 내리는 것인데, 인구 20 여만의 이 도시는 바이칼 호수와 앙카라 강 을 끼고 있는 오래된 교육 도시입니다.
겨울철에는 바이칼 호수가 얼어붇기 때문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몽골에서 호수의 어름위로 버스를 타고 찾아 올 수도 있다고 하지만, 너무 춥고 눈이 많기 때문에 구경오는것은 어려울것 같았습니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 바이칼 호수로 물이 유입되는 강은 무려 330 여개나 되는데, 이 호수의 물이 빠져나가는 강은 앙카라 강 한개 뿐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가장 깊은 곳은 1,630여 미터나 되며,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담수 호수인 바이칼호 는 맑은 곳에서는 40 여 미터의 물 속까지 볼 수있는데, 이 호수에서. 가장 큰 섬인 알혼 섬은 옜 몽골리안들이 살았던 곳이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곳이 우리 한 민족의 발원지라고 주장하는 분 들도 있다고 합니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는 불모지가 대무분이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야생화 군락 들을 만나기도 한다.
바이칼 호수의 전경 들. 이 호수의 물은 보통 섭씨 5도에서 10도 사이로서 이 호수에 손을 담그면 2 년을, 발을 담그면 5 년을, 전신을 담그면 10 년을 더 살수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을 정도로 깨끗하지만 몹씨 차가웠다.
이르쿠츠크 시민이 즐겨 찾는 앙카라 강, 이 강 변에 위치한 벼의 통나무집에서 전통 사우나로 땀을 뺀 다음, 이 강에 몸을 풍덩 담그는 일도 좋은 경험이었다.
알혼섬으로 가족과 함께 휴가를 온 비뇨기과 의사인 Dr. Sysin Serger 를 만나 보드카 한잔과, 이 호수에서 낙시로 잡은 "오물" 이란 이름의 물고기 회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이 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이었다.
2009-08-18 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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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노환성 박사와 떠난 30일간의 남미일주
△ Ushuaia에서 찾아본 펭귄의 섬
△ Ushuaia에서 찾아본 바다표범과 폥귄 들의 천국
△ Argentin 남단의 Tierra del Fuego 국립공원
△ 91,000톤에 3,000명의 고객과 승무원이 승선하는 Cerebrity Infinity 호
△ 마젤란 해협을 벗어난 후 비글 해협을 따라 북상하면서--
△ Chilian Fjord (칠레 피요르드) 의 절경
△ 남위 52도에 위치한 Punta arenas/ Chile 의 팽귄 보호구역
△ Puerto Monto / Chile 의 독일인 최초 이주 기념촌락
△ Chile 수도의 관문인 Valpareiso 해변
△ Valpareiso에서 볼 수 있는 후니쿨라(노래 제목으로 많이 듣던 이름이다)
△ Chile 의 수도인 Santiago, 멀리 안데스산맥의 자락이 보인다.
△ Santiago의 성모 마리아 상
△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Cusco / Peru, 택시로 운명이 바뀐 티코의 인기가 최고란다.
△ 2,400 미터의 Urubamba / Peru에서 만난 잉카의 후예들, 그들도 우리와 같이 몽고반점이 있단다.
△ 잊혀진 채로 남아 있다가 발견된 잉카의 공중도시, Machu picchu/ Peru
△ 구름, 안개 그리고 비가 잦은 Machu picchu
△ Ica / Peru에서 찾아 본 사막의 모래산과 오아시스
△ Mexico city 에 있는 마야문명의 유적인 태양의 신전으로 불리우는 피라미드
△ Argentina 사람인 체 게바라가 더 유명한 Habana / Cuba
△ 마야 문명의 유적인 Chichenisa 의 피라미드, Cancun / Mexico
△ 가뭄이 들 때 마다 예쁜 소녀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마야의 물웅덩이, 깊이가 25미터란다. Cancun / Mexico
2007-04-26 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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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우성 박사의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기<完>
6월2일(금요일)
아침 일찍 우리가 탄 배는 세계최대의 유빙인 Hubbard Glacier 을 만나기 위해 Princess William Sound 해역으로 향하고있다. 이 지역은 추가치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있어 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크고작은 빙하 조각들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풍경이 정말로 장관 이엇다. 그러고 저만큼 있는 "말로만 듣던 빙산"도 직접확인 할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바람도 없고 다만 사랑과 평화만이 깃든 호수 같은 바다, 그 앞에 펼쳐지는 얼음 山 겹겹이 쌓여있는 저 빙벽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지는 높고 높은 雪山! 장관이로고.장관이야뀉 16개의 빙하 협곡이 있는 College Fjord(킬리지 피요르트)로 Cruise는 계속 들어가는데 Television 이나 사진에서만 보던 그곳에 우리가 있다.
6월3일(토요일)
드디어 우리를 태운 Diamond Princess는 12시 (자정께)경에 Anchorage 인근에 있는 Whittier 항에 도착한다. Cruise의 마지막 밤이 아쉬운 듯 우리일행은 정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운다. 자정이 되었는데도 백야의 현상으로 주위는 사물을 분별 할 수 있을 정도로 희뿌엿다. 아침 7시 우리들은 하선을 하기시작 했는데 이로써 부풀었던 Alaska Cruise 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내 생전에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하선을 하면서 우리 일행은 정해진 Bus에 올라 약 2시간 거리의 Anchorage로 이동하면서 지진공원 그리고 동물원과 Alaska 주립박물관등을 관람하였다.
Alaska !
남한의 35배의 넓은 땅, 그 땅에 비해 人口는 아주 적은 그곳에도 교포들이 많이 살고있단다. 미국의 어느 곳에도 개척시대의 東洋人 들이 있었는데 American Indian ,Mongolian 의 歷史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Anchorage에서 3시간 거리인 맥킨리(Mt mckinley 해발6194m)를 돌아 보기위해 우리들은 흥분하였다. 산악인 고상돈 씨와 10여명의 동료들이 잠든 곳에서 묵념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었고 눈 덮인 맥킨리 봉을 구경하기 위해 4명에서 9명이 탈수 있는 경비행기에 나뉘어 탑승을 했다. 조용히 출발한 비행기는 山 정상을 오르면서 굉음을 내기 시작했고 일행은 비행하는 조종사가 계속 안내를 하지만 오금이 저려옴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금방이라도 저 사나운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우리비행기.. 먹구름사이로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조종사는 산 중턱을 오르내리면서 山 악인들이 base camp를 쳤던 곳을 알려주고 칼바위 같은 등산루트를 따라 정상에 오른다는 비행사의 음성이 우리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줬지만 공포의 40여분 비행시간은 平生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듯도 싶다. 일행 中 비행기 멀미를 하는 會員 공포에 떨며 새파랗게 질려버린 사람들 가지각색의 표정들이었으니까뀉. 산악도시인 Talkeetna(타케티나)에서 여장을 풀면서 우리들은 집행부 여러분들과 수고하신 임원들에게. 너무나 수고하셨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일주일간의 항해와 매킨리 봉의 비행으로 조금은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환경이 아름다운 最高級 Hotel 에서 미국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보냈다.
6월4일(일요일)
주일아침 7시 미국 약사친구 들과 주일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이번 Cruise 에 함께한 152명 전원이 모여 해단식을 가졌다. 그 많은 會員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한 장일부 한인 약사회장을 비롯한 유창호 집행위원장님 그리고Symposium 을 위해 애써 주신 여러분들! 또 한국에서 Group 별로 참여 하며 애써 주신 Leader 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만났던 기쁨 보다는 서로 떨어지는 아쉬움으로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30여명의 Group은 하루 더 Anchorage에 머물면서 마지막 날을 보내는 시간이다. Golf를 치는 사람들 Shopping을 하는 사람들. Tour를 하는 사람들로 자기에게 유익한 旅情의 마지막 날 을 보냈고 이곳의 유명한 관광지와 맛자랑 의 음식점도 들러 보았다 우리들은 저녁 늦게까지 큰 방에 모여 잊을 수 없는 Alaska Cruse를 통해 얻은 여행담으로 한밤을 지샜다.
6월5일(월요일)
조금은 여유롭게 한국의 시골 비행장 같은 Anchorage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눈 덮인 Alaska의 山 봉우리 들을 바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는 미국의 한인 약사들과 한국의 약사 들이 정기적인 만남을 통하여 학술교류를 했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고 정기적인 meeting을 통하여 우리들이 더 가까워지는 만남의 장으로 승화시켜 봤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Anchorage seattle 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제 밤 Dacoma에서 전화를 해 주었던 이남기 동기동창이 seattle 공항으로 와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에 몹씨도 섭섭했다. 40여년 떨어져 살면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궁금했는데 말이다. Seattle공항에서 우리 一行中 떠나야 하는 사람과 남아야 하는 사람들로 또 다른 別離를 하면서…
2006-08-29 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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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우성 박사의 알라사카 크루즈 여행기<4>
5월 31일(수요일)
아침6시 우리 을 태운 Diamond Princess 는 Gold Rush의 관문 이었던 Skag way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시골에 정박한 Cruise 는 우리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서부개척시대에 영화에서 보았던 차량들과 기차들이 줄줄이 서 있다. 일행은 기차를 타고 저 높은 WhitePass(화이트패스)와 Yukon Route(유콘루트)를 오르는 환상의 여정이 기다라고 있기 때문이다.
저 들 山 1/3이 눈에 덮혀 있고 그 밑의 절벽사이로는 폭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침엽수며 高山 식물들과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히 서있는 험산 준령이다. 우리의 철도와 건너편도로사이로는 수백미터의 계곡이 이어지는데 그 밑에는 거센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산악관광열차는 일단 타 보는 것 만으로도 추억이 될 겁니다" 라고 말하는 안내원의 말이 실감난다.
White pass로 오르는 동안 브라이들 베일폭포와 데드홀스 협곡의 장엄함은 우리모두를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하였고 구름이 거치면 눈 덮인 아름다운 山 구름이 덮으면 저 멀리 계곡에서 흘러 넘치는 물줄기가 아름답다.
깎아 지른 절벽 옆으로 기차는 지나가게 되고 또 터널도 여러 번 지나면서 정상에 도착한다. 구름 한 점 없는 정상에서 만년설의 풍광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얼음 山 그 구릉에서 맑고 깨끗한 호수를 볼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큰 축복이었다. 이 곳은 Canada 와 미국의 국경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탄 미국기차는 더 갈 수가 없다고 한다.
기차가 잠시 멈추더니 U Tern 을 하면서 오르던 길을 곧장 내려간다.
간이역의 驛務員에게 手話를 하면서 사무실도 없이 서있는 저 분은 이 추운 곳에서 몇 시간을 근무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참 내려오는 우리일행은 아! 곰이다. 곰이 나타났다. 우리들은 달리는 기차에서 우르르 그 쪽으로 시선집중. 야생 곰을 이곳에서 만났으니 행운 中 행운이었다.
올라 갈때도 그러했지만 頂上으로부터 내려오는 WhitePass(화이트패스)와 Yukon Route(유콘루트)의 절경은 실로 웅장한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모두가 감탄했다.
6월1일(목요일)
아침6시 우리들를 실은 Diamond Princess는 Alaska Cruise의 High Light라고 할 수 있는 Glacier Bay 국립공원으로 입항한다.
지구의 마지막 청정지역에서 안내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거대한 빙하바다.
빙하 산 보는 사람마다 "Surprise"를 연발하는 신비의 世界 바다로 흘러 내려온 거대한 빙하를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이름하여 'Surprise 빙하'이다. 거기에 곁들여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빙하산과 물개들 땅땅 우르르 쾅쾅!
거대한 빙벽이라도 무너졌나 하고 바라보면 아주 조그마한 얼음조각이 물속으로 퐁당 떨어진다. 그런데 그 소리는 Surround Speaker를 설치한 듯 천둥소리를 낸다.
눈이 놀랄 만큼 가슴이 감동한다는 말과 같이 이렇게 한참동안 자연의 웅성거림을 온몸으로 듣고 느껴본다. 이천 명이 넘는 여행객들이 일제히 갑판에 올라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저 빙벽을 바라보면서 조물주의 창조섭리를 생각해본다.
이 크나큰 배에 탄 승객은 하루종일 얼음 산 과 빙하 그리고 아름다운 협곡을 바라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8시경 다음목적지를 향하여 Diamond Princess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2006-08-25 1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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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우성 박사의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기<3>
5월28일
창파를 가르며 우리들을 실은 배는 협곡을 따라 유유히 전진한다.
아무 걱정 없이 느긋하게 休日을 즐기는 기분으로 아침을 연다. 풍성한 Buffet로 아침식사를 하고, 만나고 싶었던 친구들과 모처럼의 Coffee Break 는 生의 만감을 교차케 한다.
미국인 들이 大部分인것 같은 예배당에서 주일 성수를 하고 이곳 저곳의 shop 도 구경한다. 陸地 가 저만큼 있지만 Diamond Princess 는 豫定대로 항해하고 있으며 2670명의 승객들을 위해 1220명의 종업원(직원)들이 Serving 을 하고 있다는 이배는 世界에서 가장 좋은 배 가장 새로운 배 가장 큰 배(11만ton)이라고 자랑한다.
Titanic號가 4만톤 이라고 하니 그보다 얼마나 큰 배인가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Alaska Cruise 外에 南美(남미)와 화와이,일본과,유럽.멕시코의 Cruise 가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고있다. 아침10시에 CE(continuing education)시작된다.
작년 서울에서처럼 敎授 와 學生들이 교육을 받은 후 질의 응답을 하면서 最近의 약과병에 對한 敎育이 꽤 재미 있다.
1. 첫번째 시간은 Temple University의 Suh Byungse (M.D.,Ph.D)교수
Rationale for short-Course Therapy for Community-Acquired- Pneumonia(CAP)
2. 두번째 시간은 Medicare Part D:Emerging Issues and Impact on Medical Practice의 Chang H Yoo(R.Ph)
3.세번째 시간은 Parkinson's Disease :Review of Pathophysiology and Pharmacotherapy의 Hyun H song(R.Ph. M.S)
4.네번째 시간은 Community Pharmacist Role in the Education of Diabetic Patients의 Jae K. Shin, (R.Ph)
재치있게 진행하는 사회자와 우리는 한 민족임을 생각하면서 서로서로에게 잘 이해가 되도록 질문하고 답변함이 아름답다. 5시간30분의 긴 교육이 끝나고 재미 한인 藥師會와 大韓藥師會가 서로의 醫藥情報를 교환하자는 좋은 의견들은 우리모두에게 공감대를 주었다.
힘든 교육이 끝남을 축하 하려는 듯 Diamond Princess 선장이 한턱 내는 最高에 만찬에 모든 승객이 초청되어 간단한 Ceremony 가 있었고 아름다운 선율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韓國 藥師들의 모습에 世界各國 의 승객들이 Wonderful을 연발한다.
예약된 Restaurant에서 품위 있게 저녁식탁을 대해 보는 것도 一生에 몇 번이나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잘 훈련된 식당 종업원들로 하여금 最高의 접대를 받았다. 두시간의 저녁식사가 끝나고 대 극장으로 이동하여 화려한 Show를 관람하고 여흥을 즐겼다.
5월29일(일요일)
Vancouver를 출발한 Diamond Princess는 이틀동안 Canada협곡을 따라 항해를 하더니 아침동이 틀 무렵 첫 기향 지인 Ketchikan(케치칸)에 도착 했다 Ketchikan은 Alaska의 최 남단에 자리하고 있어서 大部分의 Cruise 는 이곳에 배를 머문다고 한다.
Ketchikan은 "꽉 뻗은 날개를 지닌 독수리란" 뜻으로 Alaska 원주민 언어인 Tlingit(칠링깃)이란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Gold Rush 가 Alaska를 새롭게 태어나게하던 1900년대 초반 Ketchikan은 수산업과 목재산업으로 성장하면서 Alaska의 4번째 큰 항구도시가 되었단다.
그래서인지, 가깝고 멀리있는 山 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계곡엔 맑은 물이 세차게 흘러나와 여행객들에게 산뜻한 육지의 맛을 보게 한다.
특히 Alaska 원주민들의 전통문화를 볼수 있는 Tong gas(통가스)박물관에서 번성했던 낚시산업,탄광산업,목재산업등 역사적인 기록들을 아주 자세하게 전시해 놓아 Alaska의 옛모습을 짐작케 했다.
또 토템바이트 주립공원의 인디언의 문화유적, 미국의 國鳥(국조)인 Eagle 서식지 Rain forest, 세계적인 연어통조림 工場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Diamond Princess는 오후 6시 우리를 싣고, 날이 저물어 가는? 아니 백야(White Night)의 太平洋을 유유히 혜쳐간다.
5월 30일(화요일)
이제 서서히 Diamond Princess에 적응하기 시작되었고 식당이랑.기념품 점 Fitness Club,음악이 흐르는 공간 편의시설 등을 마음대로 찾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동이 틀 무렵 선상에 올라 아름다운 Juneau(쥬노)의 입항을 구경한다.
억만년의 빙하와 자연의 비경을 자랑하는 Juneau(쥬노) 는 인구가 1만5천명이 사는 도시로 이중 약 60%가 연방정부나 주정부의 공무원이 살고있고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는 거대한 빙하가 장관을 이루는 Mendel hall 주립공원 이란다.
1~2마일 의 넓이와 수백 피트 의 두께로 이루어진 빙하가 해빙기를 맞아 거대한 바위모양의 빙산을 호수로 떨어뜨리고 있다. 맑고 깨끗한 공기. 풍부한 자연림.청명하고 투명한 강물 과 호수.한마디로 산수화를 보는 듯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곳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빙하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지구온난화로 점점 녹아 내리고 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다.
과거 금광도시의 영광을 안고 있는 Juneau는 Alaska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히고있으며 19세기 말부터 노다지를 노리던 광부들이 몰려와 2차 대전까지 금을 캐던 곳으로 유명하며 지금은 금을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된 곳 이란다. 1억6천 여 마리의 연어가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보여 준다는 카스티노 연어양식장을 계절이 빨라 보지 못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까이 에서 빙산을 만져볼 것만 같은 아름다운 Auke Lake, 그 옆으로 폭포 들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내뿜는다.
2006-08-21 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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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우성 박사의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기<2>
2006 년 5월 27일
그만 그만한 나이에 Seoul에서 이곳까지 긴 旅情이 얼마나 고단들 하겠는가. 그러나 Morning Call에 잔뜩 긴장한 회원들이 준비를 끝내고 7시에 식당에서 만났으니 그 아침이 오죽이나 하였겠는가.
이 나라 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꽃의 정원 부차드 가든으로의 관광이 시작된다. 꽃의 역사가 있듯이 이곳을 꽃으로 장식한 위대한 분의 History가 아름답다.이른 아침 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Garden에 찾아와 꽃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그 들이 아름다웠다. 처음 보는 꽃 이름에 감사하면서 아름다운 정원을 여유롭게 걸어간다, 나즈막한 山속에 자리한 꽃과 정원 그리고 호수의 관광을 마치고 빅토리아 -> 벤쿠버 -> Alaska Cruise 항구로 이동 하여 재미한인 여러 약사들과 한국에서 온 약사들이 함께 Diamond Princess 에 승선 수속을 했다.
승선한 會員들에게 미국한인 약사회에서 제공한Alaska Cruise의 안내문을 받고 여기에 게재한다.
"Cruise는 휴양과 여행을 겸하는 "떠다니는 Resort"로 여행을 하는 동안 이동의 안락함 입니다. 즉 비행기나 기차. 그리고 일반 여행과 같이 다른 여행지로 이동 할 때마다 짐을 싸고. 비행기를 갈아타고, 여행지 에 도착해서 다시 짐을 푸는 수고가 없다는 것이다.
"이동하는 Resort"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 밖으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모든 여행이 다 그렇지만 Cruise 하는 몇 일 동안을 아무런 근심 없이 망망대해(?)에 몸을 맡긴 채 휴식과 사색에 잠기게 하며 유람선이 닿는 곳마다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별천지의 세상을 열어줍니다.
Alaska Cruise처럼 이국적인 느낌이 강한 곳도 드'都求. 감청색 바다. 그 위를 떠다니는 빙산. 장엄한 피요르드(Fjord) 해안. 그리고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기항지들... 북태평양의 순수하고 신비로운 자연과 Canda와 Alaska의 아름다운 도시들을 거대한 Cruise를 타고 찾아가는 것이 바로 Alaska Cruise의 매력입니다. Alaska는 지형이 험하고 주요 도시가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로여행은 쉽지않습니다. 그러므로 Cruise는 Alaska 로 접근하기에 최적의 수단입니다.
얼음장 같이 시린 바닷물. 영원도록 녹지 않을 것 같은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빙산들이 떠다니는 바다. 얼음 위에 누워서 햇볕을 쬐는 바다표범 그리고 이런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인간들... 이 모든 것이 Alaska라는 단어와 하께 떠오르는 단편적인 영상들입니다. Alaska는 원주민의 언어로 "거대한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언제나 얼어 있는 동토의 땅처럼 Alaska는 각인됩니다.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0만이라는 헐값으로 구입한 이후에도 그런 Image는 지속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Alaska는 자연과 태초의 신비가 그대로 존재하는 꿈의 땅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던 골드러시와 풍부한 연어로 인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한 Alaska. 태고 적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채 때묻지 않은 빙하의 자연을 만날 수 있는 Alaska Cruise는 바다의 유빙과 피요르드(Fjord) 해안의 절경을 선상에서 감상하며 얼음의 나라로 유유히 스며들어가는 감동의 여행입니다. Alaska Cruise는 바다만 보는 Cruise가 아니고 Vancouver와 Anchorage를 이어 주는 해안선을 따라 길게 분포한 태평양 해안 Inside Passage(내수면지역)를 지나가기 때문에 빙하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절정의 산들이 해안을 따라 이어지고 그 아래로 그림에 나올 아름다운 마음들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경치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Alaska Cruise여행 시즌이 시작되는 6월은 Alaska 의 대자연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영적. 심적인 관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관광객이 붐비지 않아 이곳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7월 과 8월 은 북적 이는 관광객들로 인해 자연을 관광하기보다는 사람 구경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단점이라면 연어가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시즌이 7월이라 연어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Vancouver 공항에 도착 간단한 Cruise 입국소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시면 공항밖에 기다리는 Diamond Princess Cruise 승무원이 안내하는 Cruise 손님들을 위한 버스를 타고 Cruise 가 떠나는 선착장으로 갑니다. Vancouver 공항에서 Cruise 선착장까지는 약 12 mile 정도로 약 30분이 소요됩니다. 공항에서 Cruise 선착장까지 Transportation은 무료입니다. 저희들이 하는 이번 Cruise는 Canada를 거쳐 미국을 통과 하므로 승선 시 비행기 탑승 시와 같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여권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본인 ID와 일치해야 하며. 미국 시민권소지 여부를 확인합니다. Cruise가 정박하고 있는 선착장에 도착하면 승선 수속을 하여야 합니다. 5월 27일 Diamond Princess Cruise 승선은 오후 12시(12:00 Noon)부터 시작되며 늦어도 오후 3시까지는 승선을 완료하여야 합니다. 저희들 약사회 회원들은 배에 승선한 후 배 안에서 모입니다."
어마 어마하게 큰 배에 승선한 우리들은 2인 1실의 방에 여장을 풀고 18층까지의 Elevator 가 있는 꼭대기 층에서 미국 한인약사회가 주관하는 Opening Ceremony 가 있었다. 박보욱 초대 총연합회장의 개회선언에 이어 신재권 3대 총연합회장의 연혁소개. 장일부 대회장의 환영사.원희목 대한약사회장의 축사 전영구 전 서울시 약사회장의 축사.장우성 대한약학회 개국약학 분과회장의 격려사 가 끝나고 감사패증정.차기회장인사 그리고 한국에서 온 80여명의 약사와 미국의 각주에서 참가한 약사들의 소개가 있었고 이어서 Party 가 진행되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만났거나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내 왔던 동창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 들이 합석 하면서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이 흘러간다. 우리가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우는 이 시간에도 그 거대한 Diamond Princess는 힘차게 물살을 가르면서 항해하고 있다. 茫茫大海의 Hotel 방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꿈 같은 Cruise를 내가 하고 있구나. 하는 幸福感 에 젖어본다.
2006-08-16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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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우성 박사의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기<1>
여행기를 시작하며
미주 한인 약사 총연합회가 주관하는symposium에 참여하기 위해 Vancouver( Canada)에 도착했다. 이 대회의 참석인원이 150명쯤 인데 그 절반인 80 여명이 한국에 있는 회원과 약사 가족이다. Annual meeting Symposium을 준비하느라 애쓰신 회장님 이하 준비위원 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 그 많은 인원을 이끌고 캐나다와 미국까지 인솔한 한국의 여러 Group leader들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작년 미주 한인 약사들이 고국을 방문하여 그들이 CE학점( Continuing Education)을 이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고 하나로 뭉쳤다는 uniform을 입고 진지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공부하는 저들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은 바 있었는데 금년에도 꼭 같이 공부하고, 놀고, 먹고 마시면서 생을 즐기는 그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 약사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였고 지금도 약사다움에 또 자기들의 책무를 감당하고 있음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나는 저들이 이국에서 얼마나 고통스런 생활을 했는지 상상해보았다. 20 여 년 전Alabama 주 Samford 대학을 방문했을 때 유학 온 한국 학생을 만났는데 선생님! 정말 힘들어요. 자살하고 싶어요. 하는 말을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학생이다. 고국에서 등록금 보내주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다 해결하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면 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 학생은 Pharm D. 과정을 이수하기가 매우 힘들어 하는 것을 모습을 보았다. 우리와 함께한, 미주 한인 약사들도 공부하랴, 생활하랴, 애들 보살피랴, 정말 그들의 삶이 오직 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온다.
끝내 저들은 그 높은 벽을 통과했고 이제 스스로를 향해 나는 해냈어 하고 감격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게다.
나는 speech하는 과정에서 그 학생을 생각하고 또 우리 동료 약사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저려왔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지금도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럭저럭 살아가는 우리 동료 들도 있을 게다.
지금 한국의 우리 후배들은 미국약사 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노력을 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1차, 2차, 3차 시험에 pass하기 위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시험에 통과하고 난 다음 어느 직장에서 일해야 하나하고 고민 고민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온다.
어떻든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 한다.
젊음을 내세워 또 다른 세상을 정복해 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란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세상은 참으로 넓다. 그러나 또 반대로 너무나 좁기도 하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한국을 빛낼 후학들이 학교에서 연구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그들이 언젠가는 Novel상을 타리라고 나는 확신하면서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 수고의 땀방울 !
그 쓰라린 눈물을 기억하면서 세계정상에 우뚝 서있는 후배 들이 되어줄 것을 당부 해본다.
2006년 5월 26일
십여 년 전 하와이로 여름휴가를 갔을 때 茫茫大海의 일몰이 아름다운 Waikiki 해변에서 Sunset Cruise Party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 같다. 몇 년 전 FIP Conference가 있을 때 외국에 오래 살았던 동료가 나에게 전해주는 말은 "유럽의 Cruise旅行을 한 번 해봐, 아마도 일생에 가장 큰 追憶이 될 테니까?
그 친구의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그 때는 '이 친구 여유롭네')하며 지나쳤다. 실로 약국을 경영하는 우리들에겐 그림의 떡같이 생각하던 Cruise가 작년인가 존경하는 노환성 선배님(울산의대 교수)의 유럽 Cruise 여행기를 읽어보고 '그렇지, 나도 한 번 그 여행을 해봐야겠다고 작정했었다.
금년 들어 뜻하지 않게 미국 한인약사회에서 개최하는 Symposium 과 Alaska Cruise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큼 참가신청을 했다.
우리 개국약학 분과학회 회원들과 함께. 그러나 학회 회원들이 New York의 Albany 대학에서Summer Vacation lecture가 있어서 많은 회원이 참가하지 못해 결국 다른 group으로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일행 40여명은 밤새도록 달려 아름다운 都市 Canada 의 Vancouver 공항에 도착했다. 아침공기가 신선한 이곳도 입국소속이 꽤나 복잡하여 미국에서처럼 2시간이 넘게 걸린 입국소속.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쉴 사이도 없이 밴쿠버 市內 관광이 시작된다. 퀸 엘리자베스 공원을 비롯한 게스타운.스탠리파크.베이.라이온스 게이트 브릿지 등을 들려보고. 아름다운풍광에 접어든다. 마찬가지로 그렇지. 짧은 여행은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의 꽉찬 스케쥴 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좀 여유로워 졌음을 느꼈다 나이가든 탓일까. 빨리 빨리 가 없어지고 여기저기서 유머와 웃음꽃으로 서로의 마음을 열고 있었다. 트왓슨.대형 패리터미날로 이동하여 밴쿠버 아일랜드로 향했는데 흥미있는 것은 수 십대의 버스와 자가용 들이 사람을 싣고 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배 안의 bus에서 내린 우리 一行은(몇백명?)선상부의 Restaurant로 이동하여 state의 자랑인 빅토리아로 들어간다. 이들이 권면 하는 국립공원이랑,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 보았고, 석양의 아름다운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Sunset Cruise(비록 작지만)를 즐겼다. 뱃고동을 울리면서
그렇게 살기가 좋다는 Canada 의 Vancouver, 그 中에서도 경관이 아름답다는 빅토리아의 엠프리스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2006-08-09 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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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백두산, 고구려 유적지 답사 下
오녀산성은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지나는 길에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통화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곳은 인삼의 고향이고 포도주가 특히 유명한 곳이다.
저녁거리 구경을 나가보니 중국은 오후 8시 정도면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여러 가지 스넥을 사먹기도 하고 길거리를 배회하여 보았다. 신호등에는 초를 세는 카운터기가 따로 달려있어서 몇 초 후에 빨간불로 바뀌는지 파란불이 켜져서 건너는 시간은 몇 초가 확보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차량들이 보는 신호등에도 마찬가지로 카운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우체통보다 훨씬 큰 중국우체통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끝날 때쯤 침대열차를 타러 갔다. 이 열차의 일부 칸은 3단 침대로 되어 있었는데 제일 아랫단은 성인이 앉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위의 두 칸은 아랫단의 2/3 정도의 높이였다. 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서 백두산의 관문인 이도백하 역에 도착했다.
장백산입구에서 셔틀을 타고 곧게 뻗은 숲길을 지나서 다시 짚차를 갈아타고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문봉에 올랐다.
백두산은 이름의 유래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백 번가서 두 번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많아서 머리가 희다는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천문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흰 자작나무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두 그루가 같이 크고 죽는다는 주목나무도 볼 수 있었다.
장백산 입구에서 백두산 천지까지는 서식 식물종의 변화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출발하여 반쯤 갔을 때까지는 앞에서 언급한 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짧은 풀들만 보이더니 천문봉에 더 가까워지니까 황토만 가득했다. 백두산 천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올라갔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서 반대편 봉우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도 엄청 불고 꽤 쌀쌀했다.
기념촬영을 하고서 차를 타러 내려가려고 할 즈음에 구름이 개이면서 짙푸른색을 띤 천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서 천지를 바라다보는 게 아쉬울 즈음에 우리는 북파 코스를 내려와서 서파로 다시 백두산에 올랐다.
서파로 가는 길에는 장백폭포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원하게 세 줄기로 갈라져서 떨어지는 물을 보면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놀라게 된다.
이런 폭포를 지나서 천지호수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계단을 만들어두긴 했으나 급경사인 지점이 많고 여기저기 물이 새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단이 없었다면 천지를 보러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보니 이 것 조차 고마웠다. 힘들게 올라가서 천지를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높은 봉우리에서 본 푸른빛의 천지를 가까이 와서 보니 연못가에 작은 벌레가 너무 많아서 감히 손을 담가보기 힘들었다. 천지 주위에는 상아색 꽃인 만병초가 많이 피어 있었다.
민족의 명산인 백두산을 반은 중국이 관리하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간도를 중국으로 편입시키면서 압록강의 발원지인 백두산의 반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백두산을 찾는 사람의 대부분이 한국 사람인데 그들 모두가 중국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날 다시 침대열차를 타고 통화시로 이동하였다. 다음 날 아침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국내성)으로 갔다.
이동하는 중에 주말이라서 그런지 중국인 여러 쌍이 결혼식을 하고 풍선과 꽃으로 장식된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중국의 결혼 풍속도 우리랑은 좀 다르다고 한다.
신랑이 신부 집에 찾아가서 돈이 든 봉투를 건네고 신부를 빨간 신을 신겨서 그 신에 흙이 안 묻게 아무리 높은 층수에 살더라도 직접 신부를 들거나 업어서 지상까지 내려온 다음 결혼식장으로 데리고 간다. 이 풍습은 신랑감 체력 테스트를 해보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를 찾아갔다. 중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을 호태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릉비에 씌운 지붕의 현판도 호태왕비라고 적혀있다. 광개토대왕비는 그 높이가 13.1m나 되는 아주 큰 비석이다.
거기 쓰인 글씨는 깎일 대로 깎이고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바뀌고 정말 알아보기 힘들게 훼손된 상태였다. 비석 앞에는 그 것을 지키는 중국인 요원이 한 명 있었다. 중국인이 오면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해주지만 우리 같은 한국인을 보면 경계의 눈초리를 하면서 앉아서 지키고 있다.
요즘 중국과의 외교 분쟁이 있어서 분위기가 더 심각해 졌다고 한다. 한국말도 잘 알아들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가이드의 주의 사항도 들은 터라 조심조심 구경하고 나왔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중국이 지키고 있으면서 잘 관리되고 있지도 않아 보이는 것을 중국 관광객에게는 설명하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광개토대왕비를 관람 후에 근처에 있는 태왕릉을 보러 갔다. 돌산을 올라가니 좁다란 묘 입구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큰 돌 두 덩이만 남겨져 있고 그 위엔 사람들이 얹어 둔 지폐들이 가득했다.
그 곳에도 역시 중국인 하나가 말없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전까지는 무덤 바로 옆까지 민가가 있던 것을 몇 해 전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그 주민들을 다 이전시키고 공원조성을 하면서 문화재 보존에 힘쓰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 곳을 빠져나와 버스로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하니 장수왕릉이 있었다.
장수왕릉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7단의 피라미드형이다. 그 주위에는 커다란 돌을 뉘어놓았는데 한 면에 3개씩 12개를 두었으나 왕릉의 뒷면에는 돌 하나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4단까지 올라가면 입구에 닿을 수 있다. 태왕릉보다 천장이 높아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고 가운데는 역시 커다란 돌이 두 개 놓여 있다. 천장은 5 5m인 엄청나게 큰 통돌로 이루어져 있고 주위 벽도 2m에서 5m까지 아주 큰 돌로 벽돌 쌓듯이 쌓아놓았다. 벽화는 없었고 묘에 있던 유물들은 거의 도굴 당하고 나머지 몇 가지는 집안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묘의 우측으로 나와서 북한 쪽을 바라다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빌자면 7월 1일은 장날이라서 그런 것이라 하였다.
제련소에서 연기도 많이 나오고 활발한 농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장수왕릉의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후궁을 위한 무덤이 나온다. 장수왕릉의 1/10 정도의 규모이다. 그 다음 퉁하강으로 이동해서 424년 간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 성벽을 보았다. 대개는 중국 사람들이 사이사이 아파트를 지어 거의 없어지고 강가에 돌을 쌓아두었다는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정도로 조금 남아있었다. 높이는 1.5m정도 되어 보였다.
고구려 유적지를 하루 동안 둘러보았다. 사전에 이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아두었더라면 더 많은 것이 보였을 텐데 그냥 눈도장만 찍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역사책으로 자주 접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고구려를 그 유물을 그 유적지를 우리 손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중국이라는 남에게 이렇게 맡겨놓고 빌려서 보듯이 하고 있는 현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다음 날은 중국에 처음 도착해서 가본 압록강변으로 다시 갔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북한의 강변 유원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압록강의 수심이 중국측에는 깊지만 북한측에는 사람이 꽤 먼 거리까지 걸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얕은 모양이었다.
북한 주민 몇몇이 개울가에서 고기잡이하는 모양으로 고기를 잡고 있었고 유람선을 봐서 신이 난 아이들은 우리가 건넨 인사에 소리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외 전시용격으로 만든 듯한 관람차는 주말인데도 운행을 하고 있지 않았고 몇몇 건물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사상 짙은 문구를 걸어 두기도 하였다. 압록강을 반쯤 건너다 마는 유람선 조망이 끝나고 우리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발점인 호산장성을 보러갔다. 호산장성에 올라 그 전체적인 모습을 보니 우리가 매체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만리장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엄청난 규모로 성을 지어둔 것이다. 전체적으로 돌이 까맣게 보였는데 이 지역이 비가 자주 와서 마르지 못해 검은 것이라 한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패인 홈이 있는데 배수 시설용으로 아주 정갈하게 잘 다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무기 저장고 같은 역할을 한 순서대로 명명된 창고가 나온다.
이런 곳을 한 10개정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장성의 머리부분에 다다르게 된다. 그 곳에 오르면 중국 쪽으로는 인삼밭이 보이고 북한 쪽으로는 넓은 논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내려와서 오른편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면 일보화가 나온다.
북한 땅이 10걸음도 안되는 곳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루 넘게 걸려서 온 길을 다시 되돌아 집으로 왔다.
당초 예정했던 백두산 트래킹은 여정이 변경되었고 고구려 유적지 관람도 빡빡한 일정에 맞춰서 보느라 생각할 시간이 적었던 것 같다. 생각했던 것 보다 배, 버스, 그리고 기차로의 이동시간이 많았던 터라 모두 피곤했을 텐데 다들 그런 기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해서 좋았다.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중국체험과 잊혀져 가는 우리 것을 열심히 살펴보고 온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여행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한다.
2006-07-24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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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백두산, 고구려 유적지 답사 上
5박 6일의 긴 여정이 6월28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백두산천지를 보러간다는 마음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부산하게 준비를 하였다.
우리 일행은 동래에서 모여서 인천까지 단체버스로 이동을 하였다. 약 6시간 소요된 그 길에 모두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출국시간보다 꽤 이르게 도착하여선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사진도 몇 장 찍으면서 긴장을 좀 풀었다.
드디어 승선을 하고 우리 19명은 매트리스만 깔려있고 전혀 구획도 없는 널찍한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엔 17시간 가량 배를 타고 가야한다는 것을 몰랐던 터라 그저 즐겁기만 했다. 교수님과 다같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각자 놀기도 하고 그러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9일 중국시간으로 오전 7시 가량에 단동 항구에 도착했지만 중국 입국 관리원들이 9시부터 근무를 하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하선을 하였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 상인들이 아주 많았다. 좌측의 사진은 하선 직전에 찍은 것이다. 중국어를 못 알아들어서 관리원들이 가끔씩 소리치며 말할 때면 심각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항구 대기실에서 앞으로의 우리 일정을 책임질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지금은 중국으로 나와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는 이 분은 학생을 가이드해 보긴 처음이라며 우리를 아주 반겨주셨다.
이분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본 중국의 풍경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과 차들이 아주 자유로이 중앙선을 넘어 다닌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나 도로를 걸어 다니는 소들 모두 달리는 차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로 양옆으로는 옥수수 밭이 아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러한 길을 지나서 우리가 간 곳은 압록강이다.
그 곳에는 103개의 섬이 있는데 100개는 북한이 관리하고 3개는 중국이 관리하고 있다. 강에는 유람선이 다니고 주변에 수영을 하는 중국인도 여럿이 있었다. 그리고 '중조친선의 교'라고 하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다리가 있었다.
철교가 이어진 것이 이 친선의 교이고 나머지 하나는 반 이상이 유실된 상태였다. 6·25때 폭격을 맞아서 끊어진 것을 중국이 관광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압록강변을 바라보면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고 통화시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에는 옥수수 밭이 넓게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군데군데 들른 화장실도 모두 특색이 있었다. 중국 시골집은 거의 붉은색이었다.
벽돌도 붉은 것을 쓰고 지붕도 모두 붉은 기와를 썼다. 집밖에는 富와 福이라는 글씨를 하나씩 써서 붙여 두었다. 중국 사람들은 음력 1월1일에 이러한 글씨를 크게 써서 붙이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고구려 첫 수도 오녀산성(홍본성) 길목
환인으로 가는 길목에 '오녀산성'을 지나가게 되었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성(오녀산성)의 일부가 지금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사람들이 축적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라 한다. 오녀산성은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지나는 길에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2006-07-20 0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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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춤추는 키울라강 下
남양주시 약사회 김재농(카이로약국)
우리는 2대의 보트에 나누어 출발했다. 바로 급류다. 보트가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간다. 보트가 튈 때마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발걸이가 없다. 발을 걸어야 튕겨나질 않는데... 그도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소(沼)에서 잠간 쉬다가 또 급류가 온다. 이렇게 쉴 새 없이 급류를 만나니 앞에서 패들을 젓는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 우리가 보트를 잘 조정하니 2명이나 되는 가이드들은 뒤에 앉아 딴 짓만 한다.
그러나 강폭이 넓어서 좋다. 강변에 푸른 숲이 있어 더욱 좋다. 오손 도손 얘기하고 태양을 만끽하니 즐겁지 아니한가. 다른 보트와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바로 물싸움이다. 실컷 물 퍼 재기고 맞고 생쥐가 되어도 시원하기만 하다. 보트는 유유히 흐른다.
이렇게 얼마를 흐르니 햇볕은 뜨겁지 노 젓기도 싫증이 났다. 마침 급류가 끝날 무렵 보트를 강가에 댄다. 바디-래프팅을 한단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 어리둥절하다. 오라, 맨몸으로 급류를 탄다? 아마 이곳이 행사장인 듯 다른 보트들도 모두 강가에 정박한다. 급류 위로 올라가서 차례차례 맨몸으로 떠내려 오는데 스릴이 있어 보였다. 중요한 것은 반듯하게 누워서 머리를 위쪽으로 잘 유지하면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리를 벌리고 엎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김 약사는 돌에 엉덩이를 몇 번 부딪치고는 평형을 잃고 엎어져서 물을 먹고 아푸아푸 하는 촌극을 벌리기도 했다.
출발이다!
또 다시 래프팅은 계속된다. 강가의 집들이며 바나나 농장도 구경하고 목욕하는 물소가족도 만났다. 투망으로 고기 잡는 장면도 포착했다. 투망은 영락없는 우리나라 투망이다. 큰 고기를 집어 들고 보란 듯이 흔들어 댄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내가 한번 던져봤으면... 래프팅이 아니면 구경하기 어려운 그들 내면의 모습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또한 넓은 강을 가로지른 줄사다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자동차가 다닐 수는 없지만 마을과 마을을 잇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어떤 급류를 정신없이 헤치고 내려오는데 소용돌이에 말려 사람들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 2명을 포함한 유럽인 가족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보트에서 갑자기 튕겨나간 것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러나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살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아이가 팔다리를 벌리고 반듯이 누워 정확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완벽한 훈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소에 도달하여 이번에는 첨벙 첨벙 물에 뛰어들었다. 이글거리는 햇볕에 얼마나 더웠으면 수영도 못하는 여약사님 들이 너도나도 그 깊은 물에 뛰어들었을까.
“둥둥 떠내려가는 기분이 어때요?“
“시원하가기도 하고 스릴 있고 아주 재미있어요!” 전약사가 즐거운 듯 소리친다.
“이 맛을 알면 래프팅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데...”
아주 빠른 급류가 앞을 가로 막는다. 우리들은 물길을 보아가며 열심히 패들을 저었다. 물은 바위를 치고 물결은 하늘로 솟구친다. 물방울이 떨어지는가 하면 다시 튀어 오른다.
그 넓은 강에 물결이 춤춘다, 그래 춤이다! 결코 슬프거나 한 맺힌 춤사위는 아니다. 기쁘고 즐거운 환희의 춤이다.
춤 춰라 키울라야 자연의 축복 속에 마음껏 춤춰라! 보트가 춤 속으로 빨려든다. 모두가 춤춘다. 강물아 우리들의 이 즐거운 마음을 싣고 흘러 흘러 가거라.
2006-07-20 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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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춤추는 키울라 강 上
남양주시 약사회 김재농(카이로약국)
“Which way? Which way?” 뒤돌아보며 다급하게 소리치니
“Right! Right!” 하면서 오른쪽 지류를 가리킨다.
“신 사장! 오른쪽 지류(支流)야 오른쪽으로 저어!”
신사장이 패들을 부지런히 움직여 보트는 오른쪽 강물로 접어들었고 급류로 흘러들었다.
“앞에 바위야! 배를 왼쪽으로 틀어!” 신사장이 고함친다.
“알았어! 내가 저을께!”
보트는 큰 바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쏜살같이 내닿는다. 급류가 춤춘다. 하얀 물방울이 부딪치고 튀어 올라 너울너울 춤을 춘다. 보트는 빠른 속력으로 흐르고 신사장과 나는 방향 조절하느라 번갈아가며 패들을 젓는다. 뒤에 탄 여자 약사님들은 아예 패들을 내려놓고 보트에 고정된 줄만 잡고 튕겨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급류를 벗어나자 깊은 물로 들어간다. 와, 나무그늘이다. 그늘이 좋아! 보트는 물결 따라 천천히 흐른다. 한숨을 돌리면서
“겁 안나요?”
“겁은 나는데 재미있어요!” 최 약사가 얼른 대답한다.
“그러니 내가 뭐랬어! 래프팅은 재미있는 거라 했지.”
어제만 해도 오늘 래프팅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틀간에 걸친 키나발루 산 등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고도(高度) 800m를 올라 4100m 정상에 섰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하산했다. 정상에서 팀폰 게이트 1860m 까지 고도2240m를 내려온 셈이다.
경사가 급한데다 끝없는 계단이다.
아주 파김치가 되어 호텔에 돌아왔는데, 마침 그날 밤 월드컵 축구를 했다.
붉은 악마들이 아프리카의 강호 “토고”와 붙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응원한 덕분에 2:1로 첫 게임을 승리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우리는 이래저래 감격했다. 너무 피곤하여 래프팅 지원자가 없을 줄 알았는데 정말 뜻밖이다.
6명의 회원을 태운 미니버스가 산 속으로 계속 달린다.
강의 상류로 올라 가야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키나바루 산이 흰 그름 속에 아주 멋있게 피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아름다움에 모두가 탄성을 올린다. 저 산을 우리가 갔으니 정말 대단해!
두어 시간 후 어느 강가에 도착한다. 키울라 강이라 했다. 첫 눈에 아주 멋있다. 넓은 자갈밭과 나직이 흐르는 강물이 푸른 숲과 어우러져 풍치가 좋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래프팅 가이드를 소개받았다. 검게 탄 말레시아 젊은이다. 헬멧과 패들, 부의(浮衣)등 기본 장비를 지급받고 원형으로 둘러서서 안전교육을 받았다. 말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바디-랭귀즈로 통한다.
패들 잡는 요령과 물에 빠졌을 때의 요령 등을 설명하는 데 한국에서와 비슷하다.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준비운동을 안 한다는 점이다.(계속)
2006-07-19 1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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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미얀마를 다녀와서 ④
그 호수의 중간 지점에서 산 속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큰 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곳을 찾았다. 200여 가구가 여기저기에 있다는 말씀을 들으며 사역지에 도착하니 시원하게 뚫려있는 높은 곳에 대나무로 지은 집회장소가 있었다. 특이한 나무, 유실수 식물 등의 분포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었고 커피나무도 있었다.
50만평 대지에 유실수와 농작물을 심고 자체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 큰 호수 주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20만 명쯤 된다는데 그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모범적인 마을이 될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선교지에서 브리핑을 받았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선량해 보였고, 우리 모두는 하나의 형제와 자매임을 확인하는 사랑의 순간들이 오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과일이랑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며 특별히 빨간색의 토양에서 잘 자란다는 이름 모를 과일들을 먹으면서 밝은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선교, 봉사, 구원-참으로 목사님의 생각은 훌륭하구나 하고 격려를 보냈다.
숙소인 호텔로 오는 길은 꼬불꼬불 시골길이었고 그 유명한 틱(Tic)목(木)은 모두 베어 수출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밤늦은 시간의 호텔 주변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별빛이 아름다운 인래 지방에서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로 사역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목사님의 말씀을 빌린다면, 무궁무진한 구원사업을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사람, 장소, 자본)
양군으로 돌아와 관광을 하는데 이 민족이 자랑하는 쉐다곤(Shedagon)이라는 황금사원을 보았고 승려와 군부 지도자의 사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철권통치로 7000만 인구를 다스리고 있는 20만 명의 군부. 이 민족의 소망인 아웅산 수지도 연금 상태이고. 인접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폐쇄된 사회와 국가.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언제쯤 이 민족의 설움을 달래주실 것인지...
침례교회 총본부를 방문하여 미얀마의 전반적인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에 대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으며 열심히 추진하는 사업들도 볼 수 있었다.
카렌족을 중심으로 소수 민족을 복음화하고 마지막으로 미얀마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다는 프로젝트이다. 김 목사님께서 추진하는 Wellbeing Company를 방문하여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보았고 바로 옆의 300여 평을 구입하여 선교센터를 건축하는 방대한 계획도 들었다. NGO사무실을 방문하는 길에 지역 사령관의 저택을 볼 수 있었는데 크고 넓은 대지에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는 현대식 저택을 보고 마음이 저려왔다.
미얀마 현지인들의 NGO활동에 큰 기대를 했으며 공항에서 실랑이 부리다 가지고온 컴퓨터는 잘 설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목사님 댁에서는 30여 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있었는데 영재교육을 받는 신실한 믿음의 청년들이란다.
지난주일 저녁에 같이 예배드리며 은혜 받았던 그들과 다시 만나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그 중에는 미얀마-중국 국경에서 온 청년도 있고 인래 호수에서 생활하다 이곳에 온 청년을 만나 이야기 했다.
4박 5일의 짧은 미얀마 사역지에서 큰 꿈을 안고 귀국하였다. 금년 여름 몽골 울란바토르 지역에 의료봉사가 끝나면 12월이 되는 겨울쯤 미얀마를 다시 방문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고 싶다.
병들어 고통 받는 심령들을 위해 큰 병원을 건축하여 평생 사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完>
장우성(대한약학회 개국약학분과학회장)
2006-05-29 1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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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미얀마를 다녀와서 ③
참석인원은 남녀노소 50여 명쯤인데 예배순서에 따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림에 은혜를 받았다. 교회라는 십자가를 세울 수 없지만 실내에서는 조용히 예배를 드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웠고 저들의 신앙의 씨가 이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님의 현지 사역은 우선 100여 가구가 사는 곳에 일만여 평의 농지사용을 정부로부터 허가받고(30년 임대) 그곳에서 생활하며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집을 짓고 농토를 일구어 유실수를 심고 밭이랑에 콩을 비롯한 감자, 고구마, 딸기, 채소 등을 심어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의 유업처럼 이 땅에도 그런 농업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이고, 새마을 운동을 본받아 부강한 농업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정부가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마을이 있는 곳에는 풍부한 인적자원이 있어서 계획을 잘 세우면 집단 농경사회로 소득이 많은 기술집약적 영농계획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역지를 10여 군데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자체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유치원, 양로원, 영재학교, 기술학교(방직공장), 농업학교 등을 계획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가는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우리나라 농업 기술자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하면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대우 기업이 확실히 공업기술을 전수하면서 사업을 했었는데 지금은 철수한 상태이고 한류의 열풍을 타고 연속방송극을 하루 두 편씩이나 방영하고 있음은 한류를 통해 한국을 좋아한다는 뜻이란다.
침례교회의 건재함은 카렌족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뒷받침 되었으며 미션스쿨,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매월 2~3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는데 낙후된 병원 시설은 병원이라기보다 전시의 야전병원과 흡사하였다.
김 목사님은 이곳에서만 6년 째 사역을 하고 계신다는데 카렌족을 중심으로 소수 종족에게도 선교할 계획이며, 미얀마족은 거의 대부분 부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과 같이 참으로 선교가 어렵다는 표현으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브리핑을 받고 이곳이야말로 전도할 수 있는 황금 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얀마에서 가장 큰 호수가 있는 인래 지방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렀다.
비행시간은 50분 정도였으나 탑승기 -프로펠러 경비행기-가 적어서 50명 정도의 관광객들이고 내국인은 없는 것 같았다.
깨끗한 비행장 주변에서 비교적 최신형 중고차를 타고 호수 근처에 도착한 시간은 40분 정도. 수중 도시인 이곳 인래 호수 주위의 민가들은 이곳에서 농사짓고 일상생활을 하며 학교에도 가고 그들 나름대로의 생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들 생활상에서 충격적인 것은 바다 같은 호수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데 그 호수물로 밥을 짓고 빨래하고 대소변 보고 수확한 농산물을 먹고 고기도 잡아먹고 살아간다.
그 마을의 이장 집에서 내놓은 점심식탁을 우린 영원히 기억할 것 같았다. 손수 빚은 떡이랑 감자랑 야채, 과일,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특산품 차를 먹고 마시면서 선교자의 고통을 인지할 수 있었다.
다섯 명을 태운 보트를 이용하여 항해하는데 능수능란한 운전을 하는 현지인덕분에 그 크고 넓은 호수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구경했다. 그곳엔 큰 유람선, 작은 배, 고깃배, 낚싯배, 통통선, 손수 저어가는 배 등 종류도 많았다.
곧 뒤집힐 것 같은 배위에 앉아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손놀림이 대단해 보였다. 1시간 이상 통통통 하며 달려가는 우리 일행은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벌겋게 얼굴이 익어가고 여기저기 호수 주변의 생활양식을 추상해본다.
그곳엔 수중호텔이 있고, 매점이 있고, 사원이 있고, 물소들도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물을 실어 나르는 배, 나무를 실어 나르는 배, 학교에 다녀오는 학생들, 시장을 보았는지 많은 상품을 실은 배들이 바쁘게 왕래한다.
장우성(대한약학회 개국약학분과학회장)
2006-05-24 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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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미얀마를 다녀와서 ②
긴 여정에 단잠을 자고 있는데 무슨 소리들이 나의 아침을 깨운다. 창밖을 열어보니 새벽별이 뜨고 있는데 여기저기 숲 속에서 새 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코러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이한 소리에 잠이 깨었고, 별과 달빛이 희미한 새벽 여명에 그들만의 대화가 이방인의 마음을 상쾌하고 즐겁게 해준다. 넓은 호수가 있고 아침햇살이 아름다우며 조용한 호텔 주위를 산책하면서 이 나라의 문화를 찾아볼 수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로(1962년부터) 불교를 숭앙하는 국민들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65%가 농민이고, 135종족 가운데 60% 이상이 미얀마족, 그리고 기타 종족으로 7000만 인구. 한국의 3배쯤 되는 영토를 가진 인도와 중국, 태국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란다. 40~50년 전에만 해도 필리핀과 함께 잘사는 나라로 꼽히던 미얀마.
그러나 1962년부터 군사독재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승려와 군부의 통치 속에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단다.
인구의 70%가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 승려가 가장 우선권이 있는 나라. 통치자의 사회주의 지향으로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나라. 신형 자동차가 없고 모두가 중고품만이 수입되는 나라. 국민이 있는 곳엔 비밀결찰이 있는 듯, 학교에도 경찰관들이 띄엄띄엄 서서 지키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는 12월부터 5월까지이고 우기는 6월부터 11월까지이다. 연평균 온도는 25 쯤이고 가장 더운 날의 온도는 약 45 라 한다. 특이한 것은 6월부터 우기가 시작되는데, 6개월 내내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들은 어떻게 이 계절을 보낼까하는 것이 큰 문제로 생각되어졌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와서인지 굴절된 도로와 영국풍의 고가(古家) 그리고 서구식 건축물들이 눈에 띄었고 오래된 교회와 학교가 우리에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아침 일찍 여기저기 시내 관광을 하면서 그들의 의식주를 볼 수 있었다. 영국식 교통망에 중고차 일색인 자동차 행렬. 400만 명이 생활하고 있는 양군 시내는 여느 도시처럼 활기가 있어 보였다.
정치엔 별로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오랫동안 압정으로 체념을 했는지 지배자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듯하다. 수도를 이전한다고 하는데, 어느 역술인이 현재의 양군은 시운이 다했으므로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해야 국운이 있다고 해서란다. 중국인들이 이전비용을 충당하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가는 식으로 신도시를 건설한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크고 넓은 양군은 이 민족의 중심도시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이게 뭐람 하면서 푸념해봤자 소용이 없음을 그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양군에서 1 시간 여 자동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니 넓은 들판이 이어지고 숲과 물이 있는 곳이면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숲 속에 띄엄띄엄 집을 짓고 뜨거운 여름철을 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그들에게서 50년대의 한국 농촌을 상상해 본다.
보통 한 가정에 식구는 10여 명으로 아이들이 많았고, 맨발에 마을 어귀에서 청소년들이 축구, 배구, 족구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이곳에 파송되어 오신 김 목사님께서 시무하는 곳에서 11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장우성(대한약학회 개국약학분과학회장)
2006-05-17 1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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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미얀마를 다녀와서 ①
이른 아침에 인천 국제공항을 향해 달려간다. 10시 30분 태국항공이 홍콩을 경유, 방콕을 거쳐 양군(Youngkoon)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빠른 걸음을 재촉한다. 사단법인 국제사랑재단을 통하여 미얀마에서 사역하시는 김 목사님을 만나 뵙고 그 속에서 우리 교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여 본인을 비롯한 두 분 장로님과 함께 동행하였다.
황금노선인 타이항공의 점보기에 꽉 들어찬 승객들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고 있는 승무원들의 표정에서 생동감 넘치는 타일랜드의 발전상을 읽을 수 있었다.
경유지인 홍콩국제공항... 십 여 년 전만 해도 조그마한 공항이었던 곳이 이렇게 큰 비행장이 되었구나 하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Ocean Park에 올라 아름다운 남지나해를 바라보면서 추억에 젖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하는 저녁 시간에 방콕공항에 도착하여 모든 것이 풍족한 것 같은 활기찬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지금쯤 메콩강과 빠따야는 어떨까하고 상념에 젖어본다. 45분의 방콕 양군의 비행시간. 기장의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10분이면 공항에 도착한다는데 양군 시가지는 어두컴컴한 시골도시를 연상케 한다.
드디어 착륙!
덜커덩 덜커덩 몇 번인가에 모든 승객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했고 컴컴한 공항 청사에 도착할 즈음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승객 여러분들께 착륙 과정에서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방송이 나오는 순간 승객 모두는 폭소로 위로를 받았다.
양군 국제공항은 시골 버스 대합실처럼 조명시설이 열악하였고 통관 수속을 하고 짐을 찾는 시간이 길기도 하다.
왜냐하면 꽉 찬 점보기 승객들의 수화물을 수작업하고 있으므로 1 시간여의 시간이 지났다.
우리들은 이 곳 사람들의 사무 처리를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짐을 찾은 각국 승려나 불자 들은 유유히 세관을 통과하여 나간다. 맨 나중에 우리 일행이 검사대를 지나가는 데 짐을 모두 조사하더니 이 물건은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한단다. 어쩌면 좋을까! 이 곳 NGO사무실에서 사용할 컴퓨터를 한 대 가지고 왔는데 이 물건은 통관할 수 없다고 하니 딱하기도 하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한국인 통역사가 나오더니 귓속말로 양주 한 병을 사가지고 오란다. 지금까지 싸움질해 헐떡대던 가슴을 누르고 이 나라의 정서에 따라서 그렇게 20$의 티켓을 지불하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씁쓸했지만 소중한 체험을 했다.
1980년대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에 의료봉사 하러 갔을 때, 2000년대 3번의 몽골 울란바토르 공항에서도 우리는 짐이 많아 곤욕을 치렀던 점을 상기해 보았다. 너희 나라를 도와주러 왔는데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사회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가슴 아프게 했다.
2006-05-10 1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