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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말라리아 치료약 키니네
말라리아外 다용도 처방 `기적의 나무껍질'
토닉워터 향료·금연패치에도 이용
말라리아는 우리나라에서 학질이라고 하는 급성 및 만성 재발성 감염질환으로 이 병의 병원체는 원생동물문(原生動物門, Protozoa) 포자충아문(胞子蟲亞門, Sporozoa) 말라리아충속( 蟲屬, Plasmodium)의 원충이며 모기가 매개한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오한과 열, 빈혈, 비장비대증이 주요증상이며 간혹 치명적인 합병증이 생기기도 한다.
▣ 키니네의 발견
아주 오랜 옛날 남아메리카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인디언이 있었다. 이 인디언은 산 속을 헤매다 그만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었다. 목이 말라 산 속 웅덩이에 고여 있던 물을 마셨는데 얼마 후 몸이 가뿐해 졌다.
웅덩이 주변에는 키나키나(quina quina, 계납수, 鷄納樹)나무가 무성했다. 이 인디언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이후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게 되어 `기적의 나무껍질'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키니네는 말라리아 치료약 외에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칵테일에 자주 이용되는 토닉워터의 씁쓰레한 맛도 키니네 때문이며, 금연용 패치에서 흡연에 대한 갈망을 없애는 데에도 주성분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키나키나 나무의 수입이 차단됐다. 당시에는 말라리아 뿐만 아니라 여러 병에도 키니네가 처방되던 상황이어서 대용약품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 말라리아 병원균의 키니네 내성
내성은 말라리아 병원균의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것으로, 항말라리아 약물을 병원체 몸밖으로 배출시켜 약물이 체내에 축적되는 것을 막는다.
말라리아 약물은 병원체 내부에 일정 농도 이상 농축됐을 때 약효를 나타내기 때문에, 내성을 가진 병원체는 서로 다른 항말라리아 약물인 키니네(퀴닌), 메플로퀴닌, 할로판트린, 콜로로퀴닌, 아터미시민에 대해 모두 저항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은 말라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말라리아 예방 백신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와 말라리아 백신 이니셔티브 등 여러 연구 기관이 협력하기로 결정해 백신 개발 전망이 한결 밝아지게 됐다. 또 키니네에 대한 내성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이 발견됐기 때문에 이 정보를 이용한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제의 개발도 기대되고 있다.
2003-09-05 1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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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스테로이드 〈下〉
서양의학에서 만병통치약으로 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약제가 바로 스테로이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호도 잠시뿐 세상에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둥글둥글해지고 털이 많이 나는가하면 위궤양이 생겨 속이 쓰린 부작용도 나타나게 됐다.
면역기능 저하로 외부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쉽게 침범해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의사들을 실망케 한 것은 스테로이드의 마법과 같은 탁월한 효과가 단지 증상개선이라는 가시적 효과였을 뿐 실제 질병자체를 치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
따라서 오늘날 스테로이드는 원인치료제에서 증상완화제의 대열로 평가절하됐으며,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때문에 가장 신중히 처방되어야 할 약제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실정이다.
결론은 의사의 적절한 판단유무에 따라 명약과 독물여부가 가름되는 대표적 약제가 바로 스테로이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부도덕한 의료인 가운데 스테로이드 남용을 통해 명의가 되는 사례가 있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므로 환자들도 성급한 치료효과만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03-08-29 1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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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스테로이드 〈上〉
항생제 바톤 이어 인류건강 이바지 약물
가장 강력한 항염작용 유럽서 `만병통치약' 통해
지금까지 일류건강에 가장 기여한 약물로는 단연 항생제를 꼽을 수 있다.
살균작용으로 유사 이래 계속되어 온 역질의 시대를 마감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일류건강에 이바지한 약물은 무엇일까?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콩팥 옆 부신에서 분비되는 스테로이드를 꼽는데 주저할 의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스테로이드의 자랑거리는 지금껏 일류가 개발한 약제 중 가장 강력한 항염작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 스테로이드가 최초로 임상에 적용되기 시작한 20세기 초 미국 의학계는 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고질적인 무릎관절염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환자가 뛰어다니고 기관지확장제 등 어떠한 기존 치료법에도 반응하지 않아 가쁜 숨을 쌕쌕이던 천식환자의 숨막힘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피부과에서 최고 난치병으로 알려진 건선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였으며, 불치병 영역에 속해 그동안 속수무책이었던 어린이의 신증후군, 여자에게 많은 홍반성 낭창 치료에서도 조절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시키게 된 것이다.
서양의학에서 만병통치약으로 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약제가 바로 스테로이드라는 것이다.
2003-08-27 1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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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마취제의 발견 〈下〉
이산화질소 신비의 기체 `소기'라 불려
기분 좋아지고 몽롱해져 행복감 도취돼
마침 그 무렵 영국의 과학자 조지 프리스틀리가 염화수소와 암모니아 가스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그는 특히 산소의 발견으로 이 기체가 냄새가 없고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짐을 알아냈다.
새로운 기체의 발견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자 1798년 영국 보스턴에 이에 대한 연구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연구소에서는 여러 가지 기체가 환자에게 미치는 반응조사를 하였다.
연구소의 초대 소장에는 젊은 험프리 데이비가 임명되었다.
이 연구소에서 험프리 데이비는 여러 가지 기체의 의학적인 성질을 조사 연구했다.
그는 직접 여러 종류의 기체를 들여 마시면서 실험을 했는데, 그때 데이비는 이산화질소라는 기체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데이비는 질소와 산소의 화합물인 이산화질소를 마셔 보게 되었다. `아! 이것은, 몹시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대체 이게 뭘까?'
데이비는 이 미지의 기체가 신비의 기체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기체를 마셨을 때 매우 흐뭇한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나중에는 눈이 빙빙 돌고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이었다. 데이비는 행복에 겨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데이비는 이 웃기는 기체를 `소기'라고 불렀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 소기를 마시도록 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기분이 좋아져서 웃고 떠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학계에 이 소기라고 하는 특수기체의 성질을 보고하였다.
그의 발견은 대단한 인정을 받았으며 결국 이산화질소 즉, 소기는 최초의 마취제로 쓰이기에 이르렀다.
2003-08-20 1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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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마취제의 발견 〈上〉
18세기 화학발전 시대 英 험프리 발견
마취제 대신 아편 등 마약류 사용하기도
오늘날의 각종 수술에는 마취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통증이 거의 없이 수술이 가능하다.
또한 환자의 부위에 따른 마취도 가능하여 집도의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할 수 있게 한다.
마취제는 18세기 말경 화학분야가 급속히 발전하던 무렵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소기'라고 하는 웃기는 기체 즉, 이산화질소가 발견되면서 이것이 마취제로 활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취제가 발명되기 이전의 수술이란 정말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절단수술을 하려면 환자를 수술대 위에 꽁꽁 묶고 여러 사람이 옆에서 붙들어 주어야만 했고, 수술의 아픔을 덜기 위해 대마초나 아편 같은 마약을 사용한 기록도 있다. 때로는 알코올이 들어있는 음료 즉, 술을 환자에게 잔뜩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수술 받는 환자의 고통을 일부만 덜어줄 뿐,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었다.
최초의 화학마취제 발명자인 험프리 데이비는 1778년 영국의 펜잔스라는 어촌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화학분야의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어 기체를 다루는 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되던 때였다. 따라서 새로운 기체가 속속 발견되고 있었으며, 또한 새로 발견된 기체가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연구와 실험도 계속되고 있었다.
2003-08-18 0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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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류머티즘 치료약으로 쓰였던 석유 〈下〉
비셀, `석유도 소금물처럼…' 단순 의뢰
석탄 대체할 뛰어난 조명 연료 밝혀져
의료약 아닌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돼
19세기 중반은 조명 기술이 세상의 주목을 끌고 있었으며, 석탄가스를 쓰면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정도의 밝기를 갖는 인공의 빛을 얻을 수 있음이 알려지고 있었다. 소수의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타는 액체, 예를 들면 석유(石油)를 사용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다.
약 가게를 지나가던 비셀도 기름을 쓰는 조명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충분한 기름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셀은 약병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석유도 식염과 마찬가지로 지하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소금물을 얻는 데 쓰는 방법으로 그것을 지면까지 퍼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석유가 조명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키어의 석유를 한병사서 벤자민 실리만이라는 화학교수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한 결과 매우 뛰어난 조명용 연료를 얻을 수 있음이 밝혀졌다.
간단한 처리에 의해서 그 기름으로부터 많은 귀중한 제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리만 교수의 보고는 그 때까지 화학자가 내린 예측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비셀은 펜실바니아주 타이터스빌의 유전을 매입하고 드레이크 대령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고용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드레이크 대령은 유전에 데릭을 세웠으나 석유를 퍼올린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소금물 우물을 하나 더 파고 있을 뿐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계속 파서, 1859년 8월 작업을 멈추었을 때는 20미터 깊이만큼 파들어간 상태였다. 석유를 찾아내기까지는 아직 몇 주일을 더 파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날도 일손을 놓고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신기하게도 그 구멍 안에는 진한 황갈색의 액체가 두꺼운 층이 되어 떠 있었다. 이것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였다. 석유가 그토록 얕은 곳에 있는 건 그 근처에서 그 곳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위의 몇 킬로에 걸친 지역 가운데 다른 어느 곳을 파보아도 석유를 함유한 지층에 도달하기까지는 20미터는 커녕, 300미터 정도까지 파내려 가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곧 하루에 약 400갤론의 석유를 산출하게 되었고 9개월 동안 이 산출량은 유지되었다.
드레이크 대령이 석유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급속히 퍼져 곧바로 석유광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사막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새로운 마을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많은 석유회사가 세워졌다. 토지매매의 투기도 유행하였고, 석유로 인해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고 빈털터리가 되기기도 했다.
결국 인간은 새로운 연료를 손에 넣게 되었고, 석유는 진정 미래 세대를 위하여 놀라운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3-08-13 1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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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명반(백반)·황산마그네슘의 발견 〈下〉
설사 유발하고 쓴맛 지닌 `하늘이 준 약'
현재까지 `엡섬염' 애칭 불리며 널리 애용
몇 년 후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또 하나 나타났다. 위커의 연못을 지나가던 몇 사람들이 몹시 목이 말라 쓴맛을 참고 물을 마셔 갈증을 면했다. 그런데 얼마 후 모두 설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 물에 설사를 일으키는 성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명반 외에 무엇이 섞여 있는지 확인한 결과 황산마그네슘이라 불리는 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전해져 내려오는 바로는, 1618년에 엡섬 마을의 서쪽 반 마일의 공유지에 있는 연못물이 종기나 그 밖에 몸이 불편한 시골 사람들에게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제임스 1세때 몇 사람의 의사가 이 물의 평판을 듣고 엡섬으로 찾아왔다. 의사들이 물을 분석해 본 결과 `설사제의 작용이 있는 쓴 맛의 소금'이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연못이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 의사들에 의해 연못의 소문이 멀리까지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엡섬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주는 연못에 울타리를 쌓아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해 휴게소를 만들었다. `하늘이 준 약'이라고 할 정도로 그 물을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와서 마셨다. 이 물과 더불어 엡섬은 유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무도회장도 생기고, 큰 건물들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물을 마신 다음에도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엡섬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 중에 이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물에서 황산마그네슘의 결정을 얻어 그들에게 보내는 조직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값이 너무나 비싸서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 이윽고 이 마을의 인기가 쇠진하였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황산마그네슘의 결정이 엡섬과 전혀 관계없는 원료로도 제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산마그네슘은 오랜 세월을 거쳐 약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지금까지도 `엡섬염', 즉 사리염이라는 설사약으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2003-08-01 1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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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명반(백반)·황산마그네슘의 발견 〈上〉
명반물, 가뭄이라도 가축에 주면 안먹어
염색·세탁시 사용 상처치료에 효험
1618년 가뭄이 심한 여름날, 영국의 써리주에서 밭을 갈고 있던 헨리 위커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구릉지대는 어디나 물이 부족하였고 헨리 위커가 사는 엡섬은 특히 심했다. 이 작은 마을은 마실 물조차 모자랄 정도로 가뭄이 심해 소들도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없었다.
위커는 밭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곳에 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는데도 그 구멍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 그는 근처에 물이 솟는 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함께 주위의 땅을 파보았다. 예상한대로 샘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물이었기에 모두들 기쁨에 넘쳤다.
사람들은 구멍을 크게 넓혀서 소들이 물을 쉽게 마실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위커가 연못이 있는 밭으로 소들을 끌고 갔으나 어느 한 마리도 그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몹시 목말라 하던 소들이 물을 먹지 않으니 그 물 속에 분명 무언가 이상한 것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위커는 물을 조금 떠서 과학자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물을 분석한 결과, 그 물에는 쓴 맛을 가진 명반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반은 염색이나 세탁할 때, 칼 같은 것에 베이거나 상처 치료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엔 아주 비싼 것이었다. 이로 인해 위커는 가축들이 충분히 물을 마시지는 못했지만, 명반을 얻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3-07-30 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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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향정신병 약의 역사 〈下〉
고대 그리스, 사혈이 정신병 치료 여겨져
1950년대 약물개발 감금 등 야만행위 사라져
△약이 개발되기 전에는 어떤 식으로 환자를 치료하였는가?
고대나 중세시대에는 정신분열병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의 개념조차 없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인체 내에는 4가지 중요한 체액(혈액, 점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이 있으며, 이 체액들이 4가지 `기본요소'인 공기, 물, 불, 흙과 상호작용하여 인간의 성격과 기질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4가지 체액이 서로 균형을 잃으면 여러가지 정신질환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우울증은 검은 담즙이 너무 많아서 생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몸 안에 과다하게 있는 체액을 가능한 한 많이 제거할수록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4가지 체액 중에 제거하기가 가장 쉬운 피를 흘리게 하는 사혈이라는 방법으로 정신질환을 치료하였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도 치료방법은 대부분 작업, 휴식, 기도 등의 활동치료가 대부분이었으며, 만약 행동조절이 안되는 환자인 경우에는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치료하였다. 예를 들면 쇠사슬로 묶어 놓거나, 아주 더운물에 담가서 기진맥진하게 만들거나, 일부러 말라리아 병에 걸리게 하여 고온으로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약이 개발된 후에는 약물치료로 흥분한 환자를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감금하는 이러한 장치들은 모든 정신병원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2003-07-25 1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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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향정신병 약의 역사
정신분열증 치료제 진정·수면제와 달라
1952년 처음 사용 정신과 역사상 `혁명'
△정신분열병 치료에 사용하는 약의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가?
정신분열병 치료에 사용하는 약의 정확한 이름은 `향정신병 약'이다. `향정신분열병 약'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정신분열병 외에도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모든 질환의 치료제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약이 환자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거나 잠을 자게 하거나 진정시키는 약이라고 생각하여 `진정제', `수면제'라고도 부르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향정신병 약은 환청이나 망상과 같은 정신병적 증상을 없애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거나 잠을 재우는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작용은 약의 부수적인 효과이거나 부작용일 뿐이다.
참고로 말하면 정신과에서 사용되는 약의 이름은 사용목적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 예를 들면 우울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 이름은 `항우울제', 기분이 뜨는 조증에 사용되는 약은 `항조증제' 불안증에 사용되는 약은 `항불안제'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페니실린과 같은 다른 중요한 약들과 마찬가지로 향정신병 약 역시 `Henri Laborit' 이라는 프랑스 외과의사에 의해서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다. 1952년에 그가 발견한 최초의 향정신병 약은 `클로로프로마진'이라는 약으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약이 발견된 후로 오랫동안 정신분열병을 앓아 오던 많은 환자들이 현저히 호전되었거나 거의 완치되었다. 실제로 이 약을 사용한 후 20년 동안에 미국 내 모든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의 수가 거의 반이나 줄어들었고, 환자의 난폭하거나 기괴한 행동을 조절하기 위하여 병동 내에서 사용되었던 비인도적인 치료방법 역시 정신병동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향정신병 약의 발견은 정신과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2003-07-23 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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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로렌조 오일 〈下〉
증상초기 투여시 ALD진행 억제 증명
지방산 억제 신경세포 파괴는 불가능
이들 부부앞에 나타난 수데비 박사는 9개월 간의 연구 끝에 올리브유를 추출해 내는데 성공한다. 오도네 부부는 이를 음식에 섞어 아들에게 먹인다. 드디어 포화지방산 수치가 기적적으로 줄기 시작했다. 결국 아들의 포화지방산 수치가 0으로까지 떨어졌다.
의사들은 처음에는 이 물질의 효능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이후 여러 임상연구를 통해 로렌조 오일이 초기에 투여될 경우 ALD의 진행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하게 된다.
이 질환은 뇌의 백질이 차츰 파괴되어 가는 희귀병으로 일종의 유전병이다. 어머니를 통해서만 유전되는 이 질환은 성염색체인 X염색체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하는데 몸 안의 `긴 사슬 지방산'이 분해되지 않고 뇌에 들어가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희귀질환이다.
10살 이하 남자 아이에게서 주로 발생한다. 감정의 기복과 위축, 과잉행동과 같은 정신 심리 증상에서 시작되므로 파악이 어렵다. 특히 5~19살 사이에 발병하는 `소아형'은 첫 증상이 나타난지 6개월 되지 않아 시력과 청력을 잃고 2년 내 식물인간이 된 후 결국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부신백질이영양증(ALD)은 1932년 처음 발견된 이 후 유전질환이라는 사실만 밝혀졌을 뿐 아직까지 완벽한 치료제가 없는 실정이다. 영화 로렌조 오일의 미카엘라 오도네가 찾아낸 기적의 치료물질 로렌조 오일도 긴 사슬 지방산의 생성을 억제해 줄 뿐 신경세포의 파괴는 막지 못한다. 완치를 위한 골수이식이 1981년 첫 시도된 이후 작년까지 세계 55개국에서 120명에게 시술돼 약 55%가 성공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골수 기증자를 찾기 어렵고 시술 후 사망에 이르는 확률이 10~20%에 달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로렌조 오일은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3년 간의 실험기간을 두고 이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2003-07-18 1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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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로렌조 오일-부신백질이영양증 〈上〉
체내 포화지방산 관련 치유 불가능한 난치병
올리브유 억제효과 발견 당시 추출 기술 없어
재작년 6월 신문지상에는 영화 `로렌조 오일'의 실존 인물로서, 아들을 불치병에서 살려내겠다는 집념으로 로렌조 오일이란 물질을 찾아낸 어머니 미카엘라 오도네가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들의 사연은 지난 92년 수잔 서랜드와 닉 놀테가 주연한 `로렌조 오일'이란 영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실화는 로렌조라는 다섯 살 난 소년이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며 의사로부터 부신백질이영양증(ALD) 판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질환은 현대의학으로는 아무런 치료법이 없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병이다.
로렌조의 부모는 연구중인 식이요법을 써보지만 별로 효과가 없는 데다 의사들조차 이 희귀한 병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아들이 앓는 병의 전문가가 되기로 작정한다. 세계은행 간부인 이탈리아계 아버지 오거스트 오도네와 어머니 미카엘라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매일 도서관과 연구소로 출근해 세계 각 나라의 의학서적과 논문, 잡지와 씨름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망치고 있다고 충고하며 아들을 포기하라고 한다. 의사들조차 그들의 도전은 무모한 것이라며 말린다. 방대하면서 고독한 연구 속에 그들은 마치 하나의 생화학적 퍼즐을 풀듯이 체내 포화지방산에 관해 연구해 치료의 실마리를 얻어낸다. 그러나 그것의 효과를 시험하는 일련의 작업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아이의 병은 치명적인 단계로 악화된다.
그들은 로렌조의 병이 포화지방산의 수치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고 올리브유(평지씨 기름)가 이에 대해 억제효과가 있음을 알아낸다.
그러나, 올리브유를 그대로 사용하게 될 경우 독성으로 목숨을 잃게 되므로 별도의 처리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전문가의 견해는 순수한 올리브액을 추출하는 방법이 없을 뿐더러 추출액이 워낙 적고 또한 치료효과를 낼 정도의 양을 얻어내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는 것이었다.
오도네 부부는 순수한 올리브액 추출을 연구할 전문가를 구하지만 어느 의사도 확신이 서지 않은 이 일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2003-07-11 1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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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도마크(Domagk)의 설파제 발견
산욕열에 시달리는 산모에 프론토실 치료
설파닐아마이드 생체효과로 개발에 효시
1895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제라드 도마크(Gerhard Domagk)는 세균의 일종인 연쇄상구균(Streptococci)의 병원성을 약화시키려는 연구 중 에리히(Erlich)가 사용했던 방법을 동원하여 아조색소(azo-dye) 등을 선택하여 약효를 검색하던 중 1935년에 프론토실(prontosil)이라는 염료가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쥐를 잘 치료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다니던 회사(바이엘사)에 프론토실을 의약품으로 개발할 것을 요구했으나 항균제 개발에 많은 실패를 한 회사는 그의 결과를 들어주지 않아 도마크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이와 같은 프론토실의 운명은 도마크의 노력에 의해 극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1935년 12월 4일 그의 어린 딸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던 중 어머니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달라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손을 찔리고 만다. 그 결과 그 당시에는 흔한 질환이었던 Streptococci septicaemia 에 감염되어 병원에서 잘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죽게 되었다.
이때 도마크는 정부에 프론토실을 자기 딸에게 투여할 수 있도록 간청하여 허락을 받게 된다. 프론토실을 투여한 결과 그의 딸이 매우 빨리 회복되어 의사들은 놀랐으나, 이 결과는 독일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이 사실을 들은 콜부룩(Colebrook)과 케니(Kenny)가 런던에서 1936년 산욕열로 죽어가는 산모들을 프론토실로 치료함으로써 대량으로 임상에 사용되게 되었다. 이 프론토실의 항균효과의 원인은 1935년 말 파리의 파스퇴르연구소의 트레플(Trefouel)에 의해 다시 확인된다.
프론토실은 시험관 내에서 균에 대해 전혀 활성을 보이지 않았으나 에리히(Erlich)의 연구에서 힌트를 얻어 환원제를 함께 투여한 결과 시험관 내에서도 효과를 나타냄을 확인하였다. 이는 프론토실이 환원되어 다른 물질로 변화되기 때문으로 생각했으며 설파닐아마이드(sulfanilamide)가 그 물질로 확인되었다. 이 설파닐아마이드는 시험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생체 내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현하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설파제 개발의 효시가 된다.
자료협조 : 위드팜
2003-07-09 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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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비타민의 발견 〈下〉
지용성 비타민 과잉섭취 체지방 축적 주의
식품마다 함유·파괴량 달라… 결핍 쉬워
비타민의 하루 소요량을 보면 성인의 경우 비타민C는 50㎎, 비타민D는 10㎎이니 참으로 미량이다. 그 소요량이란 평균적인 최저 필요량을 말한다. 예컨대 비타민C의 소요량 50㎎이란 레몬이나 감 한 개면 족하다. 그만큼 먹고 있으면 괴혈병 등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타민은 물에 녹기 쉬운 수용성과 기름에 녹기 쉬운 지용성으로 구분된다. 수용성은 B1 B2 B6 판토텐산 엽산 B12 C 등인 바, 과량 섭취하면 소변에 섞여 배설된다. 그런데 지용성인 A D E K를 장기간 과잉 섭취하면 체지방 속에 축적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비타민은 미묘하여 식품에서 섭취할 경우에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파세리 다음으로 비타민C가 많은 브로클리는 데치면 비타민이 거의 없어져 버린다. 또 귤이나 사과를 믹서로 갈면 C가 상당히 없어져 버린다.
야채는 계절이나 재배방법에 따라 비타민 C의 함유량이 서로 달라진다. 이것은 모두 비타민에게 공통된 사실이다. 어떻든 모든 비타민을 식사에서 취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균형잡힌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드물다. 그래서 비타민은 부족되기 쉬운 것이다.
2003-07-04 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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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비타민의 발견 〈上〉
Vita(생명)+amin=생명유지 필수 물질
연구 역사 짧으나 중요 무기질 자리매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물의 성장과 생명유지에 필요한 성분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 물 등 다섯 가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알려졌던 모든 영양물질을 고루 포함시켜 순수하게 조제된 동물사료로 사육된 동물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거나 생존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실험실에서 동물의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이 신비한 물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를 실험적으로 처음 증명한 사람이 영국의 홉킨스였는데, 그는 훗날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1912년 폴란드의 화학자 풍크는 쌀겨로부터 항각기(抗脚氣)(각기병:몹시 피로를 느끼고 기운이 없어지고 다리가 붓고 힘이 없어 걷지도 못하게 된다. 병이 심해지면 숨이 차고 손발이 마비되며 결국에는 심장이 약해져 사망하게 된다.)의 효과가 있는 성분을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물질 내에는 아민(amine:질소를 함유하는 유기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도 밝혔다. 그는 이 유기물을 `vitamine'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라틴어의 생명을 의미하는 `Vita'와 `amine'의 합성어로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물질이란 뜻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후, 다른 화학자들에 의하여 △모든 비타민들이 아민을 함유하고 있지 않음이 밝혀지면서 `vitamine'의 마지막 `e'자를 제거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외에 1937년 지오지(Gyorgyi)는 후추에서 비타민 C를 처음으로 분리하였고, 이 후 합성이 가능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비타민의 발견과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았으며, 아직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비타민은 칼로리원(源)이 아니다. 자동차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 맨 먼저 지적한 3대 영양소를 가솔린에 비유한다면, 비타민은 윤활유인 엔진오일 격이다. 즉, 비타민이 결핍되면 체내의 생리작용이 원활하게 조절되지 못한다.
2003-06-27 1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