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고] <41> 커닝은 비열한 범죄 행위
금년도 1학기에 서울약대 학생들의 커닝 사건이 매스컴을 탄 적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커닝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커닝은 사실 예전에는 대개의 학생들이 흔히 하는 행위이었다.
나도 약용식물학과 생약학 시험시 커닝 페이퍼를 만들어 커닝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지만 두 과목은 식물 이름, 사용부위, 산지, 등 너무 암기할 내용이 많았다. 나처럼 정성껏 커닝 페이퍼를 만드는 사람은 양심적인 학생에 속했다. 더 성의가 없는 학생들도 많았다. 후일 모 제약회사의 유능한 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P군은 시험 시간에 양말을 벗고 맨발로 책상 밑에서 교과서를 뒤적이며 커닝을 했다.
재미난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현재 교수가 된 C군은 마침 군대에 간 K군을 위해 독일어 답안지 한 장을 더 작성하였다. C군 뒤에 앉아 있던 G군은 그 답안지가 보고 싶어 C군을 졸라 답안지를 넘겨 받아 베끼다가 감독교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G군은 마침 군대에 간 친구의 답안지를 자기가 써 주고 있었노라고 둘러댐으로써 C군을 범죄 라인에서 제외시켜 주었다. 감독교수는 놀랍게도 G군의 우정을 가상하다고 판단해 K군의 답안지는 제출을 허용하고, 대신 G군은 부정행위자로 적발하였다.(말이 되는가?) 그 결과 군대에 간 K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어에 A학점을 받았고, G군은 나중에 군대 갔다가 복학한 후에도 독일어 학점을 따느라고 큰 고생을 하였다.
C군은 나중에 감독교수의 연구실에 조교수로 채용되었는데, 당시에 독일어 시험시간에 답안지를 한 장 더 쓴 부정행위의 시발점이 C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C군을 조교수로 채용하였을까? 작은 일 하나에 운명이 갈린다는 이야기가 실감되는 사건이다.
더 재미있는 사건은 현재 모 제약회사의 사장인 L군의 역시 독일어 시험 커닝 사건이다. 같은 클래스의 P 양은 시험공부를 철저히 하였기에 자신 있게 답안지를 1착으로 제출하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P양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벤치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L군을 목격한 것이다.
먼저 나온 학생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P양은 아직까지도 그 연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실은 L군은 처음부터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대신 독문과에 다니는 친구가 시험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L군 왈, 나보다 더 독일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꼭 답안을 쓸 필요가 있을까?(나 참) 이처럼 당시 (1967∼1971년)에는 커닝은 좋게 말해 대학생의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옛날에는 관행이고, 문화이고 심지어 미담이었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범죄로 인식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옛날에는 참외 서리, 수박 서리 등은 무슨 낭만적인 행위로까지 미화되곤 했다. 길 거리에 침을 뱉고 담뱃재나 꽁초를 차밖에 몰래 버리는 행위,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행위 등도 과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관행이었다. 위장 전입이나 탈세, 논문의 이중 게재 등도 옛날에는 관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행위들은 비열한 범죄 행위로 분류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대학생도 당연히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커닝 같은 비열한 범죄 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다짐해야 한다. 정의 사회를 구현해야 할 미래의 주인공인 대학생들은 정정당당하게 세상을 살기를 다짐해야 한다. 비록 위장전입 같은 범죄가 용납되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리고 더욱 바뀔 것이다.
2009-10-13 11:10 |
![]() |
[기고] <40> 병상단상 (病床斷想)
지난번에 39번째 글로 “암투병과 하나님 은혜”에 대해 쓴 바 있는데, 운명처럼 이번에는 그 뒷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금년 8월 8일 (토)에 배가 아파서 하루를 버텨도 낫지 않길래 9일 (일)에 보라매 병원 응급실을 찾아 갔다.
내가 94년 직장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자 응급실 의사들은 치료에 자신 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94년 나를 수술했던 박재갑 교수에게 부탁하여 밤 중에 서울대 본원으로 병원을 옮겼다. 진단 결과 창자가 유착된 것으로 밝혀져 응급으로 수술하게 되었다.
개복 수술을 담당한 박규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창자가 엉망으로 유착되어 있어서 하나하나 떼어 낼 수 밖에 없었으며, 심하게 손상된 소장의 15센티미터는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총 7-8시간에 걸친 대 수술이었다. 수술 후에는 심한 장 유착의 후유증으로 남들과 달리 꼬박 한달 간이나 방귀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변통이 되지 않아 큰 고생을 하였다.
이번이 3번째 개복 수술이었는데 이번이 그 중 고통이 심하였다. 다행히 직장암이 재발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에 암까지 재발한 경우였다면 그 고통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병실에 누워 괴로운 나날을 보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래서 입원해 있는 동안 매주 찾아 와 준 친구, 병간호를 하는 아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준 교회 동료, 심신이 피곤한 아내의 말동무를 위해 자주 와준 여동생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았다. 반면에 꼭 달려 와 줄 것 같던 사람들이 와 주지 않아 섭섭하기도 하였다. 92년 돌아가신 어머니는 10달 동안 입원해 계실 동안 누가 병문안을 오나 안 오나에 유독 관심을 보이셨었다.
그 때는 그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막상 내가 아파 보니 그 심정을 절절히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크리스챤인 나는 병문안을 오지 않은 사람들을 섭섭해 하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 하였다. 아무튼 아픈 사람에 있어서의 위로란 건강한 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아프다 보면 자연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수술 직후 내 팔뚝에는 진통제 주사가 하나 달리게 되었는데, 내가 버튼을 누르면 일정 범위 내에서 진통제의 투여 속도가 빨라져 통증을 덜 느끼도록 되어 있었다. 진통제를 투여해도 얼마나 온 몸의 통증이 심한지 만약에 생명을 켜고 끄는 버튼이 진통제 버튼처럼 내 팔뚝에 달려 있다면 그 버튼을 눌러 생명을 끄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그 순간에는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 통증이었다.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니 생각도 건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가는 듯 했다. 물론 크리스챤임을 상기함으로써 그러한 불경스러운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아무튼 세상의 모든 환자들이 지독한 통증없이 나름대로 자신의 병을 앓아 낼 수 있으면 정말 다행이겠다.
또 하나 병상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나의 지론대로 아내들은 훌륭하다는 사실이다. 입원한 남편 곁에서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를 간호하는 남편은 그 수도 적고 정성도 아내에 미치지 못한다. 나 역시 9월 10일까지 병원에서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으면서, 아내가 하늘이 내려 주신 천사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다시는 아프지 않도록 건강에 조심하여야겠다는 것이었다. 회복을 허락하신 하나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다시는 아프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009-09-29 10:28 |
![]() |
[기고] <39> 암투병과 하나님 은혜
나는 1994년 5월12일 직장암 3기(정확히는 C2 phase) 판정을 받고 같은 달 16일에 개복 수술을 받았다. 그 때의 나이가 47세, 그야말로 한창 때이었다. 수술한 의사는 내 나이는 암세포에게도 한창 때라며 내 예후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하였다. 부득이 인공 항문을 달고 몇 주간의 방사선 조사를 받은 후 1년 반 동안 항암제 (5-FU) 주사를 맞았다. 다시 개복 수술을 하여 인공항문을 제거하고, 정기 검사를 받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 금년으로 15년이 지났다. 이제야 비로소 나았나 보다 생각이 든다. 나는 내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모른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성경을 보면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울면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15년간의 생명을 연장 받았다. 그 동안 은근히 15년이라는 숫자에 신경이 쓰였었는데 올해로 15년을 넘긴 것을 계기로 이제부터는 그런 신경 안 쓰며 살고자 한다.
나는 수술 이후 지금까지 홍삼 엑스 또는 선삼이라는 인삼 제품을 열심히 복용하고 있다. 수술 후 5년까지는 지방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등의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잘해서 병이 나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처럼 조심하면 모든 사람들의 암이 다 낫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결론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그 동안 죽을까 봐 지나치게 두렵지 않았고, 또 암에 걸린 내 인생이 억울하지도 않았었는데, 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며 병을 고쳐 주셨다. 나는 그리스찬이다. 그럼 예수님은 나의 믿음을 보고 내 병을 고쳐 주셨는가? 과연 내 믿음은 그처럼 굳건하였는가 생각해 본다. 물론 나는 그 동안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치유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하나님의 치유가 내게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는 못했던 같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고쳐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38년간이나 못 걷던 환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다. 놀라운 것은 그가 예수님을 별로 믿지 않았는데도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용조 목사님은 누구를, 왜 고쳐주시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헤아릴 길 없는 하나님, 예수님의 선택의 문제라고 하신다.
암 환자들은 나를 보면 희망을 갖는다. 특히 3기에서 살았다고 하니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아내는 내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암환자들에게 열심히 조언한다. 예컨대 고기를 줄이고 야채를 많이 먹어라, 되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을 하라 등등. 그러나 나는 나처럼 하면 모든 암환자들이 낫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조언에 신중을 기한다. “암은 이렇게 이겨라” 따위의 말도 하지 않는다. 고귀한 생명이 걸린 문제에 대해 경솔하게 조언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로 암을 이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는 권한다. 하나님 은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좋은 의사, 좋은 약, 좋은 식생활 등을 만나거나 소개받는 것도 다 하나님 은혜의 영역에 속한다.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9-09-15 10:32 |
![]() |
[기고] <38> 담배는 바보나 피우는 거다
나는 1967년 대학생이 되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1976년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고 끊었다. 단번에 끊은 것은 아니고 한번 끊었다가 실패하곤 다시 도전해서 성공하였다. 담배를 끊은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갓난 아이 때문에 집 바깥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워야 하는 궁상스러움이 싫었고, 두 번째는 담배를 피우면 오후에 컨디션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장모님은 내가 담배를 끊는 걸 보시고 내가 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단다.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1971년 육군에 입대해 보니 매일 모든 군인에게 화랑담배가 지급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별로 담배를 피울 생각이 없던 사람마저 군대에 들어가서 담배를 배우게 된다. 나라에서 모든 남자를 흡연자로 만들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은 군대에서도 희망자에게만 담배를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 잘못이다. 오히려 군대에 가서 담배를 끊는 사람이 많다고 할 정도로 군대가 금연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면 좋겠다.
내가 담배를 끊고 보니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돈도 들고 냄새도 나고 더구나 몸에도 나쁜 담배, 한마디로 백해 무익한 담배를 내가 왜 피웠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머리가 매우 나쁜 바보이거나, 아니면 인간성이 아주 나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머리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분명히 몸에 나쁘고 심지어 확실한 발암성 물질이라고 하는 담배를 제 돈을 내서 사서 피울 리가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약들을 사서 먹는다. 둘째로 인간성이 괜찮아 자기 주변에 참된 친구를 한 명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친구의 간절하고 집요한 설득 때문에라도 담배를 계속 피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해로운 흡연을 말리지 않을 친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충격 좀 받으라고 일부러 좀 과격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보나 인간성 나쁜 사람으로 몰리기 싫으면 당장 금연하시라.
요즘에는 여자 특히 여대생들도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 같다. 나는 남자는 피워도 되고 여자는 피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여자는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몸이기 때문에 여자 몸이 남자 몸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을 더 싫어할 따름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남자도 그렇겠지만 특히 여자는 몸을 소중하게 관리하여야 한다. 그래서 특히 여자는 흡연으로 몸을 망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서울대 병원의 박재갑 교수 (전 국립 암센터 원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이제 우리나라 TV의 드라마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사라졌다. 정말 잘된 일이다. 지금부터는 바보거나 인간성이 나쁜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멋진 주인공은 결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잡게 되기를 바란다. 내친 김에 앞으로는 담배뿐만 아니라 술 마시는 장면, 특히 여자가 술 마시는 장면도 TV 드라마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쯤에서 나는 담배나 술 (과음)은 멋있는 사람은 결코 하지 않는, 좀 심하게 말하면 정상적인 사람은 할 리가 없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소리치고 싶다.
끝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한마디를 경고 (실은 부탁)!. 제발 차 타고 다니면서 담뱃재나 꽁초를 차 밖으로 버리지 말라. 차 바깥 세상이 모두 당신의 재털이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보고 설마 재털이 속에 사는 신세가 되라는 것인가? 내가 덩치만 컸다면 이런 사람을 결코 묵과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담배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독물임에 틀림없다. 담배 없는 나라, 건강한 우리 나라를 꿈꾼다.
2009-08-18 11:45 |
![]() |
[기고] <37> 파마포럼
2009년 6월1일 대한약학회 주최로 ‘한국 제약산업의 글로벌화 전략 및 육성 정책’에 관한 제4회 파마 포럼이 서울대 호암 교수회관에서 열렸다. 필자는 이 포럼의 좌장으로서 다음과 같은 총론 발제를 하게 되었다.
오늘 ‘한국제약산업의 글로벌화 전략 및 육성 정책’이라는 주제의 팜월드 포럼의 좌장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분에 넘치는 외람 된 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은 그 동안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왔고 그 과정에서 우리 국민의 건강을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 왔다. 이 점은 우리 모두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의약품은 분명 복지의 수단이다. 그러나 의약품을 복지의 수단으로서만 바라보면 제약의 산업으로서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즉 제약산업을 규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고 육성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잃게 된다. 그런데 서투른 규제는 산업을 고사시킬 수도 있다. 나는 제약 주권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자기 국민의 건강을 지켜 줄 제약 산업을 갖추지 못한 나라는 온전한 주권을 갖추었다 말하기 힘들다는 의미에서이다. 아시아에서 나름대로 제약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 뿐이라고 한다. 주권국가다운 면모를 위해서도 제약은 산업으로서 간주되고 육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제약산업은 OECD 국가인 우리 나라의 위상에 걸 맞는 규모와 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제약산업에 희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래 15개 남짓의 신약이 개발되는 등 분명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 때에 무언가 한번 모멘텀을 가하면 우리나라 제약산업도 세계적인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아른 거른다.
우리의 제약 산업은 분명 방법만 찾아내면 반도체 산업에 뒤지지 않는 멋진 도약을 이룰 것이란 희망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는 이미 죽은 산업을 전면적으로 살려 내기 위한 그런 자리와는 다르다. 오늘 이 포럼은 희망을 살리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짧은 포럼을 통하여 제약산업을 살리는 100점 짜리 답안이 마련되리라고는 보지 않다. 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발전 방안에 대하여 길을 제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 포럼은 새삼스런 의미를 갖는다.
인생은 얼마나 빨리 출세하느냐 보다 얼마나 바른 방향으로 출세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쁜 방향으로의 빠른 출세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제약산업의 발전도 어쩌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긴 안목으로 바라볼 때 최선인 발전 방향을 찾아내야 하겠다. 오늘 이 포럼을 통하여 바라는 것은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점점 더 다수의 사람들이 컨센서스를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컨센서스야 말로 민주주의의 힘이고 변화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에 바쁜 가운데도 불구하고 참석해 주신 많은 청중들과 3분의 연자들, 그리고 4분의 패널들의 발표와 토론을 통하여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어떤 공감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본 포럼의 최소한도의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라 믿고 싶다.
아무쪼록 이 자리를 통하여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글로벌화 전략 및 육성 정책에 대해 어떤 컨센서스에 도달하고 이로부터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모멘텀이 마련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9-08-04 09:13 |
![]() |
[기고] <36> 사자와 소의 결혼
내가 다니는 온누리 교회에는 장로사관학교, 아버지학교, 결혼예비학교 등 무슨 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강좌가 많다. 오늘은 결혼예비학교에서 우리 아들이 배웠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학교는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가 몇 주 동안 함께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는 과정이다. 사실 우리는 대개 나이가 차면 그냥 결혼하면 되는 줄 알지만 이렇게 대책없이 결혼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아들과 며느리를 통해 이 과정이 매우 유익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이 과정의 수강을 권하곤 한다. 이 과정의 커리큘럼은 다양하지만 전 강의를 통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남자와 여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남자가 운전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부인이 “여보 오른 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하면 남편은 일부러 왼쪽으로 방향을 트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도 가르친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도 감명을 받은 내용은, 결혼을 해서 부부가 살 때에 각자가 서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자와 소가 결혼을 했단다. 사자는 토끼를 사냥하면 가장 맛있는 살코기 부분을 소에게 갖다 바쳤다. 그러나 소는 사자의 성의에도 불구하고 토끼 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한편 소는 가장 부드러운 풀을 뜯어다가 사자에게 바쳤다고 한다. 소도 그 풀을 먹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사자와 소는 서로 상대방을 서운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가장 좋은 고기 또는 풀을 갖다 주었는데 성의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어쩌면 입에 대보지도 않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사자와 소는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있어서도 남편과 아내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 최선이라는 것이 사자에게 있어서 부드러운 풀, 소에게 있어서 연한 토끼 고기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기 쉽다.
서운한 감정이 반복되다 보면 부부간에 갈등은 심각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부는, 특히 신혼 부부는 내가 상대방에게 베푸는 최선이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최선인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혼을 앞 둔 예비 신랑 신부들은 물론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명심할만한 좋을 말씀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상대방에게 서운해하기”는 부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부딪히게 되어 있다. 어쩌면 이러한 사고 (思考)의 충돌 속에서 용케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신기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그런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야말로 인간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인생은 너의 것” 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까지 훌륭해질 수 있겠는가? 기독교에서는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 이라고 믿는다. 내 인생이 내 생각, 내 능력대로만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믿음의 작은 증거이다. 부부 사이에 하나님을 모셔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하면, 마치 사자와 소 같던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되면 결혼생활의 파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할렐루야.
2009-07-21 10:27 |
![]() |
[기고] <35> 솔직한 대화는 독(?)
나는 주례를 설 때 부부간에 대화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특히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물론 하객들도 주례가 무슨 그런 말을 하나 잠시 난감해 한다. 내 말의 취지는 부부간에 갈등이 있을 때 솔직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내게 분명히 결점이 있는 경우에라도 상대방이 이를 지적하면 고맙기는커녕 기분만 나빠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의 인격은 그 정도밖에 성숙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시작한 대화가 자칫 큰 싸움으로 발전하여 부부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대화, 특히 솔직한 대화를 삼가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예컨대 교회 현관에 오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걸 주제로 누가 왜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세미나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런 세미나는 어떤 사람을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하는 등 큰 분란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처방은 간단하다. 이런 때는 오물을 먼저 본 사람이 조용히 치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취할 태도인 것이다. 부부간의 갈등도 원인이 무엇일까 상대방과 밤새 세미나 (대화)를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어둠은 어둠과 정면 대결하여 싸운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둠과 맞닥뜨려 싸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둠을 없애려면 전등을 켜면 그만이다. 어둠은 빛이 오면 그냥 물러나게 마련이다. 부부간의 갈등을 어둠으로 본다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 문제와 정면 대결하는 “솔직한 대화”가 아니다. 전등을 켜듯, 무언가 다른 방법을 통하여 부부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부부간에 듣기 좋은 소리 골라 하기”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듣기 좋아 할만한 말만 해 줘 보라. 칭찬을 해도 좋고 “여보 사랑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또는 심지어 거짓으로라도 이렇게 말해 보라. 그러면 놀랍게도 전등이 켜져 어둠이 혼비백산 도망가듯 갈등은 어느덧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좋은 소리 골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기 바란다. 솔직한 대화 너무 좋아하지 말고. 솔직한 대화는 상대방 상처에 뿌리는 소금처럼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솔직함은 부부간이 아닌 다른 인간 관계에서도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나는 직장의 상사가 “오늘은 너와 내가 지위의 상하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할 때가 부하 직원이 가장 긴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상사와의 대화 시에도 솔직한 대화는 화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장님, 저번에 저한테 그렇게 말씀 하셨을 때 솔직히 많이 서운했습니다”라는 식의 감정 표현은 부장의 마음을 더욱 엇나가게 만든다.
앞서 말한 대로 솔직한 지적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고매한 인격자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이다. 대신 상사의 장점을 억지로라도, 거짓으로라도 칭찬해 보라. 칭찬에 감동한 상사가 정말로 좋은 사람으로 변화될지도 모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도 있지 않은가? 이러고 보면 대화란 솔직히 하느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바른 소리보다는 따듯한 사랑의 말이 인간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부부가 해로(偕老)하고, 정년까지 직장에 잘 다니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좋은 말만 골라 하기”를 실천하기를 제안한다.
2009-07-07 10:08 |
![]() |
[기고] <34>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지난 5월 24일 봉하 마을에 다녀 왔다. 23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노무현 정권에서 식약청장을 지낸 나로서 조문을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리라. 그러나 그런 도리 때문에만 조문을 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래서 기꺼이 (?) 간 것이다. 사실은 생전에 찾아가 뵙고 싶었는데 차일피일하다가 결국 돌아 간 후에 조문하게 되었다.
나는 식약청장이 되기 전까지는 노무현 대통령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현실에서 이상을 추구하느라 고생한 분이 그분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권력기관을 이용한 통치를 싫어했고, 품위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격식없는 솔직한 대화를 즐겼다.
심지어 최초로 국민의 지지가 낮아 도중에 사임하는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것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었던 것 같다. 재신임 파문은 그래서 일어난 것이리라. 그의 이러한 이상들은 현실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 정치라지만 이상이 없는, 즉 꿈이 없는 정치는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 한 말이다.
보수 언론들은 처음부터 그를 싫어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고자 열심이었다. 결국 그들은 노무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을 욕하였다.
심지어 폭탄이라는 비난을 들어 가면서까지 세금을 올려 향상시킨 그 복지의 수혜자인 서민층마저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온 국민이 욕을 하더라도 적어도 서민층만은 그를 지지했어야 마땅하다.
이는 언론이 형성한 여론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를 비난하고 욕하였었다.
그랬던 많은 국민들이 이제 봉하마을로, 또 전국 각지의 빈소로 그의 서거를 조문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조문객이 의외로 많은데 정치권도 국민들도 스스로 놀라는 모습이다. 여권에서는 조문이 반정부 움직임으로 이어질까 민심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씁쓸한 것은 정치적 이해때문에 노 전대통령과 거리를 두어 왔던 일부 정치인들이 이제는 다시 친노무현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노 전대통령을 추모하는 국민들이 이처럼 많지 않았다면 이들은 계속해서 노 전대통령의 서거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사람 인심이 다 그런거지 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줄만 알았던 노 전대통령을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추모하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우선은 인간적으로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특히 좋아하는 골수 팬들은 물론이고 평소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싫어했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자살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떤 교수가 분석한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그가 추구하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음에 대한 비난이었지 그가 추구한 가치 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경제적 유토피아에 대한 국민들의 동경심은 그의 서거를 맞이하여 더욱 절실해 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문 행렬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우리는 소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를 뿐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는 것이 공존 공영의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삼가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비는 바른 자세가 아닐까 한다. 오호 통재라.
2009-05-27 11:43 |
![]() |
[기고] <33> 복받는 인생
나는 인생이란 조각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조각배 안에서 우리는 성실하게 노를 저어야 한다. 또 경솔한 행동을 하여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조심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배의 항해가 반드시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바다에 태풍이 불면 아무리 성실히 노를 저어도 배가 풍랑에 침몰할 수도 있다. 항해 중에 심한 태풍을 만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인생도 성실하게만 산다고 해서 반드시 끝내 성공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살아가는 동안에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를 만나지 않아야 한다.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가 복 받은 삶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앞 둔 신랑 신부에게 그런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그렇다. 내가 성실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가 이다. 성경 시편 1장1절에는 복을 받는 사람의 조건이 써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성경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사는 방법을 일러 주신 책이므로, 마치 전자 제품 제조업자가 만든 사용 매뉴얼과 같다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은 매뉴얼대로 전자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그 인생은 고장이 나기 쉬울 것이다. 요컨대 시편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향유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한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은 “범사에 미리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리”인데 어떤 일이 잘 되고 나서 감사하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 것 같은데, 일이 되기도 전에 감사부터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늘 불평 불만을 늘어 놓는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또 늘 부정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비전이 없다. 그 사람은 이미 복을 못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범사에 늘 미리 감사하는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고 친절하며 온유하게 대할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게 된다. 또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므로 주어진 일에 대해 비전을 갖게 된다. 그 일은 잘 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범사에 미리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만복을 이미 향유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어서 언제 왜 어떤 복을 주시는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믿으며 성실하게 사는 것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길 일인가 보다. 나도 나름대로 어려운 순간도 많이 지나 왔지만, 지금 이순간 되돌아 보면 나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건강문제도 그렇지만 직장이며 가정이며 그 밖의 모든 소소한 일까지 정말 모두 하나님 은혜로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에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었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지난 일을 되돌아 보면 나는 분명히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몽땅 감사할 일 뿐이다. 이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면서 앞으로 다가 올 인생도 미리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대해 보고자 한다.
2009-05-26 10:33 |
![]() |
[기고] <32> 1등의 운명
절친한 두 친구가 밀림 속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때 저만큼 앞에서 먹이를 발견한 굷주린 호랑이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 왔다. 그러자 한 친구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한 친구가 “아니 어짜피 호랑이의 걸음을 이기지 못 할텐데 운동화 끈은 왜 조여 매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껄걸 웃으며 “자네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나는 살 수 있네”라고 말하고 쏜살같이 혼자 도망쳐 버렸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그만 둔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쓴 책, “왕도는 없고 정도만 있다”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은 몇 년 전 교회의 ‘크리스챤 CEO 과정’에서 같이 공부하던 중에 저자로부터 받았다. 이 이야기는 냉랭해져 가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고 한다. “바람처럼 달려오던 호랑이는 뒤에 처진 사람보다는 앞에 뛰어가는 건강한 사람이 더 맛있을 것 같아 열심히 앞 사람을 쫓아갔다”.
멋진 반전이다. 의리 없는 친구가 죽게 되었다니 고소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교육에 극성인 우리나라 젊은 엄마들이 떠오른다. 엄마마다 모두들 자기 애를 일등 짜리 애를 만들 욕심으로 과외다 뭐다 해서 안 시키는 것이 없다. 일등 만드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인지 여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공부도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했어도 농구 선수는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천부적으로 두뇌가 나쁘거나 적성이 다른 곳에 있는 아이는 아무리 닥달해도 공부를 잘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것은 날보고 “너도 훌륭한 농구 선수가 될 수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라” 라고 하는 것처럼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말이 될 것이다.
과외 같은 사교육의 문제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공부로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위협받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초·중·고 학생들을 지나치게 밤 늦게까지 공부시키는 것은 일종의 아동 학대 행위가 아닐까? 따라서 마음 같아서는 밤 늦게까지 과외 시키는 부모를 모두 아동 학대 죄로 처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한창 건강하게 자라나야 할 시절에 이런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의 학대에 의한 후유증을 앓아야 할지도 모른다. 통계까지는 모르지만 점점 눈이 나빠지고 등뼈가 휘는 등 건강에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조금 확대 해석하자면 지나친 과외는 모든 국민을 쇠약한 체질로 만드는 원흉이다. 몸이 쇠약해지면 병에도 잘 걸릴 것이니 과외는 또한 국민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애가 실력이 달려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인 경우, 이를 가만히 두고 보는 걸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또 조금만 더 알려 주면 실력이 늘어 나 공부에 자신감을 갖게 될 것 같은 경우에도 과외를 시키지 말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내 부탁은 과외를 시키더라도 제발 웬만큼 시키라는 것이다.
애를 일등 만드는 것이 애써 노력해서 애를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 후 7개월 된 예쁜 우리 손녀의 미래를 내다보며 공연한 걱정에 한 말씀하였다.
2009-05-06 09:08 |
![]() |
[기고] <31> 정년퇴임과 시간 보내기
환갑이 지나고부터 부썩 정년 퇴임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배 교수의 정년 퇴임식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정년퇴임식을 하는 교수마다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책자를 만들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인생의 추억이겠지만 과거의 화려함이 오늘날 자신이나 참석자들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생이 다 그런 거지 하면서도 쓸쓸한 바람이 이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교수는 흔히 정년 퇴임식을 하는데 회사나 다른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왜 퇴임식을 별로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보았다. 아마 퇴임식을 마련해 줄 제자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다른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퇴임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보고 정년 퇴임 이후에 대비한 준비를 하라고 권고한다. 어영부영 하다가는 얼떨결에 정년 퇴임을 해 당황하게 된단다. 한 고동학교 동창 친구는 플룻과 섹스폰을 배운다면서 나보고도 아무 악기라도 하나 배우란다. 다른 대학에 근무하는 선배 교수는 부는 악기는 혈압에 나쁘니 기타나 아코디온을 배우란다. 자기는 이미 연주에 심취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여행을 다녀 보라는 권고도 있다. 다만 모텔이나 여관이 더러우니 시트와 베게는 갖고 다니라는 조언도 첨가한다. 아닌게 아니라 퇴직 후가 걱정이다. 지금은 미래가 아닌 하루 하루의 일을 생각하기에도 체력이 부치지만 정년을 맞이한 후에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나는 교양 있게 늙어 가기 위해서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영화 감상 등은 모두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대상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기술 또는 취미가 바로 교양이다. 나는 혼자 하는 취미 생활 중에서 마음에 딱히 와 닿는 것이 없다. 악기는 음악 지식이 없어서 자신이 없고, 영화 감상은 좀 나은데 매일 구경가기도 좀 그렇다. 내가 잘하는 게 무언가 생각하다가 옛날에 배운 당구를 다시 쳐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구도 혼자서는 못 치고 적어도 한 명의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아, 참, 글을 쓰는 것도 혼자 하는 것이니 교양 있는 취미 생활이 되겠구나 싶다. 사실 그래서 “약창춘추”를 취미 삼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글 쓰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직 30회 밖에 못 썼는데 벌써 쓸 내용이 고갈된 느낌이다. 어짜피 잡문을 쓰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쓰지 않고는 못 견딜 절심함이 없는 상태에서 쓰는 글은 정말로 잡문에 불과해 진다.
얼마 전 아내가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하는 말이 이제 정년 퇴임하면 아내를 졸졸 따라 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니 지금부터 자기를 따라 다니는 연습을 하란다. 귀찮아 하고 의미없어 하지 말고 쇼핑이나 아이쇼핑을 즐기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여지껏은 무어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쇼핑 등을 시간 낭비로 생각해 왔는데 이제 생각을 바꾸어 아내를 따라 다니되 억지로가 아닌 기쁜 마음으로 따라 다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정년퇴임 후의 시간 보내기를 걱정하기에 앞서 정년 후에도 건강이 따라 줄 수 있을 지가 사실 더 걱정이 된다. 솔직히 이제는 여기 저기 쑤신 데도 많고 이것 저것 먹는 약도 많다. 그런데 정년 후 시간이 남아 무료해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이 아닌가 싶다. 게을러서인지 자꾸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2009-03-31 09:33 |
![]() |
[기고] <30> 새해의 소망-갈릴리 호수
새해가 맞이하여 소망을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에 가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갈릴리 호수가 정말로 아름답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는 해저 212m에 있는 호수인데, 이 호수 물이 넘쳐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고, 요단강이 흐르다 멈추는 곳이 해저 400m의 사해라 한다. 사해의 주변은 갈릴리 호수와 정반대로 황량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성경의 맥을 잡아라’라는 강의와 책으로 유명한 문봉주 장로는 갈릴리 호수와 그 주변이 아름다운 이유와 반대로 사해 주변이 황량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갈릴리 호수의 물의 기원은 허몬산의 눈 녹은 물과 호수 밑에서 솟는 샘이라고 한다. 늘 새로운 물이 호수에 충분히 공급되고 있다. 이 물은 호스를 채울 뿐만 아니라 호수를 넘쳐 쉼 없이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갈릴리 호수는 물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흘려 보내고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해는 요단강으로부터 물을 받기는 하되, 그 물은 사해에서 증발하여 사해를 넘쳐 흐르는 물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요단강 물의 종점이 사해이다. 갈리리 호수의 주변이 아름다운 것은 두 가지 경로로 맑은 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받은 물을 요단강으로 넘쳐 흘려 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사해 주변이 황량한 것은 요단강 물을 받기만 할 뿐 흘러 넘치는 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갈리리 호수가 눈 녹은 물과 샘물을 받듯 한가지 경로 이상의 경로로부터 많은 복을 받고, 또 그 받은 복이 넘쳐 주변에 흐르게 하는 인생이 스스로는 물론 그 주변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인생을 축복 받은 인생임과 동시에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해와 같은 인생은 나름대로 받은 복을 저만 혼자 감싸 안고 주변에 흘려 보내지 않아, 스스로는 물론 주변을 황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주변에 가면 무언가 얻어 먹을 것이 있는 느낌을 주는 그런 인생이 되라는 말씀을 하신다. 공연히 근처에 가고 싶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잘나기는 했으나 찬바람이 쌩 하고 나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내 생각을 덧붙이자면 냉철한 이성보다는 따듯함이 묻어 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필자의 새해 소망은 우선 갈릴리 호수와 같이 많은 복을 받는 것이다. 동시에 필자를 만나는 사람마다 덩달아 복을 받는, 다시 말해서 필자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그래서 주변이 온통 다 복을 받는 그런 한 해,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나만 복을 받고, 주변이 온통 황량해지는 그런 사해와 같은 새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비결은 성경 말씀대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기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웃을 사랑하기란 애써 예수님을 닮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많은 복을 받고, 예수님을 애써 닮아 많은 복을 나누어 줌으로써, 갈릴리 호수처럼 스스로와 주위가 아름다워지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2009-03-10 11:03 |
![]() |
[기고] <29> 약학 소고 (藥學 小考) - 2
약학은 종합과학이다. 신약개발은 혼자 할 수 없다. 화학, 생물, 물리뿐만 아니라 면역학, 미생물학, 독성학, 약리학, 약제학, 분석화학, 유전학 등 수많은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들의 힘을 합쳐야 한다. 이렇게 해도 수만 개의 후보물질에 대해 수십억 원의 돈을 들여 10여 년 간 연구해야 하나의 신약이 탄생할까 말까 할 정도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신약개발이다. 이처럼 신약개발이 어렵기 때문에 신약개발을 주도하는 사람이나 회사는 다양한 전공의 우수한 연구자들을 채용하고 훈련시켜 효율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교향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악기 전공자들이 모여서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약학대학에서는 신약개발 전반을 공부한다. 오직 약학대학만이 신약개발의 전 과정을 교육시킨다. 약학은 피아노 전공이나 바이올린이 아니라 지휘자학 전공과 같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악기 전반을 이해하여 전체적으로 하모니를 이루게 하는 지휘자학 말이다. 신약개발은 너무나 확률이 낮고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는 리스키한 과제이기 때문에 지휘자의 판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성공도 못할 과제를 오랜 세월 계속하면 막대한 돈이 낭비된다. 도박에서의 타짜는 카드를 손에 쥐는 순간 카드들 버릴까 배팅할까, 그리고 얼마나 배팅할까를 칼같이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신약개발에서의 타짜 (명 지도자)도 연구하고 있는 물질에 대해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투자해야 할 것인가를 가능한 한 연구 개시 초기에 칼같이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오케스트라에 명지휘자가 중요하고 축구팀에 명감독이 필요하듯 신약개발팀에 명 지도자가 대단히 중요한 이유이다. 약학대학은 명지도자의 배출을 목표로 교육을 한다. 신약개발의 인프라가 선진국에 비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을 갖는 좋은 방법은 명지휘자, 명감독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축구가 월드컵 4강에 들었을 때, 히딩크 감독의 공로가 컸던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약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물질이다. 지구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더 비싼 것이 약이다. 그래서 약학은 인류의 생명을 살리고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 오는 학문이다. 웬만한 신약개발 하나면 자동차 수백만 대를 수출하는 이상의 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일반 공산품의 이익률이 수%에 불과한 반면 신약의 이익률은 30%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신약개발을 21세기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10대 성장동력산업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에 앞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약의 본질이다. 좋은 약 하나는 수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한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고 나서 인류의 평균수명이 10년간 연장되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 수술이 발달되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구해지지만, 마취제, 항생제, 수액제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수술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약으로 극복하지 못한 질병이 얼마나 많은가? 예컨대 일생을 통하여 서너 명 중 한 명이 암에 걸리지만, 암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항암제는 아직 개발되지 못하였다. 만약 획기적인 항암제를 우리가 개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는가? 약학은 이와 같은 기적의 신약개발을 꿈꾸는 설레임의 학문이다.
2009-02-24 10:53 |
![]() |
[기고] <28> 약학 소고 (藥學小考) -1
새해를 맞이하여 진부하지만, 약학이란 어떤 학문인가를 2회에 걸쳐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약학은 약이란 물질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약은 인체의 생리적 조건이 정성 상 상태를 벗어나지 않도록 예방해 주거나, 비정상 상태의 생리적 조건 (병)을 정성적 상태로 되돌리는데 (즉,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물질이다. 약이란 물질은 화학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만들어진다. 화학이 물질 자체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고, 생물이 생명현상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라면, 약학은 물질이 생명이라는 현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상호작용을 물리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상호작용의 원리가 마침내 밝혀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약학이란 약이란 물질이 생명현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화학과 생물 및 물리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약학은 생명현상을 조절하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건강과 병들음, 노화, 생로병사와 같은 생명현상의 비밀은 자물쇠와 같다. 우리는 열쇠를 이용하여 자물쇠를 열고 싶다. 생물학이 자물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화학은 열쇠를 만드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약학은 아직껏 열 수 없었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새로운 열쇠를 설계하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수많은 헌 열쇠 꾸러미 중에서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선택하여 자물쇠를 여는 방법을 연구한다. 새 열쇠를 설계하는 분야를 새로운 약을 창조한다고 해서 창약학 (創藥學) 또는 신약개발학이라고 부른다. 헌 열쇠를 사용해서 자물쇠를 여는 분야를 기존의 약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용약학 (用藥學) 또는 임상약학 (臨床藥學)이라고 부른다.
약학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학문이다. 원시인도 경험을 통하여 나름대로 초근목피 중에서 통증을 멎게 해주는 약물을 발견해 내는 창약과 이를 가공하는 조제학 그리고 환자에게 사용하는 용약학을 발전시켜 왔다. 물론 당시에는 영혼을 다스리는 무속과 약학 떠는 의학이 분리되지 않았었다. 세월이 가면서 무속이 분리되어 나가고 또 의학과 약학도 분화되어 발전되어 왔다.
약학은 응용과학 (applied science)이다. 먼저 자물쇠의 비밀을 연구한 다음, 이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설계하는 일, 그리고 수많은 세상의 열쇠 중에서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고르는 일 모두가 화학, 생물, 물리 지식을 어떻게 (how)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응용과학이다. 왜 (why) 그런 일이 일어날까를 연구하는 순수과학 또는 기초과학 (pure science)과는 관심사가 다르다. 요즘에는 약학을 응용과학이라기 보다 평가과학 (評價科學, regulatory science) 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 나고 있다. 평가과학은 어느 것 (which)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새로운 과학이다. 완벽하게 안전한 약은 없다. 항암제는 부작용이 심해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 안전성의 잣대를 높였다 낮추었다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판단이 어렵다. 이런 병에 이 정도의 부작용을 갖는 약을 시판하도록 허용해야 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국민의 의식 수준이나 전통, 관습 등까지도 망라한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지식이 필요하다. 약학은 평가과학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2009-02-11 10:24 |
![]() |
[기고] <27> 일본 학회의 세계화 움직임과 우리
필자는 2008년 10월 31일부로 일본약물동태학회(JSSX)의 펠로우로 선정되어 상패를 수여 받았다. 이는 2005년 11월 6일에 미국약학회(AAPS)의 펠로우로 선정된 이래 두 번째의 일이다.
사실 필자는 일본약물동태학회에 펠로우 제도가 이미 있어서 올해에도 몇 명의 국내외 학자를 펠로우로 추가 선정하는가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펠로우 제도를 올해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일본 학자 31명과 대만학자 1명, 그리고 필자, 이렇게 총 33명을 펠로우로 선정한 것이었다. 펠로우로 선정된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다가도 동경대학의 스기야마 교수 등 나머지 32명의 찬란한 업적을 보면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일을 계기로 왜 일본 학회가 한국과 대만 학자들까지 펠로우로 선정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한 일본 약학자들은 일본의 약학, 그 중에서도 약물동태학 분야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언어 문제도 있고 해서 일본 약학을 세계의 중심이 되게 만들지 못 하였다. 실력은 최고인데 왜 늘 미국 중심의 학회에 따라 다녀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의 약학을 세계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방법론으로 생각한 것이 일본 학회의 국제화이고, 이를 위해 우선 일본이 아시아 지역의 맹주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단계로 한국이나 중국, 대만의 협조가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대표적인 약물동태학자 스기야마 교수가 국제약물동태학회(ISSX)의 회장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추진했던 일이 아시아태평양약물동태학회(APISSX)의 창설이었다. 스기야마 교수의 부탁으로 필자는 2006년 5월 제1회 APISSX 학회를 제주도에서 개최하였다. 그 결과는 대 성공이었고 이를 계기로 필자는 그 후 이 학회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제1회 행사의 성공에 탄력을 받은 APISSX는 제2회 학회를 2008년 5월 중국 상해에서 개최하게 되었고, 제3회 학회를 2009년 5월 태국의 방콕에서 열게 되었다.
이렇듯 아시아 지역에서 이니시어티브를 쥐기 시작한 일본 학자들은 JSSX를 일본 국내의 학회를 뛰어 넘는 국제학회로 만들기에 착수하였다. 즉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할 때 적어도 한 세션을 APISSX와 공동으로 조직하여 영어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필자 등은 이러한 일본 측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데, 아마 이 협력이 필자에게 펠로우라는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필자가 이들의 생각에 적극 호응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이 세계 약물동태학계의 새로운 태양으로 부상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학회는 우리에게 거리적으로 먼 느낌이 있고, 솔직히 우리가 미국 학회에서 주역이나 조역을 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많아 보인다. 이에 반하여 일본 학회는 반드시 우리나라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세계적인 학회로 발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본 학회의 세계화 움직임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친일파" 다운 견해일지는 모르지만 일본 학회의 세계화 움직임을 적극 후원하고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 학회의 세계화를 위해서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2009-01-07 09:14 |