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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니트로글리세린 〈下〉
복용 방법 따라 효과 차 커 `반신반의'
혀밑 투여 곧바로 심장운반 치료 입증
니트로글리세린은 워낙 폭발성이 강해, 이것이 들어 있는 용기를 흔들기만 해도 터져버릴 정도여서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매우 컸다. 그러던 중 노벨을 엄청난 부자로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 위험한 약제를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용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톱밥이나 규조토를 사용했는데, 쇠통 속에서 새어 나온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가 모두 흡수해 상자 밖으로 전혀 새어나오지 않은 것을 한 작업자가 노벨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현상을 이용하여 노벨은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시켜 운송 뿐 아니라 사용도 편리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게 되었으며, 이 폭약을 팔아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다시 니트로글리세린을 의약용으로 사용하는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헤링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니트로글리세린의 약효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니트로글리세린이 우리 몸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상반된 견해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니트로글리세린 몇 방울로 심부전증에 효과를 보았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200방울을 섭취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다른 효과를 보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복용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마시면 소장에서 흡수된 후 간에서 분해돼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약효가 없으나 혀 밑에 투여하면 곧 바로 혈액 속에 들어가 심장으로 운반되어 효과를 내는 것이다. 1879년 영국 의사 윌리엄스 뮐러는 어느 의학잡지에 `협심증 치료약 니트로글리세린'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은 복용법에 따라 약효가 다르며 혀 밑에 투여하면 협심증 환자에게 극적인 치료 효과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헤링의 보고와는 달리 세계의 중심지인 영국에서 발표돼 금세 세계적 이목을 끌게 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심근의 근육층을 지나는 비교적 큰 동맥을 확장해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는 부분에 피가 잘 흐르도록 해주는 효과가 있으며,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
자료협조 : 위드팜
2003-06-25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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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니트로글리세린 〈上〉
1847年 伊 화학자 소브레로 첫 발견
“심부전증 치료”… 당시 인정 못받아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100년 후에는 평균 수명이 적어도 150년은 넘으리라고 예측된다.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게 예방하고, 또 노화현상에 대한 이해가 커짐에 따라 노화를 느리게 하거나 방지함으로써 평균 수명을 2배까지 늘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의학의 발달은 약학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며, 약학의 발달은 화학의 기초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한 가지 예가 흔히 니트로글리세린이라고 짧게 부르는 트리니트로글리세린 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은 1847년에 이탈리아 화학자 소브레로가 처음으로 합성하였다, 진한 질산과 진한 황산 혼합액을 차갑게 한 후 이 혼합액에 글리세린을 섞으면 올리브 기름 같은 화합물이 얻어진다. 이 액체를 잘 관찰하기 위해 들여다보던 소브레로는 관자놀이부터 시작해서 두통을 느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이 기름 한방울을 비커에 넣고 가열하자 즉시 폭발하면서 비커가 산산조각이 나버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관찰이 후에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을 줄지 누가 알았을까?
그 해 여름에 소브레로는 자기가 경험한 내용을 프랑스 과학잡지에 발표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를 본 미국의 한 의과대학 교수 헤링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의약품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잘 알고 있는 화학자가 합성한 니트로글리세린 한 방울을 자기 혀 끝에 묻혀 보았다. 역시 예측한대로 혈관 확장에 의해 관자놀이가 심하게 떨리더니 강한 두통이 엄습했다.
이런 경험을 한 헤링은 1방울의 300~500분의 1정도 되는 양을 설탕과 섞어 혀 밑에 투여하는 복용법을 실험하면서 니트로글리세린을 심부전증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만 해도 세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아메리카에서 수행된 실험이라 세계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한편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성을 이용해 폭약제조 공장을 세웠던 스웨덴의 임마누엘 노벨의 이야기는 이와 매우 대조적이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을 세우고 가동을 시작한 후 며칠도 되지 않아 폭발 사고로 공장이 파괴되고 자기 아들도 하나 잃는 불운을 겪었다.
2003-06-20 1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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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Withering과 디기타리스
디기타리스 18C 말부터 심장병 치료에 사용
Withering, 이뇨작용 촉진 부종치료 입증
오늘날에도 심장병의 치료에서 디기타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한데 이 약제는 심근의 수축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강심제로 또는 과다한 심박동수를 감소시키기 위한 심장전도계의 억제제로서 임상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디기타리스는 Digitalis purpurea(purple foxglove)라는 식물의 말린 잎에서 추출된다.
이 식물은 1542년 독일의 Fuchsius가 그 꽃잎이 장갑의 손가락(digit)과 닮았다고 해서 디기타리스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foxglobe라고도 불리워 졌다. 이 디기타리스가 임상적으로 심장병의 치료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경부터였는데 이것은 영국의 식물학자였던 William Withering(1741~1799)의 공헌에 힘입은 바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Withering은 영국의 한 시골에 사는 노파가 당시의 의술로서는 별 치료법이 없던 부종(dropsy, edema)을 20여 가지 이상의 약초를 섞어서 만든 비방으로 치료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약의 성분에 관해서 연구한 결과 20여가지 이상의 약초 중에서 오로지 디기타리스만이 이뇨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이뇨작용에 의해서 부종이 치료된다고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던 중에 Withering은 심부전증으로 고생하던 Oxford의 한 대학교수가 디기타리스 뿌리를 복용한 뒤로부터 큰 효과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디기타리스의 효능에 고무되어 더욱 연구에 몰두하면서 디기타리스의 제조법과 사용량을 표준화하였다.
자료협조 : 위드팜
2003-06-18 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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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플레밍과 페니실린
포도상구균 푸른곰팡이에 죽어
650여종 중 한종만 원료로 사용
위대한 발명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르키메데스의 목욕, 뉴튼의 사과, 제임스 와트의 끓는 주전자 뚜껑, 그리고 플레밍의 곰팡이가 그 예로 꼽힌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여러 날 실험실을 비워두었던 플레밍이 실험접시에서 배양하던 포도상구균(Staphylococcus)이 죽어 있는 현상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이 죽어 있는 접시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 원인이 어디선가 날아온 푸른곰팡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 푸른곰팡이를 이용하여 균을 죽이는 실험을 계속했지만 약을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다.
실제 페니실린 주사약이 나온 것은 플레밍이 1929년 자신의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11년이 지난 후 옥스퍼드대학의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에 의해서였다. 플레밍이 발견한 푸른곰팡이의 종류는 무려 약 650여종이고 그 중에서 한 종류(penicillin notatum)만이 페니실린의 원료가 되었다.
이 곰팡이를 찾아내 인류에 직접적 기여를 한 것은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 두 사람인 셈이다. 그럼에도 플레밍의 업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곰팡이가 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며 그 공로로 1945년에 노벨의학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2003-06-13 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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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아스피린 탄생 유래
`아'세틸살리실산+`스파이리어'=아스피린
버드나무 껍질·조팝나무 꽃에서 해열 성분추출
아스피린은 화학명이 아세틸살리실산이며 의사의 처방 없이도 사먹을 수 있는 해열진통제다. 독일의 바이엘사가 1899년에 분말형으로 시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알약은 1915년부터 나왔다. 현재 인류가 하루에 먹는 아스피린 알약은 무려 1억 알이 넘는다 하니 정말 놀랄만하다.
고대 서양의학 선구자인 희랍의 히포크라테스는 버드나무 껍질의 해열작용을 발견했다. 그후 2천여년이 지나 영국에서 스톤이라는 성직자가 백버드나무 껍질 즙을 열이 있는 사람 50명에게 먹여 해열작용을 확인했다. 그는 이 사실을 1763년에 런던왕립학회에서 발표했다.
60여년 후에 이탈리아 화학자 피리아는 버드나무 껍질에서 약효의 주성분인 살리신을 분리했다. 그 뒤 몇 단계 화학반응을 거쳐 아스피린의 모체인 살리실산을 얻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야생 조팝나무 꽃에서 향긋한 살리실 알데히드가 추출됐다. 이를 산화하니 살리실산이 되었다. 조팝나무는 학명으로 스파이리어에 속한다.
바이엘사는 1893년에 살리실산의 에스테르인 아세틸살리실산의 정제법을 발견했다. 이어 아세틸의 머리글자인 `아'자를 스파이리어와 합쳐 아스피린이라 이름을 짓고 진통해열제로 시판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바이엘사는 아스피린의 대명사가 되었다.
자료협조 : 위드팜
2003-06-11 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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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약의 역사와 약의 탄생
`아편서 모르핀 분리' 신약개발 첫걸음
이번호부터 약국체인 위드팜의 협조를 얻어 `재미있는 藥 이야기'를 연재한다.
`재미있는 藥 이야기'는 약의 역사를 비롯해 위대한 발명의 뒷 이야기 등을 알차게 소개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서양에서는 약 4,000년 전 수메르인들의 점토판이나 기원전 1550년대의 이집트인들의 파피루스에 약물과 처방이 기록되어 있으며, 동양에서는 기원전 250년대의 `신농본초경'에 최초로 약용식물(생약)들이 수록되어 있다.
근대 약학은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태동되었으며 19세기 제르튀르너(Serturner)가 아편에서 진통작용 성분인 모르핀을 순수 분리해 내면서 생약에서 필요한 성분만을 추출해 약으로 개발해 내는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1957년 독일의 혜미 그뤼넨탈사에서 개발된 수면제 `탈리도마이드'를 임신부가 복용한 후에 팔과 다리가 없어지고 손이 어깨에 붙는 기형아를 낳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신약을 개발할 때에는 효과의 입증 외에 부작용 등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되어야만 했고 임산부의 약물복용에 대한 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에서도 인류에게 필요한 신약들은 속속 개발되었고 우리는 그 새로운 약의 재미있는 탄생 이야기를 알아보자.
2003-06-06 10: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